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없는 사람들의 희망!
‘신비’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런 현상을 해방신학자들은 ‘기적’이라고 말한다. 해방신학은 남미에서 바닥공동체 - 남미는 사제가 부족해 평신도 사제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교회들이 퍼져있다. - 의 고유한 경험들이 신학의 정체성에서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이 바닥공동체의 상황은 정치적으로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 카톨릭 사제들이 보기에도 이런 상황에서 어떤 희망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이 바닥공동체는 어떤 합리적인 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는 고유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생명력 즉 희망 없는 이들의 희망은 남미의 변화를 이끌어 내고 민주화를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합리적’으로는 희망을 꿈꿀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게 되는가? 이 물음이 해방신학 삼위일체론 중 성령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희망 없는 이들의 희망은 남미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기실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공통된 어떤 경험이다. 때로는 희망은 다양한 장르로 승화해 어떤 예술로 거듭나고, 어떤 이상향으로 자리매김한다. 희망의 철학자 블르흐의 ‘희망의 내용은 변할 수 있지만 희망의 동인 만큼은 영원하다’는 말처럼 희망은 주어진 조건에 환원되지 않는 독자적인 것이다.
이 신비를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신비라 했지만 이것이 신비일까? 혹은 정말 기적일까? 이 답을 들뢰즈에게서 찾아 보자.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에서 ‘도구’와 ‘무기’를 구별한다. 도구는 저항을 전제한다. 어떤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도구는 탄생했다. 반면 무기는 투사한다. 무기는 정동을 낳는다. 이렇게 비유하면 어떨까? 물리학의 법칙 중 작용 반작용 법칙이 있다. 도구는 일종의 반작용의 산물이다. 저항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기는 작용 자체이다. 그것은 어떤 반작용도 전제하지 않는다. 반작용은 다만 작용의 그림자 어떤 효과이다.
희망 없는 이들의 희망이라는 신비도 마찬가지 아닐까? 희망 없다는 것은 어떤 반작용에 빌려 삶을 조망할 때 만 타당하다. 이런 삶은 항상 어떤 부정이나 결핍일 수 밖에 없다.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은 이런 점에서 상식적인 것이다. 하지만 희망 그 자체 즉 삶의 긍정성과 생명의 약동성은 마치 무기처럼 어떤 저항도 전제하지 않는다. 저항은 약동성의 현실화의 계기일 뿐 결코 그 긍정을 앞서지 못한다. 그래서 희망은 언제고 희망으로 살아남는다. 물리학의 법칙처럼 작용이 반작용의 효과가 아니라 반작용이 작용의 효과나 그림자인 것이다. 그토록 많은 예술가들, 이상향들 그리고 생명들은 적응하는 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 말해야 한다.
니체는 ‘황금에는 도금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황금은 그 자체로 빛난다. 삶도 그렇다. 우린 그것을 긍정하고 그 삶의 역능이 스스로 어떤 계기도 없이 펼쳐지는 것을 받아들이면 된다. ‘어떻게 희망없는 이들이 희망을 가지는 것인가?’ 에 대한 질문에 우린 이제 답할 수 있다. 삶은 그 자체가 희망이고 긍정이며 생명의 약동이기 때문이다. 이제 희망을 관조하지 말고 희망을 누리자..
'홈지기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무현 바로알기 (0) | 2020.02.08 |
---|---|
영생이란 무엇 인가... (0) | 2020.02.06 |
그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0) | 2020.02.02 |
„Was vernünftig ist, das ist wirklich; "이성적인 것은 실제적이다 (0) | 2020.01.27 |
사형의 기원과 역사 (0) | 2020.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