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니샤드 =용어해설
니르구나 브라만과 사구나 브라만
브라만은 크게 니르구나 브라만과 사구나 브라만으로 분류되는데, 니르구나 브라만은 산스크리트어로. '속성이 없는 브라만'이라는 뜻이다. 베단타 철학에서는 속성이 있는 브라만과 비교하여 속성이 없다는 측면에서 '절대자', '둘도 없는 유일자'로 불린다. 사고를 넘어선 초월적 신이다. 이는 속성을 지닌 사구나 브라만보다 더 높은 단계의 영역에 속한다. 반면에 사구나 브라만은 산스크리트어로 '속성이 있는 브라만'이라는 뜻이다. 사구나 브라만은 여러 가지 속성을 지님으로써 숭배의 대상이 된다. 「라마타파니야 우파니 샤드」에서는 사구나 브라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브라만은 순수의식으로, 나누어질 수 없고 형태도 없다. 브라만을 찾는 자를 위해 여러 가지 상징과 특성이 브라만에 부여되고 있다. 예컨대 경배와 존경의 대상으로서의 인격신 이슈바라 같은 것이 그 것이다."
다르마(Dharma)
산스크리트어의 문자적 의미로는 '나르다' '붙잡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힌두교와 불교, 자이나교에서 각각 그 의미를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고 설명한다. 힌두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참된 본질을 정의하는 데 관계되는 용어로의 의(義), 인간의 도덕과 윤리의 기초, 우주의 법칙, 그리고 모든 종교의 기초를 뜻한다. 그리하여 힌두교에서는 자신들의 전통을 '사나타나 다르마', 즉 '영원한 종교'라고 부른다. 다르마가 각 개인에게 적용되는 용어로 사용될 때는 카르마(karma), 즉 인간 행위의 '업'(業)이라는 뜻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왜냐하면 인간 행위의 규범으로서의 다르마는 '카르마'라는 인간 행위를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롭고 올바른 행위, 곧 선업을 행하는 것은 바른 다르마를 수행하는 길이 된다. 한편 불교에서의 다르마 개념은 여러가지로 사용되고 있다. 우선 우주적 법칙으로서의 다르마가 있는데, 그것은 이 세계를 넘어서, 또는 이 세계의 배후에 존재하는 법칙으로서 인간 행위인 카르마의 결과에 따라 환생이 결정되는 법칙을 뜻한다. 또 한편으로 다르마는 이 '법칙으로서의 다르마'를 깨달은 붓다의 가르침을 뜻한다. 그리하여 불교에서 다르마는 우주적 진리를 뜻하게 되며, 붓다가 탄생하기 이전의 영원한 진리가 되고, 그 진리 속에 불자들은 안식을 취하게 된다. 또한 이 다르마는 불자들에게 행위의 규범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사건의 일반 현상이나 사물의 실재가 드러나는 것을 뜻하기도 하며, 인간의 정신작용으로 나타나는 사고의 대상을 뜻하기도 하는 등 감각적 정신적 모든 존재들의 요소를 뜻한다.
마나스(Manas)
마나스는 산스크리트어로 '사고 능력'을 뜻하는 말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안타카라나'라고도 하는데, 이는 '내적감각기관'을 뜻한다. 우리는 마나스를 통해 외부 세계의 인상을 받아들이는데, 이것은 다시 '붓다'(buddhi)라는 마음의 '지성'으로 전달된다. 그러므로 흔히 마나스는 마음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깨달음에 이르는 보다 높은 단계의 '지성'이기보다는 낮은 인식 기관인 셈이다. 이 마나스는 의심을 일으키게도 하고 결정을 내리게도 하며, 우리의 의지를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의지 작용의 역할도 한다.
마야(Maya)
마야는 산스크리트어로 '환영, 속임수, 외관'라는 뜻이다. 힌두교와 불교, 자이나교에서 조금씩 다른 의미로 쓰이지만 대체로 '환영'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일치한다. 그러나 힌두교적 관점에서 마야는 아주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힌두교적 관점에서 보면 마야는 마음과 물질의 기초를 이루는 우주적 원리다. 이른바 비이원론적 베단타 철학에서는 환영으로 생각되는 우주 그 자체다. 마야는 또한 브라만의 힘(Shakti)이기도 하므로 영원성을 가지며 브라만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마치 불과 열기의 관계와 같다. 마야와 브라만은 인격신 이슈바라라고도 불리는데,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할 뿐만 아니라 우주를 해체시키기도 한다. 무지 또는 우주적 환영으로서의 마야는 브라만을 감추는 베일을 씌우고 또 우리 인간의 통찰도 어둡게 함으로써 우주적 근원에 도사린 유일한 하나의 실재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다양한 현상세계만을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마야는 무지와 앎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무지'는 우리를 신으로부터 멀리 떠나보내 세속적 물질적 감옥에 가두면서 욕망과 탐욕에 빠지게 한다. 반면에 '앎'은 신적 실현(신의 깨달음)을 가능하게 하며, 영적인 미덕을 찾아 수행하게 한다. 이 두 가지 측면은 시간과 공간, 인과성에 따라 작용하기 때문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절대적 존재인 브라만을 깨닫는 것으로만 상대적인 무지와 앎 모두를 초월 할 수 있다.
만트라(Mantra)
만트라는 힌두교와 불교에서 사용되는 신비한 음절이다. 힌두교에서 사용되는 산스크리트어의 의미는 몇 가지로 구분되어 설명된다. 첫째, 신의 이름을 가리킨다. 특별히 여러 신들 가운데서 선택한 신(ishtadeva)의 화신(avatara)에 주어지는 명칭이다. 영적 삶의 수행을 시작하고자 하는 학습자는 스승을 찾아가기 전에 먼저 하나의 신을 택하고 그 신명을 암송하면서 스승의 지도 아래 수행을 하게 된다. 학습자는 만트라를 계속 암송함으로써 신과의 일치를 얻게 되며, 스승은 이 거룩한 비밀을 지키라고 요청한다. 만트라의주기적인 암송은 사고를 분명하게 해주며, 꾸준한 훈련으로 신적 실현(신적 깨달음)을 가능하게 해준다.
둘째, '위대한 언설'을 의미한다. 이것은 베다의 최종적인 가르침으로서 우파니샤드의 결정적 진술인 '내가 브라만이다'라는 표현을 뜻한다. 『야주르 베다』 계열에 속하는 『브리 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에서의 이 같은 진술 외에도, 『사마 베다』에 속하는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서의 진술인 '그것이 너다'(Tat tvam asi)라는 표현도 '위대한 언설'로서의 만트라다. 이 외에도 『아타르바베다』 계열에 속하는 『만두키야 우파니샤드』에서 '이 자아(아트만)가 브라만이다'(Ayam atman Brahma)라고 한 것이나, 『리그 베다』 계열에 속하는 『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에서 '의식이 브라만이다'라고 한 표현들이 모두 위대하고 비밀스러운 언설로서의 만트라다. 셋째, 희생 제의와 관련하여 부르는 베다의 신성한 노래는 물론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베다의 거룩한 본문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베다에 기록된 본문 그 자체를 낭송함으로써 베다는 신성한 만트라가 되는 것이다.
목샤(Moksha)
목사는 신과의 연합 또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깨달음을 통하여 삶과 죽음의 순환이라는 윤회와 업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세속적인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는 최종적 해방을 의미한다. 힌두교에서 해탈인 목샤를 얻지 못하고 윤회하는 까닭은 브라만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트만이 브라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목샤는 인생의 네 가지 목표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로, 나머지 세 가지 목표는 부요함(artha), 즐거움(kama), 의무(dharma)다. 영적 열망을 가진 자들에게 해탈의 실현이야말로 인생의 지고지순한 목표가 아닐 수 없다.
바이쉬바나라 아트만(Vaisvanara Atman)
'바이쉬나바라'의 문자적 의미는 '모든 인간에 관하여'이다. 그러므로 바이쉬나바라 아트만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아트만'이라는 뜻이다. 베단타 철학에서는 대체로 깨어있는 상태의 인간 의식을 말하는데, 개개인과 관련시켰을 때는 비쉬바(vishva) 라 불린다. 또 인간 의식의 상태인 아바스타(avasthas)를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이때 첫 번째 자그라트 (jagrat: 깨어있는 상태)를 베단타에서 '바이쉬바나라'라고 부른다.
베다(Veda)
힌두교의 경전으로, 문자적 의미는' 지식' 또는 '거룩한 가르침'이다. 이 지식은 '아주 우수한' 계시의 지식이다. 베다는 인도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흩어져 전승되어 오던 여러 본문을 집단적으로 수집한 것이다. 인도 정통 힌두교에서는 이를 신적인 기원을 가진 신성한 본문으로 여긴다. 분량도 방대하여 성서의 약 여섯 배 규모에 이른다. 베다는 네 개의 문헌으로 나뉘는데, 시의 본문인 『리그 베다』, 노래를 담은 『사마 베다』, 제의의 본문인 『야주르베다』, 신비적인 불의 제사를 드리는 사제 아타르반(Atharvan)의 『아타르바 베다』가 그것이다. 앞의 셋은 베다 제의의 찬가와 제사에 관련되지만, 마지막 『아타르바 베다』는 열등한 주술적 내용들을 실은 것이 많다. 이 네 개의 베다는 그 내용이나 양식 또는 기원에 따라 다시 각각 세 부분으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베다의 몸집으로 본집(本集)을 뜻하는 상히타이고, 두 번째에는 의례적 설명을 담은 브라흐마나, 이 브라흐마나에 부록처럼 달린 더 깊은 숲속 은자들의 해설서 아라냐카, 그리고 베다의 최종적 가르침이라고 불리는 우파니샤드가 포함된다. 마지막 세 번째는이 모든 베다의 내용들을 자세히 안내해주는 지침서인 다양한 경전적 텍스트들이다. 이른바 『베단타 수트라』라고도 하는 『브라흐마 수트라』는 기원전 400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에 형성된 베다의 해설서들이다. 이 밖에도 요가를 전문적으로 다룬 『요가 수트라 (Yoga Sutras)』 등 다양한 경전들이 있다.
베단타(Vedanta)
베단타는 '베다'(veda)와 '안타'(anta, end)의 합성어로 '베다의 끝' 또는'베다의 결론'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베다의 최종적인 결론이자 결정판을 말하는 우파니샤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우파니샤드 속에서 보이는 계시적 내용과 심오한 통찰력들은 무엇보다도 브라만과 아트만에 관련된다. 그리고 브라만과 아트만의 관계에 대한 내용들은 『베단타 수트라』에 잘 요약되어 있다. 『베단타 수트라』는 바다라야나가 저술한 것으로 베단타 철학의 기초가 되고 있다.
베단타 수트라(Vedanta-sutra)
고전적 베단타 학파의 기본 텍스트로 이 경전에 근거하여 베단타 학파의 학자들이 주석을 썼다. 이 경전은 『브라흐마 수트라』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브라만이 가장 중심적 주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 경전의 기원을 대략 기원전 40 년에서 기원전 200년 사이로 추정한다,
브라만(Brahmana, 바라문)
사제 계층의 일원으로, 네 계층으로 구성된 카스트(Varma) 가운데 최상층에 속한다. 베다 시대에 바라문들은 현자들에게 계시되고 『리그 베다』에 편집된 노래들을 부르던 사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래들이 대중화되기 어려웠으므로 가정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구전으로 전승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고대의 원형적 시가의 모습은 점차 퇴색해갔고, 시가의 텍스트 본문에 대한 이해도 일상인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따라서 이러한 베다의 영적 진수를 지키고 보호하면서 안내자 역할을 해줄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역할을 떠맡았던 부류가 브라만 사제들이었다. 이들은 점차 자신들의 사제적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오직 고대의 시가들만이 권위를 지니는 것이며 자신들이 집행하는 제사의 규례를 통해 신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교리를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브라만 계층의 사제 계급은 이제 인간의 지상 행복과 자손의 번영, 물질적 부요, 원수의 대적 등을 결정하는 존재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브라흐마(Brahma)
인도의 주요 세 신 가운데 첫 번째 신을 말한다. 힌두교에서는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 세 신이 삼위 일체를 이룬다. 브라흐마는 창조의 역할을 하고 비슈누는 세계의 유지와 보존, 시바는 파기와 재생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세 신이 모두 같이 존경과 숭배를 받았지만 현대 인도에서는 브라흐마 숭배는 거의 사라지고 비슈누를 숭배하는 종파와 시바의 삭티(Shaktism: 생식력)을 숭배하는 종파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브라흐마의 개념은 마야(또는 이슈바라)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우주적 절대자요 궁극자인 브라만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브라흐마나(Brahmanas)
네 개의 베다인 『리그 베다』, 『사마 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 베다』에 각각 달린 제의 부분의 해설서다. 특히 베다의 본집인 상히타의 내용을 철학적 관점에서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철학적 내용의 대부분이 브라흐마나의 후반부에 수록되어 있어서 '베다의 최종판'인 베단다 철학의 도입부가 되고 있다. 결국 베다의 본집인 상히타에서 제의 적 해석서인 브라흐마나가 나오고 그로부터 철학적으로 더 숙고한 작품인 '숲의 책' 아라냐카가 나와 브라흐마나의 뒤를 이으면서 발전을 거듭했던 것이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Brihadaranyaka Upanishad)
산스크리트어로 '브리하드'(brihat)는 '위대한'이라는 뜻이고, '아라냐카'는 '숲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을 직역하면, '위대한 숲에서의 우파니샤드'라는 뜻이 되어 숲속에서 가르침을 전수했던 우파니샤드의 내용을 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위대한', '훌륭한'이라는 뜻을 지닌 '브리하드'는 그 가르침의 분량과 심오한 깊이에서도 위대함과 훌륭함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데, 특히 자아(아트만)에 대한 탐구가 깊다.
비슈누 (Vishnu)
힌두교의 주요 세 신 가운데 하나다. 산스크리트어로 '비슈'(vish)는 '일하다'는 뜻으로, 『리그 베다』에서 비슈누는 태양신으로서 일하는 자를 뜻하지만 오직 그는 '세 번의 걸음으로' 우주를 건너는 영웅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세 걸음은 태양의 떠오름과 정점, 그리고 지는 모습을 뜻한다. 비슈누의 최고의 걸음인 정점은 축복이 머무는 것을 말한다
샹카라 (Shankara)
인도의 위대한 성인이자 철학자로 샹카라차리야(Shankaracharya)라고도 한다.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의 대표자이자 힌두교 개혁의 중심 인물이다. 샹 카라의 사상은 불교의 '불이론'과 맥을 같이 할 수 있는 것으로 힌두교와 불교의 대화를 가능하게 해준다. 그는 말라바 해변의 칼라디에서 태어나 여덟 살에 세상을 등지고 인도 전역을 배회하다가 서른 두 살에 히말라야의 케다르나트에서 죽었다.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다재다능한 제자 덕분에 더욱 유명해졌다. 『바가바드 기타』와 우파니샤드, 그리고 신들의 찬가들에 대한 여러 주석을 남긴 그는 뛰어난 지혜와 성스러움으로 인해 시바의 화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 또한 '축복을 가져 오는 자'라는 뜻의 샹카라라 불린다는 것이다.
시바(Siva)
'시바'는 산스크리트어로, 친절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힌두의 세 신 가운데 세 번째 신에 해당하며 파괴와 재생의 역할을 담당한다. 파괴 가운데 특히 '무지'를 파괴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것은 춤추는 시바인 나타라자(Nataraja)의 모습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시바는 무지를 상징하는 난쟁이를 짓밟고 어둠을 밝히는 횃불을 여러 손에 들고 춤을 추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시바의 상징은 링가(linga: 남근)로 대표되는데, 종종 그의 아내 삭티(Shakti)와 결합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내 삭티의 상징은 요니(yoni: 여성의 생식기)다.
아그니(Agni)
산스크리트어로 '불'을 뜻한다. 힌두교에서 가장 오래되고 거룩한 신성으로 존경받는 숭배 대상 가운데 하나다. 태양처럼 하늘에 나타나기도 하고, 번개처럼 공중에 나타나기도하며, 불처럼 땅에 존재하기도 한다. 아그니는 베다의 수많은 신들 가운데서 인격신으로 등장한다. 아그니는 제사에서 숭배되는 신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제사의 불이 되어 더 높은 차원의 광명의 신으로 이끌어주는 희생 제사의 매개적 불이 되기도 한다. 그를 찬양하는 수많은 찬가가 있다.
아트 만(Atman)
힌두교와 불교에서 폭넓게 사용되고있는 용어다. 양쪽 모두에서 인간의 자아를 지칭하는 것은 일치하지만 그 해석은 다양하다. 힌두교의 전통에 따르면 아트만은 인간의 영원 불멸하는 참된 실재다. 인간의 몸과 사고를 넘어서 작용하는 절대적 의식으로서의 브라만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아트만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이며, 절대 의식이고 절대 환희다. 그러나 이러한 아트만은 불교에서는 부정된다. 공과 무아의 논리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Chandogya Upanisad)
찬도기야 학파의 ‘비밀스런 가르침'을 담은 이 우파니샤드는 『사마 베다」에 속한 것으로 두 번째로 오래된 본문이다. 『브리하드아리냐카 우파니샤드」처럼 긴 대화를 싣고 있는 이 책은 베단타 철학의 기본적 원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참된 자아인 아트만의 본성에 대해 잘 언급 해주고 있는데, 우파니샤드의 '위대한 언설'로 여겨지는 '다트 트밤 아시', 곧 '그것이 너다'라는 유명한 진술이 여기서 나온다. 우주적 자아와 인간의 내면의 자아가 둘이 아니라 곧 하나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카르마 (Karma)
카르마는 힌두교와 불교 모두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대체로 '행위'의 뜻을 지닌다. 힌두교에서 쓰는 몇 가지 의미를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신적 육체적 행위를 뜻한다. 둘째, 정신적 육체적 행위의 결과를 뜻한다. 셋째, 현세의 삶과 전생의 삶을 포함한 인간 행위의 총체적 결과를 뜻한다. 넷째, 도덕적 세계에서의 원인과 결과의 연쇄적 사슬을 뜻한다. 모든 개인의 카르마는 그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따른 것으로 '윤희'를 낳는다. 이러한 잠재적 세력으로서의 카르마는 현재와 미래의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사고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모든 카르마는 미래의 카르마의 씨앗이 되어 행위의 결과에 따른 그 열매로서의 결실은 기쁨과 슬픔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카르마는 도덕적 세계의 행위와 반작용의 법칙, 즉 뿌린대로 거두는 업의 법칙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인간이 이 카르마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인간은 이 카르마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스스로 자기의 의식 속에서 선택할 수 있다.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에 참 자아인 아트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에게 복종하고 선한 카르마를 낳고 나쁜 카르마를 소멸시킴으로써 카르마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하여 일단 깨달음의 해탈에 이르게 되면 새로운 카르마는 형성되지 않는다.
푸루샤(Purusha)
문자적으로는 '인간'을 뜻한다. 원형적이고 영원한 인간, 지고한 존재를 의미한다. 상키야 철학 체계에서는 실재를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그 가운데서 푸루샤는 참 자아로서의 절대자요 순수 의식이다. 푸루샤는 또한 물질적 실재인 프라크리티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관찰하는 '증인'이다. 비록 우주가 푸루사와 프라크리티의 연합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되지만 푸루샤는 프라크리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역할을하는 정신적 실재이다. 베단타 철학에서이 푸루샤는 아트만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푸루샤는 브라만과도 동일한 존재다. 상키야 철학에서의 순수 의식의 실재가 베단타 철학에서 브라만/아트만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푸루샤는 그 다양한 형태 속에서 남성신들이나 활동적인 신의 힘에 비견되고 있다.
프라나(Prana)
프라나는 산스크리트어로 '숲, 생명의 호흡'을 뜻한다. 생명 있는 에너지의 호흡으로 ‘기'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프라나는 인간의 몸을 지탱하고 관통하는 우주적 호흡이다. 파탄잘리는 자신의 8단계 요가 체계에서 호흡을 네 번째 수행 단계로 말하고 있다. 특히 호흡은 신체의 요가 가운데 기술적 부분을 강조하는 하타요가에서 중시된다. 『아타르바 베다』에서는 프라나를 신격화하여 찬가를 지어 숭배하기도 한다. 우파니샤드를 포함한 힌두교에서 프라나(호흡)는 다섯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 프라나는 호흡의 본질로, 순수 생명력이다. 둘째, 비야나는 순환을 돕는 호흡이다. 셋째, 사마나는 들숨을 통제하는 호흡으로, 음식물을 사용하여 신진대사의 화학적 과정을 통해 몸의 균형을 유지하게 한다. 넷째, 아파나는 몸의 아랫 부분에서 신체에 불필요한 것을 내보내는 역할을 하는 날숨에 해당한다. 다섯 째, 우다나는 몸의 상부에서 기능하는 호흡으로, 인간의 정신과 육체적 활동 사이를 잇는 가교 기능을 하면서 보다 깊은 영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호흡이다.
프라자파티(Praiapati)
'창조주'라는 뜻의 문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창조주 프라자파티는 베다에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데, 예를 들면 천둥과 번개 등을 관장하는 최고신의 하나인 인드라, 태양신으로서의 아버지 사비트리, 천지를 관장하고 만물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리그 베다』의 신 '황금 달걀' 히란야가르브하 등이다. 원형적 인간으로 묘사되는 마누 또한 그 창조자로서의 역할로는 브라흐마에 견주어지며, 우주를 지탱하는 자로서의 역할로는 프라자파티에 견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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