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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에밀 졸라 -나는 고발한다.

by 이덕휴-dhleepaul 2018. 2. 16.

에밀 졸라

19세기 프랑스의 문호

[Émile François Zola, Emile Zola]

출생 - 사망1840.4.2. ~ 1902.9.29.

1898.1.13 간첩 누명을 쓴 유대인 군인이 무죄라고 신문에서 폭로하다

“대통령 각하, 저는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정식으로 재판을 담당한 사법부가 만천하에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제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제 의무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공범자가 된다면, 앞으로 제가 보낼 밤들은 유령이 가득한 밤이 될 겁니다.

가장 잔혹한고문으로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속죄하고 있는 저 무고한 사람의 유령이 가득한 밤 말이지요. 대통령 각하, 정직하게 살아온 한 시민으로서 솟구치는 분노와 더불어 온몸으로 제가 이 진실을 외치는 것은 바로 당신을 향해서입니다. 저는 명예로운 당신이 진실을 알고도 외면하지는 않았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 13일 <로로르(여명)>지에 발표한 격문 ‘나는 고발한다!’의 일부다. 졸라는 이 격문을 통해 독일 간첩누명을 쓰고 투옥됐던 유대인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임을 격정적으로 밝히고 있다.

유대인 군인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고 "나는 고발한다."

1898년1월13일자 <로로르>지 1면에 게재된 공개 선언문

졸라는 이틀 전인 1월 11일, 분노에 찬 심정으로 격문 ‘나는 고발한다!’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드레퓌스 사건 에서 진짜 간첩임이 뒤늦게 드러난 에스테라지 소령이 무죄 석방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드레퓌스가 억울하다고 주장하며, 물증까지 내놓았던 피카르 중령까지 이날 투옥됐다. 프랑스 군부는 드레퓌스가 무죄임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들의 실수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판단해, 이렇게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격분한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를 순식간에 썼다.

처음에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란 제목으로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로로르>지의 편집장 클레망소가 ‘나는 고발한다!’로 바꿀 것을 권했다. 1면에 ‘나는 고발한다!’를 실은 <로로르>는 몇 시간 만에 30만부가 팔려나갔다. 이후 아나톨 프랑스, 에밀 뒤르켐, 마르셀 프루스트, 클로드 모네 등 예술가 과학자 교수들이 드레퓌스 사건 재심 청원서에 서명했다. 드레퓌스 재심 운동은 다시 활화산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진실은 밝혀지기까지 대가를 요구한다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란 격문을 발표하기 전에도, 후에도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 관련 글들을 처음에는 당대 최고 신문이었던 <르 피가로>를 통해 발표했다. 그러나 이 신문의 보수적인 독자들은 구독 해지 운동을 펼치며 신문사에 압력을 가했다. 결국 신문사 편집진은 에밀 졸라의 글을 실을 수 없다고 했다. 졸라는 더 이상 신문에 글을 싣지 않고 팸플릿으로 제작하여 판매를 시작했다.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프랑스에 보내는 편지’ 등이 그가 직접 제작해서 판매한 팸플릿용 글이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내 글을 싣겠노라고 용기 있게 나서는 신문 매체가 전무한데다가 나 역시 절대적 자유를 원했기 때문에, 나는 일련의 팸플릿을 제작해서 캠페인을 어어 나갈 계획을 세웠다.”

에밀 졸라를 압박한 프랑스 정보, 징역형에 훈장 박탈까지

졸라는 당대 최고 인기 작가이자 대문호로 칭송 받았지만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한 뒤 엄청난 고난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이 글은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퍼져있던 프랑스 사회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대중들의 심리를 반영한 듯 프랑스 의회는 서둘러 졸라를 기소하기로 결정했다. 1898년 7월 베르사유 중죄재판소는 졸라에게 징역 1년에 벌금 3천 프랑을 선고했다. 그리고 선고 당일 졸라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을 떠났다. 선고 며칠 후 프랑스 정부는 그의 레지옹 도뇌르 수훈자 자격도 박탈했다. 이후 1899년 6월 졸라는 영국에서 돌아왔으나, 불과 3년 뒤인 1902년 9월 30일 가스 중독 사고로 사망했다. 드레퓌스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진실’을 쓰기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한 채였다. 드레퓌스는 졸라가 사망한지 4년이 더 지난 1906년 7월 13일 복권됐다.

<분노에 찬 군중들에 둘러싸인 졸라>앙드 드 그루 작(1898년)

진실을 밝히는 일은 근대 민주 국가로의 통과 의례

졸라와 드레퓌스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마치 한국의 8,90년대를 보는 듯하다. 비단 1991년에 있었던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뿐 아니라, 수많은 간첩조작사건,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의문사 사건들을 보면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이 곧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건너가는 과정임을 알게 된다. 드레퓌스 사건이 1894년부터 1906년까지 12년에 걸쳐 진행된 것인 반면,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평가 받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1991년에 일어나 2006년 ‘유서대필 아니다’라고 결정하기까지 16년이 걸렸다. 프랑스 사회는 12년에 걸친 드레퓌스 사건을 겪으면서, 봉건 보수 세력과 공화 진보 세력의 쟁투를 지켜봤다. 유대인이란 ‘다른 존재’에 대한 인정,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 한국 사회에 대입하면 한국사회도 8,90년대를 겪으면서 전근대사회에서 현대민주사회로의 이행과정을 체험했다고 할 수 있다. 좌우격돌을 겪으면서도 다른 생각, 다른 이데올로기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왔다. 그런 점에서 드레퓌스 사건은 한 국가가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겪을 수 밖에 없는 통과의례란 측면을 가지고 있다.

19세기 프랑스 소설 시대를 열다

가난하고, 버림 받은 자들의 생을 이해하고, 대변했던 작가 에밀 졸라

졸라는 1840년 4월 2일 이탈리아인 아버지 프란체스코 졸라와 프랑스인 어머니 에밀리 오베르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졸라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포병대에서 근무했다가 프랑스로 옮겨와 살았다. 아버지는 유능한 토목기사였는데, 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에서 운하건설을 맡게 되자 졸라의 가족은 1842년 그곳으로 이사했다. 졸라는 그곳에서 18살까지 살다가 1858년 파리로 옮겨와 생루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라는 1859년 대학입학자격시험에 실패했는데, 곧 시인이 되기 위해 습작을 시작했다. 졸라는 3년 후에 출판사 직원이 되는데, 이 해에 첫 단편집인 <나농에게 주는 이야기>도 펴내면서,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더불어 같은 해에 졸라는 프랑스 시민으로 귀화한다. 다시 3년후 출판사를 그만 둔 졸라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면서 전업작가의 길로 나선다.

졸라 문학의 핵심이랄 수 있는 <루공마카르> 총서는 1871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했다. 모두 20권이 출간된 <루공마카르> 총서 중에서 <목로주점>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졸라는 유명 작가로 자리잡는다. 이어 출간된 <나나> <제르미날> 등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졸라는 당대 최고 인기 작가가 된다.

졸라는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주자로 평가 받는다. 샤토브리앙, 위고,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등과 함께 19세기 프랑스 소설 시대를 연 대표적인 소설가 중 한 사람이다. 이른바 ‘소설의 시대’라 불리는 19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우리가 ‘로망(roman)’ 이라고 부르는 장편소설의 대미를 장식한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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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

 

1894년 9월,유태계 프랑스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군 참모본부로부터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스파이 누명을 쓰고 재판에 회부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1895년 2월 아프리카 기아나의 적도 해안에 있는 '악마도'라는 외딴 섬으로 끌려갔다.

 

4년이 넘는 세월을 이 악마도의 형무소에 갇혀서 보내는 사이에 드레퓌스사건은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보고되면서,프랑스 전체, 나아가 전세계를 경악케 한 대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참모 본부는 계속해서 진실을 은폐하려 했고.유태인의 음모를 경고하고 군의 위신을 존중하자고 주장했다. 드레퓌스의 논란이 진행되면서 세계의 지식인들이 드레퓌스에게 지지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아직 드래퓌스의 미래는 여전히 먹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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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897년 1월 13일, 절망의 분위기를 일거에 몰아내는 대폭풍우가 몰아쳤다. 정치가 클레망소가 운영하는 신문인 <로로르>지에 대문호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논설을 실은 것이다. 그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의 이 논설을 하루 밤 하루 낮, 그리고 또 하루 밤을 꼬박 새워 썼다.

 

이 글의 막강한 호소력은 협잡과 혼란, 날조와 비방의 연막을 걷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는 드레퓌스가 결백하고 에스테라지가 진범인 이유를 구체적인 사실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밝힌 다음, 드레퓌스를 죄인으로 만들어 군부의 과실을 은폐하려 한 참모 본부 무리들과 국방부의 장군들, 엉터리 증언을 한 필적 감정 전문가,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한 첫번째 군사 재판 및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한 두번째 군사 재판을 무섭게 질타하였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조금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거듭 말합니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음을! 진실이 지하에 묻히면 자라납니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것입니다.

 

내가 취한 행동은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서두르기 위한 혁명적 조치입니다. 그처럼 많은 것을 지탱해왔고 행복에의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인류의 이름에 대한 지극한 정열만이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내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이 외침으로 인해 법정으로 끌려간다 해도 나는 그것을 감수할 것입니다. 다만 청천백일하에 나를 심문하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신문이던 <로로르>지는 이날 무려 30만 부나 팔려나간다. 세계 각지에서 3만 통의 편지와 전보가 날아와 졸라의 호소를 환영했다. 미국의 마크 트웨인은 <뉴욕 헤럴드>지를 통해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졸라를 향한 존경과 가없는 찬사에 사무쳐 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프랑스는 국제적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만일 드레퓌스가 범죄자가 아니라면 그를 죄인으로 몰고간 참모 본부와 국방성, 군사 법원이 범죄자가 될 판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각지에서는 대규모의 군중이 "졸라를 죽여라!" "유태인을 죽여라!" "군대 만세!"를 외치면서 폭동을 일으켰다. 수많은 유태인이 살상당하고 유태인 상점이 짓밟혔다.

 

재심 반대파의 선동에 흥분한 부랑한 하층 계급이 폭동의 선두에 섰다. 그야말로 집단적인 정신적 광란이었다. 졸라의 집으로 흥분한 군중이 몰려가 돌을 던졌다. 그러나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양심적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졸라에게 보내는 찬사를 성명서로 만들어 서명을 했다. 사람들은 일상 생활을 내팽개쳤다.

 

책도 읽지 않았으며 극장에도 가지 않았다. 신문을 읽고 말다툼을 벌이고 주먹다짐을 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가 되었다. 즉 프랑스라는 드라마의 무대에서 전 세계의 문명인들이 관객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은 스스로 배우가 되었던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의 열병이 전국을 휩쓰는 가운데 에밀 졸라는 군법 회의를 중상 모략했다는 죄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프랑스는 다시 한 번 국제적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발작적인 반유태주의의 물결에 위협을 느낀 졸라는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영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이윽고 프랑스 곳곳에서 유태인 상점에 대한 불매 운동이 조직되었다.

 

재심 요구파에 가담한 교수들은 대학에서 쫓겨났고 드레퓌스를 두둔한 정치가는 다음 선거에서 대부분 낙선했다. 곳곳에서 결투가 벌어졌다. 열병은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1898년 8월 30일,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 사태를 한걸음 더 나아가게 했다. 일찌기 피카르 중령을 모함하기 위해 에스테라지와 짜고 문서를 날조했던 참모 본부의 앙리 중령이 진상이 발각될 위기에 몰린 나머지 면도날로 목을 찔러 자살한 것이다. 이로써 참모 본부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재심 요구파는 유리한 국면을 맞이했다.

 

그러자 '군국주의자와 반유태주의자들의 영웅' 에스테라지는 재빨리 영국으로 도망쳤다. 뿐만 아니라 런던의 한 출판사에서 돈을 받고 자신의 이야기를 출간했다. 자신은 이중 첩자로서 상부의 명을 받고 독일의 기밀을 탐지하기 위해 독일 무관에게 접근했노라는 것이 내용이었다.

 

파리의 신문들은 일제히 참모 본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재심은 이제 불가피해졌다. 마침내 1899년 6월 3일, 고등법원은 1894년 12월의 재판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재심을 명령했다.

 

그러나 아직도 승리의 길은 머나먼 가시밭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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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

 

1894년 9월 어느 날, 프랑스의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훔쳐낸 한 장의 편지를 입수했다. 그 편지의 수취인은 독일 대사관 무관인 슈바르츠코펜이었고 발신인은 익명이었으며, 내용물은 프랑스 육군 기밀 문서인 '명세서'였다.

 

스파이 활동의 거점인 독일 대사관을 감시하고 배반자를 색출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참모 본부는 '명세서'를 작성한 사람이 참모 본부 내에 있는 자이거나 최소한 그런 자와 가까운 연관을 가진 인물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수사를 시작했다.

 

시민 혁명의 대명사인 '프랑스 대혁명'의 나라, 인류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가져다준 민주주의의 본고장 프랑스에, 엄청난 불명예와 아울러 내전을 방불케 하는 사회적 갈등을 휘몰고 온 드레퓌스 사건은 이처럼 은밀하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알프레드 드레퓌스라는 한 평범한 유태인 장교에 대한 부당한 박해로써 프랑스인 전체를 대립하는 두 진영으로 분열시킨 후 마침내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실과 양심이 거짓과 음모를 굴복시키는 거대한 드라마로 종결되었다.

 

드레퓌스는 독일 국경 가까운 알자스 지방 밀조우에서 방직 공장을 경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 그런데 그가 11살 되던 1870년, 보불 전쟁에서 프랑스가 비참하게 패배함으로써 알자스는 독일 영토로 병합되고 말았다.

 

 

이때 그는 정치가 개인의 삶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치며, 또 때로는 불의가 정의를 누를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으며 가족들도 기꺼이 그의 뜻에 찬동했다. 드레퓌스는 말수가 적고 성실한 타입의 인간이었지만 약간은 재미가 없고 고지식한 성격이기도 했다.

 

그는 학교 생활과 군 생활에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여러가지 차별과 모욕을 당했지만 조국 프랑스에 대한 사랑과 군에 대한 충성심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고, 마침내 프랑스군 참모 본부의 수습 참모로 등용됨으로써 착실히 군인의 길을 밟아나갔다.

 

그는 31세 된 1890년에 대위가 되었으며 '뤼시 아다마르'라는 유태인 여성과 결혼했다. 가냘프고 온순하면서도 강인한 성격의 뤼시는 고지식한 드레퓌스를 매우 편하게 해주는 정숙한 아내였으며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았다. 이렇듯 드레퓌스 일가는 매우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프랑스군 참모본부가 이 평온한 가정을 절망의 낭떠러지로 밀어넣고 말았다.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것과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스파이로 지목해버렸다.

 

물론 이같은 판단에는 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제일 먼저 유태인에 대한 법률적 차별 대우를 폐지한 나라였지만 반유태주의자들은 사회 각계 각층 속에 뿌리깊게 존재했고, 특히 군부와 같은 보수 집단 안에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명세서'의 필적은 드레퓌스의 것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자 평소 공공연하게 반유태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신문들이 이 사건을 터뜨렸다. 참모 본부의 장교가 반역죄를 범하여 체포된 사건을 공개하라고 들고나선 것이다.

 

 

드레퓌스에 대한 온갖 날조된 혐의와 근거없는 추측, 그가 했다는 스파이 행위에 대한 터무니없이 과장된 소문들이 연일 신문지상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었다. 만일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참모 본부의 체면이 땅에 떨어질 형국이었다.

 

마침내 드레퓌스는 1894년 12월, 군사법정의 비밀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참모 본부의 상관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사태를 빨리 수습하는 데 혈안이 되어 여러가지 문서를 날조하여 유죄의 증거로 제출한 다음, 그가 그것에 대해 진술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재판을 끝내버렸다.

 

반유태주의 신문들은 "드레퓌스는 프랑스 국민을 파멸시키고 프랑스 영토를 차지하려는 국제적 유태인 조직의 스파이"라고까지 주장하면서 사형을 요구했다. 참모 본부는 "국가 안보를 위해서 증거를 공개할 수는 없지만 대역죄인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는 간단한 설명으로 확실한 증거의 공개를 요청하는 일부 양식있는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그래도 수긍하지 않는 변호사들에게는 "이것은 중대한 군사 기밀이기 때문에 만일 공개할 경우 독일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엄청난 거짓말로 협박했다. 아무튼 드레퓌스는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지만 유죄를 선고받았고 수많은 군중이 보는 가운데 불명예 퇴역식을 치르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

 

1895년 2월 21일 밤, 드레퓌스는 아무도 모르게 아프리카 기아나의 적도 해안에 있는 '악마도'라는 외딴 섬으로 끌려갔다. 그는 사람 키의 두 배나 되는 높은 담장이 두 겹으로 둘러싼 조그만 돌감방에 혼자 수감되었는데 스물네 시간 감시를 받는 것은 물론이요, 밤에는 두 발에 두 겹의 족쇄까지 채워져야 했다.

 

살인적인 무더위와 이토록 비인간적인 감금 상태에서 그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자살에의 유혹과 싸웠다. 아내 뤼시의 흔들리지 않는 사랑과 믿음만이 유일한 희망이요 위안이었다.

 

무죄라는 그의 호소는 절실했지만 무심한 세상 사람들은 드레퓌스를 잊어버렸다. 나중에는 가족과의 편지 왕래마저 금지되었다. 아내 뤼시와 형 마티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함께 유배지에서 살게 해달라는 뤼시의 청원도 기각되었다.

 

그는 1899년 6월, 재심 판결이 나올 때까지 4년이 넘는 긴 세월을 이 악마도의 형무소에 갇혀서 보내야 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사이에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전체, 나아가 전세계를 경악케 한 대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재판이 끝난 지 15개월이 흘러 대다수의 프랑스인들이 드레퓌스라는 이름조차 잊어버린 1896년 3월, 참모본부 정보국의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 또다른 스파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드레퓌스 사건의 서류철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는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보병 대대장인 에스테라지 소령의 필적과 똑같다는 사실이었다. 피카르 중령은 드레퓌스와 군사 전술학교 동창생으로서 정의감과 책임감이 매우 강하고 영민한 장교였다.

 

그는 이 엄청난 진상을 상부에 보고하면서 에스테라지를 체포하고 드레퓌스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그의 상관들은 자신과 참모 본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드레퓌스 사건을 그대로 묻어두기를 원했다. 그는 칭찬 대신 질책을 받았다.

 

피카르 중령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곧 휴가를 얻어서 변호사를 만나 이 사실을 알렸고, 이것은 다시 한 상원의원에게 전해졌다. 만일 피카르 중령이 진실을 발견했을 때 참모 본부 지휘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했더라면 반역자 에스테라지가 체포되고 드레퓌스라는 한 무고한 장교는 명예를 회복하는 것으로 사건은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군부의 위신을 국가 안보와 동일시한 군 고위층의 어처구니없는 아집과 독선 때문에 사건은 눈사태처럼 커져갔다.

 

드레퓌스 대위의 형인 마티외는 필사적이었다. 그는 마침내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할 분명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따라서 일부의 의혹을 일소하기 위해 그 증거를 공개하자"는 속임수 기사를 한 신문에 싣게 하는 데 성공했다.

 

아내 뤼시는 남편이 비밀 군사 법정에 제출된 증거를 보지도 못한 채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다시금 드레퓌스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에 대한 논란이 재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변호사와 상원의원은 진상을 밝힐만한 용기가 없었다. 자신이 유태인과 한통속이라는 비방과 모략을 받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그러던 중 참모 본부의 입장을 옹호하며 드레퓌스를 비난하는 데 앞장섰던 <르 마탱>지가 특종을 터뜨렸다. 문제의 '명세서' 사본을 입수하여 신문에 게재한 것이다. 사태는 심각해졌다.

 

독일 무관 슈바르츠코펜은 '명세서' 사본을 보고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사실 그 사본은 슈바르츠코펜의 손에 들어오기 전에 참모 본부 정보국 요원에게 도난당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명세서'를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 필적이 에스테라지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첩자의 이름을 알려줄 수는 없었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에스테라지는 초조해졌다. 그는 외관상 훌륭한 군복무 기록에도 불구하고 스파이 노릇을 하거나 돈 많은 미망인을 꼬드겨 만든 돈으로 사치와 방탕을 즐기는 비열한이었다. 그는 자신의 범행이 탄로나지 않도록 온갖 음모를 꾸미고 다녔다. 참모 본부는 진상을 알면서도 에스테라지와 한통속이 되어 계속해서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명세서'가 드레퓌스의 필적과 다르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갔고, 에스테라지와 개인적인 교분이 있는 한 증권 브로커가 형 마티외를 찾아가 '명세서'의 필적이 에스테라지의 것임을 알려주었다. 마티외는 즉시 에스테라지를 범인으로 고발했다. 그러나 군 당국은 조사를 시작하고서도 질질 끌기만 할 뿐 그를 구속하지 않았다.

 

 

신문지면에서는 불꽃튀는 논쟁과 갖가지 추측, 허위 보도들이 활개치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신문들은 당국을 두둔했다.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 요구는 군부, 그리고 궁극적으로 프랑스를 파멸시키려는 유태인 조직의 국제적 음모이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군부의 위신과 신망을 실추시켜서는 안되고, 유태인은 군과 공직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편파 보도 속에서도 최초로 드레퓌스가 결백하고 에스테라지가 진범임을 주장한 한 신문이 있었다. <르 피가로>지였다. 하지만 그 소리는 반유태주의 신문의 아우성에 묻혀버렸다. 에스테라지는 하루종일 신문사에 들어앉아, 있지도 않은 국제적 유태인 조직에 대한 날조된 정보를 끝없이 흘려보냈다. 하원은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어지럽히는 악질적인 선동꾼들을 발본색원하자고 결의했다.

 

에스테라지는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재판부는 만장일치로 그의 간첩죄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오히려 피카르 중령이 변호사에게 군사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것은 즉각 전세계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전 유럽의 신문들은 "이제 프랑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애도했다. 드레퓌스를 옹호했던 유명한 정치가인 '호랑이' 클레망소는 이 신문들을 읽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자유와 지성의 나라 프랑스는 전세계의 조소를 한몸에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한 젊은 신문기자는 "사기꾼들이 사기를 예찬했고 협잡꾼들은 협잡 기념비를 세웠다"고 개탄했다.

 

프랑스 국민은 둘로 갈라졌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심 요구파와 재심 반대파가 그것이다. 공화제와 프랑스 혁명의 이념에 반대하는 왕정복고주의자와 옛 귀족들, 드레퓌스를 감옥으로 보낸 군부, 반유태주의에 몰두한 과격 가톨릭주의자, 보수적인 정치인들, 군국주의자들 및 이들과 연계된 신문들이 재심 반대의 깃발으 높이 들고 군중을 선동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유태인의 음모를 경고하고 국가 안보를 위해 군의 위신을 존중하자고 주장했다. 양심적 지식인과 법률가들, 공화주의자와 일부 진보적 정치인들, 소수의 신문이 재심 요구파를 이루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 사건을 유산 계급 내부의 투쟁으로 보고 구경만 하던 사회주의자와 노동자 계급이 뒤늦게 여기에 가담하였다.

 

미국, 러시아, 유럽 등 세계의 지식인들도 지지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아직 재심 요구파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드레퓌스의 미래는 여전히 깜깜한 먹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1897년 1월 13일, 절망의 분위기를 일거에 몰아내는 대폭풍우가 몰아쳤다. 정치가 클레망소가 운영하는 신문인 <로로르>지에 대문호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논설을 실은 것이다. 그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의 이 논설을 하루 밤 하루 낮, 그리고 또 하루 밤을 꼬박 새워 썼다.

 

이 글의 막강한 호소력은 협잡과 혼란, 날조와 비방의 연막을 걷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는 드레퓌스가 결백하고 에스테라지가 진범인 이유를 구체적인 사실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밝힌 다음, 드레퓌스를 죄인으로 만들어 군부의 과실을 은폐하려 한 참모 본부 무리들과 국방부의 장군들, 엉터리 증언을 한 필적 감정 전문가,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한 첫번째 군사 재판 및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한 두번째 군사 재판을 무섭게 질타하였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조금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거듭 말합니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음을! 진실이 지하에 묻히면 자라납니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것입니다.

 

내가 취한 행동은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서두르기 위한 혁명적 조치입니다. 그처럼 많은 것을 지탱해왔고 행복에의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인류의 이름에 대한 지극한 정열만이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내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이 외침으로 인해 법정으로 끌려간다 해도 나는 그것을 감수할 것입니다. 다만 청천백일하에 나를 심문하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신문이던 <로로르>지는 이날 무려 30만 부나 팔려나간다. 세계 각지에서 3만 통의 편지와 전보가 날아와 졸라의 호소를 환영했다. 미국의 마크 트웨인은 <뉴욕 헤럴드>지를 통해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졸라를 향한 존경과 가없는 찬사에 사무쳐 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프랑스는 국제적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만일 드레퓌스가 범죄자가 아니라면 그를 죄인으로 몰고간 참모 본부와 국방성, 군사 법원이 범죄자가 될 판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각지에서는 대규모의 군중이 "졸라를 죽여라!" "유태인을 죽여라!" "군대 만세!"를 외치면서 폭동을 일으켰다. 수많은 유태인이 살상당하고 유태인 상점이 짓밟혔다.

 

재심 반대파의 선동에 흥분한 부랑한 하층 계급이 폭동의 선두에 섰다. 그야말로 집단적인 정신적 광란이었다. 졸라의 집으로 흥분한 군중이 몰려가 돌을 던졌다. 그러나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양심적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졸라에게 보내는 찬사를 성명서로 만들어 서명을 했다. 사람들은 일상 생활을 내팽개쳤다.

 

책도 읽지 않았으며 극장에도 가지 않았다. 신문을 읽고 말다툼을 벌이고 주먹다짐을 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가 되었다. 즉 프랑스라는 드라마의 무대에서 전 세계의 문명인들이 관객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은 스스로 배우가 되었던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의 열병이 전국을 휩쓰는 가운데 에밀 졸라는 군법 회의를 중상 모략했다는 죄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프랑스는 다시 한 번 국제적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발작적인 반유태주의의 물결에 위협을 느낀 졸라는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영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이윽고 프랑스 곳곳에서 유태인 상점에 대한 불매 운동이 조직되었다.

 

재심 요구파에 가담한 교수들은 대학에서 쫓겨났고 드레퓌스를 두둔한 정치가는 다음 선거에서 대부분 낙선했다. 곳곳에서 결투가 벌어졌다. 열병은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1898년 8월 30일,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 사태를 한걸음 더 나아가게 했다. 일찌기 피카르 중령을 모함하기 위해 에스테라지와 짜고 문서를 날조했던 참모 본부의 앙리 중령이 진상이 발각될 위기에 몰린 나머지 면도날로 목을 찔러 자살한 것이다. 이로써 참모 본부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재심 요구파는 유리한 국면을 맞이했다.

 

그러자 '군국주의자와 반유태주의자들의 영웅' 에스테라지는 재빨리 영국으로 도망쳤다. 뿐만 아니라 런던의 한 출판사에서 돈을 받고 자신의 이야기를 출간했다. 자신은 이중 첩자로서 상부의 명을 받고 독일의 기밀을 탐지하기 위해 독일 무관에게 접근했노라는 것이 내용이었다.

 

파리의 신문들은 일제히 참모 본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재심은 이제 불가피해졌다. 마침내 1899년 6월 3일, 고등법원은 1894년 12월의 재판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재심을 명령했다.

 

드레퓌스는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아직도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는지 의아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대서양을 횡단하여 브르타뉴의 군형무소로 돌아왔다. 졸라도 망명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했으며, 또한 피카르 중령도 감옷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아직도 승리의 길은 머나먼 가시밭길이었다.

 

재심이 시작되었다. 드레퓌스는 단지 자신이 죄가 없다는 것밖에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변호사 라보리는 법정으로 가는 길에 괴한의 저격을 받아 부상했고 참모 본부의 상관들은 거짓말을 계속했다. 군사 법정의 심판관들은 '정상 참작'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에게 금고 10년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표결의 결과는 5:2로 유죄였다.

 

졸라는 다시 한번 펜을 들었다.

 

"이것이 정상 참작이란 말인가? 이것은 피고에 대한 정상 참작이 아니라 심판관들에 대한 정상 참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정상 참작을 한 것이다. 이같은 결정은 그들이 규율과 양심 사이의 타협을 했다는 고백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정의를 구현하려는 외침은......머지않아 온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내일이면 세계 각국의 국민들이 어안이벙벙해져서 물을 것이다..... 프랑스는 어디에 있는가? 프랑스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러면 훌륭한 병사 외에는 아무도 "내가 여기 있다"고 대답할 권리가 없을 것이다."

 

사실이었다. 전세계의 프랑스 대사관 앞에는 항의 군중이 몰려들었고 이듬해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 박람회를 보이코트하자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모든 것에 대한 보이코트 결의가 곳곳에서 채택되었다. "범죄자는 드레퓌스가 아니라 프랑스다"라는 사설들이 세계 언론을 장식했다.

 

장 조레스, 클레망소 등 진보적인 정치인의 맹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몰린 대통령은 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를 특별 사면시켰다. 그는 자유를 되찾았고 아내 뤼시를 포옹했다. 졸라는 라보리에게 이렇게 써보냈다. "싸움은 이미 끝났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들은 이제 지저분한 방법으로 정직한 사람과 도둑에게 똑같은 특별 사면을 내린 것입니다."

 

드레퓌스가 특사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동안 진실의 승리를 위해 싸워온 사람들은 실망했다. 그것은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피카르 중령까지 곤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수년간 계속된 소란에 지친 사람들은 이제 드레퓌스를 잊고 싶어했다. 방대한 저작과 위대한 행동으로 인해 영원한 세계인의 양심이라는 찬사를 받은 졸라는 1902년 우연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석탄 난로의 가스가 빠지지 않은 탓으로 잠자던 중 사망한 것이다. 타살의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아나톨 프랑스가 장례식 조사에서 말한 것처럼 그는 "프랑스의 사회 정의, 공화국의 이념, 자유로운 정신을 질식시키기 위해 손잡은 모든 폭력적 억압적 세력의 음모를 백일하에 드러냈다. 그의 웅변은 프랑스를 잠깨웠다", "운명과 그의 용기가 그를 높은 곳으로 밀어올려 그로 하여금 한 순간 인류의 양심이 되게 하였다".

 

드레퓌스는 <악마도 일기>를 출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졸라도 <진실>이라는 소설을 썼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책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그러나 그 어떤 책도 현실 그 자체보다 더 극적일 수 없었다. 드레퓌스는 1904년 3월, 재심을 청구했다.

 

그리고 1906년 7월 12일, 최고 재판소로부터 무죄 선고를 받아냈다. 사건의 막이 내린 것이다. "발표하면 독일과의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참모 본부가 그토록 외쳐온 '중대한 기밀 문서'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협잡과 음모를 위해 날조된 허위 증거 문서들만이 쓰레기더미처럼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졌을 뿐이다.

 

 

드레퓌스는 같은 해 7월 22일, 사관 학교 연병장에서 프랑스 육군 소령으로 복귀하는 의식을 치르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무개차에 올라타고 형 마티외와 아들 피에르를 양옆에 세웠다.

 

그들이 연병장을 나섰을 때 자발적으로 몰려든 20만 인파가 일제히 모자를 벗어들고 경의를 표했다. 창백한 드레퓌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손을 번쩍 들었다. "프랑스 만세! 진실 만세!", "드레퓌스 만세! 정의 만세!"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두 차례의 전투에 참가하여 중령으로 진급하였으며 1935년 7월 11일,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사망하였다.

 

조국 독일에 충성스러웠던 무관 슈바르츠코펜은 인간 드레퓌스의 고난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지만, 1917년 죽음이 임박했을 때는 프랑스 말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들아봐라 프랑스인들아,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 모두가 거짓이고 모략이다. 그에겐 티끌만한 잘못도 없다."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드레퓌스, 양심적이고 강직한 군인 피카르 중령, 진실의 승리를 향해 가시밭길을 택한 용기있는 지성인 에밀 졸라, 현명하고 정열적인 정치인 클레망소, 그리고 진실과 정의의 편에 서서 싸운 수없이 많은 이름없는 사람들, 해외에서 지원한 각국의 양심인들, 이들 모두는 사기와 협잡, 무지와 편견의 책동을 분쇄하고 프랑스 혁명의 정신과 공화제를 지켜낸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힘을 모아 쟁취한 드레퓌스 사건의 승리는 몇 가지 면에서 세계사적인 의의를 지닌다.

 

우선 거의 내전 상태를 방불케 한 극심한 사회적 갈등을 통해 프랑스인들은 신체의 자유와 공정한 재판 등 인권 존중의 가치를 몸으로 터득하게 되었다. 더욱이 군부의 이익과 위신을 국가의 이익 또는 국가 안보와 동일시한 군부와 군국주의자들을 굴복시킴으로써 정치에 있어서 민간 우위의 전통이 마련되었다.

 

동시에 이 사건은 양심적 지식인 집단이 주도하는 여론의 승리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 사건 이후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참여가 더욱 폭넓게 이루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행동하지 않는 지성은 참다운 지성이 아니다"라는 진리를 졸라는 모범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같은 교훈은 곧 전인류의 정신적 자산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크게 보아 대립하는 두 세계관의 대결이었다. 드레퓌스라는 특정한 인물, 혹은 에스테라지라는 악당의 존재가 이같은 대결의 본질적인 요소는 아닐 것이다.

 

재심 반대파는 주로 공화제에 반대하는 왕정복고주의자, 국가의 안전 보장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고 또 무시해야 된다고 믿는 군국주의자들 혹은 국가주의자들, 유태인의 음모로부터 조국 프랑스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축출하고 말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종 차별주의자 혹은 편협한 가톨릭주의자들, 어떤 형태의 사회적 갈등도 유해하다고 확신하는 대소유자 즉 자본가들이었다.

 

반면 재심 요구파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시민 혁명과 공화적의 정신 위에서만 국가의 번영과 안전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공화주의자와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들, 인권과 진실을 짓밟는 이상 정의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법률가들, 어떤 형태의 차별과 불평등에도 반대하면서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추구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재심 반대파의 세계관은 발전하는 역사를 거꾸로 되돌려놓으려 하고 인간을 사회와 국가의 주인이 아닌 종속물로 보는 반동적 세계관이다. 참모 본부와 국방성의 장성들, 에스테라지 같은 사람들은 이같이 퇴행적이고 사멸해가는 세계관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역사의 무대에서 약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패배했다.

 

반면 에밀 졸라와 피카르 중령, 클레망소와 변호사 라보리 등 역사의 무대에서 주역이 된 사람들은 진보적이고 성장해가는 세계관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승리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는 프랑스 조국 연맹과 프랑스 행동 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반유태주의, 군국주의자들과, 인권 옹호 연맹을 중심으로 하는 반군국주의, 반교권주의자들로 양분되었는데, 전자(前者)는 샤를 모라스가 창설한 <Action francaise>를 선봉으로 반동적인 민족주의자와 왕당파를 대변하는 반드레퓌스파이고, 후자(後者)는 장 조레스를 중심으로 연합 전선을 이룬 사회주의 연합의 선봉으로서 드레퓌스파였다.

 

구체적인 국가 공동체와 전통 및 질서에 충실하려는 전자와, 정의와 이성을 지상으로 삼는 합리주의적 입장에 섰던 후자의 싸움에서, 결국은 좌익이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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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에밀 졸라 [Émile François Zola, Emile Zola] - 19세기 프랑스의 문호 (인물세계사)

  


19세기 프랑스의 문호 에밀 졸라에 대해 다룬 전기영화로, 제 10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다.

꽤 훌륭하게 평가받고 있는 영화이지만, 문학과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지금껏 기피하고 있던 영화였다.

영화가 지나치게 문학적이거나 역사적인 성향이 강할 줄로만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영화는 에밀 졸라의 '작가'로서의 삶보다는 '인종차별'이라는 이유로 프랑스의 역사적인 사건 '드레퓌스 사건'의 희생양이 되버린 대위 '드레퓌스'의 석방을 위해 끝없이 투쟁하고, 정의를 구현시키기 위한 에밀 졸라의 노력에 대해 다룬 감동적인 휴먼드라마이다.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가난했던 에밀 졸라의 작가로서의 성장과정을 다루고 있지만, 영화의 대부분은 '드레퓌스 사건 진상규명'에 대한 에밀 졸라의 끝없는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밀 졸라 역을 맡은 '폴무니' 라는 배우의 열연과 함께 조연배우들의 연기도 괜찮은 편이다. 특히, '작가'의 전기영화인 만큼 다소 문학적일까봐 걱정을 하였지만, 정의를 향한 에밀졸라의 열정, 무죄 입증을 위해 끝없이 투쟁하는 드레퓌스와 아내의 모습 등등이 딱딱하지 않고 정감이 넘치게 잘 연출이 되었다.

특히, 졸라의 무덤을 찾는 드레퓌스의 마지막 장면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는 명장면이다.

 

 

 

영화의 주인공 '에밀 졸라'는 진실과 정의를 사랑하는 이상주의적인 사회주의자이다. 

에밀 졸라는 친구인 화가 지망생 '폴'과 함께 단칸방에서 함께 지내고 있으며 '파리'라는 대도시에 하루 하루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작가지망생이다.

비록, 둘은 방값도 제대로 못내는 신세이지만, 대도시 '파리'에서의 희망과 꿈을 간직하며 서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어느날, 에밀 졸라는 길을 가다 우연히 다리 밑의 부랑자들을 보게 되는데..

그는 파리의 어두운 면을 보고, 대도시의 어두운 면을 책을 써서 고발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서 쓴 책이 바로 '나나'라는 책이다.

'나나'라는 책으로 주인공 에밀 졸라는 순식간에 '부'와 '명성'을 얻게되지만..

당시 지배층에게는 대도시의 어두운 면을 그린 에밀 졸라의 책들은 환영 받을리가 없을터..

 

하지만, 정의를 사랑했던 에밀 졸라는 그들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계속 책을 써내려간다..

 

"졸라씨, 당신이 쓴 책은 언제나 말썽이군..

제 2제국을 비난했고, 제 3공화국도 비난했군..

'제르미날'은 수년간 광부들을 들끓게 한 책이지..

'나나'는 더럽고 잔인하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

 

"이런 책들은 국가의 불신을 야기한다네..

더이상 이런 책은 쓰지말게.. "

 

"자신이나 걱정하시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가 글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

 

에밀 졸라의 작가로서의 면모 뿐만 아니라, 정의를 사랑하는 이상주의자로서의 모습을 밀도있게 다룬 부분이다.

훈훈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대사들..

 

 

--------------------------------<수십 년후>-------------------------------

 

 

그 후 수십년이 지난 후..

졸라는 그동안 써온 수많은 걸작들로 '부'와 '명예'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부'와 '명예'를 거머쥔 그에게는 더이상 '정의'를 향한 이상주의자적 모습은 볼 수가 없었는데..

 

어느날, 수년간 단칸방에서 동고동락을 함께 하던 친구 '폴'을 만나게 되는데..

 

"폴.. 무슨 일인가? 말해보게.. 우린 오랜 친구잖나? "

 

"넌 이제 부자야...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지..

다락방에서 같이 시작한 그 시절보다 정말 출세했지..

그때는 위선자들의 책을 태우고, 진실된 우리를 따뜻하게 하자고 했었지..

나도 이따금 유혹에 빠진다네..

친구..

그렇게 되면 진실이 없어지지..

재능에도 기름이 끼게되면 끝장인거라네.."

 

"폴.. 떠나지말고, 나와 함께 해주게나..

무서울 것이 없던 과거의 나를.. 그 시절의 나를.. 기억나게 해줄 사람이 필요하네.."

 

폴은 부와 명예에 찌들려 진실과 정의를 갈망하고 투쟁하던 예전의 열정을 일어버린 졸라의 모습을 보고, 수년간 동고동락을 함께했던 절친한 벗으로서 졸라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해준다.

 

 

한편..

프랑스군 포병대위 드레퓌스는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에 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를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지만 발견된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는 없다.

결국, 군부의 위상을 지키기에 급급했던 정치가들과 군인들은 드레퓌스를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드레퓌스 대위를 스파이로 지목한다.

 

 

끌려가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말을 잇지 못하는 아내의 모습..

 

"용기를 내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의 무죄를 증명하겠어요.."

 

"나는 무죄야..

그들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할지라도, 난 끝까지 살아남아 증명하겠어.."

 

죄를 인정할 수도 있었지만, 드레퓌스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며, 투쟁하기에 나서고..

아내 또한 백방으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에 나서는데..

 

 

결국, 남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드레퓌스의 아내는 졸라를 찾아가서 '글'로서 대중들에게 남편의 무죄를 대중들에게 알려줄 것을 부탁하는데..

 

"졸라씨, 프랑스에서 당신의 말은 힘을 가지고 있잖아요..

언제나 진실을 수호한 분이시구요."

 

"저는 도울 수 없습니다.

전.. 이제 평범한 시민에 불과합니다..

저도 살만큼 살았습니다. 싸울만큼 싸웠구요.."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

매일 지옥같은 나날을 보낼 제 남편을 생각했습니다.."

 

졸라에게는 더이상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던 옛 시절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는 상태..

 

 

졸라는'부','명예' 와 '정의','진실'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친구 '폴'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침내 결정한다..

다시한번, 예전의 풋풋했던 시절로 돌아가기로..

자신의 부와 명예를 팽개치고 '정의'와 '진실'을 위해 다시 한번 끝까지 투쟁하기로 마음먹게 되는데..

 

 

졸라는 많은 이들의 앞에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연설을 행하고,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친 '정부'와 '군대'를 비난하는 연설까지 하게되는데..

졸라는 드레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군부의 의혹을 신랄하게 공박하는 논설을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형식으로 1898년 1월 13일 오롤지에 '나는 고발한다'의 제목으로 발표한다.

 

"군대는 프랑스의 시민들입니다.

드레퓌스도 그 군대의 일원입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참모부 전체의 잘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드레퓌스의 사건을 은폐했습니다..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그 무엇도 그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졸라의 뜻에 동참하는 시민들도 많았지만, 그 반대의 입장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를 계기로 사회여론이 비등하여 프랑스 전체가 ‘정의·진실·인권옹호’를 부르짖는 드레퓌스파 또는 재심파와 ‘군의 명예와 국가 질서’를 내세우는 반드레퓌스파 또는 반재심파로 분열되기까지하고..

 

 

결국, 졸라는 드레퓌스의 편을 들어준 일로 재판까지 받게되는데..

 

 

졸라의 편은 재판에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거듭 주장하지만..

판사는 드레퓌스 사건에는 관심이 없고, 졸라의 처벌 유무에만 관심이 있다.

심지어는 졸라의 변호인의 말마져 묵살해버리고 마는데..

사태는 점점 졸라에게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져간다..

 

"지금껏 증인석에 선 군인들은 배심원들에게 자신들이 유리하도록 증거를 조작하고, 하고 싶은 말은 다하는데..

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질문하는 우리들에게는 그렇게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군요..

정의를 모독하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저는 재판장에서 일어나는 편애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군인들은 할말을 다할 수 있는데..

왜 졸라가 적은 신문기사는 안된다는 겁니까?

그렇게 편파적으로 편결을 내려도 되는겁니까? "

 

 

마침내 졸라가 입을 열기시작하고..

법정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수많은 시민들과 군인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꼽는 부분이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한 사람의 인생과 정의 실현을 위해 끝없이 투쟁하는 졸라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여러분..

몇달전 참모부에서는 총리가 갈채를 받으며 군대의 위상을 여러분들께 맡기겠다고 말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여러분들은 저를 죄인으로 몰도록, 지시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가 한 말이 명령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것을 밝히려는 겁니다.

 

저는 말보다는 글쓰는 것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저는 오로지 '진실'을 밝히기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싸움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주위에서는 미친 짓이라고.. 불가능하다며 저를 말렸습니다.

제가 질 것이 뻔하다며 저를 말리셨지요..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요?

개인이 무시 당한다면 말이죠..

정의가 실현된겁니까?

 

저는 제가 원해서 이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저 혼자서, 여러분을 재판장으로 정한 것이지요..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되든 저는 상관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믿습니다..

국가에서는 여러분들에게 판결권을 줬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잘 압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사랑하는 파리의 심장이자, 지성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족과 함께 있는 모습..

공장과 가게에서 일하는 모습이 상상이 갑니다..

모두 직장과 가정이 있는 정의로운 사람들이지요..

여러분들은 무죄인 사람이 수감되어 고생하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고..

' 한 사람의 고생과 희생이 국가를 들먹일 정도로 중요한 것인가? ' 라고 생각하지 않으실겁니다..

 

여러분.. 모두.. 저를 보십시요..

제 모습이 배신자의 모습입니까?

저는 평범한 작가일 뿐입니다..

평생 글쓰기에 전념한 사람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40여년간 저의 작가인생..

프랑스의 정신을 전파하기위해 제가 지금껏 쓴 모든 작품들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드레퓌스는 무죄입니다..

맹새코.. 그는 무죄입니다.. "

 

 

하지만, 결국, 졸라는 패소하게 되고..

'징역 1년형과 벌금 3천프랑' 이라는 처벌을 받게되지만..

 

"에밀.. 어서 프랑스를 떠나게나..

자네를 체포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게.."

 

"나보고 범죄자인 양 도망을 가란 말인가?

나는 절대로 그런 비겁한 짓을 할순 없네.. "

 

"그렇겠지.. 감옥에 가는 것이 낫겠지..

전세계의 동정을 받겠지..

하지만, 에밀..

제발.. 한번만 다시생각해보게..

감옥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않나?

자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생각해야지.. "

 

 

고민끝에 졸라는 경찰들을 피해 런던으로 피신을하고..

런던에서도 졸라의 정의를 위한 투쟁은 계속된다..

'글'로서 대중들의 마음을 선동하는 에밀 졸라의 모습..

 

' 진실은 밝혀질 것이다..

졸라의 기사를 읽으시오. '

 

 

결국.. 수십년간의 투쟁 끝에 다시 재판을 받게 된 드레퓌스..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데..

 

 

드레퓌스는 재판끝에 군에 복귀하고 승진까지 하게된다..

하지만..

졸라에겐, 아직도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전세계인들에게 '정의'와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어야하고, 자신의 이념을 널리 전파해야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와 '명예'를 포기해가며, 남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졸라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여보.. 휴식을 취하셔야 해요..

내일, 드레퓌스 행사가 있잖아요.."

 

"드레퓌스가 내일 복귀하는구나..

드레퓌스사건은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지..

전에는 나의 일이 끝나서 쉴 수 있을 줄 알았어..

내가 게을러진 것이었지..

 

하지만.. 갑자기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고..

나는 진정한 내 삶을 되찾은거야..

지금 이순간, 나는 아이디어가 넘쳐나..

지금 이 책도 최고의 걸작이 될거야..

붕괴된 국가가 희망을 되찾는다는 이야기지..

믿지 못하는군.. 기다려봐..

내가 할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 사회에 정의를 실현시켜야되.. "

 

 

드레퓌스의 복귀식..

그러나.. 수십년간 자신을 위해 싸워준 졸라의 죽음을 통보받게되는 드레퓌스..

비록, 전혀 친분도, 얼굴 조차 모르는 사람이지만..

졸라의 죽음으로 가장 슬픈 사람은 바로 드레퓌스였다..

 

 

감동적인 부분..

졸라의 무덤을 찾은 드레퓌스의 모습..

수십년간 늘 마음속에 함께했던.. '졸라'를 떠나보내는 그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슬프다..

 

끝내 드레퓌스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오늘 슬퍼하지말고..

평생 이어질 그의 정신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횃불처럼 그 정신을 전파합시다..

오늘 자유를 만끽하는 여러분들은 졸라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유를 향해 싸운 사람들을 잊지 맙시다..

자유를 피와 고통으로 얻은 자들의 희생을 잊지말고..

그들에게 영원히 고마움을 표시합시다..

 

우리 모두 인간이 됩시다..

졸라만큼, 인간을 사랑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의 정신은 위대했습니다..

그는 부유한 노년을 지내고 있었지요..

명예, 재산, 행복..

이 모든 것들을 떨쳐버리고, 그는 우리를 위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정의를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

 

 

이 영화는 프랑스의 문학가 에밀 졸라의 삶을 그린 전기영화로, 에밀 졸라의 작가로서의 삶 보다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정의실현을 위한 그의 노력과 투쟁을 주제로 하였다..

비록 70여년이 흐른 영화이지만, 우리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영화이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한 사람의 인생을 위해, 정의로운 국가를 위해 '부'와 '명예'를 포기해버리고, 평생을 바친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용기일 것이다..

비록, 나는 '에밀 졸라'에 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영화만큼은 누구든지 '에밀 졸라'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게 하도록, 잘만든 영화임은 분명한 듯 하다..

 

출처 : 블로그 > 말타의매님의 블로그 추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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