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스터(J. Webster)는 독일어권 신학과 영어권 신학 사이의 상호이해가 종교적 언어에 대한 논의를 통해 증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신학 전통은 모두 종교적 언어가 어떠한 본성과 기능을 지니는지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정작 그 문제가 상대방의 전통 속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 첨예하게 갈등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독일어권 신학의 가장 뛰어난 학자 중 하나인 에버하르트 융엘(E. Jüngel)을 영어권 신학에 소개하려는 그의 작업은 바로 두 전통 사이에 놓인 이러한 간격을 메우기 위한 시도로서 이루어지고 있다.
1.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그리스도교 신앙은 때로 ‘언어의 세속화(secularisation of language)’에 직면하여 하나님에 대한 언어가 어떻게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지를 해명해해야 한다. 세계에 대한 언어가 더욱 ‘세계내적으로(worldly)’ 변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사유와 발화 속에서 더 이상 자리를 차지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적 특성이 문제시되기 마련이다. 우리의 시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실 수 있는 가능성’과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이러한 언어의 세속화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객관성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을 이룬다. 따라서 융엘의 작업은 하나님에 대한 발화의 필요성과 그 속에서 하나님이 발화하셔야 하는 언어의 다언성(wordliness)을 충분히 관련지어야 한다는 요청으로 빈번하게 돌아간다.”1
융엘은 하나님에 대한 언어의 정당성을 해명하기 위해 크게 두 가지 주장을 강조한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한 언어는 본래적으로 인간의 언어이다. 하나님에 대한 언어가 분명 ‘인간적 발화의 구조’를 넘어서는 힘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그 언어가 ‘인간적 언어성’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 그[융엘]는 하나님에 대한 언어가 인간의 언어에 대한 중지나 폄하가 아니라는 것을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단언한다. [……] 하나님에 대한 언어는 덜 인간적이기보다는 더 인간적이다.”(EJLF, 254-255) 둘째로, 하나님에 대한 언어를 단순히 말을 부적절하게 사용한 결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언어는 기존 언어가 사용되는 고정된 방식을 깨부수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킨다. “‘하나님을 발화로 데려오기’에 적절한 언어는 오용적인데, 말을 새로운 지시체에 적용시킴으로써 새롭게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한 오용은 용납할 수 없는 말의 남용으로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언어와 사태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확장을 고무시켜야 한다.”(EJLF, 255)
(i) 초기 연구
『바울과 예수』: 융엘은 ‘발화 사건(speech-event)’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신약성서에 접근한다. 신약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신약성서의 언어적 ‘형식’과 분리되지 않는다. 신약성서의 언어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재를 발화 속으로 데려오기 위해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실재는 언어 넘어에 놓여 있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언어를 통해 발생하는 발화 사건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실재는 그것의 텍스트적 형식으로서 현존한다(그리고 그 형식 없이는 현존하지 않는다).”(EJLF, 256) 따라서 신약성서를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태도는 거부된다.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텍스트 바깥의 사실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언어가 발화 사건의 측면을 지닌다는 점을 놓치고 있을 뿐이다. 특별히 이러한 논의는 신약성서의 비유를 논리적 판단의 형식을 지닌 두 명제 사이의 비교로 환원하고자 하는 율리허(A. Julicher)의 입장에 대한 비판으로서 제시된다. “[……] 율리허의 실패는 단순히 부적절한 문학적 범주를 비유에 끼워 맞추려는 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이며 그것의 현존에 대한 문학적 삽화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한 간과이다.”(EJLF, 256)
하나님 나라가 비유 속에서 존재한다는 주장은 교의학의 차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다. 하나님 나라는 신약성서의 비유가 제시될 때에야 비로소 도전과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비유를 벗어나서는 애초에 하나님 나라 자체가 존재할 수조차 없다. “‘하나님 나라가 비유로서의 비유 속에서 발화된다(The Kingdom comes to speech in parable as parable).’라고 제시하면서, 융엘은 단순히 하나님 나라와 그것이 발생하는 언어의 관계만을, 하나님 나라가 ‘비유 속에서 발화된다’는 사실만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계’라고 일컬어질지도 모르는 것을 고려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비유로서’ 온다는 사실은 융엘에게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인간 및 인간의 역사와 관계 맺는지를 교의적 수준에서 성립시키는 의미를 지닌다.”(EJLF, 257)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는 근본적으로 ‘종말론적(eschatological)’ 성격을 지닌다. 애초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술어를 바탕으로 해명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세상 속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응하는 사건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 대해 형용사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래서 간접적으로 발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비유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계는 종말론적이다.”(EJLF, 257)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coming)’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온다(come)’라는 은유는 하나님 나라가 세계내적 대상에 고착화되어 있는 언어와 거리를 둔 채 우리의 세계이해를 문제 삼는 방식으로 발화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융엘은 하나님 나라가 발화로 ‘온다’고 강조한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오고 있는’이라는 관념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차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중심적 은유이다. 하나님 나라가 발화로 ‘온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유지하는 것이다.”(EJLF, 257-258)
문제는 초기 융엘이 하나님 나라와 세상 사이의 차이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비유의 가장 중요한 성격 중 하나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유는 본래 우리에게 친숙한 것을 통해 친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다. 신약성서는 세상을 넘어서는 언어를 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세상의 언어를 사용하고 한다. 그러나 초기 융엘은 두 가지 언어 사이의 차이만을 부각시킬 뿐이다. “사실, 『바울과 예수』 속 융엘의 비유 이론과, 그 책 속 개별 비유에 대한 그의 해설이 지닌 근본적 연약함은, 그가 거의 완고하게 예수의 비유가 지닌 흔한 성격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바로 그 비유를 통해 ‘우리가 활발하게 ‘비신성화된(desacralized)’ 종교적 관용어를 만난다.’라는 점 말이다.”(EJLF, 258) 이러한 한계는 이후 저작인 『세계의 비밀로서의 하나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극복된다.
『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 속에 있다』: 융엘은 1960년대에 브라운(H. Braun)과 골비처(H. Gollwitzer)가 하나님에 대한 언어의 ‘객관화’ 가능성을 주제로 논쟁한 내용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특별히 바르트(K. Barth)의 삼위일체론을 통해 두 입장이 지닌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종교적 언어의 의미가 인간의 맥락과 조건이 아니라, 신적 존재의 진행(procession)에 근거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융엘은, 말하자면, 바르트에게서 종교적 언어의 유의미성(meaningfulness)에 대한 질문의 우월함을 거부하는 저항을 발견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접근은 신적 지시체와 인간적 언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신적 존재의 진행에 의해 제기된다는 점을 파악하는 데 실패하기 때문이다.”(EJLF, 259) 즉, 하나님에 대한 언어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언어적 능력이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묘사(illustrate)’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늘 새롭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언어를 ‘징발(commandeering)’하여 그 자신을 끊임없이 ‘해석(interpret)’하도록 이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의 과정은 ‘언어의 증진(gain to language)’을 가져온다. 하나님에 대한 언어는 우리의 언어가 세계내적 존재자에 대한 묘사에 종속되지 않도록, 곧 도래하는 존재를 향해 자신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유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융엘의 논의는 하나님에 대한 발화가 지닌 인간성(humanity)을 철저하게 긍정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적 말씀의 선재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우리의 자연적 언어의 인간성에 대한 평가절하로 귀결되고 만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징발된 언어만이 ‘참된’ 언어라고 규정된 나머지 그 이외의 언어는 마치 참된 언어로서의 지위를 지니지 못하는 것처럼 기술되기 때문이다. “융엘의 관심은 인간적 발화를 선재적인 신적 말씀으로부터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우리의 언어가 신적 발화 행위(speech-act)로 흡수될, 혹은 최소한 순전히 ‘자연적’ 언어가 발화의 변종적 형태라는 함의를 지니게 될 실제적 위험이 있다.”(EJLF, 259)
(ii) 은유적 진리
융엘은 1974년에 「은유적 진리」라는 논문을 통해 은유의 신학을 발전시킨다. 그는 ‘은유적 진리(metaphorical truth)’라는 용어를 리쾨르(P. Ricoeur)에게서 빌려온다. 언어와 실재 사이의 완벽한 지시 관계란 성립할 수 없다. 오히려 지시 관계는 그 가장 밑바탕에 은유를 전제하기 마련이다. “문자적 지시의 붕괴는 [……] 더욱 근본적인 지시의 형태의 출현을 위한 부정적 조건이다.”(EJLF, 260) 더욱이 실재는 은유 속에서 기존에 알려진 적이 없는 자신의 새로운 측면을 개시하는 것으로 밝혀진다. 우리가 언어가 지시하고 있는 대상이란 사실 세계내적 존재자가 아니라 은유를 통해 표현된 ‘실재에 대한 관점(view of reality)’이기 때문이다. 실재에 대한 새로운 은유는 실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출현시키는 것이다. “은유는 그러므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새로운 실재의 출현을 추적하는 언어의 형식이다.”(EJLF, 260) “은유는 새로운 실재에 대한 표현을 도입함으로써 세계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 그것은 언어의 한계만큼이나 세계의 한계를 밀어낸다.”(EJLF, 260)
은유는 우리의 언어가 주어진 현실성을 넘어설 수 있도록 만든다. 문자적 지시는 세계내적 존재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은유는 끊임없이 새롭게 개시되는 실재를 표현하는 힘을 지닌다. 하나님에 대한 언어 역시 은유를 통해 도래하는 존재를 지시하게 된다. “신앙의 언어가 문자적 현실성을 기술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성보다 더 적은 것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성보다 더 많은 것을 지시하는데,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은유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문자적 지시의 중지는 현실적인 것을 넘어서는 사태(state of affairs)에 대한 언어적 발견을 허락한다.”(EJLF, 261) 이러한 논의는 (1) 은유가 무엇이 사실인지(what is case)를 개시한다는 점을 통해, 또한 (2) ‘현실성(actuality)’과 ‘현실성보다 더 많은 것(more than actuality)’이 구별된다는 점을 통해 보다 철저하게 해명될 수 있다.
첫째로, 은유의 사용은 문자적 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사태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고유한 의의를 지닌다. 문자적 언어를 통해 은유를 환원하고자 하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은유는 단순히 장식품으로서 문자적 언어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도래하는 존재가 개시되는 장소로서 문자적 언어 이상의 것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 융엘은 은유가, 교육적으로는 유용하지만 발견적으로는 정확한 단어(verbum proprium)로부터의 과잉적 일탈인, 수사학적 사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은유는 환원불가능한데, 왜냐하면 그것이 문자적 언어로는 적절하지 않은 기술을 위한 사태를 개시하기 때문이다.”(EJLF, 261)
둘째로, 세계내적 존재자의 ‘현실성(actuality)’을 바탕으로 도래하는 존재의 ‘가능성(possibility)’을 규정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현실성은 존재와 동일시될 수 없다. 존재는 현실성과 가능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를 지닌다. 즉, 아직 세계내적 존재자 속에 현실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은 사건 역시 우리에게 도래할 수 있다. 존재에는 언제나 현실성보다 더 많은 것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융엘이 현실성과 가능성을 포괄하도록 존재의 범주 확장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현실적 사태에 대한 그러한 존재론적 우위성의 부여를 반대하는 것이다. ‘존재는 현실성 속에서 소진되지 않는다. …… 그 이상이 가능하다.’ [……] 이 작품[「현실성과 가능성으로서의 세계」은 존재와 현실성의 동일시에 대해 한결같은 비판을 제시하며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to on)의 영역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EJLF, 261) 문자적 언어가 존재의 한계를 포괄적으로 그려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성에 대한 기술을 넘어서 가능성에 대한 표현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문자적 언어에 국한되지 않는 은유의 사용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존재’가 현실성과 가능성 모두를 포괄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문자적 발화는 언어의 한계를 그려내지 못한다. 그래서 은유는 무엇이 사실인지에 대한 고려의 중단이 아니라, 존재의 새로운 측면에 대한 개시이다.”(EJLF, 261)
따라서 진리의 개념 역시 현실성을 넘어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진리’가 단순히 현실성(actuality)뿐만 아니라 은유로서 언어적으로 규정된 현실성의 교란(disturbance of actuality) 속에도 위치해야하기 때문이다.”(EJLF, 262) ‘지성과 사물의 일치(adaequatio intellecus et rei)’에 근거한 진리 이론은 문자주의(literalism)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이러한 이론에서는 진리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기술에 국한될 뿐이다. 그러나 존재가 은유를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도래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경우 진리 이론은 실재의 새로운 측면이 개시되는 사건 속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언어와 세속적 언어 사이의 차이만을 강조한 초기 융엘의 한계는 비로소 극복된다. 은유는 그 두 가지 언어를 중재한다. 우리는 은유를 통해 도래하는 존재를 표현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세속적 언어는 도래하는 존재와 만나는 과정에서 ‘언어의 증진’을 경험한다. 은유의 사용은 우리에게 ‘친숙한 세계의 확장’을 가져오는 것이다. “해결의 핵심은 은유의 분열된 지시가 현실성과 가능성 양쪽에 걸쳐 있는 방식 속에 놓인다. 은유 속에는, 친숙한 언어가 새롭고 기이한 의미를 얻게 됨에 따라, ‘친숙한 것과 낯선 것의 변증법’이 존재한다. 따라서 종교적 은유는 세계내적 언어의 폐지가 아니다. 현실성에 대한 지시의 중지는 현실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성은 자신을 넘어서 자신을 취한다. 은유는 억압이 아니라 ‘친숙한 세계의 확장’이다.”(EJLF, 262) 즉, 초기 융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통약불가능한 간격을 강조하는 반면, 후기 융엘은 은유를 통한 언어의 확장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적 언어의 본질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형태 속으로 발화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초월적 말씀보다는) 은유에 주목함으로써, 융엘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발화의 인간성을 더욱 충분히 주제적으로 만든다.”(EJLF, 262) “인간과 그의 언어의 세계내적 지평과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종말론적 지평 사이의 초기 구별은 점차 약화된다. 이러한 구별은 문자적 발화로 표현되는 세계내적 현실성과 현실성에 보조되는 더 나아간 가능성 사이의 구별로 전환된다. 순전히 초월적인 요구가 아니라 언어의 확장과 갱신으로서 발생하는 가능성 말이다.”(EJLF, 262)
(iii) 강림의 유비
융엘은 『세계의 신비로서의 하나님』에서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하나님을 발화 속으로 데려올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강림의 유비(analogy of advent)’를 제시한다. “은유에 대한 그의 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융엘은 완전히 인간적이면서 또한 ‘하나님을 발화 속으로 데려오는’ 발화의 양태를 두루 탐구한다. ‘강림의 유비’는 그가 주장하는 해결책이다.”(EJLF, 263) 하나님과 세계는 직접적으로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 ‘x→a=b:c’라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비교된다. 즉, 하나님(x)이 세계(a)를 향해 ‘오실’ 수 있는 것은 세계내적 관계(b:c)가 이러한 강림을 위한 유비로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융엘은 세계내적 관계(b:c)가 오직 하나님을 지시하는 것으로서만 자신의 참된 의미를 얻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제안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완결적인, 세계내적 관계가 또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세계내적 관계(b:c)는, 그 자체로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지시하는 아무 것도 주지 않지만, 이제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자연(natura)을 하나님에 의한 완전성의 절정으로 데려옴으로써가 아니라, 더욱 자명한 어떤 것을 위해 말하는 세계의 자명한 조각으로서 말이다.”(EJLF, 263)
강림의 유비는 ‘하나님의 인간성’에 근거하고 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세계내적 관계를 통해 우리의 언어 속에 도래하신다는 점에서 ‘인간성(humanity)’을 지니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인간성(man’s humanity)’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하나님의 인간성(God’s humanity)’을 지니신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대립될 수도, 혼동될 수도 없다. 즉, 하나님께서 세계내적 존재자와 구별되신다는 주장이 반드시 그 두 가지가 완전히 통약불가능한 극이라는 주장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세계내적 존재자를 향해 오고 계신다는 주장이 반드시 그분을 세계내적 존재자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주장으로 귀결되지도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별은 정확히 하나님의 인간성과 인간의 인간성 사이의 구분인데, 왜냐하면 ‘그분의 신성에 적절한 인간성과 인간의 인간성 사이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성의 고유한 인간성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EJLF, 264) “유비의 교의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대립(polarisation)도 혼동(confusion)도 반영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하나님의 세계로의 오고계심에 근거하여 그들의 구체적 구별을 반영한다.”(EJLF, 264)
(iv) 의인법
융엘은 하나님에 대한 의인법적(anthropomorphic) 언어의 의의를 강조한다. 그의 논의는 하나님의 무역사성(unhistoricality)를 주장한 스피노자(B. Spinoza)의 철학에 반대하여 제기된다. 스피노자는 세속적 대상에 적용되는 언어를 하나님의 무역사적 존재에 적용하기를 거부한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모든 의인법이 하나님의 존재에 맞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언어라는 것을 시사한다.”(EJLF, 264) 그러나 스피노자가 하나님에 대한 언어에서 의인법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고자 한 반면, 융엘은 인간의 언어가 근본적으로 의인법적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확실히 융엘은 하나님에 대한 의인법적 발화가 모든 인간적 언어가 의인법적이라는 사실에 의해 필연적으로 형성된다는 점을 인정한다.”(EJLF, 264) “그의 발화의 대상이 무엇이든지,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 자신을 표현한다.”(EJLF, 265) 여기서 ‘의인법(anthropomorphism)’의 필연성에 대한 이러한 강조가 반드시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언어가 의인법을 바탕으로 발화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그 언어를 인간적 언어로 환원시키는 주장이라고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의인법은 인간의 언어적 능력이 지시의 절대적 지점이 되어버리는 인간중심주의와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toto caelo) 다르다.”(EJLF, 265)
그러나 의인법이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언어가 지닐 수밖에 없는 필연적 조건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유가 의인법적 언어를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모습으로 자신을 기꺼이 표현하고자 하셨다는 사실이 그분에 대한 의인법적 언어의 근거에 놓인다. 하나님에 대한 의인법적 언어의 정당성은 인간의 언어가 언제나 의인법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인법적 언어로 자신을 계시하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법은 단순히 인간적 사업의 하나로서 하나님에 대한 언어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인법이 적합한 그러한 방식 속에서 그 자신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자유의 표현이다.”(EJLF, 265) “융엘의 해석에서, 그러므로, 의인법의 근거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사이에 상정된 자연적 친밀성에 놓이거나 인간적 언어가 미치는 한계에 대한 인식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하나님이 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자기 결정에 놓인다. 하나님에 대한 발화는 의인법적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기 때문이다.”(EJLF, 265)
(v) 반성
융엘은 하나님에 대한 언어가 ‘실증적(positive)’ 혹은 ‘문자적(literalist)’ 언어의 양태에 종속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그의 신학은 흔히 ‘이상한 언어(odd language)’라고 폄하되는 ‘은유’, ‘비유’, ‘유비’ 등이야 말로 실재의 새로운 측면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 유용하다. “그는 종교적 담론의 문법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언어가 ‘실용적’ 또는 ‘문자적’ 모델에 의해 소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자 고민한다는 점에서 본받을 점이 많다.”(EJLF, 266)
다만 융엘의 논의는 문자적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은유’의 의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자칫 그리스도교적 언어의 다양성을 간과할 수 있는 위험 또한 지니고 있다. 문자적 언어를 비판하고자 하는 시도가 오히려 그리스도교적 언어를 ‘은유’와 같은 또 다른 특정한 언어적 양태로 환원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확실히 오용법(katachresis)의 의미론에 대한 융엘의 작업은 문자적 발화와 문자적 발화를 강조하는 존재론의 헤게모니에 대한 귀중한 저항이다. 다만 그러한 저항의 비용이 모든 종교적 언어를 하나의 특정한 양태로 너무 성급하게 해소하려는 시도일 수도 있다. 그래서 융엘이 ‘신앙의 발화는 은유(metaphora)를 통해 구성된다’고 쓸 때, 그의 제안은 그리스도교적 확신의 표현을 위해 적절한 언어의 다양성 사이의 구분을 생략해버린다.”(EJLF, 266) 이러한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융엘의 논의가 언어의 다양성을 포괄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신학적 의미론의 체계를 세우고자 한다기보다는, 언어의 세속화를 비판하고자 하는 특수한 교의적 목적을 바탕으로 전개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언어의 범위가 지닌 이러한 종류의 한계를 위한 해명은 융엘의 논의가 지닌 처방적 성격 때문이라는 점이 이제는 명백해져야만 할 것이다. 즉, 그의 논의는, 교의적 목적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어, 언어 사용의 다양성의 세부적 예시를 위해서는 적은 자리만을 제공할 뿐이다.”(EJLF, 266)
2.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말씀
융엘은 ‘하나님의 말씀’ 개념을 바탕으로 신학적 인간학을 성립시키고자 한다.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그에 따르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secundum dicentem deum)라는 원칙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평가되는 말씀에 의존한다.’”(EJLF, 266-267) 그러나 융엘의 논의가 말씀에 대한 교의를 마치 언어철학의 ‘의미론(semantics)’처럼 체계화하여 신학적 인간학의 근거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언어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친숙하지만 융엘에 의해 제시된 반성의 전통에는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의 관심사를 파악하거나 그에 대해 공감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신적 말씀에 대한 교의와 언어적 활동에 대한 분석을 통합시키고자 시도하는 진지한 저술이 거의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EJLF, 267)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명이 제시될 수 있다. (1) 말씀에 대한 교의는 특정한 신학적 영역 속에서 구체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때에야 비로소 부각될 수 있다. 또한 (2) 말씀에 대한 교의는 단순히 신학적 인간학과 따로 구별되어 다루어질 수 있는 논의의 ‘형식’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신학적 인간학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신학적 인간학은 ‘지성과 사물의 일치’로서의 진리 개념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진리 대응 이론 위에 성립한 인간학은 현실성 속에 주어져 있는 것만을 탐구의 대상으로서 인정하는 나머지 세계내적 존재자로서 인간이 지닌 양태를 분석하는 논의에 머무르고 말 뿐이다. “은유적 진리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 융엘은 진리 대응 이론의 내적 보수성에 주목하는데, 현실성을 향한 그 이론의 정향이 새로운 언어 속 새로운 존재의 출현에 의한 현실성의 교란에 대해 저항으로서 여겨지는 한에서 그렇다. 인간학적 맥락에서 대응 이론은 거부되는 것은 현실성을 향한 그 이론의 정향이 인간의 행위에 대한 강조를 포함하기 때문이다.”(EJLF, 267) 그러나 진리는 주어져 있는 현실성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작업에서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성이 도래하는 존재에 의해 무너지는 사건 속에서 개시된다. “진리는 ‘근본적으로 인간적 삶이 지닌 연속성의 중단이다.’”(EJLF, 267) 따라서 신학적 인간학이 수행해야 하는 작업이란 인간이 어떻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는지에 대한 기술이라기보다는, ‘부르시는 말씀(Word of address)’이 어떻게 ‘나(I)’라고 규정된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극복하도록 만드는지에 대한 증언이어야 한다. “인간은 ‘말씀에 의해 규정(wortbestimmt)된다.’”(EJLF, 268)
(i) 칭의
융엘은 칭의를 신학적 인간학을 위한 ‘진리의 구성적 기준(constrictive criterion of trith)’으로서 제시한다. 그는 칭의를 ‘구원론적(soteriological)’인 맥락보다는, ‘인간학적(anthropological)’ 맥락에서 다루고자 한다. “[……] 융엘은 칭의가 전제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기초적 구조를 확장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칭의는 신학적 인간학이 전개될 수 있는 틀이 된다. 따라서 칭의는 순수하게 구원론적인 경계 넘어로 뻗어간다. 그것은 다른 계열(seriatum)과 나란히 놓인, 분명하게 구분지어진 교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융엘이 ‘진리의 구성적 기준’이라고 부르는,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교의의 어떠한 구별된 특징을 제공하는 동기이다.”(EJLF, 268)
그리스도교의 칭의 개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수동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인간이 수행하는 행위가 그의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 없이도, 또는 인간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격을 긍정하신다. ‘인격(person)’과 ‘행위(work)’는 필연적 영향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것으로 강조된다. “왜냐하면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은 인간을 그의 행위 없이도──실제로는, 그의 행위에도 불구하고──긍정하시기 때문인데, 따라서 인격성의 진리(the truth if personhood)와 행위의 현실성(the actuality of works) 사이의 구별을 수반하는 것이다.”(EJLF, 268) 즉,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행위의 현실성이 아니라, 그를 인간으로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밖으로부터(ab extra)’ 형성된다. “다시금, ‘부르심(Anrede)’이라는 관념이 부각된다. 수행과 활동에 앞서서, 인간은 밖으로부터 구성되며, 이러한 구성의 수단은 신적인 ‘부르심’이다. 즉, ‘그리스도교 신학은 인격과 행위의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의 한 가운데서 인간이 그의 행위로부터 영적으로 구별가능하다고 인간을 부르시는 권위에 의해 서거나 넘어진다.’”(EJLF, 268-269) 인간의 존재가 주어진 현실성을 뛰어넘어 새롭게 규정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 ‘인간의 존재로 향하는 입구’는 인간이 ‘그를 인간으로 만드시는 말씀과의 만나는’ 장소에서 발견되어야 한다.”(EJLF, 269)
(ii) 시간성
융엘은 바르트(K. Barth)와 훅스(E. Fuchs)의 영향을 받아 시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주장한다. 시간은 단순히 자아가 경험하는 가치중립적이고 연속적인 순간의 집합으로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의미가 개시되는 사건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 시간은 시간으로서 경험될 수조차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시간을 움직인다는 것은 바로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새로운 시간을 가능하게 만드는 새로운 의미를 개시한다는 주장이다. “시간은 하나님에 의해 그분의 말씀 속에서 움직여진다.”(EJLF, 269) 가령, 예수의 산상수훈은 모세의 율법이 대표하는 이전의 시간 속에 새롭게 구별된 시간을 가져다준다. 옛 시간 속에 새 시간이 도래하게 되는 것은 말씀 사건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모세의 율법의 옛 시간에 대항하여 새 시간을 선언하는, 새로운 말씀 속에서 일어난다.”(EJLF, 269)
의식하는 주체의 사유 활동을 ‘절대적 현재(absolute presence)’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 데카르트(R. Descartes)의 시도는 비판받는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시간을 단순히 동일한 순간의 집합으로 이해한 나머지 새로운 시간이 자아 정체성을 깨부수며 찾아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사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의심한다’를 융엘이 ‘절대적 현재’라고 부르는 것으로──그곳에서부터 시간의 진동이 밖으로 나아가는 절대적 결절 지점으로 만든다.”(EJLF, 270) 아무런 변화도 발생할 수 없는 이러한 연속적 순간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은 말씀 사건에서 발견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말씀 사건을 통해 주어진 현실성의 지배를 벗어나게 된다. “과거와 미래 사이의 간극으로 기능하면서, 말씀의 사건은 과거의 지배를 부수어 자유를 제공한다.”(EJLF, 270)
(iii) 반성
(1) 융엘은 신적 ‘부르심’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학의 교의가 언어의 ‘개시성’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철학의 논의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해명하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 신학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철학 역시 인간이 언어를 통해 주어진 현실성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학이 주장하는 신적 말씀의 ‘부르심’에 대한 논의가 과연 오늘날의 철학이 제시하는 언어의 ‘개시성’에 대한 논의와 과연 어떠한 점에서 구별되는지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 융엘의 의도가 인간을 향해 열린 가능성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그리고 심오하게 창조적이어서 초월적 실재의 선물로서 경험되는 언어의 전통이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 하지만 발화의 이러한 전통과 하나님의 존재 사이의 관계가 지닌 정확한 본성은 더욱 충분하게 설명될 필요가 있다. 신적 언어 혹은 하나님의 존재의 구어성(verbality)에 대한 분석되지 않은 개념에 의지하는 것은 문제를 명료하게 만들기보다는 어둡게 만든다.”(EJLF, 271)
(2) 융엘은 인간의 ‘언어적 본질(Sprachwesen)’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비언어적 상징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고 있지 않다. 의미는 ‘말해진 것(thing said)’뿐만 아니라, ‘행해진 것(thing done)’ 속에서 역시 성취될 수 있다. 분절화된 언어가 지니는 신학적 의의를 강조하고자 하는 논의는 자칫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활동에서 전례와 성사 등의 상징적 활동이 차지하는 역할을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이렇듯 막대한 강조는 의미를 투사하는 인간의 활동 속에서 다른 상징적 활동의 중요성에 대한 융엘의 기민함을 무디게 만든다.”(EJLF, 271) “[……] 의미의 성취는, 물론, 기호체계의 제조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상호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세계를 전유하며 인간화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상징적 관습으로부터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호체계는 순수하게 구어적(verbal)이지만은 않다. 그것들은 또한 ‘제스처의 언어(le language du geste)’를 포함한다.”(EJLF, 271-272)
1. J. Webster, “Eberhard Jüngel on the Language of Faith”, Modern Theology, Vol. 1(4), 1985, p. 254.(약호: EJ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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