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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시간 -크로노스

by 이덕휴-dhleepaul 2020. 7. 31.

고전역학

시간(時間)은 사물의 변화를 인식하기 위한 개념이다. 세월(歲月) 또는 광음(光陰)이라고도 한다.

시간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는 것은 고대부터 철학자과학자들의 주된 관심사이다. 그러나 시간의 의미에 대한 여러 갈래의 폭넓은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시간의 정의를 제공하는 것은 어렵다. 또한 시간이 사건의 측정을 위한 인위적인 단위에 불과한지, 아니면 사건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리학적 의미를 갖는 어떠한 양인지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산업혁명은 '시간' 이라는 개념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전에는 서구에서조차 기계적이고 객관적이며 측정 가능한 '시간'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이 딱히 없었다. 공전과 자전에 따라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보고 시간을 대략적으로 가늠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예부터 발전해온 학문은 천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은 시간의 측정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철도회사가 생기고, 각종 물품회사가 생기면서 객관적인 시간의 측정과 여기의 정확성은 '돈'과 직결되는 문제가 되었다. 즉, 개인과 사회, 국가에게 있어서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경쟁력의 핵심이 된 것이다.

정리하면, 시간의 단위는 오랫동안 사건들 사이의 간격과 그 지속 기간에 대한 으로 생각되어 왔다. 예를들어,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과 하늘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태양의 육안 운동, 이 차고 기우는 변화, 진자의 진동처럼, 명백하게 주기적으로 운동을 하는 물체들을 시간의 단위에 대한 표준으로 사용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아인슈타인상대성이론, 카를 융동시성 이론,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시간 등이 논의되면서 어느 누구에게나 객관적인 것으로서 여겨지던 시간은 그 의미가 많이 변화하고있다. 이렇게 시간의 상대성과 주관성이 부각되기 시작하자, '시간' 이라는 주제는 작가, 화가와 철학자들에게 새로운 의미로서의 중요한 테마로 자리잡게 된다. 또한 이러한 시간에 대한 관심은 현대에 들어서 시간여행, 거꾸로 가는 시간, 시간이 멈추는 등 시간에 대한 흥미로운 영화들이 제작되는 계기가 된다.

목차

물리학에서의 시간

열역학 제 2 법칙

시간이 왜 과거에서 미래로만 직선적으로 흘러가는지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한 가지는 바로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무질서도)의 증가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고립계에서는 항상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하게 되고 결국에는 엔트로피가 극대값을 가지는 평형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엔트로피가 증가함에 따라 시공간의 에너지 분포가 변하게 되면 그 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며 커지는 쪽이 자동으로 시간이 흘러가는 미래가 된다. 이렇게 나타나는 시간의 방향성을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이라 하는데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방향성은 열역학적 시간의 방향성과 같기 때문에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시간의 상대성

 

알버트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이론

1905년 아인슈타인의 <운동하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 라는 논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시공에 대한 일대 사고의 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아인슈타인이 특수 상대성 이론이라 이름붙인 이 이론은 다음의 다섯 가지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움직이는 물체는 시간이 천천히 간다.(시간지연) 움직이는 물체는 길이가 짧아진다.(길이수축) 한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난 사건은 다른 운동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동시의 상대성) 움직이는 물체는 질량이 무거워진다.(질량증가) 물질과 에너지는 서로 바뀔 수 있다.(물질과 에너지의 동등성) 위와 같은 다섯 결론들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고전역학적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뒤바꾸어 놓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는 관측자의 상태에 상관없이 항상 같다는 사실에 기반해 기존의 갈릴레이상대성이론뉴턴역학을 부정한다. 또한 고전물리학적 관점에 따르면 모든 위치에 있는 시계는 똑같은 시간으로 맞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 일정하게 흘러가는데 이것 또한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해 부정된다. 그 근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의 기본 가정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광속 불변의 원리(의 속도가 지구의 공전속도에 상관없이 299,792,458m/sec 로 항상 일정하다는 사실은 미국의 마이컬슨(Albert Abraham Michelson, 1852~1931)과 몰리(Edward Williams Morley, 1838~1923)의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2. 어떤 관성계에서든 물리 법칙은 같다.

여기서 빛의 속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299,792,458m/sec 로 일정하다는 기본 가정에 따라 기존의 갈릴레이의 상대성 이론은 부정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빛의 속도에는 어떠한 다른 속도도 더해지거나 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광속 불변의 원리에 따라 ‘빛시계’를 가정하면, 움직이는 물체 안에서 시간은 더디게 간다는 결론을 도출 할 수 있다. 빛 시계는 일정한 거리를 위아래로 한 번 왕복하고 돌아오면 1초가 지나는 시계이다. 이 시계를 움직이는 기차 안에 두면, 이 빛이 이동하는 거리는 기차 밖에 있는 빛 시계의 빛이 이동하는 거리보다 길어지게 된다. 빛은 언제나 같은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기차 안의 시간은 느리게 가게 되는 것이다.

 

빛시계

이러한 시간지연 효과는 시간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일정한 속도로 흘러간다는 기존의 관념을 통째로 뒤엎는 것이었다. 시간은 속도와 움직임이 다른 개체들에게 모두 다르게 흘러가며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흘러가는 시계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지연 효과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알아 챌 수 없을 만큼 미미하기 때문에 처음에 사람들은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효과는 1971년, 비행기로 지구를 동쪽과 서쪽방향으로 돈 후 시계를 비교해 본 결과 실제로 서쪽으로 돈 시계는 0.000027초, 동쪽으로 돈 시계는 0.000006초 느려진 것이 확인 되어 사실로 증명되었다. 또한 오늘날에는 우리들이 쓰는 스마트폰, 인공위성 등 다양한 기기에 정확한 시간을 조절하는 원리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동시성의 상대성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절대적 동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멈춰있는 어떤 사람에게 다른 방향에서 오는 두 불빛이 동시에 반짝인다면 이것은 그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이나 뒤로 이동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 불빛은 동시에 반짝이지 않는다. 빛의 속도는 항상 일정하기 때문이다. 즉, 움직이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느 순간 한 불빛과는 점점 가까워지는 반면, 다른 한 불빛과는 점점 멀어지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불빛을 먼저 보게 되고, 멀리 떨어져가는 불빛은 나중에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운동 상태와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개체들에게 ‘동시’란 모두 다르게 관측된다.

철학에서의 시간

불교 철학에서는 시간은 실체가 아니며 단순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서양 철학에서 시간과 관련된 논의는 형이상학의 시초인 플라톤 이후로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라파엘로아테네 학당 중 일부. 좌측이 플라톤

불교

이 부분의 본문은 시간 (불교)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유위법이 생멸변화할 때의 그 변화상태를 가설(假說)적으로 이름하여 시간이라고 한다. 즉, 시간이란 실체가 없는 것으로 단순히 편의상 설정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1][2]

플라톤

플라톤에게 시간이란, 진정한 본질인 이데아의 모상일 뿐인 현실세계의 불완전함을 나타낼 뿐이다. 그는 사물이 본질의 순수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타자와 관계를 맺지 않은 독립적이고 부동의 상태에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간이 흐르는 현실세계에서는 이러한 본질의 순수성이 구현되지 않고, 시간이 존재하지 않아 아무런 변화도 운동도 일어나지 않는 이데아계에서만 본질의 순수성이 구현될 수 있다. 그에게 시간은, 이데아인 영원의 모상에 불과했다.

중세 스콜라 철학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의 수많은 역설과 문제를 탐구하였다. 그는 “시간은 정말로 무엇인가? 나에게 아무도 묻지 않더라도 나는 안다. 그러나 내가 질문자에게 설명하고자 한다면 나는 알지 못한다.” 라고 말하며, 시간 탐구의 어려움을 말했다. 그는 과연 ‘현재’가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사이의 형식적인 분기점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인지, 시간을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로 분할할 수 있는지, 시간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고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하였다. 그는 자신이 품은 시간에 관한 일련의 물음들의 답을 인간의 ‘정신(혼)’에서 구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이 시간이 분할하여 이해하는 것은 영원 속에서 유한한 시간을 뽑아낼 수 있는 ‘정신’ 때문이었다. 영원은 시간의 연장이 아닌 신에게 귀속된,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것이고 인간은 그가 인식할 수 있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는 창조 이전과 종말 이후는, 끝없는 시간 혹은 無 시간이 아닌, 영원성일 뿐이고, 인간이 인식하는 시간은 유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죽음, 재생, 죽음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순환적인 시간관을 거부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인간 정신의 산물로 보고, 인간은 신의 창조 이후 약 수천 년 동안 지속될 역사의 과정 속에서 살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아퀴나스

아퀴나스는 세계가 어떻게 신에 의해 창조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독특한 시간관을 도입하였다. 그가 보기에 세상은 시간과 함께 창조된 것이지, 시간으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었다. 신은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닌, 초시간적인 존재이지만,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갇힌 존재이다.

 

아이작 뉴턴

뉴턴과 라이프니츠

아이작 뉴턴에게 시간은 공간과 더불어 언제 어디서든 변하지 않는, 항상 균일하게 흘러가는 실체였다.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수학적이며 진리적인 절대시간은 외부의 그 어떤 것과 상관없이 그것 자체로 흐른다.” 사물의 존재나 변화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뉴턴적 시간은, 사물이 생성되는 순서결과로 시간이 생긴다는 라이프니츠적 시간관과 대립관계를 이룬다.

칸트

근대 서구 철학칸트뉴턴라이프니츠를 넘어선 새로운 시간관념을 주장한다. 그는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은 실체가 아닌, 관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선험적 종합판단과 공간과 더불어 어떤 대상에 대한 현상학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지니고 있는 인식의 형식으로 보았다. 이 형식은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이 만들어낸 도구일 뿐, 물리계에 실재하지 않는다. 칸트의 저서 형이상학 서설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은 인간이 가진 감성의 형식적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기본적인 형식이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는 발상은 인식의 주체를 외부에서 내부로 돌림으로써 데이비드 흄의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극복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이라고 할 수 있다.

 

앙리 베르그송

앙리 베르그송

베르그송은 제논의 역설에 대해 강의하던 중, 서양 철학이 이 때까지 시간의 본성을 망각한 채 시간을 공간화해서 이해하지 않았나, 라는 물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베르그송은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공간으로 치환해서 측정하는 과학적, 물리적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의식의 시간, 삶을 경험하는 방식으로서의 시간이 진정한 시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의식의 시간을 지속이라고 명명했다. '지속'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 이 흐름에 따라 생명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속으로서의 시간, 의식으로서의 시간은 내가 직접 느끼고 경험하는 '진짜' 시간이지만, 체험이 배제된 기계적 시간은 단지 형식에 불과하다.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은, 플라톤 이후로부터 시간과 상관없이, 시간이 흘러도 변화하지 않는 본질을 찾아 쓸데없이 헤맸다고 비판하였다. 그가 보기에 진정 중요한 철학의 주제는, 본질적으로 시간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어떻게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가? 의 문제였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시간성’에서 찾는다. 인간은 ‘시간성’으로 존재하며, 인간 실존은 근본적으로 시간적이다. “시간성이란, 있어 오면서 (과거), 마주하면서 (현재), 다가감(미래)이다.”

헤겔

헤겔은 시간관은 칸트의 시간관, 즉 시간을 외부의 실체가 아닌 내부의 형식으로 보는 시간관을 수용한다. 그러나 그의 시간은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형식이라기보다는, ‘정신’ 속에서 존재하며 ‘정신’의 의미를 규정하는 시간, 즉 역사적 시간이다. 영원히 순환하는 자연적 시간이 아닌 역사적 시간 속에서 자아는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의 구성 원리를 간파’ 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립한다. 헤겔근대적 의미의 시간 의식과, 근대적 의미의 자아를 확립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시간은 순수 자기의식으로서의 자아의 동일성의 원리이다. 이 시간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적 시간에서처럼 만물이 시간 속에서 생성되는 원리이기보다는 시간 그 자체가 이 생성, 곧 생기와 소멸, 존재하는 사상활동, 모든 것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그 산아를 절멸해 버리는 크로노스다.” 라고 말했다.

니체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그의 영원회귀적 시간관을 표현한다. “ 끝에 와서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재귀할 뿐이다. 그것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레비나스

레비나스는 윤리적 책임을 설명하기 위해 독특한 시간관을 도입하였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윤리적 책임은 “기억과 역사의 시간으로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시간의 개념을 필요로 한다. 그는 기존의 전통적인 시간관과 달리 지속되지 않는, 중단된 시간관을 주장하였다.

시간과 의식

시간의 지각

시간심리학자들의 연구 내용은 주로 사람들의 시간의 지속에 관한 지각에 대한 내용이다. 즉 사람은 사건들이 얼마나 지속되는지에 관해 어떻게 지각하는지 궁금해 한다는 뜻이다. 시간의 지속을 아는 것은 의외로 일상 생활에서 중요한 능력인데 악보를 표시된 음표만큼 연주하거나, 자신의 일을 일정한 시간 내에 끝내야 될 때 중요하게 쓰인다. 20세기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인식과 시간의 지각간의 상관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생체시계라는 개념을 도입하였으며 그 후에 생체시계 외에도 시간의 지각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요인을 찾아내었다. 다음의 내용은 그 요인들과 요인들이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설명하는 내용이다.

자극의 종류

19세기 후반 주로 독일과 미국에서는 다양한 실험이 이뤄졌는데 사람이 시간의 지속성을 얼마나 정확히 판단하는지, 혹은 다른 두 사건에서 어느 사건을 더 길게 지각하는지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이 연구에 의하면 자극의 종류에 따라 지속의 차이가 있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같은 시간 동안 가해지는 자극에 대해서는 청각적 자극을 시각적 자극보다 10~20% 정도 더 길게 인지한다. 더 흥미로운 내용은 ‘연속적 지속 착각’이라는 효과이다. 지속 시간이 똑같은 두 사건을 지각한다 하면 사람은 일정 시간보다 지속해서 주어지는 자극에 대해서는 짧은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자극보다 30%정도 더 길게 느낀다.

체온

미국의 심리학자 허드슨 호글런드는 체온과 시간 인지 과정간의 관계를 발견하였다. 어느 날 호글런드의 아내가 감기로 인해 체온이 올라갔다. 호글런드는 간병하는 도중에 잠시 자리를 떴는데 아내로부터 오랫동안 어디에 가있었냐는 불평을 들었다. 실제로 그가 떠났던 시간은 매우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호글런드는 체온이 시간 인지 과정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추측하고 그의 아내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다. 실험 결과 사람의 체온이 올라갈수록 시간을 인지하는 과정의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호글런드가 이 사실을 발견하였을 무렵 미셸 프랑수아라는 프랑스 심리학자도 비슷한 결과를 발표하였다(물론 허글런드는 발표 내용을 몰랐다).

인간의 자각 수준

인간의 자각 수준 또한 시간 지각에 영향을 끼친다. 자동차 사고를 당하는 순간같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사람들의 주관적 시간이 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풍부하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처해지면 사람들은 외부 사건의 속도가 느린 것처럼 보인다. 또한 객관적으로 매우 짧은 순간에 사람들은 많은 일을 한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은 생체시계의 속도가 크게 증가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 설명한다. 인간의 자각 수준에 의해 생체시계의 속도가 크게 증가하면 외부 시간은 느려지는 것처럼 느껴지며 반응속도는 평소보다 빨라진다.

나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간다고 느낀다. 이에 대해 흥미로운 실험이 있는데 바로 심리학자 퍼거스 크레이크(Fergus I. M. Craik)가 1999년에 행한 ‘노화와 시간 판단’에 관한 실험이다. 그는 우선 피실험자를 평균 나이 72.2세인 노인 그룹과 22.2세의 젊은 그룹으로 나뉘었다. 크레이크는 피실험자가 눈을 감고 30, 60, 120초를 짐작으로 세게 하는 실험과 실험자가 30, 60, 120초에 신호를 제시하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 판단하는 실험을 수행하였다. 실험 결과는 연령에 따라 달랐는데, 시간을 세도록 하는 실험에서 노인 그룹은 실제 30초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서야 30초가 흘렀다고 답했다. 또한 시간의 경과를 짐작하도록 했을 땐 실제 120초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40초밖에 안 됐다고 판단했다. 심리학자는 나이가 들수록 생체시계가 느려져 외부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낀다고 설명한다.

기억

사람들에게 갑자기 ‘~한 일을 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나요?’라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기억을 더듬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고 대답할 것이다. 기존의 생체시계 모델은 피실험자들에게 시간 판단이 이뤄질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줬을 때에만 유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들을 통해서는 위와 같이 시간 판단의 시작점을 알 수 없을 때에 생체시계가 어떻게 사람이 시간의 흐름에 대해 인지하였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이에 1960년대 온스타인은 인간이 지니는 시간 감각은 ‘일정 시간 동안 누적된 기억’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기억의 ‘용량’에 의해 시간의 흐름을 인식한다는 뜻이다(오늘날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시간 측정 시 대개는 기억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나는 자동차로 캐나다에 가는 길이었어요. 여행 중에 글 쓰는 일을 걱정하던 친구에게서 녹음기를 받았지요. 그리고 72년의 추억들을 녹음하기 시작했습니다. 72년 이야기를 끝낸 뒤 73년 이야기로 넘어갔어요. 국경에 이르렀을 때는 89년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녹음 테이프가 부족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해가 지날수록 이야기할 내용도 점점 줄어들었거든요. 점점 더 이야기할 것이 없었어요. 그 길이가 거의 일률적으로 짧아졌어요. 왜 그럴까요? 인생에서 반복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는 걸까요? 나이가 들면 저장되는 경험들이 점점 적어질까요? 젊은 시절에는 집중력이 좋을까요? 나는 이 가정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릴 수가 없군요.”[3]

세계적인 신경의학자이자『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등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인 올리버 색스의 글이다. 위의 예시에서 온스타인의 이론은 쉽게 증명되지만 사람의 인지와 시간 지각에 대해 전부 설명한 것은 아니다. 어떤 연구에 의하면 약물에 의해 각성 능력을 증대시킨 경우에는 과거 시간의 길이에, 약물이 의해 기억 저장에 관여한 경우에 현재 기억의 길이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기억의 ‘저장량’만 보는 온스타인의 이론은 지나친 단순화라는 결론이 나오기도 했다.

관심

누구나 지하철을 기다리거나 영화극장에서 줄 서서 표사기를 기다릴 때 시간이 유난히 느리게 흐른다고 느껴봤을 것이다. 반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에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 처럼 느낀다. 이 사례는 온스타인의 이론과는 반대되는 내용이다. 온스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 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에 더 많은 기억이 저장되므로 시간이 더 많이 흘렀다고 인식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반대로 인식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시간에 대한 관심’에 의해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시간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은 단순히 흥미를 갖는 일을 했을 때에만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관심의 집중이 필요한 까다로운 일을 할 때에도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느끼는 것이다.

칼 구스타프 융의 동시성 이론

 

칼 구스타브 융

칼 구스타프 융이 말한 심리적 차원에서 동시성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물리적인 상대성이론과는 차이가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비교적 외부적인 물질세계의 시간의 상대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시도한 것이라면, 칼 구스타프 융이 설명하는 동시성 현상은 인간의 의식과 외부세계와의 상호작용, 혹은 상호연결에 관한 것이다. 칼 융은 정신을 시공간 안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보았다. 즉, 인간 관념 속의 시공간과 인과성에 대한 개념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융은 의식의 차원을 넘어선 무의식의 차원의 무시간성, 무공간성을 제시하였다. 즉, 인간의 무의식은 현존하는 시공간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분석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가였던 칼 융은 자신이 돌보았던 환자들의 기이한 경험들은 기반으로 <동시성 : 비인과적인 연결원리>Synchronizitat als ein Prinzip akausaler Zusammenhange (Zurich, 1952)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그 당시의 정상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던 과거와 미래의 혼재, 인과율의 뒤섞임,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등을 임상사례들과 직관을 기반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칼 융이 제시하는 동시성 현상의 세 가지 유형은 다음과 같다.

  1. 관찰자의 의식상태와 외부의 사건이 동시적으로 일치를 보이는 경우.
  2. 관찰자의 의식상태와 관찰자의 지각영역으로 포섭되지 못하는 외부의 사건이 동시적으로 일치를 보이는 경우.
  3. 관찰자의 의식상태와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사건이 일치를 보이는 경우.

즉, 여기서 동시성이란 두 사건 사이에 인과적인 연결이나, 시간적인 나열과는 상관없이, 같거나 비슷한 의미를 띈 사건이 의식과 외부세계에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동시성(Synchronicity)은 의식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며, 무의식의 보완기제이고, 개인적인 측면인 동시에 원형적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시간의 흐름

3차원의 현실 우주는 세로·가로·높이의 방향으로 펼쳐지는 공간과,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기초로 하여 성립된다. 시간공간과 함께 과학철학의 기저를 이루는 주요한 개념이다.

시간(時間)과 시각(時刻)의 차이

시간과 시각이란 말이 섞여서 쓰이곤 하는데, 엄밀하게 말해 둘의 의미는 다르다. 시간의 흐름을 1차원의 직선으로 생각했을 때 직선상의 0차원의 점, 즉 시간의 어느 한 시점이 시각(時刻)이며, 시각과 시각 사이의 1차원 구간이 시간(時間)이다.[주 1]

평균 항성시와 평균 태양시

지구를 중심으로 한 하늘의 구면(球面)을 천구(天球)라고 한다. 항성이 천구에 달라붙어 있다고 하면 북극성을 중심으로 해서 별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관찰자 입장에서 천구가 약 1일에 1회전의 속도로 돌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현상을 천구의 일주 운동(日周運動)이라고 한다. 천체의 회전은 지구가 자전하는 현상이므로 이 회전축은 지구의 회전축, 즉 지구의 북극과 남극을 관통하는 직선으로, 이 직선이 천구와 교차되는 점을 각기 하늘의 북극, 하늘의 남극이라 한다. 따라서 이 점들은 천구가 회전하여도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들의 머리 위에 있는 천구상의 점, 즉 천정(天頂)과 하늘의 북극을 연결하는 큰 원을 자오선이라 부른다. 이 자오선은 시간과 함께 얼마만큼 회전하였는가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가 있다. 시각을 정의하려면, 천구상에 있는 천체가 자오선을 지나 얼마만큼 회전하였는가를 표시하면 된다. 일상 생활에 가장 관계가 깊은 것은 태양이므로 태양의 시각(時角=천체와 하늘의 북극을 연결하는 큰 원과 자오선 사이의 각)의 크기로 시각(時刻)을 나타내면 시각을 생활 주기에 쉽게 연관지을 수 있다.

세계시(世界時)와 협정 세계시

시각은 하늘을 보는 사람의 자오선을 기준으로 하여 측정하므로 보는 장소가 다르면 시각의 값이 달라진다. 영국의 그리니치를 통과하는 자오선으로 측정한 평균 태양시를 특히 세계시라고 부른다. 지구가 일정한 속도로 자전하고 있다면 평균 태양의 시간 각도로 결정되는 태양시의 연평균이 일정할 것이므로 평균 태양시의 정오(12시)부터 다음의 정오까지의 간격을 1평균 태양일로 하고, 이를 24시간으로 나누면 시·분·초의 시간을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구의 자전 속도는 일정하지 않다. 바닷물의 밀물과 썰물 때에 해저에서 마찰이 생기며, 이 마찰이 원인이 되어 자전 속도는 차츰 느려진다. 또한 불규칙, 돌발적인 속도의 변동도 있다. 따라서 평균 태양시로 시각을 정하는 데에 문제는 없지만, 그 시각의 간격(예를 들면 평균 태양일)으로 시간을 정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간의 단위인 초는 원자의 진동으로 정의된다. 세슘 원자시계로 실현되는 일정하고도 불변하는 길이의 초를 1초, 1초 더하여 가면 하나의 연속된 시간의 흐름이 형성된다. 이와 같이 해서 만들어진 시각이 세계시와 0.95초 이상 차이가 나지 않도록 한다. 만약 이 한도 이상으로 차이가 날 염려가 있을 때에는 1초를 더하거나 뺀다. 이러한 1초를 윤초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해서 각국은 표준시를 정해놓고 있는데 이를 협정 세계시라고 부른다. 윤초는 UTC를 기준으로 6월 30일 또는 12월 31일의 23시 59분 59초 다음에 23시 59분 60초로 가산하고, 다음이 다음 날 0시 0분 0초가 된다. 한국 표준시를 기준으로 하면 1월 1일 또는 7월 1일의 오전 8시 59분 59초의 다음에 8시 59분 60초로 가산하고, 다음이 오전 9시 0분 0초가 된다.

공전과 자전의 비율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지구의 공전 시간과 자전 시간이 정수비(整數比)가 되는 우연은 거의 없다. 지구가 한 번 공전하는 동안에 태양에 대한 자전은 365회 남짓, 정확하게 말하면 1년은 365.24219879일(1900년 초의 값)이 된다. 즉 1년을 365일로 하면 모자라고 366일로 하면 남는다. 그 때문에 4년에 1회씩 366일로 계산하는데 이것이 윤년이다. 은 지구의 둘레를 공전하는데, 우주공간에 대해서는 약 27.3일에 한 바퀴 돈다. 이를 1항성월이라 한다. 지구는 달을 데리고 태양의 둘레를 공전하기 때문에 지구에서 보면 만월과 다음의 만월 사이는 29.5일 정도 소요된다. 이를 1삭망월(29.53059일)이라 부른다.

시간의 측정

해시계

 

휴대용 해시계

시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해시계를 들 수 있다. 해시계란 막대기나 기둥, 또는 방첨탑(obelisk)의 그림자 길이를 측정하거나 위치 변화를 추적함으로써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생각 되었던 태양의 움직임을 이용해 시간을 측정하는 기구를 말한다. 그런데 우선 그림자의 길이를 재는 식의 해시계(gnomon,그노몬)는 그 지역의 시간만을 가리킬 수있다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태양의 움직임이 복잡하게 변하기 때문에 유용성이 떨어지는 문제도 생겼다. 그래서 막대기를 지구의 자전축과 평행이되게 기울이는 방법을 쓰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선다이얼 (sun dial)의 시초이자 시계 역사의 시초가 되었다. 그 예로 고대 이집트에서는 오벨리스크가 그노몬으로 쓰였는데, 지침(指針)은 지축에 평행하게 기울어지도록 하였다. 이러한 선다이얼은 계절에 관계 없이 같은 장소에 그림자의 위치가 일정한 곳에 오지만, 그림자의 길이는 늘 변했다.

선다이얼은 기원전 1500년경에 이집트 해시계가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이를 먼저 발명한 것은 아마도 바빌로니아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후 그노몬은 기원전 6세기 초에 그리스에 소개되는 등 차츰 동·서로 전해졌다. 그러나 밤이나 날씨가 궂은 때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17세기 까지만 해도 기계로 된 시계보다도 오히려 더 정확했다.

해시계의 도입은 시간에 대한 개념을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시간 사용에 대한 훈련도 촉진시켰다.

물시계

 

광명문 내에 전시된 자격루

해시계가 비교적 정확한 시간측정기구 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시간을 세분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 결점을 보완하여 물방울을 이용한 물시계 클랩시드라(clapsydra;물항아리)가 고안되었다. 또한 시간을 일종의 강이나 흐름 같은 것으로 보는 원초적인 관념이, 액체(물이나 수은) 나 모래 같은 것이 흐르는 속도를 이용해서 시간을 재도록 유도하였다. 물시계를 처음 발명한 것을 칼데아 사람들이나 이집트 사람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물받이를 층층이 겹쳐 놓고 물이 가장 윗쪽의 물받이로부터 아랫쪽의 물받이로 차례대로 흘러내리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물이 흐르는 속도 자체도 일정하지 않으며, 그릇의 수압이 떨어질 수록 그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물시계는 고대 문명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그 예로 기원전 100년 경 아테네에서는 공식 시간을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