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의
<의무론>
그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 1 권
도덕적 선에 대하여
1. 나의 사랑하는 아들 마르쿠스야! 너는 이미 일 년 째⁰ 크라팁푸스⁴ 스승 밑에서, 그것도 아테네에서 수학 중이구나. 너의 스승과 아테네의 높은 권위에 힘입어 너는 철학적 규칙솨 지침들을 충분히 터득했으리라고 확신한다. 너의 스승은 자신의 지식으로, 아테네는 자신이 배출한 모범적 철학자들로 너를 성장시킬 수 있으니 말이야. 그렇지만 내가 내 자신의 실력 향상을 위해서라면 철학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연설 연습에서도 그랬듯이, 지금까지 나는 언제나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연습해 왔는데, 너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똑같이 구사하기 위해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공부하기를 권한다. 알다시피, 참으로 주가 뭐라 하든 내가 이런 점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리스 문헌을 접하는 초심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고등교육을 받은 박식한 로마인들까지도 적절하게 말하고 철학적으로 판단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1)Cicero는 그의 아들을 B.C.45년 4월1일 경에 아테네에 유학보냈는데, 이 글은 Caesar 암살 두세달 후인 B.C.44년 봄이나 초여름에 쓰기 시작한 것 같다.
4)Cratippus of Mityiene: 미틸레네 출신의 뛰어난 소요학파 철학자. B.C.50년 경 아테네에서 학교 열음.
2. 그러므로 사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너는 정녕 이 시대 제1인자인 철학자 크라팁푸스에게서, 그것도 장시간에 걸쳐 원하는 한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데, 너는 아마 아무리 많이 배워도 만족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아카데미학파와 소요학파⁵는 양자 모두 소크라테스계열과 플라톤계열에 소속되고 싶어 하니까, 진정 나는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을 테니 소요학파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 나의 철학 책들은 읽으면서, 네 자신이 책들의 내용 자체에 대해 판단을 내리도록 하여라. 그러지만 확실히 너는 나의 책들을 읽음으로써 너의 라틴어 구사 능력은 더욱 훌륭해 질 것이다. 사실 나는 이 말이 건방진 말로 들리기를 원치 않는다. 철학적 지식 분야에서 능력면으로는 나보다 월등히 낫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나에게 연설가의 특수능력-꼭 들어맞고, 명료하고, 잘 꾸며진 단어들을 구사하고, 말로 하는-이 있다고 주장해도, 나는 연설가의 능력배양에 평생을 바쳤기 때문에 생각하건대, 내 주장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고 본다.
5. 아버지는 신아카데마학파, 즉 플라톤학파에 속하고, 아들은 소요학파, 즉 아리스토텔레스학파에 속한다.
3. 내 아들 키케로야, 나는 이런 이유로 네가 나의 연설문들뿐만 아니라, 이미 연설문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에 오른 바 있는 나의 이 철학책들⁶도 열심히 읽기를 적극 권한다. 사실 연설을 할 때는 더 큰 힘이 나타나지만, 철학 또한 마친가지로 추구되어야 하니, 왜냐하면 철학은 차분하고도 절제된 연설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포룸⁷에서 행해지는 공적인 연설과 차분한 학문적인 토론 둘 다의 영역에서 조력을 하고 정력을 쏟는 일은 그 어떤 그리스인에 의해서도 지금까지 수행되지 않았다. 다만 훌륭한 논자이며, 별로 격렬하지도 않으면서 매혹적인 웅변가로 네가 테오프라스투스⁸의 제자라고 인정할 수 있는 팔레룸의 데메트리우스⁹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나 연설, 철학, 이 두 분야에서 내가 얼마나 진전을 보였는지는 남들이 판단할 문제지만, 분명 나는 양자 모두를 추구해 왔다.
6. 키케로는 그의 국가론, 투스쿨롬의 토의들, 최고선과 악에 대하여, 신들의 본질, 아카데미아들, 호르텐시우스, 우정론, 노년론, 운명론, 점술론, 기타(모두 15개의 주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7. forum: 도시의 광장. 주위에 주랑(柱廊), 신전, 연단, 상점이 늘어서 있고 정치 및 경제의 중심을 이루었다.
8. Theophrastus of Lesbos: Aristoteles의 후계자
9. Demetrius Phalereus: B.C.345년 경에 아티카의 Phalerum이라는 데모스에서 출생. 시인 M두뭉견 와 함께 공부, 공공 연설로 명성떨침.
4. 물론 나는 플라톤₀이 광장에서 연설하고자 했다면 매우 장중하고도 유창하게 했으리라고 보며, 데모스테네스₁가 플라톤에게서 배운 바를 연구하여 발표하기를 원했다면 극히 수사적이고 눈부신 저작 활동을 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₂와 이소크라테스₃에 대해서도 나는 똑같이 생각하는데, 그들 각자는 자신들의 연구에 심취한 나머지 서로 경멸했다.
0. Platon(B.C.429~337): 유명한 철학자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아카데미학파의 창시자.
1. Demosthenes(B.C.385~342): Platon의 제자로서 아테네의 가장 유명한 웅변가. 이소크라테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철학을 포기하고 웅변을 택했다고 말해지고 있다.
2. Aristoteles(B.C.385~322):Platon의 제자이며 알렉산더대왕의 스승. 소요학파의 창시자.
3. Isocrates(B.C.436~338): Socrates의 제자로서 아테네의 10명의 웅변가 중의 1인. Cicero는 그를 ‘연설의 아버지’로 부른다.
아무튼, 지금 무엇인가 너에게 쓰기로 결심한 이상 많은 것은 후에 차차 쓰기로 하고, 이번에는 가급적 네 나이에도 가장 알맞고, 내 권위에도 가장 합당한 것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하겠다. 왜냐하면 철학에는 중요하고 유용한 많은 문제들이 철학자들에 의해 정확하게 논의되어 있긴 하지만, 의무에 대해 철학자들에 의해 전수되고 훈계된 것들이 가장 광범위하게 실행활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포룸에서의 정치적인 것이든 가내사이든, 너 혼자만이 하든 타인과 더불어 행동하든 간에 실로 생활의 어떤 부분도 의무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생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옳고 선하고 명예로운 모든 것은 의무를 이행하는 데 달려 있고, 도덕적으로 옳지 않고 나쁘며 불명예이며 추한 것은 의무를 이행치 않는 데 있기 때문이다.
5. 그러므로 이 탐구 주제는 모든 철학자들의 공동 문제이다. 의무에 대해 어떤 규칙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감히 철학자로 칭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최고선과 최고악을 설정함으로써 모든 의무를 왜곡시키는 학자들₄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이와같이 설정하여 최고선이란 덕과는 아무 관련도 없고 더욱이 최고선을 도덕적으로 옳고 선하고 명예로운 것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 득실을 따져 평가하는 사람에게는, 가끔 발동하는 본래의 착한 마음도 억눌러가면서 자기 생각을 계속 고집한다면, 우정은 물론 정의감도, 관대한 마음도 싹틀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고통을 최고악으로 간주하는 자는 결코 용감한 자가 될 수 없고, 쾌락을 최고선으로 놓는 자는 결코 절제하는 자가 될 수 없다.
4. 키레네학파와 특히 에피쿠루스 학파. 이들은 쾌락을 최고선으로, 고통을 최고악으로 보고 있다.
6. 이 진리들은 자명하여 논의할 필요가 없는데도, 나는 다른 책₅에서 논술한 바가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만일 이 학파들이 자기들의 주의, 주장에 초지 일관하여 고집을 버리지 않는다면, 의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도덕적인 선 그 자체만을 추구하거나₆, 혹은 주로 도덕적인 선 그 자체를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학자들₇로부터가 아니라면, 견실하고도 안정적이며 자연이 부여한 인간 본성과 일치하는 의무 규칙은 결코 제시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의무 규칙의 가르침은 스토아학파, 아카데미학파, 소요학파에 고유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₈ 퓌론,₉ 에릴루스⁰의 이론은 이미 오래 전에 설파당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들 3인의 학자들이 사물에 대한 선택의 여지만 남겨 놓았더라면 의무에 관해 논의할 수 있는 자신들의 권리를 계속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그 결과 의무가 무엇인지를 찾아낼 수 있는 입구에 접근할 수가 있었을 것인데, 아쉬운 바가 많다. 따라서 현시점과 이 문제에서 나는 주로 스토아학파의 입장을 따르려고 하는데,⁴ 이 경우 나는 단순한 번역가가 되기는 싫다. 나는 스토아학파로부터, 마치 샘으로부터 그렇게 하듯이, 내 습관대로 내 목적에 부합하는 양만큼 퍼 올릴 것이다.
5. 에피쿠루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논쟁은 키케로의 <최고선악론>(김창성 역, 서광사, 1999)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6. 스토아학파란 Zenon(B.C.280) 창설자가 아테네에 Polygnotus의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는 Portico에서 학교를 열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 이들은 henestum을 유일의 선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덕의 생활에서 생기는 쾌락이란 그것의 자연적인 결과이지, 덕행의 목적과 목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7. 소요학파: 즉 아리스토텔레스학파. 이들은 비록 도덕적 선이 중요한 것이기는 하나, 그 밖에도 선한 것으로 건강, 부 재산, 친구들의 우정 등을 들고 있다. henestum도 이 중의 한 가지로 간주하고 있다는 데에 스토아학파의 견해와 차이가 있음.
8. Aristo of Chius(B.C.260): 스토아철학자로서 제논의 제자. 그는 외부 사물이란 선악을 판별할 수 없기 때문에 무관심할 것을 가르쳤으나, 거부당함.
9. Pynto of Elis(B.C.4세기)는 회의학파의 창설자. 덕은 유일의 선이며, 진리와 지식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쳤지만, 그의 윤리론은 거부되었음.
0. Erillus of Carthage는 Zenon의 제자로서 스토아학파. 지식이 유일의 선인 반면, 기타의 모든 것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가르쳤지만, 그의 윤리철학은 거부되었음.
4. 윤리 문제에 관한 한, 신아카데미학파에 속하는 키케로는 가급적 스토아학파의 교훈을 따르고 있음에 유의하기 바람.
7. 따라서 의무에 대한 모든 논의가 앞으로 진행될 것이므로, 우선 의무가 무엇인지부터 정의를 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파나이티우스⁵가 이를 간파했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왜냐하면 어떤 주제에 대해 학문적인 방식으로 제시될 모든 지침은, 무엇에 대해 논의할 것인지를 알기 위해 개념 정의에서 출발해야 되기 때문이다.
의무에 관한 모든 논의는 이중적이다. 하나는 최고선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상적 삶이 그것의 전 영역에 있어서 조직되게끔 해주는 규칙들에 관한 것이다. 최고선에 관한 예에는 모든 의무들은 완전한가? 어떤 한 의무가 다른 한 의무보다 더 중요한가? 혹은 이와 비슷한 논의들이 속한다. 그런데 그것들을 위해 규칙들이 제시하는 바의 의무들에 관해 말하자면, 이 의무들이 비록 최고선에 관련된다 할지라도, 이 관련의 사실은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의무들은 그보다는 일상적 삶에 관한 지침 쪽으로 정향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내가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들에 대해서이다.
5.Panaetius of Rhodes(B.C.180~111): Diogenes와 Anitipater의 제자로서 중기 스토아철학의 창시자. B.C.2세기 중엽에 그리스의 문학, 철학, 역사 등을 연구하기 위해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기도 하는 소(少) Scipio장군이 만든 소위 Scipio Circle에서 역사가 Polybius와 더불어 로마현실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그가 저술한 의무론은 키케로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 전해 내려오고 있지 않음.
8. 그 외에도 의무에 대한 또 다른 구분이 있다. 우리는 소위 ‘중간적’ 의무와 ‘완전한’의무를 구분해서 말한다. 완전한 의무를, 내 생각에는, 우리는 ‘올바름’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리스인들은 이를 ‘카토르토마’라 부르고, 이에 반해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보통의 의무를 ‘카테콘’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단어들을 이런 식으로 정의한다. 즉 그들은 올바른 것을 완전한 의무라고 정의하는 반면에, 중간적 의무는 ‘그것이 행해졌을 때 왜 행해졌는가에 대한 그럴법한 이유가 제시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9. 따라서 파나이티우스가 보여주고 있듯이 어떤 행동을 하려고 결정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은 삼중적이다. 우선 첫째로, 사람들은 심사 숙고된 행동이 실제로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지, 아니면 도덕적으로 나쁘고 추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그러한 고려를 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은 흔히 상반된 의견으로 갈라진다. 그 다음 둘째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심사 숙고된 행동이 생활의 편리함과 즐거움, 수단과 재력의 통제, 사회적 영향력과 권력을 가져다주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조심스럽게 탐색하거나 추구하는데, 그러한 여러 가지를 이용하여 그들 자신과 그들에게 딸린 사람들을 도울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고려는 유익함⁶의 정도에 달려 있다. 셋째로, 의문을 품고 고려해야 할 것은 유익하게 보이는 것이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 것과 상충되는 것으로 보일 때이다. 참으로 유익함 쪽으로 마음이 쏠리면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 쪽이 마음에 걸리고,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 쪽으로 마음이 쏠리면 유익함 쪽이 마음에 걸리는 경우처럼, 마음은 심사숙고함에 혼란을 일으켜 사고하는 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생기게 된다.
6. utlitas(ω συμϕερον): 유익함이라 번역했지만, 영어로는 utility, expedience로 표기되고 있듯이, 유리함, 이득, 편리함이라 해도 괜찮을 것이다. 심지어 에피쿠루스학파에서 최고선으로 간주하고 있는 쾌락(voluptas)도 이에 속한다.
10. 구분하는 데 있어서 무엇인가를 빠뜨리는 것이 최대의 결점인데도 위의 구분에서는 두 가지가 간과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가 나쁘고 추한 것인가 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 것이 두 가지가 제시되었을 때 어떤 것이 더 선하고 명예로운지, 마찬가지로 두개의 유익한 것이 제시되었을 때 어느 것이 더 유익한지에 관해서도 사람들은 보통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 파나이티우스가 세 가지로 생각했던 것은 마땅히 다섯 가지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첫째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 것에 대하여는 이중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고, 둘째 유익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논의되어야 하며,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이들에 대한 비교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11. 원래 모든 종류의 동물은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생명과 몸을 보호하고, 해롭다고 보이는 것은 피하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 즉 먹을 것이나 은신처 또는 그와 같은 종류의 다른 것들을 구하고 마련하는 본능이 자연으로부터 주어졌다. 또한 모든 동물은 공통적으로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결합 본능과 자식이나 새끼를 낳는 순간부터 보살펴 주려는 본능이 있다. 그러나 인간과 짐승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짐승은 감각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의 일이나 앞으로 닥쳐올 미래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면서 현재 눈 앞에 보이는 것에만 자신을 적응시키는 데 반해, 인간은 이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사물의 결과를 인식하여 그 원인을 찾아낼 수 있으며, 사물의 전후 관계를 간과하지 않고 유사한 것들을 비교하여 현재의 사물을 장차 있을 미래의 것과 결합하고 연결시킬 수가 있으므로, 쉽게 자신의 전 인생 행로를 내다보면서 그것 맞추어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한다.
12. 자연은 또한, 인간 본성으로 하여금 이성의 힘을 빌려 인간과 인간이 언어와 사회 생활의 공동 유대를 맺도록 결합시키며, 무엇보다도 자식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지니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집회와 축제를 열고 거기에 참석하기를 원하게 된다. 더 나아가 자연은 인간 본성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처자식과 돌봐줘야 할 딸린 사람들의 안락과 풍요한 생활을 위해 도움이 되는 것들을 마련하는 데 열중하도록 한다. 이러한 배려와 책임감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용기백배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13.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고유한 것은 진리 탐구다. 그렇기 때문에 종사하는 일과 그 일에 대한 근심 걱정에서 해방되어 정신적 여유가 생기면,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듣고 배우기를 갈망하게 되며, 비밀에 싸여있거나 놀랄 만한 일들에 대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나 욕망을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와 같이 진실하고 단순하며 순수한 것이야말로 인간 본성에 가장 적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진리를 발견하려는 이 욕망에 소위 제1인자가 되려는 욕망이 첨가되는데, 그 결과 인간 본성이 잘 다듬어진 정신의 소유자는 오직 훈계자나 진리의 교사 또는 유익함을 위해 정의와 법에 따라 명령하는 자에게만 복종하려고 할 뿐, 그뢰의 어떤 사람에게도 복종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태도에서 인간 정신의 위대성과 인간과 사물에 대한 경멸감이 생기는 것이다.
14. 진실로 저 본능과 이성의 힘은 작은 것이 아니니, 그 까닭은 이 동물, 즉 인간만이 질서가 무엇인지 예의 범절과 언행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동물들은 가시 세계에서의 미적 감각, 애정 감각, 부분들로 이루어진 전체의 조화감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한다. 이에 반해 인간의 본능과 이성은 이의 유추를 감각 세계에서 정신 세계에로 확대하면서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할 때 훨씬 더 아름다움과 일관성과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여 언행심사에서 예의 범절에 어긋나거나 비신사적인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하며 일시적인 충동과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도덕적으로 선한 것, 명예로운 것이 형성되어 나온다. 경우에 따라서 이때 우리는 정색을 하고 어떤 것이 비록 일반적으로 고귀한 것이 아니어서 아무에게서도 찬양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여전히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우며, 자연이 부여한 인간 본성의 면에서 볼 때 찬양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5. 내 아들 마르쿠스야, 너는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육안으로 구별된다면, 지혜에 대한 놀라운 사랑을 일으키게 될” 실로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 것의 형상 자체와 바로 그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 것 전부는 다음 네 개의 부분 중 하나에서 나온다. 그것은 첫째 진리에 대한 통찰과 이해에서 생각되거나, 둘째 인간사회를 유지하며, 각자의 것은 각자에게 나누어 주며, 계약된 것에 대한 신의에서 생각되거나, 셋째 고귀하며 굽히지 않은 정신의 위대함과 강직함에서 생각되거나, 마지막 네 번째로 행해지고 말해진 모든 것에 절도와 인내가 내재해 있느 질서와 온건함 속에서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네 개 부분의 의무들은 비록 상호 간에 중북되거나 혼합되어 있다 하더라도, 어떤 유의 의무들은 단일 부분에서 나오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혜와 예지를 포함시키고 있는 첫 번째로 분류된 부분에서 진리에 대한 탐구와 발견이 행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그 덕의 고유한 열매다.
16. 실로 사물에 대해 가장 진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많이 알고, 가장 예리하고 빠르게 그 이유를 알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보통 가장 예지가 있고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진리란 사물을 자료로서 취급하며 그 속에서 발견하려고 애쓰는 사람만이 발견하는 것이다.
17. 그런데 나머지 세 가지 덕에서 실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 마련되고 유지되기 때문에 인간 사회가 이루어지고 유지되며, 정신의 뛰어남과 위대함은 자신과 자신에게 딸린 가족과 기타 사람들을 위해 부와 유익함을 증대시키는 데서 나타나기도 하며, 때로는 부와 유익함, 이것들 자체를 경멸하는 데서 훨씬 더 빛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질서의 일관성, 절제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은 정신 활동뿐만 아니라 어떤 신체 활동을 유발하는 그러한 종류와도 결부된다. 왜냐하면 일상 생활을 해나갈 때에 가능한 한 예의범절과 질서를 지키기만 한다면 우리는 도덕적으로 선한 것과 명예로운 것을 보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8. 그러나 우리가 도덕적으로 선한 것과 명예로운 것의 본질과 그 힘을 구분한 네 가지 가운데에서, 진리에 대한 인식에 내재해 있는 저 첫 번째 부분이 인간의 본질과 관계가 가장 깊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인식과 학문의 욕구에로 유도되어 빠져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서는 뛰어난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반면, 빗나가거나 잘못하는 것, 알지 못하거나 속임을 당하는 것을 악하고 추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의 본성과 도덕적으로 선한 것에 있어서는 두 가지 오류를 피해야 한다. 하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아는 체하여 맹목적인 동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니, 이러한 오류를 회피하고자 하는 자는(물론 모든 사람이 마땅히 회피하기를 원해야 되겠지만) 사물을 숙고하기 위해 시간과 정력을 들여야 할 것이다.
19. 또 다른 오류는 애매모호하고 어려우며, 필요치 않은 것들에 너무 많은 정력과 노력을 쏟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점성학에서 가이우스 술피키우스⁷에 대해 듣고 있고, 기하학에서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⁸를 우리 스스로가 인정하며, 변증법에서 많은 사람들을, 시민법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오류들을 회피하고 난 후, 그들이 도덕적으로 선한 것들과 인식할 가치가 있는 것들에도 그 만큼의 노력과 배려를 기울였다는 점은 마땅히 찬양받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진리탐구에 관한 것이지만, 사실 연구 때문에 실제의 생활과 유리되는 것은 의무에서 어긋난다. 왜냐하면 모든 덕의 찬양은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활동이란 자주 중단될 수도 있는 것이어서, 연구에 복귀할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 게다가 절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는 정신활동은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이 없을 때조차도 계속적인 지식 추구에 전념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생각과 정신 활동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과 명예로운 것, 착하고 행복한 생활로 안내하는 것들을 계획하거나 학문과 지식을 추구하는 일에 전념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상으로 의무의 제1원천에 관한 논의를 끝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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