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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adapted from invited talks given at the FHI (Oxford University) and the Charity International Happiness Conference (2007)
다음 내용은 Future of Humanity Institute(옥스포드 대학) 및 Charity International의 Happiness Conference(행복회의, 2007)에서 행해진 초청 강연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팟캐스트
(15.3 MB)
강연 시간 34분
종식론자 프로젝트
서론
이 논의는 고통과 이를 없애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모든 생물계를 통틀어 고통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후손들은 오늘 날 경험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수십, 수백 배에 이르는,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된 행복을 물려 받은 채 태어날 것입니다.
우선, 저는 모든 불쾌한 경험(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까지)의 생물학적 근본 원인을 없애는 일이 기술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 간단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로, 저는 윤리적 공리주의자든 아니든 종식론자 프로젝트가 최우선적인 도덕적 긴급성을 갖는다는 점을 논증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비록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생명공학에 있어서 어떤 혁명적인 변화는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을 논증할 것입니다.
1. 기술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
슬픈 일이지만, 사회경제적 개혁, 기하급수적 경제 성장, 일반적인 의미의 기술적 진보, 또는 세상의 악을 해결하기 위한 전통적인 처방 따위는, 적어도 단독으로는 절대로 고통을 종식시킬 수 없습니다. 외부 환경을 개선하려는 시도는 중요하며, 존경스러운 일이지만, 그러한 시도로는 우리가 올라서 있는 쾌락의 트레드밀(hedonic treadmill)을 유전적 한계를 넘어 재조정할 수는 없습니다. 쌍둥이 연구를 통해 우리 모두는 일생 동안, [부분적으로] 유전되는 어떤 설정치를 중심으로 좁은 범위 내에서 행복(또는 불행)을 경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설정치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장기적으로 스트레스가 조절되지 않는 경우 쾌락 설정치가 하향조정될 수도 있지만, 이 역시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전시(戰時)에는 자살률이 떨어집니다. 또한 사지가 마비되는 사고를 당한 사람들에 대한 연구 결과는 대개 6개월이 지나면 그렇게 끔찍한 일을 겪기 전에 비해 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1.] 불행하게도, 좌파든 우파든, 자유시장주의든 사회주의든,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미래의 하이테크를 추구하든 자신의 텃밭을 일구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러한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전통적 미래학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것, 예를 들어 영원한 젊음, 무한한 물질적 풍요, 형태학적 자유(morphological freedom), 초월적 지성(superintelligence), 몰입형 가상현실(immersive VR), 분자 나노기술 등이 현실화된다고 해도 보상 경로를 강화(reward pathway enrichment)시키지 않는다면, 우리의 주관적 삶의 질이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조상들이나 오늘날 뉴기니 부족민의 그것을 평균적으로 크게 상회할 것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아주 정교한 신경스캔을 해보지 않고는 입증하기 어렵지만, 심리적 고통의 객관적 지표, 예를 들어 자살률 등을 비교함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고양되지 않은 인간은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사소한 실망이나 좌절감에 이르는 다양한 진화론적 감정, 즉 슬픔, 불안, 질투, 실존적 고뇌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물학적 조건은 "인간이라는 것"의 일부인 것입니다. 주관적으로 불쾌한 의식 상태는 유전적인 적응 때문에 존재합니다. 우리의 핵심적인 감정 하나하나는 과거 진화 과정에서 저마다 독특한 신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조상들이 처한 환경에서 유전자의 포괄적응도(inclusive fitness)를 강화시킨 행동을 유도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외부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고통과 불안을 종식시킬 수 없다면, 기술적으로 어떤 방법에 의해 이것이 가능할까요?
사회학적으로 설득력이 낮은 것부터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은 3가지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a) 와이어헤딩(wireheading)
b) 유토피아적 맞춤 약물
c) 유전공학 및 – 제가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이 바로 이건데 – 맞춤형 신생아를 낳는, 곧 도래할 생식 혁명
a) 와이어헤딩이란 전극을 이식하여 직접 뇌의 쾌락 중추를 자극하는 방법입니다. 두개강내 자가 자극(intracranial self-stimulation)법은 생리적 또는 주관적 내성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즉, 이틀 후든 2분 후든 똑 같은 효과를 나타냅니다. 와이어헤딩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환경적 영향도 미미합니다.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해소하며,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라면 성행위보다 덜 모욕적입니다. 물론, 일생 동안 뇌 속에 전극을 설치한 채 산다는 것은 우울증이 극심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호소력 있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를 적용하는데 기술적인 문제는 무엇이 있을까요?
글쎄요, 와이어헤딩은 진화의 관점에서 안정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널리 적용한다면 도태 압력(selection pressure)이 작용할 것입니다. 또한, 와이어헤딩은 양육행동(nurturing behaviour)을 촉진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든 인간외적 존재든, 와이어헤딩된 존재가 와이어헤딩된 자손을 기르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와이어헤딩 또는 상응하는 조치를 통한일률적이고, 예외 없는 행복 추구는, 최소한 전세계적으로 적용된다면, 인류의 고통을 효율적으로 종식시킬 것입니다. 보상중추를 직접 자극하면 환경 자극에 대한 정보 민감도가 파괴됩니다. 따라서 현명해지고 싶다면 – 또한 끊임없이 더욱 현명해지고 싶다면 –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지적인 존재는 오늘날 일생에 걸친 고난의 원인인 불행이 얼마나 심한가를 기준으로 동기 체계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또는 현재 우리가 전형적으로 겪는 쾌락과 고통이 혼재하는 상태를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전적으로 대뇌 행복의 [적응] 정도 차이에 기반을 둔 정신적 정보 경제(informational economy)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 바로 이것이 제가 논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와이어헤딩을 배제한다면 너무 성급한 판단일 수 있습니다. 먼 미래에, 우리는 즐겁지 않거나 틀에 박힌 모든 일을 무생물인 수퍼컴퓨터, 인공이식물 또는 로봇에게 떠맡긴 채, 항구적인 오르가즘의 기쁨을 향유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오르가즘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나은 상태를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상적인 상태가 조합된 삶을 구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변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든, 제 생각에는 초월적 행복과 초월적 지성을 모두 겨냥한다면 적어도 우리의 행동이 내포한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보다 신중해야 합니다. 고통을 종식시키는 방법이 동시에 초월적 행복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급박하지 않습니다.
[떠맡긴다는 선택에서 무생물인 수퍼컴퓨터, 인공이식물 또는 로봇은 기능적 구조상 유해한 자극을 회피하거나 반응할 수 있다고 해도 주관적인 현상적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다는(또는 최소한 경험할 필요 없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생물적 고통이 없다는 이러한 생각은 현존하는 컴퓨터의 경우 상대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PC의 스위치를 끄는 행위에 도덕적 함의 따위는 없으며, 실리콘 로봇은 손상 시 고통을 느끼지 않고도 부식성 산(酸)을 피하도록 프로그램할 수 있습니다. 고전적 폰 노이만 구조를 지닌 연산 시스템이 흥미롭게도 의식을 지닐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저는 회의적입니다만, 어쨌든 이는 어떠한 시스템이든 유해한 자극을 회피하려면 기능상 주관적인 맥락의 고통이 필수적이라는 논의를 생략할 수 있다면 떠맡긴다는 선택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b)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한 두 번째 기술적인 선택은 미래의 맞춤 약물입니다. 성숙된 포스트 게놈 의학의 시대에는, 허용할 수 없는 부작용이 없으면서 일생 동안 높은 수준의 기능성과 함께 행복을 유지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상적인 쾌락 약물(pleasure-drug)을 합리적으로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서 "이상적인 쾌락 약물"이란 짧게 표현하기 위한 말일 뿐입니다. 원칙적으로 그러한 약물은 일반적인 의미의 일차원적이고 도덕 관념이 사상된 감각적 쾌락이 아닌 지적, 감성적, 미적 및 아마도 영적인 행복까지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뇌의 음성 되먹이기 기전을 활성화하는 기분전환용 약물이나, 멋진 신세계식의 경박한 약물 도취, 또는 통제불능의 흥분, 비판적 통찰의 마비, 과대망상과 사고비약을 동반하는 도취적 열광을 유도하는 약물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 가능한 승화된 행복, 쾌락의 트레드밀을 재조정하여 모든 사람에게 높은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기적의 약을 개발할 수는 없을까요?
"약물"이란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움츠러듭니다. 오늘날의 길거리 마약과, 이와 별로 다를 것 없는 구태의연한 의료용 약물들을 생각해 볼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학자나 지성인들조차 바보 약물의 원조 격인 에틸 알코올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일시적으로 행복하거나 바보로 만드는 어떤 약물을 사회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면, 왜 사람들을 영원히 행복하고, 보다 현명하게 만들어 주는 약물을 이성적으로 고안할 수 없는 것입니까? 추측하건대, 남용 가능성을 제한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상적인 쾌락 약물이(제한적이지만 중요한 의미에서) 흡연자의 뇌에서 최적 혈중 수치가 세밀하게 조정되는 니코틴 비슷한 것이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통제 불능 상태까지 용량을 올리게 되는 일은 없으니까요.
물론 약물에 기반한 해결책에도 온갖 문제점이 따릅니다. 여기서 논증하지는 않겠지만, 원칙적으로 저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다 심오한 문제가 있습니다. 진화에 의해 물려받은 현재 우리의 자연적 의식 상태에 근본적으로 잘못된(또는 최소한 근본적으로 부적합한) 부분이 없다면, 우리는 이를 그토록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쾌하지는 않다고 해도, 일상 의식은 이른바 최상의 경험에 비하면 평범한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 의식은 어쩌면 우리의 유전자가 아프리카의 사바나에서 보다 많은 복제본을 남길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환경적응적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왜 우리의 초기 상태를 한없이 끌고 가야 하는 것입니까? 왜 문자 그대로 우리의 유전 코드를 수정함으로써 인간성이란 것을 변화시키면 안 되는 것일까요?
약리학적 해결책을 이런 식으로 배제한다면 이 역시 너무 성급한 판단일 수 있습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유토피아적 맞춤 약물들은 즉시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극히 섬세한 의식 조절에 항상 유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저는 맞춤 약물이 현재의식(conscious mind)의 이질적인 다양성을 탐구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장기적인 자가 투약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는 역시 어떤 유전적 성향을 지니고 태어날 수 있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요? 가장 열렬한 종식론자라고 해도 모든 어린이들이 탄생하는 순간부터 온갖 약물을 섞어 놓은 혼합물을 투여하기 시작해서, 일생 동안 복용한다는 생각을 쉽게 수긍할 수 있을까요?
c) 따라서 세 번째 방법, 체세포와 생식세포 치료를 함께 포괄하는 유전적 해결책이 등장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 주위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항상 우울하거나 기분이 저하되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란성 및 이란성 쌍둥이 연구를 통해 우울증에는 높은 수준의 유전적 하중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반대로,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낙천주의 정도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들이 기분고양성(hyperthymic)이라고 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분고양성이란 조증이나 양극성 장애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때로 타인들에 비해 행복한 상태에 불과하다고 해도, 현재의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은 항상 극도로 행복한 상태입니다. 기분고양성인 사람들은 주위 환경에 "적절히" 반응하며 적응합니다. 실로 활기차고, 생산적이며 창조적인 성향을 타고난 셈입니다. 그러나 극히 기분이 좋을 때라도, 그들이 "황홀경에서 헤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전체 문명 차원에서 우리가 유전적 기분고양성이 되기로 한다면, 오직 행복의 적응적 정도 차이에 의해서만 동기를 부여 받는 시스템을 채택하기로 한다면 어떨까요? 보다 근본적으로, 쾌락적 기질의 유전적 기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기분고양성-촉진 유전자/유전자 조합과 촉진 조절 인자를 대량으로 복제하여 투여함으로써, 항상성과 쾌락의 트레드밀을 해치지 않고 우리의 쾌락적 설정치를 훨씬 높은 수준에 맞추는 방법을 선택할 수는 없을까요?
여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 이러한 유전적 재보정은 획일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행복한 사람, 특히 과도파민(hyperdopaminergic) 상태의 사람들은 보통 우울 상태에 있는 사람들보다 잠재적으로 바람직한 다양한 자극에 보다 쉽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보다 다양한 탐구적 행위에 참여합니다. 이러한 성향은 고양된 개인과 포스트휴먼 사회 전체가 함께 판에 박힌,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에 빠질 가능성을 감소시킵니다.
둘째, 전세계적인 기분고양성이라고 하면 마치 어마어마한 실험처럼 들립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유성 생식 과정은 사실상 하나의 실험입니다. 우리는 룰렛을 벌이듯 유전자를 마구 섞은 후 유전의 주사위를 던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생학"이란 말에 눈썹을 찌푸립니다. 그러나, 비록 거칠고, 무슨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미래의 배우자를 고를 때, 실제로 하는 행동이 바로 우생학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향후 수십 년 내에, 부모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점점 이성적이고 책임감 있게 생식에 관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착상 전 진단은 일상화될 것입니다. 인공 자궁이 실용화되어 인간 산도(産道)의 제한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것입니다. 또한 생식 의학의 혁명이 일어나 낡은 진화의 도박을 대신할 것입니다. 문제는 생식 혁명이 도래할 것인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종류의 존재(또한 어떤 종류의 의식)를 창조하고 싶은지가 아닐까요?
셋째, 이런 생식 혁명이 서구의 부유한 엘리트 계층만이 누리는 특권이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해도 오래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휴대폰이 개발된 후 얼마나 짧은 기간 내에 전세계적으로 보급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라디오가 개발된 후 전세계적으로 보급되기까지는 50년, 텔레비젼은 20년이 걸렸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소개된 후 전세계적으로 보급되기까지의 기간은 급속도로 짧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가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쨌든, 적어도 예측 가능한 미래에, 쾌락의 트레드밀을 아예 없애기 보다 유전적으로 재보정하는 일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고통, 불안, 죄책감, 심지어 우울까지도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는 성가신 원초적 감정은 제거된 채 기능적 유사 감정으로 보존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의 기능적 유사 감정(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진보의 원동력인)과 함께, 열광적인 행복감에 도취되지 않은 채 분별력과 비판적 통찰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쾌락적 상태가 대폭 고양되고, 보상 중추가 신체적, 기능적으로 증폭된 상태에서 원칙적으로 기존의 선호 체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베토벤보다 모차르트를 좋아하거나, 놀기보다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쾌락적 상태가 대폭 고양된 상태에서도 이러한 선호 순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저는, 우리의 선호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우리가 [전문용어를 용서해 주십시오] "감정의 재대뇌화(re-encephalisation of emotion)"를 추구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자연 선택을 통한 진화의 결과, 우리는 유전자를 위해서라면 자신과 타인에게 해가 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부정적인 태도를 형성하는 강력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최고의 행복은 적을 무찌르고, 눈 앞에서 혹사시키며, 그들의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고,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수의를 입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을 품에 안는 일이다’라고 했던 징기스칸의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학계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들 하지만, 심지어 상아탑 안의 삶조차 경쟁적으로 지위를 탐하고, 마초 기질이 선도하는 온갖 의식이 횡행하는 세련된 야만성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두가 패배자가 되는 제로섬 게임인 셈입니다. 우리가 선호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조상들이 처했던 환경에 유전적으로 적응한 결과 형성된 추잡한 행동과 의식 상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우리 스스로 손상된 정보를 재기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여기서 저는 유전적으로 고양된 쾌락적 기질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감정의 생물학적 측면을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미러 뉴런(mirror neuron)을 기능적으로 증폭시켜 공감 능력을 키우거나, 옥시토신 분비를 지속적으로 증가시켜 신뢰와 사회성을 향상시키는 조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를 들어, 영성(靈性)이나 심미관, 또는 유머 감각의 분자적 원인을 파악하고, 이러한 심리적 기제를 조절하거나 “과표현”시킬 수도 있습니다. 정보이론적인 측면에서 세계에 대한 적응력 있고, 유연하며 지적인 반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쾌락 척도 상 정확히 어디에 위치하는지가 아니라, 차이에 대해 정보적으로 민감한지 여부입니다. 실제로 정보이론 학자들은 정보를 단순히 "차이를 만들어 내는 차이"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이러한 감정의 재대뇌화는 우리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모든 감각의 행복감을 조절하면서도 동시에 전부는 아니더라도 기존에 지니고 있던 대부분의 선호 체계를 유지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논의했던 고통을 종식하기 위한 세 가지 기술적 선택, 즉 와이어헤딩, 맞춤 약물 및 유전공학은 상호 배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로써 가능한 모든 방안이 망라된 것일까요? 저로서는 다른 실행 가능한 선택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트랜스휴머니스트 가운데는 언젠가 모든 인간을 스캔하여 디지털화한 후 무생물인 컴퓨터에 업로드하여 재프로그래밍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글쎄요, 사실 저는 회의적입니다만 어쨌든 이러한 방법으로도 이른바 파괴적 업로드라는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생물계에 현존하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파괴적 업로드는 홀로코스트에 준하는 선택이므로 저는 여기서 감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합니다.
2. 왜 이런 일을 해야만 하는가
향후 몇 세기 안에 우리가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이렇게 신(神)적인 힘을 갖게 된다고 가정해 봅시다. 또한, 여기서 논의한 재보정 방법을 통해서든, 불쾌하거나 판에 박힌 모든 것을 무생물적인 인공물, 생체공학적 이식편 또는 컴퓨터에 떠맡기는 방법을 통해서든, 또는 어쩌면 질투심 같은 경우 아예 제거해버리는 방법을 통해서든, 불쾌한 경험의 신호화 기능을 대체할 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왜 우리 모두는 종식론자가 되어야 할까요?
만일 고전적 공리주의자라면 종식론자 프로젝트를 당연히 지지할 것입니다. 벤담에 생명공학을 더한 것과 같으니까요. 고통의 종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반드시 고전적 공리주의자일 필요는 없지만, 모든 고전적 공리주의자는 종식론자 프로젝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벤담은 사회와 법률의 개혁을 지지했습니다. 물론 현재로서도 중요한 일이긴 합니다만, 그는 생명공학과 유전의학의 시대 전에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과학적으로 계몽된 불교도라면, 역시 당연히 종식론자 프로젝트를 지지할 것입니다. 불교는, 많은 종교 중에서도 독특하게 생물계의 고통에 최우선적으로 주목합니다. 불교도라면 유전공학보다는 팔정도에 의해 보다 확실히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생명공학이 실제로 고통을 종식시킬 수 있다면 원칙적으로 불교도가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습니다. 불교도는 욕망의 억제를 통한 고통의 종식에 집중하지만, 이러한 억제는 기술적으로 선택할 수 있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사회를 정체시킬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신 고통을 종식시키면서 동시에 모든 형태의 욕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면 어떻습니까?
이슬람교와 유대-기독교 전통의 추종자를 설득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들 종교의 신자들은, 경험적 증거 상 예외적인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알라/하나님은 무한한 동정심을 지닌 자비로운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유한한 존재에 불과한 우리가 모든 감각적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자비심이라는 영역에 있어 신이 오히려 제한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며, 이는 신성모독이 됩니다.
대부분의 현대 철학자들은 고전적 공리주의자나 불교도 또는 유신론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컨대 윤리적 다원론자는 왜 종식론자 프로젝트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여기서 셰익스피어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제 아무리 철학자라도
치통을 진득하게 견뎌내는 사람 아직 못 보았으니"
[헛소동, 1막, 5장(레오나토의 대사 중)]
극심한 신체적 고통에 시달려 본 사람은 항상 고통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고 충격을 받습니다.
순수한 "심리적" 고통, 즉 외로움, 따돌림, 존재론적 고통, 슬픔, 불안, 우울 등은 극심한 신체적 고통만큼 견디기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매년 80만 건 이상 발생하는 자살은 주로 심리적 고통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 예컨대 위대한 예술, 우정, 사회정의, 유머감각, 고매한 인품의 함양, 학문적 추구 등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스로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극심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릴 때, 우리는 그 강렬한 고통이 최우선적으로 시급한 일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문에 손이 끼어 극심한 고통을 겪는 순간, 삶에 있어 보다 고매한 가치를 상기하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까요? 사랑의 고통에 마음이 산란한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날이라 한들 그 아름다움이 쉽게 눈에 들어올까요?
그래 좋소, 극심한 고통이나 정신적 괴로움이 지속되는 동안은 삶의 어떤 일보다 긴급한 우선 순위를 갖는다고 합시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요? 고통이 가라 앉은 후에, 왜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거요?
우선, 자연과학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관점", 즉 절대적으로 추상적인 신의 관점을 열망합니다. 물리학은 지금-여기가 다른 어떤 시공간에 비해 전혀 특별한 점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시공간은 똑같이 실재합니다. 과학과 기술은 머지 않아 이러한 전지적 관점에 걸맞은, 모든 생물계를 지배할 수 있는 전능한 힘을 우리에게 부여할 것입니다. 저는 어떤 지각하는 존재가 있어 우리의 괴로움과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 역시 우리 자신 또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과 똑 같은 우선 순위와 시급성을 지니고 다루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권능에는 책임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신적인 권능에는 신적인 책임이 따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를 들어, 200년 전에 존재했던 고통은 매우 끔찍했을 수는 있지만, 이를 가리켜 "부도덕"하다고 하는 것이 분별 있는 판단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그러한 고통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공학 덕분에 현재, 또는 가까운 시일 내에 이러한 고통은 부도덕한 일이 될 것입니다. 향후 몇 세기 내에, 어떠한 고통도 선택 사항이 되는 시기가 올 것입니다.
고전적 공리주의자가 아니라면, 우리의 기존 선호 체계에서 이어 내려온 것 가운데 적어도 인지 가능한 부분을 보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초월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쾌락의 트레드밀을 재보정하는 편이 보다 유리할 것입니다. 쾌락의 트레드밀은 기존의 가치 체계와 일관성을 갖도록 보정할 수 있으니까요. 따라서, (이러한 지칭은 잘못된 것이지만) 이른바 "선호공리주의자"의 원칙에도 맞출 수 있습니다. 사실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은 삶의 기존 계획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추구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고통을 통해 인격이 단련된다는 주장은 어떻게 될까요? "나를 파멸시키지 않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니체의 말입니다. 이러한 걱정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쾌락적 기질을 고양시키면 보다 강력한 동기가 부여됩니다. 심리적으로 보다 강인해지는 것입니다. 반면, 장기적으로 기분이 침체되는 경우 학습된 무력감과 절망행동(behavioural despair) 증후군에 빠지게 됩니다.
저는 가치 허무주의자, 즉 모든 가치는 단지 견해의 문제일 뿐이며, 우리는 “존재”로부터 “당위”를 논리적으로 유추할 수 없다는 주관주의자 또는 윤리적 회의론자의 견해를 명시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 이제 손이 난로에 닿는 바람에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난로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확신이 논리적 추론의 정식 규범을 따라 생긴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러한 고통은 내재적 동기를 유발합니다. 과학적인 세계관을 진지하게 받아 들인다면, 지금-여기 또는 나라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전혀 특수하거나 특권을 지닌 시공간 또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중심적 환상은 이기적인 DNA에 의해 조작된 관점의 착각일 뿐입니다. 내가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이 그릇된 것이라면, 어느 곳의 누구에게든 그릇된 것입니다.
3.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그래, 좋아요.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합시다. 고통 없는 세상이야 좋죠. 지상 낙원을 만들어 준다면 더욱 좋고요. 하지만, 다시 한 번, 그래서 어쨌다는 거요? 한 모서리의 길이가 1Km에 이르는 케익을 만드는 일도 기술적으로 가능하기는 매한가지 아닌가요? 왜 고통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나요? 어쩌면 그저 희망사항일 수도 있겠죠. 어쩌면 우리는 고통의 생물학을 영원히 간직해 두기만 할지도 모릅니다2.
여기서 반론은 종식론자 프로젝트에 공감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맞춤 신생아를 얻기 위한 생식 혁명을 지향합니다. 부모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머지않아 미래에 태어날 아기의 특징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도태압력이 조금이라도 완화될 것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진화가 더 이상 "맹목적"이고 "무작위적"인 것이 아닐 것이라는 의미에서 진화론 후 과도기(Post-Darwinian Transition)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태어날 자식들의 유전적 구성을 선택하고, 그 결과를 예측해 가면서 대립유전자 및 대립유전자 조합을 고르고 설계할 것입니다 조상들이 처한 환경에서는 적응적이었지만, 이제는 성가신 존재가 된 대립유전자 및 대립유전자 조합에 대해서는 도태압력이 작용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아직 활발히 논의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미래에 태어날 자녀들의 기분(쾌락 설정치)에 대한 유전적 설정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설정을 택하시겠습니까? 일생 동안 초월적 행복이 지속되기를 원하지는 않더라도, 절대 다수의 부모들이 행복한 자녀를 원할 것은 틀림없습니다. 우선, 자녀를 키우기가 훨씬 재미있을 것입니다. 저는 문화권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가 행복하기를 원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자녀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유일한 바람이라고 한다면 회의적일 수 있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그보다는 훨씬 큰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조건이 같다면, 행복이야말로 성공의 증표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자신의 행복뿐 아니라 자식들의 행복에도 똑같은 가치를 부여하는 이유에 대한 진화 상의 궁극적인 기원이 바로 여기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부모의 선택을 둘러싼 논쟁이 끝은 아닙니다. 특히, 생식에 관한 결정을 자유롭게 내릴 수 있는 세대가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지는 불분명합니다. 근본적인 항노화 기술이 개발되면 늙지 않는 반불멸적 존재가 제한된 물리적 공간에 한없이 늘어날 수는 없기 때문에 생식에 관한 결정을 점점 더 엄격하게 포괄적으로 제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식에 관한 결정을 중앙 통제하는 것이 일상화되고, 출산 자체가 드문 일이 된다고 해도, 진화 상 원시적인 유전형에 대해서는 강력한 도태압력이 작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미래의 사회적 구조 상 우울 또는 불안 질환, 또는 심지어 고양되지 않은 의식이 “정상적”인 병을 겪게 될 성향에 대해 어떤 계획적 조작이 허용될지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인간 외의 동물들
지금까지 논의는 한 가지 종(種)의 고통에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종식론자 프로젝트를 인간에만 한정하는 것은 편협한 시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간 중심적 편향은 뿌리 깊은 것이기도 합니다. 조상들이 처한 환경에서는, 다른 종을 사냥하고, 죽이고, 착취하는 행위가 유전자의 포괄 적응도를 향상시켰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보노보(bonobos)보다는 침팬지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근친상간 금기가 발달한 것과는 달리, 우리는 인간 외의 동물을 사냥하고 착취하는 일이 그릇된 것이라는 선천적 통찰력을 발달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수백 만년 전에 우리와 같은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을 아이린 페퍼버그의 앵무새가 3세 어린이의 정신연령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스포츠맨이란 사람들이 취미로 새를 사냥하는 일은 여전히 합법적입니다. 스포츠맨이란 사람들이 재미 삼아 젖먹이나 어린이들을 총으로 쏜다면, 당장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행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극명한 대비가 생깁니다. 끔찍한 아동 학대나 방치, 유괴 또는 루마니아의 버려진 고아에 대한 뉴스는 종종 매체의 헤드 라인을 장식합니다. 아동 학대범이나 살해범은 우리가 가장 혐오하는 인간상입니다. 그러나 고기를 먹기 위해 지각하는 다른 존재에 대한 산업적 대량 학살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공장형 농장에서 길러 도살하는 동물들이 고통을 느낀다는 측면에서 기능적으로, 감성적으로, 지적으로 또한 비판적으로 우리 인간의 젖먹이나 어린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증거가 넘쳐나는 데도 우리는 고기를 먹습니다.
절대적으로 추상적인 신의 관점에서 볼 때, 저는 우리가 우리 종의 구성원이 학대당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만큼 기능적으로 상응하는 다른 동물들도 학대당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식들인 어린이들의 학대나 살해에 관심을 갖는 만큼 돼지의 학대나 살해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도덕적 직관에 위배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도덕적 직관이란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우리의 인간중심적 편향을 반영하며, 도덕적 한계뿐 아니라 지적 및 인식의 한계를 갖습니다.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 간에 차이가 없다는 것은 흑인과 백인 사이에, 자유 시민과 노예 사이에, 남녀 사이에,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에,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과 꼭 같습니다. 따라서 마땅히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합당한 차이인가? 이러한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지각하는 존재 사이의 실재하지만 도덕적으로 합당하지 않은 차이에 천착할 때 도덕적으로 파국적인 결과가 빚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제를 옹호했던 방식을 상기해 보십시오. 그가 어떻게 그토록 맹목적일 수 있었을까요?]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유전적 이기주의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애초부터 공정한 신의 관점을 취하도록 설계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위대한 지성은 보다 큰 공감 능력을 수반하며, 잠재적으로 연민의 범위를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어쩌면 초월적 지성/초월적 공감 능력을 지닌 우리 후손들은 인간 아닌 동물에 대한 학대를 지금 우리가 아동 학대를 끔찍한 도착(倒錯) 행위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혐오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서로 잡아 먹는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일까요? 우리의 이기적 편향은 너무도 강합니다. 우리는 고기의 맛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모든 사람이 철저한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생각은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향후 수십 년 내에, 유전공학적으로 생산된 인공육류가 출현하여 잔인한 도살을 하지 않고도 현재 맛볼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맛 좋은 “고기”를 즐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시판될 인공육류에 대한 시식 기회를 위해, 2007년 6월 노르웨이 생명과학대(Norwegian University of Life Sciences)에서 열린 한 워크샵에서 시험관내 육류 컨소시엄(In Vitro Meat Consortium)이 출범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개의 세포로부터 유전공학적으로 만들어진 육류는 무한정 수확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이러한 육류를 소비한다면 살아있는 가축을 이용하는 것보다 가격 면에서 저렴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직 화폐 유통과 시장 경제를 영위할 예측 가능한 미래를 생각할 때, 값싸고 질 좋은 인공육류가 우리의 동료인 동물들을 공장형 농장에서 기른 후 대량 도살하여 얻어진 고기를 대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축을 도살해서 얻은 고기보다 싸고 맛나기로서니, 정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공육류를 먹을까?
인공육류가 제대로 마케팅된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인공육류의 맛이 죽은 동물의 시체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잔인하지 않은 방법으로 생산된 식품에 대한 도덕적 요구가 훨씬 강력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세계적인 채식주의를 달성한 후에도, 여전히 자연계에는 끔찍한 잔인함이 남지 않나요? 야생 동물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생물계에 대해 디즈니 만화같은 시각을 갖게 만들죠. 동물들이 갈증이나 굶주림으로 죽어가거나, 천천히 질식해 가면서 포식자에게 먹히는 모습을 30분씩이나 보여줬다가는 좋은 프로그램이 될 수 없을 테니까요. 먹이 사슬이 있어야 한다는 건 명백하지 않습니까? 자연은 잔인한 거에요. 하지만 개체 수의 폭발적인 팽창에 따른 맬더스적 파국을 막기 위해 포식자는 항상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원한다면, 저장형 피임약(depot contraception)3을 이용하고, 전세계적 생태계를 재구성하며, 척추동물의 게놈을 다시 작성하여 인간 외 자연계의 고통 역시 종식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 외 동물들은 해방이 아니라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젖먹이와 어린이, 노인, 정신적 장애인을 돌볼 의무가 있는 것처럼 그들을 돌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러한 전망은 먼 일처럼 들리지만, 서식지 파괴가 지금처럼 진행된다면 금세기 말 마지막으로 남은 동물은 모두 동물원에만 있는 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동물원의 뱀에게 겁에 질린 살아 있는 쥐를 먹이로 주지 않는 것을 생각할 때(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야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구라는 동물원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행위를 “자연적”이라는 이유로 계속 허용해야 할까요?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영역은 바다입니다. 직관적으로, 너무나 복잡한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 성능과 나노로봇 기술의 기하급수적 성장에 따라 이론적으로 우리가 해양 생태계를 포괄적으로 재설계하는 일 역시 가능해질 것입니다. 현재로서 그러한 재설계는 불가능하지만, 수십 년 내에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 정도는 가능한 일이 되고, 결국에는 기술적으로 간단한 일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실제로 그 일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핵심이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할까요, 아니면 진화론적 현상을 보존해야 할까요? 이 점에서 우리는 아직 추론의 영역에 있음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른바 미약한 자애심의 법칙(The Principle Of Weak Benevolence)에 호소해 볼 수 있습니다. 초월적 지성이 필연적으로 초월적 공감능력을 수반하는가라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장과 달리, 미약한 자애심의 법칙은 기술적, 인식적으로 진보된 우리 후손들이 현재의 우리보다 도덕적으로 앞서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지 않습니다.
이 원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늘날 자유롭게 놓아 기른 닭이 낳은 달걀과 공장형 양계를 통해 얻어진 달걀을 고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소비자가 자유롭게 놓아 기른 닭이 낳은 달걀을 선택합니다. 공장형 양계를 통해 얻어진 달걀이 조금 싸다고 해도, 여전히 대부분의 소비자는 잔인하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식품을 선택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악의와 심술과 어처구니 없는 광기를 과소평가해선 안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약하게나마 자애로움에 대한 편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기 희생에 무시하기 어려운 요소가 끼어든다면, 예를 들어 자유롭게 놓아 기른 닭이 낳은 달걀이 훨씬 비싸다면, 슬프지만 매출은 급속히 떨어집니다. 저의 요점은 만약(물론 상당히 큰 만약입니다만), 도덕적으로 무관심한 사람들이 치러야 할 희생을 아예 없애버리거나 사소한 것으로 줄일 수 있다면, 종식론자 프로젝트는 생물계의 구석구석까지 미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David Pea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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