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트로 : 한국 공산주의 태동과 속성
한국은 특별히 다이나믹한 민족이다라는 평가를 받는다 좋은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일면도 많이 있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쉽게 잊어 버린다. 주사파 6명이 드디어 합법적으로 국회에 입성하였다. 이들은 여러가지 불법적인 행태를 보이면서도 끝까지 사퇴하지 않았다. 보통 인사였다면 벌써 사퇴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부인하면서도 대한민국의 혜택은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의 조국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북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의 목적은 대한민국을 공산화하는 것이다. 이들을 국회까지 보내 준 국민들은 이들의 역사와 속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사상의 태동
1919년 3월 1일 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혹해 지자 허탈감이 극도에 달하게 되자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유혹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 사상이었다. 이동휘는 1918년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공산주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초기에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하였기 때문에 이 사상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공산주의자들은 ‘토지도 나누어 주고, 가진 자 없는 자 차별 없이 다같이 잘 살고 평등하게 사는 좋은 세상이 온다’ ‘ 미국은 우리는 돕지 않는다, 소련의 도움으로 독립할 수 있다' 라는 말로 백성들에게 선전하며 유혹하였다.
이 일을 선두에서 지휘했던 사람이 박헌영이다. 이동휘는 1919년 8월 중국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출이 되었고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하여 공산주의 단체들을 만들어 나갔다. 1921년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편하고 박헌영은 책임비서가 되어 공산당 조직을 넓혀 나갔다. 서울에서는 서울청년회, 화요회, 북풍회 같은 좌파조직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독립운동조직은 여러 파벌로 갈라진다
미국파 : 이승만, 이기붕, 허정 소련파 : 김일성, 최용건, 김책, 남일, 김광협 중도파 : 김구, 김규식, 이범석, 이시영 장안파 : 김두봉, 최창익, 무정, 허정숙 국내민족파 : 조만식, 송진우, 김성수, 안재홍, 장택상 국내진보파 : 여유형, 홍명희, 조태암 공산주의 서울(장안)파 : 이영, 정백, 최익한, 이승엽 공산주의 화요회 : 박헌영, 이관술, 김삼룡, 이주하 ML(막스레닌)파 : 이정윤, 신용우, 박용선
이런 분열로 인해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통치 때보다 더 무서운 혼란과 무질서에 휩싸였고 대한민국의 운명은 공산주의가 뿌리내리느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느냐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이때 나라의 주도세력을 잡은 것은 선전과 선동에 능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대한민국 분열의 원조 박헌영
박헌영은 전국적인 조직인 조선인민국화국을 급조로 창건하고 임시정부를 만들었는데 중앙위원의 약 75%가 공산당원들이었다.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조선 공산당을 정부로서 합법화시키기 위해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고 이후 건준은 해체되고 1945년 9월 11일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 1945년 10월 7일 조선인민회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는데 당시 분위기는 마치 조선인민국화국이 된 것 같았다고 한다
<김일성과 박헌영>
한편 소련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공산화한 경험을 토대로 1945년 8월 24일 소련군 제25군 선발대가 평양에 입성하였으며, 다음 날 북조선 주재 소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8월말에는 북한 전역을 장악하였다.
1946년에는 북한에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방안으로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위원장으로 김일성을 선임하였다. 김일성은 소련점령군을 따라 소련군의 신분으로 북한에 들어온 것은 1945년 9월 이었으며, 당시 나이는 고작 33세였다. 그래서 그가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많은 사람이 동원된 군중대회에서 처음으로 소련 제25군의 정치위원 레베제프 소장에 의해 “조선인민의 항일투쟁을 이끈 영웅”으로 공식 소개되었을 때 짧은 시간이나마 군중들 사이에 “가짜다”라고 말하는 소음이 장내를 휩쓸었다 한다.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였다. 원래의 김일성은 1920년대부터 만주 일대에서 민족 항일투쟁의 전설적인 영웅으로서 1920~‘40년대에 한국인 사이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자신을 “민족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내세우기 위하여 김일성의 이름을 따서 그의 명성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데 가장 잘 이용한 자였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고 남한까지 공산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948년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북조선 인민 위원회를 인민 공화국으로 고치고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북한 정부는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한 남침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최신 무기를 갖추는 등 비밀리에 군사력을 키워나갔다.
박헌영의 인민위원회는 노동자,농민,도시 근로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서민생활을 급진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투쟁한다고 선동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당시 국민들 78%가 공산주의 사상을 선호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박헌영은 이승만을 만나 인민위원회 주석 취임을 간곡히 부탁하였으나 이승만이 이를 거부하였고 재차 요청했으나 거부하자 사사건건 이승만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발표하였는데 “온 세계를 파괴하는 자는 공산당이요, 조선을 파괴하는 자도 공산당이다” 하였다.
박헌영은 사흘 뒤 이승만을 ‘민족 반역자 및 친일파의 수령’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런 대응은 지금도 주사파나 좌파들이 입지가 공격받았을 때 친일파로 대응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전에 텔레비전에 목사님 가족이 나왔는데 약 5살 먹은 아이에게 기자가 커서 모가 되고 싶으냐? 질문하니 아이가 대답하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을 적이 있었다. 아이의 대답은 “커서 친일파를 척결하고 싶어요” 이었다 평상시 목사님이 친일파가 문제라는 말을 자주하여 아이가 영향을 받은 듯 싶었다.
미.영.소 신탁통치 결의와 좌우 대립의 시작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개국 외상회의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가결하였다. 미국은 한국을 즉시 독립시키자고 제의하였으나 소련이 반대하였다. 한국국민에게 이 소식은 청청벽력과 같은 것으로 좌우익 모두 결사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소련의 지령을 받은 박헌영은 돌연 신탁통치안을 찬성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하지 사령관을 찾아가 신탁통치 반대 집회를 중지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하였다.
이후 우파 지도자 이승만과 미군정과 협력관계를 맺는데 모두 실패하자 우익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1946년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하였다. 이후로 남한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좌우의 이념대립이 시작되었고 미군정을 반대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미군정이 끝난 지금까지도 공산주의 통일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이유로 사사건건 반미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조선공산당의 지폐 위조사건
남한 공산화 공작이 한창일 때 조선공산당이 재기 불능의 큰 타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1946년 4월에 있었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었다. 당의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공산당의 선전물 인쇄소였던 정판사는 일본이 철수하면서 남았던 지폐원판으로 몰래 위조지폐를 발행한 사건이었다. 이들은 여섯 차례에 걸쳐 1,200만원의 위조지폐를 발행하였는데 이 액수는 당시 신문기자 월급 600원의 약 1,700년치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위조지폐는 당 활동비로 사용하면서 시중에 유통되었고 그 여파로 남한경제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조선공산당 입금계좌에서 인쇄 정지된 발권번호가 계속해서 나오는 것을 보고 조선은행에서 이상히 여겼고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여 공산당원 14명을 체포하였다.
정판사 공판은 1946년 7월부터 약 33회가 열렸는데 수천명의 공산당원들의 시위집회로 법정 밖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재판은 무기연기되기도 하였다.
그해 11월 한 국가의 경제를 혼란시킨 중대한 사건으로 보도되고 최저 징역 10년에서 무기징역까지 중형이 선고되었다. 아무 근거도 없이 거짓 광우병 보도로 인해 사회가 극심한 혼란과 촛불집회를 야기시켰던 PD수첩의 판결과는 대조적이다.
이처럼 위조지폐범은 모두 공산당원이고 조선공산당이 개입되었다고 알려짐으로써 국민들이 충격을 받고 조선공산당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해방일보같은 좌익신문을 통해 이 사건을 허위날조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미군정 당국은 해방일보를 폐간시키고 공산당의 불법활동에 강력한 조치를 치하자 공산당은 지하로 잠입하였다.
이후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이 발부되자 박헌영은 북한으로 월북하게 되고 3대 좌익신문 조선인민보,중앙신문,현대일보는 폐간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익신문이나 객관적 매체보다는 좌익매체가 더 많은 시대가 되었다. 한겨레,경향신문,오마이뉴스,프레시안,헤럴드,노컷,머니투데이,미디어오늘 같은 좌익매체의 부정적인 뉴스가 역시 좌익포털인 다음과 네이버의 메인뉴스화면으로 여과없이 전달되어 국민들을 끈질기게 선동하고 쇠뇌시킨다.
월북한 박헌영의 대남 선동 및 폭동 지령 폭동과 혼란의 시대
월북한 박헌영은 황해도 해주에 머물면서 남한에 있는 공산당원들과 프락치를 조종, 요인 암살 및 대대적인 폭동을 계속해서 일으켰다. 박헌영은 악랄한 파업을 선동하고 그 기세를 몰아 드디어 대구에서 10월 폭동을 일으켰고 유혈적인 파괴난동행위를 야기하여 국민의 시선이 집중되는 틈을 타서 비밀회합 끝에 남한에 남로당을 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한에는 남로당, 북한에는 북로당으로 남북한에 두 개의 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이 후 위조지폐 사건을 궁지에 몰렸던 공산당은 더욱 극렬한 투쟁활동을 전개하였다. 공산당의 개입으로 1946년 9월에 부산 철도노동자 7,000명이 파업을 선언하면서 전국 철도노동자 4만여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박헌영은 영등포에 파업총본부를 설치하고 파업지령을 내렸다. 파업은 40여개의 노조단체로 확산되어 약 25만명이 파업에 가담하였다.
대구 10.1 폭동은 경찰 사망자 38명, 공무원 163명, 우익 인사들이 포함된 민간인 73명이 사망하였다. 폭도들이 공산당원들이 수감되어 있던 형무소를 습격하여 전주,광주 등에서 약 1,300여명이 탈옥하거나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10.1 폭동사건으로 배후로 지목된 공산당원 7,000여명이 체포되었고 1,500여명이 구속되는 등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가져 온 사건이었다. 이후에도 공산당은 여수순천사건,제주4.3폭동을 일으키고 일부는 태백산,소백산으로 숨어 들어가 빨치산의 시작이 되었다.
제주도는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좌익계 인물들이 숨어 들어와 제주도에서만 6만여명이 남로당에 가입하는 등 친북 좌파들이 극렬하게 활개치고 있었다. 도지사 박경훈이 인민투쟁위원장이요, 제주읍장이 부위원장, 각 면장이 면 투쟁위원장이었던 것을 보면 제주도에 공산주의세력이 얼마나 많았었는지 짐작이 갈 정도이다. 심지어 남로당에 가입하지 않으면 가족을 몰살시키는 끔찍한 일도 자행되었다.
1947년 10월 28일 유엔은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선 정부수립, 후 외국군대 철수를 가결하고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인구 비례에 따라 비밀 투표에 의한 보통선거를 실시하고 선거 후 90일 내에 외국군대는 철수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남로당은 선거실시를 음모라고 맹비난하며 반대하였고 김일성과 박헌영은 선거 유엔 감시단의 입북은 결사반대하여 안타깝게도 통일한국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만 건국 사상 최초의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이승만 정권이 출범하였다.
다급해진 박헌영은 남한에서의 선거를 방해하기 위하여 1948년 2월 7일 남로당 당원 30만명을 동원하여 전쟁을 방불케 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2.7폭동사건은 2주간 계속되었으며 약 30건의 파업과 55건의 충돌이 있었고 시위가 103건, 8,479명이 검거되었다.
한편 제주도를 공산화하려는 제주 4.3폭동으로 이승만대통령은 여수순천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제주반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된 군경 토벌대는 공산당의 총사령관 이덕구 인민유격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일부 주민이 즉결 처형되는 사례가 발생되기도 하였다.
제주남로당의 약 6만명의 무장폭동을 진압하는데 1년이 걸렸으며 수습하는데 6년이 넘게 걸렸으며 사상자는 1만명에 이른다.
이렇게 남한에서는 공산당의 선동과 폭동으로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가운데 북한의 김일성을 소련의 무기를 지원받아 6,25 남침을 감행하게 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이 시대도 주사파 좌익과 용공세력은 척결되지 않고 사회적 분열과 혼란을 지속적으로 야기시킨다. 좌파매체는 끊임없이 반정부 뉴스를 송출하고 미국에 대한 것은 여과 없이 반대와 투쟁을 전개한다. 미국때문에 한반도가 공산국가로 통일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기 때문이다. 제주 해군기지 반대, 평택 미국기지 이전 반대, 한미 FTA 반대, 미국 소고기 광우병 촛불집회 등이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받아야 하는데 한국인은 쉽게 잊어버리거나 선전선동에 취약한 특성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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