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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

이반일리히의 유언, 데이비드 케일리

by 이덕휴-dhleepaul 2020. 12. 15.

 

 

"미래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사람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제도에는 미래가 있지만,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로지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서 문

성직자 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일리히는 자신이 '그녀she'라고 부르는 교회와 '그것it'이라고 부르는 교회를 구별했다. '그녀'로 지칭되는 교회는 전통의 보고이자 기독교 공동체의 살아 있는 육신으로, 일리히는 항상 그곳에 머물렀으며 깊게 헌신했다. 이러한 의미의 교회를 그는 '연결망 속의 놀라움, 진주,.... 신비, 우리 안의 왕국'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지칭되는 교회는 이기적이고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교회로, 그는 여기서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였다.

 

권력없는 교회를 제창하다

일리히는 '개발'을 통해 재화와 서비스가 부족한, 더 궁핍한 '현대화된 빈곤'이 도래하게 되므로 개발이라는 현상을 '생존을 위한 전쟁'으로 보았다. 또한 이를 '절대 멈추지 않을 소비의 천국'이라고 주장했으며, 결국엔 끝없는 소비와 절대 만족할 수 없는 서비스에 대한 필요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했다. 또한 개발의 화려함에 의해 실존의 의미가 무디어지며 자기만족감을 잃게 된다고 하였다.

 

1960년대 일리히는 교회가 '진보를 위한 동맹'과 같은 주도권을 휘두르지 않도록 설득하면서 '기독교의 교리를 이용하여 사회적, 종교적인 문제를 뒷받침하는 것은 신성모독'임을 주장했다. 그는 '사명mission은 진지한 자기비판과 깊은 경청, 스스로를 버리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복음이 다른 문화의 목소리로 전해질 때 그것을 듣고자 한다면 스스로의 문화를 돌아보고 상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미국 교회는 믿음과 문화를 혼동했고, 그들의 권력과 그 권력을 뒷받침해주는 교리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일리히는 사역을 하면서 겪게 되는 순수한 빈곤을 찬양했다. 이러한 빈곤이 나타나지 않는 곳에서는, 일리히는 자신의 소명이 그런 교회의 자기만족과 세속적인 모습을 비판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제가 사회문제에 개입해야 한다면,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웃음을 통해 거짓을 폭로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일리히에게 십자가란 권력의 포기를 의미했다. 심자가는 스스로가 선언하는 통합을 상징하지만 결코 그것에 속하지는 않는다. 통합은 항상 사람들이 만든 도구적인 목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일리히는 교회의 역할이란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지 않고, 그런 풀리지 않는 문제를 인식하고 널리 알리는 데 있다고 보았다. '교회가 선교, 즉 복음의 전파를 통해 기여하는 것은 유머에 따르는 웃음의 역할과 비슷하다.'면서 일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두 명이 같은 이야기를 들었으되, 이해하고 웃는 것은 한 사람이다.'

 

1970년대 팜플렛 네 편

일리히는 학교 제도의 다른 고약한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우선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학교 체제의 권위성은 결국 학습을 방해하고, 지식을 쪼개고 나누어 임의적인 순서와 패키지로 만들고 무엇보다도 배움이라는 것이 가르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잘못된 환상을 심어 주게 된다. 또한 그는 학교가 얼마나 독단적으로 역효과를 내는 체제인지에 대해서도, 지식의 보급과 획득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였다. 왜 항상 학교 제도의 실패에 대하여 학교가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적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가? 왜 학교 체제는 스스로 추구하는 목적과 반대되는 결과를 보이며, 사람들은 문맹이거나 무관심한 상태에 머무를까?

 

'학교없는 사회'에서 그는 학교 체제의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공격했지만, 학교 그 자체를 비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리히는 학교는 특정부분 합리적이고 실용적으로 교육제도를 구성할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반대했던 것은 '극단적 독점'이었다. 즉, 교육이 직업을 구하고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일리히는 속도가 갖는 한계와 그것을 지켜야 할 이유를 다시 논했다. 이 책은 '의료 체계의 구축이 건강에 대한 주요한 위협이 되었다'는 놀랄 만한 주장을 담고 있다. 책에서는 또 병원의 헤게모니가 환자들의 의지를 꺾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치유하거나 고통을 견디거나 죽지 못하게 만드는 다양한 경로를 탐구하고 있다. 일리히는 이런 건강의 수용을 '의사에 의한 병'을 뜻하는 의원병iatrogenesis이라 불렀다.

 

일리히가 일컬은 문화적 의원병이 이제 만성화되어 사람들이 건강에 대해 지나치게 의학적으로 한정된 이미지를 추구하고 의학 검사와 검진, 위험 평가의 왜곡된 거울 안에 비친 모습을 더욱 더 신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미 정치적 논의는 거의 전적으로 의료 서비스가 공공 서비스인지, 아니면 민간 서비스인지, 그리고 때에 맞춰 공평하게 제공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의료 서비스의 특징과 중요성은 하찮게 여겨지며, 무엇이 바람직하고 적절하며 충분한지에 대한 질문은 정치적인 형태로 드러나지도 못하고 있다. 일리히가 막아보려고 했던 경계를 우리가 얼마나 멀리 넘어섰는지 이보다 확실하게 보여주는 예는 없을 것이다.

 

현대사회의 여러 전제의 탐구

그가 역사를 가르치고 연구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는 근대적 확실성의 고고학을 연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근대적 확실성은 너무 명확했고 '자연스러워'보여 그동안 의문시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12세기를 이러한 확실성의 중요한 발흥기로 보려고 했다. 그가 다음 장에서 설명하듯이 오늘날의 양심, 시민권, 기술, 택스트, 개성, 결혼 들의 개념은 모두 그 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12세기의 세계가 근대적 감각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외부로 남아 있었기에 이 점이 그가 역사를 연구하는 바로 두 번째 이유가 되었다.

 

일리히에게 과거는 항상 양면적이었다. 과거는 현재 속에 있으나, 동시에 우리의 손이 닿지 않기 때문에 보물이나 휴양지처럼 현재로부터 외따로 떨어져 있다. 그래서 그는 기원을 탐색하면서도 항상 과거가 단순히 현재의 프롤로그나 이데올로기적 원천 이상의 그 무엇을 항상 만들어내는 위엄과 차이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과거는 현재의 원시적인 형태이다'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의 책 '젠더Gender'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나는 공적이고 잘 정리된 비판적인 연구를 통해 죽은 자를 존경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유토피아에서 캐온 생각을 가지고 과거를 재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토착적'이라는 단어에 생명을 불어넣다

그림자 경제는 쇼핑에서부터 직장까지 운전해서 가는 등 무보수 활동이지만 경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활동들을 모두 포함하여 정식formal 경제를 보완한다. 토착영역은 경제학 영역 밖에 있으며 '경제학에서 발전된 개념을 이용한 분석으로는 결코 다루기 힘든' 활동들을 포함한다. 일리히가 '그림자 노동'에서 상기시킨 것처럼 '토착적vernacular'이라는 단어는 주로 언어나 건축에서 무지 또는 미숙한 형태를 뜻했다. 일리히는 그 단어에 '국산의, 소박한, 토착의 또는 손수 만든 것 일체'를 뜻하는 라틴어 버나큘럼vernaculum의 보다 넓은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일리히는 결핍의 영역으로부터 토착적인 것을 확실히 구분함으로써 경제계에서 배제된 사람들이나 스스로를 배제시킨 사람들이 경제의 그림자 아래로 추락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고자 했다.

 

선은 무엇인가

기도의 가치는 뇌파에 안정을 가져오는 효과로 측정될 수 있을 것이며, 숲이 주는 휴양의 쾌적함은 바이오매스로서의 숲의 금전적 가치와 비교할 수 있다. 치료를 통해서 쇠약한 환자들의 생명을 유지할 수는 있지만 환자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건강상태에 비하여 추가 치료비용이 너무 많이 들 경우에는 쇠약한 환자들에게 사망을 선고할 수 있다. 가치는 당연한 부분에 대한 감각을 훼손하고 경제학적 계산으로 대치한다. 가치는 경쟁가치를 넘어설 때에만 효과를 나타내지만 선은 언제나 효과적이다. 그는 이러한 차이를 고려하여 감각의 역사를 추적하고, 어떻게 의식이 선에 맞춰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쇠퇴하게 되었는지 연구했다.

 

그리스도 신앙의 배반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는 윤리적 규범 너머에 존재하며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일상 세계를 혼란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일리히는 한계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이 선언에서 심각한 변덕성을 인지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유는 그 자체로 규범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그 한계가 없으므로 무섭게 인간 생활이 침해될 것이라는 것이다.

 

강생에서의 결정적 전환

예수는 요한복음에서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들의 죄를 변명할 구실이 없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내 아버지까지 미워한다. 일찍이 다른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들을 내가 그들 가운데서 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와 내 아버지까지 미워하였다.'라고 했다. 이 새로운 맥락에서 죄는 더 이상 율법의 위반을 뜻할 뿐만 아니라 폭로된 것에 대한 냉정함이나 무관심 그 이상을 뜻한다. 일리히는 '죄는 자유를 실행함으로써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 생겨난 관계 즉, 내가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관계 또는 인간과 신 사이에 맺어진 관계를 명예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어떤 면에서든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에 반하는 죄이며 불신이다.' 이런 면에서 죄는 단순히 악이나 도덕적 과실이 아니다. 이는 성령에 거스르는 것으로, 들었음에도 들은 것을 무시한 이들에게만 해당되며, 바오로가 말한 '죄에 대한 용서'와 같은 자유의 광명 안에서만 보인다.

 

이 최초의 기독교인들에게 사랑은 개인적인 사명이었다. 그들은 아직 그들이 속해 있는 다른 세속적 실체에 대해서 사회적 조합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1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종 이후에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1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종 이후에 변하기 시작했다. 믿음, 희망, 사랑을 바라는 경향이 하나의 종교가 되었고 주교들은 행정권을 부여받았으며, 교회는 자선단체들을 설립함으로써 사회적 지위를 강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최선의 것이 타락하여 최악이 되었다는 일리히의 이야기의 시작이다. 교회는 자비가 필요한 곳에 즉시 은총을 만들 수 있는 사회적 기계가 되어가는 첫 단계를 거치게 된다.

 

최선의 타락은 최악이다

그는 제도화 자체를 비판하거나 사람들이 제도적인 굴레가 없이도 살 수 있는 천사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교회와 그 신자들의 자기인식 부족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즉, 사랑과 그 제도적 허위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도화 그 자체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생각을 가졌고, 사랑의 제도화가 필연적인 과정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전적으로 인간적인 것으로 인정한다.

 

복음서를 타락에 이르게끔 만든 것은 이런 세심한 배려와 균형이며 이는 최악의 타락을 초래했다. 일리히는 오랫동안 기독교의 개념과 실천이 그가 튕기기, 타락, 뒤집기 등으로 부르는 과정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자유는 의무로 법제화되고 '최고의 어리석음'이 '잔혹한 열심'으로 변한다. 공기를 함께 마실 뿐 서로 무관했던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근대 국가를 세우는 토대가 된 사회계약이 되었다. 예수가 '그리스도의 화신'이라는 믿음은 유대교의 우상 금지 원칙을 약화시키고 현대 세계가 이미지의 홍수로 빠져들게 했다. 죄가 '금지된' 것처럼 죄가 양심에 짓눌린 사람을 무서운 고립상태로 이끈다는 생각을 통해서 '악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었다.

 

전환점을 넘어선 후에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일리히는 그가 주장했던 방향의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한 시점을 지나쳐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지적한 제도의 역효과는 그 제도를 누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욱 불분명해져 버린 것 같았고, 모든 성직자들은 일부 권위를 잃고 발전에 대한 의식은 변색되었지만 이는 '체제'내에서의 반체제문화 요소의 적응과 보호적 냉소주의로만 해석될 것이다.

 

묵시록적 세계를 살아온 친구

현대적 관념들은 그들이 왜곡하고 부정하고 숨겨온 기독교적 원형에 의해 출현했던 것이다. 일리히는 이견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러한 시각을 '예언적'이라고 한다. 이 단어가 오늘날 쓰이는 것처럼 대중 영화의 주요 테마가 되어버린 신의 앙갚음이나 무시무시한 천재지변에 대한 근본주의적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이 단어를 주저하며 거론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일리히는 이 단어를 글자 그대로 '폭로'의 뜻으로 쓴다. 그에게 현대 세계는 사마리아인이 길가에 쓰러진 남자에게 끗밖의 예측하지 않은 반응을 보인 것을 사기나 시뮬레이션으로 여길 때에만 이해할 수 있는 죄를 폭로한다. 전통적으로 죄는 선의 망각이자 부재이다. 일리히는 새로운 유형의 죄는 선이 측정 가능한 가치로 대체되고 제도적 성과로 변형될 때에만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이런 경우, 선은 그냥 잠시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감지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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