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47.송강 정철과 기축옥사
기사승인 2018.06.24 19:5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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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가사문학의 별 그러나 잔혹했던 정치가, 정철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47. 송강 정철과 기축옥사
조선 가사문학의 별 그러나 잔혹했던 정치가, 정철
서인 정철, 정여립 반역 조사 맡아
반대편 동인들 1천여 명 피의 숙청
영남사림 속했던 호남사림 큰 피해
이발형제·정개청·최영경등 목숨 잃어
해남 윤씨·나주 나씨·창녕 조씨 등
전라도 사림가문 멸절위기 몰리기도
송강정 |
■송강(松江) 정철(鄭澈)에 대한 평가
담양은 가사문학의 산실이다. 그 중심에는 송강 정철이 있다. 정철은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관동별곡> 등 조선을 대표하는 가사를 지었다. 정철은 노계 박인로,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 가사 문학의 3대 거장으로 불린다. 담양에 있는 송강정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의 산실이다. 식영정은 성산별곡을 낳게 한 곳이다.
국민들 대부분은 정철을 국어교과서를 통해 만났다. 학생시절, 수능시험에 어김없이 출제되는 정철의 문학작품과 의미를 맞추기 위해 정철의 작품을 외웠다. 그래서 정철은 국민들에게 친숙한 조선의 문신(文臣)이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임금에 대한 사모의 정을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정철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은 충신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정철은 감성의 시인과는 정 반대의 행적을 보였다. 서인에 속했던 정철은 ‘정여립의 역모’로 발생한 기축옥사 조사를 주도하면서 1천 여 명에 달하는 동인 쪽 호남지역 인사들을 죽였다. 500여명은 유배를 보냈다. 정여립의 역모가 뚜렷한 증거가 없는 상황인데도 사적인 감정으로 역모의 가능성을 부풀려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했다.
정치인 정철은 음모가였으며 잔인했던 숙청가였다. 기축옥사에 관련해 정철이 보여준 무자비한 정적제거는 그의 인간성을 의심케 한다. 그는 사적인 감정에 얽매어 법의 칼날을 휘둘렀다. 정철 때문에 풍비박산된 가문과 멸족의 화를 당한 가문들은 원한을 품었고 이는 300 여 년 간에 이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시발점이 됐다.
그래서 이형권 같은 문학평론가는 정철에 대해 이 같은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정철이 이룩한 국문시가에서의 혁혁한 공로와 명성만을 생각하면 정치인으로서의 송강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권력에 집착했던 정치역정만을 생각하면 시인 정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일구어낸 가사문학의 업적은 영광이지만 그로인한 호남사림의 운명을 알게 되면 반대의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송강정 |
■정철의 청장년 시절
정철은 1536년(중종 31)에 태어나 1593년(선조 26)에 세상을 떴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다. 서울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에서 출생했다.
송강 정철의 집안은 궁중 권력과 직접 연결돼 있었다. 큰 누이는 12대 인종(1544~45년)의 숙의(淑儀 : 왕의 후궁에게 내린 종2품의 작호)였다. 작은 누이는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의 부인이었다. 계림군은 9대 성종의 庶손자이자 대윤(大尹, 파평윤씨-인종외가)의 지도자 윤임의 조카였다. 누이들 덕분에 궁중출입을 자유롭게 하면서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훗날 명종)과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요절하고 계림군이 을사사화(1545년)에 연루돼 능지처참되면서 정철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돼버렸다. 정철의 아버지 정유침(鄭惟沈)은 사온령(司?令:궁중에서 사용하는 술을 빚는 사온서의 책임자)이었다. 맏형 정자(鄭滋)는 이조정랑이었다. 정철이 10세 되던 해에 을사사화가 일어나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맏형인 정자는 광양으로 귀양에 보내졌다.
정철이 12세 되던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졌다.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迎日)로 유배됐고, 맏형은 장형(杖刑)을 받은 뒤 경원으로 유배를 가다가 장독이 도져 32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이후 정철은 아버지와 함께 유배지에서 자라났다. 명종 6년(1551) 순회세자(順懷世子)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대사령이 내리자 정유침은 가족들을 이끌고 선산이 있는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으로 내려가 정착했다.
정철은 이곳에서 10년 동안 명망 높은 호남사림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임억령(林億齡)으로부터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또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같은 선비들과도 교류를 시작했다. 정철은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을 담양에서 생활했다.
정철은 1552년(명종 7) 17세 나이에 문화 유씨(文化柳氏) 유강항(柳强項)의 딸과 혼인해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다. 이 가사는 성산(星山: 별뫼)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서하당 주인의 유유자적한 삶을 노래하고 있다.
정철은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했다. 다음 해에는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했다. 1566년(명종 21)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됐다. 그러나 명종의 미움을 받아 지방현감이나 도사 등 외직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명종이 정철을 내친 것은 자신의 부탁을 정철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종의 근친인 경양군은 처가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서얼 처남을 죽여 버렸다. 명종은 정철을 따로 불러 선처를 부탁했다. 그러나 정철은 경양군을 사형에 처해버렸다. 혹자는 이런 사실을 들어 정철이 매우 강직했다고 주장한다. 정철은 술을 좋아해 실수를 저지른 적도 많지만 근본적으로는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신하이기도 했다.
정철은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湖堂 : 젊은 문관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을 닦게 했던 자리)에 선출됐다. 1570년(선조 3) 35세 때 부친상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해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했다. 1575년(선조 8) 40세에 다시 벼슬길에 나가 직제학성균관사성, 사간 등을 역임하면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었다.
식영정 |
■당쟁 속의 정철
정철이 관직에 나아갈 때 조선은 동서 붕당의 파쟁이 무척 심할 때였다. 선조 1575년은 동인이 서인을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할 때였다. 당시 조선 조정은 김효원이 동인의 원조가 되고, 심의겸이 서인의 우두머리가 돼 대립하고 있었다. 신임 이조정랑 추천 문제를 놓고 부딪친 동인과 서인의 힘겨루기에서 동인이 승리해 주도권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당시 심의겸의 집은 서울 서쪽인 정릉동에 있었다. 이에 심의겸을 지지하는 선배 관료들을 서인(西人)이라 불렀다. 이에 반해 김효원의 집은 서울 동쪽인 건천동(現 인현동)에 있었다. 자연 김효원을 지지하는 후배 관료들은 동인(東人)이라 불리게 됐다.
사실 기호사림파가 주축인 서인은 1392년 조선 건국 이래 조정의 주도권을 계속해 쥐고 있었다. 남명학파 및 퇴계학파로 구성된 영남사림파는 170여 년 동안 기호세력의 두터운 벽을 뚫고자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었다. 그런데 신진 사림 김효원이 원로대신 심의겸을 상대로 한 명분다툼에서 승리를 거두고 동인의 시대를 연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선조의 서인(기호사림파)견제 의도와 부합된 것이다. 두 번째는 영남사림파에는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같은 명망 높은 학자들이 확실한 구심점 역할을 했으나 기호사림파에는 이런 인물이 없었다. 세 번째는 명분론에서 서인들이 밀린 것이다. 영남사림파는 기호사림파를 척결해야할 훈구·척신파와 연관시켜 공격했으며 기호사림파는 이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동인·서인 구성인물 |
이이는 동서붕당의 폐해가 커지자 양측 간의 조정(조제보합調劑保合)을 시도했다. 그러나 선배 관료들이 명분론과 여론전에서 크게 밀리자 마지막에는 선배 관료 쪽으로 돌아섰다. 당시 기호사림파와 영남사림파는 지역과 학파를 결집시켜 세를 불리려는 노력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율곡학파(이이의 제자) 및 우계학파(성혼의 제자)가 기호사림파 쪽으로 전격 합류한 일은 기호사림파에게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율곡·우계학파의 합류는 기호사림파를 명실상부한 하나의 학파(學派)로 자리 잡게 했다. 남명학파 및 퇴계학파로 구성된 영남사림파에 맞설 수 있는 학문적 토양과 인적 자원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붕당사(朋黨史)에서 율곡 이이가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이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명분론에서 밀린 과거의 훈구·척신파가 개혁적 세력인 기호사림파와 맞설 수 있는 토양을 이이가 제공한 것이다.
선조는 당쟁 초기에 서인 편을 들었다. 선조가 신뢰하던 이이가 동인의 공격에 시달리다 본의 아니게 서인 편에 섰기 때문이었다. 이이를 따라 서인 편에 섰던 정철은 동인들을 꺾기 위해 애를 썼으나 이이가 적극적으로 가세해 주지 않았다. 이에 정철은 담양 창평으로 내려가 몸과 마음을 쉬게끔 하면서 정쟁에서 발을 뺐다.
정철은 43세 때인 1578년(선조 11)다시 벼슬길에 나섰다. 같은 해 11월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과 관련, 반대파인 동인에 맞서다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도군수 이수 뇌물사건은 동인인 허엽(許曄)이 서인 윤두수(尹斗壽)를 탄핵하면서 진도군수 이수로부터 쌀을 뇌물로 받았다고 고변한 사건이다.
이때 조정은 윤두수를 처벌하자는 이발(李潑) 등의 동인과 이를 간언이라고 하는 정철(鄭澈)등 서인이 서로에 맞서 격한 언쟁을 벌였다. 이때 이이(李珥)는 중도의 입장을 보였는데, 동인들의 간계(奸計)는 옳지 못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서인 쪽으로 가세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수 뇌물사건에서 동인의 주장이 세를 얻자 정철은 외직으로 나가게 됐다.
정철은 1580년(선조 13)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낸 뒤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했다. 그 다음 해(1584년) 율곡이 죽은 후 대사헌이 됐다. 율곡이 없는 서인의 우두머리가 돼 동인들에 맞섰으나 불가항력이었다.
결국 정철은 1585년에 조정에서 물러났다. 부모가 묻혀 있는 고양에 잠시 머무르다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했다. 이때 송강정에서 지은 가사들이 <사미인곡>·<속미인곡>등이다. 이들 가사들은 선조에 대한 그리움과 충성심을 바탕으로 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읊은 것이다.
문학작품으로서는 매우 아름답고 격조가 높다. 그렇지만 권력을 잃고 낙향한 정치인이 쓴 글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민망한 아부와 하소연’의 성격이 짙은 것도 사실이다. 후대에 정철을 옹호한 김상숙(영조 때의 문신)은 정철의 모든 작품을 우시연군지사(憂時戀君之詞:임금을 사랑한 시)라며 찬양했으나 동인들과 그 후손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송강정 계단 |
■저승사자로 변한 정철과 기축옥사의 피해자들
정철이 54세 때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정여립이 모반을 꾀했다는 고변이 올라오자 정철은 재빨리 움직였다. 연루자들을 색출해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글을 올림과 동시에 한양으로 달려갔다. 선조는 그런 정철을 ‘충신’이라 하며 조사책임자인 위관(委官, 최고수사관)에 임명했다.
역모 사건은 사안이 중대한 관계로 3정승 중에서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1589년 당시 3정승 중 좌의정 아계 이산해와 우의정 정언신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영남사림파 (동인)에 속해 있었다. 영의정 유전은 중립 성향이었지만 영남사림파에 가까웠다. 거기다 우의정 정언신은 동래정씨로서 정여립과 9촌 지간이었다.
우의정 정언신이 탄핵되자 선조는 그 자리에 정철을 앉혔다. 기호사림파(서인)의 지도자 정철이 우의정 겸 위관으로 임명돼 영남사림파(동인) 인물인 정여립의 반역사건을 조사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됐다. 동인들에게 원한이 사무쳤던 정철은 정여립 반역사건을 기호사림파 인사들을 제거하고 숙청하는데 철저히 이용했다.
당시 호남사림은 영남사림파를 지지하는 화담 서경덕(전라右도) 계열과 기호사림파를 지지하는 면앙정 송순(전라左도) 계열로 양분돼 있었다. 화담 서경덕 계열에는 동·서인 분당 때 영남사림파에 가담했던 이발·이길 형제 및 정개청 등이 있었다. 반면 면앙정 송순 계열에는 그의 제자들과 정철, 고경명, 김천일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정철 시비 |
◇이발(李潑)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은 동인의 차세대 지도자였던 대사간(정3품, 오늘날의 감사원장격) 이발·이길 형제를 죽였다. 이 와중에 이발형제의 82세 된 노모와 8세 난 아들이 고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발의 아들과 사위, 사촌동생 이급도 죽임을 당했다. 기축옥사로 광산이씨 가문은 대가 거의 끊길 지경에 달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빼앗겼다.
이발(1544~1589)은 전라도 남평에서 태어났다. 1568년, 과거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584년에 대사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인사를 책임지는 이조 정랑으로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을 다수 기용하여 자연스럽게 동인의 지도자가 됐다. 동인이었지만 후일에 서인의 지도자가 된 이이를 존경해 각별한 사이를 유지했다.
이발은 1584년 동인과 서인을 화해시키려 애쓴 이이가 죽자 서인의 영수 심의겸을 탄핵해 파직시켰다. 이를 계기로 동인이 조정을 장악하지만 서인들과의 알력으로 기축년 9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한 달 뒤에 기축옥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발은 정여립과 공모했다는 의혹을 받아 종성으로 유배됐다.
그러나 문초 과정에서 정여립과의 연루 의혹이 제기돼 한양으로 다시 끌려와 고문을 받다가 죽고 말았다. 후세사람들은 정철이 자기 원한을 풀기 위해 이발과 이발 집안사람들을 처참하게 죽였다고 여긴다.
전해오는 말로는 정철이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러 가는 길에 남평에 있는 이발의 집에 들렸다고 한다. 이때 이발은 여덟 살이었고 정철은 열여섯 살이었다. 이발이 다섯 살 먹은 동생 이길과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이를 구경하던 정철이 훈수를 했다. 그러자 이발 형제가 달려들어 “역적놈의 자식이 훈수를 한다”며 정철의 턱에 나있는 수염을 뽑아버렸다고 한다.
이때 정철은 이발 형제에게 원한을 품게 됐고 결국 기축옥사 때 한풀이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축옥사 이후 서인들이 꾸며낸 말일 가능성이 크다. 어린 아이에 불과했던 이발 형제들이 건장한 청년인 정철을 상대로 수염을 뽑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진도에는 광산이씨가 130여 가구 살고 있다. 기축옥사 때 도망 온 이발의 후손들이다. 진도군 임회면에는 광산 이씨들이 기축옥사 때 피신해 살았다는 피동(避洞)이란 동네가 있다. 이발의 조카 이선화(璿華)가 진도 지산면 관마리에 숨어살다가 그의 아들 보세(寶世)가 이곳으로 왔다. 그 이후 마을이름이 피동이 됐다고 한다.
이발은 가족이 모조리 잡혀가기 직전에 자신의 아들과 종의 아들의 옷을 바꿔 입혔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아들 원섭(元燮)은 제주로 도망가다가 진도 고군면 원포항에 잠시 들렸다. 진도사람들은 원섭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그를 도왔다. 원섭은 이에 진도에 정착했다.
이발 집안과 관련된 나무가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 있다. 수령이 600년 정도 된 왕 버드나무인데 이 나무는 괘고유(掛鼓柳)라 불린다. 필문 이선재 선생이 살았던 원산동 만산마을은 조선왕조 초기 가장 많은 과거 급제자를 냈다. 마을 사람들은 동네 어구에 있던 왕 버드나무에 장원급제를 축하는 북을 매달아 쳤기에 ‘북을 걸어놓은 버드나무’(괘고유)라 했다고 한다.
이발과 집안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자 이 마을에 살던 광산 이씨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 버드나무도 말라 죽었다. 그러나 이발 형제가 1694년 신원 복관되고 정려가 내려지자 죽었던 나무에서 100여년 만에 새순이 돋아 나왔다고 한다. 이 나무는 지난 1998년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됐다.
이발의 집은 당시 남평군 산포면 등수리 등계마을 483번지에 있었다. 조선시대에 역모가 일어나면 관아에서는 역모 가담자의 집을 불 질러 버리고 연못을 팠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 연못 위에 다시 동네가 들어섰다. 그 탓에 이발의 집이 어느 곳에 있었는지 가늠하기가 힘들다.
식영정 서하당 |
◇최영경(崔永慶)
전남 무안에서 은거하던 화담학파 정개청과 경남 진주에서 은거하던 남명학파 최영경 역시 역모자로 몰려 처형당했다. 정개청은 정여립의 집터를 살펴봐 주었다는 이유로, 최영경은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정여립의 반역음모에는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길삼봉’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정철은 최영경을 길삼봉으로 몰았다.
최영경은 옥중에서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최영경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병에 걸려 죽었다는 설과 자살설(김상헌의 <석실어록>), 독살설(남하정<동소만록>)등이 있다. <선조실록>에는 선조가 “내가 이 무렵의 일을 알 수가 없고 또한 누구의 소행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영경이 독물로 살해된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한 대목이 있다.
이는 서인 측 사람들이 최영경을 정여립반역사건의 주모자인 길삼봉과 무리하게 연결시키다가 조작이 탄로 날 것을 염려해 독살시켜버렸다는 세간의 의혹이 사실일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당시 최영경의 동생 최여경은 조정의 처사에 대한 불만을 담은 편지를 형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를 본 선조의 분노를 사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정개청(鄭介淸)
곤재(困齋) 정개청(鄭介靑)은 1529년 봉산 훈도 정세웅과 어머니 금성 나씨 사이에서 나주 금성산 아래 대곡동에서 태어났다. 정개청의 7대조인 정봉송은 고려말년 영동정이라는 벼슬에 있다가 나주로 귀양을 와 정착했다. 정개청의 아버지 정세웅은 훈도이기는 했지만 살림살이는 형편이 없었다.
정세웅은 무안에 있는 심의겸의 농장을 관리하며 살았는데 심의겸의 배려로 봉산훈도(정9품)의 관직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을 면치 못해 정개청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불우함의 연속이었다. 정개청은 젊어서부터 과거공부에 열중했다. 그러나 가문이 미천해 벼슬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제주도로 건너가 토굴을 짓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문을 닦았다. 역사, 천문 지리, 의학, 복서(점치는 것), 산수, 병법, 가무 등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나주 곡강촌(나주시 동강면)에서 살다가 1570년경에는 무안군(지금은 함평군)엄다(淹潭)면 제동마을에 윤암정사를 짓고 후학양성에 힘썼다.
1574년 전라 감사 박민헌, 1583년에는 호남 출신의 영의정 박순이 그를 천거했으나 관직을 사양했다. 벼슬자리에 오른 것은 이산해의 천거로 나이 60에 곡성 현감을 지낸 것이 전부다. 정개청은 고향 나주에서 학문 정진과 후학 양성에만 힘썼다.
1589년, 정여립의 반역사건이 터지면서 정개청은 한양으로 끌려가 국문을 받게 된다. 정개청은 정여립과 약간의 교류가 있었고 집터를 봐준 일이 있었다. 정철은 그것이 역모를 꾸민 것과 관련이 있다 여기고 반역자로 엮었다. 조사결과 정개청의 모반 연루는 풀렸다.
그러나 정철은 정개청이 쓴 논설문 <동한절의진송청담설>의 일부 내용이 임금에 대한 절의를 꺾어도 된다는 뜻을 담고 있어서 매우 불순하다고 우겼다. 결국 선조는 정개청을 함경도 경원의 아산보에 유배 보냈는데 정개청은 국문 받을 때의 상처가 악화돼 유배지에서 6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정개청은 <우득록>(愚得錄)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우득록>은 ‘어리석어서 늦게 얻은 학문을 정리한 책’이라는 의미다. 선조는 <우득록>을 읽어본 뒤에 “이것은 옛 사람의 학문을 말하는 책이니 돌려주어라”라고 명했다. 정개청의 사상이 주자 사상에 충실했을 뿐 배절(背節)과는 거리가 멀다는 선조도 인정한 셈이다.
함평 자산서원 표석 |
정개청을 흠모했던 제자들은 1616년 6월 4일 광해군의 윤허를 받아 정개청을 배향하고 후학을 기르기 위해 당시 무안군(현재는 함평군) 엄다면 제동마을에 자산서원을 세웠다. 그러나 자산서원은 당쟁 때문에 수난을 거듭해 겪었다. 광해군 때 사액을 받은 자산 서원은 서인이 집권하면 헐리고 남인이 집권하면 세우고 하면서 무려 여섯 번이나 헐렸다가 다시 지어졌다.
숙종은 정개청을 기리는 제문까지 직접 지었다. 그러나 노론(서인)이 집권하면 자산서원은 으레 헐리게 됐다. 그런 배경 중의 하나는 남인의 주요 인물이었던 윤선도가 이발의 조카였다는 점이다. 윤선도는 기축옥사 때 죽은 인물들을 높이면서 정개청을 높였다. 윤선도가 정치적으로 몰락하면 죽은 정개청 역시 몰락했던 것이다.
기축옥사 이후 정개청의 가문 고성 정씨와 이발의 가문 광산 이씨는 정철의 가문 연일 정씨와 앙숙지간이 됐다. 기축옥사 이후 400여년이 지나도록 고성 정씨와 광산 이씨는 연일 정씨와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함평 자산서원 모습. |
■정여립의 반역음모와 기축옥사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은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백(仁伯), 전주(全州) 출신이다. 정극량(鄭克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세완(鄭世玩)이고, 아버지는 첨정 정희증(鄭希曾)이다. 정여립은 성정이 과격했으나 두뇌가 매우 명석했다. 1570년(선조 2)에 문과에 급제했다. 급제 이후 성균관 학유, 사간원 정언, 예조 좌랑을 거쳐 홍문관 수찬에 올랐다.
서인으로서 이이와 성혼의 후원을 받았으나 이이가 죽은 뒤 동인 편에 서서 이이를 비롯 성혼, 박순을 비판했다. 선조가 이를 불쾌하게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세력을 확장시켰다. 1587년 왜구들이 전라도 손죽도(損竹島)를 침범해,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이 도움을 요청하자 대동계를 동원해 물리치기도 했다.
1589년 정여립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조정에 올라갔다. 조정이 군사를 급히 보내 체포하려 하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자살하고 말았다. 동인은 정여립이 역모를 꾀할 리 없다고 옹호했다. 사실 역모라 할 뚜렷한 증거도 없었다. 그러나 정여립이 자살함으로써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말았다.
동인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정철이 위관이 돼 역모사건을 조사하면서 호남지역 사림을 포함한 1천 여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발의 외가인 해남 윤씨와 인척관계에 있던 미암 유희춘 집안이나 나주 탐진 최씨 최부(崔溥)의 집안 등도 모두 동인계 인맥으로 분류돼 이때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밖에도 해남 윤씨, 나주 나씨, 창녕 조씨 등 수많은 전라右도 호남 사림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옥사가 끝나가던 1591년 무렵 호남 지역 내 영남사림파 지지 가문들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때 광주지역 사림들은 서인계에 속했는데 기축옥사 이후 2년만인 1591년 정철이 실각하고 동인계가 집권하면서 정치보복을 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기축옥사는 호남사림의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정여립 반역사건으로 이발을 위시한 호남지역 동인들이 몰살을 당했다. 기축옥사 이후 호남에서는 동인세력의 씨가 말라버렸다. 대신 호남지역 서인이 득세하게 됐다. 기축옥사는 경기·충청 출신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서인세력에 호남의 서인들이 주요한 세력으로 가세하게 된 계기가 됐다.
■정철의 몰락
정여립의 옥사는 서인이 동인을 초토화시킨 사건이었다. 도끼를 휘두른 사람은 정철이었다. 정철의 말 한마디에 생사가 갈렸다. 정철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선조는 다시 서인을 견제할 필요를 느꼈다. 사실 기축옥사는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세력을 축소하기 위해 선조가 의도적으로 실체가 모호한 정여립 역모사건을 부풀린 측면이 있다.
그래서 선조는 북인인 이산해만으로는 정철을 견제하기 힘들다고 판단해 남인 류성용을 불러들였다.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정철, 우의정 류성용으로 의정부 체제가 갖춰진 것이다. 당시 선조는 인빈 김씨에 빠져 인빈의 소생 신성군(信城君)에게 왕위를 넘겨주려 마음먹었다. 그러나 조정의 분위기는 광해군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1591년 우의정으로 임명된 류성룡이 정철을 찾아와 경연석상에서 세자책봉 문제를 선조에게 건의하자고 했다. 정철은 선조에게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제기했다. 그런데 정작 이 자리에는 이산해가 나오지 않았다. 류성용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선조의 분노가 정철에게 향했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데 경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이산해 영정 |
왜 류성용이 정철을 꼬드겨 건저문제를 제기하자고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산해의 조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선조는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며 정철을 파직했다. 선조는 정철을 파직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철을 평가했다.
‘정철은 음으로 호남지방 유생을 움직여 저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자는 일대에 이름난 사대부일지라도 모두 역적으로 몰아 기필코 죽이려고 했다. 그 간사한 꾀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저희들의 속내가 모두 드러나서 사세가 궁하게 되자 또 대간을 시켜서 군사를 협박하여 마침내 저의 뜻대로 하였으니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도 옛날의 간신들 중에서 그 유례가 드물 것이다. 따라서 그 마음씨가 참혹하고 독하기가 칼날보다 더하니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선조는 정철을 앞장세워 동인들을 멸절시켰다. 그런데 그 뒤에는 정철을 내치면서 모든 책임을 정철에게 뒤집어 씌웠다. 사실 이발의 노모와 아들을 죽이도록 명령한 사람은 선조였다. 정철은 최영경을 풀어주려 했으나 선조가 거부했다. 선조는 정언신도 처형하려 했다. 그러나 정철이 말려서 유배형이 됐다. 정언신은 결국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왕권강화를 위해 신하들을 대량 살육하고 그 책임을 떠넘기는 선조의 간악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철은 명천(明川)으로 유배됐다가 다시 강계(江界)로 이배됐다. 1592년(선조 25)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났다. 왜군이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군사들을 모으는 체찰사로 임명돼 활동하다가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서 머물다 5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해지고 있다.
충북 진천에 있는 정철묘소 |
도움말/이해준, 김정호, 이한우, 이덕일, 신정일
사진제공/담양군, 위직량, 문화재청, 리베로
그래픽/류기영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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