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뿌리

潑선조님 정여립 그리고 정철과 이항복

by 이덕휴-dhleepaul 2021. 7. 26.

의주 목사(義州牧使) 서익(徐益)이 상소를 올렸다.

"신은 단지 일개의 외신(外臣)이니 내정(內庭)의 일에 관계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품은 생각을 말하지 않는 것은 신하의 큰 죄이므로 부월(鈇鉞)의 주벌을 피하지 않고 진달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참람스러움을 용서하여 주소서.

신이 생각건대 국운이 중간에 비색해져서 사론(土論)이 서로 갈라졌는데 처음에는 큰 일이 아니었는데도 점차 고질(痼疾)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논의가 날로 성하여가고 공격이 서로 잇달았는데 정(正)으로 사(邪)를 공격하는 것도 오히려 불행이라 하는 것이거든 하물며 사가 아닌데이겠습니까. 신이 계속 저보(邸報)를 보니 한두 대신이 서로 잇따라 휴가 중에 있고 몇몇 어진 재상들이 함께 기척(譏斥)당하고 있었습니다. 신은 이를 보고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어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야흐로 서로를 조화시켜 보합(保合)을 이룸으로써 사류를 안정시키려 하고 있는데 어떤 불량한 자가 있기에 다시 이 단서를 여는 것입니까.

도로에서 서로 전하는 말을 번거롭게 위에 아뢰는 것이 마땅치 않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사실과 다르더라도 무슨 해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듣건대, 정여립(鄭汝立)이 경연에서 이이(李珥)를 공격하고 드디어 박순(朴淳)·정철(鄭澈)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박순정철이 자리에 있기가 미안하여 은총을 피해 물러갔다고 하니, 그 말이 사실입니까?

이 일은 다른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어도 여립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립은 본래 이이의 문하생으로서 몸에 학사(學士)의 명함(名銜)을 띠고 조정에 들어와 천안(天彦)을 뵙게 된 것이 모두 이이의 힘이었습니다. 삼찬(三竄)을 처음 정하고 나서 이이를 소환(召還)했을 때 여립전주(全州)의 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선비가 가서 만나보고 이이의 사람됨을 물었더니, 여립이 뜨락에 있는 감을 가리키면서 ‘공자(孔子)는 다 익은 감이라면 율곡(栗谷)은 반쯤 익은 감이다. 이 반쯤 익은 것이 다 익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율곡은 진실로 성인(聖人)이다.’ 하였는데, 율곡이이의 도호(道號)입니다. 또 그가 ‘변사정(邊士貞)은 바로 천하사(天下士)이다. 삼현(三賢)050) 을 구원한 소장 하나는 마땅히 만세를 유전하여도 썩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발(李潑)이 항상 스승의 도리로 이이를 섬겼는데 논의가 서로 일치하다 않게 되자 드디어 공격할 마음을 품고 조정을 제멋대로 휘두르면서 옳지 않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조정이 안정되지 못할 화환(禍患)을 빚어냈으니 이발은 큰 죄를 졌다.’ 하였습니다. 신이 그때 그 이웃에 있었는데 사인이 이 말을 신에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학사(學士)051) 가 고전들을 읽었을 텐데 어찌 그리도 경솔한가.’ 하였습니다.

신은 그 뒤 오래지 않아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왔는데, 그때 이이는 병중에 있었습니다. 저와 친한 사람이 여립이이에게 보낸 편지를 신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편지에 ‘삼찬(三竄)은 이미 결정되었지만 거간(巨奸)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뒷날의 근심이 오늘의 근심보다 더 심할 것이다. 빨리 그들을 도모해야 한다.’ 하였으니, 거간이란 유성룡(柳成龍)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를 보고 신이 사사로이 ‘정가(鄭哥)052) 의 기습(氣習)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아 문노공(文潞公)의 일053) 로 다른 사람을 면려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연루시켜 단련함으로써 자신을 논박한 사람을 죄주게 하기를 힘쓰고 있단 말인가. 더구나 유성룡은 본래 이이를 공격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전에도 여립이었고 지금도 같은 여립인데 어찌하여 지금에 와서는 직접 이이를 팔고서도 부끄러움을 모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사우(師友)로 지냈으면서 우의가 생사(生死)에 따라 달라지고 언론과 풍지(風旨)를 시세에 따라 달리하면서도 ‘나는 글을 읽는 군자이다.’고 한들,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도리어 소인이라고 이름 붙일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어떤 사람이 이이의 심사(心事)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논하였다고 합니다. 아, 이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까? 군자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부모를 잊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 말을 한 자는 아마 부모도 없는가 봅니다. 언자(言者)는 이이심의겸과 사귄 한 가지 일만으로도 족히 의심을 받을 만하다고 합니다. 이이심의겸과 사귄 것이 과연 죄라면, 어째서 그때 논박하지 않고 도리어 분주하게 이이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제자(弟子)의 예를 다하다가 오늘에 와서야 알고서 이를 끌어다가 그를 공격하는 자료로 삼는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의 말을 듣는 자도 어쩌면 그렇게 급급(岌岌)합니까.

신이 일찍이 유성룡과 더불어 이이에 대해 논한 일이 있는데, 성룡이 ‘평탄 평이(平坦平易)한 것이 그의 장점이나 한스러운 점은 변경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 고금 천하에 어찌 평탄 평이한 소인이 있겠습니까. 그의 행사(行事)로 논하여 소탈(踈脫)함을 면할 수 없다고 한다면 신과 같이 이이를 존경하는 자라도 두 손으로 받들어 인정하겠지만, 만약 그의 심사(心事)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한다면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한결같은 말로 이이를 두호할 것입니다. 박순정철은 모두 청명(淸名)과 아망(雅望)으로 성명의 지우를 받아 경상(卿相)의 자리에 있으면서 품은 생각은 아뢰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한 것은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미처 하지 못한 것은 삼찬(三竄)을 방환하자고 청하는 한 가지 일 뿐입니다. 가령 이이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전하에게 계속 간쟁하였을 것입니다.

아, 세 신하에게 진실로 죄가 있지만 유배까지 시킨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 송응개(宋應漑)의 말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라서 사람과 귀신이 모두 싫어하였습니다만, 그의 직이 간관(諫官)으로 이름지어졌으니 어떻게 그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고서 그 말에 죄를 줄 수가 있겠습니까. 허봉(許篈)유명한 아버지054) 의 아들로서 문장의 재주가 있어 약관(弱冠)에 과거에 올라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여 뜻대로 된 일은 많으나 일에 대한 경험은 적으니 비록 허물이 있더라도 어찌 가혹하게 탓할 수가 있겠습니까. 갑산(甲山)은 본디 험한 곳으로 이름이 나서 그곳에서 생장한 사람이 아니면 병들지 않는 자가 드물기 때문에 전후 귀양간 자가 살아서 돌아온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젊은 재사(才士)가 진실로 아침 이슬처럼 사라진다면 성덕(聖德)에 누가 됨이 어찌 많지 않겠습니까.

신은 허봉과 나이에 차이가 나고 승침(升沈)이 달라서 다만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한두 번 얼굴을 보았을 뿐 술잔을 들고 서로 마주해서 은근한 환담을 나누어 본 일이 없는데도 오히려 곧 죽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될까 걱정하는데, 더구나 그를 친애하는 사람들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이것이 언론이 날로 일어나 중지되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전하를 아침 저녁으로 가까이 모시던 신하로서 형극(荊棘)의 험난한 길을 타개하고 이매(魑魅)같은 무리들을 방어하였습니다. 신은 전하께서도 마음으로는 불안해 하셨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난해 주청사(奏請使)가 돌아오자 큰 은사(恩赦)를 내려 마땅히 사죄에 처해야 할 죄수들까지 다 사면되었으므로 도성 사람들이 모두 삼찬(三竄)도 사유(赦宥)받을 것이라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해사(該司)에서 이는 국가에 관계된 일이라 하여 응당 방면해야 될 대상에 넣지 않았습니다. 이 법은 영갑(令甲)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이처럼 오래 고수하면서 고치지 않는 것입니까?

신이 그때 옥당(玉堂)에 봉직하고 있으면서 동료들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진달하려고 했는데, 들리는 말에 정철이 먼저 일어나 상신(相臣)에게 말하고 전하에게 진달하여 놓아주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대신이 말하려 하니 옥당이 기필코 할 것이 없겠다.’ 하여 드디어 중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일이 오래 되어도 아무 소식이 없기에 신이 정철을 만나서 물어보니, ‘상신에게 고했으나 상신이 아직 아뢰지 않았는데 아뢰어야 하겠다.’ 하였습니다. 곧 이어 듣건대, 박순이 궐하(闕下)에서 양상(兩相)055) 에게 말했으나 의논하여 실행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정철이 강개한 말로 신에게 ‘차라리 내가 경연에서 몸소 진달해야 하겠지만 전에 이런 요청이 있었을 때 상께서 너그러이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반드시 상신을 통해야만 그 일이 무게가 있게 될 것이다. 상신들과 다시 의논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오래지 않아 신이 은혜를 받아 외직에 보임되었으므로 그 뒤의 일은 신이 실로 모릅니다. 신이 정철을 만나 삼찬(三竄)의 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잔을 멈추고 탄식을 하면서 이어 비창하게 신음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정철을 모르는 자들은 서로 다투어 죄를 그에게 돌려 온갖 비방이 모두 정철의 한몸에 집중되었으니, 철의 처지로서는 다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술을 좋아한다는 비방에 대해서는 과연 그런 병통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이이가 살아 있을 때 탑전에서 진달하여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책망하게 하려 했었는데, 이이가 마침 홀연히 죽어서 겨를이 없었습니다. 정철이 술을 좋아하는 잘못을 논한 것은 한 가지이지만, 이에 대해 한 말에는 공사(公私)와 애오(愛惡)의 다름이 있으니,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정철이 술을 좋아하는 것은 귀중한 백옥(白玉)에 작은 흠집이 있는 격인 것으로 타산(他山)의 돌로서 색깔이 맑은 것과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산보(李山甫)박점(朴漸)의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은 종들까지도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언자(言者)들이 용박(庸駁)하다고 하니 지금의 용박은 옛날의 용박과 다른 모양입니다. 지금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고 붕우(朋友)에게 신의있는 사람을 용박이라 하니, 신은 옛날의 용박은 언자들이 해당된다고 여깁니다. 전에 이이를 공격할 때 안민학(安敏學)이배달(李培達)이이의 문하에 왕래하였다는 이유로 부도(不道)라는 명목을 붙여 공격하더니, 이번에도 이 수단을 쓰고 있습니다.

안민학이배달의 사람됨을 신은 사실 잘 모르지만 산보와 같은 경우는 하늘이 부여한 품성을 온전히 지니고 있으며 충후(忠厚)하고 신근(愼謹)한 것이 그 집안의 법도입니다. 그의 계부(季父)인 지함(之涵)056) 도 일찍이 경외받던 사람이었으니, 이와 같은 어진 선비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말을 더듬는 병이 있어 말에 문채(文彩)가 없기 때문에 남에게 말을 듣고 있으니, 아마도 이 때문인 듯합니다. 신은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깊이 살피소서.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좌의정 노수신은 경세 제민(經世濟民)의 학술을 쌓았고 교악(喬岳) 같은 중망(衆望)을 지닌 데다가 성명의 지우를 받아 깊이 묘당(廟堂)에 올라 있으니, 사림(士林)을 합일시키고 조정을 화하게 하여 국가를 안정시키고 사직을 높이는 것이 그의 마음이요 직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고 서둘러 구차스레 사면할 마음만 품고 있으니 이 어찌 까닭이 없겠습니까. 수신(守愼)의 후덕과 중망은 처음부터 양가(兩家)057) 와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양가가 모두 자기 편을 도와주어 무게를 더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자 양가에서 모두 불평하는 뜻을 품고 이를 말과 낯빛에 드러내는 자까지 있었습니다. 수신의 입장에서는 양쪽을 모두 보존시키려면 조정에서 공격이 그치지 않게 될 것이고, 양쪽을 다 제거하자니 일을 그르치는 자가 나와서 한 나라가 텅 비게 될 것이며, 한 쪽을 보존하고 한 쪽을 제거하자니 양쪽 모두 사류(士類)인데 어떻게 제거할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양쪽을 화해시켜 보존하게 함으로써 진정시킨 다음 그 상태가 오래되면 자연 안정될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와서는 양가 사이에 근거 없는 논의가 더욱 치성해서 마치 물이 깊어지고 불이 치열해지듯이 쇠망과 위란의 재앙이 지척에 닥쳤습니다. 이것을 구제해 보자니 힘이 미치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러 있자니 배운 학문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육계(苦肉計)를 세우고 있으니 그 실정이 애닯다고 하겠습니다. 신은 노수신의 거취에 국가의 경중이 달려 있다고 생각되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신이 삼가 듣건대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은 옳은 것이 있다.’고 하였으니,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기는 하나 원컨대 한 번의 옳은 것을 아뢰겠습니다. 신이 듣건대 아들이 서로 화합하지 않으면 부모가 화해시킨다고 합니다. 아비된 입장에서 자식들이 서로 불화한 경우를 당하는 것은 비상한 변고이니 비상한 변고를 당한 사람은 반드시 비상한 도리로 조처해야 합니다. 자식에 대해 편벽되게 좋아하거나 성을 내서 한쪽을 기쁘게 하거나 한쪽을 슬프게 해서는 안 되며 죄책(罪責)을 엄하게 해서 은혜와 자애를 상하게 해서도 안 됩니다. 세상에 어떤 아비 하나가 자식들이 다투는 변을 당하였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따르지 않고 화를 내면 낼수록 더욱 화합하지를 않자, 그 아비가 언어(言語)나 위노(威怒)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여기고 이에 길일(吉日)을 택하여 술을 빚어놓고 마루에 자리를 깔고 아들들에게 앉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리고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너희들은 내 소생이 아니냐?’ 하니, 여러 아들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예, 그렇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너희들은 동기(同氣)에서 형체를 나눈 자식이 아니냐?’ 하니, 여러 아들들이 ‘예, 그렇습니다.’ 하였습니다. 아비가 다시 ‘너희들이 이미 나에게서 나온 자식이고 동기에서 형체가 나뉜 것임을 안다면 무슨 까닭에 이처럼 사소한 사심(私心)을 품고 윤기(倫紀)를 그르쳐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우리 가도(家道)를 어지럽히는가?’ 하면서 눈물을 그치지 않으니, 여러 아들들도 아비의 말에 감격하고 아비의 눈물이 뚝뚝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는 서로 자리에서 일어나 통곡하고 절하면서 ‘아버님, 저희들이 불초(不肖)했습니다. 아버님, 눈물을 멈추십시오. 아버님의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아비가 ‘아들들아, 이리 오라. 내가 너희들과 한 잔 하겠다.’ 하고, 아비가 먼저 마시고 차례로 아들들이 마시는데 모두 대작(大酌)하였습니다. 취한 뒤에는 형은 동생의 손을 잡고 동생은 형의 옷을 부추기면서 서로 노래를 부르면서 그쳤습니다. 그 뒤 제각기 자기 아들들을 모아놓고 ‘내가 오늘에야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면 내가 짐승으로 평생을 마칠 뻔하였다.’ 하니, 그 자식들도 각기 아비에게 절하면서 ‘저희들도 각각 어버이가 있어 사원(私怨)으로 삼고 풀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석연히 풀렸습니다.’ 하고 들어가 조부(祖父)에게 문안드렸습니다. 이 뒤로 그 형제는 서로 수족(手足)처럼 사랑하고 금슬(琴瑟)처럼 즐거워하였으므로 한 집안에 화기가 애애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형은 아우를 원수처럼 생각하고 아우도 형을 역시 원수로 여겨 형의 아들은 동생의 아들을 공격하고 동생의 아들은 형의 아들을 공격하여 장차 몇 대가 지나도록 끊어지지 않아 끝내는 그 집안이 복패(覆敗)되고 말 것입니다. 아마 오늘날의 신하들을 바야흐로 전하를 아버지처럼 여기고 있을 것이고 전하께서도 신하들을 아들처럼 여기고 있을 것인데 그들을 화해시켜 주지 않는다면 신은 전하께서 한 아비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내 자신이 진실로 지성으로 한다면 금석(金石)도 꿰뚫을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금석이 아닌 사람이 어찌 감동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먼저 유배한 신하들을 방환시켜 집에서 늙게 하시고, 다음에는 근시(近侍)로서 외직에 보임되어 나간 사람들을 불러 다시 좌우에 두시고, 박순정철을 위안하여 그 직을 회복시켜 주소서. 그리고 나서 대신과 재상 및 근시들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해서 전교하기를 ‘그대들이 나를 임금으로 대하고 아비로 대하니 내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이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같은 조정에서 벼슬하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인데 이와 같이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온화한 얼굴 부드러운 말로 마음을 열고, 정성을 다해 의리의 명분으로써 밝히고, 힘을 합하여 공경하는 아름다움으로써 효유한다면 마음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역말보다도 빠른 것이어서 모두가 기뻐하고 감읍(感泣)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난날 서로 좋아하지 않았던 마음이 어디에서 다시 생겨나겠습니까. 지난날 더없이 시끄럽던 분쟁은 단지 하나의 웃음거리로 될 뿐입니다. 그렇게 한 뒤에 담박한 것은 권장하고 조급한 것은 억제하며 화평하고 공정한 사람은 진출시키고 망령되고 경박한 무리들을 물리침은 물론 양가(兩家)에 혹 지난날처럼 바르지 못한 자가 있는 경우에는 이들을 징계하여 동요되지 않게 한다면 신은 한 달 사이에 조정이 안정되고 사론(士論)이 통일되어 화평한 기상을 모이게 할 수가 있게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만약 이렇게 계책을 세우지 않고 위세와 노여움으로 안정시키려 한다면 한번 성공하고 한번 실패하는 사이에 양가의 자제들이 대대로 적이 되어, 전하의 자손 만대의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신이 조정에 있을 적에 잠잠히 양가의 기색(氣色)을 살펴보니, 모두가 서로 용납하지 않는 것을 절의(節義)에 죽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혹 화평에 대한 의논을 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이 사람을 저편으로 본다.’ 하고 ‘나는 저 사람을 이편으로 본다.’ 하면서 좌우에서 훼방하고 비난하기를 있는 힘을 다하여 합니다. 이 때문에 전하께서 한 아비와 같은 계책을 쓴 뒤에야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영세토록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여기에 유념하신다면 국가의 대계를 위해 더 없는 다행이겠습니다.

또 신이 의혹스러운 점이 있어 전하께 앙달하고자 합니다. 심의겸(沈義謙)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 신은 진실로 잘 알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의겸을 간괴(奸魁)로 여겨 그와 사귀는 자는 모두 그르다고 한다면, 의겸은 신하로서 막대한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탈없이 황금 띠를 두르고 여전히 재상의 반열에 있어 마치 죄가 없는 자와 같습니다. 과연 죄가 있다면 그 악을 헤아려 죄를 밝히고 경중을 가늠하여 율(律)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될 것이요, 벼슬을 높이고 총애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죄가 없다면 신하가 비록 미천한 존재이긴 하지만 전하께서 어찌 간(奸)이란 글자를 씌울 수 있겠습니까. 또 죄가 있기는 하지만 선후(先後)의 지친(至親)이기 때문에 차마 형벌을 가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신에게도 한마디 할 말이 있습니다.

형정(刑政)은 조종(祖宗)께서 정하신 것이요 온 나라 사람이 지켜야 하는 것이니, 죄가 진실로 크면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 죄상이 그래도 용서할 만한 것이라면 그를 한가한 자리에 두어 국정(國政)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고 성인(聖人)의 교화 속에서 노닐게 하며 녹봉이나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찌 꼭 분명히 드러내어 말할 만한 것이 없는데 갑자기 죄를 알려 그로 하여금 스스로 용납될 길이 없게 할 것이 있겠습니까.

황천(皇天)이 아래로 임하시니 무슨 물건인들 그것을 보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오직 아무 말이 없어도 모든 만류(萬類)가 편안히 믿습니다. 전하는 하늘을 본받는 분이 아니십니까. 신은 글이 문장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말이 이치에 맞지를 않으니 진실로 기롱과 비웃음만을 살 뿐 성명에 아무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구구한 한 마음은 국사(國士)로서 보답058) 하려고 합니다. 신은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사랑을 내리시어 받아들여 주소서. 신은 상이 계신 궁궐을 바라봄에 지극한 비애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9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419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 [註 050]삼현(三賢) : 이이(李珥)·성혼(成渾)·박순(朴淳)을 말한다. 삼찬이 언관으로 있으면서 이이(李珥) 등을 공격할 때 변사정이 상소하여 그들을 공격하고 이이 등을 구원하였다.
  • [註 051]학사(學士) : 정여립을 가리킴.
  • [註 052]정가(鄭哥) : 여립을 가리킴.
  • [註 053]문노공(文潞公)의 일 : 일을 너무 까다롭게 밝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뜻. 문노공은 송나라 초기의 명재상인 노국공(魯國公) 문언박(文彦博)을 말한다. 당시 가창조(買昌朝)와 내시 무계융(武繼隆)이 결탁하여 사천관(司天官)을 시켜 재상이던 부필(富弼)을 모함하려 했는데, 문언박은 그 일에 배후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사천관 두 사람만을 문책하고 덮어두었다. 뒤에 그 일이 알려져 이유를 물으니 "그들을 처벌하면서 사건의 전모가 다 드러나 중궁(中宮)까지 불안하게 된다." 하였는데, 이를 가리킨 말이다. 《송사(宋史)》 권313.
  • [註 054]유명한 아버지 : 초당(草堂) 허엽(許曄)을 가리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청백리(淸白吏)에 올랐던 인물이다.
  • [註 055]양상(兩相) : 좌의정과 우의정.
  • [註 056]지함(之涵) :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을 말함.
  • [註 057]양가(兩家) : 동인과 서인임.
  • [註 058]국사(國士)로서 보답 : 자신을 알아준 데 대하여 목숨을 바쳐 보답하는 것.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예양(豫讓)이 ‘지백(知伯)은 나를 국사로서 대접해 주었다. 이 때문에 나도 국사로서 그에 보답하고자 하는 것이다.’ 했다." 했는데, 여기서 온 말이다.

성균관 유생 최희남(崔喜男)이 상소하기를,

"지난 기축년001) 에 국가가 불행하여 극히 흉악한 역적 정여립(鄭汝立)이 한 세상을 속여 명류(名流)들과 두루 사귀더니, 실직(失職)함을 원망하여 문득 불궤(不軌)를 도모해 몰래 군도(群盜)와 결탁했다가 일이 발각되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온 집안이 주륙(誅戮)되자 귀신이나 사람이나 모두 쾌하게 여겼는데, 다만 평소 조정에서 서로 알고 지내던 사우(士友)들이야 그의 뜻을 알았을 리 만무한데도, 분노를 품고 있던 한쪽 사람들이 보복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 겉으로는 역적을 토멸한다는 명분을 핑계로 해서 몰래 일망타진할 계책으로 거짓을 꾸며 죄에 얽어들이기에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그 물여우같은 정상을 신들이 번거롭게 아뢰지 않더라도 성명께서 통촉하신 것은, 이미 최영경(崔永慶)을 포증(褒贈)하신 데서도 나타났습니다.

간당의 괴수 정철(鄭澈)은 사류에게 버림을 받고는 이발(李潑) 등에게 이를 갈고 있다가 역변(逆變)을 듣자마자 그의 도당과 함께 기뻐 날뛰며 서로 경하하면서 기어이 이발 등을 멸족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몰래 백유함(白惟咸)·양천경(梁千頃) 같은 괴상한 무리들을 사주하여 연속 글을 올려 화(禍)를 엮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도 안옥(按獄)이 소루하여 이발 등이 요행히 면할까 염려하여 추관(推官)을 제거했습니다. 그래도 이발 등의 죄상이 끝내 드러나지 않자 몰래 문객(門客)을 보내 옥에 갇힌 죄수를 협박해 죽음을 면하게 해준다고 꾀어 그로 하여금 거짓말로 이발 등을 이끌어 대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국문할 즈음에는 내응(內應)했다는 말을 지어내어 공초의 말을 만들도록 하여, 끝내 무고한 사람들이 엄한 형장 아래에서 모조리 죽게 하였고 또 늙은 어미와 어린 아이로 하여금 모두 형신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때의 위관(委官)들은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위축되어, 간사한 무리들에게 순순히 따르면서 일찍이 형옥(刑獄)의 잘못을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나라를 그르친 죄를 유독 정철에게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삼봉(三峯)이란 이름을 가탁하여 임하(林下)의 선비를 죽이고, 옥사를 번복시킨다는 말을 만들어 무죄한 추관을 모함하고, 조야에 조금이라도 명성이 있는 자로서 자기들에게 붙지 않는 자는 끝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아, 천리와 공론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어서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신원하려는 의논이 발단되었습니다. 그러나 화를 두려워하는 습성이 다 제거되지 않아, 대신은 머뭇거리며 제지하여 미봉(彌縫)할 터전으로 삼고 삼사(三司)는 침묵을 지키고 나서지 않아 보신(保身)할 계책으로 삼고 있으니, 신은 통분스럽고 민망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최영경(崔永慶) 등을 신원(伸冤)하고 불쌍히 여겨 포상한 것은 유감이 없게 하였는데, 그 나머지 정개청(鄭介淸) 등의 원통함을 품은 무리에게는 원통함을 분명하게 씻어주는 은전을 입지 못하도록 해서야 되겠습니까. 더구나 이발(李潑)의 아들 이명철(李明哲)이 형벌을 참으며 아비를 구한 것과, 백진민(白振民)002) 형제가 바름을 지켜 스스로 죽은 것은, 전하께서 불쌍하게 여기시는 바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의 말은 지나치다."

하였다. 이항복(李恒福)기축 기사(己丑記事)를 상고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항복이 그때 문사 낭청(問事郞廳)이었고, 이 위관(委官)이었는데, 하루는 항복을 불러서 최영경의 옥사에 대해 물으니, 항복이 말하기를,

"옥사가 일어난 지 이미 해를 넘겼는데, 한 사람이라도 누가 영경을 가리켜 삼봉(三峯)이라 한 자가 있었습니까. 지금 아무런 단서도 없이 소문만 듣고 처사(處士)를 잡아가두었다가 불행하게도 죽는다면 반드시 공론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상공(相公)은 어떻게 그 책임을 면하겠습니까."

하였다. 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내가 영경과 평소 논의가 서로 다르기는 하였지만 어찌 서로 해치려고까지야 하겠소. 이는 본도에서 와전된 데서 나온 것이니, 나와 무슨 상관이겠소."

하니, 항복이 말하기를,

"상공께서 모함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좌시하고 구하지 않는 것이 어찌 추관(推官)의 체모라 하겠습니까. 역적을 국문하다는 명목하에 죄수가 옥에 가득하니, 추관이 감히 하나하나 심리하지는 못하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영경은 죄수 중에서도 더욱 죄명을 삼을 만한 근거가 없고, 또 이 사람은 효우(孝友)하는 처사니 어찌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이 말하기를,

"내가 극력 구원해야겠다."

하였다. 그 후 재차 국문할 때 영경이 당시의 일에 대해 대략 진술하고 또 성혼(成渾)과 논의가 다른 이유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국문을 마치고 이 물러나와 항복을 불러 발끈 성내며 말하기를,

"그대도 그 공사(供辭)를 보았겠지만 그게 무슨 말이오."

하니, 항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상공께서 불쾌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시사(時事)에 대해 언급한 것 때문이 아닙니까?"

하니, 이 그렇다고 하였다. 항복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상공은 당초 영경을 잘 모른 것입니다. 영경이 시배(時輩)들과 다른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의 논의가 다르다는 것은 재차 국문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엄히 국문하는 마당에서 구차스레 자신의 전일 소견을 모조리 버리고 좀스럽게 억지로 듣기 좋은 말을 꾸며대어 요행히 면하기를 바란다면 어찌 참된 영경이라 하겠습니까. 영경으로 논할 것 같으면 이번 공사에서도 처음 마음을 변치 않았으니 이것이 그의 고상한 점입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논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국문하는 것은 단지 삼봉인지의 여부만을 따질 뿐이니, 논의의 이동(異同)은 이 옥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소. 그 점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소."

하니, 수일 후에 이 또 묻기를,

"어느날 갑자기 형추(刑推)하라는 명이 있게 되면 미처 구하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나는 옥사에 골몰하느라 정신이 없으니, 그대가 나를 위해 차자를 초하여 대기해 주시오."

하니, 항복이 말하기를,

"이런 일을 어찌 남을 시켜 대신 초하라 하십니까. 상공이 직접 초해야 합니다."

하였다. 또 수일 후에 항복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미 구해낼 계책을 마련하여 차자의 초를 잡아 놓았고, 또 유 정승과도 약속이 되어 있소."

하였다. 항복이 말하기를,

"어떻게 약속하였습니까?"

하니, 이 말하기를,

"만약 형추하라는 명이 있게 되면 내가 급히 유상에게 알리어 연명(聯名)으로 차자를 올려 구하면 일이 잘 될 것이오."

하였다. 항복이 말하기를,

"유상과 과연 그렇게 약속하였습니까?"

하니, 이 말하기를,

"이미 굳게 약속이 되어 있소."

하였다. 그 후 공사(公事) 관계로 항복유성룡(柳成龍)의 집에 가게 되어 그 자리에서 최영경의 억울함을 극론하였는데, 성룡이 단지 몇 마디 말로 대답하므로, 항복이 인하여 말하기를,

"대신이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성룡이 말하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감히 구원하겠소."

하였다. 항복성룡과 약속했다는 말로써 묻고 싶었으나 사체에 구애되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항복은 항상 ‘영경을 끝내 털끝만큼도 해칠 생각이 없었고 구원하려는 뜻을 가졌었으며, 후세 공론의 죄인이 될까 두려워하는 기색이 얼굴과 말에 가득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 영남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최영경에게 죄를 씌워 죽인 것은 성혼(成渾)의 죄이다.’고 주장하였는데, 한준겸(韓浚謙)이 공언하기를 ‘당초에 영경에게 죄를 씌워 죽였다고 하는 것도 지어낸 말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또 성혼이 죄를 만들어 죽였다고 하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준겸의 형 한백겸(韓百謙)도 이 옥사에 연루되어 형신(刑訊)을 받고 멀리 귀양을 갔으므로, 준겸은 항상 옥사에 지나침이 많다고 말하였는데도 항복의 기록이 이러한 것은 대개 준겸이 공정한 마음으로 일에 임하여 발언하면서 형이 잘못 연루되어 죄를 입은 것을 혐의하여 끝내 묵묵히 있지 않은 것을 취한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7책 31권 3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6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정변(政變)

  • [註 001]기축년 : 1589 선조 22년.
  • [註 002]백진민(白振民) : 백유양(白惟讓)의 아들.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을 도체찰사(都體察使) 겸 도원수(都元帥)로 삼았다. 《실록(實錄)》을 살펴보건대 ‘이항복기축 역옥(己丑逆獄)003) 때에 악독한 정철과 함께 문사 낭청(問事郞廳)이 되었는데, 정철에게 「역적이 호남에서 일어나고, 서울에서도 일어나고 또 영남(嶺南)에서도 일어났다.」고 하여 사류(士類)들을 모두 죽이려고 하자, 정철이 기뻐서 상에게 아뢰니, 「이 말을 아는 자는 이 계책에 참여했던 자일 것이다. 경은 이 말을 누구에게 들었는가?」 하므로, 정철이 「이항복이 말했다.」 하였다. 그의 참독(慘毒)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정승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니, 당시의 일을 알 만하다.’고 하였다.

슬프다. 군소배(郡小輩)들이 허위를 날조하여 모함하는 말이 어찌 이처럼 심하단 말인가. 항복기축년 옥사 때 매번 죄를 논할 즈음에 이리저리 주선하여 그 덕에 온전히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았다. 또 항복이 지은 기축기사(己丑記事)》를 보면 더욱 항복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데도 참독하다고 하였으니, 역시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8책 34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677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실록》에 이르기를,

"이덕형의 아비가 문화 현령(文化縣令)으로 있을 때 덕형이 공명 고신첩(空名告身帖) 1백여 장을 빼내어 그 고을에서 소[牛] 수백 두를 사가지고 통진(通津) 농사(農舍)에서 방목하니 들이 온통 누렇게 변했다."

하고, 또 덕형이 반복해서 세력을 좇고 계속하여 수시로 변절한 사실을 유대정(兪大禎)의 말을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또 이르기를,

"이항복기축 옥사(己丑獄事)를 당했을 때 정철(鄭澈)에게 말하기를 ‘정여립(鄭汝立)이 호남에서 기병(起兵)할 때에 영남에서 일어난 사람도 있고 서울에서 일어난 사람도 있다.’고 하였으니, 대개 이는 항복이 영남의 최영경(崔永慶)·정인홍(鄭仁弘)·유성룡(柳成龍)과 서울의 이발(李潑)·이길(李洁)·정언신(鄭彦信)·백유양(白惟讓)을 모함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동악상제(同惡相濟)한 모습이 이와 같은데도 정승의 자리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괴이하지 않은가."

하였다. 살피건대 덕형항복은 모두 어진 재상으로서 세상에서 기대하는 것이 컸기 때문에 기자헌이이첨의 무리가 무척이나 시기하여 반드시 그들을 모함할 계략을 꾸미려 했으나 적당한 구실을 찾지 못하자, 마침내 근거도 없는 얼토당토 않은 사실을 가지고 마음대로 비방하고 욕하면서 사책(史冊)에 기록한 것이다. 또 최영경의 죽음을 가지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동인이다.】 전적으로 정철을 공격하였으나, 항복(恒福)기축옥의 문사랑(問事郞)으로서 그 전말을 자세히 알고 있기 때문에 항시 말하기를 ‘영경이 처음 체포되었을 때 철(澈)이 차자를 초안하여 장차 그를 구하려 하였는데, 문득 풀어주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차자를 올리지 못하였다. 그를 두 번째 국문함에 미쳐 은 대간이 논한 것을 듣고 매우 놀라 심희수에게 입이 닳도록 말해주었으니 의 마음씀이 시종 이와 같았다.’ 하였다. 그런데 이를 가지고 소인배들이 매우 심하게 미워하고 있지도 않은 일을 날조하여 마침내는 동악상제라고까지 하였으니 통탄하고도 남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