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여성신비주의
정미현(이화여대 기독교학, 조직신학)
I. 들어가는 말
"미래의 그리스도인은 신비적인 것이 되거나 아니면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칼 라너는 기독교안에서 차지하게될 신비주의의 중요성을 극단적으로 말한다. 여기서 언급된 신비주의는 탈소극적, 탈세계적 환상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일상적 삶속에서 겪게되는 신비체험의 활동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은 창조적 삶의 역동성으로, 이웃에 대한 돌봄과 책임의 윤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기독교와 신학의 역사에 있어서 신비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 시기는 중세기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여성들에 의하여 이러한 신비주의는 다양하고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각 세기별로 대표적인 인물들인 시에나의 카타리나, 노르비취의 줄리안, 아빌라의 테레사를 중심으로 중세 여성신비주의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II. 몸말
II. 1. 중세 여성 신비주의의 등장배경
교회사 2000년을 돌이켜보면 여성과 제도교회의 관계형성과정에 대체로 유사한 흐름이 있다. 각 시기마다, 각 조직체마다 초기에는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나 차츰 제도화되고 체계화되면 여성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남성들이 공식적인 모든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성들의 이야기는 차츰 자취를 감추어 갔다. 성서신학자로서 초대교회 여성들의 모습을 재건하려고 시도하는 엘리사벳 쉬쓸러 피오렌자(Elisabeth Sch ssler Fiorenza)에 의하면 "초기 그리스도교의 여자활동에 관한 전승과 정보의 상당수는 아마도 되찾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남성중심적 선별과 편집과정에서 중요치 않거나 남성중심적 사고방식에 위협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성서는 가부장적 선별과정의 산물로써 여자들이 교회에서 지도력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을 일반화시켜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각각의 교부들의 내용이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대체로 가부장적 교부들의 논점은 여성들이 교회내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직책을 갖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었고, 때로는 여성들의 지도력을 "이단"으로 연결짓기도 하였다. 결국 정통과 이단이라는 이분법적 질서속에서 여성들의 자리는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제도권안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여성들의 역할은 가부장적으로 규정된 어머니와 아내가 되는 것으로 제한되어왔다.
그러나 중세기에는 일시적이나마 여성의 자연적 역할에 자신을 제한하지 않고 한 인격체로서 자아실현을 해 나갈 수 있었던 길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비교적 열려 있었다. 중세 서구 기독교 여성의 모습은 내용, 형태, 방법에 있어서 단일화된 정형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몇몇 모습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유산을 이어 나갔으며, 또 몇몇 모습은 종교개혁과 근대의 특성을 이미 포함하고 있었다. 중세기 여성들이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으며 자신의 모습을 사회에 알릴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방법은 수도원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12-13세기 독일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하여 여성 수도원 운동은 절정에 달하였다. 일반적으로 수녀원의 규율은 매우 엄격하여서 단지 14일에 한번 꼴로 다른 상급 수녀의 입회하에 외부 방문객의 면회가 허락되었는데, 그것도 자유로운 공간에서가 아니라 창살있는 상태에서 대화가 허용된 것이었다. 일년에 한번은 이러한 창살이 벗겨진 곳에서 면회가 허용되었고 바깥으로 노출이 허용되었다. 수녀원에는 대부분 많은 지참금을 갖고서야 들어올 수 있었고 이러한 재정적 부담으로 인하여 잘 사는 귀족계층이나 부호가문의 딸들 혹은 고위 통치가의 딸들이 주로 들어왔다. 봉건주의 체제가 극도로 번성한 중세기에 재력가나 명망이 있는 귀족가문의 여성들에게는 이로써 다양한 많은 기회들이 열려 있었다. 간혹 재산이 없는 여성들도 수녀원에 들어오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평신도 견습 수녀로서 수녀원의 잡다한 일들을 다 도맡아야 했다. 그래서 재산을 갖고 들어온 다른 수녀들은 이러한 잡무에서 벗어나서 밤낮으로 명상과 기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수녀원은 이와같이 여성들의 자아실현의 기초적 무대가 되어 주었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의 삶의 가치가 당시에 높이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복음서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마 13:1-9, 막 4:1-9, 눅 8:4-8)는 이 시기에 다음과 같이 주석되기도 하였다. "미혼 여성의 삶은 100배, 과부는 60배, 결혼한 여인은 30배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몇몇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중세기에 탁월한 영향력을 끼친 여성들은 대부분 수녀들이었다. 여기에서 수녀란 포괄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먼저 수녀란 좁은 의미에서 볼 때 폐쇄된 수녀원의 공간안에 사는 미혼 여성들을 말한다.
그러나 광범위한 의미에서 보면 소위 "제3의 수도회(das Dritte Orden)"를 형성하여 수녀원 밖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며 신앙활동을 하는 여성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가 베긴회(die Beginen)이다. 이러한 여성들은 일상적 삶에서 완전히 차단되지 않았고, 열려진 신앙 공동체안에서 살면서 정기적으로 기도를 위한 모임을 갖었다. 이 가운데에는 자기자신의 직업을 갖고 생활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개별적 주거 공간을 갖았으나 신앙 공동체로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이들은 여러 도시에 그들의 집단을 이루기도 하였다. 수녀원의 수녀가 되려면 일정기간 동안의 견습시기를 거쳐 영원한 동정을 서약하고 들어가야 하지만, 베긴회의 여성들은 원한다면 언제라도 탈퇴가 가능하고 결혼할 수 있었던 자유로이 열린 신앙 공동체였다. 이처럼 결혼을 하려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여성들이 수녀가 되는 것이었고 당시로서는 여성들에게 제공될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일정 수준의 자아실현이 보장된 것이었다.
이러한 여성들을 중심으로 중세기에 여성신비주의가 꽃피워졌던 것이다.
"신비주의(die Mystik)란 가장 보편적 의미에서 종교적 경험의 차원으로 표시될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경험의 주체와 객체 사이에 설득력 있는 통합이 조금 더 친숙하고 가깝게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희랍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나오는 mysterion, mystikos 등의 개념은 이후 교회사에서 등장한 신비주의의 의미에 까지 아직 이르지 못한다. 오리게네스 이후 이 개념(mystikos)은 보편화 되어졌다. 마르틴 안톤 슈미트(Martin Anton Schmidt)는 오리게네스와 2세기에 등장한 교부들로부터 "기독교적 신비주의"라고 불리울 수 있는 특성들이 나타났다고 본다.
오리게네스에게서 "mystikos"란 개념은 직접적인 신 인식과 신과의 직접적 관계를 갖는 방법을 뜻하였다. 이 경험이란 성서와 연결되며 성서 안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신 적인 것을 말한다. 그리고 신 적인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신과 "긴밀히 하나됨"을 의미한다. 기독교 신비주의란 은총에 의한 종교 경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주체와 객체로 대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합(unio mystica)을 이루는 것이다. 기독교적 인식의 대상과의 합일로부터 출발하는 기독교적 신비주의는 성서를 깊이있게 통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그 성서의 의미와 정신과 하나되는 것이다.
"신비주의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으나, 공통적으로 초월적 지식이 합리적인 사고의 산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활방식, 개인의 영감과 갑작스러운 계시의 통찰의 결과"로 생긴 것이라 규정할 수 있다. 신비사상은 여성들에게 각별한 매력을 지니며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중세기에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사상이 집중하여 나타났다. 그 특징은 신비적 명상, 환상, 어떤 표시로 나타나는 초자연적 존재와의 의사소통 등이었다. 그림과 영상은 중세 여성신비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것은 글자를 모르는 이들에게 내용을 전달하고 가르침을 줄 뿐 아니라 어떤 사실을 망각한 이들에게 상기하게 하며, 또한 마음이 상한 이들에게는 명상의 효과를 주는 것이었다. 중세기는 평신도에 대한 성직자의 권위가 극대화되었고 교회가 더욱 제도화됨으로 인해 교회내의 위계질서가 강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거다 러너(Gerda Lerner)는 이러한 현상의 이유를 여성들이 교회내에서 성직이나 공식적 역할로부터 제외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종교적 경험을 개인적 신비형태로 표현하게 된 것으로 본다. 공적으로 말할 수 있는 권위가 주어지지 않은 환경에서 이들은 하나님이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권위를 주고, 직접 말하게끔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신비한 혼인(Mystische Verm hlung)"에 비유하는데, 이로써 죄로부터 벗어나 보증과 표시, 메시지를 받게 된다.
중세기와 르네상스 초기에 여성학자들은 그들의 업적보다는 전반적으로 그러한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이들 여성 신비주의자들은 대부분 정식으로 라틴어를 배우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들이 경험한 환상과 영감을 기록한 책들에서 라틴어 교육을 받지 못했음을 자신의 무지라고 보며 자신을 극도로 낮추어 표현하는 관습적 태도를 보이는데, 거다 러너는 이를 문학비평가의 표현을 빌어 "겸손 토포스"라 부른다. 또한 거다 러너는 신비주의를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대한 대안 유형"으로 규정한다. 이와 유사하게 도로테 죌레(Dorothee S lle)는 신비주의적 종교성과 그 내용은 "가부장적 사고의 기본전제들을...극복하려는 것"이라 본다. 자아 실현과 종교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는 통로가 제한되어 있었던 여성들에게 신비주의는 매력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비주의는 가부장화된 사회의 여성들에게 힘을 주었고 대담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용해되어 나타난 것이다.
II. 2. 중세 여성신비주의의 유형
1. 시에나의 카타리나(Katharina von Siena 1347-1380)
중세후기에는 도미니크회와 프랜시스회가 특히 발전되었는데, 카타리나는 도미니크회에 소속해 있으면서 활동한 한 특출한 여성이다. 1347년 이태리 시에나의 한 가문에서 막내로 출생한 그녀는 이미 6살 때 처음으로 환시를 보고, 7살 때 독신으로 살기로 서원하였고 15세때는 혼인을 거부하고 머리카락을 자르기도 하였다. 18세때 평신도로서 도미니크회에 입단하여 이후 14세기에 전개된 수도원 평신도 운동의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만텔라테(eine Mantellatin)라고 불리우는 이들은 봉쇄 수도원에 살지 않지만 도미니크회의 수도복을 입고 제 3회의 회원(Mitglied des Dritten Ordens)이 되어 자신의 집에서 살면서 기도하는 일과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돕고 살았다. 그녀는 침묵과 독거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심오한 헌신을 쌓아갔다. 침묵의 독거생활중 그리스도와의 대화를 체험하였고 통찰의 은사를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고난과 일체감을 갖
는 특유의 체험도 갖게 되었다. 그녀는 19세나 20세가 되었을 1366년 혹은 1367년에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혼인(Mystische Verm hlung)"을 체험한다. 그녀의 기도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그녀에게 이르기를 "이제 나는 너와 함께 가장 축제적인 혼인을 축하할 결심이 확고하게 되었다. 그래, 이제 내가 너에게 약속했던데로 나는 너와 신앙안에서 혼인하려한다...이러한 모든 말씀을 마친 후 그 분의 얼굴은 사라졌으나 카타리나의 손에는 반지가 남겨져 있었다. 이 반지는 평생을 그녀에게 끼워져 있었지만, 그녀 외에는 아무도 이것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신비적 혼인은 그녀 생애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 이전까지 그녀는 세상과 등을 진 상태로 은수자의 삶을 추구하였으나, 이후로는 사회적인 삶의 모습을 열어갔다. 이러한 경험을 통한 내적 자각과 교회에 대한 열성적 헌신이 그녀에게 어우러져 나타났다. 침묵의 명상과 오랜동안의 금식을 통한 독거생활 이후 사회에서의 봉사생활을 시작하여서 병자를 간호하는 일과 시에나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맡아 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회분열이 극심하였던 중세말기의 시기에 남녀 걸식승 그룹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선교수행에 열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매력적 인성을 지녔다고 전해지는 카타리나는 귀족들과 신학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고 성서주석, 종교체험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과 영적교제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체험을 갖은 카타리나는 1370년 4시간 동안 진행된 "신비적 죽음"을 체험한다. 이러한 체험가운데 지옥, 연옥, 천국에 관한 환상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1375년에 그녀는 그리스도의 고난과의 일체감을 상징하는 성흔(Stigmata)을 받게 되었다. 1380년에 그녀는 세상 죄를 위하고 교회의 연합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그녀 자신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질 것을 간구하였다. 이러한 간구대로 1380년 1월부터 4월에 죽기까지 그녀는 몸이 점차로 쇠약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끊임없이 사람들과의 교제와 대화를 유지하였고 단지 성찬음식만을 먹으며 병상에서 기도의 작업을
계속 진행하였다.
카타리나는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사랑이 가능케 됨을 강조하였고 하나님과의 연합안에서 인간의 완성을 향한 여정을 추구하였다. 신성이라는 바다에서 영혼은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을 찾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카타리나와 세계와 하나님,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다리(die Bruecke)"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리라는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그녀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성육신을 특별히 강조한다. 카타리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일체감을 강조하여 그녀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통과의 연결고리 속에서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한 속죄행위로 이해하였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와 마찬가지로 그녀 신학의 중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 예수가 바로 "영원한 진리"인 것이다. 카타리나에게 있어서 진리(Veritas)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실제적 현실로서 우주의 기초가 되는 사랑인 것이다. 그 진리에 이르는 길은 우리에게 열려져있다. (신명기 30, 11-14, 눅 17, 21) "우리 자신의 삶의 깊은 곳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살도록 부르시는 거룩한 '장소'를 이루는 것"임을 카타리나는 깨달은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의 삶이 지속적이며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내면의 방"이 된다. 이 진리에 대한 열정,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한 사랑은 카타리나에게 신비적 직관과 연관되었다. 그것은 세계의 구원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도 연관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인간을 이 세상으로부터 떼어놓고 이 세상으로 향한 사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 속으로 더욱 깊숙이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도피하게 하지않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세상 구원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한 사랑을 잉태
하고 낳는 것이라고 본다.
구조체계, 은유적 언어의 복합성을 지닌 그녀의 대화집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간청으로 시작하여, 그녀가 받은 이러한 선물에 대한 감사로 끝맺음되었다. "나를 옷 입게 하소서. 나를 바로 당신으로 옷입게 하소서. 영원한 진리시여." 여기에서 진리는 우리의 몸을 감싸는 옷으로 은유적으로 표현되었고, 예수 자신이 바로 우리를 옷입히는 진리인 것이다.(cf. 롬 13, 14) "진리를 입으면 우
리는 자유로운 것이며, 이 때에는 겉꾸밈이나 거짓,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을 말하는 둘러댐이나 숨기는 것이 필요없다. 진리 그 자체가 옷으로서 우리의 내적인 신원을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펼쳐지게 하여,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선물이 되게 한다."
카타리나에게는 여성주의적 의식의 표현들이 가끔씩 등장한다. 그리스도에게 향한 한 기도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여성입니다. 당신은 여성이라는 존재가 공적인 과제를 맡게 될 때, 남성이 얼마나 여성을 얕보며, 여성이 남성들과 동등하게 무언가를 하려하면 얼마나 많은 장벽에 부딪히게 되는가를 아십니다." 그리스도가 그녀에게 응답한다. "남성과 여성 모두를 창조한 자가 나 아니더냐? 내가 어느 곳에 나의 영의 은총을 선사하는가는 나 자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냐? 내 앞에서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고상한 이나 미천한 이나 모두가 동등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동등하게 나의 권세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천사를 지은 것처럼 개미를 지었고, 하늘을 창조한 것처럼 벌레를 만들었다...내가 옛적에 유태인과 이방인들에게 둔하지 않고 나의 지혜로 무장한 남자들을 보냈던 것처럼, 이제 나는 여성들을 파송하려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동등함을 말하는 것은 구약성서 요엘 2, 28f와 신약성서 갈라디아 3, 28에 근거한 내용이다.
그녀를 추종하는 이들은 그녀가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Mamma" 혹은 "dolcissima mamma"라고 불렀다. 많은 사람들을 한 가족처럼 보살피고 인도하는 재능이 그녀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먹고, 마시고, 목마르고, 배고프고, 젖을 먹이는 음식의 상징이 카타리나의 글에 자주 나타나는데 그것은 근본적 배고픔과 갈증을 해소케하는 예수의 성혈의 힘을 체험한 것과 연관된다. 어머니가 젖으로 아기를 먹이고 키우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키우시는 유비(요 6;53, 56)가 여기에서 나타난다. 또한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따뜻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모든 사랑의 원천인 성령에 대한 상징을 본다. "예수께서 당신 품에서 우리를 먹이시듯이, 우리의 어머니인 성령은 하나님의 품에서 우리를 기르시며 끝없는 하나님 사랑의 젖을 우리에게 먹이신다."
우리의 어머니인 성령이 감사와 사랑의 젖으로 우리를 먹이시면 우리의 불안은 먹을 것이 없어서 결국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양육된 우리는 차츰 담대한 확신을 갖게 되고, 성령이 주는 빛에 의하여 새로운 눈으로 삶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 없는 삶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는 중요한 표식이 되게 된다. 그녀는 종교적 이유로 금식을 시작했으나 때로는 이것이 지나치게 되어 위를 상하게끔 되었고 급기야 먹지도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그녀는 금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권하고 싶은 것은 가능하다면 교회가 규정한 날 이외에는 금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식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느낀다면, 금식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몸이 쇠약하고 병들었다고 느끼시면, 잘 구별해서 결정해야 됩니다. 그러면 금식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고기도 먹고, 하루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으면 네 번 정도 고기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바닥에 앉아 있기가 힘들거든, 침대에 누워도 좋고, 무릎을 꿇을 수 없으면 앉거나 누워야 합니다. 이러한 것은 잘 판단하여 시행해야 됩니다. 금식과 회개, 기도의 방법들이 수단이 되어야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세로 기도하고, 얼마나 많이 주기도문을 외우고, 얼마나 오래 금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경건성을 외적으로, 형식적으로만 시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타리나 시대의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교만과 분열로 무너져가는 하나의 기관이었고, 이 세상에 대한 추문의 원천이고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한 교회의 모습을 그녀는 외면하지 않은 것이다. 이 상처입은 신부를 위하여 카타리나는 새로이 자신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던 신비체험을 하게된다. 이것이 "대화집"의 토대가 된 것이다. 교회는 비록 죄로 일그러졌으나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요 15, 5)이며,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문"으로서 삼위일체의 심연을 열어주셨는데, 카타리나는 모든 이들이 이 보물을 알고 갖게 되기를 열망한 것이다.
카타리나는 분열되고 적대적인 도시간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고 평화운동에 관계하였다. 그녀는 분열된 교회를 연합하게 하는 일에 주력하여 프랑스 아비뇽에서 70년간 생활하였던 교황을 다시 로마로 불러 들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후일에 도미니크 교단의 총회장이 된 카푸아의 레이몬드(Raimund von Capua)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그는 카타리나가 아무 두려움도 없이 당시 교황을 설득하고, 신랄한 어조로 교회개혁을 부르짖는 모습에 감동되었다. 그러한 그녀였으나 결국 교회분열(Schisma)을 막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된다. 그녀의 사후에 그녀 생의 마지막 시간들 동안에 쓰여진 글들이 "대화집" 혹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대화"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궁극적으로 그녀가 바란 것은 만유의 구원, 보편 구원이었다. 이것을 신학화하여 가르친 것은 아니었으나 이러한 희망가운데 그녀의 삶을 꾸려 나간 것이었다. 이것은 신적 사랑과 은총에 대한 그녀의 확고한 믿음에 근거한 사상이었다. 그녀는 하나님의 섭리를 모든 상처를 치료하는 자비로운 의사의 치료약에 비유하였다.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친밀함이 카타리나 자신의 정체성과
우주의 의미를 발견하게 한 기본 근거이다. 그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라면 영원히 지옥의 고통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cf. 롬 9,3) 더욱이 그녀는 자신의 몸을 지옥 입구에 세워 문을 막아서 다른 이들이 더 이상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원하였다. 지옥을 소멸시키기를 열망할 만큼 그녀의 사랑의 힘이 강한 것이었다. "저는 지옥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원합니
다. 아니면 최소한 어떤 영혼도 다시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2. 노르비취의 줄리안 (Julian of Norwich 1343-1413)
줄리안은 여성으로서 중세기 말미를 장식한 영성 저술가이다. 영국의 노르비취에서 명상으로서 심오한 신학적 질문을 제기하여 수도적 생활을 하였던 그녀는 금욕주의의 고대전통과 독거생활, 영적 길안내자의 역할을 특징적으로 조화시킨 인물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그녀의 인간적 고통이 심오한 신비주의로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수난사건은 줄리안과 시에나의 카타리나에게서 나타나는 중요한 종교적 표현이며 헌신의 대상이 된다.
그녀는 1342년 출생하였고 영국 노르비취의 성 줄리안 교회 근처의 암자에서 대부분 은둔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1416년 사망할 때까지 그녀의 생애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그녀는 서구 라틴명상전통의 저술들에 가까운 글들을 남겼으며 그녀의 영적 저서들은 중세영어로 된 문체적 특성을 지닌다. 그녀가 살고 활동했던 시기는 중세 여성신비주의가 번영하던 때였다. 1373년 5
월 그녀는 계시를 받고 첫 저서 "Short Text"를 지었다. 1393년이라고 날짜가 명기된 "Long Text"는 금욕적 단계동안 받은 16 계시와 종교경험을 기초로 성숙한 영적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다. "Short Text"와 "Long Text"는 "신적 사랑의 계시들(Revelations of Divine Love)"이란 제목의 책 안에 포함되었는데, 인간 실존, 그리스도의 의미,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상상력 풍부한 신학적 해석들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녀는 그녀에게 나타난 계시를 유형적 환상(vision)으로 간주한다. 계시는 신적 사랑의 교리를 이해하게 하는 가르침의 수단이며 매체가 된다.
"Long Text" 서문에 줄리안은 하나님에 대한 세가지 요청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회상에 대한 요청, 둘째로 신체적 중병에 대한 요청, 셋째로 하나님의 은총, 거룩한 교회의 가르침에 의한 다음과 같은 내용에 대한 요청이다. 즉 진실한 뉘우침, 사랑으로 갖게되는 연민, 내 의지를 다한 하나님 사랑에 대한 열망이 그것이다. 이러한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써 줄리안이 보게된 16가지의 환상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의 가장 값비싼 가시면류관과 삼위일체성, 2. 소중한 수난으로 변색된 그리스도의 얼굴, 3. 하나님의 것으로써의 모든 존재와 권능과 사랑과 지혜의 하나님, 4. 그리스도의 몸의 고통과 피흘림, 5. 그리스도의 수난에 의해 정복된 악, 6. 우리 주 하나님이 하늘에서 모든 축복받은 종들에게 내릴 보상, 7. 행복과 고뇌, 기쁨과 슬픔의 빈번한 체험,8. 그리스도의 마지막 수난과 죽음, 9. 그리스도의 수난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환희, 10. 수난의 시간에 인간을 위해 열려진 우리 주 예수의 끝없는 사랑, 11. 어머니를 걱정하는 영적 숭고함, 12. 우리 주는 온 생명, 13. 하나님이 창조한 만유의 온전한 회복을 기원함, 14. 우리 기도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15. 하늘에서의 사랑의 완성, 16.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우리를 사랑으로 보호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대략적 내용이다.
줄리안은 이러한 환상가운데에서 인간 생활의 두 극이 되는 기쁨과 고뇌의 교체에 대하여 성찰한다. 예수와 줄리안 자신의 수난 사이에서 궁극적으로 "수난이란 악령을 극복하는 것"임을 배웠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수난은 기쁨으로 변하게 된다. 죄와 악은 부정적 실재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단지 "선으로부터의 결핍"일 뿐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끝없는 친교, 우리의 자리, 우리의 삶의 존재는 하나님 안에 있고 우리가 죄 지었으나 멸하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보호하는 하나님의 끝없는 선 때문에 우리를 평화로 이끄시고 우리의 분노와 뒤틀린 타락에 대항하여 우리가 진정한 평화와 사랑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은총스럽게 구원된다.
줄리안은 하나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표현하고, 우리를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와 실재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 사랑의 매체가 된다. 또한 그녀는 예수를 어머니(Jesus as our Mother)라 비유하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다. 삼위일체의 제 2 위격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어머니(Our Mother)이다. 어머니인 그리스도(Our Mother Christ)는 자애로운 어머니(Our Mother of mercy)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인을 부양하였고 사랑했으며 생명을 주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키우기 위하여 젖을 먹이듯이 예수는 그리스도인을 양육하기 위하여 그의 몸을 먹인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인을 양육하면서 때때로 질책하지만 그의 근본적 사랑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세상 어머니들은 자녀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고통스러워 할 뿐이지만 우리의 하늘의 어머니 예수는 결코 그의 자녀들이 죽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는 전능하시고 지혜이시며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신성을 대담하게 표현하여서 여성적 상징과 남성적 상징을 이용하여 신의 모습을 재정의 하였다. "신의 전지 전능함은 우리의 친절한 아버지이며, 신의 지혜스러움은 우리의 친절한 어머니이다. 성령의 선함과 사랑을 지닌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며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리고 결혼으로 하나됨으로써 신은 우리의 진실한 배우자이며, 우리는 신의 사랑받는 아내이며 깨끗한 처
녀이다." 그리고 줄리안은 신성을 모성의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어머니가 아이를 가슴에 품어 안고 젖을 먹여 키우듯이 신성을 묘사하는 것이다. "모성의 속성에는 자연, 애정, 지혜, 이해가 있으며, 이는 바로 하나님이다...하나님은 더 높은 곳의 사랑을 위해 겸손한 곳에 은총을 보이심으로 본질상 우리 어머니이시다."
그리고 줄리안은 삼위일체성 안에서 인간의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선함을 "모성성"의 언어로 표현한다. 궁극적으로 분노는 기쁨으로 화할 것이며, 병과 공포는 하나님 은혜에 의하여 정복될 것이다.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의 어머님됨에 대하여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삼위일체의 최고의 존재자가 우리의 아버지이심과 삼위일체의 심오한 지혜가 우리의 어머니이심과 삼위일체의 극진하신 사랑이 우리의 주님되심을 보고 이해합니다...우리의 어머니가 되시는 이 두 번째 위격의 존재는 사랑하는 인간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감각적으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우리의 어머니는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며...우리의 어머니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증대되며 그 자비함안에서 우리를 개혁하고 회복케 하십니다. 그의 수난, 죽음, 부활의 힘에 의하여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질을 연합케 하십니다." 줄리안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삼위일체성
을 여성적 이미지로 표현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카타리나와 줄리안은 중세 말기 어려운 교회 상황가운데에서도 공공연하게 교회에 가르침을 전한 여성들이다. 고행, 수난, 하나님과의 대화의 덕행 안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행할 수 있었던 이들은 많은 공통점을 지녔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의 생활과 가르침의 중심에 언제나 그리스도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이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카타리나는 그녀의 "대화집(Dialogue)"을 통하여 개혁가, 교회의 갱신운동을 이끌었던 반면, 줄리안은 은둔자, 영혼의 안내자의 역할을 감당한 차이를 보인다.
영국의 신부로서 서구의 신비주의 전통과 동양 신비사상에 심취한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은 줄리안이 죽음에 직면하여 경험한 것을 적은 "16개의 환상"을 개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를 주관적 경험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 정도로 볼 수 없음을 말한다. 머튼은 줄리안의 저서를 "가톨릭 교회의 전통과 가르침을 담고 있는 자료"이며 "가톨릭 신앙의 기본 교리에 대한 명상적인, 진
정 신비주의적인 주석"이라 평가한다.
줄리안의 신학은 모든 것을 감싸안는 신성한 사랑의 총합체에 대하여 강조한다. "신의 사랑에 의해 모든 것이 존재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 작은 것 속에서 나는 세 가지 속성을 본다. 첫째는 신이 만드셨다는 것이요, 둘째는 신이 사랑하신다는 것이요, 셋째는 신께서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그러고 이러한 것에서 내가 보는 것은 진실로 창조자이시며 사랑하시는 분이며 보호자이시다."
그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의 사랑에 의해 둘러싸여 있음을 말한다. 그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악을 포함한 모든 것이 온전히 회복될 것을 믿었다. "죄는 존재할 필요가 있지만, 모든 인류는 온전케 될 것이다. 모든 인류가 온전케 되면, 모든 만물이 온전케 될 것이다."
3. 아빌라의 테레사(Therese von Avila 1515-1582)
1971년 교황 바오로 6세는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두명에게 공식적 박사 칭호를 수여하였다. 한 명은 시에나의 카타리나이고, 다른 한 명은 아빌라의 테레사였다. 중세 말기 수도원은 극도의 타락상태에 있었으나 이들 가운데에는 수도원 본래의 순수함을 지키며 가톨릭의 개혁을 추구하였던 지도자들도 있었다. 이러한 지도자들의 자리에 이와같은 여성들이 있었던 것이다.
테레사는 1515년 가톨릭의 영향이 강한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유태교로부터 개종한 그녀는 어려서부터 수도생활을 동경하였고 20세 때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빌라의 성육신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간다. 테레사는 수많은 경건서적을 탐독하였고 그녀가 경험한 환상과 신비체험을 많은 작품으로 남기게 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그녀의 영적 생활의 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에라스무스의 저서는 스페인에 가득한 종교적 열정을 신비주의적 방향으로 이끄는 한 역할을 했다. 약 20여년에 걸친 내적 분투 끝에 그녀는 41세가 되는 때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뚜렷한 소리를 듣고 마지막 신비적 단계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이때로부터 그녀에게 참된 뜻에서의 신비적 생활이 시작되었고, 이후 많은 수도원을 창립하고, 사람들에게 영적 감화를 주며 저술활동을 하는 등의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1572년에 그녀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혼인"이라는 과정을 거쳐 사랑의 완결된 일치를 맛보게 된다. 상상적 환시속에서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나타난다. "이 못을 보라. 이는 네가 오늘부터 나의 배우자가 되는 표이다. 너는 지금까지는 이 못에 합당치 않았으나 오늘부터는 네 창조주, 너의 임금, 너의 하나님으로서 나의 영예를 받는 것이 아니고, 나의 배우자로서 나의 영예는 네 영예이고 너의 영예는 나의 영예이다." 이후 그녀는 지적 환시를 받게된다.
"기도의 스승"이라 불리우는 테레사는 명상적 삶과 활동적 삶을 성스럽게 조화시켰고 천성적인 신비스런 능력을 멋스럽게 펼쳐나갔다. 그녀는 결코 기도를 세상으로부터의 단순한 도피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묵상기도의 실천은 테레사의 영적 성공의 비결이었다. 묵상기도란 그녀에게 사랑의 완전함에로 점차로 인도해 가는 길이었으며,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신비적 일치에 이르는 길이기도 했다. 수덕적 측면으로서의 고행과 기도의 훈련과 신비적 측면으로서의 하나님의 은총 체험이 테레사의 영성생활의 두 축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네 안에 나를 가두려고 수고하지 말라. 그러나 내 안에 네가 갇히어라."라는 신비로운 소리체험을 하게 된다. 그녀가 하나님안에 있다기보다 그녀 안에 하나님이 갇혀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오해로부터 벗어나 이후에는 열려진 자세를 갖게된다.
그녀는 개혁자로서 활동하였고 가르멜회를 그 본래적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노력함으로써 당시 교회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가르멜의 유래는 13세기 초에 팔레스티나의 가르멜산의 동굴에서 예언자 엘리야를 자기들의 선조로 받들어 그를 본받고 있던 몇 명의 은수자들이 있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들은 직접 일하고 고독과 청빈속에서 주의 법을 밤낮으로 묵상하고
밤새 기도하는 것을 주요 일과로 삼고 살았다. 1226년 이들의 회칙이 처음으로 교황 호노리오 3세에 의하여 인준된다. 이후 사라센족의 침략으로 가르멜산 수도자들이 유럽으로 피난가게 되었고, 이들은 탁발 수도회에 소속되게 된다. 중세 말기 수도원의 전반적 퇴폐현상이 나타났고, 이는 가르멜회에도 영향을 미쳐 1432년 교황 에우제니오 4세때에 엄한 회칙을 완화하게된다. 본래 여
자 수도회를 따로 갖고 있지 않던 가르멜회에서 1453년에 여수도회가 탄생했다. 테레사는 가르멜회의 완화규칙을 따르며 수도생활을 시작한 것이었다. 테레사는 자신이 속한 가르멜 수도회의 고유한 전통을 지켜 나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점진적 개혁을 시도하였다. 마침내 그녀는 여성과 남성을 함께 수용하는 수도원 공동체를 설립하고 맨발의 수도회를 이끌어 나갔다. 1580년 가르멜회
는 이전의 완화 회칙을 따르는 가르멜회와 테레사의 개혁을 흐름을 따라 엄격한 회칙을 갱신하고 맨발의 가르멜회라 불리는 것으로 양분되었다. 가르멜의 생활양식은 단순한 은둔생활이 아니고, 은둔적 공동생활이었다. 테레사의 개혁운동으로 가르멜회에 새로운 자극이 가해졌을 뿐 아니라, 당시 교회 안에 신비적이고 활동적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당대의 대학 교수들과 같은 권위를 갖고 가르치던 영적 생활의 스승이며 개혁자인 테레사에게 1578년 교황 대사 세가(Sega)는 딛전 2:11의 말씀과 연관하여 자중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녀는 이에 대하여 자신이 경험한 환상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다음과 같은 사명을 받았다고 담대히 전하였다. "그들에게 가서 몇 개의 성서구절에 얽매이지 말고, 다른 것을 포괄적으로 염두에 두라고 말하라. 그리고 그들이 나의 손들을 묶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고 전하라." 바울사도의 몇몇 구절의 말씀을 상황에 대한 이해없이 그대로 문자적으로 적용하려하던 교황의 대사에게 아주 적절한 방법으로 맞선 것이었다. 테레사는 남성들과의 직접적 투쟁의 방식을 취하지는 않았으나 여성으로서의 선구적 자각을 지닌 여성 지도자였다. 그녀에게서 신비스런 명상과 기도가 하나님과 이웃에로 향한 봉사와 어우러져서 종교적 경건성이 사회적 참여와 조화를 이룬 신앙적 삶의 본을 보여주었다.
테레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1486년 "마녀의 망치(Malleus Mallificarum)"가 출간된 후 마녀사냥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여성들이 신비체험을 표현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부담이 큰 일이었다. 물론 중세기에 활동했던 대다수의 걸출한 여성들이 남성 조력자들의 후원을 받았던 것처럼 테레사를 옹호해주는 인물들도 있었으나 그녀의 책 또한 압수되는 등 결코 안전한 것이 못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정치나 여러형태의 삶의 압박감에 굴하지 않고 그녀의 비젼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자서전, "주의 기도", "완덕의 길", "서간집"등의 저서를 남긴 그녀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시기에 가톨릭 교권제도의 문제성을 지적하고, 예언자적 자세로 수도원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애쓴 인물이다.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테레사는 영적 발달의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기도의 삶을 통하여 내적인 성숙으로 이르는데 필요한 안내서이다. 하나님에게 이르는 영적 여정을 일곱 궁방으로 단계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기도와 명상의 종류를 구별하여 설명한다. 또한 관조(contemplation)는 정적인 관상기도(the prayer of quiet)와 연합의 기도(the prayer of union)로 나뉘인다. 테레사는 영혼을 "아름다운 금강석이나 맑은 수정으로 된 궁성"으로 표현하고, 하나님과 영혼사이의 만남을 말한다. 기도의 주체자인 영혼과 기도의
응답자인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위하여서는 우선 자아에 대한 지식이 요청된다.
테레사는 온갖 질병으로 시달렸으면서도 정열적으로 자신의 환상을 공동체와 세상을 향하여 연결하여 실천하였다. 또한 그녀는 비기독교 국가들에 대한 선교의 비젼도 제시한 신비가이며 활동가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 외에 다른 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부지런한 삶을 살았던 테레사는 당시 교회 안팎과 사회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영향을 주었다. 특히 19세기에 가르멜회를 더욱 아름답게 꾸민 리지외의 테레사(Therese von Lisieux 1873-1897)와 유태인 철학자로서 훗설의 제자이자 조수였으며, 2차 대전때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 희생된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 1891-1942)은 무신론자였으나, 테레사의 "자서전"을 읽고 감화되어 가르멜회에 들어가 종교 생활을 하였었다. 이 두 여성들은 어머니 테레사의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한 여성으로 손꼽히고 있다.
II. 3. 중세 여성 신비주의의 특징들
1) 신비주의는 신학적 신 인식보다 직관적으로 체험된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특별히 중세기 유럽에서 대학이 생겨나고 학문적 신학의 공간이 마련되었으나, 이러한 제도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여성들은 신비주의로써 하나님에게 향한 그들의 체험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열정은 제도적으로 학위받은 당대의 남성 신학자들보다 훨씬 강한 것이었다. 중세라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여성들은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학력이 없었다. 그러나 아빌라의 테레사나 시에나의 카타리나 처럼 후대에 교회박사 칭호를 받게 된 이들도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은 당시 주어진 여건 이상으로 나름대로 여성으로서의 글쓰기에 한 몫을 톡톡히 담당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체험을 절대적 권위를 갖고 독선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신체험을 중시하지만 경험 자체의 주관성을 절대화하지 않았고 오히려 경험한 것을 신학화하려는 노력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겸허한 형태로 당대의 저명한 신학자들에게 검증을 요청하며, 기존의 신학과의 단절이 아니라 대화를 모색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들의 주장을 설득력있게 전달한 것이었다.
2) 이 여성 신비주의자들은 그들이 경험한 환상체험과 내용이 하나님으로부터 전하여 받은 것임을 자신들이 확신하였고, 또한 이러한 사실을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알린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경험을 한 것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것은 겸손한 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의혹심이 있기도 했고, 또한 마녀 사냥이 번져가던 시기에 교회당국에 의하여 검열이나 조롱, 핍박을 받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등이 작용하여 이러한 내용을 알리기를 꺼렸다. 그러나 어떤 계기를 기점으로 강한 확신을 갖게 되면, 이러한 경험에 대하여 공공연히 알리고 공적 능력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한 사람의 신비로운 수도자의 명상적 삶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를 향한 정치적이고 공적인 일과 관련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또한 이 여성들이 그러한 경험의 현실성을 독특하게 표현했다는 것이 중요할 뿐 아니라, 이러한 경험
의 내용들과 의미들을 그들의 동시대인들에게 믿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중요하다.
3) 중세 여성 신비주의자들의 신비적 가르침은 하나님은 사랑이심과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름다운 창조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등지게 하는 것이나 염세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몸과 마음을 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신비주의는 우리가 특정한 시간 속에서 드리는 기도뿐 아니라, 일상생활 속으로 스며들어서 우리의 삶을 깊이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 자체가 곧 살아있는 기도가 되게 하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을 주제로 한다. 하나님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기도의 자세는 곧 현세지향적 책임윤리와 연결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져서 세상으로의 적극적 참여와 행진, 개혁을 추구하는 에너지로 발산된다.
4) 현대의 페미니즘의 잣대로 볼 수는 없으나, 이들에게서는 시대를 뛰어넘는 여성의 자아의식과 자아실현의 노력이 엿보인다. 신학적으로 볼 때 삼위일체론에 근거한 기독론을 강조하는 것이 중세 여성신비주의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의 신학적 작업 가운데에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여성적 이미지로 설명하는 방법이 특색있게 등장한다. 하나님의 속성을 남성이라는 한가지 성에 국한하지 않고, 포괄적 언어로 묘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은 것이다.
5) 중세 여성신비주의에서는 예수의 육체적 고통, 수난의 의미를 강조한다. 잦은 전쟁, 흑사병등으로 인한 염세적 혼돈과 불안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한 화해의 의미와 부활에 근거한 끊임없는 희망과 하나님 사랑의 위대한 긍정성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신비주의는 황홀경에 빠짐으로 영적 도피나 영적 위안을 찾는 것이 아니었고, 사회를 혼란과 불안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인간이 직면하는 고난의 문제를 단순히 회피하거나 도외시하거나 미화하지도 않았다. 가난한 이들, 억압받는 사람들의 얼굴속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모습을 보고, 이들에 대한 연대적 행동을 서슴지 않고, 치유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이들의 보편적 자세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자의적으로 동참하는 윤리성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으며, 그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골 1, 24)
6) 환상과 상징의 내용은 위계질서를 거부하며, 이 신비주의의 상징들은 대체적으로 원형, 곡선, 물결등을 이용한 것들이었고, 전체성, 통합, 조화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환상체험은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의 환각현상이 아니라, 의식이 아주 명료할 때 시각적으로 혹은 청각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이와같은 환상과 상징의 내용은 하나님 사랑의 새로운 계시인 예수 그리스
도의 빛에 비추어 피조세계 본래적 모습인 원형성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7) 중세 여성신비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인과 예수의 관계를 혼인의 이미지로 묘사하며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조화로운 합일(unio mystica)을 강조한다. 이것은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갇혀 계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신비체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을 우리 자신안에 가두어 두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한다. 우리의 사고, 감정, 체험,
이념, 교파, 종교가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 여성신비주의가 지적하고 추구한 것은 바로 "네 안에 나를 가두려고 수고하지 말라. 그러나 내 안에 네가 갇히어라"는 것이었다.
III. 나가는 말
기독교의 역사에서 과거는 대부분 남성들의 전유물(his-story)이었다. 가부장주의에 의하여 지배되었던 그러한 과거의 지배의 역사로부터 전환을 요청하는 것이 여성신학의 주선율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부장주의로부터 가모장주의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성신학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피라미드적 위계체제로부터 원형으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다. 본래 하나님에 의하여 지어진 지구의 속성은 둥근 것이었다. 그러나 동, 식물, 인간, 생물과 무생물, 이 모든 것이 조화로이 어울려 있는 원형적, 유기체적 관계는 망가지고,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와 착취의 피라미드형 구조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은 본래적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창조질서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려는 것이 여성신학의 지향점이며, 그것은 원형성, 통전적 유기체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다.
기독교의 역사 안에는 살아 숨쉬고 활동했던 여성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신학사상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유난히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성들의 신비체험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 이 중세의 시기이다. 중세 여성 신비주의자들은 시대를 앞서간 여성신학자들이었다. 그리고 이 신비주의는 여성들의 글쓰기와 공 적인 목소리가 인정되지 못하던 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적으로 전해진 권위로써 그들의 신학사상을 체계화하고 전달하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 안에 가두고,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이 이 우주와의 연결성을 몰각하고 다른 피조물을 착취하는 총체적 불의에 맞선 저항의 에너지였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는 일상의 고뇌, 삶의 무게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바램을 표출하고자 기도원을 찾는 이가 많다. 특별히 여성신자들이 이러한 기도원 운동의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신비체험의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면 중세 여성들의 신비체험과 현재 한국 기도원에서의 여성들의 신비체험은 어떻게 다르며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가? 외형적으로 볼 때 여성이 주축이 되었고, 몸을 통한 감각적 체험과 감성적 경험등이 강조되는 등의 유사성을 지닌다. 중세 여성신비주의에서는 먼저 개인적으로 침묵과 명상가운데 하나님과의 합일을 구하고, 그 다음에 세상가운데 공동체의 삶속으로 향한다. 이에 비하여 한국 기도원에서는 일반화시켜서 말하기는 힘들지만, 대체로 집단적 예식을 통하여 함께 통성으로 기도
하고, 울고, 소리지르며 황홀경에 이르는 공동체성이 강조되지만, 세상으로 흩어져서는 오히려 개인주의화의 성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중세 여성 신비주의는 음성화된 세상도피적 수단이 아니라, 세상긍정을 통하여 세상을 끌어안는 방법이었다. 은둔과 고립된 침묵의 시간이 이들에게는 세상의 문제를 도외시하는 부정적 시간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다시 세상속으로 뛰어들어갈 수 있는 영양을 공급하게 하였다. 이들의 신비주의에서는 하나님에게로 향한 기도와 경건의 열정과 세상속으로 향한 책임과 사회의식이 역동적 리듬으로 어우러진 것이다.
중세 여성신비주의에서는 금욕, 고난, 희생등의 개념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개념들은 특히 기독교의 역사상 여성들에게 더 많이 부과된 마조키즘적 현상으로써 여성신학적으로 볼 때 상당히 문제화 된 것들이다. 그러나 중세라는 시대적 특성과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지 않고, 현재적 여성신학의 시각으로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업적과 삶
의 모습을 단순히 기리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우리가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명상과 관조의 삶(vita contemplativa)과 활동적 삶(vita activa) 사이의 조화된 삶(vita mixta)을 추구함으로써, 종교개혁 이전에 이미 종교개혁적 사상을 선취(Vorwegnahme)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중세 여성 신비주의이다. 또한 중세 여성신비주의는 업적 지향주의를 배격하고 은총을 강조하는 특성을 지닌 것이었다. 이와같은 은총을 통한 의인론은 곧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게도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용들은 가톨릭 교회의 한 전유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명상과 활동의 조화된 리듬이 더욱 소중한 가치로 부각되는 21세기에 새롭게 주목되어야 할 개혁적 유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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