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토라 교사(노미코스)가 예수에게 영생의 길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예수는 직답을 피하고 오히려 그에게 반문했다. 토라에(엔 토 노모) 무엇이라 쓰여 있으며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토라 교사는 토라의 많은 계명들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두 가지를 뽑았다. 예수는 그의 토라 해석이 옳다고 말하고 이를 실천하면 영원한 생명
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눅 10:25-28; 참고: 마 22:35-40).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예수를 거쳐야 한다면, 위의 이야기에서 영생에 이르는 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오직 토라의 실천에 있음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토라’란 무엇인가? 히브리어성서에 언급된 ‘토라’를 칠십인역에서 단순히 ‘법’(노모스)이라 번역한데서, 이를 신약성서에 ‘율법’이라 표기하고, 오랫동안 교회는 ‘율법’은 ‘복음’과 대조되는 말로 이해하여 왔다.1) 위의 토라 교사와 예수의 이야기 역시 한 ‘율법’ 교사와의 대화로 알려져 있다. ‘토라’를 의도적으로 ‘율법’이라는 말로 고친 것이다. 그럼으로써 율법과 예수의 복음을 대비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럼에도 위의 이야기에서 예수는 율법/토라에 대하여 그 어떤 반대뿐 아니라, 그 어떤 새로운 해석도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은 율법은 유대인의 것으로 여기고, 기독교인이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이유가 있는가를 회의한다.2)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 역시 그와 같은 회의를 한 듯 보인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예수의 대답을 보면 그렇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f.). 그러므로 누구든지 가장 작은 계명 하나까지라도 행해야하고 가르쳐야한다.
‘율법’과 ‘선지자’는 히브리성서의 삼분법에 따른 제1부 ‘토라’와 제2부 ‘느비임’을 일컫는 말이다. 곧 예수 당시 정경이었던 구약성서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른 바 ‘반제(反題)’(Antithese, 5:21-48)3)를 들여다보면,
1) ‘율법 ’과 ‘복음’에 대한 교회의 오해의 문제 및 구약과 신약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하여, 박경철, 『한 권으로 읽는 구약성서』, 제 2장,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10), 33-65를 참고하라. 또한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교회의 오랜 반목과 갈등에 대한 역사적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로즈메리 류터, 『신앙과 형제살인, 반유대주의의 신학적 뿌리』, 장춘식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를 참고하라.
2) 크뤼제만은 지난 교회의 역사를 통해 교회가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해야 하는 것을 의심해 본 적은 없지만, 교회는 유대교와의 거리를 두게 되면서 점차 하나님의 계명과 구약성서의 율법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아울러 ‘율법’으로서가 아닌 ‘토라’가 구약성서의 유일한 계명들이며, 이것이 곧 기독교 윤리를 올바르게 세울 수 있는 성서의 기본 틀이라고 말한다. Frank Crüsemann und Gabriele Obst, “Müssen sich Christinnen und Christen an das Gesetz des Alten Testaments halten?”, Frank Crüsemann(Hg.), Ich glaube an den Gott Israels: Fragen und Antworten zu einem Thema, das im christlichen Glaubensbekenntnis fehlt, (Gutersloh: Kaiser, 1999), 114-118.
3) 이에 대해서는 Georg Strecker, “Die Antithesen der Bergpredigt (Mt 5 21-48 par)”, ZNW 69(1978,1/2), 36-72; Christian Dietzfelbinger, “Die Antithesen der Bergpredigt im Verständnis des Matthäus”, ZNW 70(1979, 1/2), 1-15; Peter Wick, “Die Antithesen der Bergpredigt als paränetische Rhetor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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