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德經 王弼本 26. 重爲輕根(진중함은 가벼움의 뿌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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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輕則失本(경즉실본) 重爲輕根, 靜爲躁君, 是以聖人終日行不離輜重, 雖有榮觀, 燕處超然, 柰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 輕則失本, 躁則失君. 重爲輕根/, 靜爲躁君, 是以聖人終日行不離輜重/, 雖有榮觀/, 燕處超然, 柰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 輕則失本/, 躁則失君. <帛書校勘版 第七十章 輜重> 重爲巠根 清爲趮君 是以君子眾日行 不離其甾重 唯有環官 燕處則昭 若若何萬乘之王 而以身巠於天下 巠則失本 趮則失君 -------------- B:重為輕根,靜為趮君。是以君子冬日行,而不遠其輜重,唯有榮館,燕處超若。奈何萬乘之王,而以身輕於天下?輕則失本,趮則失君。 趮(躁), 冬(終), 唯(雖), 榮(縈), 趮(躁). M:□為巠根清為躁君是以君子眾日行不離其甾重唯有環官燕處□□若﹦何萬乘之王而以身巠於天下巠則失本躁則失君 m:重為輕根靜為躁君是以君子冬日行不遠亓甾重雖有環官燕處則昭若﹦何萬乘之王而以身輕於天下輕則失本躁則失君 G: * * * W:重為輕根,靜為躁君。是以君子終日行不離輜重。雖有榮觀燕處超然。奈何萬乘之主而以身輕天下。輕則失根,躁則失君。 H:重為輕根,靜為躁君。是以聖人終日行,不離輜重。雖有榮觀,燕處超然。奈何萬乘之主而以身輕天下?輕則失臣,躁則失君。 F:重爲輕根,靖爲躁君。是以君子終日行,不離其輜重。雖有榮觀宴處,超然。如之 何萬乘之主,而以身輕天下。輕則失本,躁則失君。 B : 北大 竹簡本 ~ -150, ~ -100 / 2009년 北京大 기증 M ; 馬王堆 帛書本 甲 (楚簡) < -206 / 1973년 발견, BC 168년 4월 4일 묘 m : 馬王堆 帛書本 乙 (楚簡)< -179 / 1973년 발견, BC 168년 4월 4일 묘 G : 郭店 竹簡本(楚簡)~ -300(BC4세기중반~BC 3세기초반) / 1993년 발견, 1998년 공개, BC 278년 이전 묘, 1,666 W : 王弼本 (226–249) < +250 / 위진 남북조(삼국시대), 현행본은 12세기 판본 H : 河上公本 > +100 F : 傅奕本 (554−639) +574 / < -202 / 당 -------------- 重爲輕根(중위경근) : 진중함(重)은 가벼움(輕)의 뿌리고, 靜爲躁君(정위조군) : 고요함(靜)은 조급함(躁)의 주군이다.
是以聖人終日行(시이성인종일행) : 이러한 연유로 성인은 종일토록 다녀도 不離輜重(불리치중) : 묵중한 수레에서 떨어지지 않고, 雖有榮觀(수유영관) : 비록 화려한 볼거리가 있을지라도 燕處超然(연처초연) : 의연(燕)하고 초연(超然)할 뿐이다.
柰何萬乘之主(내하만승지주) : 어찌 만 승의 임금이 而以身輕天下(이이신경천하) : 경거망동하여 스스로 천하를 가벼이 여기겠는가? 輕則失本(경즉실본) : 가벼우면(輕) 근본(本)을 잃게 되고, 躁則失君(조즉실군) : 조급하면(躁) 주군(君) 자리를 잃게 되리라.
--------------------- 진중함(重)은 가벼움(輕)의 뿌리고, 고요함(靜)은 조급함(躁)의 주인이다. 이러한 연유로 성인은 종일토록 다녀도 묵중한 수레에서 떨어지지 않고, 비록 화려한 볼거리가 있어도 의연(燕)하고 초연(超然)할 뿐이다. 어찌 만 승의 임금이 경거망동하여, 스스로 천하를 가벼이 여기겠는가? 가벼우면(輕) 근본(本)을 잃게 되고, 조급하면(躁) 주군(君) 자리를 잃게 되리라. ---------------------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요 고요함은 조급함의 주인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하루종일 길을 가도 옷과 음식을 실은 수레 곁을 떠나지 않으며 비록 호화스러운 궁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평소의 거처에서 담담히 기거한다 어찌 만승의 왕이 되었으면서도 그 몸으로 천하에 경거망동하겠는가 가벼우면 근본을 잃을 것이고 조급하면 주인을 잃을 것이다. 重爲輕根, 靜爲躁君. 是以君子終日行, 不離其輜重. 雖有環館, 燕處則超然. 若何萬乘之王, 而以身輕於天下. 輕則失本, 躁則失君. [重爲輕根, 靜爲躁君]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 -------------------- <오 강남 역>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입니다. 조용한 것은 조급한 것의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루 종일 다닐지라도 짐수레를 떠나지 않습니다. 화려한 경관이 있을지라도 의연하고 초연할 뿐입니다. 만 대의 전차를 가진 나라의 임금이 어찌 세상에서 가볍게 처신할 수 있겠습니까? 가볍게 처신하면 그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히 행동하면 임금의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노바당 역>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이고 조용한 것은 조급한 것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루 종일 다닐지라도 짐수레를 떠나지 않는다. 화려한 경관이 있을지라도 의연하고 초연할 뿐이다. 만대의 전차를 가진 나라의 임금이 어찌 세상에서 가볍게 처신할 수 있겠는가? 가볍게 처신하면 그 근본을 잃게 되고 급하게 행동하면 임금의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 <임채우 역> 26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가 되고 무거움은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되고, 고요함은 경솔한 것의 중심이 되나니, 그래서 도를 얻은 사람은 종일토록 다녀도 묵중한 중심을 잃지 않으며, 화려하고 영화로운 곳에 있어도 편안히 초연하다. 어찌 만승(萬乘)의 군주가 자기 자신을 가벼이 행동하겠는가? 가벼우면 뿌리를 잃고, 서두르면 임금을 잃는다. 역> 1. Gravity is the root of lightness; stillness, the ruler of movement. 2. Therefore a wise prince, marching the whole day, does not go far from his baggage waggons. Although he may have brilliant prospects to look at, he quietly remains (in his proper place), indifferent to them. How should the lord of a myriad chariots carry himself lightly before the kingdom? If he do act lightly, he has lost his root (of gravity); if he proceed to active movement, he will lose his throne. 역> Heaviness is the root of lightness Quietness is the master of restlessness Therefore the sages travel the entire day Without leaving the heavy supplies Even though there are luxurious sights They are composed and transcend beyond How can the lords of ten thousand chariots Apply themselves lightly to the world? To be light is to lose one’s root To be restless is to lose one’s mastery3 <장 도연 역> 제26장 일을 행할 때는 언제나 신중하고 침착해라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되고 고요한 것은 조급함의 임금이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어디를 가든 절대 가볍게 행동하지 않으며 신중하고 침착하다. 몸은 비록 높은 곳에 있지만 마음은 초연하다. 그러므로 어찌 만인의 군주로서 천하를 가볍게 여기는가? 가벼이 행동하면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하면 임금의 자리를 잃게 된다. <왕필 노자주 / 임채우 역> 무거움은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되고, 고요함은 경솔한 것의 임금(즉 중심)이 된다. 重爲輕根, 靜爲躁君. 무릇 사물이란 가벼워서는 무거운 것을 실을 수 없고, 작아서는 큰 것을 누를 수 없다. 가지 않는 이가 가는 이를 부리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움직이는 것을 제어한다. 그래서 무거움은 반드시 가벼움의 뿌리가 되고, 고요함은 필히 경솔함의 임금이 된다. 凡物, 輕不能載重, 小不能鎭大. 不行者使行, 不動者制動. 是以重必爲輕根, 靜必爲躁君也. 그래서 성인(聖人)은 종일토록 다녀도 묵중한 수레를 떠나지 않으며, 是以聖人終日行, 不離輜重, <주석> 치중(輜重)은 옛날 임금이 출행하면 반드시 군사가 수행하는데, 이때 의식(衣食)ㆍ기계(器械)를 실은 수레를 치거(輜車)라고 하는데 묵중하므로 ‘치중’이라고 한다.(장묵생(張默生), 『노자장구신석』(老子章句新釋), 34쪽) 진고응(陳鼓應)은 ‘치’(輜)는 본래 ‘정’(靜)인데, 정(靜)과 경(輕)은 발음이 비슷하여 정(靜)을 경(輕)으로 잘못 썼다가, 경(輕)과 치(輜)의 형태가 비슷하므로 다시 치(輜)가 되었다고 한다.(진고응, 『노자주역급평개』(老子註譯及評介) 참조) 무거움을 근본으로 삼기에 떠나지 않는다. 以重爲本, 故不離. 비록 영화로운 곳에 있어도 편안히 처하고 초연하다. 雖有榮觀, 燕處超然; 마음에 매어두지 않는다. 不以經心也. 어찌 만승(萬乘)의 주인으로 자신을 세상에 경솔하게 행동하겠는가? 가벼우면 근본을 잃고, 서두르면 임금을 잃는다. 柰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 輕則失本, 躁則失君. <주석> 하상공본 등에는 본(本)이 신(臣)으로 되어 있다. 가벼움은 무거움을 제압할 수 없다. 근본을 잃는다는 것은 몸을 잃는 것이요, 임금을 잃는다는 것은 임금의 지위를 잃는 것이다. 輕不鎭重也. 失本, 爲喪身也. 失君, 爲失君位也. 역> Heavy is the root of light. Stillness is the ruler of haste. Therefore: Although he travels all day, The sage never loses sight of his luggage carts. Only when he rests securely inside the walls, He relaxes his attention. Why would a ruler with ten thousand chariots Look lightly on himself or his domain? In lightness the root is lost. In haste the ruler is lost. Be Still In his stream of wisdom, Lao Tzu also occasionally enjoys playing with words. He does so in the very first lines of the Tao Te Ching , where Tao is used as both a noun and a verb. In this chapter, the joke is the ruler in the second line compared to the last line. In the former, the principle of stillness is the ruler of haste, whereas in the last line the ruler who is lost in haste is a human one, neglecting himself and his domain. It’s a high-brow kind of humor, one would say, but Lao Tzu might have giggled putting it together. The book has several examples of the same kind of humor, a play with words that creates double meanings – both of them profound. That’s what many poets can’t resist doing. To be heavy is shouldering one’s responsibilities and holding one’s ground. Stillness is acting with caution and well prepared. This is important for anyone to understand, but particularly for a ruler, since the consequences of neglect would be much direr. We have just learned, in chapter 25, that the king is one of the four greats, so he has to behave like one. Power means responsibility and responsibility means care. The ruler has the most in his care, so he has to be the most careful. Being heavy and still, a ruler does not eagerly spring into action, but waits until it is time, and then does just what is called for. Nothing more. Eagerness to act tends to create more problems than it solves. <사봉 역> 重爲輕根(중위경근) 무거움으로 가벼움의 근본을 삼고 靜爲躁君(정위조군) 고요한 마음으로 거친 마음을 다스려라. 是以聖人終日行(시이성인종일행) 그리하면 성인은 종일 걸어도 不離輜重(불리치중)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게 되며 雖有榮觀(수유영관) 비록 영화롭더라도 燕處超然(연처초연) 편안하게 처신하고 초연한 마음을 가진다. 柰何萬乘之主(내하만승지주) 어찌 일만 수레를 가진 임금이 而以身輕天下(이이신경천하) 가볍게 처신하여 세상을 우습게보겠는가? 輕則失本(경즉실본) 가볍게 처신하면 근본을 잃게 되고 躁則失君(조즉실군) 조급하게 처신하면 임금 자리를 잃게 된다. ---------------------------------------------------------------------------------------------------------------------- 重 vs 輕 靜 vs 躁 가벼움은 근본을 잃게 하고(輕則失本) 조급함은 임금의 자리를 잃게 한다(躁則失君) 이 章에서 인상적인 자구 雖有榮觀 燕處超然 自然 도덕경 비교 (17장) 信不足焉, 有不信焉, 悠兮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23장) 希言自然, 故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25장)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26장) 雖有榮觀, 燕處超然 (51장) 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而常自然 (53장) 以天下觀天下, 吾何以知天下然哉, 以此 (57장) 以正治國, 以奇用兵, 以無事取天下, 吾何以知其然哉, 以此 (64장) 不貴難得之貨, 學不學, 復衆人之所過, 以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 (65장) 元德深矣遠矣, 與物反矣, 然後乃至大順. (66장) 不爭而善勝, 不言而善應, 不召而自來, 繟然而善謀, 天網恢恢, 疏而不失 (77장) 天之道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靜 도덕경 비교 (16장) 致虛極 守靜篤 /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26장) 重爲輕根 靜爲躁君 (37장)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45장) 靜勝熱 淸靜爲天下正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57장)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61장)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 <인용> 이명권 http://cafe.daum.net/koreanashram/8IoM/31 도덕경 26장 중정(重靜)의 도리와 십자가의 길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근본이 되며, 고요한 것은 조급한 것의 임금(주인)이 된다.> 重爲輕根, 靜爲躁君. 1. 중후한 삶의 철학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된다는 것은 중후한 삶이 경박한 삶의 뿌리가 된다는 말이다. 경박한 삶은 눈앞의 일시적인 이익에 따라 울고 웃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멀리 보지 못한다. 하지만 인생을 가볍게 사는 것과 경박하게 사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무거운 인생길을 가볍게 사는 일이야 말로 도를 추구하는 자의 본래 모습일 수 있다. 예수가 일렀듯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면서, 내가 주는 멍에는 쉽고도 가볍다고 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한 왕필의 해석을 보면 재미있다. “무릇 사물을 보면,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을 실을 수 없고, 작은 것이 큰 것을 누를 수 없다. 행동하지 않는 것이 행동하는 것을 부리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제어한다. 이로써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된다.(凡物, 輕不能載重, 小不能鎭大. 不行者使行, 不動者制動. 是以重必爲輕根.)”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제어한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른바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不動)의 동자(動者)(the unmoved mover)’ 개념을 떠 올리게 된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움직이는 존재, 즉 제 일 원인(原因)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참으로 큰일을 행하는 사람일수록 그 행동이 신중하고 중후하다. 고요함(靜)과 조급함(躁)도 같은 맥락이다. 고요함이 조급함의 주인이 된다. 조급한 사람이 고요한 사람을 이기는 법이 없다. 고요함은 중후함에서 비롯된다. 물이 깊을수록 고요함이 더한 것과 같다. 얕은 물은 언제나 바람에 찰랑거리게 마련이다. 뿌리가 깊은 나무일수록 폭풍에 잘 견딜 수 있는 이치와도 같다. 그리스도인의 영성도 이와 같다. 영성이 깊을수록 무게가 있고 영적 권위가 높아지며, 마귀의 궤계나 조급함을 멀리할 수 있다. 영성이 깊어지고 무게를 가지려면 겟세마네의 기도와 같은 고요함(靜)이 필요하다. 예수는 하루 일과를 마치면 고요한 기도에 들어갔다. 고요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고요함으로 하루를 마친 것이다. 2. 불리치중(不離輜重)과 천국의 과업 <그러므로 성인은 종일토록 행할지라도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는다. 비록 영화로운 일을 만나도 의연히 거하며 초연할 뿐이다.> 是以聖人終日行, 不離輜重, 雖有榮觀. 燕處超然. 성인(聖人)이 무거운 수레(輜重)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무거운 수레(輜重)’는 옛날에 임금이 행차할 때 수행하는 군사가 의식(衣食)과 기계(器械)를 실은 수레를 말한다. 이 때 임금이 행차하면서 늘 이 수레를 떠나지 않는 것에 대해, 노자가 성인의 행동 양식으로 비유 한 말이다. 이를테면 임금이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는다는 말과 성인이 중대한 과업을 멀리하지 않는 것이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天國)라고 하는 중대한 과업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생애는 한시도 이 과업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는 첫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가 1:15)”라는 외침이었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고 말함으로써 예수는 그의 과업을 완성한 것이다. 천국의 실현, 이는 모든 성인이 일평생 치중(置重)한 ‘무거운 수레’ 곧 치중(輜重)이었다. 이러한 중대한 과업에 치중하는 사람은 비록 영화(榮華)를 누릴 일이 있어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으며, 제비가 자기 둥지에 자리 잡아(燕處) 편안히 거하듯이 무슨 일을 만나도 초연함을 잃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부귀영화에 마음을 매어두지 않기에 오히려 안연(晏然)히 살 수 있는 것이다. 부귀와 영화에 마음을 매기 보다는 오히려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에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무거운 수레’가 소외된 자들의 양식, 곧 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금 된 자는 이 수레를 떠나지 않는다. 한국에도 ‘밥퍼 목사’라는 별칭을 가진 목사가 있다. 그는 의지할 곳 없는 노숙자에게 이 ‘밥 퍼’는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고 평생의 과업에 ‘치중’하고 있다. 3. 만승지주(萬乘之主)의 처신(處身) 만 대의 수레(전차)를 지닌 임금이 어찌 자기 마음대로 천하를 가볍게 여기겠는가? 경솔하면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하면 임금의 지위를 잃게 된다. 奈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 輕則失本, 躁則失君. 사람마다 그릇이 다른 법이다. 옛 로마 시대의 군법에 의하면, 백부장은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자요, 천부장은 천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군대장이다. 소대장과 대대장의 차이가 다른 것과 같다. 농사를 짓는 일에도 쌀가마를 수확하는 양의 정도에 따라, 천석꾼과 만석꾼으로 나눈다. 그런 점에서 사람마다 일의 역량과 그릇이 다르다. ‘만승지주(萬乘之主)’라 함은 만대의 수레를 거느리는 임금을 말한다. 그만큼 인간의 역량과 지위에 따라 처신하는 방법도 신중해야 함을 말한다. 한 나라의 임금이나 되는 사람이 천하를 우습게 여기고 가벼이 처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솔하면 곧장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한즉 임금의 자리를 잃게 되는 법이다. 누구나 만대의 전차를 거느리는 임금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만승지주’와 같은 마음을 지닐 수는 있다. ‘만승지주’의 마음을 가진 자는 언제나 홀로 신중하게 처신한다. 예수는 ‘만승지주’로서 이 땅에 천국의 실현을 위해 살았다. 그는 결코 천하를 우습게보거나 세상을 경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냈다(요한복음 3:16).’ 세상은 진노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었다. ‘만승지주’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구원을 위한 사랑의 실천일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가볍게 생각하여, 경거망동함으로써 근본을 잃게 되거나(輕則失本), 조급하게 행동함으로써 임금의 지위를 잃게 되는(躁則失君)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무겁고(重) 고요한(靜) ‘중정’의 삶의 원리는 가볍고(輕) 조급한(躁) ‘경조’의 삶과 대비된다. 이 같은 대비는 <도덕경> 전체를 ‘얼나(道)’와 ‘제나(自我)로 풀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의 해석을 따르는 것도 유익한 교훈이 된다. 이를테면, 중정은 ‘얼 나’의 소산이고 경조는 ‘제 나’(자아)의 소산일 수 있다. 무겁고 고요한 삶의 원리, 즉 도의 원리가 가볍고 조급한 인간적 자아의 원리를 통제하는 근본 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비유를 따라 해석해 보면, 중정은 ‘영의 생각’이 되고, 경조함은 ‘육신의 생각’이 된다. 로마서 8장 5-6절에 의하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服從本性的人意向於本性的事, 順服聖靈的人意向於聖靈的事. 意向於本性就是事. 意向於聖靈就有生命和平安. 참조, 중국어 성경). 사망의 길을 갈 것인가, 생명과 평안의 길을 갈 것인가, 이는 중정의 길이냐, 아니면 경조의 길이냐에 달려 있다. 십자가의 길은 가볍고 조급한 길이 아니라, 무겁고 고요한 길이기 때문이다. -------------------- --------------------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요, 고요함은 조급함의 주인이다 重爲輕根, 靜爲躁君 첫 구절은 "군자가 무겁게 행동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다(「학이」)"는 『논어』의 말을 연상시킨다. 하상공은 이 구절에 "임금이 무겁게 처신하지 않으면 존귀해지지 않는다"는 해설을 달았는데, 『논어』의 주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왕필은 좀더 길게 설명한다. "무릇 사물은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을 실을 수 없고, 작은 것은 큰 것을 누를 수 없다. 가지 않는 사람은 가는 사람을 부릴 수 있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움직이는 사람을 제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고, 고요함은 조급함의 군주이다." 『여씨춘추』에도 이와 유사한 말이 있다. 권세가 같으면 서로 부릴 수 없고, 세력이 동등하면 서로 정복할 수 없으며, 치란이 똑같으면 바르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작고 큼, 가볍고 무거움, 다스림과 어지러움은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화복의 문이다. ……큰 것으로 작은 것을 부리고, 무거운 것으로 가벼운 것을 부리며, 많은 것으로 적은 것을 부리는 것, 이것이 왕 노릇 하는 사람이 집안을 이루어 온전히 할 수 있는 길이다(「심분람·신세」). '신세(愼勢)'라는 말은 힘〔勢〕을 조심한다 또는 힘에 대해 조심스럽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위에서도 드러나듯이 「신세」는 임금 노릇을 잘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힘 또는 권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곧 '세(勢)'의 통치술을 이야기하는 것이 「신세」이다. 「신세」에서는 이런 글도 발견할 수 있다. "경중을 저울질하고, 대소를 살피며, 봉건을 많이 하는 것이 힘을 불리는 길이다. 왕이라는 것은 힘〔勢〕이다. 왕은 그 힘에 필적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 힘에 필적할 사람이 있으면 왕 노릇 하는 것은 망하게 된다." 봉건을 많이 한다는 것은 혈연에 봉토를 나누어주고 지방을 장악하게 하는 통치술이며, 주 왕실의 지방 통제술이기도 하다. 이러한 '세'의 통치술을 유세한 사람은 신도(愼到)다. 「신세」는 글 전체가 신도의 사상을 대변한다. 『한비자』 「난세」에도 신도의 사상이 우회적으로 나타나 있다. 앞에서 나는 신도가 『노자』 사상의 한 원천임을 밝혔다(다음 참조). 이 글(26)도 신도와 연결될 수 있다. 반면 "고요함은 조급함의 주인이다"라는 말은 "고요히 안정하면 더위를 이길 수 있으니 맑고 고요해야만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45)"라든지 "허함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돈독히 한다(16)"는 말 등과 통한다. 곧 주정(主靜)의 사유다. 고요함을 견지한다는 것은 무위의 다른 표현이다. 이 점은 이미 설명하였다(다음 참조). 이 때문에 군자는 하루종일 길을 가도 옷과 음식을 실은 수레 곁을 떠나지 않으며, 비록 호화스러운 궁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평소의 거처에서 담담히 기거한다 是以君子終日行, 不離其輜重. 雖有環館, 燕處則超然 여기의 '군자(君子)'는 왕필본 등에는 '성인(聖人)'으로 되어 있다. 장석창은 "하루종일 길을 가는 것"은 성인의 할 일이 아니므로 군자가 맞다고 하였다. '치중(輜重)'에 대해서는 오징과 설혜의 설명이 좋다. 오징에 따르면 "군자가 길한 일로 길을 갈 때는 승거(乘車)를 타고 군사들은 병거(兵車)를 타는데 두 수레가 모두 가벼운 수레다. 이 가벼운 수레 뒤에 치거(輜車)가 있어서 침식에 소용되는 물건을 싣는데 그것을 중거(重車: 물건들이 무거우므로)라고 한다. 비록 가벼운 수레에 타고 있더라도 하루종일 중거와 서로 떨어지지 않으므로 길한 행차에는 하루에 50리를 가고, 군사가 행군할 때는 하루에 30리를 가게 된다. 가벼운 수레에 탔다고 감히 빨리 나아가고 질러가면서 뒤에 있는 치중을 돌보지 않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빠르게 갈 수 있다고 경거망동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다. 설혜에 따르면 "치거란 원래 옷을 실은 수레인데 앞뒤를 막고 길 가는 사람의 의·식과 기계 등을 싣게 되니 그 무게가 무겁기 때문에 치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환관(環館: 環官)'은 통행본에 '영관(榮觀)'으로 되어 있다. 이 말에 대한 기존의 주해는 세밀히 따지면 가지각색이고, 크게 보면 두 가지다. 호화로운 궁관이라는 견해(하상공·성현영·왕진 등)와 좋은 볼거리라는 견해(육희성·오징 등)가 그것이다. 전자에서 '관(觀)'은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궐각(闕閣)이 있는 건물이라는 뜻이고, 후자에서는 볼거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백서에서는 '관(觀)'이 '관(官: 館)'으로 되어 있다. 이 글자는 전자의 견해를 뒷받침해준다. 또 고명은 '환(環)'이 '영(榮)'과 통한다고 하였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백서의 '환관'은 호화로운 궁관이라는 의미다. 정리조는 백서의 '환관'이 '환관(闤官)'과 같은 글자로 여객이 쉬어가는 곳이라고 하였다. 이런 곳은 대단히 소란스럽고 분주하므로 평소에 기거하는 곳과 대비된다. 충분히 하나의 설이 된다. '연처(燕處)'는 '연거(燕居)'와 같은 말로(설혜) 조정에서 물러나와 거처하는 곳을 가리킨다. 『예기』의 한 편명인 '공자연거(孔子燕居)'라는 말에서 이런 용례를 발견할 수 있다. 앞의 호화로운 궁관과 대비되는 말이다. 이와는 달리 하상공은 '연처'가 후궁의 처소를 가리킨다고 하면서 앞에 나온 '호화스러운 궁관'과 같이 멀리해야 할 대상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백서에는 가운데 '즉(則)'자가 있어서 이렇게 보기 어렵다. 본문처럼 구두해야 할 것이다. '초연(超然)'은 고고히 솟아올라 얽매임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설혜). 하루종일 길을 가도 치중에서 떨어져 경거망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거운' 처신의 묘사라면 호화스러운 궁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평소 기거하는 곳에서 담담히 안정을 유지하는 것은 '고요한' 처신의 묘사다. 어찌 만승의 왕이 되었으면서도 그 몸으로 천하에 경거망동하겠는가. 가벼우면 근본을 잃을 것이고, 조급하면 주인을 잃을 것이다 若何萬乘之王, 而以身輕於天下. 輕則失本, 躁則失君 양계초(1922)는 『노자』의 시대를 문제삼으면서 '만승(萬乘)'이란 말은 춘추시대에 쓸 수 있는 용어가 아니라고 하였다. '승(乘)'은 말 네 필이 이끄는 전차로 춘추시대에는 만승의 전차를 거느릴 만한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이 문장에서 통행본의 '주(主)'가 백서에는 '왕(王)'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노자』가 전국시대 말기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에 더욱 힘을 실었을 것이다. '왕'은 주나라 천자만이 쓸 수 있는 말로 만승의 전차를 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제후가 왕으로 참칭하는 것은 전국시대의 일이기 때문이다. 왕진에 따르면 "그 몸으로 천하에 경거망동한다"는 말은 황제가 미복으로 갈아입고 저자에 나가 미행을 즐기는 잘못된 풍습을 경계한 것이다. 오징은 주나라 왕이 팔준(八駿)을 타고 노닐었던 일과 한나라 황제가 미행했던 일 등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경(輕)'은 가볍게 움직인다는 뜻이다(오징). "가벼우면 근본을 잃을 것이다"는 "가벼우면 신하를 잃을 것이다"로 되어 있는 판본도 많다(하상공본 등). 하지만 백서를 보면 잘못이다. 『한비자』 「유로」에서는 이 글을 조나라 무령왕(主父)의 일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무령왕은 대단히 영명한 군주로 조나라의 영역을 크게 확대하고 국력을 키워놓았지만 일찍 그 자리를 자식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결국 왕자들 사이의 분쟁에 휘말려 맥없이 굶어죽고 만 인물이다. 『한비자』에 따르면 무령왕이 일찍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준 것이 치중(나라)을 떠난 것이고, 그 결과 무령왕은 "근본도 잃었고" 군주의 지위도 잃게 되었다. 이 글(26) 첫머리에 소개한 신도의 사상과 호응하는 결론이다. 큰 것으로 작은 것을 부리고 무거운 것으로 가벼운 것을 부리며 많은 것으로 적은 것을 부리는 것 이것이 왕 노릇 하는 사람이 집안을 이루어 온전히 할 수 있는 길이다 ―『여씨춘추』 「심분람·신세」 [重爲輕根, 靜爲躁君]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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