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G.W.F. Hegel
정신현상학Phaenomenologie des Geistes(1807)
서문Vorrede
번역: 전대호
1.
이런 설명, 의례 서문이라는 이름으로 책 앞에 던져놓는 설명 - 그러니까 작가가 품은 목적이나 책을 쓰게된 동기나, 같은 대상에 관한 과거와 현재의 연구들이 작가가 보기에 여기 이 책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등에 관한 설명 - 이런 설명은 철학적인 책에서는 거추장스러울 뿐 아니라, 철학의 본성을 생각해보면 심지어 부적절하고 일을 망치는 것으로까지 보인다. 왜냐하면 철학에 관해 서문에서 어떻게 무엇을 얘기하건 간에 - 예를들어 연구경향과 연구관점과 일반적 내용과 결론을 연구가 이루어진 순서대로 서술하거나, 여기저기 흩어진 주장들과 강조점들을 묶어 진실이라 늘어놓거나 - 그렇게 얘기하기가 철학적인 진실을 펼치기에 적당한 방법으로 여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 또한 철학은 그 근본상 특수한 것들을 제 안에 품은 일반을 원소로 하여 이루어지므로, 여타 학문에서보다 더 쉽게 다음과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목적 혹은 최후결론이면 학문 그 자체가 다 드러났다, 심지어 가장 완벽하게 학문의 근본이 드러났다, 따라서 그 목적이나 결론을 풀어 늘어놓은 내용은 별로 중요치않다. 반면에 예를들어 해부학의 경우, 즉 몸의 부분들을 죽은 상태로 고찰하는 학문의 경우, 사람들은 일반표상만으로 이 학문의 내용을 다 알았다고 여기지않고 더 나아가 특수한 것을 알기위해 노력해야 함을 믿는다. - 뿐만아니라 학문이라는 이름을 제 맘대로 붙인 여러 지식다발과 관련해서는, 목적이나 그 밖의 일반에 대한 논의와 그저 생각없이 서술하는 논의가 구분되어있지 않아서 항상 내용 그 자체에 관해, 즉 이 신경 이 근육 등등에 관해 얘기된다. 이와는 달리 철학에서는 목적이나 일반을 따로 얘기하는 방식이 사용되면서도, 또한 동시에 이런 별도의 얘기방식이 진실을 담기에는 부족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듯 하다.
2.
어떤 철학적 작업이 같은 대상을 다룬 여타의 노력들과 맺는 관계를 규정하게 되면 사실 구경꾼들의 관심만을 끌어들일 뿐, 진실을 아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이 오히려 어둠에 묻히게 된다. 참과 거짓의 원수관계를 속으로 믿는 구경꾼은 기존의 학문체계에 대한 동의나 반박을 기대하기 마련이며, 그래서 기존체계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서 아싸리한 동의 또는 아싸리한 반박만을 보기 마련이다. 구경꾼은 학문체계의 다양함이 앞으로 나아가며 펼쳐지는 진실의 움직임임을 알지못하고, 그 다양함 속에서 다만 싸움을 본다. 꽃이 필 때 꽃봉오리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꽃이 봉오리를 반박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열매는 꽃이 거짓이었음을 선언하고 꽃이 차지했던 나무의 진실이라는 자리를 차지한다고. 이 여러 모습들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서로 공존할 수 없으므로 서로를 밀어낸다. 그러나 이 흘러가는 모습들의 본성은, 이 모습들이 하나의 살아있는 조직에 참여하는 요소가 되게 한다. 이 살아있는 조직체의 하나임 안에서 요소들은 서로 싸우지않을 뿐 아니라, 각자 다 꼭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요소들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필연성이 바로 전체의 삶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학문적 체계를 상대로 싸우는 싸움꾼은 자기자신이 위와같다고 여기지않는 경향이 있어서, 대개의 경우, 폭넓게 감싸는 의식으로 자기자신을 일면성으로부터 풀어 자유롭게 유지하면서 자신을 서로 싸우는 듯이 보이는 요소들 중 한 요소로 파악하지 못한다.
3.
목적이나 결론이나 관계를 밝힐 것을 요구하고 또 요구에 맞추어 밝히는 것이 그러나 여전히 근본적으로 중요한 일이라 여겨질 수도 있겠다. 목적과 결론이 아니라면 그 무엇을 통해 한 철학책의 알맹이를 보겠는가, 또한 같은 영역에서 세월을 통해 만들어진 것과의 차이를 말하는 방법 외에 어떤 방법으로 그 알맹이를 더 분명하게 보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식의 밝힘이 앎의 시작 이상으로, 실현된 앎으로 여겨진다면, 그건 사실상, 사태 자체에서 눈을 돌리고 진지함과 노력의 흉내만 내면서 진지함과 노력 없이 가기위해 꾸민 잔꾀로 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태는 목적이 아니라 목적의 실행으로 완성되며, 결론이 실현된 전체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실현된 전체는 결론과 결론에 이르는 과정 전체이므로; 독자적으로 고립된 목적은 생명없는 일반이어서, 마치 경향이 다만 본능적인 욕구인 것처럼, 아직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며, 벌거벗은 결론은 실현이 뒤에 남긴 시체일 뿐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두 학문체계 사이의 차이는 다만 사태의 경계선일 뿐이다; 경계선은 사태가 끝나는 곳에 있다, 다시말해서 경계선은 사태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 말한 바와같이 목적과 결론과 편가르기와 편들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노력은 겉보기와는 달리 아주 쉽다. 이런 식의 공부는 사태 자체를 움켜쥐는 대신 항상 사태 너머로 날아다니기 때문이다, 사태 안에 머물러 자기자신을 잊는 대신, 항상 다른 사태를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제 곁에만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사태 곁에서 사태에 몰두하는 흉내는 내지만. - 가장 쉬운 일은 크기도 있고 무계도 있는 것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것이며, 보다 어려운 일은 그것을 움켜쥐는 일이며, 가장 어려운 일은 이 둘을 종합하여 사태자체를 펼쳐놓는 일이다.
4.
딱딱하게 굳은 삶의 <그냥>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일, 즉 배우는 일의 시작은 언제나, 일반적인 원리들과 관점들을 배우는 것에서, 우선 사태에 관한 생각에까지 기어오르는 것에서, 좋다, 사태에 근거를 달아 지지하거나 반박하는 것에서, 구체적이고 풍요롭게 가득찬 것을 이렇다 저렇다 규정해서 파악하는 것에서, 사태에 대해 적절한 식견과 진지한 판단을 내놓을 줄 아는 것에서, 시작은 언제나 이런 것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배움의 시작은 그러나 곧 가득찬 삶의 진지함에게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다. 충만하고 진지한 삶은 사태자체를 경험하러 들어간다. 물론 더 덧붙여야 할 것은, 그 경험의 바닥으로부터 진지한 개념들이 솟아오른다는 것, 그리하여 사태에 관한 앎과 탄정이 대화 속에서 올바른 제자리를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5.
진실이 있을 수 있는 참된 모습은 오직 진실에 관한 학문적인 체계일 수밖에 없다. 철학이 학문의 모양에 다가가도록 함께 노력하는 것,- 앎을 향한 사랑이라는 철학의 이름을 버리고 실현된 앎일 수 있도록,- 바로 이 것이 내가 의도하는 바이다. 앎이 학문이어야만 하는 내적필연성은 앎의 본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에대한 만족스런 설명은 오직 철학 자체를 펼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한편 이래야만 하는 외적인 필연성은, 개인성격이나 개별동기의 우연성을 옆에 치워놓고 일반적으로만 말한다면, 내적필연성이 마치 시간처럼 여러 모양으로 변하며 자신의 요소들을 규정된 어떤 것들로 떠올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철학을 학문으로 격상시킬 시기가 왔다는 것, 바로 이를 분명히 밝히는 일이 그러므로 철학을 학문으로 높이는 목적을 품은 이 책을 위한 단 하나뿐인 올바른 정당화일 것이다. 이 책은 그 목적의 필연성을 제시할 것이며, 그렇다 이 시도는 또한 동시에 그 목적을 실현할 것이다.
6.
진실의 참모습을 학문성으로 둠으로써 - 바꾸어말하면, 진실이 오로지 개념만을 원소로 가진다고 주장함으로써 - 내가 이 시대에 매우 폭넓고 권위있게 받아들여지는 생각과 그 생각의 귀결들과 모순을 이루는 입장에 섬을 나는 안다. 그러므로 나와 그런 생각 사이에 있는 모순에 관해 설명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비록 그 설명이 여기 서문에서는, 나의 적수들의 언성높인 소리처럼 똑같이 언성높인 보장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만약 그들의 말대로 참된 것이 오직 그런 모습으로만 혹은 더나아가 그것으로만, 즉 직관이라고도 불리우고 절대에 관한 순간적인 앎이라고도, 종교라고도, 있음이라고도 - 신의 사랑의 중심 안에서의 있음이 아닌 신의 있음 자체로 여겨진 있음이라고 - 불리우는 그것으로만 있다면, 그렇다면 철학을 펼치는 데에 있어서도 개념이 아닌 개념의 반대모양이 요구될 것이다. <절대>는 개념화되는 것이 아니라, 직관되고 느껴져야하며, 절대의 개념이 아니라 절대의 느낌과 직관이 앞장서 논의를 이끌어야 할 것이다.
7.
이런 식의 요구가 등장함을 일반적인 맥락 속에 넣은다음 스스로를 의식한 정신이 현재 서있는 단계에서 바라보자. 오늘날의 정신은 분명히 그냥 한덩어리인 생명으로부터 벗어나있다, 물론 예전엔 이런 한덩어리 생명을 정신이 생각의 필수요소로 끌어들였었지만.- 그냥 믿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있다, 자신과 근본(Wesen)의 화해에 대해 또한 근본이 제 안에도 제 밖에도 늘 함께있음에 대해 가졌던 확신의 믿을만함과 만족스러움으로부터 의식은 이미 벗어나있다. 정신은 이런 믿음들을 벗어나, 거리낄 것 없는 자기자신으로의 회귀라는 반대쪽 극단으로 갔을 뿐 아니라, 이미 이 새로운 극단도 벗어났다. 정신은 뿌리박힌 삶을 잃었을 뿐만아니라 그 상실을, 그 상실의 실제내용인 유한성을 의식하기에 이르렀다. 방랑자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자신이 불행함을 속으로 되내이며 이를 부끄러워 하면서 정신은 이제, 제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을 철학에게 요구하지도 않고, 옛날의 한덩어리 풍요로운 있음에 철학을 통해 비로소 다시 도달할 것을 철학에게 요구하지도 않는다. 정신의 이러한 요구 앞에서 철학은 닫힌 실체를 열지도 않고, 실체를 자기의식으로 끌어올리지도 않고,- 혼돈된 의식을 생각된 질서와 개념의 단순성으로 되돌려 놓지도 않고, 또는 생각의 구분들을 뒤엎어 서로다른 개념들을 눌러버림으로써 근본에 대한 느낌을 만들어내지도 않고, 통찰도 감동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아름다움, 성스러움, 영원함, 종교와 사랑 등등의 말은 입질을 유도하기 위해 필요한 미끼로만 쓰일 뿐이다. 개념이 아니라 도취가 차갑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태의 필연성이 아니라 부글거리는 감동이 실체의 풍요를 펼치고 유지해야 한단다.
8.
이런 요구와 맞물리는 것으로, 감각적인 것과 속된 것과 개별적인 것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들을 건져 별을 향해 눈돌리게 하겠다는, 매우 열성적이고 심지어 거의 호들갑에 가깝게 열을내는 노력도 있다; 마치 사람들이 오늘날 신을 완전히 잊고 진흙탕에 지렁이처럼 만족하고 살기라도 하는 듯이. 예전에 사람들은 하늘을 장황하고 풍요로운 생각과 그림으로 꾸몄었다.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의 의미를, 자신을 하늘과 연결하는 실에서 찾았다; 하늘 가로, 여기 이 지금에 머물지않고, 눈길은 이 지금을 벗어나 신적인 근본을 향해, 말하자면 <저편의 지금>을 향해 미끄러졌다. 정신의 눈은 강제적으로 땅으로 돌려져야했고 강제적으로 땅에 묶여야 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오직 하늘에만 있던 맑음을 뿌옇고 흐릿한 여기 이 곳의 감각에 집어넣는 일이, 이 곳의 현재에 그 자체로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경험이라는 이름아래 관심과 권리를 얻게 되었다.- 지금은 어느새 다시 반대의 위기가 도래한 것처럼 보인다, 감각이 너무나 지상에 묶여있어서 이를 풀기위해 예전만큼의 강제가 또 필요한 듯이. 정신은 지금 너무도 가난해서, 마치 사막을 헤매는 사람이 단 한 그릇의 물을 갈망하듯이, 신에 대한 남루한 느낌만이라도 타는 목마름을 수그리기 위해 열망하는 것같다. 정신에게 만족감을 주는 그것, 바로 그것을 보면 정신이 얼마나 궁핍한 상태에 있는지 측정할 수 있다.
9.
이와같이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주는 데는 인색한 모습은 그러나 학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오직 감동만을 찾는 사람, 지상에서 자신이 다양하게 정해진 모습과 자신의 생각을 안개 속에 감추고 불분명한 신과 불분명한 만끽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마 잘 알 것이다, 어디에서 그런 것들을 찾을 수 있는지; 그는 혼자서 무언가 열렬히 상상하면서 흠뻑 쏟아져버리기 위해 쓸 도구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감동되고 싶은 마음을 경계해야 한다.
10.
더군다나 이런식으로 학문을 포기하는 만족감이, 이 감동과 도취가 무언가 학문보다 더 높은 것이라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 이런 예언자연설은 정확히 중심에 깊은 심연에 머문다는 생각으로 규정들을 천시하고, 의도적으로 개념과 필연성으로부터도 유한에만 머무는 회귀(Reflexion)로부터도 거리를 두려한다. 그러나 텅빈 너비가 있듯이 텅 빈 깊이도 있다. 유한한 다양 속으로 부어져 다양을 묶을 힘이 없는 실체의 펼쳐짐이 있듯이,- 예언자연설은 내용없는 진함일 뿐이다, 다만 힘만 있고 펼쳐짐없이 유지되는, 그러니까 피상적임과 다를 바가 없다. 정신의 힘은 표현된 만큼 크고, 정신의 깊이는 스스로 열어서 펼치고 기꺼이 자신을 잃는 그 만큼 깊다.- 더군다나 이 개념없이 덩어리뿐인 앎이 자신의 독특함을 근본 안에 담갔다고 참되고 성스럽게 철학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다음의 사실을 숨기는 것이다: 신에게 충실하기는커녕 분수와 규정을 무시함으로써 스스로에게는 작위적인 내용을, 신에게는 자신의 제멋대로의 선택을 짐으로 얹어준다는 사실을.- 걷잡을수 없는 덩어리의 부글거림에 자신을 맡기고 지성의 과제와 자기의식을 숨기면서 그들은, 자기들이 잠 속에서 신으로부터 지혜를 받는 신의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그들이 실제로 잠 속에서 받아 낳는 것은 그리하여 꿈일 뿐이다.
11.
다른 한편 우리의 시대가 새로운 단계로의 이행과 탄생의 시대라는 것을 알아보기가 어렵지않다. 정신은 자신의 정해져있음(Dasein)과 생각이 이루었던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와 이 세계를 과거로 돌리고 자기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중이다. 정신은 물론 한 순간도 쉬지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아기가 오래동안 고요히 영양분을 받은 후 첫울음소리로 단지 크기만 느는 과정을 부수고- 질적인 도약- 이제 아기로 태어나는 것처럼, 스스로 짓는 정신도 천천히 조용히 새로운 모습을 향해 익어가면서 이전 세계가 지은 집의 부분들을 차례로 부순다. 이전 세계의 흔들림은 다만 산발적인 증상으로만 넌지시 알려진다: 어리석음과 지루함, 기존의 것에 스며드는 지루함, 모르는 것에 대한 불분명한 예감 등은 무언가 다른 것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파발들이다. 차츰 심해지는 이 부스러짐이 전체의 체질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것이 솟아오름으로써 이 부스러짐도 마감될 것이다. 한번의 섬광이 단 한번에 새로운 세계의 윤곽을 세울 것이다.
12.
그러나 이 새로움은 마치 갓난아기가 그러하듯이 완전하게 실현되어있지않다; 이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첫 번째 출현은 고작해야 그냥 새로움, 혹은 새로움의 개념일 뿐이다. 터를 닦았다고 집을 다 지은 것이 아니듯이, 이제 도달된 전체의 개념이 그대로 전체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도토리나무의 튼튼한 밑둥과 펼쳐진 가지와 빽빽한 잎사귀를 보기 원할 때 누군가 우리에게 나무 대신 도토리 한 알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만족하지 않는다. 이와같이 정신세계의 왕관인 학문도 그 시작에서 완성된 것은 아니다. 새로운 정신의 시작은 다채로왔던 자라남의 모습들이 한꺼번에 확 뒤집히면서 나오는 산물이다, 여러 겹으로 얽힌 길을 걸어야만 얻는 상이요, 또 그렇게 여러겹인 노력과 수고를 통해 얻는 상이다. 새로운 정신의 시작은, 단계적인 진행과 펼쳐짐으로부터 자신 안으로 되돌아들어간 전체, 길을 거쳐 되어진 단순한 전체개념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전체의 실현은, 지나가버려 요소가 된 모양들이 자기들을 다시 새롭게 새로운 원소들로 이제 되어진 의미 안에서 새로 펼쳐 자기들에게 새 모양을 주는 것에 있다.
13.
새로운 세계의 첫 나타남은 비록 다만 단순한 하나로 숨어있는 전체, 혹은 전체의 일반적 토대(Grund)일 뿐이지만, 의식에게는 지나간 여러 모습들의 풍요가 기억속에 여전히 함께있다. 새로 나타나는 모습에 내용이 아직 구체화되지않았고 펼쳐지지도않았음을 의식은 아쉬워한다; 하지만 의식이 더욱더 아쉬워하는 것은, 구분되는 것들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서로간에 고정된 관계설정을 통해 질서지우는 것을 가능케하는 <형식>이 완성되지않았다는 점이다. 형식을 완성하지않는 한, 학문은 일반적으로 이해될 길이 없으며, 따라서 학문이 몇몇 개인의 배타적인 소유물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배타적인 소유물: 학문이 오직 개념이나 속알맹이로만 있을테니까; 몇몇 개인에게만: 널리 퍼지지못한 학문은 개별적으로만 있는 것처럼 나타날테니까. 완전하게 규정된 것만이 비로소 열려있고 파악가능하며 배울 수 있고 모든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 있다. 학문을 이해할수 있는 모양으로 만드는 일은, 모두에게 또한 공평하게 모두를 위해 학문으로의 길을 열어주는 일이다. 지성을 통해 이성적인 앎에 이르겠다는 것은 학문의 길에 나서는 의식이 내놓는 정당한 요구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생각Denken> 즉 <순수한 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란 이미 익숙한 것, 즉 학문과 학문없는 의식이 공유하는 것, 의식이 학문에 첫발을 내디딜 때 밟는 첫발판이기 때문이다.
14.
이제 막 시작하는 학문은, 시작이기에 세부내용이 채워져있지도 않고 형식이 완벽하지도 않아서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비난이 새학문의 근본을 향한 비난이라면, 완성할 것을 요구하는 소리를 학문이 귀담아 듣지 않는 것이 부당한 만큼이나, 적절치못하고 부당한 비난일 것이다. 완성의 요구에 무감한 새학문과 새학문의 근본을 향한 비난, 바로 이 대립이 현재의 학문짓기에게 싸움거리를 주는 그러면서도 현재의 학문짓기가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핵심 매듭인 것으로 보인다. 한 무리는 손에 잡히는 내용의 풍요와 이해할수있음을 추구하고, 다른 한 무리는 차근차근 이해되는 것을 천시하면서 그냥 단번에 알아보는 이성적임과 신적임을 추구한다. 비록 앞의 무리가, 진리의 힘에 의해서인지 혹은 뒷무리의 습격에 의해서인지는 몰라도, 침묵하게 되었지만, 또한 사태의 근본에 관한 논의에서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느끼고있지만, 완성에의 요구는 여전히 충족되지않았다. 앞무리의 침묵은, 절반쯤 뒷무리의 승리를 의미하지만, 절반쯤 또한 지겨움과 무관심을 의미한다; 끝없이 기대감을 품게 하고는 약속을 채우지않는 이들 앞에서 나타나곤 하는 지겨움과 무관심.
15.
내용과 관련해서는 뒷무리가 때로 내용의 크기를 늘리기에 너무도 쉬운 입장에 서있다. 이미 알려져있고 정리되어있는 재료들을 자기들 마당에 한무더기 끌어들이는 것으로 뒷무리의 내용늘리기작업은 완성된다. 또한 그들은 예외인 것들과 기괴한 것들을 주로 다룸으로써, 앎이 나름대로 이미 소화해놓은 일반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더 잘아는 듯한 그래서 더 불규칙적인 것을 다스리는 듯한 그리하여 모든 것을 절대적인 뜻(Idee) 아래 복종하게 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절대적인 뜻을 모든 것 안에서 발견한 듯한 절대적인 뜻이 부피를 갖춘 학문으로 자라난 듯한 착각을 심어준다. 그러나 이 부피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하나의 동일한 것이 자기자신을 여러 모양으로 만듦으로써 그 부피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것을 틀도 없이 그저 그냥 반복함으로써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같은 하나가 서로 다른 재료에 외적으로 적용되어 정말 지루한 헛 차이만을 잡아낸다. 그 하나만 독자적으로 떼어놓고 보면 충분히 옳은 뜻이 사실상 계속 출발점에만 머물러있을 뿐이다, 뜻의 펼쳐짐이 이런 식으로 하나의 같은 공식을 반복하는 것 뿐이라면. 아는 주체에 속한 하나의 고정된 형식을 눈앞에 있는 것에 두루 펼침으로써 재료들은 밖으로부터 젖어들어 이 움직임없는 벽돌 속에 잠긴다, 이렇게 해서는, 내용에 대한 제멋대로의 착상이 완성이 아닌 것처럼, 앞무리가 요구했던 것을, 즉 자신 스스로로부터 솟아나오는 풍요와 모양들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여 만드는 차이를 향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이는 오히려 한 색깔뿐인 형식주의이다; 다만 재료의 차이에 의존해 차이를 만들고, 이 또한 그 재료가 이미 준비되어있고 알려져 있기에 가능하다.
16.
이런데도 형식주의는 그 <한 색깔임>과 추상적 일반성이 <절대>라고 주장한다; 형식주의자는 강조하기를, 이 <한 색깔>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절대적인 관점에 도달하고 그 관점에 굳세게 머무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도, 그저 공허하게 달리 생각할 가능성을 들이댐으로써 한 생각을 충분히 반박했다고 여기면서 바로 이 공허한 가능성, 즉 일반적인 생각만을 실현된 앎이 가질 모든 좋은 가치를 차지할 앎이라고 여겼던 때가 있었듯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도, 이 실현되지않은 일반적인 뜻에 모든 가치가 부여됨을 본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도 차이와 규정을 없애는 일이 혹은 더 분명히 말해서 차이와 규정을 구체성없이 정당화없이 텅빈 심연 속으로 던져버리는 일이 <자유롭게 감싸는spekulativ> 고찰방식으로 통함을 본다. 어떤 정해진 무엇을 절대 안에 있는 것으로 고찰한다는 말을 이들은 이렇게 이해한다: 일단 어떤 것에 대해 얘기하긴 하지만, 절대 즉 A=A 안에서는 그런 어떤 것이 전혀 없고, 대신에 절대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이다. 절대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같다라는 이 외톨이 앎은, 구분하고 채우고 채울 것을 요구하는 앎과 대립한다.- 달리 말한다면, 사람들이 말하곤 하듯이, 그들의 절대는 모든 암소가 검게 보이는 밤이라 불리울 수 있겠다, 그들의 외톨이 앎은 공허하고 어린 앎이다.- 최근의 철학이 비판하고 멸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또 만들어낸 형식주의는 그 불충분함이 알려지고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현실에 대한 앎이 자신의 본성을 분명히 알게 될 때까지, 학문세계에서 사라지지않을 것이다.- 일반적인 표상을 먼저 가지면, 그 표상 아래 이루어질 나중의 일들을 파악하기 쉬워지는 것 역시 사실이므로, 나중에 이루어질 것의 윤곽을 여기서 넌지시 비추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또한 동시에 그 윤곽을 보임으로써 철학적 앎을 방해하는 몇가지 굳어진 모양들을 떨어내려 한다.
17.
내가 아는 바로는, 물론 체계 자체를 펼쳐놓음으로써 정당화시켜야 하겠지만, 모든 것은 결국 여기에 달려있다: 참된 것을 실체(Substanz)로 뿐만아니라 또한 마찬가지로 주체(Subjekt)로 파악하고 완전하게 진술하는 것에. 또한 명심해야 할 것은, 실체성이 앎에게 <있음> 혹은 <그냥>일 뿐만아니라, <그냥>인 앎 혹은 일반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신이 하나인 실체라는 말에 한 시대가 화를 낸 이유는, 첫째 만일 그렇다면 자기의식이 유지되지않고 함몰한다는 본능적인 느낌 때문이었고, 둘째 정반대로, 그저 생각뿐인 생각, 일반적인 것, 즉 마찬가지로 구분없이 단순하고 움직임없는 실체성을 위해서였고, 그리고 이제 셋째로, 만일 생각을 실체의 그대로 있음과 결합함으로써 이 <그냥> 결합 혹은 직관을 생각으로 여기겠다면,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혹시 이러한 예지적 직관이 또다시 게으른 단순성으로 주저앉아 현실을 현실적이지않은 방식으로 펼쳐보이는 것이 아닌지.
18.
더나아가 살아있는 실체는, 참되게 말하면 주체인 있음, 다시말해서 참되게 현실적인 것, 오직 자기자신을 내려놓는(setzen) 움직임으로서 혹은 다르게 되면서 여전히 자기자신과 <연결하는 움직임Vermittlung>으로서 참되게 현실적인 것이다. 살아있는 실체는, 주체로 고찰될 경우, 순수하고 단순한 <아니라하는 힘Negativitaet>이며 따라서 단순한 것의 갈라짐, 혹은 이렇게 갈라져 서로 무관심해진 둘 또는 서로 적이된 둘을 또한번 아니라함으로써 이루는 서로 맞선 둘의 같음이다; 오직 이러한 다시 이룬 같음, 혹은 다른 것 안에서 제게로 돌아옴만이 참된 것이다.- 옛날의 하나임이 그냥 그대로, 또는 그냥 <그냥>이 참된 것이 아니다. 참된 것은 <자기자신이 됨>, 움직임의 끝을 목적으로 미리 놓아 출발점으로 삼는 동그라미, 그리고 오직 실체 움직임과 끝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동그라미이다.
19.
따라서 신의 삶과 신의 앎을 자기사랑의 놀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만일 그 안에 진지함과 고통과 <아님>의 작용과 오래참음이 없다면, 감동뿐인 감동으로 더나아가 바보짓으로 주저앉는다. 신의 삶 그냥 그대로는 맑디맑은 자기자신의 하나임이요 같음이어서 다름이나 달라 낯설어짐이나 낯설음의 극복이 전혀 진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그냥>은, <자기자신에게 있음>이라는 신의 본성을 그리하여 모양이 스스로 움직임을 완전히 간과한 추상적인 일반성에 불과하다. 모양(Form)이 근본(Wesen)과 같다는 말을, 다만 <그냥 그 자체>를 또는 근본을 알면 다되니까 모양은 몰라도 된다는 말로 이해한다면, 그건 오해이다.- 절대적인 근본문장이 또는 절대적인 직관이, 근본문장을 더 발전시키는 일이나 직관을 풀어놓는 일을 면제해준다는 생각도 오해이다. 모양이 근본에 그토록, 그러니까 근본이 근본에게 근본적인 만큼이나 근본적이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근본은 다만 근본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즉 근본이 그냥 실체 그대로 또는 신의 순수한 자기직관으로 파악되고 표현될 것이 아니라, 또한 만찬가지로 모양으로 또 펼쳐진 여러 모양들의 풍요로 파악되고 표현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근본은 비로소 현실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표현된다.
20.
참된 것은 전부이다, 그리고 전부는 펼침으로써 자신을 완성하는 근본이다. 절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근본적으로 산물이라는 것, 그가 맨 끝에 비로소 참된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절대의 본성이다; 절대의 본성: 현실적인 것, 주체, 자기자신이 됨. 절대가 근본적으로 산물이라는 파악이 겉보기에는 틀린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조금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렇지않음을 알게 된다. 시작, 근원, 혹은 절대를 맨처음에 그리고 그냥 얘기하면, 이런 절대는 다만 일반적인 것일 뿐이다. 내가 “모든 동물“이라고 말하면서, 이 한마디가 동물학이라 주장한다면 아무도 나를 인정하지않을 것과 마찬가지로, 신, 절대, 영원 등등의 말이 그 말 안에 담긴 것을 발설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사실상 오직 이런 말들만이 그냥 그 자체인 직관을 표현할 유일한 말들이다. 이런 말들보다 더 나아감, 즉 단 한 문장으로라도 넘어감은, 다시 싸담아야 할 달라짐, 즉 <연결하는 움직임>이다. 그런데 바로 이 연결움직임(Vermittlung)이 혐오의 대상으로 찍혀있다, 절대는 이 연결움직임이 아니고 절대 안에는 이 움직임이 전혀 없다는 것 이상 어떤 의미라도 이 움직임에 주어지면 절대적인 앎이 포기되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21.
그러나 이 혐오는 사실상 연결움직임과 절대적 앎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다. 왜냐하면 연결움직임이란 다름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자기와 같음> 또는 <자신 안으로 돌아옴>, <나에게 있는 나>라는 요소, 순수한 <아님>, 혹은 단순한 <됨>이기 때문이다. 나 또는 됨, 즉 이 <연결하며 움직이기>는 바로 이들 자신이 단일하기 때문에, 바로 그래서 되어가는 <그냥 그 자체> 다시말해서 <그냥 그 자체> 자체이다.- 그러므로 <자기자신으로의 회귀(를 통해 생각을 고정시키는 일)Reflexion>를(을) 참된 것으로부터 배제하면서 이 회귀를 절대의 요소로 파악하지않는 것은 이성의 오류이다. 자기회귀(Reflexion)가 바로 참된 것을 결과물로 만드는 장본인이요, 동시에 산물과 되어짐의 과정이 맞서는 것을 해소하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되어감이 또한 단일해서, 결과에서 자신의 단일함을 드러내는 참된 것의 모양과 다르지않기 때문이다; 참된 것은 바로 이렇게 <다시 단순한 것으로 돌아가있음>이다.- 태아는 그냥 그 자체로는 사람이겠지만, 태아 자신에게도 사람이지는 않다; 자기자신에게도 사람인 것은 오직 배운 이성, 원래 그냥 지기인 것으로 자기를 만든 이성뿐이다. 이것이 비로소 현실이다. 그러나 이 결과물 자신도 또한 단일한 <그냥>이다, 왜냐하면 이 결과물은 자신 안에 편히 쉬는, 자신을 의식하는 자유이며, 대립을 옆에 치워놓지않고 대립과 화해를 이루기 때문이다.
22.
이제껏 얘기된 것을 이렇게 달리 말할 수도 있다: 이성은 목적에 따르는 짓(Tun)이라고. 자연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강조하면서 또한 무엇보다도 <외적인 목적에 따름 aeussere Zweckmaessigkeit>을 학문에서 추방하면서, <목적>은 도무지 어떤 모양으로든 불신의 대상이 되고말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을 <목적에 따르는 짓>으로 규정했듯이, 목적은 그냥 그 자체,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움직이는 것, 즉 주체이다. 목적이 움직일수 있는 힘을 추상적으로 규정하면, 그것은 <제 자신에게 있음Fuersichsein> 또는 순수한 <아니라하는 힘>이다. 산물은 오직 시작이 목적일 때만 시작과 같을 수 있다; 다시말해서 현실적인 것은, <그냥 그 자체인 것>이 목적이어서 제 자신을 혹은 순수한 현실을 제 안에 품고 있을 때만, 개념과 동일할 수 있다. 수행된 목적, 즉 어떻게 정해져있는 현실은 움직임 그리고 펼쳐진 <됨>이다; 바로 이 머물수없음이 <자기자신임>이다; 그리고 이 <자기자신임>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앞서의 그냥 단일한 시작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자기자신임>은 산물로서 자기에게로 돌아옴이며,- 자기에게로 돌아옴이 바로 자기자신이며, 자기자신은 자기자신과 맺는 하나임과 같음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23.
절대를 주체로 떠올리기위해 사람들은 이런 문장들을 사용했다: 신은 영원이다, 도덕적인 세계질서이다, 또는 사랑이다, 등등. 이런 문장에서는 참된 것이 다만 그냥 주어로 적혀있을 뿐, 스스로 자신 안으로 되돌아가는 움직임이 드러나있지 못하다. 이 문장들은 “신“이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이 “신“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떼어놓으면, 뜻없는 소리요 그저 이름일 뿐이다; 신이 무엇인지는 술어가 비로소 말한다, 술어가 “신“의 알맹이요 의미인 것이다; 공허했던 시작이 끝지점인 술어에서 실현된 앎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영원이나 도덕적인 세계질서 등등, 혹은 옛날 사람들처럼, 있음이나 하나 같은 순수개념들만, 즉 의미인 것들만 말하면 됐지 무엇하러 의미없는 소리를 앞에 덧붙이느냐고. 그러나 이 단어 “신“이 나타내는 바는, 지금 얘기되는 것이 있음이나 근본이나 일반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돌아온 것, 즉 어떤 주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다만 예측처럼 미리 던져져있을 뿐이다. 문장주어는 고정된 점이고, 그 주어에 대해 아는 마음에 속하는 움직임을 통해 그 점에 술어들이 붙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움직임이 그 점 자체의 움직임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이 움직임만이, 주어 자신에게 속하는 움직임만이, 주어로 가리킨 내용이 주체임을 말할 수 있게 한다. 보통 생각되는 움직임의 방식으로는 움직임이 주어에게 속할 수 없다; 또한 그 점을 미리 놓을 경우 운동이 달라질 수도 없다, 운동이 외부에서 오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가 주체라는 예측은, 절대개념의 실현이 아닐뿐더러 심지어 절대개념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한다; 예측은 절대를 운동없는 점으로 보고있는데, 이와는 반대로 절대의 실현은 자기움직임이기 때문에.
24.
이제껏 얘기된 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몇가지 귀결 중 다음을 강조하려 한다: 앎은 오직 학문(Wissenschaft)으로만 체계(System)로만 실현되고 펼쳐적어질 수 있다. 더나아가 소위 얘기되는 철학의 근본문장(Grundsatz)이나 원리(Prinzip)는, 만일 내가 말한 바가 옳다면, 그들이 근본문장이나 원리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거짓이다.- 바로 이래서 근본문장이나 원리를 반박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들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것으로 반박은 충분하다; 그리고 그들은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반, 원리, 시작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반박은 근본문장 자신으로부터 뽑아올려지고 펼쳐진다.- 소리높여 반대를 다짐함으로부터 혹은 외적인 착상으로부터 뚝딱뚝딱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반박은 근본문장 자신의 펼쳐짐이며 근본문장의 부족함을 보충함이다.- 근본적으로 반박하는 사람이 자신의 일을 제대로 이해해서, 반박의 <아니라하는> 면만 보지않고 반박의 진행과 결론을 또한 <이라함>으로 의식한다면 말이다.- 시작을 올바로 긍정하면서 끌고나아가는 일은 또한 동시에 반대로 시작에게 <아니>라고 말하는 일, 즉 시작의 일면적인 모양에게 <그냥 그 자체임> 또는 <목적임>에게 <아니>라고 말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시작을 긍정하며 나아가는 일은 또한 마찬가지로 시작을 즉 체계의 근본을 반박하는 일일 수 있다, 물론 더 잘 말하자면, 체계의 근본 혹은 원리가 다만 시작일 뿐임을 지적하는 일이라 해야겠지만.
25.
참된 것이 오직 체계로만 실현된다는 것, 실체가 근본적으로는 주체라는 것, 이 둘은, 절대가 정신(Geist)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으로도 표현된다.- 정신, 가장 고귀한 개념, 보다 새로운 시대와 그 시대의 종교에 깃든 개념. 오직 정신임만이 현실임이다; 정신적인 것이 근본이며 <그냥 그 자체>이다 - 스스로 관계 속에 활동하는 것, 또는 정해진 것, <다르게 있음> 그리고 <자기에게 있음> - 그리고 이 정해져있음 혹은 <자기를 떠나 있음> 안에서도 자기 안에 머무는 것 - 즉 정신적인 것은 <그냥 그 자체요 또한 자기자신에게 Anundfuersich>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것의 <그냥 그리고 그 자신에게도>는 지금 시작단계에서는 우리에게만 그러하다, 혹은 정신 자신의 <참된 그냥>으로만 그러하다, 다시말해서 정신적인 것은 일단 정신적인 실체에 불과하다. 정신적인 것은 제 자신에게도 <그냥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가 되어야 한다.- 정신적인 것에 대한 앎, 자기자신이 정신임을 아는 앎이 되어야 한다; 다시말해서, 정신은 자기자신에게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냥 저편에 있는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연결움직임을 거친 대상, 다시말해서 <품에 안긴(aufgehoben)> 즉 제 속으로 되돌아온 대상이 되어야한다. 정신이 가지는 정신적인 내용들이 그 놈 자신에 의해 낳아졌으므로, 정신은 이미 <정신 자신에게>이지만 아직은 우리가 보기에만 <정신 자신에게>이다. 그러나 정신이 제 자신에게도 <제 자신에게>일 때, 그 때 정신은 <자기자신을 낳음>이며 순수한 개념이며, 또한 제 자신에게 대상화된 원소이다, 자신의 여러 정해진 어떠함을 담은 원소이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정신은 자기 자신의 정해진 어떠함 안에서 <제 자신에게> <제 안으로 돌아들어간 대상>이다.- 이리하여 자기자신이 정신임을 아는 정신, 이것이 바로 학문이다. 학문은 정신의 실현이며, 정신이 정신자신인 벽돌로 짓는 왕국이다.
26.
절대적인 <다르게 있음> 안에서 순수하게 자기자신을 알기, 바로 이 푸른하늘(Aether)이 학문 즉 일반 안에서의 앎을 키우는 근본이요 터이다. 학문의 시작은 의식이 이 푸른하늘 안에 있을 것을 전제한다, 혹은 요구한다. 그러나 이 푸른하늘 또한 오직 제 자신이 되어가는 움직임을 통해서만 완성되고 투명해질 수 있다. 학문의 시작이 전제하는 혹은 요구하는 이 푸른하늘은 순수한 정신임 또는 단순한 <그냥>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일반이다. 그러나 이 <그냥>은 정신의 <그냥 그대로>이기 때문에, 또한 실체가 다름아닌 정신이므로, 이 <그냥 그대로>는 드러난 근본이요 <자신에게 돌아옴>이며, 이 돌아옴이 단순하게 <그냥>이므로, 또한 <있음>이다, <자신 안으로 되돌아들어감>이란 의미에서의 <있음>. 학문은 자기의식(Selbstbewusstsein, 각자의 나)에게 이 푸른하늘로 올라와 학문 안에 살수 있기를 또한 살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반대로 각자의 사람 역시, 그 하늘로 오를 사다리를 학문이 줄 것을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 각자가 가진 권리는, 각자가 어떤 모습의 알을 갖든 항상 지켜나갈 줄 아는 각자의 절대적인 독립성을 기반으로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무슨 앎을 가지든 간에 그 앎이 학문에 의해 인정 받든 안받든 앎의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각자의 사람은 <절대적인 틀absolute Form>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자기자신의 확실함>을 가장 첫 번째로 가지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표현을 더 좋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각자의 개인은 자신의 확실성으로 인해 <거리낄 것 없이 있음>이기 때문이다. 대상인 놈들이 자신에게 또한 자신이 대상인 놈들에게 맞선다고 아는 의식이 학문적이지 않다면,- 학문없는 의식이 익숙한 자기모습으로 여기는 이 것이 오히려 정신의 상실이라면- 의식에게는 학문의 푸른하늘이 저 건너 먼 곳일 뿐이다, 의식에게 아주 낯선 저 건너 먼 곳일 뿐이다. 학문과 의식은 서로를 완전히 뒤집힌 진실을 말하는 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자연적인 의식이 그냥 학문에 익숙해지려 시도하는 것은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한번 물구나무서서 걷기로하는 것과 같다; 이 힘든 자세를 취하라는 강압적 요구는, 준비단계도 없이 또한 불필요하게 의식이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학문이 그 자체로는 어떤 편안한 것이라 할지라도, 시작하는 자기의식과의 관계 속에서는 학문은 자기의식의 물구나무서기이다. 달리말한다면, 그냥 그대로의 자기의식이 현실의 원리이므로, 또한 학문은 자기의식밖에 독자적으로 있으므로, 학문이 비현실의 모양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은 그냥 그대로의 자기의식을 학문 안에 끌어묶어야 한다, 혹은 보다 분명히 말하자면, 자기의식이 학문에 속해있음을 그리고 어떻게 속해있는지를 보여야 한다. 실현되지않는 한 학문은 단지 <그 자체>, 목적, 속에만 품어진 목적이며, 정신이 아니라 겨우 정신적인 실체일 뿐이다. 학문은 자신을 밖으로 내놓아 자기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자기의식과 학문을 하나로 엮어 지어야 한다는 말이다.
27.
자기의식과 학문이 하나가 되어감, 그리하여 진정한 학문이 되어감, 또는 앎이 되어감을 펼쳐놓는 것이 학문체계의 첫부분인 이 정신현상학의 일이다. 처음있는 모습으로서의 앎 혹은 <그냥 그대로>인 정신은, 정신적이지 못함 혹은 감각적인 의식이다. 제대로 된 앎이 되기까지, 또는 학문의 원소인 순수한 학문개념을 낳을 때까지, <그냥 그대로>인 정신은 긴 과정을 지나며 애써야 한다.- 이 되어감의 과정은, 그 과정을 이루는 여러 내용들과 모양들이 채워진 상태에서 보면, 학문없는 의식을 학문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닌 어떤 다른 것으로, 학문의 기반을 닦는 것이 아닌 어떤 다른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그러니까 마치 단 한 방의 총알로 끝장내듯, 처음부터 절대적인 앎에서 시작하는, 다른 입장들을 거들떠보지않음으로써 다른 입장들에 대해 볼 일은 다 보았다고 여기는 열광의 외골수로 보일 지도 모르겠다.
28.
그러나 배우지못한 관점에 있는 개인을 앎으로 이끄는 과제는 일반적인 의미로 파악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일반적인 개인 혹은 세계정신이 지어지는 과정을 고찰하는 것으로 채워져야 했다.- 특수한 개인과 일반적인 개인의 관계는 이러하다; 일반적인 개인에게서는 모든 요소들이 구체적인 형식과 고유한 모양으로 발견되지만, 특수한 개인은 불완전한 정신이므로 하나의 구체적인 모양으로만 나타나고 그 개인의 정해져있음 전체가 한 규정으로 덮여있어서 그 특수한 개인 안에 다른 규정들은 희미하게만 겨우 함께 있다. 보다 낮은 구체적인 어떠함은 보다 높이 서있는 정신 안에서 드러나지않는 요소(Moment)로 가라앉는다; 이전에 사태였던 것은 이제 다만 흔적으로 남아있다; 이전의 모양은 다른 것으로 덮여 단순한 그림자가 되었다. 그리고 개인은 사실상 보다 높이 서있는 정신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거를 다시 겪는다, 마치 보다 높은 수준의 학문을 배우는 정신이 이미 오래전 익힌 입문과정을 다시 돌이켜 생생하게 되살리는 것처럼 말이다; 정신은 기억에서 과거를 다시 불러내지만, 그 과거에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각자의 개인은 일반적인 정신이 지어져온 단계들을 차례로 밟는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모양이 된 단계들을 이미 다 닦여진 길 위의 정거장처럼 거쳐간다; 과거에 어른들이 골몰했던 생각들이 오늘날에는 아이들의 상식이나 연습이나 심지어 놀이로 낮아진 것을 우리가 보는 것 처럼, 또한 배우는 사람의 발전과정에서 마치 흐린 윤곽을 보듯 세계가 지어진 역사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지나가버린 어떠함은, 개인의 진실인 혹은 생명을 넘어선 본성인 일반정신이 이미 획득한 소유물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지어짐은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름이 아닌 이것이다: 개인은 이미 주어진 것을 획득한다, 자신의 생명을 넘어선 본성을 소화하여 자기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런데 이는 또한 다른 한편, 일반정신 혹은 정신적 실체가 자기자신에게 자기의식을 주는 일, 즉 일반정신의 되어감 혹은 일반정신의 자기자신에게 돌아감이다.
29.
이 학문은 이렇게 짓는 움직임을 그 움직임에 맞게 빠짐없이 필연적으로 기술하며, 또한 이미 정신의 요소 혹은 소유물로 가라앉은 것을 구체적인 모양으로 기술한다. 이 학문의 목표는, 정신으로 하여금 앎이 무엇인지 알게하는 것이다. 성미급한 사람은 단계없이 목표에 도달할 것을 즉 불가능을 유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문하는 사람은, 첫째 이 짓는 움직임이 거치는 길의 거리를 참아내야 하며, 왜냐하면 무슨 요소든 다 필수적이니까,- 둘째 각각의 요소에 머물기도 해야한다, 왜냐하면 각 요소는 그 자체로 개별화된 전체의 모양이니까, 또한 각 요소의 정해져있음을 전체로 혹은 구체적인 것으로 봄으로써만 다시말해서 이 고유한 각자의 정해져있음 안에서 전체를 고찰함으로써만 이 요소들을 절대적으로 고찰할 수 있으니까.- 개인의 진실인 세계정신이 이 모든 모양들을 참을성있게 오랜 세월동안 거치면서 세계역사를 위해 많은 땀을 흘린 것과 같이, 또한 세계정신이 이만큼 애써 비로소 자기자신을 알게 된 것과 같이, 개인 역시 쉽게 자신의 진실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월이 흘렀으므로 이제 개인은 더 적은 노력만 기울여도 된다, 왜냐하면 일반정신의 자기회귀가 그 자체로는 이미 이루어졌고, 거쳐야할 내용들 또한 이미 <그럴 수 있음>으로 뿌리가 잘려나간 현실 즉 억지로 고정시킨 <그냥>이기 때문이다. 생각되어진 것은 바로 생각되어졌다는 이유에서 이미 개인의 소유물이다. 개인은 이제 자신의 어떠함을 어떤 다른 어떠함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그냥 어떠함>을 <나 자신에게도 어떠함>으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이 바꿈의 방식을 이제 보다 자세히 설명하려한다.
30.
<그냥 어떠함>에서 <나 자신에게도 어떠함>으로의 움직임을 겪는 동안 개인은 자신의 <어떠함>을 부수는 힘든 일을 하지않아도 된다; 그러나 여러 모양들을 떠올리고 사귀는 일은 해야한다. 진실 안에 묻혀버린 어떠함은 세월이 만든 첫 번째 <아니라함>을 통해 자기자신임 이라는 원소 안에 그저 그냥 들어갔을 뿐이다. 그러므로 묻혀있을지라도 아직 예전의 어떠함과 같은 방식으로 파악되지않은 <그냥>의 성격 혹은 움직임없는 <상관없음>의 성격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다시말해서 <어떠함>은 단지 <어떠함을 떠올림>으로 넘어갔을 뿐이다.- 따라서 지나간 <어떠함>은 정신이 이미 볼일 다 본 <익숙한 것>이다, 익숙하므로 정신이 더 이상 볼일도 할 일도 없는 것이다. <어떠함>에 더 이상 진지한 관심이 없는 활동은 그저 그냥인 연결움직임 혹은 정해져있는 연결움직임이며 그리하여 특수한 것을 파악하지않는 정신의 움직임이다. 반대로 위의 방식으로 생겨나는 표상에 대항하는 앎이, 익숙함에 맞서는 앎이 바로 일반적인 자기자신의 활동이며 생각이 할 일이다.
31.
익숙한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익숙하다는 이유 때문에 앎없는 것이다. 앎을 논할 때 어떤 것을 이미 익숙한 것으로 먼저 놓고 만족하는 것은 가장 흔히 일어나는 착각이다, 자기자신과 남을 속이는 일이다; 이런 논의에서 아무리 많은 얘기가 이리저리 흘러도 미리 놓은 익숙한 앎은 굳건히 제자리를 지킨다. 그 앎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들은 전혀 모른다. 주체, 객체, 등등 신, 자연, 지성, 감성, 등등은 검토됨없이 익숙한 것으로 통하는 것으로 기반에 놓여져 튼튼한 출발점과 귀착점 노릇을 한다. 논의의 움직임은 움직이지않는 출발점과 종착점 사이를 그저 겉핥기로 오간다. 따라서 파악도 검토도 단지, 지금 얘기된 것을 각자가 자신의 표상 속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보는 것으로, 얘기된 바가 각자에게 그럴 듯 한지 혹은 낯선지를 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32.
한 표상을 분석한다는 것은, 과거에 사용되어온 분석 방식으로도 이미, 다름이 아니라 낯익임이라는 모양을 부수는 것이었다. 하나의 표상을 분해하여 근원적인 요소들로 펼치는 일은 표상의 요소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그저 주어진 표상의 형식을 벗어나 <자기자신임>의 소유물임이 드러난 요소들로 말이다. 이런 분석은 물론 익숙하고 움직임없고 고요한 규정들에만 적용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요소는 분석을 통해 드러난 것들, 이 분해된 것들, 이 현실적이지않은 것들이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것은 자기자신을 갈라 펼침으로써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갈라놓는 움직임은 지성의 힘 지성의 일이다, 가장 경이로우며 가장 크며 심지어 절대적이기까지 한 힘- 지성. 자기 안에 닫혀 쉬고있는 동그라미, 지신의 요소들을 제 안에 품은 실체는 <그냥 그대로>인 그래서 그다지 경이롭지않은 모습이다. 그러나 <덧붙는 어떠함>이 묶여있고 또한 다른 것과 연관하에 있을 때만 현실적인 것이,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 고유하게 독립한 <어떠함>이 되고 독립적인 자유를 얻는 것은, <아님>의 무시무시한 힘이다; 이는 생각의 활력이며 <나>의 활력이다. 죽음은, 우리가 만일 위의 비현실적인 요소들을 죽음이라 부르기로 한다면, 가장 두려운 일이요, 그러므로 죽은 것을 고정시켜 유지하는 일은 힘이 가장 많이 드는 일이다. 힘없는 아름다움은 지성을 미워한다, 왜냐하면 지성이 그에게 바로 이 힘든 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가 할 수 없는 이 힘든 일을. 그러나 죽음 앞에 움츠러들고 환란 중에 순수하게 숨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참고 환란 중에 자기자신을 얻는 삶이 정신의 삶이다. 만신창이로 찢어진 조각들에서 자기자신을 발견할 때만 정신은 자신의 진실에 이른다. <아님>에서 눈을 돌리는 긍정으로서가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에 대해 아니라고 또는 틀렸다고 말하고는 일을 마무리짓고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그렇게 <아님>에서 눈돌리는 긍정으로서가 아니라; <아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아님> 곁에 머뭄으로써만 정신은 그 무시무시한 힘이다. 바로 이 머뭄이 <아님>을 <임>으로 뒤집는 마술의 힘이다. 이 마술의 힘은 우리가 앞에서 주체라 불렀던 것과 동일하다; 자신의 규정에게 독자적인 <어떠하게 있음>을 줌으로써 추상적인 즉 다만 있는 <그냥 그렇게>를 부수는 주체, 바로 이를 통해 참된 실체가 되는 주체, 연결움직임을 밖으로 밀어낸 있음 혹은 <그냥>이 아니라 연결움직임 자체이기도 한 <그냥 그렇게>- 즉 주체.
33.
떠올림으로써 떠올려진 것을 순수한 자기의식의 소유물로 만드는 일, 즉 일반성을 얻도록 들어올리는 일은 자신을 짓는 일의 한 측면일 뿐 완성이 아니다.- 옛날의 공부는 자연적인 의식을 정말로 키웠고 그래서 오늘날의 공부와 다르다. 자기자신의 정해져있음의 모든 부분에서 노력하면서 그리고 눈 앞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철학하면서, 옛사람들은 모든 측면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진 일반성에 이르도록 자신을 지어나갔다. 반면에 새시대의 개인들은 이미 차려져있는 추상적인 형식들을 받는다; 이 추상적인 형식들을 움켜쥐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노력은, 구체적이고 다양한 어떠함으로부터 일반성이 튀어나오는 모양이라기 보다는, 속알맹이만 연결움직임없이 강조하는 일 또는 일반성만 딱 잘라내서 짓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냥 감각적으로 사는 개인을 닦아서 생각된 그리고 생각하는 실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움직임없이 규정된 생각을 부숨으로써 일반적인 것을 실현하고 혼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고정된 생각을 흐르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일은 감각적인 정해져있음을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 이유는, 이미 얘기한 바와 같이, 이렇다; 고정된 생각규정들은 자신의 <어떠함>의 원소 또는 진실로 <나>를, <아님>의 힘을, 즉 순수한 현실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감각적인 규정은 다만 무력하고 추상적인 <그저 그냥> 혹은 <있음 그 자체>를 가질 뿐이었다. 순수한 생각 즉 내적인 <그저 그냥>이 자신이 요소임을 알 때, 다시말해서 자기자신의 확실성이 자신을 누그러뜨릴 때, 생각은 흐르게 된다;- 자신을 버리거나 옆에 치워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기자신이라 함>이 지닌 고정성을 버리고, 또한 순수한 구체의 고정성을 즉 다양한 내용차이에 맞서는 나 자신의 고정성을 버릴 때, 또한 순수한 생각 속에 들어옴으로써 <나>가 가지는 거리낌없음을 나눠얻게 된 차이들의 고정성을 버릴 때, 이 흐르는 움직임을 통해 순수한 생각은 개념들이 되며, 이때 비로소 생각의 참모습에 이른다, 자기움직임, 동그라미, 자신의 진실, 혼이 있는 뿌리에.
34.
이 순수한 근본뿌리들(Wesenheiten)의 움직임이 바로 학문성(Wissenschaftlichkeit) 그 자체이다. 이 움직임을 내용의 연관으로 고찰할 경우, 이 움직임은 근본뿌리들이 조직된 전체로 필연적으로 자라나는 움직임이다. 앎의 개념에 도달하는 동안 거치는 길 또한 이 필연적인 움직임에 의해 필연적이며 빠짐없는 되어감이어서, 이 책이 계획하는 입문과정 역시 불완전한 의식이 가지는 이런저런 우연적인 대상이나 사정이나 생각을 다루는 우연적인 철학이 아니며 또한 이리저리 넘어 흘러 다니는 겉핥기생각과 추론과 도출을 통해 어떤 특정한 생각으로부터 참된 것을 세우는 노력도 아니며, 대신에 이 입문과정 즉 이 길은 개념의 움직임에 의해 제어됨으로써 세상에 있는 모든 의식의 모양들을 빠짐없이 필연적으로 포괄할 것이다.
35.
이러한 포괄적인 펼쳐적음은 또한, 어떻게 정해진 정신이 일단은 <그냥 어떠함> 즉 시작일 뿐이며 또한 시작은 아직 <제 안으로 돌아옴>이 아니므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학문의 첫부분을 이룬다. 그냥 어떻게 정해져있는 정신의 모습을 다룬다는 점이 이 첫부분을 여타의 다른 부분들과 구분하는 특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계획하는 이 첫부분이 다른 부분들과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보다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와 관련된 몇가지 굳어진 일반적 생각을 논할 필요가 있다.
36.
그저 어떻게 정해져있는 정신 즉 의식은 두가지 요소 즉 앎과 앎의 반대편에 맞서있는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정신이 이제 자신을 의식으로 펼쳐 자신의 요소들을 늘어놓게 되면, 정신의 요소들에게도 앎과 대상의 맞섬이 생겨나게 되고, 요소들을 모두 의식의 모습들로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의식의 모습들이 등장하면서 거치게 되는 길에 관한 학문은, 의식이 겪는 경험에 관한 학문이다; 우리는 진실을, 의식이 진실과 진실의 움직임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고찰할 것이다. 의식은 단지 자신의 경험 안에 있는 것들만을 파악할 뿐 그 이상은 전혀 모른다; 왜냐하면 의식이 경험하는 것이 단지 정신적인 실체이며, 더군다나 대상화된 실체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이런 방식으로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정신은 자기자신이 아닌 다른 것 즉 자신에게 대상인 것이 되고 또한 이 다름을 품어안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 역시, 어떤 그냥 있는 것 혹은 경험되지않은 것이, 즉 감각된 있음이나 생각된 단순함이 자기자신을 떠나고 또 이렇게 떠나 자기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움직임 또한 동시에 의식의 소유물이 되는 움직임이다.
37.
의식 안에서 생기는 나와 나에게 대상인 진실의 다름은, 사실은 진실이 자체적으로 가지는 차이 즉 <아님> 일반이다. 사람들은 이 차이를 의식이나 진실의 불완전함으로 여길지도 모르나, 사실 이 차이는 의식과 진실의 혼, 즉 그 둘을 움직이는 힘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몇몇 고대인들은 빈 공간이 움직이는 힘이라고 파악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님>이 움직이는 힘임을 알았지만, <아님>이 또한 <자기자신임>이라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다.- 지금 이 차이는 우선 나와 대상의 차이로 나타나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이 차이는 진실이 자기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갖게되는 진실 자신과의 차이이기도 하다. 진실 밖에서 진행되는 일 그러므로 진실을 대상으로 맞세워놓고 하는 일로 보이는 의식의 작업 역시, 그러므로 진실 자신의 일이며 진실은 이렇게 그 근본에서 주체임을 드러낸다. 진실이 이렇게 자신의 근본인 주체임을 완벽하게 드러냈을 때, 그 때 정신은 자신의 정해져있음과 자신의 근본을 갖게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정신은 이제 있으며 또한 동시에 자신에게 대상으로 있으므로, <그냥>이라는 추상이 또는 앎과 참된 것 사이의 추상적인 분리가 사라진다. 있음은 완벽하게 절대적으로 연결움직임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 있음은 진실인 내용이면서 또한 동시에 나의 소유물로 나 자신답다, 즉 개념이다. 바로 이 단계에서 정신현상학은 막을 내린다. 현상학을 통해 정신이 준비하는 것은 앎을 지어갈 필수원소이다. 그리고 앎 속에서는 정신의 요소들이 단순한 모양으로 자신을 펼치는데, 이 단계에서 요소들은 자신이 대하는 대상이 자기자신임을 이미 안다. 요소들은 더 이상 있음과 앎의 맞섬으로 주저앉지않고, 앎의 단순한 하나임 안에 머문다. 요소들은 이제 참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참된 것들이며, 따라서 이들 사이의 차이는 다만 내용의 차이일 뿐이다. 이러한 요소들의 움직임, 근본원소로부터 전체로 자기자신을 지어나가는 움직임이 바로 논리학, 혹은 달리 말한다면 <자유롭게 감싸는 spekulativ> 철학이다.
38.
정신의 경험을 다루는 우리의 첫 번째 체계가 다만 정신의 나타남만을 상대하므로, 이 체계로부터 참된 것을 참모습으로 다루는 학문으로 나아가는 일이, 나타남을 일면적으로 부정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더나아가 어떤 사람은, <아닌 것> 즉 <틀린 것>에 골머리를 썩는 것이 싫으니 직접 진리로 가자 요구할지도 모른다; 뭣할려고 틀린 답을 자꾸 내놓는가?- 당장 학문을 시작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으나, 여기에 또한번 이번엔 <틀린 것>으로 여겨지는 <아닌 것>이 어떤 놈인지에 대한 설명을 통해 언급하려 한다. <아닌 것>에 대한 사람들의 보통 생각이 사실상 학문에 드는 것을 방해하는 주범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된 언급을 하는 동안 우리는, 철학없는 앎이 이상으로 여기는, 또한 철학이 거기 도달하려 애써야 하고 그래서 애썼지만 이제껏 헛수고만 했다고 얘기되는, 수학적 앎에 대해 논하게 될 것이다.
39.
참과 거짓은 움직임없이 각자 고유한 근본을 가진다고 믿어지는 정해진 생각들이다. 참과 거짓이 있으면 하나는 저기 저쪽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여기 이쪽에 서로 상대방과 함께 할 일이 없이 고립되고 고정되어 우뚝 서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주장해야 겠다: 참이 무슨 한국은행권처럼 정품으로 찍혀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또한 악(惡)이 없는 것처럼 거짓도 사실은 없다고. 악도 거짓도 무슨 악마처럼 못된 것이 아니다, 악마는 참 거짓과는 달리 특정한 주체로 여겨지므로 못된 것이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참과 거짓은 다만 일반적인 것들이며 각자의 뿌리를 상대방 안에 두고 있다. 거짓인 것은 진실과 <다른 것> 진실이 <아닌 것>이라 여겨지며, 진실은 앎의 내용일 경우 <참>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진실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아님>이다; 첫째 진실이 구분이며 규정이니까, 또한 진실이 단순하고 하나인 구분하기 즉 <자기자신임>이며 앎이니까. 물론 사람은 잘못 아는 수가 있다. 거짓된 앎이 생긴다는 것은, 앎이 자신의 진실을 벗어나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달라짐이 구분하기라는 근본적인 요소이다. 이 구분을 거쳐 곧 앎의 <자기와 같음>이 이루어질 것이며, 이렇게 <되어진 같음>이 바로 참된 진실이다. 그러나 이 참된 진실은, 마치 쇠를 뽑아낼 때 불순물을 내버리듯이 다름을 내던져버린 진실이 아니며, 마치 그릇을 만들고나서 도구를 치워놓듯이 다름을 치워놓는 진실도 아니다. 다름과 차이는 참된 것 그 자체 안에 <자기자신임>으로 또는 <아님>으로 그냥 그대로 들어있다. 하지만 이렇다고해서 거짓이 참의 요소라거나 심지어 구성부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거짓인 것에 참됨이 있다는 얘기 - 이런 얘기 속에서 참과 거짓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못하고 외적으로만 연결된다. <다름이 들어있음>이라는 요소를 완벽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는 오히려, 다름이 품 속으로 묻혀진 그 자리에서, 오히려 <다름이 들어있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주체와 객체가 하나임, 유한과 무한이 하나임, 있음과 생각이 하나임, 등등의 말도 부적절할 수 있다, 이 말 속에서 예를들어 “주체“와 “객체“가 둘의 하나임 이전의 둘을 의미한다면 이 말이 말하려는 바와는 다른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짓인 것이 여전히 거짓인 것으로 참의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40.
앎을 논할 때 그리고 철학을 공부할 때, 사고방식으로 독단론Dogmatismus을 취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진리가 굳건한 결론인 한 문장이라는 믿음을, 단 번에 그냥 알 수 있는 한 문장이라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시이저가 언제 태어났는가?“ 같은 종류의 질문에 대해서는, “한 자가 몇 치냐?“ “얼마냐?“ 등등의 질문에 대해서는 상큼하고 깨끗한 대답을 주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이 나머지 두변의 제곱의 합과 같은 이유에 대해서도 상큼한 대답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소위 진실은 철학적 진실과는 본성적으로 다르다.
41.
역사적인 참에 대해서 간단히만 언급하자면, 만일 그 참이 있었던 일의 기술에만 순수하게 전념한다면, 우리는 그 참이 개별적인 어떠함을 어떤 내용을 우연적으로 자의적으로 필연적이지않은 규정으로 다룬다고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 우리가 예로 든 것과 같은 벌거벗은 역사적 참들 조차도 자기의식의 움직임없이 있지는 않다. 이런 진실 하나를 알기 위해서도 많은 것을 비교하고 책을 찾아보는 등등 어떤 식으로든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단번에 보아 아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을 이유와 함께 알 때 비로소 참된 가치를 가진 앎으로 통한다, 다만 벌거벗은 결론만이 중요하다고 논의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42.
이제 수학적인 앎과 관련해서는, 만일 어떤 기하학자가 유클리드의 정리를 술술 외지만 그 정리의 증명을 모른다면, 위의 경우에서보다 훨씬 더 무능하다 여겨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 직각삼각형을 측정하며 세 변이 피타고라스 정리에 맞음을 알게 되었다면, 그 앎을 불충분한 앎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적인 앎에서 증명의 의미와 본성은 결론 자체의 요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결론에 이르는 순간 증명은 지나간 것이 되고 사라진다. 증명된 이후의 결론은 물론 참임이 드러난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부차적으로 덧붙여진 <참임이 드러났음>은 결론의 내용을 건드리지않고, 다만 그 내용과 주체와의 관계만을 나타낸다; 수학적 증명의 움직임은 대상인 그것에 속하지않고, 대신에 사태 밖에서 일어나는 행위일 뿐이다. 예를들어 피타고라스정리를 증명하기 위한 구성(Konstruktion)과정에서 직각삼각형을 자르는 일은, 직각삼각형의 본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진다; 결론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은 다만 통로요 도구일 뿐이다.- 철학적인 앎에서도 어떠함이 다만 어떠함으로 되어가는 과정과, 근본뿌리가 되어가는 과정은 다르다. 그러나 이 두 과정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을 때 철학적인 앎이 비로소 이루어지며, 이와는 달리 수학적인 앎은 다만 <어떠함>이 되어가는 과정만을, 즉 사태의 본성의 어떠함이 앎 그 자체 안에서 되어가는 과정만을 기술할 뿐이다. 철학적인 앎은 위의 두 움직임을 결합한다. 진실이 내적으로 일어남 혹은 진실이 되어감은 바로 그대로 밖으로 혹은 정해진 어떠함으로 <다름으로 있음>으로 넘어나옴이며; 반대로 어떠함이 되어감도 자기자신을 근본 속으로 다시 끌어넣음이다. 그러므로 이 움직임은 두 겹의 과정이며 전체가 되어감이다, 하나의 되어감이 동시에 다른 하나의 되어감을 짓고 따라서 각각이 자기 안에 두 과정을 두 측면으로 가진다; 두 과정 각각은 스스로를 무너뜨려 전체의 요소로 만들고, 이를통해 두 과정은 함께 전체를 이룬다.
43.
수학적인 앎에서 <참임을 앎>은 사태 밖에서 일어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사태가 이 외적인 행위의 영향을 받아 변질될 수밖에 없다. 도구와 구성과 증명은 따라서 참된 문장들을 담고 있을수도 있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그 내용이 거짓임을 나는 말하지않을 수 없다. 위에 든 예에서 삼각형은 증명을 위해 쪼개져, 구성이 만든 다른 도형들로 넘어가 버린다. 원래 볼일인 삼각형은, 과정 중에서 사라져 다만 다른 전체에 속하는 조각들로만 등장했다가 맨 마지막에야 다시 지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도 내용이 가지는 <아니라함>의 힘을 본다. 고정된 생각이 개념의 운동 속에서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성이 만든 조각들이 맨마지막에 사라지는 것 역시 <아니라함>이요 따라서 <거짓이라함>이라 불리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학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외적인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44.
수학적인 앎의 고유한 헛점은 앎 자체에서도 또한 앎의 질료 자체에서도 기인한다. 앎에 대해 말하자면, 첫째로 구성의 필연성이 불투명하다. 정리를 파악함으로부터 구성방법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증명에 도움이 되리라 좋게 믿음 이외에 어떤 앎도 없이, 다른 선도 그을 수 있지만 꼭 이 선을 그으라는 명령에 눈 딱 감고 따라야만 한다.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선이 도움이 되었음이 드러난다. 나중에야 증명과정에서야 자신을 드러내기에,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수학적 구성이 목적에 맞음은 외적인 목적에 맞음이다.- 또한 증명도 이렇게 어딘가에서 시작되는 길을 간다, 도출되어야할 결론과 그 길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채. 증명이 앞으로 나아갈 때, 증명은 무언가 특정한 ‘이‘ 규정과 ‘이‘ 관계를 디딤돌로 삼는데, 왜 그래야하는지 사람들은 들여다볼 수 없다; 낯선 목적에 맞음이 수학적인 움직임을 지배한다.
45.
이 헛점많은 수학적 앎이 자랑하면서 철학에 맞서 가슴을 부풀릴 밑천으로 내놓는 명증함(Evidenz)은 오직, 수학이 품은 목적이 지극히 가난하고 수학이 가진 재료가 형편없어서 생길 뿐이다, 그러므로 수학의 명증함은 철학이 경멸해야 마땅한 종류의 명증함이다.- 수학의 목적 혹은 개념은 크기이다, 그리고 크기는 근본없고 개념없는 관계이다. 이런 이유에서 앎의 움직임은 겉표면에서만 이루어지고 사태자체를 근본이나 개념을 건드리지않는다, 따라서 이 움직임은 움켜쥠이 아니다.- 즐거운 수학이 자신의 앎을 쌓아놓는 터를 이루는 재료는 공간과 <하나>이다. 공간은 그 안에 개념이 자신의 차이를 적어두는 공허하고 죽은 원소이며,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공간 안에 적힌 차이들 역시 공간처럼 움직임없고 생명없다. 현실적인 것은 수학에서 고찰하는 바와는 달리 공간적이지 않다; 수학적인 대상들 같은 비현실적인 것을 가지고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직관도 철학도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종류의 비현실적인 원소들 안에도 비현실적인 참 즉 고정되고 죽어있는 문장들이 있기는 하다; 죽은 문장들의 경우, 생각은 무슨 문장에서든 멈출 수 있다; 다음 문장은 저 혼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첫문장이 다른 문장으로 나아가지도 않고, 그렇게 나아감으로써 사태의 본성자체로부터 필연적인 연관이 생기지도 않는다.- 또한 수학의 원리와 재료 때문에 - 바로 여기에 수학적 명증함의 형식성이 있다 - 앎은 같음을 따라가는 선 위에서만 움직인다. 왜냐하면 죽은 것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근본을 구분함에 이르지 못하고 따라서 반대의 것이 맞선 반대의 것으로 넘어감에, 질적이고 내적인 움직임에, 즉 자기 움직임에 이르지못하기 때문이다. 수학이 오직 크기를, 즉 근본없는 차이를 다루기 때문이다. 공간을 공간의 차원들로 나누고 차원들 간의 관계와 차원들 안에서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다름아닌 개념이라는 사실을 수학은 간과한다; 예를들어 수학은 직선과 평면의 관계를 다루지않는다; 또한 원의 지름과 둘레를 비교하려 할 때, 수학은 그 둘이 <서로 통하지않음>을 알고 벽에 부딛힌다; <서로 통하지 않음 Inkommensurabilitaet>- 즉 개념의 관계, 무한함, 수학적 규정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관계 앞에서 수학은 주저앉는다.
46.
내적인 수학, 소위 얘기되는 순수수학 역시 시간을 그 자체로 공간과 다른 두 번째 재료로 놓지는 않는다. 응용수학이 시간을 다룰 수는 있겠다, 운동이나 그 외의 현실적인 것들을 다루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응용수학은 경험으로부터 종합문장을 즉 관계문장을 퍼올려 수학적 개념을 통해 규정하며 수학적 공식을 오직 이 전제된 경험에만 적용한다. 이런 문장들에 대해 이루어지곤 하는 증명들은, 예를들어 지렛대의 중심에 대해 또는 자유낙하운동에서의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대해 등등 자주 등장하고 통용되는 증명들은, 앎이 얼마나 증명을 바라는지에 대한 증명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증명이 없자 헛증명을 만들어 경배하면서 만족을 찾는 꼴이다. 이런 증명을 비판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수학의 허풍을 잠재우기 위해 또 한편으로는 수학의 한계를 보임으로써 다른 종류의 앎이 절실히 필요함을 말하기 위해 유익한 가르침이 될 것이다.- 시간에 관해 얘기하자면, 사람들은 시간이 공간과 짝이되어 수학의 또다른 부분을 이룰 재료라 여기는 모양이지만, 사실 시간은 <정해진 어떠함으로 있는 개념 그 자체>이다. 크기를 즉 개념없는 차이를 원리로 둘 경우, 또한 같음을 즉 추상적이고 생명없는 하나임을 원리로 둘 경우, 시간을 즉 삶의 순수한 머물수없음을 <절대적인 구분하기>를 다룰 길이 없다. 그래서 시간의 <아니라하는 힘>은 다만 마비된 상태로만 즉 <하나>로만 수학적 앎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수학이라는 낯선 행위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눌러 재료로 만든 후, 그것에게 그것과는 상관없는 낯설고 생명없는 내용을 집어넣는다.
47.
이와는 달리 철학은, 규정들을 근본없는 규정으로 다루지않고, 대신에 그 규정들이 근본적인 규정인 한에서만 다룬다; 추상적인 것 혹은 비현실적인 것이 철학의 원소요 내용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 자기자신을 짓고 자신 안에서 사는 것, 자신의 개념 안에 있는 어떤 정해진 것, 바로 이것이 철학의 원소요 내용이다. 현실적인 것은 자시느이 요소들을 낳고 두루 거쳐가는 과정이며, 이 움직임 전체가 바로 현실적인 것의 <바로 그러함 das Positive>이요 현실적인 것의 진실이다. 이 진실은 그러므로 <아님>을 제 안에 포함한다, <거짓>이라 불리울 수도 있고, 또 그렇게 불리우는 경우 떼어내야 한다고 여겨지는 <아님>을. 오히려 덧없이 사라지는 것을 근본적인 것으로 고찰해야만 한다. 사라지는 것을 참된 것으로부터 단절되어 어딘지 몰라도 어딘가 저쪽에 굳건히 있는 것으로 보지않아야하며, 참된 것 또한 그 반대편에 편히 쉬고있는 죽은 좋음으로 보지않아야 한다. <나타남>은 생겨나지도 가버리지도 않는 생겨남과 가버림으로 그냥 그렇게 있다, 그렇게 <나타남>은 참된 것이 사는 움직임이며 현실이다. 그러므로 참된 것은 술취한 바쿠스의(술의) 휘청거림이다. 어떤 부분도 술없이 멀쩡하지않으며, 어떤 부분이 독자적으로 떨어져 나오면 곧바로 사라진다,- 또한 마찬가지로 술은 투명하고 하나인 고요이다. 이 술취한 비틀거림의 심판 앞에서 정신의 개별적인 모습들은 고정된 생각이라면 살아남지 못하지만, 그 모습들은 <아님>이며 사라지는 중임인 동시에 바로 그렇게 필연적인 요소들이다.- 이 전체의 움직임을 고요로 파악할 경우, 이 움직임 속에서 자기자신을 분리하고 자신에게 특별한 정해져있음을 부여하는 그것은, 자기자신을 되살리고 유지하는 방식으로 있다. 그것의 정해져있음은 자기자신을 앎이요, 자기자신을 앎이 바로 그것의 정해져있음이다.
48.
이 움직임의 방법에 관하여 즉 학문의 방법에 관하여 미리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이 방법의 개념은 이제껏 얘기된 바에 이미 들어있고, 이 방법을 제대로 펼쳐놓는 것은 논리학에 속하는 일이다, 혹은 논리학 전체가 바로 이 방법을 펼쳐놓는 일이다. 왜냐하면 방법이란 다름이 아니라, 전체건물을 순수한 근본뿌리로 세워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방법과 관련해서 오늘날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을 대할 때 우리는 이들이, 심지어 철학적 방법과 관련된 생각들 조차도, 이미 실종된 과거임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어떤 어조로 말하더라도 허풍처럼 혹은 혁명처럼 들릴 뿐이겠지만,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수학이 전세낸 학문의 왕국은,- 설명과 구분과 공리와 늘어선 정리들과 증명들과 근본문장과 귀결 그리고 추론으로 이루어진 왕국은- 이미 사람들의 속마음에서조차, 아무리 좋게 말한다 할지라도, 낡아버렸다. 비록 수학적 학문왕국의 무능함이 분명하게 인식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고하고 수학적 방법은 전혀 혹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비록 수학적 방법 자체가 의심의 눈초리를 받지는 않지만, 그 방법이 사랑받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뛰어난 것은 사용되고 사랑받음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한 문장을 세워놓고, 그 문장을 위한 근거들을 갖다대고, 또한 반대되는 문장을 같은 근거로 쓰러뜨리는 방식이 진실을 드러낼 올바른 방법이 아님을 알아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않다. 진실은 자기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자신의 움직임인 반면, 위의 수학적 방법은 재료에 낯설게 있는 앎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은, 이미 지적한대로, 개념없는 크기관계를 원리로 하여 죽은 공간과 죽은 하나를 재료로 다루는 수학에게 꼭 어울리며 따라서 수학에게만 허용되어야 한다. 물론 이런 방법이 보다 자유롭게 즉 보다 제멋대로 우연적으로 사용되어, 앎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호기심을 채우기위해 이루어지는 길거리의 대화에서나 역사적 사실의 전달에서 그러니까 대략적으로 서문처럼 이루어지는 대화에서 여전히 사용될지도 모른다. 일상속에서 의식은 익숙함, 경험, 감각적으로 구체적인 것, 생각, 근본문장 등등을, 그러니까 이미 주어져 있음으로 혹은 굳건히 머물로 있음 혹은 근본으로 통하는 것들을 내용으로 가진다. 의식은 이런 내용을 따라 나아가거나, 부분적으로 이런 내용에 자유로운 장난을 가함으로써 연관성을 끊고 내용을 외적으로 규정하면서 만지작거린다. 의식은 내용을 무언가 확실한 곳으로 끌고간다, 그 확실한 곳이 겨우 한순간의 감각일 뿐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정신에게 익숙한 고정점에 도달하게 되면, 의식이 바랐던 확신의 욕구는 만족된다.
49.
그러나 겉만 핥는 대화의 허술한 움직임이나 학문적 치장이 만드는 엄격한 움직임을 거부한다고 해서, 개념의 필연성이, 겉치례뿐인 학문성만이 아니라 학문성 전체를 멸시하는 육감과 감동과 예언자 연설의 방법없음을 대안으로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50.
또한 마찬가지로 삼박자 형식을, 칸트가 본능적으로 다시 발견한 후 아직 파악되지않은 채 죽어있는 삼박자를, 절대적인 의미로 격상시켜, 참된 형식과 내용을 동시에 세우는 식으로 삼박자 형식을 사용하는 것 역시 학문적 방법으로 인정될 수 없다. 이렇게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이 그 삼박자 형식을 생명없는 도식으로 즉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도식으로 만들고, 학문의 조직적 구조를 도표로 만듦을 우리는 본다.- 이미 앞에서도 일반적으로 언급되었고 이제 좀 더 자세히 고찰하려 하는 이 형식주의는, 한 모양에다가 도식의 한 규정을 갖다붙임으로써 그 모양의 본성과 삶을 다 말했다고 여긴다.- 그것은 주체야, 객체야, 또는 자기(磁氣)성이야, 전기성이야, 등등, 응축이야 혹은 발산이야, 동(東)이야 서(西)야 등등, 이런 도식적인 규정을 갖다붙인다. 이런 사업은 무한히 확장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라면 모든 규정과 모양이 다른 것에게 도식의 형식 혹은 요소로 갖다붙여질 수 있으니 말이다;- 서로 서로에게 갖다붙여지는 상부상조의 동그라미, 그 안에서 우리는 사태자체를 경험하지못한다, 하나도 또한 다른 하나도 알지못한다. 또한 이런 작업의 와중에, 일상적인 직관에서 얻은 규정들이 뭔가 특별한 의미로 끌어들여지기도 하고, 실제로 의미심장한 생각의 순수규정들이, 즉 주체, 객체, 실체, 원인, 일반 등등이 일상생활에서처럼 전혀 거리낌없이 전혀 비판없이 강함, 약함, 팽창, 응축 등의 말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이리하여 주체 객체 등에 관한 형이상학이 강함 약함 등의 감각적 표상들 만큼이나 비학문적이어진다.
51.
형식주의적 논의 속에서는, 내적인 삶이나 정해져있음의 자기움직임 대신에, 위와같이 단순하게 규정된 직관이, 즉 이 경우에는 감각적 앎에서 나온 단순한 규정이 피상적인 유비를 통해 얘기되어지며, 이러한 외적이고 공허한 도식적용이 구성이라 일컬어진다.- 이 새로운 형식주의 또한 형식주의 일반과 전혀 다르지않다. 강함으로 인한 병과 약함으로 인한 병과 간접적약함으로 인한 병이 있으며 이에 맞게 세가지 치료계획이 있다는 것을 단 15분 안에 배우지못할 멍청이가 있겠는가? 어떤 멍청이가 이런 얘기로 끝나는 의학 분야에서 15분 안에 신입학생에서 이론의학자로 성장할 수 없겠는가? 자연철학적 형식주의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있다면, 지성은 전기성이요 동물은 황(Schwefel)이요 또는 남(南)이요 또는 동(東)이요 등등의 말로 가르치는 바가 있다면, 이런 식으로 발가벗겨놓고 보든지 혹은 더 많은 용어들을 동원한 거창한 모습으로 보든지 마찬가지로, 형식주의가 가르치는 것은, 아주 멀리 떨어져보이는 것을 함께 묶는 힘과 가만히 있는 감각된 것을 묶어 고통받게 함으로써 파악됨의 가상을 일으키는 폭력일 것이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개념 자체에 대해서도 감각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말하지않고 빠져나가는 기술인 것 같다.- 경험없는 사람들은 이 형식주의 앞에 경탄으로 몸을 떨며, 심오한 천재성을 숭배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형식주의자들이 추상적인 개념 대용으로 직관적인 것을 사용함으로써 만들어내는 재미있는 규정들의 맑디맑음 앞에 신이나서, 자신이 이 위대한 작업에 막연하나마 어울리는 성격을 지닌 영혼이기를 희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지혜의 휘파람은, 휘파람을 따라불기가 쉬운 그만큼 꼭 그만큼 빨리 배워진다; 그리고 이 휘파람의 반복이 익숙해지고나면, 속임수가 들통난 마술이 자꾸 반복되는 것을 보는 만큼이나, 참을 수 없이 지겨워진다. 한가지 음만으로 연주하는 형식주의의 악기를 배우는 것은, 팔레트에 두 색깔만 예를들어 빨강과 녹색만 풀어놓고서 역사적 그림을 그릴때는 빨강으로 화폭전체를 칠하고 풍경화를 그릴때는 녹색으로 다 칠하는 화가의 기술을 배우는 것만큼이나 쉽다.- 이 위대한 회화를 볼 때 우리는, 하늘에 땅 위에 땅 밑에 있는 모든 것을 한 색으로 몽땅 발라버리는 편리함이 더 위대한지, 아니면 이런 절대보편의 색깔이 탁월한 도구라고 믿는 상상이 더 위대한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탁월하다는 착각과 편리함은 서로를 보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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