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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지기칼럼

Albert Schweitzer의 생애와 사상에관한 기독교적 조명

by 이덕휴-dhleepaul 2018. 2. 11.

Albert Schweitzer의 생애사상관한 기독교적 조명

 

 
                   [목 차]   
  
알버트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 의사
        출생-사망
1875년 1월 14일 (독일) - 1965년 9월 4일
        가족
배우자 헬레네 브레슬라우
        학력
스트라스부르제1대학교 신학, 철학 학사

필리핀 대미 승전탑

이덕휴목사



          - 수상
 1952년 노벨평화상
 1928년 괴테상
          - 경력
 1951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
          - 관련정보
 네이버[캐스트] - '밀림의 성자'로 유명한 인도주의자 / 알버트 슈바이처
     Ⅰ. 슈바이쳐의 생애와 사상/ 1
         1. 출생/ 1
         2. 학업/ 1
         3. 사상/ 2
      Ⅱ. 나의 생활과 사색에서/ 3
          1. 생활의 여정/ 3
          2. 성찬연구와 예수전연구/ 4
          3. 인류에의 봉사/ 6 

          4. 생명에의 외경 -문화철학 사상-/ 8

      

Ⅲ. 에필로그/ 10

  
    Ⅰ. 슈바이쳐의 생애와 사상
 
       1. 출생
      알베르트 슈바이쳐(1875-1965)는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거인들 중의 한 사람으로 신학자, 철학자, 음악가, 의사로서 인류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었다. 그는 당시 독일령이던 알사스 주 카이저스부르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균스바하에서 성장하였다. 소년 시절에 교회는 그에게 신비스럽고 즐거운 안식처가 되었으며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질이 뛰어나 이미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여덟 살이 되면서 오르간을 배웠는데 이 때 이미 바하의 위대함에 강렬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열 여덟 살 때 그는 파리에 나가 파이프오르간의 거장 위도르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인 음악 수련에 들어간다.

     2. 학업
     1893년, 슈바이쳐는 18세의 나이에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과 철학을 동시에 전공하였다. 또한 음악은, 그의 예술가적 삶의 지평을 열어주었으며, 그의 영혼을 깨닫게 해 주었던 신학에의 몰두는그가 아프리카에서 의사활동을 하게 한, 열정의 원동력이었지 아니었겠느가?. 대학에서 열심히 수강한 것은 유명한 홀츠만 교수의 공관 복음서와 빈델반트 교수의 철학사 강의였다. 특히 홀츠만 교수의 강의는 그에게 공관복음서에 대하여 강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으며, 이에 관한 여러 주석서를 읽게 하는 동기였다. 이러한 갖가지의 삶의 정황은, 크리스챤으로서의 삶과 인술에의 봉사로써, 그를 20세기에 가장 훌륭했던 인물로 기억하게 한, 도덕철학자이기도 하였다.
 
      1897년에 슈바이쳐는 최초의 신학수업으로 논문을 작성하게 되었는데, 쉴라이에르마허의, "최후의 만찬론"이었다. 1898년 제1회 국가시험을 통과하고 나서 그는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학위논문으로는 칸트의 종교철학을 논제로 하였다. 이 논문에서 얻은 경험은 칸트의 종교철학이 하나님, 자유, 영혼불멸의 문제를 과제로 하는 종교철학이라고 하지만 그 사상은 항상 동요하였다고 하였다. 1900년에 제2회 국가시험에 통과하여 부목사가 되었다. 신학논문은 "19 세기의 신학적 연구 및 역사기록에 의한 성만찬 문제"였다.
 
      1902년 "메시아 성의 신비와 수난의 비밀"을 모교 슈트라스부르크에 제출하고 신과 대학사강사에 취임한다. 1903년부터 '역사적 예수 연구' 와 '바하'에 몰두한다. 이후 1905 년 그의 생일(1.14)에 그는 의사가 될 것을 결심한다. 1906 년에 『예수전 연구사』를 발표한 후, '예수의 정신 의학적 연구'를 제출하여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 3월 27일 아프리카로 출발한다.
 
       3. 사상
       슈바이쳐의 사상은 자신의 실존적 삶 속에서 전개된다. 그는 공허한 관념의 유희를 싫어하고 언제나 자기의 철학을 실천에 옮기기를 열망하였다. 그의 반생을 람바레네에서 보낸 관계로 전문적 저작은 많이 남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그의 학문적 범위는 끝이 없었다. 신학과 철학을 동시에 하였는가 하면, 그의 정신세계의 영혼을 달래 주는 음악과 파이프 오르간의 제작과 연주, 그리고 그의 삶의 지평이었던 인류에의 봉사는 그의 나이 30에 교수직을 겸하던 의과 대학생으로서, 이제 교수, 목사 그리고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뒤로하고 아프리카의 오지 가봉의 람바레네의 인술 봉사로 이어지는 의학의 세계에서 종횡무진한 학문적 성과와 인류에의 봉사는 결국 1954 년의 노벨 평화상이라는 영광이 주어진다. 그 상금마저도 그에게는 봉사를 위한 헌금이었다. 크게 그의 학문은 신학적 부분과 철학적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무리가 없겠다.
 
      먼저 신학적으로 그는 19 세기에 나타난 "예수전"들을 비판한다. 이른바 철저적 종말론에 입각한 예수의 생애와 사상을 재구성하였다. 종말론에 의하여 예수와 바울의 사상을 파악하였고, 특히 예수의 생애를 근대적으로 해석하는 데 반대하였다. 18세기와 19세기의 예수전들은, 예수를 유대교의 비정신적인 교리로부터 자기만족을 하나님과 지상에 건설될 윤리적 하늘나라에 대한 합리적 사고로, 모든 교리를 초월하는 조건으로 인도하려는 위대한 계몽주의자로 묘사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대개의 예수전들이 예수가 행한 기적사화들은 군중들이 잘못 이해한 자연적 사건이라고 해석함으로써 기적에 대한 신앙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다음으로 철학분야로서 그는 소위 "生命의 畏敬思想"에 입각한 그의 문화철학에서 세계와 인생의 긍정과 윤리의 문제에 몰두하여 현대의 문화와 종래의 철학을 비판하여 생명의 경외의 세계관을 전개시킨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배경은 노벨 평화상수상 기념연설에서의 제목이 "현대에 있어서 평화의 문제"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하에서는 그의 자전적 저서『나의 생애와 사상』(Aus meinem Leben und Denken, 1931)을 중심으로 개략적 탐구를 전개한다.
 
 
 Ⅱ. 나의 생활과 사색에서
 
     1. 생활의 여정
     그는 1875년 1월 14일 고지 알사스 카이저스베르크에서 교구 목사인 아버지 루드비히 슈바이쳐와 어머니 실링거 아델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는 1925년 고령으로 어머니는 1916년에 군마에 밟혀 돌아가셨다. 어릴 때부터 오르간에 타고난 소질을 보인 것은, 할아버지 실링거의 영향이라고 한다. 1884년 가을까지 귄즈바하의 마을 학교에 다닌 그는 뮌스터 중학교를 거쳐, 필하우젠 고등학교를 아버지의 이복형제 되시는 루드비히 슈바이쳐의 가정에서 엄격하게 생활을 한다. 고등학교 상급반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우고 고대철학과 근대사상을 배웠다. 1893년 슈트라스부르크 신학대학에 입학한 그는, 젊고 패기에 찬 학풍과 훌륭한 교수진 속에서 신학과 철학을 동시에 청강하였다. 히브리어 때문에 고생한 그는 노력 끝에 시험에 통과하고 공관복음서 중 삼복음서를 공부하고 이어서 빌헬름 빈델반트와 테오발트 찌글러의 철학사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1894년의 군복무 기간에도 빈델반트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부대장의 배려였다. 이때 그는 마태복음 10장과 11장에 전념한 나머지 마태에만 기록되고 마가에는 기재되지 않은 재료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마가 가설 즉 마가복음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그 원안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에 당황한 나머지 스승 홀츠만 교수의 가르침에 놀라게 된다. 홀츠만에 의해서 대표되었던 비평학파의 일반적 견해였던 예수의 일생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 그는 스승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만다. 이것이 후일 그가 역사적 예수전 연구를 하게되는 동기부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새로운 시야를 전개시킨다. 즉 예수가 선포한 나라는 자신이나 신자들의 힘으로 자연적인 세계에 실현될 나라가 아니라 앞으로 초자연적인 세계의 시대가 출현함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나라라는 견해가 그의 심중에 확고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바하에 대한 존경과 더불어 리하르트 바그너에게서도 같은 감정을 갖는다. 슈트라스부르크의 대학생활은 빨리 지나갔다. 1897년 여름이 지날 무렵 최초의 신학시험의 테제는 성서와 종교개혁의 고백문헌 속에 기록된 해석과 비교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최후 만찬론"이었다. 이 과제는 그로 하여금 또 다시 복음서와 예수의 일생에 대한 문제로 돌아가게 하였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신앙론에서 마태와 마가에서의 성만찬은 예수가 되풀이 하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가르친 것이라는 사상에 대해서 그는 충분히 연구할 것을 가슴에 남기었다.
 
      1898년의 첫 번째 신학시험에 합격한 그는 본격적으로 철학에 몰두한다. 빈델반트의 고대철학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찌글러의 윤리학과 종교철학은 그의 학창시절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장식된다. 테오발트 찌글러는 철학박사 학위논문의 방향을 칸트의 종교철학으로 할 것을 권면하기도 하였다. 이후 파리에서 그는 소르본느에서의 철학과 위도르에게서의 파이프 오르간 공부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1899년 3월 중순에 다시 슈트라스부르크에 돌아온 그는 완성된 철학논문을 낭독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7월말에 받았다. 그의 긴 박사학위 청구논문은 그해 『순수이성 비판에서 이성의 한계 내에 있어서의 종교에 이르는 칸트의 종교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찌글러는 그에게 철학과의 전임자리를 권했으나 그는 신학과에서 일할 것을 결심한다. 그것은 그가 일찍이 목사의 길을 걷고자 택했는데 철학과 전임강사를 하면서 목사로 일한다면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을 것이라고 찌글러가 암시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설교한다는 것은 슈바이쳐의 내적 요구였으며 실존의 궁극적 문제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1899년 12월 1일자로 그는 슈트라스부르크의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목사로 일하게 된다. 처음에는 부목사보였지만 제2차 시험을 주로 연세드신 목사님들로부터 치르고 나서 정식으로 부목사가 된다. 거기서 오후 예배와 어린이 예배, 그리고 종교교육을 담당하였다. 성 니콜라이 교회가 쉬는 때는 아버지를 대신하려고 여러 번 귄즈바하에 가기도 했다. 그의 교육의 목적은 신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사고에 받아들여 후에 무종교의 유혹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그것에 항거할 수 있게 종교적으로 이끄는 데 있었다. 또한 교회에 대한 사랑과 매주일 예배에서 누리는 영혼의 안식을 찾는 마음을 그들에게 일깨워 주려고 하였다. 전통적인 교리에 대해서는 외경의 마음을 가지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정신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는 바울의 말씀을 굳게 지키도록 가르쳤다. 이 종교 교육을 하면서 그가 조상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교사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2. 성찬연구와 예수전 연구
       대학생활에서 느껴오던 예수전과 성찬에 관한 연구는 그의 신학적 안목을 다시 한번 더 넓혀 주었다. 성찬 문제는 예수의 신앙에서 초대교회의 신앙으로 발전하는 중간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쌍방의 영역에 동시에 자리잡고 있었다. 성찬의 기원과 의미가 그렇게도 알 수 없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사상세계와 초대교회의 사상세계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던 것에 기인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와 반대로 예수의 신앙문제와 초대교회의 신앙문제를 본디의 형태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도 우리가 성찬과 세례문제를 먼저 고찰해 보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았다. 이러한 견지에서 성찬사를 예수전 및 초대교회사와 관련시켜 연구하고자 노력했다. 성찬에 관한 연구로 1900년 7월에는 신학의 리첸티아트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수난의 신비와 메시아의 신비를 취급한 두 번째의 논문으로 1902년 대학 전임 강사로 취임한다. 성만찬의 연구에서 초기 기독교 의식을 빵과 포도주가 자기의 몸과 피라고 한 예수의 말씀을 되풀이함으로써 몸과 피의 의미를 지니는 빵과 포도주의 분배로 해석하려는 모든 시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초기 기독교의 만찬 의식은 예수의 속죄의 죽음의 성스러운 반복이나 상징적 재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최후의 만찬의 의식이 반복되는 것은 카톨릭의 미사 제물과 신교의 성만찬 의식에서였다. 즉 이러한 의식은 초기 공동체 만찬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가 자기의 몸과 피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감사의 기도는 대망하는 메시아만을 시사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였다.
 
       이후 그는 1902년 3월 1일 슈트라스부르크 대학 신학부에서 <요한복음>의 "로고스론"에 대하여 강사 취임강연을 하게 된다. 이 강연에서 예수가 한 말씀 가운데 애매한 부분은 로고스에 의해 이루어진 성사(聖事)가 그의 사후에 효력을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의 청중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기 위한 암시로 해석할 때에,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논증하였다. 이후 그가 사도 바울의 신비주의에 관한 책에서 이 이론을 자세히 검증할 수 있었다. 1905년 여름 학기에 "예수전 연구사"를 연구할 겸, 그는 일주일에 두 번씩 강의를 하였다. 슈바이쳐의 역작이라고 평가받는 "예수전 연구사"는 1906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은 그가 신학생들에게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초판은 『라이마루스로부터 브레데까지』(Von Reimarus zu Wrede)라는 이름으로 나왔는데, 재판부터는 『예수전 연구사』(1913)라는 이름으로 나왔으며, 이 책의 영역판은 『역사적 예수의 연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 A Critical Study of its Progress from Reimarus to Wrede, London: Black, 1910)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슈바이쳐가 바라 본 "예수전 연구"에 있어서의 문제의 소재는 과연 예수가 종말론적으로 생각했는가, 비종말론적으로 생각했는가 하는 데 있었다. 즉, 자기를 메시아로 간주했는가 그렇지 아니하였는가의 문제였다. 라이마루스는 처음으로 예수가 당시의 통념처럼 종밀론적 메시아의 대망을 갖고 있었다는 가설에서 출발하였고, 브레데는 또한 처음으로 예수의 종말론적 표현을 했기 때문에 슈바이쳐가 역사적 예수의 연구의 초점을 두 사람의 상반된 주장으로부터 당시에 발표된 무수한 예수전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표명하고자 했었다. 슈바이쳐의 견해는, 예수는 스스로 자기가 진정 메시아라는 의식을 갖었으며 이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부터라고 한다.
 
      따라서 예수가 자기를 메시아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또한 그의 메시아의 표상과 대망이 후기 유대교적 종말론적인 것이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위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메시아성도 부인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연구의 초점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가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역사적인 괘도에 오른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예수전의 역사적 이해를 위해서는 그가 후기 유대교의 종말론적 메시아 표상 세계에 살았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고 그의 결심과 행동을 통상적인 심리학이 아니라 그의 종말론적 대망 속에 내포되어져 있는 동기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3. 인류에의 봉사
       슈트라스브르크에서 신학과 음악의 세계를 동시에 밟아 나가던 그에게 신은 다시 세 번째의 길을 보여 주신다. 이미 스물 한 살의 어느 여름날 우연한 명상 끝에(1898년 귄스바하에서 성령 강림절 날,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의 복음을 위하여 잃으면 구하리라" 라는 말씀),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현재의 자기 행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자기도 무언가 베풀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우선 서른 살이 될 때까지는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고 그 다음부터는 인류에 봉사하는 길을 걷자" 이렇게 하여 학문과 예술에 전념한 그는, 당시 파리 전도협회에서 발행한 「콩고 지방 선교사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이라는 한 권의 팜플렛을 보게 된다.
 
      원래 슈바이쳐가 생각한 인류에의 봉사는 고아 구제사업에 뜻을 두었는데, 이루지 못하고 다시 부랑아와 전과자를 돕기로 하고 당시 성 토마스 교회에서 추진하고 있던 선교사 사업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를 아프리카의 오지 콩고의 오고웨 강가 람바레네까지 그를 보내신 것이다. 팜플렛의 제목은, "콩고 지방 선교사에 결핍되어 있는 것" 이라는 제목 하에 "사람들이여 교회는 구하고 있다. 주의 부르심에 응해 곧 주여, 제가 가겠나이다 라고 대답할 사람을" 이란 말을 읽고 그의 가슴은 뛰었었다.
 
       이로부터 그의 생활이 열리며 동시에 그때까지의 모색의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1905년, 30세가 된 슈바이쳐는 인류에 대한 직접 봉사의 길을 아프리카의 적도에서 행하고자 결심한다. 그것도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의사로서.... 이러한 그의 결심을 그의 가족들이나 친지들은 적지 아니 우려를 나타냈었다. 더구나 반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먼저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다시 학생신분으로 돌아가야 했다. 대학 교수단의 일원으로서의 그가 의과대학에 등록을 신청할 때, 학장이던 펠링 교수는 차라리 슈바이쳐를 정신병리학 교수에게 보내고 싶다고 하였다. 옳은 말이다. 이미 그는 명망 있는 신학교수에 목사로서 더구나 상류사회에 진출한 명사이자 오르간 연주의 대가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오지 아프리카 땅으로, 선교사도 아닌 의사의 신분으로 봉사의 길을 떠나기 위해서 이제 의사가 되겠다니, 아니 더구나 나이 30세에 정신병동으로 직행시킨다는 학장의 말씀을 새삼 논할 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네 사회라면 이해가 가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슈바이쳐의 결심을 꺾을 사람은 없었다. 정규 학생신분이 아닌 청강생으로 수업은 받되 교수들이 교부하는 청강 증명서에 의해서 의사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하였으며 같은 동료 교수라고 해서 강의료도 무료로 해 주었다. 해부학, 생리학, 화학, 동물학 등을 배웠고 마침내 그는 1911년 10월에 국가고시를 치르고 마지막으로 12월 17일에는 외과 시험을 끝으로 긴 8년여의 의학수업을 마친다. 그의 말대로 46면 짜리 박사 학위논문은, "예수에 대한 정신병학적인 평가"(Albert Schweitzer, Die Psychiatrische Beurteiung Jesu, T bingen: Mohr, 1913)라는 상당히 애매한 내용, 즉 예수에 대한 의학적 차원의 주제로 논문을 쓴 사실에 대하여 비판적 견해를 받을 정도의 골치 아픈 주제를 택하여, 일 년간이나 질질 끌면서 몇 번이고 다른 주제로 바꿀려고 했으나 어쨌든 통과하게 된다.
 
       아프리카를 향하기 전 1912년 봄, 그는 성 니콜라이 교회의 목사직과 대학 교수직을 내놓는다. 서른 여덟의 슈바이쳐는 오랜 동지이자 이젠 아내가 된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준비는 파리에서 하였다. 사용될 각종 약품, 의료기구 등 그러나, 가장 그를 압박하는 것은 자금이었다. 무슨 사업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계획에 불과한 그에게 선뜻 자금을 대주는 이가 있겠는가. 친지들을 찾아가서 자금 얘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졌다. 그러나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다.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의 독일인 교수단이 프랑스 식민지에 창설될 사업을 위해 거액의 기부금을 내놓았다는 사실에 그는 감동하였다. 이어서 성 니콜라이에서 신도들이, 후배, 제자 목사들의 교구에서. 파리의 바하 협회, 그리고 연주회 등을 통하여 자금은 형성되었다. 특히 슈트라스부르크의 젊은 외과 교수의 미망인, 안니 피셔 부인의 재정적 후원은 그에게 커다란 용기를 준다.
 
      이제 그는 파리의 선교회에, 오고웨 강가에 있는 그들의 선교 지역에서 중앙에 위치한 람바레네를 거점으로 한 선교 의사로서, 자비로 봉사하겠다는 최종적 신청을 하였다. 람바레네 선교부는 원래 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인 나사우 박사에 의하여 1876년에 창설된 것이지만 가봉이 프랑스 식민지가 되자, 학교수업을 프랑스어로 할 것을 프랑스 정부가 요청하자 하는 수 없이 미국 선교부에서 1892년 프랑스에 양도한 것이다.
 
       1913년 3월 26일 보르도에서 아내와 함께 배에 오른 슈바이쳐는, 람바레네에 도착한 후 마땅한 진료실이 준비되지 않아서 낡은 닭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짐짝을 풀어 놓을 여가도 없이 그는 진료에 들어갔다. 폐렴과 심장병 환자가 주종을 이루었다. 또한 탈장과 비뇨기 계통의 환자가 들끓었다. 그들은 수술만 하면 살아 갈 수 있는 데, 매년 죽어나가는 수를 줄여 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가 오자마자 수많은 환자들을 대하면서 그는 이곳에 오기를 잘 했다고 감사하는 것이었다. 간호원 교육을 받은 아내는 무던히도 그를 잘 도왔다. 천생연분이었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하늘이 맺어준 배필이라 한다. 아니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2-3개월이 지나자 매일 40여명의 환자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문제는 멀리서 카누에 환자를 싣고 와서 대기하는 사람들의 숙소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환자들을 돌보는 와중에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그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으며, 파리 바하 협회에서 보내 준 열대용 오르간은 그의 음악에의 열정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였다.
 
      4. 생명에의 외경 -문화철학 사상-
      1914년 8월 5일에 유럽에서는 사상 초유의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알사스 출신인 그는 금족령을 받고 흑인 병사의 감시 하에 백인 및 원주민과의 접촉도 금지되는 상황에 놓인다. 이때 그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꿈에서 깨어난다. 여기서 그는 이 전쟁을 통해 현대문명의 퇴폐와 인간성의 부활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의 유명한 「생명에의 외경사상」이 움튼 것도 이 무렵이었다. 생명을 유지시키고 이것을 촉진하는 것은 善이요, 생명을 죽이고 파괴하는 것은 악이다. 개인이나 사회가 이런 생명에의 외경이라는 윤리관에 의해 지배되는 곳에 문화의 근본이 있다는 생각에 미쳤을 때, 그는 황홀한 감격을 맛보게 된다.
 
      그렇다면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의 본질 하면 우선 개인이나 사회의 윤리적 완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모든 정신적, 물질적 진보도 문화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문화에의 의지는 윤리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의식하는 보편적인 진보 의지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식과 능력이 이룩해 놓은 업적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인류는 윤리적 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때에만 물질적 진보의 혜택을 충분히 누릴 수 있고, 또 거기에 수반되는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는 진보가 그 내재적 힘에 의하여 어떤 의미에서 자동적으로, 자연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라 믿었고 또 윤리적 이상 같은 것은 더 이상 필요 없고 오직 능력과 지식에 의해서만 전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류가 그 후 처하게 된 상황은 무서운 오류(誤謬) 에 빠져 있었음을 입증해 주었음을 슈바이쳐는 아프리카 오지(奧地), 그것도 포로의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혼돈의 세계에서 탈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 것이 그의 철학과 사상을 집대성한 소위 문화철학이다. 이미 그는 철학박사 학위논문,「칸트의 종교철학」으로서 주목받은 바 있지만, 세계와 인생의 긍정과 윤리를 포함하는 생명에의 외경사상을 '문화철학'에 전개시키고 있다.
그의 문화철학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제1부,「문화의 몰락과 재건」(1923):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비문화로부터 문화로 복귀할 수 있을까? 비윤리성은 그것을 부정하지만, 윤리적인 문화관은 낙관론과 비관론을 막론하고 문화의 몰락을 우려해야 할 상태로 본다. 이 경우에 문화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이며, 따라서 비문화에서 문화에로의 복귀가 가능하므로 문화의 몰락은 변화해서 항상 재생될 것이다. 문화의 재건에서 직시해야 할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의 실존적 철학의 배경이 우뚝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부,「문화와 윤리」(1923): 여기서 그는 유럽 철학의 위대성을, 낙관적이고 윤리적 세계관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인생의 의미를 세계의 의미로 보았기 때문에 낙관론적 윤리관을 모색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즉 인생관을 인생의 목적이나 가치 등에서 추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철학자들은, 세계관 속에서 인생관과 세계관을 동시에 추구하려 했기에 당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살려고 하는 의지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인생관을 주는 것일까, 그것은 살고자 하는 의지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살마저도 긍정적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에는 비관론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명의 외경은 자기를 자각함으로써 자아의 근거가 자기 자신임을 안다는 의미이다. 이 의지는 자기 자신 속에 세계와 인생과의 궁극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세계나 인생을 긍정함으로써 자기 생존의 의미가 자기의 내부에서 주어지고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결론적으로, 생명에의 외경은 세계와 인생에 대한 긍정과 윤리를 포함하고 있기에 개인이 세계에 대해 무관심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이 언제나 그를 둘러싼 모든 생명에 관계하고 그것에 책임을 느끼게 하고, 나아가서 인간만이 모든 생명 안에서 그 발전에 대해서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생명에의 외경>은 개인에게 인류가 행할 수 있는 모든 문화를 구상하고 의욕 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에 대한 외경심은 그 속에, 체념(諦念) 세계긍정(世界肯定), 인생긍정(人生肯定), 그리고 윤리(倫理)를 내포하고 있지만, 이 3자가 하나로 결합할 수 있는 세계관은 없지만 본질적으로 생에 대한 외경심이라는 보편적인 신념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
 
 
  Ⅲ. 에필로그
 
       그의 삶에는 두 가지 체험이 그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한다. 하나는 이 세상에는 말할 수 없는 신비(神秘)와 고뇌(苦惱)가 넘쳐흐르고 있다는 생각이고, 다음은 인류의 정신적 쇠퇴기에 그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두 가지 체험에 따라 생에 대한 외경심이라는 윤리적인 세계긍정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상적 바탕 위에서 그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헤겔(G.W. F. Hegel; 1770-1831)은 그의 주저 『법의 철학』(1821) 서문에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그가 그렇게 살았던 것이다. 지금껏 살펴보았던 슈바이쳐의 삶은, 한마디로 "고통받는 자에 대한 공감과 의무"라는 등식 아래, 기독교적 감정과 의식이 일관되어 흐르는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유년기에서부터 싹터왔던 기독교적 휴머니즘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소년 시절의 슈바이쳐는 목사의 딸인 어머니의 손을 잡고, 목사인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러 교회에 갔었다. 당시의 알사스 지방의 그리스도교는 종교개혁 이후의 자유, 관용, 실천의 정신이 넘쳤으며 카톨릭과 개신교의 화해가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이 지방의 성직자들은 대개가 민중 속에 파고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사고하고 실천하는 행동하는 양심들이었다. 어린 슈바이쳐가 처음으로 체험한 그리스도교의 정신이야말로 그의 의식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그가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세계에 대한 눈을 떴고, 자기의 사상세계를 구축하여 그 바탕 위에서 평생을 인류에의 봉사, 사랑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해 몸바친 것은 오늘날 현대인에 팽배한 물질만능, 자기위주의 개인주의, 사회적 폭력과 무질서에 얼마든지 경종을 울릴 수 있는 귀감이라 하겠다.
 
2000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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