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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論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 관하여

by 이덕휴-dhleepaul 2018. 7. 30.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 관하여

 

 

최 영 재 (한국교회사학회, 교회사)

 

 

 

 

Ⅰ. 서 론Ⅱ. 역사적 배경Ⅲ.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Ⅳ. 결 론

 

 

 

<국문 초록>취리히 종교개혁이 시작되는 시기인 1523년에 츠빙글리(Zwingli)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를 썼다. 그는 이것을 통하여 자신의 급진적 추종자들과 농부들이 신약성서에 근거하여 기존 사회경제질서의 전면적인 폐지를 주장하는 것과 보수적인 가톨릭교회측이 그가 취리히 시민법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주장에 반박했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그의 신론으로부터 도출하였으며, 그것의 핵심적인 특징은 산상설교와 이웃사랑으로 대변되는 사랑의 계명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성취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계명의 성격을 지닌다. 반면에 ‘인간의 정의’는 타락한 인간 본성으로 인하여 공동체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다. 가련하고 불완전한 정의로 일컬어지는 ‘인간의 정의’는 세속권력이 강제력으로 지키는 것이다. 이 세속권력 앞에 종교권력을 포함하여 모두 순종해야 한다. 하지만 이 정의는 세속권력이 전횡하여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성서의 빛에 비추어 행사되어야 한다. 따라서 성서가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다. 모든 삶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하나님의 정의는 내적 인간에, 인간의 정의는 외적 인간에 관계하며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설교자는 말씀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거기에 근거하여 세속권력은 악한 행위를 처벌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한다. 이렇듯이 츠빙글리에게 교회와 국가는 서로 독립된 존재라기보다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존재이다. 이것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츠빙글리의 두 정의론와 루터의 두 왕국론(zwei-Reiche-Lehre)은 서로 유사한 점이 많이 있기도 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츠빙글리는 두 정의 모두 지켜야하는 계명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외적인 인간의 정의에서 내적인 하나님의 정의로 진전해 나가야한다고 주장한다.

 

주제어* : 종교개혁, 츠빙글리, 하나님의 정의, 인간의 정의, 루터

 

 

Ⅰ. 서 론

올해 10월 31일은 종교개혁 500주년으로 수년 전부터 수많은 학자와 개신교인들이 각종 행사와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다. 500년 전의 교회의 개혁의 역사를 기억하고 의미를 되새기는 이 시기에 다른 한편에서는 이와 맥을 같이하여 한국교회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으로 인하여 교회개혁의 목소리는 한층 더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의 한국교회를 과거 종교개혁 전야의 가톨릭교회와 비교하는이도 있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라 중세 말 가톨릭교회와 지금의 한국교회가 구조적으로 많은 면에서 닮아있다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 땅에 교회를 사랑하는 신학자와 목회자와 평신도들은 새로운 종교개혁 혹은 교회개혁을 이야기하며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가 새롭게 거듭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 과거 500여 년 전 교회와 사회 공동체를 개혁하기 위하여 노력했던 취리히의 종교개혁가 츠빙글리(Huldrych Zwingli)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교육과 계몽을 통하여 윤리적 개혁인 에라스무스적 개혁으로 출발하여 오직 성서만 의지하여 교회뿐만 아니라 지역공동체까지 개혁하는 종교개혁자로 나아가게 되었다. 보수적인 그룹들에게 반대를 경험하고 급진적인 그룹과 갈등을 빚기도 하면서 그는 취리히 교회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와 일상적인 삶까지 개혁해 나갔다. 이러한 그의 개혁과정에 겪게 된 갈등과 실패와 성공의 경험이 개혁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21세기 한국교회에서 생활하는 우리에게 귀한 조언과 경험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의 교회와 사회개혁에 대한 중요한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Göttliche und menschliche Gerechtigkeit 1523)를 연구하는 것이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비록 츠빙글리가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 대하여 『논제 혹은 논문의 해석과 근거들』(Auslegung und Begründung der Thesen oder Artikel 1523)과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서 다루었지만, 본 논문은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 한정하여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두 편 모두 거의 비슷한 시기에– 『논제 혹은 논문의 해석과 근거들』은 1523년 7월 14일에,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는 1523년 7월 30일에 출판되었다–출판되었으며, 앞의 책은 1차 취리히 공개토론회를 위해 작성한 『67개 논제』에 해석을 첨가한 것으로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반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는 연구하고자 하는 주제만을 집중하여 체계적으로 쓴 저서이기 때문에, 좀 더 집중적인 연구를 위하여 후자를 택하기로 한다.

 

그동안 루터의 두 왕국론에 대해서는 국내외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 대한 연구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주제에 대하여 하인리히 슈미트(Heinrich Schmid)는 그의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 대한 츠빙글리의 이론』1)에서 주로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 대한 분석과 그 의의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다. 아투어 리히(Arthur Rich)는 “사회정치 사상가로서 츠빙글리”2)에서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를 분석한 뒤에 거기에 나타난 츠빙글리의 사회윤리를 서술했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리히는 『경제윤리학』3) 1, 2권에서 자신이 이해한 츠빙글리의 두 가지 정의의 구조적 관계를 근거로 시장경제체제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국내에서 임희국이 종교개혁 시대에 출판된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 나타난 츠빙글리의 사회윤리가 어떻게 20세기의 리히의 시장 경제론에 반영되어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다루었다.4) 이렇게 몇몇 학자들이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 대해서 다루었지만, 츠빙글리의 두 가지 정의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한 뒤에 그것을 근거로 루터의 두 왕국론과 대비되는 점을 구체적으로 다룬 논문이 드물다. 이런 점에서 이 논문이 의의가 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는 1522-1523년의 취리히 종교개혁이 시작되는 가운데 사회적 혼란과 갈등에 대한 반응으로 집필되었다. 따라서 주제로 들어가기 전 먼저 당시 사회정치적 배경을 살펴볼 것이다. 그런 후에 주제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 대한 츠빙글리의 견해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그 후 두 정의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본 뒤에, 루터의 두 왕국론과 츠빙글리의 두 정의론에 대하여 간략하게 비교하여 두 사상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할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츠빙글리의 견해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새겨보기로 한다.

 

 

-------------------------각주---------------------

1) Heinrich Schmid, Zwingli Lehre von der göttlichen und menschlichen Gerechtigkeit (Zürich,1959).2) Arthur Rich, “Zwingli als sozialpolitischer Denker,” Zwingliana Bd. XIII, (1969-1973), 67-89.3) Arthur Rich, Wirtschaftsethik, Bd. 1, Grundlagen in theologischer Perspektive (Gütersloh, 1984);Ders., Wirtschaftsehtik, Bd. 2, Marktwirtschaft, Planwirtschaft, Weltwirtschaft aud sozialethischer Sicht (Gütersloh, 1990).4) 임희국, “16세기 종교개혁자 츠빙글리(H. Zwingli)의 사회윤리에 조명해 본 오늘의 시장경제,” 『장신논단』 18 (2002. 12), 219-48.

 

 

Ⅱ. 역사적 배경

1519년 1월 츠빙글리가 취리히에 시민사제로 부임하여 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당시 일반적이었던 교회력에 맞춰 매 주일마다 정해진 특정한 성경본문(Perikope)을 가지고 설교하지 않고, 마태복음 1장부터 연속적으로 강해설교(lectiocontinua)를 하였다. 이런 설교를 통하여 츠빙글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원사역을 선포했으며, 이후 사도행전과 디모데전후서로 이어지는 설교를 통하여 그는 취리히 시민들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초대교회의 도덕적 정결함을 깨달아 모범으로 삼기를 원했다. 이처럼 츠빙글리는 취리히 사역 초기 에라스무스주의적 교회개혁을 수용하여 교육과 계몽을 통한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 삶의 갱신과 교회개혁의 의지를 나타냈다.

츠빙글리는 설교단에서 성서를 근거로 당시 사제와 수도사들의 도덕적 타락과 나태함, 성자와 성모 마리아 숭배, 사순절 금식규례 등의 중세교회 신앙전통을 비판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같은 성서를 근거로 당시의 부조리한 사회현실에 대해서 비판했다. 특히 그가 비판한 사회적 부조리는 이자(Wucher)와 십일조(Zehntenabgaben)와 관련된 것이었다. 츠빙글리는 이자지불제도는 통상적인 경제생활로 보아서 인정했으나, 과도한 이자에 대하여 비판했다. 그는 5%미만의 이자율을 제안했다. 십일조는 원래 각 교구 교회에 수확이나 물품의 1/10을 바치는 것으로 수도원과 교회의 주요한 수입원이었다. 십일조가 교회 기관이 지역사회의 영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지원하는 명목으로 이해되었기에,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로 인식되어 함부로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가 십일조에 대한 권리를 세속 기관이나 개인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만연하게 되자 십일조의 본래의 의미가 퇴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똑같이 십일조라고 명명되지만 어떤 것은 개인이나 세속기관에게 납부되고 어떤 것은 교회와 수도원에 건네주게 되었다. 츠빙글리는 이런 십일조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라는 것을 비판하고, ‘교회에 대한 기부’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십일조는 원래의 목적을 되살려서 가난한 목회자의 생활을 위해 지원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츠빙글리의 설교들은 여러 사람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건들이 1522년 한 해 동안 지속적으로 일어나면서 사회적으로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중세 금식규례에 대한 거부로 1522년 3월 9일에 인쇄업자 프로샤우어(Christoph Froschauer)의 집에서 몇 사람이 사순절 금식을 깨고 소시지를 나눠 먹은 것이었다. 이후 금식규례를 깨는 행위가 계속 일어났다. 7월 21일에는 탁발수도사와 성자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고, 이에 시의회는 설교는 성경에 근거해서만 하도록 지침을 내려졌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농부들과 급진적인 추종자들이 츠빙글리가 설교했던 신약성서를 근거로 이자와 십일조를 완전히 철폐하던지 대폭 축소할 것을 주장했다. 이런 주장들은 개인적인 경제생활과 교회와 사회복지기관의 수입구조를 파괴할 위험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더 나아가 기존의 정치적 경제적 제도와 권력이 성서로부터 지지받지 못한다면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급기야 1522년 가을에는 취리히 지역의 농부들이 그로스뮌스터교회에 십일조를 바치기를 거부하는소요가 일어났다.

츠빙글리의 설교와 개혁에 대한 시민들의 행동으로 1522년 하반기에 취리히 교회와 사회는 계속 혼란 속에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스위스 연방대표자회의가 7월부터 주시하면서 취리히 시의회에 간접적으로 경고를 하였다. 11월에 츠빙글리의 설교에 영향을 받은 한 사제가 바덴(Baden)에서 개혁을 지지하고 결혼을 하자 스위스 연방대표자회의가 이 문제를 다루면서 취리히의 개혁이 연방주들에 확산되는 것을 금지시키고 바젤과 취리히에서 출판되는 책들을 검열하라고 권고하게 되었다. 이러한 외부의 압박과 더불어 취리히 시 내부에도 문제가 심각하게 발전했다. 12월에 이르면 취리히 여론뿐만 아니라 시의회까지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을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눠졌다. 결국 이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시의회는 1523년 1월에 츠빙글리의 설교에 대하여 공개토론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츠빙글리는 이 토론회에 그동안 자신이 한 설교를 잘 정리 요약한 “67개 논제”를 제출했다. 토론회를 통하여 시의회가 츠빙글리의 설교의 정당성을 보장해주고, 앞으로 모든 설교는 성서에 근거하여 선포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토론회가 있은 지 약 반년 뒤인 1523년 7월 14일 이 “67개 논제”에 츠빙글리 자신의 해설을 담아 『논제에 대한 분석과 근거들』(Auslegen und Gründe der Schlussreden)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논제의 34-43조항은 세속권력에 관한 것이며, 67조항은 이자와 십일조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을 계기로 취리히에서는 1월부터 교회와 국가의 정의와 관계에 대해서 비로소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츠빙글리가 이 책을 통하여 산상수훈에 근거한 과격한 주장들에 대하여 반대했음도 불구하고 급진파들은 이자와 십일조에 대한 과격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계속 펼쳤다.

 

이러한 사회적인 긴장이 팽배해 있는 상황에서 가톨릭 진영에서도 츠빙글리의 주장과 개혁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비판을 했다. 그들은 교황의 권위와 가톨릭교회의 질서와 전통을 고수하면서 츠빙글리의 주장들이 취리히의 시민법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하였다. 결국 츠빙글리는 보수적인 가톨릭 진영의 비판과 복음을 근거로 과격하게 모든 인간적 질서와 제도를 폐지하려는 급진적 추종자들의 주장에 직면하게 됐다. 그런 가운데 1523년 6월 22일에 몇몇 교구 대표들이 집단행동을 취하여 시의회에서 십일조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시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십일조 문제가 제기되자 츠빙글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틀 후에 츠빙글리는 설교단에서 이 주제를 가지고 설교했다. 그리고 이 설교를 확장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라는 논문을 7월 30일에 출판했다. 이 논문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이미 『논제에 대한 분석과 근거들』의 일부분에서 다뤄진 것이며, 여기서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 논문은 베른(Bern)의 수석사제인 바텐뷜(Niklaus von Wattenwyl)에게 헌정되었다. 츠빙글리가 그에게 이 논문을 헌정한 이유는 취리히에서 무정부 상태와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을 불식시키고,5) 베른을 종교개혁진영을 확고히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Ⅲ.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 6)

1.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츠빙글리의 입장

1) 하나님의 정의의 근거츠빙글리는 보수적인 가톨릭 진영의 비판과 급진적인 추종자들의 과격한 주장에 대처하기 위하여 “정의”의 개념을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로 나누고, 먼저 하나님의 정의의 의미를 규정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정의에 대한 논의에서 고대로부터 내려온 ‘각자에게 그 자신의 것을(suum cuique tribuens)’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정의7)와는 맞지 않다는 주장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께 자신에게 속한 것을 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8) 따라서 고대의 정의 개념은 하나님에게 맞지 않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내어주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정의란 이러한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정의” 개념은 그의 하나님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하나님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가장 높고 완전한 선이신 분이며 의 그 자체이다.

“그는 모든 순결함과 아무런 흠이 없음과 모든 의와 선한 모든 것의 온전한 원천으로 옳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본질적으로 의와 흠이 없음과 선한 모든 것이기에, 그로부터 나온 것은 아무것도 흠이 없고 의롭고 선하다. 그가 진실할 뿐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는 의로울 뿐 아니라, 순결하고 온전한 의 그 자체이다. 그의 의는 근본적으로 순수하고 깨끗하다. 거기에는 어떤 욕망의 더러움이 전혀 섞여 있지 않다.”9)

따라서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 그 자신과 같으며 하나님의 존재양식이다.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선과 의가 나온다. 반면에 하나님께 근거하지 않은 모든 것은 불의이고 불결한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정의가 이렇게 하나님 자신처럼 완전한 의라면, 죄가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 그것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츠빙글리에 의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이룰 것을 요구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 그의 사랑과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의를 이루심으로 이것을 믿는 죄인이 자신에게로 올 수 있게 한다.10)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의이기도 하다.11)

이러한 츠빙글리의 하나님 이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 밀접하게 관련 있다. 츠빙글리에 의하면 하나님인식의 유일한 원천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의 정의에 대해서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그의 말씀 외에 우리가 어느 것을 통해서라도 알 수없다. 그의 계명은 바로 그의 영원한 의지의 계시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다.1”2)

츠빙글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내는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지혜나 말과는 달리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선한 뜻을 드러내며 인간을 항상 선한 것으로 인도하며 믿음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항상 최고의 선이기 때문이기에 그의 계시말씀 역시 선하다.13)

그러므로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이해는 두 가지 근거, 자신의 하나님의 이해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로부터 도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사랑의 계명으로서 하나님의 정의츠빙글리는 자신의 하나님 존재양식에 대한 인식과 성서로부터 하나님의 정의를 이끌어내면서 그 정의의 특징을 사랑의 계명으로 규정한다. 츠빙글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정의의 내용은 사랑이며, 그 형식은 계명이다.

루터가 하나님 나라의 삶의 기준을 산상설교에 나타난 사랑으로 언급한 것처럼14) 츠빙글리도 하나님의 정의의 핵심을 산상설교로부터 이끌어낸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10가지 항목을 언급한다.15) 이 모두 신약성서에서, 특히 산상설교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 10가지 항목은 이중적 사랑의 계명(마22:37-40)에 수렴된다. 이런 점에서 츠빙글리가 사랑의 계명 안에 하나님의 정의의 모든 요구들을 집합시켰다고 보는 리히(Arthur Rich)의 견해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16) 이 무조건적인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 사이를 구별하는 척도로 간주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정의의 형식은 계명이다. 그것은 츠빙글리가 산상설교를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명으로 이해한 것에 잘 나타난다. 비록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허락받지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요구로서 하나님의 정의의 성격은 그대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즉 우리가 어느 때에나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처럼 순수하고 깨끗하며 흠 없고 의롭게 살아야하는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17)

츠빙글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요구로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 마태복음 5장 17-20절을 언급한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고 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의 본질적 의미를 드러내어 그것을 지키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츠빙글리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에게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정의를 성취함으로 그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선물로 줄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분명히 밝히고 그것을 실천할 것을 명령한다.18)

따라서 츠빙글리는 동시대 가톨릭교회가 이중윤리로서 산상설교를 해석하는 것을 거부한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산상설교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효한 계명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에 근거하여 더 높은 완전함의 상태에 이르기 원하는 자들, 즉 사제와 수도사들에게는 계명으로, 평신도에게는 복음적 충고로 적용했다. 하지만 츠빙글리는 산상설교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정의는 복음적 충고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하는 하나님의 계명이자 명령으로 이해했다.

 

 

-------------------------각주---------------------

5) 이 소문으로 인하여 취리히 시의회는 베른과 솔로투른(Solothurn)에 공식적으로 반박 성명을 보내기도 했다.6) 츠빙글리가 1523년에 기록한 책의 원제는 Von götlicher vnd menschlicher grechtigheit / wie die zemen sehind vnd standind. Ein predge Huldrych Zuinglis 이다. 중세독일어로 되어 있는 이 책을 에른스트 삭서(Ernst Saxer)가 현대 독일어로 번역하여 펴낸 글의 제목이 Göttliche und menschliche Gerechtigkeit 1523이다. 본 논문에서는 현대 독일어 번역을 텍스트로 사용하였다.

7) 개블러가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츠빙글리는 자신의 글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법”이라는 개념을 엄격한 구분없이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자연의 법”(das Gesetz der Natur)이라는 용어를 앞의 두 개념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법”을 동의어로 보고 사용할 것이다. 참고. Ulrich Gäbler, Huldrych Zwingli (Zürich, 2004), 70.8) Huldrych Zwingli, “Göttliche und menschliche Gerechtigkeit 1523,” 162.9) 위의 글.10) 위의 글, 164-65.

11) Arthur Rich, “Zwingli als Sozialpolitischer Denker,” 72.12) 위의 글, 169.13) 다음 글을 참고하라. Zwingli, “Göttliche und menschliche Gerechtigkeit 1523,” 183; Rich, “Zwingli als sozialpolitischer Denker,” 70.14) Reihard Schwarz, Luther, 2. Aufl. (Göttingen, 1998), 157.15) Zwingli, “Göttliche und menschliche Gerechtigkeit 1523,” 166-68, 츠빙글리가 언급한 10가지 하나님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기를 원하는 것처럼 용서하라. 2. 살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화를 내지 말라(마5:22). 3. 네 속옷뿐만 아니라 겉옷까지 내어주라(마5:40). 4. 간음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다른 배우자를 넘보지 말라(마5:28).

5. 맹세하지 말라(마5:37). 6. 아무것도 갚은 수 없는 자에게 우리의 것을 주라(눅6:35). 7. 원수에게도 선을 베풀라(마5:44). 8. 탐내지 말라(출20:15,17). 9. 악한 말과 이웃을 비방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어떤 무익한 말도 하지 말라(마12:36). 10.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이웃을 도와주는 것뿐만 아니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22:39).16) 참고. Rich, “Zwingli als Sozialpolitischer Denker,” 73.17) Zwingli, “Göttliche und menschliche Gerechtigkeit 1523,” 165.18) 위의 글, 185.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한다.19) 하지만 강요에 의하여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성으로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계명의 강제적 성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츠빙글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이해했다. 그에게 있어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실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이다.20) 그 때문에 츠빙글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율법으로부터 자유가 아니며, 그 자유를 통하여 계명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라, 죄의 압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한다.21)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의는 이중 사랑의 계명으로 규정되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자발적으로 그 사랑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정의의 성취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로서 그것을 온전히 이루기에는 무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정의를 이룰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 스스로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정의를 온전히 성취하기가 어렵다. 이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적인 표식이나 예전 등에 의지하는 것에 대해서 츠빙글리는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의 내적으로 양심이나 생각을 겨냥하는 정의이다. 이런 점에서 츠빙글리는 수도복이나 종교적 표식 같은 외적인 것으로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정의를 거부한다.22) 츠빙글리에 입장에서 볼 때, 외적인 것은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구원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종교적인 예전과 같은 것은 하나님의 정의나 인간의 정의에 무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츠빙글리는 무력한 인간은 외적인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정의를 성취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바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 역시 여전히 죄인이기에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이룰 수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알고 그를 사랑하며 그를 닮기를 원하게 된다. 그런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의를 이루도록 도우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이웃을 향한 사랑 역시 우리 안에 있게 된다. 그래서 이웃을 대한 사랑이 우리 안에 있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그에 적합한 준비 역시 갖춰지게 된다.”23)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자신의 의를 이루도록 요구할 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서 그것을 이루도록 일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의는 그 자신에게 있으며, 그가 우리에게 그것을 이룰 것을 명령하시고 그것을 이루도록 행동하기 때문이다.24)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무력함을 겸허히 인정하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의 정의를 이루어가기 위해 일하신다.

 

 

-------------------------각주---------------------

19) 츠빙글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각자 하나님의 법을 바르게 지키는 모범을 제시했다. 그리스도 자신이 인간에게 모범이 되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다. 따라서 각자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신뢰를 하나님께 향하도록 해야 한다. 참고. 위의 글 164-65 참고. 여기에 그리스도를 신자의 모범으로서 이해하는 아벨라드의 영향이 엿보인다.20) 다음 글을 참고하라. Rich, “Zwingli als sozialpolitischer Denker,” 72; Schmid, Zwinglis Lehre von der göttlichen und menschlichen Gerechtigkeit, 131.21) 위의 글, 134 참고.

22) Zwingli, “Göttliche und menschliche Gerechtigkeit 1523,” 173.23) 위의 글, 181.24) 위의 글, 166.

 

 

2. 인간의 정의에 대한 츠빙글리의 입장

 

1) 인간의 정의와 그 한계비록 하나님의 정의가 그렇게 완전하고, 순수하고, 의로울지라도 현실의 인간 공동체에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인간 공동체에는 이러한 불법을 행하는 인간들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츠빙글리는 인간의 부패함으로 인하여 공동체의 삶이 완전히 파괴될 수 있는 가능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인간의 정의의 자리를 발견한다.25)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처럼 완전히 순수하고 의롭고 온전한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인간 공동체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켜야할 의를 요구한다. 그 때문에 인간의 정의는 외적인 삶과 공동체와 인간관계에 작용한다. 그 때문에 츠빙글리는 인간의 정의를 “가련하고 매우 불완전한 의”26)라고 부른다. 인간의 정의가 고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인간의 불순종의 성향 때문에 명령하셨다.

 

“비록 인간의 정의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지만, 그것이 완전해서 하나님께서 요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부패한 본성 때문에 우선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더러움과 욕망이 그의 뜻을 따르지 않고 그를 닮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을 주신 것이다.”27)

츠빙글리의 정의에 대한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이중적 상태에 놓여있다. 인간은 인간의 정의를 지킴으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정의의 측면에서 여전히 죄인이다.28) 비록 인간의 정의를 지킨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구원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인간의 정의는 영원한 복과 거리가 멀고, 단지 이 땅에서 삶과 질서유지와 관계있다. 인간의 정의를 준수함으로 구원과 영원한 삶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인간의 정의의 한계이다.

 

그래서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정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고 보았다. 그 이유를 두 가지 이유를 든다. 먼저 우리가 단지 인간의 정의만으로 만족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실 것이다.29) 인간의 정의는 단지 최악을 예방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계명으로 이루어져 있다.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인간의 정의를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두 번째는 신자들은 비록 자신들의 불완전함과 무력함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는데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들의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장 속에 하나님의 정의를 향한 갈망을 심기 때문이다.30)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찾도록 명령받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들이 인간의 정의에만 성실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31)

 

-------------------------각주---------------------

25) 위의 글, 169.26) 위의 글, 173.27) 위의 글, 181.28) 위의 글, 172.

29) 위의 글, 186.30) 위의 글.31) 위의 글, 182.

2) 인간의 정의와 세속권력인간의 정의가 외적 행동이나 태도에 관한 것이고 인간의 이기심을 허용하는 한계를32) 지니고 있지만, 츠빙글리는 아무도 개인적으로 인간의 정의를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정의를 지키기를 원치 않는 인간들은 개인적인 욕망에 따라 법률을 제정하여 소요와 불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그로 인하여 인간 공동체의 삶이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다툼을 예방하고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사람들 위에 세속권력을 세웠다.33) 이러한 근거로 츠빙글리는 세속권력도 인간의 정의처럼 원래 하나님께서 세웠다고 주장했다. 세속권력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츠빙글리는 세속권력을 하나님의 시녀라고 불렀다.34) 다른 한편 그는 세속권력을 엄격한 교사로 불렀는데, 세속권력이 인간의 법을 지키도록 강요하고 위반자를 처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속권력은 다음과 같은 임무를 가진다. 1) 세속권력은 공개된 악한 행위만 처벌해야 한다. 2) 세속권력은 무죄한 자나 연약한 자들과 압제받는 자를 보호해야 한다. 3) 세속권력은 국민을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배려해야 한다. 4) 세속권력은 기독교적인 삶의 양식을 후원해야 한다.35)비록 세속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고 모든 신자들이 그에게 순종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 세속권력이 국민들에게 인간의 법을 지키도록 강요할 수 있고 또 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정의를 지키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정의를 성취할 수 없으며, 인간의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와는 다른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적인 삶과 관련된 영역에서만 그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세속권력은 내적인 양심 때문에 국민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제한해서도 안 된다.36) 하나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 있는 자는 세속권력에 의해서 처벌받지 않아야 한다. 비록 그가 교황을 반대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37) 세속권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거나 많은 사람들이 폐지를 호소하는 의식이나 전례를 근거로 아무도 처벌해서는 안 된다. 츠빙글리는 이런 의식이나 전례를 인간이 꾸며낸 것으로 간주한다.

츠빙글리는 인간의 정의와 관련하여 종교권력에게 어떤 자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세속권력을 가지고 인간들을 다스리려는 종교적 권력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세속권력에 대한 아무런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적 상급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사자와 하인”, “하나님의 비밀의 관리자”,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 “복음을 위해 섬기는 직분”일뿐이지,38)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영적 관할권을 주어진 것이 아니다.

츠빙글리는 모든 이들이 인간의 정의와 세속권력에 순종할 것을 그리스도가 명령했다고 보았다. 세속권력에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이는 없다. 그는 모든 신자는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벧전2:13-14)는 베드로의 진술을 근거로 든다. 여기에 교황과 교황의 추종자들도 속한다. 그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순종해야한다는 논리로 하나님의 대리자들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견해를 거부한다. 그는 종교적 권력이 복음의 선포자란 이름을 가지고서 세속 영주로서 지배하기 원할 때, 그들은 정당한 세속권력을 도처에서 혼란에 빠뜨린다고 주장한다.39) 그들은 세속 권력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파수꾼과 사자이기를 포기해야 한다. 아무도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을 동시 보유해서는 안 된다. 츠빙글리는 불의하고 타락한 세속권력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모든 세속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존재한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악하고 타락한 상급자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징벌하기 위해 이러한 상급자를 보낸다.”40)

츠빙글리는 악하고 타락한 세속권력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의 감수와 인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타락한 세속권력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기에, 시민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고통당하는 이들을 도울 때까지, 이러한 타락한 세속권력을 참아야 한다. 즉 츠빙글리는 만약 악한 세속권력이 회개하지 않고 자신들의 정치적 권한만을 주장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벌할 자를 ‘멀리서’ 불러와서 그들을 심판할 것이라고 주장한다.41) 반면에 타락한 세속권력을 향하여서는 착취와 억압이 계속되면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고 세속권력에 저항하며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42) 이것은 취리히 종교개혁에 있어서 시의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츠빙글리가 그러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여 세속권력에 대하여 상당히 우호적인 경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츠빙글리는 세속권력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것을 금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예외적으로 세속권력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을 인정했다.43) 즉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에 우호적인 세속권력에 대하여 긍정적인 반면에, 개혁을 가로막는 세속권력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셈이다.

 

 

-------------------------각주---------------------

32) 위의 글, 181.33) 위의 글, 175.34) 위의 글, 190.

35) 기독교적 삶의 양식을 후원하는 것이란 복음이 올바르게 자유로이 선포되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츠빙글리는 세속권력의 임무 중 하나로 복음선포 장려를 들었는데, 세속권력의 수단이 검이란 것을 고려한다면 복음설교를 가로막는 자들을 위해 검의 사용이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를 진척시킨다면, 츠빙글리가 무력이 사용되는 카펠전투에서 참여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는 복음설교를 방해하는 자들과 맞서 싸웠던 것인 셈이다.

36) 위의 글, 212.37) 위의 글.38) 위의 글, 187

39) 위의 글, 188.40) 위의 글, 190.41) 위의 글, 199.42) 이러한 주장들은 『논제의 해석과 이유들』에 언급된 것보다 한층 완화된 것이다. 거기에서는 죄인을 처벌하지 않고 방조하는 세속권력, 무죄한 자를 억압하는 세속권력,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세속권력에게 백성들이 저항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임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살인이나 전쟁이나 반란을 통해서가 아니라 재선출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참고. Zwingli, Auslegung und Begründung der Thesen oder Artikel 1523, Schriften Bd. 2, 391-94.43) 노이저(Wilhelm Neuser)는 『논제의 해석과 이유들』의 42항의 해설에서 제시된 저항권이 다른 곳에서 언급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서는 약간 완화되었지만 분명하게 저항권에 대해서 거론되고 있다. 참고. Wilhelm Neuser, “Von Zwingli und Calvin bis zur Synode von Westminster,” in Die Lehrentwicklung im Rahmen der Konfessionalität, Handbuch der Dogmen- und Theologiegeschichte, ed. Bernhard Lohse et als. Bd. 2 (Göttingen, 1998), 191.

 

 

3) 인간의 정의의 척도로서 하나님의 말씀츠빙글리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속권력을 세웠다고 그 정당성을 인정할 때, 그러면 그러한 세속권력은 무엇을 근거로 선과 악을 구별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의 역시 성서를 통해서 판단지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세속권력은 다른 어떤 권위나 개인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판별해야 한다. 이것을 근거로 츠빙글리는 세속권력이 자신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기에 그 자신 안에 올바른 인간의 정의를 간직하고 있다는 견해를 거부한다. 비록 세속권력이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졌고 범죄자를 처벌할 수 있는 권리를 그에게 주었을지라도, 세속권력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밀접한 관계 속에 있어야만 그 정당성이 보장된다. 따라서 세속권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규범으로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가르침도 정부나 세속권력을 섬기는데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뛰어나지 않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무엇이 선한지 그리고 무엇이 악한지 가르친다. 단지 외적으로만 의롭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윗사람들을 아랫사람들과 함께 내적인 의와 보다 더 온전함으로 이끈다.”44)

이 때문에 모든 질서와 법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향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적인 법의 유일한 근원으로 간주한다. 이것에 근거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한 것과 금하지 않은 것과 허락한 것을 세속권력이 마음대로 금해서는 안되며, 인간들이 꾸며낸 것을 선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이 세운 것만을 선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45) 이런 관점에서 성서가 결혼을 금하지 않았기에 결혼은 하나님과 인간에게 고귀한 것이므로, 성직자의 독신제는 하나님에게도 인간의 정의에의해서도 옳지 못하다.46) 당연히 세속권력을 통하여 성직자의 독신제를 강요하거나 압박하는 것은 부당하다. 따라서 세속권력은 국민들을 잘못된 교리를 따르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법의 유일한 근원으로 간주하는 것을 통하여 츠빙글리는 두가지 유익에 이르게 된다. 먼저는 이것을 통하여 법은 권력자들의 전횡으로부터보호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슈미트는 “법은 이런 근거로 해서 세속권력에 의해서 만들어져서 그들의 필요에 따라 수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다”47)고 주장한다. 법은 개인이나 권력에 의해서 좌지우지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을 잘 반영해야 함으로 그에 합당하게 개정되어야 하는 것인 셈이다. 둘째 이런 입장은 법률을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 속에서 해석해야하는 당위성을 제공한다. 그래서 기존 사회 법률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정의의 연속성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세속법의 정당성을 판별하는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주장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이 중요하게 된다. 세속권력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설교하도록 보장해야 한다.

“그 때문에 인간의 정의 혹은 세속권력이 허락하는 테두리에서 하나님을 말씀을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48) 세속권력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성직자들이 설교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설교자들을 통제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츠빙글리는 이에 대해 3가지 이유를 든다. 먼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가 희미해질 수 있다. 둘째 모든 사람들이 비천한 인간의 정의로 만족할 수 있다. 셋째 아무도 자신의 내부에서 하나님을 주시하지 않고 단지 처벌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49) 그러므로 세속권력이 설교직과 밀접한 관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 도출된다.50)

 

 

 

-------------------------각주---------------------

44) Zwingli, “Göttliche und menschliche Gerechtigkeit 1523,” 193.

45) 참고. 위의 글, 212.46) 위의 글.47) Schmid, Zwinglis Lehre von der göttlichen und menschlichen Gerechtigkeit, 39.48) Zwingli, “Göttliche und menschliche Gerechtigkeit 1523,” 183.49) 위의 글.

 

3.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의 상호관계

츠빙글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양식과 그의 말씀인 성서로부터 도출되는 하나님의 정의는 불완전한 인간이 온전히 성취하기 어려운 절대적인 정의인 반면에, 타락한 세상의 질서유지를 위해 주어진 인간의 정의는 사회의 파멸을 막기 위해 최소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상대적 정의이다. 이렇게 절대성과 상대성으로 대변될 수 있는 두 정의는 서로 별개로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행위의 동기인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인간의 정의는 외부에 드러나는 그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는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51) 둘 다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고, 함께 하나님의 뜻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두 가지 정의는 각자 별개의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두 정의는 그 내용과 지향하는 목표에서 차이가 난다. 사랑의 계명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정의를 온전히 이루는 자는 외적인 범죄행위를 금지하는 인간의 정의를 자연히 이루게 되지만, 반대로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인간의 정의를 완전히 이룬 자는 그 행위의 동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하나님의 정의를 온전히 이룬 자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두 정의는 구별되지만 별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두 정의가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로 서로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츠빙글리는 인간의 정의가 그 자체에 자신의 정당함을 보장하는 어떤 권위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보다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정의의 빛에 비춰서 인간의 정의가 해석되고 조정되고 유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서로 다른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축으로 하여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정의를 대변하는 설교자와 인간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세속권력의 관계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설교자는 말씀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밝히며 내적인 인간의 변화를 도모해야한다. 반면에 세속권력은 강제력으로 시민들의 사회생활을 규제하고 공동체의 질서가 파괴되지 않도록 지키는 역할을 감당한다. 슈미트(Heinrich Schmid)는 츠빙글리가 이 둘 사이를 위계질서적으로 보았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정의에 대한 최고의 교사로서 세속권력의 소유자에게 무엇이 진실로 의로운 것인지를 가르칠 의무를 지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설교직을 소유한 교회가 세속권력 위에 놓인다고 보았다.52) 하지만 츠빙글리는 이 둘을 그렇게 위계적으로 보지않았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 대해서 세속권력자와 시민에게 선포하지만, 그 역시 일상적인 삶에서 세속권력에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진다.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세속권력을 함께 소유한 영적 권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단지 강제력을 행사하는 세속권력과 말씀을 선포하며 섬기는 설교자만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츠빙글리는 자신의 급진적인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와 국가의 질서를 하나님의 정의 하나로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 속에는 인간의 타락으로 자신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기심과 욕심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인간사회를 보존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기본적인 계명”을 외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53) 츠빙글리는 상거래, 이자, 십일조와 관련하여 각 사람은 한시적인 재물이나 물건들 때문에 결코 근본적인 인간관계와 사회질서를 파괴해서는 안 되며 보다 큰 해악을–영혼의 피해처럼–피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4)

이처럼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모든 삶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여 있으며, 세속권력과 교회가 그의 통치를 구체적인 제도를 통하여 확립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신정정치체제의 사회를 구상한 것으로 보여 진다.55) 그는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직접적으로 시민들의 신앙생활과 간접적으로 일상의 사회적 경제적 생활이 조화롭게 유지되기를 바란 것 같다.56)

 

 

-------------------------각주---------------------

50) Schmid, Zwinglis Lehre von der göttlichen und menschlichen Gerechtigkeit, 236.51) 임희국, “16세기 종교개혁자 츠빙글리(H. Zwingli)의 사회윤리에 조명해 본 오늘의 시장경제,” 229.

52) Schmid, Zwinglis Lehre von der göttlichen und menschlichen Gerechtigkeit, 236 참고.53) Zwingli, “Göttliche und menschliche Gerechtigkeit 1523,” 200.54) 위의 글.55) W. P. Stephens, Zwingli: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박경수 역,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212 참고.56) 공교롭게도 츠빙글리는 1525년 이후로 구약성경만을 주석하였다.

 

 

4.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와 루터의 두 왕국론

이렇게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 언급한 학자는 종교개혁시대에 츠빙글리만이 아니다. 루터 역시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 고민했고 후대에 소위 ‘두 왕국론’이라고 불리는 것을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와 루터의 『세속정부에 대하여.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그 권위에 순종해야 하는가』가 같은 해인 1523년에 출판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 두 사람에 의해서 출판되었기에 두 사람의 사상을 비교해서 언급한 학자들이 그동안 여러 명이 있었다.

오즈맹(Steven E. Ozment)은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에 큰 차이점이 없다고 평가한 반면에,57) 게스트리히(Christof Gestrich)는 츠빙글리가 루터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58) 노이저(Wilhelm)는 루터와 츠빙글리가 세속권력에 대하여 똑같은 임무를 부여했지만, 루터는 두 왕국의 차이점에 대해서 츠빙글리보다 훨씬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보았다. 츠빙글리는 오히려 루터보다 인간의 정의를 하나님의 정의로 나아가는 전단계로 묘사하는 멜란히톤의 사고와 같다고 파악했다.59) 로허(Gottfried W. Locher)는 츠빙글리의 사고에는 루터측보다 믿음이 거룩함과 밀접하게 결합되고, 공동체의 거룩함을 위해 더욱 노력하는 경향이 있어서 루터의 개인주의적 윤리보다 우월한 측면이 엿보인다고 이해했다.60)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는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의 여러 가지 공통점을 열거했다.61) 먼저 두 사람 모두 타락과 죄의 결로 정부의 필요성을 대두되었다고 본다. 둘째 공동체 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정부의무력 사용을 정당화했다. 셋째 세속권력은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아 행사하는 것이다. 넷째 재세례파와 달리 두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공직을 맡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다섯째 둘 다 개인윤리와 공적윤리를 구별하고, 산상설교의 윤리를 그리스도인 개인에게 적용시켰다. 여섯째 두 사람은 그리스도인 개인과 국가에 관계되는 의를 구별해서 언급했다. 반면에 맥그래스는 두 사람 사이에 차이점도 언급한다. 루터는 인간의 정의와 하나님의 정의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고 때로는 상호모순적일 때도 있다고 보았지만,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내적인 것으로 인간의 정의를 외적인 것으로 구별했다.

맥그래스가 언급한 츠빙글리와 루터의 공통점과 차이점 이외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파악할 수 있다. 루터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직분과 임무에 따라 윤리의 두 가지 측면을 언급한다. 즉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에 대한 희생과 헌신과 사랑을 실천해야 하지만, 그가 공직자라면 공공의 질서유지를 위하여 범죄자 처벌과 같은 사랑과는 거리가 있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렇게 루터는 한 그리스도인이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리스도인으로서 공직자로서 윤리가 서로 구별하여 적용한다. 반면에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인 개인 차원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차원에서 취해야 하는 윤리를 언급한다. 그의 글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정의로 대변되는 이웃과 사회에 대하여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계명과 그리스도인이 속한 공동체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지켜야 하는 인간의 정의가 강조된다. 츠빙글리는 그의 글에서 인간의 정의를 한 개인의 옳고 그른 행동에 대하여 다룬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약속한 법을 준수하는 것과 관련하여 다루었다. 즉 츠빙글리의 인간의 정의는 루터의 그리스도인 공직자의 윤리와는 달리 공동체의 규범과 윤리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인 한 개인의 관점보다는 그리스도인공동체가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윤리적 측면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62) 이런 공동체성에 대한 강조가 츠빙글리가 루터와 다른 점이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루터는 교회와 세속권력이 서로 견책하며 긴장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지만,63) 츠빙글리는 세속권력의 인간의 정의가 교회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지향해야하는 것으로 본다. 세속정부가 행사하는 인간의 정의는 루터의 세속정부의 역할처럼 악한 자 처벌과 선한 자 보호를 통하여 공동체 내의 질서유지와 복음설교 후원에 머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정당성이 하나님의 정의에 비춰서 평가되어야 한다. 낮은 차원의 인간의 정의에서 더 높은 차원의 하나님의 정의로, 인간의 외적인 행위의 올바름에서 내적인 동기의 온전함, 즉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래서 츠빙글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외적인 의에 머물러 있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64) 츠빙글리는 인간의 정의에 근거한 세속권력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정의를 지향하는 역동성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65)

 

이런 관점에서 츠빙글리는 현 시대의 법과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완전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인간의 정의를 기준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세속권력의 권위는 결코 절대화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정의에 근거해서 세워진 현 제도와 사회질서는 항상 바뀔 수 있고, 하나님의 정의를 그 시대에 적합하게 구현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세속권력은 현 체제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사랑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의 개념을 통하여 시대정신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궁극적으로 이 땅에 실현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각주---------------------

57) Steven E. Ozment, The Reformation in the cities: the appeal of Protestantism to sixteenth-century Germany and Switzerrland (New Haven, 1975), 131-38.58) Christof Gestrich, Zwingli als Theologe. Glaube und Geist beim Zürcher Reformator (Zürich und Stuttgart, 1967), 176.59) Neuser, “Von Zwingli und Calvin bis zur Synode von Westminster,” 191.60) Gottffried W. Locher, Die Zwinglische Reformation im Rahmen der europäischen Kirchengeschichte (Göttingen, 1979), 618-19.61) 아래의 내용은 Alister McGrath, Reformation Thought: An Itroduction, 최재건 역, 『종교개혁 사상』 제3증보판 (서울: 기독교문사, 2014), 350-51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62) 참고 Gottfried W. Locher, Die Zwinglische Reformation im Rahmen der europäischen Kirchengeschichte,619.63) 참고 Hans-Martin Barth, Die Theologie Martin Luthers. Eine kritische Würdignug, 정병식, 홍지훈 역, 『마르틴 루터의 신학. 비평적 평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5), 609.

 

 

Ⅳ. 결 론

16세기에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속적으로 강해하는 설교(Lectio continua)를 통하여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1522년 이래로 그의 설교에 대하여 급진주의자들과 가톨릭 진영이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며 갈등을 츠빙글리와 일으켰다. 가톨릭 진영은 츠빙글리가 취리히에서 그의 설교를 통하여 기존 사회질서를 흔들며 불안을 야기하는 자로 보았으며, 급진주의자들은 츠빙글리 설교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정의를 근거로 기존의 모든 사회경제적 제도를 과격하게 변경하거나 폐지하려고 했다. 이에 반하여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라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함을 밝히고 기존 질서에 대하여 신중하게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그의 하나님 이해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도출하여 타락한 인간이 온전히 성취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이 정의는 개인의 노력으로 완수될 수도 없기에 세속권력에 의해서 강제될 수도 없다. 하지만 산상설교의 이웃사랑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정의는 내용적으로는 사랑이지만, 형식적으로는 계명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통하여 주어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성취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계명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스도인 역시 죄인이기에 스스로 하나님의 정의를 이룰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무력함을 겸허히 인정하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때, 하나님이 그의 안에서 자신의 정의를 이루어가기 위해 일하신다. 즉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자신의 의를 이루도록 요구할 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서 그것을 이루도록 일하신다.

반면에 루터처럼 츠빙글리도 ‘인간의 정의’는 타락한 인간 본성으로 인하여 공동체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세속권력이 강제력을 동원하여 ‘인간의 정의’를 지키도록 강제하는 것이라고 파악하고, 종교권력을 포함하여 모든 이들이 이 세속권력 앞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의 역시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세속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권리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세속권력이 이 정의를 전횡하여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정의가 계시되어 있는 성서의 빛에 비추어 그 의의가 평가되고 개선되어야 한다. 따라서 성서가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원천이다.

츠빙글리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삶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하나님의 정의는 내적 인간에, 인간의 정의는 외적 인간에 관계하여 모든 삶의 영역을 포괄하며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 둘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여 함께 하나님의 뜻을 지향하지만 그 내용과 지향하는 목표가 다를 뿐이다. 설교자는 말씀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밝히고, 세속권력은 하나님의 정의의 빛 아래서 인간의 정의에 근거하여 악한 행위를 처벌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한다. 이렇듯이 츠빙글리에게 영적권력과 세속권력은 구별되지만 서로 분리되지는 않는다.

츠빙글리의 두 정의론을 루터의 두 왕국론과 비교하면, 타락과 죄의 결과로 세속권력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그 기원을 하나님께 두고, 그리스도인이 세속권력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본 점은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직분과 임무에 따라 상반되게 가지게 되는 윤리를 언급한 루터와 달리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는 개인의 직분과 임무와는 관계없이 그리스도인공동체가 추구하고 지켜야 할 공동체윤리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또한 츠빙글리는 인간의 정의를 그 자체로 완전한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의 빛에 비추어서 그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의 개념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현 시대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방관하거나 그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정의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이상에서 언급한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에 나타난 사상은 다종교 사회인 우리와 달리 기독교 사회였던 취리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츠빙글리의 주장을 현재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츠빙글리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의 구조와 역동적 관계는 충분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기존의 사회질서와 제도를 인간의 정의 차원에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하지만, 그것에 만족하거나 그것을 절대시하는 과오는 피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며 어떻게 우리의 사회질서와 제도가 그 정의를 반영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 모색해야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로부터 지탄 받고 있는 것은 이런 작업을 하지 않고, 인간의 정의 차원으로 만족하거나 세속사회의 윤리에 만족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잊어버린 것 때문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내면서 우리들은 16세기 츠빙글리가 설교한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의 개념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시대정신에 매몰되거나 현세대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정의가 반영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제도의 개혁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각주---------------------

64) Zwingli, “Göttliche und menschliche Gerechtigkeit 1523,” 186.65) 위의 글.

 

 

 

참고문헌

 

1차 자료(primary source)Zwingli, Hudrych. “Göttliche und menschliche Gerechtigkeit 1523.” In Schriften. Band 1.Zürich, 1995.. “Auslegung und Begründung der Thesen oder Artikel 1523.“ In Schriften.Band 2. Zürich, 1995.

2차 자료(secondary source)Barth, Hans-Martin. Die Theologie Martin Luthers. Eine kritische Würdignug. Translated byJung Byung-Shik and Hong Ji-Hoon. Maleutin luteoui sinhag: bipyeongjeog pyeong-ga『마르틴 루터의 신학: 비평적 평가』. Seoul: Christian Christianity, 2015.Gäbler, Ulrich. Huldrych Zwingli. Leben und Werk. 2. Aufl., Zürich, 2004.Gestrich, Christof. Zwingli als Theologe. Glaube und Geist beim Zürcher Reformator. Zürichund Stuttgart, 1967Lim, Hee-Kuk 임희국. “16segi jong-gyogaehyeogja cheubing-geulli(H. Zwingli)ui sahoeyunliejomyeonghae bon oneul-ui sijang-gyeongje” 16세기 종교개혁자 츠빙글리(H.Zwingli)의 사회윤리에 조명해 본 오늘의 시장경제 [Today’s market economy, whichis illuminated by the social ethics of the 16th-century religious reformer H. Zwingli].Korea Presbyterian Journal Theology 『장신논단』 18 (2002. 12), 219-48.Lohse, Bernhard. Luthers Theologie in ihrer historischen Entwicklung und in ihrem systematischenZusammenhang. Göttingen, 1995.Lohse, Bernhard u. a. Handbuch der Dogmen-und Theologiegeschichte. Band 2. 2. Aufl., Göttingen,1998.Locher, Gottfried W. Die Zwinglische Reformation im Rahmen der europäischen Kirchengeschichte.Göttingen, 1979.McGrath, Alister. Reformation Thought: An Introdction. Translated by Choi Jae- Gun. Jonggyogaehyeogsasang『종교개혁사상』. Third Edition. Seoul: Christian DocumentaryMission, 2014.Ozment, Steven E. The Reformation in the cities: The appeal of Protestantism to sixteenth-centu-ry Germany and Switzerrland. New Haven, 1975.Rich, Arthur. “Zwingli als sozialpolitischer Denker.” Zwingliana 13 (1969), 67-89.Schmid, Heinrich. Zwinglis Lehre von der göttlichen und menschlichen Gerechtigkeit. Studienzur Dogmengeschichte und systematischen Theologie 12. Zürich, 1959.Schwarz, Reihard. Luther. 2. Aufl. Göttingen, 1998.Stevens, W. P. Zwingli: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Translated by Park Kyung-Soo.Cheubing-geulliui saeng-aewa sasang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Seoul: The ChristianLiterature Society of Korea, 2007.

 

 

<Abstract>Zwinglis Perspectiveon “Justice of God and Human”CHOI Young-Jae (Th. D.)Church HistoryChurch History Society in KoreaSouth KoreaThe time when the Reformation took place in Zürich, Zwingli wrote “Justice of God”to assert abolition of former social economy order carried out by radical followers of Zwingliand farmers whose basis was under the New Testament, and to stand against the assertion ofconservative Catholic church, stating that he is weakening the civil law of Zürich. Zwingliconcluded “God’s Justice” core characteristics are Love and Command. This representsSermon on the Mount and loving your neighbors. on the other hand, “Human justice”states that God has allowed in order to prevent destruction of congregational lives due tohuman’s sinful nature. God’s justice cannot be swayed by the secular power but must becarried out under the light of the Bible. Therefore, the Bible is the only foundation in orderto understand the Justice of God and human. Based on this, the preacher persecutes thewrong doings of secular authorities and maintains social order. Like so, the church and thecountry is not a separate being, but considered as having an intimate bondage in the eyes ofZwingli. The Word of God is what combines and unites these two factors. The two Justicetheory of Zwingli and the two Kingdom theory of Luther are similar in some ways but alsodifferent. Zwingli understands both Justice as a command which must be kept and statesthat external human justice must move on to internal justice of God.

 

Key Words*Reformation, Zwingli, Justice of God, Justice of Human, Lu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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