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홈지기칼럼

루터의 종교개혁의 발단 -하나님의 義를 발견하다

by 이덕휴-dhleepaul 2020. 6. 30.

1. 들어가는 말

 

 

루터신앙의 전환이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것은 하나님의 義를 발견한데서 시작된 것이며 루터신학은 바로 이 문제를 취급하는데서 시작된다. 루터의 이 발견은 그와 식사를 함께한 사람들에게 말한 "탁상담화"에 의하여 일반에게 탑의 체험이라고 알려져 있다. 루터는 그러한 체험이 당시의 그의 연구실이었던 힛덴버그대학(현재는 닛덴버그 마틴루터 대학)의 탑안에서 오랜 세월에 걸친 신학연구 성경과의 계속적인 싸움 그리고 스스로 구원을 찾는 간절한 탐구의 결과로 되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기 때문이다.루터신앙의 전환이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것은 하나님의 義를 발견한데서 시작된 것이며 루터신학은 바로 이 문제를 취급하는데서 시작된다. 루터의 이 발견은 그와 식사를 함께한 사람들에게 말한 "탁상담화"에 의하여 일반에게 탑의 체험이라고 알려져 있다. 루터는 그러한 체험이 당시의 그의 연구실이었던 힛덴버그대학(현재는 닛덴버그 마틴루터 대학)의 탑안에서 오랜 세월에 걸친 신학연구 성경과의 계속적인 싸움 그리고 스스로 구원을 찾는 간절한 탐구의 결과로 되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기 때문이다.[(6)김남식 종교개혁 신학" 한국성서 협회 (1976.3.p15).]

 

 

2. 하나님의 義의 발견

 

 

루터가 "하나님의 의에 관한 종교개혁적인 발견이 된 것은 그가 1513-1515년에 걸쳐서 제1회 시편강의를 했을 때 주의 의로 나를 구하소서"(시 31:1-11) 라는 성구에 의해서 기인 되어진 것이다. 루터는 시편의 이 말을 읽고서 매우 놀라 이 말에 적의를 느꼈다고 말한바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엄한 공의와 심판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 하나님의 의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의에 의해서 우리들을 의롭다고 하는 의이다. [(7)ibid pp 15-16]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탁상회담에서 회상하고 있다 (7)

루터는 제1회 시편 강의 때에 문제의 이 대목에 관해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여준 하나님의 심판이며 또 그것이 그리스도의 의이며 따라서 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을 이해한 것이며 그가 이와같은 해석에 이르게 된 것은 롬 1:17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구절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루터는 말하였다. 이와같은 사실은 루터가 죽기 전해인 1545년에 출간된 그의 전집 서문에 기록되어 있다. 거기서 그는 개혁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의의 새로운 이해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또 그것이 롬 1:17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8)ibid p.16]

이와같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는 사도바울의 신학을 그가 이해한 것을 의미한다. 사도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신학이요 또한 부활의 신학이었다. 사도바울의 십자가와 부활의 교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은 속죄와 아울러 율법의 성취(롬 10:45:18-19) 는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대신(사도바울의 견해는 대신이라는 견해보다 전인류를 포함한 대표이다) 하여 죄를 완전히 처리함과 동시에 완전한 순종으로 완전한 의를 성취하였다. 이와같은 그리스도의 승리는 우리를 대표한 행위이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성취된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다(롬 4:253:21-24)

 

루터는 바울의 십자가 신학을 여기까지 밖에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십자가 신학은 이신칭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법적인 칭의요 그 칭의를 받은 자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함께 못박히는 옛사람의 죽음과 그의 부활에 연합된 완전한 새 인격의 중생의 신학인데 루터는 여기까지는 이해하지 못한듯하다. 그러므로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면서도 죄인이라는 말을 자주 쓴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여간 루터는 사도바울의 이신칭의의 교리를 발견하느데 그가 어떻게 그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였는가 하는점을 우리는 착안하여야 할 것이다. 사실 로마교회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성 어거스틴 이후로 죄와 은혜는 늘 살아있는 문제가 되어 있었으며 어거스틴이 수립한 은혜관이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며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상당한 공헌을 이루었으며 체계정연한 신학을 확립한 것이다. [(9) 왓슨... "프로테스탄트 신앙원리" 이장식역 컨콜디아사 1977.6.p33.]

 

루터가 신학자로서 이런 교리를 모를리가 없다. 그러나 그가 참 진리에 조명되기 전에는 이 모든 진리를 그대로 지나쳐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인격의 구원을 위하여 실제적으로 자기에게 적용되는 완전한 의를 찾게 되므로서 비로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는데 이른 것이다. 이와같이 그가 참된 의를 발견하기 까지에는 그가 어떻게 하여 이 진리에 이르렀는가 하는 사실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제 그가 회상한 글을 통해서 검토해 보면 "..... 왜냐하면 나는 이 하나님의 의라는 이 말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나는 그 말을 모든 교회 교사들의 반응에 따라서 철학적으로 형식적 혹은 능동적으로 이해하도록 배워왔기 때문이다. 이 능동적 의에 의하면 하나님은 의이고 죄인은 불의한자로 벌하신다는 것이다.[(10) opcit .p 17] 루터가 한 간단한 이 말 속에는 그가 하나님의 의의 표준에 대한 심각한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의를 至善至高의 의로서 그 표준대로 인간에게 요구하시고 그 의에 미달하는 모든 ㅇ니간은 일률적으로 죄인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옳바르게 파악하는데 이른것을 나타낸 말이다. 모든 인간은 이와같은 하나님의 공의를 먼저 발견할 때에 자기 자신을 옳바르게 볼 수 있는데 이르는 것이다. 이와같은 사실은 사도바울의 교훈에도 나타나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의 표준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잘 나타낸 말씀이다. 그것은 완전히 무죄하며 거룩하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의 표준이다. 그것은 타락전 하나님의 영광스런 형상대로 지음 받았던 죄없는 인간의 본래의 형상이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을 지으셨으므로 그러한 사람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성경이 모든 인간을 일률적으로 범죄자로 몰고 의인은 없다고 판단하시는 기준이 바로 이와같은 하나님의 심판기준에 기인하는 것이다. 루터가 바로 이와같은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을 파악한데 이르렀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이르기를 "그러나 나는 수도사로서 비난받지 않을 생활을 하고 있을 경우에도 하나님 앞에는 양심의 맹렬한 고민을 갖는 죄인이라 느끼고 내 죄를 보상하는 행위에 의해서도 '이것은 회개, 금식,수도, 고행으로 보상해 보려고 노력한 것을 말함) 하나님은 좋게 보실 것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죄인을 벌하시는 의로운(공의로운) 하나님을사랑할 수가 없고 오히려 미워했다. "두려워 경원한 것을 뜻함" [(11) ibid] 고하였다.

이 말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루터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그가 구원받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애섰는가 하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자신의선행이나 수도나 고행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파악한 것이요 그럼에도 그는 피나는 노력으로 온전한 의에 이르려고 부단히 애쓴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구원은 모든 사람이 온전한데 이르려는 간절한 구함이 있어야 그 영광에 이르는 것이다.

이 노력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그러한 마음이 루터에게 일어나게 하신 것이거니와 성경에는 이같이 "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신다"(롬 2:7) 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다음에는 루터가 "하나님의 의"를 발견한 진술을 들어 보기로한다.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나는 밤낮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중 드디어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계시되고 있다) 라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한 문장과의 관련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의란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 즉 신앙에 의해서 사는 종류의 의란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복음의 의로서 의롭기 하는 수동적인 의를 말하고 이것은 마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기록된 그대로인 것이다. 이제야 나는 마치 새로 태어난것 처럼 느끼고 또 열린문을 지나서 낙원에 들어간 것으로 느꼈다. 나는 기억하고 있는 한, 성경 말씀을 찾고 다른 말씀 안에서도 그것과 비슷한 것을 찾아 내었다. 즉,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우리들 안에서 하시는 것이고 하님의 강력한 힘 그것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강력하게 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지혜란 그것으로 하나님이 우리들을 슬기롭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 처럼 유사어를 찾아낸 것이다)... "[(12) ibid.pp.17-18]

루터가 구원을 받기 까지에는 먼저 그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그의 심령이 개발되면서 의로 성숙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고한 선과 의의 표준을 아는데 까지 이르렀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깨끗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의로운 표준대로 흠과 티가 없는 온전한 의인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한 자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표준에 이를 수 없었으며 하나님 앞에 떨며 좌절하는 상태에 까지 이른것을 볼 수 있다. 이제 다시 루터의 회고록을 보면 "내가 수도사 였을때 나는 갈수록 아주 버림받은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육의 정욕을 생각할 때 마다 즉 내가 어떤 악한 뜻과 육적인 욕심과 분노와 미움과 형제에 대한 원망을 품을때 마다 경험한 것이었다.나는 내 양심을 무마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모양으로 노력 하였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자기에와 육의 정욕이 언제나 되돌아 와서 나를 안절부절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13) 이장식 op.cit p 39]

이와같은 루터의 경험은 롬 7:14-24 까지에서 말한 사도 바울의 경험과도 일치한다. 루터는 이와같이 자기의 노력으로는 이제 아무런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음을 알고서 다른 구원의 방법이 성경에 있는가를 모색하기 위하여 이제는 성경속에서 어떤 희망이 있을까 하여 오랜시간을 성경연구에 몰두하다가 그는 복음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한 것이다.

 

3. 복음 신앙에의 전환

 

 

다음으로 우리가 관찰하고 숙고해야 할 문제는 루터가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는데 이르는 결정적인 동기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점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시대나 종교개혁 시대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어느시대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을때는 없었다.그러나 그 보음을 들으면서도 그 복음의 영광의 빛을 받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의 율법신앙의 관념에 잡혀 있어서 율법의 눈으로 복음을 볼때는 그 복음의 광채가 그들의 심령에까지 비취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사실을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그러나 저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후 3:14-16).

여기서 말하는 수건은 모세의 얼굴을 가리었던 수건을 들어서 오늘날 모든 인간의 심령을 덮고 있는 율법관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관념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였고 오늘날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복음의 영광을 볼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어떻게 그것(율법 관념과 사상)을 벗고 복음의 광채를 보게 되었는가를 관찰하려는 것이다.

루터는 그가 수도사로서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그 당시 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고 또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최대한 다 경주하였다.루터는 교회가 주는 실패없는 만능약 통회의 성례전으로도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만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을 가지며 악을 미워하며 완전한 광채를 하고 자기죄를 고백하고 신부로 부터 사죄의 선언을 받으면 사죄가 되고 하나님과 일치함을 확신하게 된다고 가르침을 받았든 것이다. 실은 이러한 완전한 회개를 할 수 없는 경우에는 공포심이 유도하는 불완전한 회개를 성례전의 은혜가 보충하여 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루터를 만족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무리 자주 고백을 했어도 그 맹렬한 고백이 사랑의 회개로 변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14)ibid.pp 40-41]

루터는 성자들의 저서와 전기도 많이 읽었다.그는 어거스틴의저서와 또 신비주의자들의 책도 읽엇다. 그래서 그는 신비주의들이 가르친 방법도 알려고 노력했다. 그는 하나님과 자기 영혼이 연합하는 경험을 갖기 위하여 아레오파키테와 보나벤튜라의 취한 방향을 따르고자 했다. 또 그는 베르나드 의 길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명상하는 가운데 자신을 잃어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이 말한 경험은 루터에게 있어서는 부인되었다.[ (15)ibid.p 43]

그는 당시 교회에서 가르치는 모든 노력과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하여 완전한 구원에 이르려고 최선의 노력을 모두 동원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그는 좌절당했으며 때로는 실의에 빠졌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제 그는 자기의 노력은 포기함에 이르렀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율법신앙에서 복음신앙에로 전환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되는것이다. 그는 이제 다른 방도의 구원의 길을 찾아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가 성경을 연구하게 된 것은 다른 방법이 있는가를 모색하는 행동이요 그가 먼저의 방법을 포기한 뒤에야 구원이 발견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심령을 덮고 잇는수건이 벚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신앙 의인의 교리를 발견하고는 너무나 기쁨에 가득차 큰 환희와 은혜로 충만하였따. 그는 이 구원의 진리를 믿음으로 얻는 것을 발견하고는 "오직 믿음으로 만" "오직 그리스도로만"이라는 말을 자주 그리고 힘있게 사용하엿는데 그가 이 진리를 발견하기 전에는 자기 노력에 의지하여 율법신앙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그가 그리스도를 발견한 이후로는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그의 공로에만 믿음으로 의존하는 신앙의 전환을 가지게 된 것을 뜻하는 것이다.이와같은 신앙의 전환은 모든 복음적인 중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12사도를 위시하여 특히 사도 바울은 율법신앙에서 복음신앙에의결정적인 전환을 뚜렷하게 경험하므로서 그의 서신에 율법과 복음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가르친 내용들이 많은 것이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요 부흥사인 스펄젼의 경험에서도 그가 신앙의 전환을 분명히 체험한 사실을 볼 수 잇다. 스펄젼은 그의 체험기"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였는가"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나는 기독교국에 태어나고 나의 양친도 기독교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때가지 기독교복음의 자유성과 단순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내가 살고있던 거리의 예배당을 두루 헤매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은 수없이 들었고 익었으나 나는 여전히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한 작은 감리교회에서 사 45:22의 "땅끝의 모든 백성들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서... 나는 주님을 바라볼때 구원을 받았던 것이빈다..."(16) 하였다.[(16) R.A 토레이 '성령의 세례" 박지용역 성령출판사 1967.1. pp .123-129 ].

이와같은 복음신앙에의 전환을 자기와 자기 공포에 의한 오직 복음만을 바라보는 신앙으로의 방향전환을 뜻하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와 자기 행동에 의하여 구원이 결정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갖지 못하는 것이다.

 

 

맺음

 

루터가 복음을 일찌기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모든 최선을 다하다가 지치고 좌절된 후에야 깨닫게 된 것도 그가 율법 관념과 율법 신앙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았음으로 얻어진 것이다. "오직 믿음만으로!""오직 그리스도 만으로! "라고 하는 표어들은 루터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자기 노력으로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그저 바라봄으로 구원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그때 그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뱀에서 물렸을때 구리뱀을 쳐다봄으로 치유를 얻었던 사실을 가리켜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모형이라고 하셨다 (요 3:14-15). 이와같은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얻게되는 것이다.

또한 사도바울은 이같이 율법의 수건을 벗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볼때 변화와 구원을 얻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홈지기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와대 청원했습니다.  (0) 2020.07.23
노령화되는 교회  (0) 2020.07.20
아리랑에 담긴 秘密  (0) 2020.06.16
종교에 대한 여러 논의  (0) 2020.06.16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0) 2020.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