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을 아는 것 -
ON LEARNED IGNORANCE(De Docta Ignorantia) by NICHOLAS OF CUSA
Chapter One
: How it is that knowing is not-knowing.
제1장 어찌하여 아는 것이 모르는 것인가?
We see that by the gift of God there is present in all things a natural desire to exist in the best manner in which the condition of each thing's nature permits this.
And [we see that all things] act toward this end and have instruments adapted thereto.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만유 안에는
각 사물의 자연조건이 허용하는
최선의 방식으로 존재하려는
자연스런 욕망이 있음을 본다.
만유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작용하며
적절한 도구를 소유하고 있다.
They have an innate sense of judgment which serves the purpose of knowing. [They have this] in order that their desire not be in vain but be able to attain rest in that [respective] object which is desired by the propensity of each thing's own nature.
But if perchance affairs turn out otherwise, this [outcome] must happen by accident-as when sickness misleads taste or an opinion misleads reason.
그것들은 또한 자신들의 욕망이 좌절 당하지 않고
각자의 본성의 경향성이 원하는 목적 속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자신들의 지식이 목적하는 바에 일치하는
선천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병이 나면 맛을 제대로 알 수 없고,
편견을 품으면 이성적인 판단을 바르게 할 수 없듯이,
언젠가 그렇지 않게 되면(즉, 선천적인 판단력을 잃게 되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생긴 것이다.
Wherefore, we say that a sound, free intellect knows to be true that which is apprehended by its affectionate embrace. (The intellect insatiably desires to attain unto the true through scrutinizing all things by means of its innate faculty of inference.)
Now, that from which no sound mind can withhold assent is, we have no doubt, most true. However, all those who make an investigation judge the uncertain proportionally, by means of a comparison with what is taken to be certain.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하고 자유로운 지성은
타고난 탐구를 통해 사랑의 포옹 속에서 얻고
이해하기를 지칠 줄 모르고 갈망한다는 것을 사실로 안다.
건전한 마음은 가장 참된 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탐구자들은 누구나 확실하다고 가정한 것과 비교해서
불확실한 것을 비율적(比率的)으로 판단한다.
Therefore, every inquiry is comparative and uses the means of comparative relation.
Now, when, the things investigated are able to be compared by means of a close proportional tracing back to what is taken to be [certain], our judgment apprehends easily; but when we need many intermediate steps, difficulty arises and hard work is required.
그러므로 모든 탐구는 상대적이며 비율의 방법을 쓴다.
탐구의 대상을 확실하다고 가정한 것에 근사한 비율로 비교할 수 있는 한, 우리의 판단력은 쉽게 이해하지만,
많은 매개물이 필요할 때는 어렵고 힘든 작업에 직면하게 된다.
These points are recognized in mathematics, where the earlier propositions are quite easily traced back to the first and most evident principles but where later propositions [are traced back] with more difficulty because [they are traced back] only through the mediation of the earlier ones.
이것은 수학에서 인정한 것인데,
먼저 나온 명제들은 처음의 가장 명백한 원리로 훨씬 쉽게
되돌아갈 수 있으나, 뒤이어 나오는 명제들은 더 어렵다.
이는 그것들이 먼저 나온 명제들을 매개로 해서만 처음의 원리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Therefore, every inquiry proceeds by means of a comparative relation, whether an easy or a difficult one.
그러므로 모든 탐구는
쉽다거나 어렵다는 상대적인 비율로 이루어져 있다.
Hence, the infinite, qua infinite, is unknown; for it escapes all comparative relation.
But since comparative relation indicates an agreement in some one respect and, at the same time, indicates an otherness, it cannot be understood independently of number. Accordingly, number encompasses all things related comparatively.
무한은 모든 비율을 벗어나기 때문에, 무한 자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비율은 어떤 점에서 일치를 표현하며 또한 다르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수(數)와 떼어서 이해할 수 없다.
Therefore, number, which is a necessary condition of comparative relation, is present not only in quantity but also in all things which in any manner whatsoever can agree or differ either substantially or accidentally.
그러므로 비율에 영향을 주는 수는 양(量)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실제적으로든 우연히든, 일치하거나 다를 수 있는 모든 것에 그런 수(數)가 있는 것이다.
Perhaps for this reason Pythagoras deemed all things to be constituted and understood through the power of numbers.
아마도 이것이 피타고라스가 모든 것은 수의 힘을 통해 구성되어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이유일 것이다.
Both the precise combinations in corporeal things and the congruent relating of known to unknown surpass human reason-to such an extent that Socrates seemed to himself to know nothing except that he did not know.
그러나 실체가 있는 것들을 정확하게 결합시키는 일과,
알려진 것을 알려지지 않은 것에 적합하게 적용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너무나 넘어서는 것이므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모른다고 믿었던 것이다.
And the very wise Solomon maintained that all things are difficult and unexplainable in words.
And a certain other man of divine spirit says that wisdom and the seat of understanding are hidden from the eyes of all the living.
심히 지혜로웠던 솔로몬은 만물은 어려워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단언했으며, 신성한 영을 지닌 다른 사상가는 지혜와 명철이 있는 곳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눈에서” 감춰져 있다고 말한다.
Even the very profound Aristotle, in his First Philosophy , asserts that in things most obvious by nature such difficulty occurs for us as for a night owl which is trying to look at the sun.
마찬가지로 매우 심오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의 철학에서
주장하기를, 우리가 본질적으로 가장 명확한 것들을 접할 때 겪는
어려움은 밤의 올빼미가 태양을 볼 때 겪는 어려움과 같다고 한다.
Therefore, if the foregoing points are true, then since the desire in us is not in vain, assuredly we desire to know that we do not know. If we can fully attain unto this [knowledge of our ignorance], we will attain unto learned ignorance.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속에 있는 알려고 하는 욕망은
헛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고 하는 욕망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에 완전하게 이를 수 있다면,
우리는 아는 무지에 이를 것이다.
or a man-even one very well versed in learning-will attain unto nothing more perfect than to be found to be most learned in the ignorance which is distinctively his.
The more he knows that he is unknowing, the more learned he will be.
Unto this end I have undertaken the task of writing a few things about learned ignorance.
아는 데 아무리 열심인 사람일지라도,
원래 자신의 것인 무지 속에서 가장 잘 알았음을 확인하는 것보다 더 완전한 일은 인간에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그만큼 더 알게 된다.
내가 아는 무지에 대해 몇 마디를 쓰기로 한 것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이다.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명제에 대해서는
참이라고 해도 맞고 거짓이라고 해도 맞다. <칸트>
세계는 존재하는가 아닌가, 세상이 끝이 있는가 아닌가,
죽은 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닌가,
육체와 영혼은 하나인가 다른가 등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완강히 대답해주시지 않으셨다.
《니까야나 아함(Pañca Nikāya)》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
<논어(論語)>
"나는 대화 상대자와 헤어질 때 혼자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더 현명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우리 둘 다 올바른 것, 정의로운 것을 모르고 있지만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안다고 상상하는 반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큰 차이가 아니더라도 분명 나는 그보다 더 현명하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알지 못한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Chapter Three
The precise truth is incomprehensible.
제3장 진리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It is self-evident that there is no comparative relation of the infinite to the finite.
Therefore, it is most clear that where we find comparative degrees of greatness, we do not arrive at the unqualifiedly Maximum; for things which are comparatively greater and lesser are finite; but, necessarily, such a Maximum is infinite. Therefore, if anything is posited which is not the unqualifiedly Maximum, it is evident that something greater can be posited. And since we find degrees of equality (so that one thing is more equal to a second thing than to a third, in accordance with generic, specific, spatial, causal, and temporal agreement and difference among similar things), obviously we cannot find two or more things which are so similar and equal that they could not be progressively more similar ad infinitum.
Hence, the measure and the measured—however equal they are—will always remain different.
무한과 무한 사이에는 비율이 없는 것이 분명하므로,
상대적으로 크거나 작은 것을 가지고는 ‘단순하게 최대인 것’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상대적으로 크고 작은 것들은 유한하지만,
그러한 최대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단순하게 최대인 것’이 아닌 어떤 것을
가정한다면,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있고, 우리는 정도(程度)에서
나타나는 대등성을 보게 되므로, 성(性)과 종(種)과 장소와 영향과 시간의 일치점과 차이점에서 볼 때, 어떤 것이 비슷한 종류의 다른 것들 중에서는 제3자보다 다른 어떤 것과 더 대등하게 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둘이나 그 이상의 사물이 너무도 비슷하고 대등해져서 이제는 더 이상 비슷해질 수 없다고 여길 만한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척도와 측량된 것이 아무리 대등하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항상 서로 다른 것이다.
Therefore, it is not the case that by means of likenesses a finite intellect can precisely attain the truth about things. For truth is not something more or something less but is something indivisible. Whatever is not truth cannot measure truth precisely. (By comparison, a non-circle [cannot measure] a circle, whose being is something indivisible.) Hence, the intellect, which is not truth, never comprehends truth so precisely that truth cannot be comprehended infinitely more precisely. For the intellect is to truth as [an inscribed] polygon is to [the inscribing] circle.
그러므로 무한한 지성은 유사성을 통해서는 사물의 진리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없다.
진리는 더 많은 것도 더 적은 것도 아니고,
나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참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참된 것을 정확하게 측량할 수 없다.
이는 원이 아닌 것이 원을 잴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원이라는 존재는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가 아닌 지성은 결코 진리를 아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으며, 언제나 더 정확한 이해가 무한히 남아 있다.
지성과 진리의 관계는 다각형과 원의 관계와 같다.
The more angles the inscribed polygon has the more similar it is to the circle. However, even if the number of its angles is increased ad infinitum, the polygon never becomes equal [to the circle] unless it is resolved into an identity with the circle. Hence, regarding truth, it is evident that we do not know anything other than the following: viz., that we know truth not to be precisely comprehensible as it is.
원 안에 그려진 다각형은 그 각이 커질수록 점점 더 원과 같아진다. 그러나 그 다각형이 해체되어 원과 하나가 되지 않는 한,
그 각이 무한히 커진다고 하더라도,
그 다각형은 결코 원과 같아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진리는 사실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뿐이다.
For truth may be likened unto the most absolute necessity (which cannot be either something more or something less than it is), and our intellect may be likened unto possibility. Therefore, the quiddity of things, which is the truth of beings, is unattainable in its purity; though it is sought by all philosophers, it is found by no one as it is. And the more deeply we are instructed in this ignorance, the closer we approach to truth.
진리는 자체보다 더 많거나 덜할 수 없는
가장 절대적인 필연과 같다.
그러나 우리의 지성은 가능성과 같다.
그러므로 존재의 진리인 사물의 본질은
그 자체의 순수한 형태로는 잡을 수 없으며,
철학자들이 그것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것을 사실 그대로 발견한 일이 없다.
우리가 이 무지 속에서 더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진리 자체에 더 가까이 나아간다.
하나님을 찾는 일에대하여
그대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길이 있나니, 즉 경계를 없애는 길이다. 예술가가 나무토막 하나에서 왕의 얼굴을 찾을 때,
그 예술가는 그 얼굴 자체 외에
제약된 그 밖의 모든 것을 거부한다.
예술가는 믿음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 나무토막 속에서 자신의 눈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는 대로 보려고 하는 그 얼굴을 보기 때문이다. 그 얼굴은 눈에게는 미래이지만, 지성적인 개념 속에서 마음에게는 믿음으로 지금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하나님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능가하신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대는 제약되고 축소된 모든 것을 거부한다. 그대는 육체를 거부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육체가 아니라는 뜻이며,
곧 하나님은 양(量)이나 장소나 형상이나
위치에 제약당하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그대는 제약된 감각들을 거부한다.
그대는 산을 뚫고 보지 못하며,
지구의 숨겨져 있는 심연을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태양의 밝음도 보지 못하며,
듣는 것과 기타 감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대는 상식이나 환상이나 상상력을 거부하나니,
그것들은 육체적인 특성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성을 거부하나니,
이성은 종종 잘못을 범하고 모든 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것이 왜 인간이며 저것은 왜 돌인지 알고 싶어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온갖 사역(使役)의 이성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성의 힘은 작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성이 아니다.
그대는 지성을 거부하나니,
지성은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지성 자체는
그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성은 어떤 것의 순수한 본질에 완전하게 이를 수 없으며,
그것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좀 더 완전한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성이 아니다.
그러나 그대가 더욱 더 추구한다면,
그대는 자신 안에서는 하나님과 닮은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하며, 하나님은 그대의 지성적인 영혼의 원인이요 시초요,
생명의 빛으로서 이 모든 것들을 넘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대는 그대의 모든 내면성을 넘어 선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기뻐할 것이다.
그대가 지닌 모든 것은 그 근원에게서 그대에게 흘러나온다.
그대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 위에 서 있기 위해
매일 그대 안에 더 깊이 들어가고,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아서며,
그 후에 그대는 하나님을 진실로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대와 나에게 이것을 허락하시기를.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풍성하게 주시기 때문이다.
"The mind, to be sure, is like an intellectual book,
which sees in itself, and for all, the intention of the author." — Nicholas of C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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