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老舍), 낙타상자(骆驼祥子)
https://view.inews.qq.com/k/20201229A03DXU00?web_channel=wap&openApp=false&f=newdc
샹즈, 그는 ‘낙타’라는 별명과 연관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자유로운 인력거꾼이었다. 농촌에서 자란 그는 부모님을 여의고 열여덟 나던 해에 무조건 도회지로 뛰쳐 들어왔다. 곤경에 빠지면서도 이를 악물고 노력해서 꼬박 3년이나 걸려서야 그는 겨우 100원을 모아 자신의 인력거를 마련할 수 있었고, 그 후 그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활기를 띠었다.
그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또한 보통 인력거꾼처럼 나쁜 습관에도 물들지 않았다. 그는 총명하고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자신의 소원을 현실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희망은 대부분 허사가 되는 법이니 샹즈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소식에도 불구하고 성 밖으로 인력거를 끌고 나갔다가 병사들에게 잡혀가고 말았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이며 신발, 모자, 인력거, 심지어 허리에 동여맨 무명 허리띠까지 모두 빼앗기고, 남은 것이라곤 여기저기 시퍼렇게 멍든 상처와 물집이 생긴 발뿐이었다. 포성으로 병영이 소란해진 틈을 타 그는 낙타 세 마리를 이끌고 도망쳤고, 어느 마을에 도착해서 낙타를 헐값에 팔아넘겼다. 샹즈는 사흘 동안 끙끙 앓았고, 그와 낙타 세 마리의 관계가 잠꼬대나 헛소리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진게 틀림없었는지, 잠에서 깨어나 보니 그는 이미 ‘낙타 샹즈’가 되어 있었다.
샹즈는 서안문 대가에 있는 인화차창(인력거나 삼륜차를 세놓는 가게)의 인력거를 끌었다. 인화 인력거 가게의 주인인 류쓰예(劉四爺)는 나이가 거의 일흔에 가까운 늙은이였고, 그의 딸 후니우(虎妞)는 건장하고 다부진 것이 호랑이 못지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 후니우는 제 아버지보다 샹즈를 더욱 좋아했다.
샹즈는 자신의 인력거를 빼앗긴 후, 인화차창의 인력거를 다시 끌었지만, 지난 일이 마치 악몽처럼 느껴져 더 이상 장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차오선생 집에서 전세로 인력거를 끌게 되었고, 이렇게 잘 먹고 잘 자면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는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소대장이었던 쑨 형사의 협박으로 인력거를 사기 위해 모으고 있던 돈을 다시 빼앗겼다. 인력거를 사놓고도 인력거를 잃고, 돈을 모아도 다시 빼앗겼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모두에게 능멸을 당할 뿐이었다.
샹즈는 임신을 했다는 후니우의 거짓말로 인해 마지못해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샹즈와 후니우가 사는 셋집에 같이 사는 얼챵즈(二强子)가 인력거를 팔려고 내놓았고 샹즈는 후니우의 도움으로 인력거를 샀다. 얼챵즈에게는 샤오푸즈(小福子)란 딸이 있었고, 그녀는 후니우와 친구로 지내게 되었다.
결혼 후 후니우는 정말로 임신을 하게 되었지만, 나이도 있고 평소 운동을 게을리 하면서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어 태아가 비대해져, 결국 뱃속에 아이를 담은 채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샹즈는 장례 비용등 돈이 필요해서 인력거를 다시 팔았다. 인력거를 사고 잃어버리고 다시 사고 다시 팔아버리고...
샹즈에게 샤오푸즈는 젊고 부지런하고 근검절약할 줄 아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다시 결혼 한다면 이보다 더 이상적인 여자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재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형편이 나아지면 꼭 온다는 말과 함께 샹즈는 그 셋집을 나왔다.
샹즈는 다시 전세 인력거를 끌게 되지만, 그는 예전처럼 전세 인력거를 모는 데 열을 올리지 않았다. 예전의 그처럼 죽도록 일을 하는 인력거꾼은 목숨이나 잃을 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때때로 자신의 예전 모습을 떠올려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인력거를 사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하곤 했다. 돈을 모으고 인력거를 살 생각을 하자 샤오푸즈 생각이 났다. 그는 사라진 샤오푸즈의 행방을 찾다가 사창가에 갇혀 지낼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지만, 숲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샹즈는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았다. 깔끔하던 샹즈가 수척하고 더러운 하급 인력거꾼이 되고 말았다.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 오직 왜 그렇게 갖은 노력으로 부지런히, 성실하게 살았을까 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습관은 점차 도를 더해 그는 돈을 빌리고도 갚지 않다가 차츰 빌려주는 곳이 없자 사기를 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돈의 노예가 되어 모든 일에 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자신을 위해 죽음의 길로 향했다. 그는 아직은 숨결이 남아 있는 죽은 영혼이었다.
그의 황금시대는 지나가버렸다. 인력거꾼으로 성공하지 못하면서, 모든 일이 ‘그저 그런 일’이 되어버렸다. 체면을 소중히 여기고 강인하게 꿈을 좇던 사람, 자신을 사랑했고 독립적이었던 사람, 건장하고 위대했던 샹즈는 장례식의 일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타락한 인간, 이기적이며 불행한 인간, 사회적 병폐의 산물이며 개인주의의 말로에 선 그 영혼이 언제 어떻게 땅에 묻힐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라오서
다른 표기 언어 Lao She , 老舍 동의어 수칭춘, 舒慶春, 수서위, 舒舍予
1899. 2. 3, 베이징 |
1966. 10, 중국 |
중국 |
요약 해학적 풍자소설과 단편소설 작가로 중일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애국적·선전적인 희곡과 소설들을 썼다. 5·4신문화운동 때 백화로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1924년 영국으로 건너가 5년 동안 <금병매>의 공동번역에 참여했다. 디킨스의 소설에 영향을 받아 첫 번째 소설 <장선생의 철학>을 발표했다.
6년 간의 유학 도중 <조자왈>·<이마> 등 장편들을 계속 발표했고, 1931년 귀국 후 지루대학과 산둥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묘성기>·<이혼> 등 희극작품을 썼다. 1946~47년 미국 여행을 하면서 <황사폭>과 마지막 소설인 <드럼 연주자들> 등 몇 작품의 번역본을 검토했고, 미국에 머물면서 <사세동당>을 발표했다. 문화대혁명 때 당과 마오쩌둥에 반대하다가 홍위병에게 규탄을 받은 뒤 시체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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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수칭춘[舒慶春]. 자는 서위[舍予]. 라오서는 수서위[舒舍予]의 필명이다.
해학적 풍자소설과 단편소설 작가로 중일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애국적·선전적인 희곡과 소설들을 썼다.
베이징의 가난한 만주 기인(滿洲旗人)의 가정에서 태어난 라오서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하층 서민에 대해 동정의 시각을 키웠다. 1917년 베이징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여러 해 동안 교직생활을 했으며, 5·4신문화운동 때 백화(白話)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24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대학교 동양대학에서 표준중국어를 가르치며 생계를 꾸려갔으며, 5년 동안 명대(1368~1644)의 위대한 소설 〈금병매 金甁梅〉의 공동번역에 참여했다. 영어실력을 키우기 위해 읽게 된 디킨스의 소설로부터 자극을 받아 첫번째 소설 〈장선생의 철학 老張的哲學〉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이 작품은 중국의 〈샤오숴웨바오 小說月報〉에 게재되어 얼마간 성공을 거두었다. 6년 간의 유학 도중 〈조자왈 趙子曰〉·〈이마 二馬〉 등 지식인의 생활상을 씁쓸한 유머로 묘사한 장편들을 계속 발표하여 희극작가로 문단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1929~30년 중편소설 〈소파의 생일 小坡的生日〉을 썼다.
1931년 귀국 후 지난[齊南]의 지루[齊魯]대학과 칭다오[靑島]의 산둥[山東]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묘성기 描城記〉·〈이혼 離婚〉·〈우천사전 牛天賜傳〉 등 계속해서 희극적이고 행동성이 강한 작품들을 써나갔다.
〈우천사전〉(1934)에서는 자신의 개인주의적 주제를 벗어나 전반적인 사회환경의 중요성과 그러한 환경에 대항하는 개인의 투쟁은 무용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 새로운 주제는 그의 대표작인 〈낙타상자 駱駝祥子〉(1936)에서 가장 명료하게 나타난다. 이 작품은 베이징에 사는 가난한 인력거꾼의 비참한 생활을 그린 것으로서 하층 서민의 애환과 어두운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묘사를 통해 비판적 리얼리즘의 방향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전쟁중 라오서는 우한[武漢]에 있던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를 주도하면서 작가들에게 애국적이며 선전적인 문학작품을 창작하도록 격려했다.
〈잔무 殘霧〉 등 이 시기의 작품들은 졸렬할 정도로 선전에 젖어 있었다.
1946~47년 문화보조금을 받아 미국을 여행하면서 강의를 하고, 자신의 소설 중 〈황사폭풍 The Yellow Storm〉(1951)과 마지막 소설인 〈드럼 연주자들 The Drum Singers〉(1952) 등 몇 작품의 번역본을 검토했다. 이 작품들은 중국어로 발행되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 머물면서 100만 자가 넘는 3부작 〈사세동당 四世同堂〉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일본 점령하의 베이징에서 4대가 함께 살고 있는 대가족 식구들의 생활상을 묘사했다. 중국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는 여러 가지 문화사업과 문학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선전적인 희곡들을 계속 써나갔다. 이 가운데 〈용의 수염물결〉(1951)은 베이징의 변한 모습과 새로운 생활을 묘사하여 새 중국을 칭송한 희곡작품이다. 이외에도 명작 〈찻집 茶館〉을 비롯해서 20여 편이 넘는 희곡을 집필하는 한편, 상성(相聲)과 탄사(彈詞) 같은 대중예술의 부흥과 발전에 대단한 공적을 남겼다.
그는 〈용의 수염물결〉과 〈찻집〉을 베이징어(語)로 재발간하여 훌륭한 언어적 재능을 드러냈다.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베이징시문연[北京市文聯] 주석 등의 요직을 계속해서 역임했다. 문화대혁명 때 당과 마오쩌둥[毛澤東]에 반대하다가 홍위병(紅衛兵)에게 규탄을 받은 뒤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채 라오서는 1978년 6월에 복권되었다.
* 윗글은 내가 2021-08-30 09:56에 나의 블로그에 실었던 것이다. 오늘 웹서핑 중에 다시 샹즈를 만났다.
기억이 바로 났다. 반가워서 덧붙인다. 감동이다.
http://classicsmatrix.snu.ac.kr/2980/
『낙타샹즈(駱駝祥子)』 4·5장 (번역본: 『낙타샹즈』, 심규호·유소영 옮김, 황소자리, 2008[2015], 51~52쪽, 69~71쪽)
자신의 인력거를 장만한 지 반년가량 지났을 무렵 전쟁 소식과 풍문이 커지던 어느 날 샹즈는 베이징 성안으로 들어갔다가 칭화(淸華)까지 평소 요금의 10배인 2원을 주겠다는 말에 배짱 좋게 길을 나선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군인들에게 붙들려서 입고 있던 옷가지와 인력거까지 모두 빼앗기고 며칠 동안 짐꾼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허드렛일을 돕는다. 그러던 중 전투가 벌어져 퇴각하는 틈을 타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군인이 민가에서 약탈한 것으로 보이는 낙타 세 마리를 끌고 도망친다. 낙타 세 마리를 팔아 인력거를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샹즈는 다시금 희망에 차오르지만, 난리통에 낙타 가격은 헐값이 되었다. 아쉬운 대로 베이징 근교 마을의 시골 부자에게 낙타를 시세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35원에 넘기고 시내로 돌아온다.
[고전본문]
샹즈는 하이뎬*의 작은 여인숙에서 사흘 동안 끙끙 앓았다. 온몸에 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정신이 혼미해진 데다 잇몸에 붉은 물집이 가득 생겨 그저 물만 마시고 싶을 뿐 아무것도 입에 대기 싫었다. 사흘을 내리 굶고 나니 열은 내렸지만, 몸은 엿처럼 축축 늘어졌다. 그 사흘 동안 그와 세 마리 낙타의 관계가 잠꼬대나 헛소리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게 틀림없었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그는 이미 ‘낙타 샹즈’가 되어 있었다.
베이핑성*으로 들어온 이래 그는 ‘샹즈’라고 불렸다. 애당초 그에겐 성이 없는 듯했다. 지금은 ‘낙타’라는 말이 ‘샹즈’ 앞에 붙어 그의 성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여기는 이들이 더더욱 줄어들었다. 성이 있든 없든 그 자신은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세 마리 짐승을 그까짓 돈 몇 푼에 바꾸고 오히려 자신에게 그런 별명이 떨어지니 뭔가 타산이 맞지 않는 것만 같았다. (중략)
자신의 인력거를 끌지 않으면 그는 헛되이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벼슬을 할 생각도 없었고, 돈을 벌거나 부동산을 사 놓을 생각도 없었다. 그가 가진 능력은 오직 인력거를 끄는 것이었으니, 그가 믿을 수 있는 희망 역시 자신의 인력거를 사는 일뿐이었다. 인력거를 사지 못하면 스스로 면목이 없었다. 그는 하루 종일 이 문제와 씨름하거나 자신의 돈을 세어보는 데만 골몰했다. 만약 잠시라도 이 일을 잊는다면, 그것은 곧 자신을 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저 길거리를 달리는 짐승, 생각도 없고 인간미도 없는 짐승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아무리 좋은 인력거라도 임대한 것은 마치 등짝에 돌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워 아무리 끌어도 흥이 나질 않는다. 물론 임대한 인력거를 끌 때에도 그는 게으름을 피우는 법이 없었다. 매일매일 깨끗하게 닦았고, 하루라도 마구 끌어 부딪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조심하고 삼가는 것일 뿐 즐거움은 아니었다. 역시 자기 인력거를 깨끗하게 닦고 단장해야만 자기 돈을 세는 것처럼 진정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여전히 담배도 술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예 좋은 찻잎으로 만든 차를 마시는 일도 삼가는 게 좋겠다. (중략)
이처럼 돈을 악착같이 절약했을 뿐 아니라 돈을 버는 데 있어서도 그는 한 치도 늦추는 법이 없었다. 전세로 끌지 않을 때는 하루 종일 손님들을 태우느라 아침 일찍 나갔다가 늦게야 돌아왔다. 정한 액수를 채우지 못하면 시간과 두 다리의 상태가 어떻든 인력거를 거두지 않았다. 때로는 무리하게 밤을 새워가며 끌 때도 있었다. 이전만 해도 그는 다른 인력거꾼, 특히 늙거나 허약한 이들의 벌이를 빼앗지 않았다. 그 정도의 몸집에 괜찮은 인력거를 가지고 그들과 승객을 다툰다면 그들에게 돌아갈 몫이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오로지 돈뿐이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그는 삯이 좋든 나쁘든 상관하지 않았으며, 손님도 제멋대로 가로채 갔다. 그는 마치 배고파 날뛰는 들짐승처럼 오로지 손님을 끌어 돈을 버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다른 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손님이 타기가 무섭게 달려야만 마음이 조금 시원해졌다. 한시라도 쉬지 않고 다리품을 팔아야 인력거를 살 희망과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오가는 사이에 낙타 샹즈의 명성은 형편없이 떨어져 그냥 샹즈라고 불릴 때보다 훨씬 못하게 되었다. 그가 손님을 가로채서 달려갈 때 뒤편에서 욕지거리를 해대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인력거를 사는 것만 아니라면 나도 이렇게 염치없는 짓은 절대로 안 해!”
* 하이뎬(海甸)은 베이징 북서쪽의 구(區) 이름이다. 베이징대, 칭화대, 중국인민대, 베이징사범대 등 20개가 넘는 대학이 밀집한 지역이다.
* 베이핑은 베이징의 옛 이름으로, 장제스(蔣介石)가 1928년 6월 북벌 완성과 전국 통일을 선언하고 난징(南京)을 수도로 정하며 바꾸었다. 베이징은 수도를 뜻하는 ‘징(京)’을 없애고 베이핑(北平)으로, 경기(京畿: 서울을 중심으로 한 가까운 주위의 지방)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는 즈리성(直隸省)은 허베이성(河北省)으로 각각 개칭했다. 1937년 7·7 사변(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일본군이 점령하면서 공식 명칭을 베이징으로 바꾸었지만, 민간에서는 일본에 대한 반발심에서 계속 베이핑으로 불렀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면서 베이핑으로 공식 명칭이 돌아갔다가 1949년 신중국 성립 이후 수도가 되면서 다시 베이징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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