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조수정실록 7권, 선조 [수정실록] 6년 9월 1일 무인 4번째기사 / 성균관에 행행하여 선성을 배알하고 시사하여 이발 등 7인을 뽑다 상이 성균관에 행행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시사(試士)하여 이발(李潑) 등 7인을 뽑았다.
- 2. 선조수정실록 8권, 선조 [수정실록] 7년 7월 1일 계유 1번째기사 / 이발을 이조 좌랑으로 삼다이발(李潑)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이발은 젊었을 때 학문에 뜻을 두어 상당히 청명(淸名)이 있었고, 과거에 급제한 뒤에는 이이가 힘껏 당로자(當路者)에게 천거하여 출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전조(銓曹)의 요직에 앉았으므로 인망이 매우 무거웠다.
- 3. 선조수정실록 8권, 선조 [수정실록] 7년 11월 1일 신미 4번째기사 / 이성중·김성일 등을 선발하여 사가 독서하게 하다 이조 좌랑 이성중(李誠中), 수찬 김성일(金誠一), 교검(校檢) 이발(李潑), 정랑 유근(柳根), 봉교 최운보(崔雲溥)를 선발하여 사가 독서하게 하였다.
- 4. 선조수정실록 9권, 선조 [수정실록] 8년 7월 1일 정유 11번째기사 / 정종영을 이조 판서로 삼았으나 끝내 병으로 면직하다 정종영(鄭宗榮)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헌부가 비속(鄙俗)하다고 탄핵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는데, 끝내 병으로 면직하였다. 종영은 사류를 싫어하여 선발하는 일을 마음대로 하니 낭료(郞僚)인 이발(李潑)이 그의 자제를 시켜 후진들을 친근히 하라고 귀띔하였으나, 종영이 따르지 않았다. 이 때 김계휘(金繼輝)가 대사헌으로 있었는데 의논을 제기하여 탄핵하였다.
- 5. 선조수정실록 10권, 선조 [수정실록] 9년 2월 1일 을축 2번째기사 / 이이가 부제학을 사면하고 향리로 돌아가다 에게 미치니, 이이는 힘써 저지하였다. 그리고 이발(李潑)을 전랑(銓郞)으로 삼아 효원의 당여를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이발은 피혐하여 체직되고, 윤두수(尹斗壽)의 조카 윤현(尹晛)이 전랑이 되었는데 인물을 멋대로 기용을 하고, 또 조원(趙瑗)을 전랑으로 삼으려 하였다. 조원은 문명(文名)이 있으나 국량과 식견이 없어서 사류의 신망을 ...
- 6. 선조수정실록 11권, 선조 [수정실록] 10년 5월 1일 무자 5번째기사 / 전 목사 이충작의 졸기 하였으며 일을 논하는 데 있어 준엄하고 정직하였으므로, 상이 그의 행실을 고상하게 여겨 주의(注擬)할 적마다 끝자리에 있더라도 반드시 등용하였다. 그러나 편당의 의논에 들지 않았고, 또 일찍이 이발(李潑)은 길인( 吉人)이 아니라고 말하였으므로, 이발이 미워하여 언제나 멀고 나쁜 주군(州郡)에 두었기 때문에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무진 년간 1568 선조 1년.
- 7. 선조수정실록 12권, 선조 [수정실록] 11년 10월 1일 무인 4번째기사 / 양사가 윤두수·윤근수·윤현을 논핵하여 파직시키다 에게 추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이이가 매양 정철과 이발 두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의 의논을 화평하게 유지하고 마음을 함께하여 협조를 해간다면 사림은 아마 무사할 것이다."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정철은 그 말을 듣고 자기 소견을 바꾸어 이발과 더불어 교분을 정하고 조정(調停)의 의논 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동인 중에 뒤늦게 붙좇는 자들이...
- 8. 선조수정실록 13권, 선조 [수정실록] 12년 7월 1일 을사 1번째기사 / 양사가 백인걸의 상소로 인해 이이의 죄를 다스리라고 청하려 하다 되겠는가." 하였으나, 부제학 이산해(李山海), 응교 이발(李潑)은 양쪽 사이에서 우물쭈물하면서 두 편을 다 보전하려고 하였다. 이산해가 초(草)한 차자에, "전파된 말이 혹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며 송응형의 소문 역시 명백한지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이는 스스로 소 문을 믿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권덕여 등이 그의 의논을 따르지 않은 것은 참으로 공변된 ...
- 9. 선조수정실록 14권, 선조 [수정실록] 13년 3월 1일 경자 5번째기사 / 헌부가 신임 찬성 정종영을 논하여 개정하기를 청하다 교격(矯激)하지 않을 뿐이다."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 정종영은 유자(儒者)를 좋아하지 않고 당에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신중하게 스스로를 지켰기 때문에 당시의 명망이 없었다.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낭관 이발(李潑)이 매번 찾아 와서 인물의 진퇴에 대해 함께 의논하려 하였으나 정종영은 막연히 응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에 인망을 크게 잃었던 것이다.】
- 10. 선조수정실록 15권, 선조 [수정실록] 14년 2월 1일 을미 2번째기사 / 헌부가 수원 현감 우성전을 논핵하여 파직시키다 고 그의 동아리들이 매우 많아 성세를 크게 떨쳤는데, 이발·김우옹(金宇顒) 등이 그의 소위를 증오하여 논핵하려 하였다. 이때 이이는 사류들을 화합시켜 하나로 만들어 서 로 정성을 모아 임금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였는데 이발 등의 말을 듣고서는 또 다른 구적(仇敵)을 만들까 염려하여 강력히 말렸었다. 그런데 정인홍(鄭仁弘)은 ‘성전은 임기가 만료되었으니 체직시...
- 11. 선조수정실록 15권, 선조 [수정실록] 14년 3월 1일 갑자 2번째기사 / 헌부가 이조 좌랑 이경중을 논핵하여 파직시키다 기용되는 것을 저지하였으므로 여립이 전랑의 의망에 참여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경중에 대한 원망이 매우 컸었다. 인홍은 선인을 질투하여 배척했다고 하면서 계사에서 훌륭한 선비가 저지당했다고 하였는데, 유성룡 등은 매우 불평스럽게 여겼다. 이때 우성전·이경중이 잇따라 논핵을 당하게 되자 물정이 미흡하게 여겼는데 이로부터 이발 등과 진로를 달리하게 되었다.
- 12. 선조수정실록 15권, 선조 [수정실록] 14년 5월 1일 계해 1번째기사 / 윤의중을 형조 판서에 제수하니, 간원이 개정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받았고 근원도 참망(參望)시켰다. 의중은 바로 이발(李潑)의 외삼촌으로서 성세가 한창 치성했기 때문에 양상이 자급이 가장 앞선다고 칭탁하면서 그를 추천했던 것이다. 박근원은 경망하고 교활하여 행실이 없었으므로 사류들에게 천시를 받았었는데 김첨(金瞻) 등에게 빌붙어 다시 청망(淸望)에 오르게 되자 공론의 불평이 많았다. 이이가 논핵하여 개정시키려 하...
- 13. 선조수정실록 15권, 선조 [수정실록] 14년 7월 1일 임술 4번째기사 / 양사가 청양군 심의겸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다.’ 하였고 김우옹도 불가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발은 이들의 말을 모두 듣지 아니하고 인홍에게 한번 결단하라고 권면하였으나 인홍은 이이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자 혼자서 발론하기는 어렵다고 여겨 관직을 버리고 돌아가려 하였다. 이발이 이이에게 설득하기를 ‘시배(時輩)들이 공을 그다지 신임하지 않는 것은 공이 의겸을 버리지 않는 것인가 하여서이...
- 14. 선조수정실록 15권, 선조 [수정실록] 14년 8월 1일 임진 1번째기사 / 심의겸·정철을 논계한 일로 이이·남언경·유용정을 체직하다 상이 특별히 윤승훈을 신창 현감에 제수하였다. 【이때 이발 등의 뜻은 곧바로 한쪽 사류들을 공격하고 싶었지만 이이가 보합시키는 논의를 주장하여 상의 은총을 입고 있는데다가 사류들의 신망도 그에게로 귀의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잃게 되고 또 그가 서인(西人)들에게 중히 여김을 받을까 걱정하였다. 이리하여 전후 이이에게 친근하였었는데 이이는 그...
- 15. 선조수정실록 15권, 선조 [수정실록] 14년 8월 1일 임진 2번째기사 / 상이 조강에 나아가니, 이이가 윤승훈의 일로 아뢰다 공론이 없으니 내 가 언지(言地)에 있으면서 어찌 감히 혐의를 피하고 진심을 속이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랏일을 위해서는 옛사람도 모두 피혐하지 않았다. 예컨대 장준(張浚)이 윤색(尹穡)에게 공박을 받자 장준은 윤색을 간사한 자라고 지목하였는데 그렇다면 장준도 역시 그르다고 하겠는가?" 하니, 이에 이발과 김우옹이 모두 이이에게 사과하였다.
- 16. 선조수정실록 15권, 선조 [수정실록] 14년 8월 1일 임진 3번째기사 / 첨지중추부사 정철이 관직을 버리고 향리도 돌아가다 말하였다. 어느날 술김에 이발에게 욕을 하고 꾸짖자 이발은 드디어 절교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대간의 논핵을 중하게 입었기 때문에 바로 가솔(家率)을 데리고 호남(湖南)의 향리로 돌아갔다. 이이와 이해수(李海壽)가 강가에까지 나아가 전송하면서 술을 끊고 지조를 지키라고 당부하자, 정철은 이발의 심술은 믿을 수 없으니 그와 벗하면 반드시 농락당할 것이...
- 17. 선조수정실록 15권, 선조 [수정실록] 14년 9월 1일 임술 3번째기사 / 정유길을 우의정으로 삼으니, 간원이 체직시키기를 청하다. 이에 집의 정사위(鄭士偉), 장령 이노(李輅) 는 이발(李潑) 등의 지시를 받아, 유길이 권간에게 아부했던 죄를 논핵하여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우상의 인품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그를 알기 때문에 아끼고, 아끼기 때문에 등용한 것이다. 아, 애석하다. 그의 굉활한 기량과 의연한 태도, 고매한 재능으로서 늘 서생(書生)들의 구설에 곤욕을 치르게 되니...
- 18. 선조수정실록 16권, 선조 [수정실록] 15년 6월 1일 정해 2번째기사 / 대제학 이이에게 《강목》의 강론을 고문할 신하를 선발하게 하다 거만하고 도도한 자세로서 명절(名節)로 자부하였다. 이발(李潑)의 동생 이직(李溭)과 벗하였는데 당시 사람이 흠모하여 그의 교접을 받은 사람은 마치 용문(龍門)에 오른 것처럼 여겼고, 연소한 사류들의 우두머리가 되었 었다. 그런데 이영이 죽고 나서 당론(黨論)이 크게 일어나 사류가 분열되었으므로 사자(士子)들이 다시는 학문을 닦고 스승을 섬기는 일을 숭상하지...
- 19. 선조수정실록 17권, 선조 [수정실록] 16년 1월 1일 을묘 1번째기사 / 최영경·안자유·이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영경(崔永慶)을 지평으로, 안자유(安自裕)를 대사헌으로, 이발(李潑)을 대사간으로 삼았는데, 영경은 사양하고 제수를 받지 아니하였다.
- 20. 선조수정실록 17권, 선조 [수정실록] 16년 4월 1일 임자 9번째기사 / 경안령 이요가 면대를 청하여 붕당에 관한 일 등을 아뢰다(政令)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는 것과 유성룡(柳成龍)·이발(李潑)·김응남(金應南) 등이 동인(東人)의 괴수로서 제멋대로 권력을 행사한 흔적이 많다는 것을 강력히 말하여 억제시킬 것을 청하고, 또 시사(時事)를 이것 저것 논하였는데, 모두 가 당시에 기휘하는 일들이었다. 양사가 논하기를, "이요가 근거없는 말을 터무니없이 떠벌려 일망타진할 단서를 만들어 내고 있으...
- 21. 선조수정실록 17권, 선조 [수정실록] 16년 5월 1일 임오 3번째기사 / 적호 5천여 기병이 방원보에 또 침범하니 최호 등이 물리치다 끌고 와서 재차 방원보를 포위하였는데, 최호가 조방장 이발(李 ) 등과 함께 성에 올라 힘껏 싸웠고 우후 장의현(張義賢)과 판관 윤담(尹湛) 등 이 종성부(鍾城府)에서 와서 구원하여 안팎으로 합세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 크게 공격하니, 적이 마침내 패하여 물러갔다. 이때에 정예로운 장졸(將卒)들이 변방 진에 많이 모였는데 신입을 대장으로 받들기를 희망했으나, 조정에...
- 22. 선조수정실록 18권, 선조 [수정실록] 17년 2월 1일 무신 5번째기사 / 사헌부가 이순인이 시세에 영합한다고 체직을 청하다 은 잘합니다. 처음에는 조원(趙瑗)에게 붙었다가 다시 이발(李潑)에게 붙었으며, 이이(李珥)와는 젊었을 때 부터 서로 친한 사이였는데 그가 득세하고 못함에 따라 향배를 달리했으니, 그의 행실을 이런 데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순인은 시강(侍講)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또 어떤 일을 맡지 않았으므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물었을...
- 23. 선조수정실록 18권, 선조 [수정실록] 17년 3월 1일 무인 1번째기사 / 경연관 심희수가 입시하여 아뢴 시사에 대한 의견이 두서가 없어 견책받고 체직되다 손자인데 아버지 심건(沈鍵)은 노수신(盧守愼)과 동서간이었다. 그래서 희수가 처음에는 노수신에게 배웠는데 재주가 뛰어났으며, 이이와 교유하고 정철과 교제하였기 때문에 이발(李潑)에게 배 척을 당했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와서 처음으로 경연에 들어왔는데 말이 번거롭고 두서가 없어서 견책을 받고 체직되었다. 오랜 뒤에 금산 군수(錦山郡守)로 나갔다.
- 24. 선조수정실록 18권, 선조 [수정실록] 17년 11월 1일 계유 1번째기사 / 정부에 하교하여 어진 인재를 추천케 하다 대체 어떤 자인가?’ 하면서 매우 의심했었다. 그러나 이발 등에게 잘못 유도되어 이렇게 추천한 것이다.】 【 한효순은 용렬하고 노둔하여 재주가 없는데 이발의 주선으로 전랑(銓郞)이 되었으나 잘못을 범하여 파직시키도록 하였다. 그뒤 척리(戚里)와의 인연으로 다시 발탁되었으니, 사사로이 진출하는 길이 한효순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대해는 주색에 빠져 세상 ...
- 25. 선조수정실록 19권, 선조 [수정실록] 18년 4월 1일 임인 4번째기사 / 홍성민을 경기 감사로, 정여립을 홍문관 수찬으로 삼다 으로 율곡은 반쯤 익은 감과 같다는 비유를 하고 또 ‘이발은 율곡을 사사(師事)하였는데 논의가 일치되지 않자 반격하여 모함하기를 다른 사람보다 더 심 하게 하였으니 그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 하였으며 또 ‘유성룡은 겉으로는 선비인 체하지만 속은 실제로 간교하다. 그런데 조정에 있으면서 자기 주장을 고집하니 후환이 염려된다.’ 하였다. 이정란은...
- 26. 선조수정실록 19권, 선조 [수정실록] 18년 5월 1일 신미 3번째기사 / 의주 목사 서익이 정여립 등을 논평하여 상소하다 져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발은 일찍이 이이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논의가 일치하지 않게 되자 끝내 공격할 뜻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조정의 정사를 멋대로 독단하면서 옳지 못한 인물을 끌어들여 조정에 환란을 조성하였으니, 이는 이발의 죄입 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부름을 받고 도성에 들어왔을 때에 이이는 이미 병석에 누워 ...
- 27. 선조수정실록 19권, 선조 [수정실록] 18년 6월 1일 경자 10번째기사 / 생원 이경진이 상소하여 정여립에 대해 극론하였고, 정여립이 시골로 돌아가다 절교당할 만한 잘못이 없다면 남이 스스로 절교한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니 절교의 여부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하였다. 여립은 크게 기운이 꺾여 시골로 돌아갔는데 이발(李潑) 등이 서로 잇따라 신구(伸救)하고 여러 차례 삼사(三司)에 의망하였으나 상은 끝내 기용하지 않았고 비록 외관(外官)이라도 낙점하지 않았으니, 여립의 울분이 더욱 심하였다.
- 28. 선조수정실록 19권, 선조 [수정실록] 18년 8월 1일 기해 1번째기사 / 양사의 대사헌 이식 등이 심의겸을 죄주기를 논계하다 드디어 도망하여 그의 백숙부들과는 발을 끊고 이이· 이발· 정인홍 등을 추종하면서 학문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이 일로 의겸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 경이 제 어미의 원수 를 갚는데 권도(權道)를 씀으로써 정도(正道)를 잃지 않았다.’고 칭송하였다.】 "한 사람의 시비를 가리는 일은 애당초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 일로 인하여 조정이 소란스럽게 논란만 ...
- 29. 선조수정실록 19권, 선조 [수정실록] 18년 8월 1일 기해 2번째기사 / 대사간 이발이 서울에 들어와 아뢰다 대사간 이발(李潑)이 부름을 받고 서울에 들어와 아뢰기를, "지난번에 본원이 심의겸이 붕당을 만들고 권력을 독점한 죄를 논할 때 상께서 그와 교결(交結)한 사람을 하문하셨으면 대간이 된 자는 마땅히 성상의 뜻을 받들어 하나하나 숨김없이 진술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조 판서 홍성민(洪聖民)과 부제학 구봉령(具鳳齡)은 실제로 서인(西人)들에게 칭송을 받았고 ...
- 30. 선조수정실록 19권, 선조 [수정실록] 18년 8월 1일 기해 3번째기사 / 이조에 심의겸의 일로 전교하다 시끄럽게 일어나 ‘ 성전이 김수를 붙잡아 놓아 차자를 논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였는데, 이로부터 김수(金睟) 또한 이발(李潑) 등과 사이가 벌어졌다. 지평 이시 언(李時彦)이 동료에게 말하기를 ‘계사에 성혼과 이이를 의겸의 당이라고 이르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는데 이 때문에 체직되어 다시 대간에 들어가지 못하고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나갔다.】
- 31. 선조수정실록 19권, 선조 [수정실록] 18년 9월 1일 무진 3번째기사 / 진사 조광현 등이 이발의 계사를 논하여 상소하다 치는 계책이 되었다.’ 하였습니다. 아, 전에도 같은 이발이었는데 이이가 죽기 전에는 ‘의겸을 소인이라 하면 안 된다.’ 하였고 뒤에도 똑같은 이발이면서 이이가 죽고 난 뒤에는 ‘의겸과 서로 아는 자는 모두 사당(邪黨)이다.’ 했으니, 그 논의의 변천이 어찌 이토록 이이의 생사에 따라 앞뒤가 다르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이가 전날의 삼사(三司)를 쓰지 않은 것을...
- 32. 선조수정실록 19권, 선조 [수정실록] 18년 9월 1일 무진 4번째기사 / 이항복을 정언으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이조 좌랑으로 옮기다 이항복(李恒福)을 정언으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이조 좌랑으로 옮겼다. 【 항복은 재기(材器)가 남보다 뛰어나 상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이발(李潑) 등이 시기하였으나 배척하지 못하였다.】
- 33. 선조수정실록 20권, 선조 [수정실록] 19년 7월 1일 갑오 1번째기사 / 전 대사헌 구봉령의 졸기 될 때에도 중립을 지켜 한쪽으로 쏠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발에게 꺼림을 받았고, 이어 당인(黨人)으로 지목을 받게 되자, 이로부터 관직에 제수되어도 일체 부임하지 않았다. 산간에 집을 지어 책을 갖 추어 놓고 제자들을 가르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존모(尊慕)하여 섬겼으며, 그가 죽은 뒤에도 조금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아 사당을 세워 향사하였다. 문인 권춘란(權春...
- 34. 선조수정실록 20권, 선조 [수정실록] 19년 10월 1일 임술 1번째기사 / 주학 제독관으로 제수된 조헌이 붕당의 시비와 학정의 폐단을 논한 상소문 ①패함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신은 보건대 그가 이발 형제를 아껴 백방으로 충고하여 미혹에서 돌아오기를 바랐는데도 이발은 뉘우치지 않고 더욱 공격하여 해치려 하였으니, 송나라 때 정위(丁謂)가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 기필코 구준(寇準)을 쫓아낸 일과 같습니다. 한나라 급암(汲黯)의 강직함이 없었더라면 누가 회남왕(淮南王)의 역모를 제어할 수 있었...
- 35. 선조수정실록 20권, 선조 [수정실록] 19년 10월 1일 임술 2번째기사 / 주학 제독관으로 제수된 조헌이 붕당의 시비와 학정의 폐단을 논한 상소문 ②간 지혜로워 속으로 부끄러워하며 먼저 물러갔으나 우옹·이발은 더욱 전의 잘못을 성사시키려고 도성에 머무르면서 눈치 보기를 쉬지 않고 있으니, 이는 신종(神宗)이 이른바 ‘잔당들은 물리쳐도 떠나가지 않는다.’는 자들 입니다. 저 이발의 무식함은 아예 말할 것도 없지만 우옹은 삼경(三經)의 의리가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으니, 신이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게 되는 바입...
- 36. 선조수정실록 20권, 선조 [수정실록] 19년 10월 1일 임술 3번째기사 / 주학 제독관으로 제수된 조헌이 붕당의 시비와 학정의 폐단을 논한 상소문 ③대(南臺)가 혁파된 것도 오로지 이들 때문이었습니다. 이발의 이러한 일들은 모두 의중을 위하고 자기 형제들의 입지를 마련키 위한 것이었으니, 그의 마음이 진실로 사직과 임금을 보필하는 데에 있었던 것 이었겠습니까. 해치(獬豸) 부정한 사람을 보면 뿔로 받는다는 신수(神獸). 지녕(指侫) 간사한 사람이 들어오면 구부려서 지적한다는 풀. 신은 그래도 이발이 옛 ...
- 37. 선조수정실록 21권, 선조 [수정실록] 20년 3월 1일 경인 1번째기사 / 성균 진사 조광현·이귀 등이 스승 이이가 무함당한 정상을 논한 상소문 생 정여충(鄭汝忠)을 형신(刑訊)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발 등의 소위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인심을 열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발 등의 생각도, 삼윤(三尹)이 일을 그르친 죄를 곧바로 탄핵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하면 선배 사류 중에 반드시 불평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위에서도 모함하는 것인가 의심할까 염려하였던 것...
- 38. 선조수정실록 21권, 선조 [수정실록] 20년 3월 1일 경인 3번째기사 / 대사간 이발이 이귀의 상소로 인하여 사퇴를 청하다 는 반복하는 작태가 있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 뒤 이발은 출사(出仕)한 뒤에 정병(呈病)하고 면직되었다. 상이 하루는 어제(御製)한 삼색도화시(三色桃花詩)를 옥당에 내렸는데, 그 시에, 한 나무가지에 곱게 핀 복사꽃이 무슨 일로 두세 가지 빛깔이냐 식물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인심이 반복하는 것 마땅하리 하고, 또 벽도화시(碧桃花詩)에, 흰 꽃은 눈처럼 희디...
- 39. 선조수정실록 21권, 선조 [수정실록] 20년 9월 1일 정해 8번째기사 / 공주 교수 조헌이 소장을 올렸는데 감사가 받지 않자 사임하고 귀향하다 이 내쫓아서는 안 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발과 김우옹·정인홍은 성혼이 심의겸을 편든다고만 의심하였을 뿐 이것이 국인의 공언(公言)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호언(狐偃) 춘추 시대 진(晉)나라 사람. 진 문공(晉文公)이 공자(公子)로 있을 때 망명하여 외국에 가 있었는데 호언이 19년 동안 수행하였다 . 진 문공이 귀국하여 임금이 된 뒤에는 문공을 ...
- 40. 선조수정실록 22권, 선조 [수정실록] 21년 11월 1일 경술 1번째기사 / 형조 판서 김명원을 경기 감사, 김엽을 경상도 순찰사, 윤근수를 공조 참판으로 삼다 주의(注擬)되었는데 윤근수가 어찌 말망(末望)에 적합하지 않겠는가." 하자, 이발이 말하기를, "그대가 너무도 일을 모른다. 이노는 공조 참판이 곧 그의 본분이니 거기에 그치는데 불과하지만 윤근수는 다시 높은 직임을 얻게 되면 그가 어찌 공조 참판에만 그칠 자이겠는가." 하였다. 그 뒤에 윤근수가 마침내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이발이 그의 관작을 삭탈하지 못하였다.
- 41.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수정실록] 22년 7월 1일 병오 4번째기사 / 전 부사 강서의 졸기 못하였다. 일찍이 이발(李潑)을 옥당에서 만났는데 이발이 그가 취한 태도를 조롱하자 강서는 크게 노하여 꾸짖기를, "너 같은 후생이 이 옥당에 앉아 있으니 시사(時事)를 알 만하다. 네가 무리를 모아 뜬 논의를 주창하여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가. 필경에는 죽음을 취할 따름이다. 내가 대관(臺官)이 되어 너를 탄핵하지 못하니 어찌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42.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수정실록] 22년 8월 1일 병자 1번째기사 / 판중추부사로 치사한 정종영의 졸기 벼슬하게 되어서도 청망(淸望)이 쇠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오직 도학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후진을 소외하였으며, 또 이발 등에게 미움을 받아 탄핵을 거듭 입었다. 상이 그를 정직하게 여겨 정승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마침내 나이가 퇴휴(退休)할 시기에 이르렀으므로 명절(名節)을 잃지 않게 되었다. 자손이 많은데 아들 정혹(鄭㷤)은 명관이 되었다. 당저(當宁) 선조를 말함.
- 43.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수정실록] 22년 10월 1일 을해 5번째기사 / 한준·박충간·이축·한응인 등이 정여립의 모반에 대한 변서를 올리다(縣舍)로 달려가서 편지를 써서 종에게 부쳐 형 이발(李潑)에게 통보하고, 현감에게 말하기를, "도중에 도적의 위협이 있을 듯하니 모름지기 군병을 얻어 호행(護行)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현감이 읍내의 민병(民兵) 약간인을 내어 무장을 갖추어 호송하고 연로의 군현이 차례로 교대하 게 하였다. 도중에 과연 장사 두세 사람이 군장 차림으로 말을 타고 선후로 ...
- 44.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수정실록] 22년 10월 1일 을해 7번째기사 / 정여립의 시체를 군기시 앞에서 추형케 하다." 하니, 여립이 기가 꺾였다. 조헌(趙憲)이 이발(李潑)의 형제로 인하여 처음에는 그와 사귀었었다. 여립이 이 이를 배반하고 전후 반복하여 간궤(姦詭)스런 정상이 다 드러나게 되어서는 명류(名流)로서 진심을 지키는 사람은 모두 그의 무상(無狀)함을 알았다. 그러나 오직 이발·백유양(白惟讓)은 그가 성혼과 이이를 배척한 것을 칭찬하면서 추천해서 숭장...
- 45.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수정실록] 22년 11월 1일 을사 2번째기사 / 생원 양천회가 역적과 교분이 있던 자의 처벌에 대해 상소하다死友)의 교분을 맺어 서로 복심(腹心)이 된 자로는, 이발(李潑)·이길(李洁)·백유양(白惟讓) 같은 자가 있고, 종족으로서 친밀한 자로는 정언신·정언지(鄭彦智) 같은 자들이 있어 상당히 많습니다. 온 나라 사람들 중 이를 모르는 이가 없는데도 오히려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경연(經筵)을 출입하면서 소장을 올려 스스로를 탄핵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인심이 통...
- 46.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수정실록] 22년 11월 1일 을사 3번째기사 / 예조 정랑 백유함이 역적과 교분이 친밀한 이발·이길 등에게 죄줄 것을 상소하다 예조 정랑 백유함(白惟咸)이 상소하여 ‘이발·이길·김우옹 등이 역적과 교분이 친밀하였으니 죄주지 않을 수 없다.’고 논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백경(白卿) 이 훌륭한 후사(後嗣)를 두었다." 백경(白卿) 백인걸을 가리킴. 하였다.
- 47.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수정실록] 22년 11월 1일 을사 7번째기사 / 정언신·정언지·홍종록·정창연·이발·이길·백유양 등을 하옥시키다 정언신·정언지·홍종록(洪宗祿)·정창연(鄭昌衍)·이발·이길·백유양 등을 하옥시켰다. 이때 정여립의 조카 정즙(鄭緝)이 고문을 받아 승복하면서 같은 당여를 과람하게 끌어대었는데 70여 인에 이르렀다. 또 여립의 조카 정약(鄭約)과 의연(義衍)의 복초(服招)에도 조사(朝士)를 많이 끌어대었으므로 잡혀 수금된 자가 더욱 많았다. 상이 정언신 등을 친국(親鞫)하여 정...
- 48.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수정실록] 22년 12월 1일 갑술 4번째기사 / 간원이 호군 홍여순의 탐학을 아뢰다 간원이 아뢰기를, "호군(護軍) 홍여순(洪汝諄)은 위인이 음험한데다가 시기심이 많고 탐욕스럽습니다. 수령으로 있을 적에는 끝없이 토색질하였고 형장(刑杖)을 과람하고 혹독하게 사용하여 백성을 해쳤습니다. 흉악한 위세가 극도에 이르러서는 감사를 멸시하였는데 사람들이 그를 이리와 범처럼 여겼습니다. 그가 시기하고 해치려는 마음을 품은 정상은 실로 조정 사이의...
- 49.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수정실록] 22년 12월 1일 갑술 6번째기사 / 역당 선홍복을 복주하고, 이발·이길·백유양·유덕수 등은 고문받다 죽다 형에 연좌되어 죽었다. 이발·이길이 죽은 뒤에 그의 어머니·아내·어린 아들도 모두 추후에 수금당하였다. 이발이 옥에 있을 적에 이정란(李廷鸞)에게 말하기를, "내가 눈이 있으면서 사람을 알지 못하였다. 그대는 죽음을 면하게 될 것이니 모름지기 칼로 내 눈을 뽑아버리라."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조헌의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음을 후회한다." 하였다.
- 50.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수정실록] 22년 12월 1일 갑술 7번째기사 / 유성룡이 정여립과의 관련 여부에 대해 해명하는 상소를 올리고 대죄하다 인은 누구인가?" 하니, 백유양이 아뢰기를, "북인은 이발·이길·정언신·정언지 및 정적(鄭賊) 과 신(臣) 유양(惟讓) 등 모두 10인입니다." 정적(鄭賊) 정여립을 말함. 하고, 조인후(趙仁後)가 승지로 입시하였는데 유양이 아뢰기를, "인후는 곧 북인입니다." 하였다. 조인후는 물러나서 대죄(待罪)하였는데 근심과 두려움으로 실성하여 죽었다. 유양의 서찰에 여립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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