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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지기칼럼

욥기 37장21절-엘리후의 연설(22)

by 이덕휴-dhleepaul 2020. 9. 8.

사람이 어떤 때는 穹蒼(궁창)의 光明(광명)을 볼 수 없어도 바람이 지나가면 맑아지느니라

 

(욥기 37:21-24)

 

엘리후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거룩한 경외감을 품고서 그것에 대한 몇몇 짤막하고도 위대한 말로써 자기의 이야기를 끝맺는다. 그 자신이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성스런 경외심을 가지고 남에게도 인상깊이 하나님의 영광을 심어 주기를 원하였다. 그는 간결하게 서둘러서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이제 곧 그 일을 자기 수중에 직접 장악하시려고 한다는 사실을 그가 감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 "짙은 흑암 중에 거하시며, 그것으로 자기 장막을 삼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이(대하 6:1; 시 18:11) "구름과 캄캄함"에 둘러쌓이신 채(시 97:2, 9) 흡사 심판을 위해 자기 보좌를 준비하러 오시는 것과 같이 그 두려운 병거를 타시고 그들을 향해 나아 오시는 것을 엘리후는 관찰한다. 그는 그 가슴에 회오리 바람을 품고 남방으로부터 나오는 구름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너무나 짙고 검어진 채 그들의 머리 위로 몰려 와서 그들 중 아무도 조금 전까지도 "구름 중에 있던 밝은 빛을 볼 수"가 없었다. 태양 빛도 이제는 어두워졌다. 이것은 그에게 흑암을 상기시켜 주었고, 이로 인하여 그는 말할 수가 없었으며(19절), 이 캄캄함은 그로 하여금 계속 말하는 게 두렵도록 만들었다(20절). 이와 같이 제자들도 "구름 속에 들어 갔을 때 두려워하였다"(눅 9:34).

그러나 그는 북쪽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그 쪽은 그것이 밝게 보였기에 그는 그 구름들이 대홍수를 일으키려고 모이는 것은 아니라는 희망을 가진다. 그들은 덮여 있기는 하나 빽둘러 쌓여있지는 않았다. 그는 "바람이 지나가서 그들을 깨끗이 쓸어 줄 것"으로 기대하는데, 그 바람이 하나님의 은총이 다시 돌아옴을 상징하여, 노아의 홍수의 물결로부터 땅이 들어나도록 지면 위로 불었던 바람과 같은 그런 바람이었다(창 7:1). 그리고 나면 "맑은 날씨가 북방에서 나올 것이며" 만사가 괜찮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찡그리지는 아니하실 것이며 영원히 다투지는 아니하실 것이다.

2.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고 하기 때문에 서둘러 결론을 맺는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의 총결산으로서 소수의 말들로 많은 것을 전달하고자 하는데, 만약 잘만 고려한다면 자기가 지금껏 박아 오던 쐐기를 완전히 때려 넣어 확정을 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에 대한 길을 닦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관찰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이시며, 자기의 모든 시종들에게 경외하는 생각을 줄 수밖에 없고 자기의 모든 대적들 위에 두려운 생각을 넣을 수밖에 없는 그런 초월적이고도 온전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는 두려운 찬양이 있다"(이렇게 해독하는 이도 있다). 왜냐하면 그는 찬송하기에도 두려운 분이시기 때문이다(출 15:11).

(2) 우리가 "전능자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는 "우리가 그를 발견해 낼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자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유한한 오성은 그의 무한하신 온전성을 포착하지 못한다(23절). 우리가 계란껍질 속에 바다를 담아 넣을 수 있느냐? 우리는 그가 자기의 섭리 가운데에서 취하시는 발자국을 추적할 수 없다. 그의 길은 바다 가운데 있다.

(3) "그는 권능이 지극히 빼어나신다." 하늘에서나 땅에서 그가 하고 싶은 일이면 무엇이든 그가 행하실 수가 있다는 것은 그의 권능이 빼어남이다. 그의 능력의 우주적인 범위와 그것의 항거할 수 없는 힘은 그 권능이 지극히 크심이다. 어떤 피조물도 그와 같이 그토록 강한 팔, 긴 팔을 가지지 못했다.

(4) 그는 지혜나 공의에 있어서도 못지 아니하게 빼어나신다. 즉 "심판과 풍부한 공의에 있어서" 지극히 크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의 권능이 지극히 크다고는 도무지 할 수 없다. 무슨 일이든 다 행하실 수 있는 그가 무슨 일이든 다 가장 선하게 행하시리라는 것은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는 그가 무한히 지혜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 그가 어떤 일에 있어서도 그릇 행하지 않을 것도 확신할 수가 있다. 이는 그가 무한히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죄인에게 심판을 행하실 때에는 그 행사에는 무한한 공의가 있어서 그는 죄인들이 마땅히 받을 벌 이상은 절대로 내리시지 않는다.

(5) "그는 벌을 내리시고자 원하지 않으신다. 그는 벌을 내리지 않으실 것이다." 즉 그는 즐거워하는 가운데 벌을 내리지는 않으신다. 인간의 자녀에게 괴로움을 주는 일이 하나님께 즐거움이 되지 못하는 터에, 자기 자신의 자녀에게 벌을 내리는 일은 말해 무엇하랴! 그는 당연한 이유가 있을 때와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는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벌 주지 아니하신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괴로움의 과중한 짐을 지우지 않으시고, 우리의 골격을 참작해 주신다.

이 구절을 이렇게 해독하는 이들도 있다. "전능자는 우리가 찾아 낼 수 없으신 분이며, 그의 권능이 크시나 심판으로 괴롭히지 않으시고, 그에게는 풍부한 공의가 있다." 그는 우리의 그릇된 행동이 무엇인지를 주목하는 일에 혈안이 된 분은 아니시다.

(6) 그는 자기들의 생각에 지혜롭다 하는 자들의 비난은 귀하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는 그들을 돌아보지 아니하신다"(24절). 그는 그들에게 친절히 보살펴 주고자 하시는 그의 뜻을 변경시키지 않을 것이며, 그에게 지시하려고 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그가 행하시도록 강요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하고, 그를 이기지도 못할 것이다. 그는 겸손한 자의 기도는 돌아보시나 간교한 자의 책략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신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인간보다 지혜롭다(고전 1:25).

(7) 이 모든 사실로부터 하나님은 위대하시므로 그는 크게 경외해야 할 분이라는 것을 추론해 내기는 어렵지 않다. 아니, 그는 은혜로우셔서 괴로움을 베풀지 않고자 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경외함이 마땅하다." "사유하심이 주께 있으심은 주를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시 130:4).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만인의 의무요 이득이다. 조만간에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을 경외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그의 물병에서 진노하심의 물이 쏟아질 때는 영원히 벌벌 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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