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사건

120여 년 전 프랑스는 엄청난 음모에 시달리고 좌우파가 난동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정점에 카톨릭이 음모를 꾸며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인류역사상 비열하기 그지없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좌우파, 진보파와 보수파로 나뉘어져서 보수파는 끝까지 자유혁신파를

내몰고 있다. -이덕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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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월 13일자 '르 프티 주르날’ 에 실린 앙리 메예의 드레퓌스 군적 박탈식(1월 5일)

드레퓌스 사건(프랑스어: L'affaire Dreyfus)은 19세기 후반의 수년 동안 프랑스를 휩쓸었던 반유대주의와 이 때문에 희생된 무고한 드레퓌스의 무죄 여부를 놓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군부 등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이 격돌했던 사건이다. 에밀 졸라(Emile Zola)를 비롯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한 드레퓌스파들에 반하여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했던 반 드레퓌스파들은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벌리기 위하여 '프랑스 조국 연맹'(Ligue de la Patrie Française)을 결성하였다. 프랑스 학술원(Académie française)의 가톨릭 회원들은 이 단체에 일괄적으로 가입했다. [1] 로마 가톨릭교회의 적극적인 반드레퓌스 운동은 결국 드레퓌스의 무죄로 끝나며 프랑스의 정교분리 원칙인 라이시테 원칙을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나아가 드레퓌스 지지파들의 이념과 전략들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반교권주의 운동의 모델이 되었다.



사건의 전개[편집]

19세기, 프랑스독일을 상대로 한 방어 전쟁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독일 자신이 원하는 배상금을 주면 파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하자, 온 나라 국민이 돈을 모아 갚으면서 겨우 풀려날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갈수록 반 독일 감정이 높아졌고, 반유대주의도 온 유럽을 휩쓸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날, 한 청소부가 한 문서를 발견 하게 되는데, 그 문서가 정보 유출에 관한 문서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그는 유대인이고, 또한 그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반 독일 감정의 대상이였던 독일계의 사람이였던 것이다.그러자 그는 순식간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재판에나섰고, 심지어는 그에게는 변호인도 허용되지 않았다. 프랑스 육군의 포병 대위였던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1894년 소령페르디낭 에스테라지(프랑스어: Ferdinand Walsin Esterhazy)라는 간첩이 쓴 문건으로 인하여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종신형과 치욕적인 군적 박탈식을 선고 받았다. 그의 군적 박탈식장에서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외쳤지만 "유태인을 죽여라"라는 군중들의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그는 강제로 불명예 전역된 뒤, 프랑스령 기아나악마섬으로 유배당한다.(사실 재판 과정에서 서명과 자신의 글씨체가 다르다는 이의가 있었으나, 피고가 글씨체를 바꾸어 썼다는 말도 안되는 근거를 내세워 그의 이의는 묵살당하였다. 실제 자신의 글씨체를 바꾸어 쓰기는 매우 힘든일이다. 그렇게 드레퓌스는 악마섬에서 유배를 당하였고, 그사이 프랑스 본토에서는 진범인 에스타라지가 발각되어 논란을 겪다가, 결국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사건의 전말[편집]

결국 드레퓌스는 온 누명을 뒤집어 씌운체로 프랑스 군사 법정에 나섰다.앞에 말한 대로 그는 변호사도 허용되지 않았고, 변호사가 없었던 마당에 그의 유죄 판결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였다. 일부 사람들은 그 말고 다른 사람이 범죄를 했다는 추측을 했으나,그 당시 반유대주의, 반독일주의에 의해 가볍게 묵살 되었다.

드레퓌스는 잘못된 증거 자료에 기초를 둔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사실 드레퓌스는 무죄였다.(정보 유출에 발견된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D'. 이에 따라 유태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그 이름의 첫글자가 암호와 일치한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지목했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고간 것이다. 당시 고급 장교들은 그들의 실수를 덮으려고 사실을 은폐했으며, 반유대적인 가톨릭교회보수주의 언론들도 드레퓌스 사건을 침소봉대하여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다.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외치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 조르쥬 피카르 중령이 우연한 기회에 진짜 간첩 에스테라지를 적발하게 되었다. 그는 참모본부 정보국에서 일하면서 또다른 간첩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레퓌스는 무죄이며, 진범은 에스테라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따라 그는 참모본부 상부에 이 사실을 알리며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진범은 무죄로 풀려나고 피카르는 군사기밀 누설죄로 체포된다. 그의 무죄 주장도 묵살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때 증거자료를 몰래 복사해서 실어 낸 어느 한 신문에 의해 드레퓌스 사건이 세상에 공개된다. 하지만 가장 곤란한 상대는 진범인 에스테라지 본인이었다. 그는 이런저런 거짓말을 늘어놓고 다녔고, 놀랍게도 참모본부는 그의 거짓말을 눈감아주었다.

그러나 사실이 알려지자, 군사 법정은 많은 비난을 받았고, 일부 사람들은 피카르와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반유대주의[편집]

드레퓌스 사건이 벌어지기 전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동으로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가톨릭 교회는 《라 크루우아》, 《라 리브르 빠롤》, 《랭트랑지장》 같은 가톨릭 계열 신문들을 통해 "유대인은 프랑스의 적이다. 매점매석한다.신을 살해한 민족이다. 그들은 저주 받았고 우리는 기독교인이다"며 매일처럼 반유대주의를 조장했다. 이 반유대주의는 민족주의, 국수주의와 결합하여 온 프랑스를 휩쓸었고 드레퓌스 사건은 이런 반유대주의가 만들어낸 정치적 추문이다. 드레퓌스가 체포된 사실을 맨 처음 특종으로 보도한 신문도 바로 《라 리브르 빠롤》이다. 《라 리브르 빠롤》은 1894년 11월 19일 "대역죄, 유대인 장교 체포"라는 제목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최초로 보도했고 이 보도로 프랑스는 극도의 갈등과 분열 양상에 빠지게 된다.[2]

나는 고발한다[편집]

로로르지 1면에 실린 에밀졸라의 격문 나는 고발한다

작가 에밀 졸라1898년 1월 13일 문학 신문 로로르(L'Aurore, 여명)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펠릭스 포르(Félix Faure)에게 보내는 유명한 공개 편지를 기고함으로써 일반 사회에 그 사건을 폭로한다.(에밀은 군법회의를 중상모략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 중에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1899년에 귀국한다.) 역사학자 바브라 투흐만은 이를 한마디로 '역사상 위대한 소동'의 하나라고 말한다.

이 밖에도 여러 지식인과 신문사 르 피가로 등이 에스테라지 범인설을 주장했지만 대부분 언론들은 반유대주의 감정 때문에 '드레퓌스는 죽어라'는 등의 폭언을 일삼았다.

드레퓌스가 악마섬에서 유배되어 있는 동안 프랑스에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그렇지 않은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반(反)드레퓌스파로 완전히 양분되었다. 유대인들은 간첩으로 몰리기까지 하자 테오도르 헤르츨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약속했다는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을 건국하겠다는 시오니즘운동을 시작한다.

앙리 중령 자살과 드레퓌스 재심[편집]

에밀 졸라를 비롯하여 아나톨 프랑스, 앙리 푸앵카레, 장 조레스 등등의 수많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프랑스 군부와 정부에 대한 비판, 세계 언론과 외교적인 부담이 가중되었고, 1898년 8월, 진범인 에스테라지와 함께 문서를 조작한 앙리 중령이 감방에서 면도칼로 목을 찔러 자살하자 드레퓌스는 재심을 받지만, 군사법원에서는 10년형으로 형량만 감했을 뿐 유죄판결을 뒤집지는 않았다.

단, 선고 후 대통령이 사면해서 감옥에서는 풀려나왔지만 복권은 되지 않았다.그러나 선거에서 군사측이였던 우파가 지식인 측인 좌파에 패배, 즉시 1904년에 재심이 청구되었고 1906년에 드레퓌스의 무죄가 선고되어 모든 혐의를 벗고, 복권도 되어 육군에 복직했다. 그 이후 소령으로 승진함은 물론,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하고 진급도 하고 일반 군인들처럼 생활하다가 1935년에 지병으로 별세했다.그러나 이 사건은 드레퓌스 자신에 삶에 너무나도 큰 상처를 입었고, 그 후에도 우파는 끝까지 드레퓌스의 유죄를 외쳤다. 그러면서 드레퓌스의 상처는 더 심해지는 그 당시 반유대주의와 반도이칠란드 주의가 낳은 최악의 결과였다.

가톨릭 교회의 선동[편집]

〈라 크루와〉(La Croix, 십자가라는 뜻)와 〈르 펠렝〉 등 가톨릭 계열 주요 일간지와 지방 신문 등 〈성모승천수도회〉 회원 들이 경영한 신문들은 체계적으로 반드레퓌스파들을 지지하기 위한 종교적인 영역을 맡고 있었으며 민족주의를 찬양하고 유대인들을 적국 국민으로, 그리고 외국 시민으로 심지어 이웃 국가가 파견한 스파이라고 매도했다.〈라 크루와〉를 비롯한 반드레퓌스파 신문들은 집단적인 반드레퓌스파 프랑스의 이미지를 전파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3]

예수회의 조작[편집]

1893년 <라 리브르 빠롤(La Libre Parole)>1면에 실린 반유태주의 캐리커처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날 당시 프랑스 육군 사관학교 생도들은 가톨릭 예수회 교단이 운영하는 예비학교 과정(폴리테크니크 예비학교)을 거쳐야 했다.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하자 참모본부에 속한 이들의 대부분은 예수회 교단과 결탁해 공화국을 흔들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비요장군(당시 국방장관)은 참모본부를 〈예수회파〉(Jesuitiere)라는 이름으로 지칭했다. 또한 드레퓌스 지지파들도 경멸적인 의미로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4] 앙리 중령이 감옥에서 칼로 자살하자 <라 리브르 파롤〉은 그를 유대인들에게 희생된 순교자로 만들며 미망인을 위한 모금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이 때 예수회가 운영하던 폴리테크니크 예비학교들은 단체로 기부금을 냈는데 한 학생이 기부금을 못내겠다고 버티자 학교는 학생을 퇴학시킨 일도 있었다.[5]

이에 에밀 졸라는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를 쓰기 전 1898년 1월 7일 <<프랑스에 보내는 편지>>라는 팜플렛을 통해 "프랑스여 그대는 교회가 지배하던 과거로 되돌아 가려고 하는가"라며 통탄했다.[6]

라 리브르 빠롤 자금 지원[편집]

또 드레퓌스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신문은 예수회가 자금을 지원한 <라 리브르 빠롤(La Libre Parole)>지였고 바일리 신부가 창간한<라 크로와>등 여타 가톨릭 계열 신문들이 앞장서서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했고 반유태인 정서를 날마다 되풀이했다. 이 <라 리브르 빠롤>지의 발행인 에두아르 드뤼몽(Édouard Drumont)에게 자금을 대준 사람이 예수회의 뒤락(Du Lac) 신부였다. 그는 또 당시 국회 내의 충실한 가톨릭 교회 옹호자이자 '노동자 클럽'(영문:The Society of Catholic Worker Circles, 불어:Oeuvre Circles Catholiques d'Ouvriers)을 만든 알베르 드묑(Albert de Mun)백작과 참모본부의 총참모장 드 브와데프르의 고해신부이기도 했다.[7]

프랑스의 가톨릭 계열 신문인 라 크루와지(La Croix)는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자 "드레퓌스는 프랑스 국민을 파멸시키고 프랑스 영토를 차지하려고 획책해온 국제적 유대인 조직의 스파이"라고 보도했다.[8] 가톨릭 연구가 에드몽 파리는 "대부분의 성직자와 주교는 드레퓌스의 범죄를 확신하고 있다"고 부르게레트는 기록하였으며, 생디칼리슴의 이론가 조르주 소렐 (Georges Sorel) 또한 이렇게 공언하였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사회 전체가 분열된 반면 가톨릭계는 철저하게 일치하여 재조사에 반대하였다. 교회의 모든 정치력이 드레퓌스 사건에 집중되었다."며 예수회가 만든 신문과 가톨릭 교회와 예수회가 주축이 된 군부가 한통속이 되어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9]

또 예수회의 기관지 <씨빌타 카톨리카(Civilta Cattolica)>에는 '유태인 드레퓌스라는 제하의 기사로 다음과 같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명확히 표명하였다. "유태인들은 프랑스 공화국을 장악하고 프랑스적이기보다는 히브리적인 나라로 이끌어왔다. 유태인들은 어느 곳에서나 반역을 도모하는 스파이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유태인은 프랑스 뿐만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태리에서도 추방되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과거의 위대한 평화를 재건하게 되고, 제국은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게 될 것이다."[10] 이 신문은 훗날 교황이 드레퓌스를 면죄한 후에도 그가 계속 유죄라고 주장할 정도로 막무가내였다. 이 신문의 편집장인 라파엘레 발리니 신부는 유대인들이 드레퓌스를 무죄로 만들기 위해 '유럽의 모든 신문과 양심을 샀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또 유대인들이 매년 '아이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들은 '고통 속에서 죽어야 한다'고도 썼다.[11]

앙리 중령 죽음의 배후[편집]

에스테라지와 함께 문서를 조작한 앙리 중령이 체포되고 감방에서 자살하며 참모본부의 음모가 드러나자 좌파 공화주의자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와 군부가 안보를 구실로 정치와 공공생활을 얼마나 침식해 들어갔는가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장 조레스는 이 때 드레퓌스 사건을 파헤치는 안내서 《증거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때부터 드레퓌스의 재심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로로르지는 감옥에서 자살한 앙리 중령이 자살하지 않았다는 기사를 실었다. 로로르는 "예수회원들이 앙리 중령의 손에 면도날을 쥐어주면서 불명예 퇴역으로 추방되겠느냐 아니면 그의 미망인에게 연금을 주는 조건으로 자살하겠느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했다"는 것이었다.[12]

에드몽 파리는 조셉 레이나크(Joseph Reinach)의 말을 인용해 이 사건을 이렇게 결론내린다 "보다시피 이 흉악한 사건은 이 예수회 회원들의 음모이다. 사실 드레퓌스 사건은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도 인정하듯이 사회적인 우상들과 1789년 대혁명 정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13]

사건의 영향[편집]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싼 당대 프랑스 국민들의 분열을 풍자한 1898년 2월 14일자 만평. 대가족의 식사 시간에 “오늘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맙시다.”라고 이야기하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결국은 이야기했다”라면서 온 가족이 난장판이 되도록 싸우고 있다.

이 사건으로 우파 고급 장교들 등등 재판 관리자들은 많은 비난을 받았고, 결국 이런 비난이 드레퓌스를 무죄로 이끌어 가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반유대주의의 문제를 많이 느끼게 되었고, 결국 반유대주의는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하다가 결국 1949이스라엘건국 이후 거의 완전히 없어졌다.

민중의 적[편집]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를 드레퓌스의 유죄를 믿는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보수층과 무죄를 믿는 개신교인과 지식인층으로 두쪽으로 갈라 놓았다. 가족 친지간에도 드레퓌스의 유무죄를 놓고 싸우고 대립했다. 마침 파리에서 헨릭 입센의 연극 《민중의 적》(En folkefiende)이 공연하고 있었다. 이 연극은 그런데 연극의 내용이 마치 에밀 졸라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관객들의 난투극을 불렀다. 결국 연극 공연은 취소되고 말았다. [14]

예수회 해산법과 정교분리법[편집]

드레퓌스 사건은 '라페르'(l'Affaire:사건)라고도 불리는데 프랑스 제3공화국의 역사와 현대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주축으로한 보수파와 공화파간 확연하게 나뉘어져 이들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정치·사회적 세력들의 입장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마침내 프랑스에서는 1901년의 '결사에 관한 법(Association loi de 1901)'의 규정과 이후 다음과 같은 새로운 일련의 법률들을 통해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었다.

  1. 1902년 7월 법을 통해 국가적으로 허가를 받지 않은 약 3000개의 모든 가톨릭학교 폐쇄가 결정되었다. 이것은 매우 심한 대중적 반발을 불러일으킨 조치였는데, 74명의 주교들이 항의서에 서명을 하여 명시적인 반대 및 항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동 법을 통하여 정부를 통한 주교의 급여 또한 정지되었다.
  2. 1903년 3월 법을 통하여 예수회를 포함한 모든 남성 수도단체의 해산이 결정되었다.
  3. 1903년 7월 법에서는 모든 여성 수도단체의 해산이 결정되었다.
  4. 1904년 7월의 법은 새로운 수도단체의 결성을 금지하였고 현재 또한 그러하다.

[15]

그리고 마침내 1905년 정교분리법인 ‘국가와 종교 분리에 대한 법(불어:loi de separation des Eglises et de l'Etat, 영어:1905 French law on the Separation of the Churches and the State)’이 통과됐다. [16] 이 법은 당시 수상인 콩브(Combe)의 이름을 따서 이른바 “Loi Combe” 즉 콩브법이라 불리기도 한다.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위한 동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교분리원칙, 즉 정치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를 의미하는 ‘라이시테’(laïcité:비종교성)원칙을 확립하였다. 이 법에 따라 프랑스 공화국에서는 어떠한 종교도 공식 종교로 인정하지 않으며, 어떠한 종교에도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고, 종교 건물은 공공 재산으로 환원하고, 종교는 어떠한 정지적 권한도 행사할 수 없음을 규정했다.[17] 이 법이 통과되자 당시의 교황인 비오 10세는 사목서한 “프랑스 정교분리법에 관하여(Vehementer nos)”를 통해 공개적으로 강하게 종교적 비난을 하였고, 이후 수 년 동안 프랑스와 가톨릭교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18]

드레퓌스 사건 100주년[편집]

1998년 1월 13일은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에 항의하여 로로르지에 명문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국가이성의 이름으로 한 무고한 인간에 가해졌던 인권유린의 대표적 예로 기록되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졸라가 생전에 살던 집에 현판식을 갖고 기념비를 헌정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졸라가 쓴 나는 고발한다의 원본과 드레퓌스 사건 관련 문서들을 진열했다. 또 졸라가 안치된 팡테옹에선 당시 왜곡된 공권력의 상징이던 법무부와 국방부의 수장이 참석해 다시는 국가 권력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될 것임을 다짐하며 졸라에게 경의를 표했다. [19]

각주[편집]

  1. 이동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포이에마P 770
  2. 이동 막스 갈로《장 조레스 그의 삶》(당대,P199)
  3. 이동 임종권《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세력-우파와 가톨릭 교회》(숭실사학회 제29집)
  4. 이동 에밀 졸라<<전진하는 진실>>P209
  5. 이동 니홀라스 할라스《나는 고발한다 드레퓌스사건과 집단 히스테리》(한길사,P350)
  6. 이동 에밀 졸라<<위 책>>P164
  7. 이동 예수회가 <라 리브르 빠롤>지에 대해 자금을 지원했다는 주장은 에드몽 파리의 <<예수회의 비밀 역사>>P165, 니홀라스 할라스의《나는 고발한다 드레퓌스사건과 집단 히스테리》(한길사,P64,P182)에도 나옴
  8. 이동 니홀라스 할라스의《나는 고발한다 드레퓌스사건과 집단 히스테리》(한길사,P96)
  9. 이동 에드몽 파리<<위 책>>P172
  10. 이동 <The Civilta Cattolica>1898년 2월5일자
  11. 이동 J.콘웰《히틀러의 교황;비오 12세의 은밀한 역사(hitler's Pope, The Secret History of Pius 12》P28
  12. 이동 니홀라스 할라스《나는 고발한다 드레퓌스 사건과 집단 히스테리》(한길사,P335)
  13. 이동 에드몽 파리<<위 책>>P175
  14. 이동 니홀라스 할라스《위 책》(한길사,P302)
  15. 이동 이석민《 國家와 宗敎의 關係에 관한 硏究 : - 中立性 槪念을 中心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P24)
  16. 이동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드레퓌스〉 참조
  17. 이동 민유기 《프랑스 급진공화파의 반교권주의와 1901년 결사법 한국프랑스사학회》(프랑스사연구 제27호, P93~122)
  18. 이동 이석민《위 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P25)
  19. 이동 《드레퓌스사건 100주년 다시 묻는 권력과 진실 그리고 지식인의 역할》, 1998년 1월 13일자, 한겨레 신문

함께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