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에 대한 개념(고전12;4-7)
“은사(카리스마타)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디아코니아)은 여러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에네게마타)는 여러가지
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파네로시스)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
라”(고전12;8-11)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
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성령으로 병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
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나누어 주
시느니라” 은사에 대한 개념이 오늘날까지 혼란된 이유는 용어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다
고전12;8-11에서 ‘어떤 이’에게 주어지는 것 9가지는 고정적으로 주어지는 디아코니아(직임)가 아니라 유동적으로 주어지는 파네로시스
(성령의 나타남)이다. 우리들이 주로 ‘은사’라고 불렀던 용어는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성령의 나타남’이라는 용어가 더 정확하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은사’라 부름으로 ‘직임’으로 주어지는 은사의 개념과 혼동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첫째 혼란의 한가지 원인은 롬12;6에 기록된 은사는 직임(디아코니아)을 말하는데 ‘예언이라는 은사가 여기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고전12;7
의 예언(파네로시스)와 같은 것으로 보았으며 은사의 분류를 ‘직임’과 ‘나타남’을 동일하게 보는 혼란이 일어나고 은사의 개념이 흐려졌다
초대 교회에서는 은사가 강하게 일어났고 또 이러한 은사 자들이 자신들의 은사를 직분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예언의 은사는 이러한 사역자체를 말하고 있으며 또는 직임을 가지고 사역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 12;7의 ‘성령의 나타남’을 고정적으로 나누어주는 ‘직임’과 같은 것으로만 생각하는 고정 관념의 틀에 박혀서 ‘은사’라고 불러
버리고 말았다
둘째 혼란의 이유는 고전12;28에 나오는 ‘병고치는 은사’‘방언’이라는 은사가 고전 12;7의 은사와 똑 같은 개념으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했
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여기에서는 뒤에 계속되는 고전12;30의 나오는 문맥을 보면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 ‘방언을 말하는 자’‘통역하는 자’라고 분명히 ‘직임(디아코니아)’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12;7의 은사(나타남)와 동일한 의미로 보았기 때문에 고전12:30 절의 다른 은사
즉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와 같은 고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고 고전 12;7의 ‘병고치는 은사’도 고정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성령이 계속적으로 역사하면 고정적으로 보이겠지만...
셋째 고전 12;31의 “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이 용어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큰 은사를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은 은사
를 주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성경 해석의 기본 원칙상 문자 적인 의미가 ‘나타남’이라면 문맥적으로나 성경 적인 전체 맥락에서도 일치해야 하는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교인들이 자신의 은사가 더 큰 은사라고 자랑하는 교인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서신을 보낸 뜻은 분명히 큰 은사 적은 은사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인데 어찌하여 이곳에서 큰 은사를 사용했을까? 어찌하여 모든 주석들은 한결 같이 큰 은사가 13장의 사랑이라고 주석하고 있거나 혹은 침묵을 지키고 있을까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수꺼기는 성령의 나타남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확증하기 어려운 문제 였습니다.
원어주석을 조사해 보아도 큰 은사로 주석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은 모두가 한결 같이 큰 은사로 표기하고 있으니 과연 나의 성경 해
석이 잘 못 되었는가 하고 이를 위해 고심하던 중 어느 날 새벽 예배를 위해 일어났지만 잠이 들깬 비몽사몽간의 순간에 번개처럼 지나가
는 빛은 ‘큰 은사’라는 용어의 “큰”이라는 단어는 “형용사가 아니라 부사다”라는 말씀으로 내 심령에 크게 들리는 것입니다
벌떡 일어나 성경을 다시 읽어보니 그것은 분명 형용사로 기록은 되었지만 우리들이 일상 생활 가운데서 그런 용법이 얼마나 흔하게 사
용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자로 기록하는 표기법은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구어 법과 다를 때가 많다 우리는 뜨거운 것을 먹으면서도 ‘시원하다고 말할 때가 많은 것이다
‘큰 사람이 되라’하는 말은 키 큰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뜻을 높이 세우고 ‘크게 살아가라’라는 거와 같이 ‘너희는 더욱 은사를 크게
사모하라 그리하면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보이리라’ 이렇게 해석하면 전후 문맥에도 일치하고 고전 12장의 개념과도 성경 전체의 개
념에도 일치하며 ‘성령의 나타남’이라는 개념과도 일치한다
여기서는 형용사 용법으로 사용되었지만 ‘큰’은 형용사가 아니라 ‘크게’라는 부사라야 됩니다 ‘큰’이라는 헬라어의 원어인 ‘메이조나’가 어디에서 또 사용되었나 조사하니 이와 같이 사용된 원어는 마태복음 20;31에서 바디메오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에서와 같이 부사로 사용된 곳이 있으니 더욱 분명해 졌습니다
헬라어 사전 “The Greek New Testment, Dictionary third edition. United Bible Societies” no 3187에 분명히 meizon; adv all the more 더욱 크게라는 비교급이나 최상급으로 설명하고 있고 AConcordance to the Greek Testament 에서도 분명해 졌습니다
넷째 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고전 12;11절의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나니”라는 말은 은사가 주어지는 결정적인 개념으로 보이는데 ‘그 뜻대로 나눠주시는 것’이라는 11절의 뜻이 ‘성령의 나타남’과 어떻게 일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언어(言語)와 문자(文字)는 항상 양면성을 가진 용어가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절대적인 주권 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지만 인간 편에서 보면 ‘순종’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눠주는 것은 성령님의 입장에서는 나눠주는 것이요 나누어주시는 것을 받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나타남’인 것입니다
‘주어지다’의 헬라어 ‘디도타이(didotai)’는 현재의 계속적인 긴장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즉 성령의 나타남은 단 한번 주시는 것으로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상태로 주어진다는 것이다(아놀드 비틀링거著정인찬 조원길
공역“은사와 은혜” 기독지혜사 1982년판 25p)
그러므로 항상 주어진 고정적인 상태의 이미 주어진 은사의 개념이 아니고 각 사람의 영으로부터 ,혼을 통하여, 육신을 뚫고 외적으로 나
타나는 개념으로 이해되기 위하여 위의 네 문제가 다 해결되어야 하는데 우리들이 주로 ‘은사’라고 부르는 고전12;7의 ‘성령의 나타남’이
란 것은 분명 한사람에게 한번 주어지면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어떤 영적 조건과 상태에서 유동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 분명해 졌습니다
안개 속에서 안개가 걷히고 은사(나타남)의 개념은 분명해진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은사라고 하는 고린도 전서12:7의 은사는 특별하게 어
떤 사람에게만 고정적으로 주어진 “디아코니아”가 아니라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내주 하시는 성령께서 인간의 영과, 혼과, 육
신을 뚫고 수시로 나타나기도 하며 때로는 소멸되기도 하는 “파네로
시스”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이 나타나시는 이러한 현상들을 통하여 과거에는 특별하게 기름 부으신 선지자를 통하여 여러 가지 하나님의 신비
와 능력을 나타내시고 신약에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는 택하신
족속이요 제사장들이며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성령을 통하여 누구든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말
씀과 능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초기에는 하나님의 신의 감동이나 이상들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났고 이러한 하나님의 신에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
은 일반적인 사람들을 초월하는 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신령한 사역들을 감당하여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능력자가 되기도 했고 예레미아와 미가와 사무엘과 같은 선지자가 되기도 하고 요셉과 다니엘과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축복의 사람이 되기도 했다
나중에는 이것이 제도적으로 기름 붓는 의식을 통하여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와 같은 직책을 부여했다 이렇게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만 나타내시던 내적인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한 성령의 나타남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고서 성령을
소멸치 않은 신약의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다 이 성령의 나타남이 있게 되어 있고 또 나타나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하
나님의 일군이 됩니다
성령이 나타내시는 여러 가지 신령한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이 하는 사역은 인간이 하는 사역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도 없고 사람을 변화시키지도 깨닫게도 할 수 없습니다 성령만이 하나님께로 인도 할 수 있고 성령만이 율법을 지
킬 수가 있고 성령과 더불어 하는 사역 즉 성령이 나타나는 사역만이 참되고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참된 사역입니다(엡3: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
로 주안에 거하라
고전12:7절의 “성령의 나타남’은 각 사람의 영적 기질과 영성에 따라‘나타남’의 형태나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요 우리들의 심령의 영적
인 어떤 조건과 상태 하에서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요 목회선상의 실제 경험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성경 해석학 상에도 문제가 없으며 실제적인 여러 현상들과도 일치하며 문자적, 역사적, 성경적, 신학적인 종합적 해석에도 전혀 하자가
없음이 분명해 졌고 모든 맥은 뚫렸으며 해답은 주어 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사는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
하여 주시는 것”이라는 정의는 잘못 되었으며 성령이 임재 하시고 내주 하신다면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당연히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와 같이 은사에 대한 개념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성령의 나타남을 제한해 왔고 은사를 받고도 의식하지 못하거나 활용
한다는 생각이나 개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 성경적이라고 까지 생각해 오기도 했다
그러므로 먼저 용어의 개념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은사가 무엇인가? 분명한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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