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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칼럼

몰트만이 말하는 그의 신학

by 이덕휴-dhleepaul 2021. 10. 26.

1. 희망의 신학(1964년)

 

내가 이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은 1964년에 출간된 "희망의 신학"을 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원래 내가 의도한 것은 그 시절에 잡지 "Evangelische Theologie"(개신교 신학)에서 이루어진 "약속과 역사"에 관한 논의에 대해 나의 입장을 표명하려는 것일 뿐이었다. 여기서 나는 게하르트 폰 라트(Gehard von Rad), 발터 침멀리(Walter Zimmerli), 한스-발터 볼프(Hans-Walter Wolff), 한스-요하힘 크라우스(Hans-Joachim Kraus) 등에 의해 대변된 "구약성서신학"과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에 의해 세워지고 특히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äsemann)에 의해 수정, 발전된 "신약성서신학"을 중재하려고 했다. 앞에서 거론한 구약성서학자들의 관심의 초점이 하나님의 약속의 역사에 있었다면, 불트만의 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약속과 신앙 안에서 실천된 "역사의 종말"의 현재적 종말론에 의해 규정되었다. 에른스트 케제만은 이를 다음과 같은 그의 도발적인 테제로써 문제삼았다: "묵시문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어머니이다." 그가 말한 "묵시문학"은 물론 세계의 종말에 일어날 사건에 관한 사변이 아니라, 언제 하나님이 그의 나라에서 참으로 하나님이 될 것이며, 언제 그의 정의가 세계 안에서 승리할 것인가를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이 "역사의 사건"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미 현재하는 것도 결코 아니라는 점을 전제한다.

나 자신의 신학사상은 괴팅엔 대학에서 발터 침멀리와 에른스트 케제만에게서 배운 내용을 통하여 이미 이런 방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홀랜드의 신학자 아놀트 반 룰러(Arnold van Ruler)를 통하여 나는 "사도직의 신학"을 주목하게 되었고, 그리스도교의 사도직이 "종말을 바라봄"(Walter Freytag)으로써 메시야적인 동기를 갖는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었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의 책 속에서 나는 종말론적 희망과 역사적 실천의 이러한 상관관계를 다루었다.

그 후에 나는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희망의 철학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1960년에 일어났다. 나는 스위스에서 휴가를 갖는 동안에 "희망의 원리"(Prinzip Hoffnung)를 동독판으로 읽었고, 이 책에 너무나 매료되었기 때문에 스위스 산의 경관을 감상할 틈도 갖지 못했다. 그 즉시 받았던 나의 인상(印象)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 자신의 가장 본래적 주제인 이 희망을 내팽개쳤는가? 원시 그리스도교의 희망의 영은 오늘의 그리스도교 어디에 남아 있는가?

 

나는 희망의 "신학"에 착수했다.

나는 성서의 약속의 신학과 묵시적 희망의 신학, 사도직의 신학과 하나님 나라의 신학, 유물론적 성분을 지니고 있고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실천을 지향하는 희망의 철학을 서로 결합하였다. 나는 에른스트 블로흐를 계승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 나는 그를 추종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당시에 칼 바르트가 바젤에서 의심한 것처럼, 내가 그의 희망의 원리에 그리스도교적인 "세례를 베풀려고"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그 자신의 전제를 근거로 삼아 비교해 보려고 했다. 블로흐가 현대적인 무신론만을 희망의 근거로 생각했고, "무신론이 없다면, 메시야적 희망도 없다"는 테제를 제시했다면, 나는 처형당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켜서 세계의 미래의 주님으로 삼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다. 블로흐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위로를 받는 사회적 유토피아를 철학적으로 다시 복권시켰고, 그래서 "억압당하고 멸시받는 자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정의의 유토피아를 실천하려고 했다면, 내게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희망과 성서적인 하나님 증언에 기초한 기다림이 중요한 것이 되었고, 사회적 유토피아와 정의의 유토피아를 수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물론 우리의 논의는 자주 단순한 양자택일로 빠졌다: 블로흐는 초월성이 없이 초월하고, 나는 초월성을 지니고 초월한다. 블로흐는 하나님을 거부하면서 희망하고, 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희망한다.

 

"희망의 신학"에 착수할 때, 나는 중세기의 "사랑의 신학"과 종교개혁 시대의 "믿음의 신학" 다음으로 희망, 그 근거와 그 미래, 그 경험과 그 실천, 즉 - 지금껏 실로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 그리스도교 신학의 대상을 우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는, 임마누엘 칸트가 천명한 것처럼, 현대의 유일한 종교적 질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의 신학은 현대적인 신학이다. 하지만 책을 써 내려가는 중에 내게는 희망이 점점 더 강하게 신학의 주제가 되었다. 나는 더 이상 희망에 관하여 신학하지 않고, 희망으로부터 신학했다. 신학적으로 희망으로부터 사고한다는 것은 신학 전체를 이 초점에 모아서 이 희망의 빛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인식한다는 것을 뜻한다: "종말론적인 것은 그리스도교에 덧붙여 있는 그 무엇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매개체이고, 모든 것을 조화시키는 음색이며,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기대되는 새 날의 여명의 빛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학은 그 미래의 목표로부터 생각되어야 한다. 종말론은 그 마지막이 아니라 그 시작이어야 한다"(12쪽). 그러므로 종말론(마지막 일들에 관한 이론)만이 아니라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역사를 거쳐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신학의 모든 이론들은 다르게 나타나며, 새롭게 반성될 수 밖에 없다. 나의 "희망의 신학"은, 그 당시의 역사의 경험, 그리스도교적 역사이해와 역사적 실천과 관련을 맺으면서, 나의 전제들과 가능성의 틀 안에서 이러한 일을 해내었다: "신앙이 희망으로 나타날 때면, 언제나 신앙은 잠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하게 하며, 참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참지 못하게 한다...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자는 더 이상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고난당하며, 이에 저항하기 시작한다"(17쪽).

 

그러나 자연철학이나 자연과학과 관련된 창조론 분야는 아직까지 새롭게 형성되지 않았다. 에른스트 블로흐가 기꺼이 받아들였던 "우주적 종말론"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1245쪽) 외에는 "희망의 신학"에서는 그것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당시의 나는 묵시적 종말론에 나타난 "우주의 역사화"를 생각했다. 나는 하늘과 땅의 새 창조, 즉 요한 계시록 21장으로부터 창조론을 구성하려고 했고,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더 이상 창세기 1장으로부터 창조론을 구성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1964년에는 "생태학적 위기"가 아직 내 의식 속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그 당시의 우리는 여전히 역사의 충격 때문에 더 경악하였고, 그 가능성에 더 사로잡혔다. 1985년에 이르러서야 나는 1964년 이래로 내게 절박한 것으로 느껴지던 창조론을 출간할 수가 있었다.

 

1964년에 희망, 새출발이라는 주제는 말하자면 이제 막 떠오르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위해 문호를 개방했다. 미국에서는 민권운동(Civil-Right-Movement)이 극에 달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가 생겨났다. 교회일치운동은 큰 진보를 이룩하였다. 이전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많은 것들이 60년대에는 가능해졌다. 그러나 1968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희망으로 인해 쓴 환멸을 맛보았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쳐 "희망의 신학"의 한 가지 사상이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관점, 즉 "창조적인 제자도(弟子道)"의 관점 안에서 역사적 해방과 종말론적 구원을 함께 보는 시각이었다: "종말론은 악한 세계로부터의 영혼의 구원, 개인적 구원, 시련당한 양심의 위로만을 뜻하지 않고, 종말론적인 정의의 희망의 실현, 인간의 인간화, 인류의 사회화, 온 피조물의 평화를 뜻하기도 한다"(303쪽). "그리스도교의 희망이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미래를 바라봄으로써, 사귐을 창조하고 정의를 구현하며 질서를 형성하는 사랑 안에서 창조적인 제자도가 종말론적으로 가능해진다"(309쪽). 요한 밥티스트 메츠가 60년대에 이루어진 그리스도교-맑스주의의 대화 속에서 발전시킨 정치신학은 이 영향을 받았다. 제임스 콘(James Cone)이 미국의 억압받는 흑인들의 인권 운동(Black Power Movement)을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한 흑인신학은 이 사상을 수용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츠(Gustavo Gutiérrez)의 해방신학도 역시 이런 노선으로 기울었다. 한국의 민중신학은 이 관점 안에서 예수의 민중(오클로스)을 하나님 나라의 민중으로 발견했다. 나는 채 알지 못했지만, 많은 영역에서 이러한 역사적-종말론적 관점을 옹호하는 새로운 실천적 장(場)들이 발견되었다.

 

교황 바오로 2세가 1983년에 니카라과를 방문했을 때, 그는 사제들에게 백성의 정치적 해방운동에 참여하지 말고 백성이 영생을 얻도록 도울 것을 권고했다. 이러한 양자택일을 그 당시의 우리는 그릇되다고 선언했다. 나는 영생을 믿기 때문에, 백성의 삶을 위해 투신하게 된다. 나는 치명적인 억압권력에 맞서서 싸우는 백성의 저항에 참여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는다. 여기서 "종교적으로 단지 영생만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세속적으로 단지 이 세계의 변혁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주장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나누는 자이다.

 

 

2.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년)

 

그리스도교 희망의 신학적 근거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부활이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신학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는 자는 항상 다시금 이 근거의 다른 측면, 즉 부활한 자의 십자가를 회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희망의 신학"의 그리스도론적 출발점의 논리에 속해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몸소 지려고 할 바로 그때에 "창조적인" 것이 되는 그리스도의 제자도 실천으로부터도 나왔다. 그러므로 나는 1970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정치신학이 형성되어 감에 따라 나는 이전보다 더 강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신학, 교회와 사회에게 던져 주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려고 애썼다. 성공과 행운을 찬양하고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대해 눈이 어두운 문화 속에서, 실패하고 고난당한 그리고 수치스럽게 죽어 간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회상시켜 주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에 대해 눈을 떨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를 일으켜 세계의 희망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회상시켜 주는 것은 교회로 하여금 권력자들과의 결탁을 끊도록 하고 억압받는 자들과 연대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Umkehr zur Zukunft, 1970년, 14쪽).

 

나는 "희망의 신학"에서 의도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다시금 시도했다. 즉 나는 전체 신학을 하나의 초점, 즉 십자가에 모았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관점 안에서 신학의 많은 내용들을 이전과 달리 보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게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거와 비판"이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자 앞에서 견딜 수 있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신학이다. 여기서 견디지 못하는 것은 신학에서 사라져야 한다. 이 점은 그리스도교적인 하나님 진술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마가가 시편 22편의 구절로 해석하는 큰 소리를 지르며 죽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림당한 그리스도의 이 외침은 모든 신학의 종말이든지 아니면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인 신학의 시작이다. 모든 신학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앞에서 욥의 친구처럼 서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버림당한 신학적 이유를 말함으로써, 신학자들은 모두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그의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버림당한 그리스도의 외침이 신학의 비판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거는 신학자들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이러한 하나님 경험을 그들의 모든 하나님 사고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데 있다.

 

그 당시의 나는 루터가 1518년의 하이델베르크 신앙논쟁을 위한 주제들 속에서 기초한 십자가의 신학(theologie crucis)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능력과 영광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라는 반대형상 아래서(sub contrario) 불경한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며, 이렇게 죄인들을 의롭게 한다. 그러나 나는 질문을 뒤집어 보았다.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간을 위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이상 묻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가 그가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 그 하나님 자신을 위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었다. 골고다 위의 아들의 죽음과 결합되어 있고 그 안에서 계시되는 아버지의 깊은 고난을 깨달음으로써,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았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의 고난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난받는 하나님의 표상은 하나님의 불사성(不死性)과 함께 그의 본질적인 고난불가능성(무감정)도 가르쳐 온 서방의 신학전통과 모순되는 것이었다.

 

성서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철학적인 이러한 무감정 공리를 극복하기 시작했을 때, 나와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리라고는 나는 전혀 꿈도 꾸지 못했다. 첫 번째의 발견은 하나님의 열정에 관한 유대교적 표상이었다. 아브라함 헤셀(Abraham Heschel)은 이 표상을 갖고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해석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랍비들과 카발라 신학이 가르친 하나님의 쉐히나(Schechina), 즉 하나님이 박해당하고 고난당하는 백성 이스라엘 안에 내주한다는 표상이다. 프란츠 로젠츠바이크(Franz Rosenzweig)는 "구원의 별"에서 이를 설명한 적이 있고,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도 이를 설명한 적이 있다. 고난받는 하나님의 십자가 신학을 발전시켜 나감에 따라, 나는 이스라엘 안의 하나님의 수난사를 가르치는 유대교 신학에 접근하게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그리스도론"이라고 사람들은 종종 말했다. 내가 내 세대 위에 드리운 아우슈비츠의 그림자 안에서 골고다를 깨달았고, "아우슈비츠 이후의 유대교 신학"에서 도움을 받은 한, 이 말은 옳다.

 

더욱이 나는 전쟁 말엽에 "하나님의 고통"을 발견하고 이로써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넘어선 일본 신학자 카초 키타모리에게서 이와 비슷한 생각을 발견하였다. 그 당시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도 역시 감옥 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 내 책이 출판된 지 몇 년 후에야 나는 스페인의 철학자요 시인인 미구엘 드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에게서 "하나님의 근심"의 이론을 발견했고, 러시아의 종교철학자 니콜라이 베르쟈예프(Nikolai Berdjajew)에게서 "하나님 안의 비극"의 표상을 발견했다. 나는 나의 책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1980년)에서 이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그렇지만 나를 더 크게 놀라게 한 것은 19세기와 20세기에 영국에서 이미 하나님의 수난가능성에 관한 상세한 공개적인 논의가 있었다는 발견이었다. 친구 바론 폰 휘겔(Baron von Hügel)을 통해서 이를 알게 된 에른스트 트뢸취를 제외하고는 대륙의 신학은 온통 이 논의에 대해서 무관심했다.

이온 소브리노(Ion Sobrino)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을 심화시킬 때, 나의 십자가의 신학이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다. 이론만으로가 아니라 직접 겪은 고통을 통해서도 형성된 그의 십자가의 신학으로부터 나는 배웠다. 자유와 인권을 위해 투쟁하며 고난당하는 한국교회의 신학자들의 번역된 글들을 통하여 나는 그들과도 친밀한 사귐을 나누었다. 놀랍게도 정교회 신학의 진영에서 나의 생각에 동의한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드미트루 스타닐로에(Dumitru Staniloae)와 게바르케세 마르 오스타티오스(Geevarghese Mar Osthathios)이다. 그들은 나를 매우 감동시켰다. 또한 십자가의 신비를 위해 특별히 수행하는 카톨릭 교회의 수도회와도 연결되었다. "영혼의 어두운 밤"에 겪는 하나님 경험에 대한 관심은 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대한 비판은 "희망의 신학"에 대한 비판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일방성에 대한 비판이다. 몬댕(B. Mondin)에 의하면 이 책은 "일부러 그리스도의 한 가지 신비, 즉 십자가의 신비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로흐만(J. M. Lochmann)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하나님은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만은 아니다." 이러한 "일방성"은 분명히 방법론이기 때문에, 나는 "희망의 신학"에 대한 논쟁서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려고 했다: "나는 이 책에 나타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방성'을 다른 신학자들, 다른 신학들과 갖는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의 인정과 표현으로 이해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 무엇을 알 수 있다. 그 누구도 빙점(氷點)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이 책은 비현실적으로 모든 측면을 다 포용하려고 하지 않는, 그래서 모든 방면에 영향을 주려고 하지 않는, 열린 대화를 위한 하나의 기여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대한 논쟁서에도 나는 다시 한번 더 이 비판에 대한 나의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일방성'이 미리 선택한 주제로부터 생겨났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나는 신학의 전체를 그때마다 하나의 초점으로부터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그러자면 물론 지나친 강조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신학의 다른 교설들이 새롭게 조명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들로써 모든 면에서 정보를 제공하고 신중하게 판단하고 지혜를 만족시키는 신학 교과서를 쓸 계획도 아니었다. 이 책들을 가지고 나는 그때마다의 정신적, 신학적, 정치적 상황에 대해 특별한 그 무엇을 말하려고 했고, 그 어떤 편을 들었다. 그것들은 시대로부터 시대를 위하여 쓰여졌고, 실로 현재적인 삶의 상황과 갈등 안에 있는 신학으로 이해될 수 있다. 나는 시대를 초월하는, 순수하고도 정선된 학문적 이론의 의미를 배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이론이 주어진 시간(카이로스)의 상황 안에 있는 신학보다 더 영원에 가까운 것만도 아니다. 지나간 20여 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고독한 학자로서가 아니라 신학운동과 신학논쟁의 참여자로서 느끼면서 신학활동을 했다. 이 사실은 내가 받은 영향들과 그에 대한 나의 반응들의 다양성을 어느 정도 설명해 줄 것 같지만, 이 때문에 나의 신학을 연구하는 많은 박사후보들은 짜증이 났을 지도 모르겠다.

 

 

3.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출간된 지 비교적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교회와 성령에 관한 책을 출간했다. "이 일이 필요했는가?"라고 많은 친구들과 비판가들은 물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 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1. 십자가의 신학에 대한 연구는 나로 하여금 삼위일체론을 재구성하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골고다에서 예수와 그가 아바,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불렀던 하나님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을 나는 오로지 삼위일체론적으로만 파악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삼위일체론의 실질원리이고, 삼위일체론은 십자가의 신학의 형식원리이다"라고 나는 그 당시에 요약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고난" 혹은 "천국의 보좌"라고 일컬어지던 중세기의 유명한 삼위일체론적 그림들을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십자가의 횡목(橫木)을 손에 쥐고 있고, 여기에 죽은 아들이 걸려 있다. 그리고 성령은 죽은 아들을 일으키기 위하여 아버지 면전에서 한 마리의 비둘기의 형상으로 그에게로 내려온다. 이것은 내가 이해하려고 했던 삼위일체론적 십자가의 신학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나의 책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이위일체(二位一體)를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니케아 신경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하고 찬양하여야" 한다고 고백한 그 성령은 어디에 있었는가? 예수가 그의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역사(歷史)와 이 하나님이 아들 예수와 함께 하는 역사(歷史) 안에서 성령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러므로 저 십자가의 신학이 이위일체론적 신학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론적 십자가의 신학에 따른 성령론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 당시에 세미나와 박사후보 모임에서 성령론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그 여러 결과들을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1975년)에서 발표했다.

 

2. 다른 이유는 시대사적인 상황에 있다. 60년대에 서구 전체를 휩쓸던 학생소요가 끝난 후 서독의 개신교회는 적합성의 위기에 빠져들어 간다는 사실을 느꼈다. 사람들은 전통과 제도 속에서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그 어떤 것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질문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교회의 이러한 징조가 그 원천으로부터 자신을 갱신할 새로운 기회의 징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가 서 있던, 그리고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했던 갈림길은 다음과 같이 생각되었다: 개신교회가 자신에게 위기를 가져다 준 이 길, 즉 국가교회로부터 국민교회로 가는 길, 국민교회로부터 목회자가 국민을 위해 돌보는 교회로 가는 길 그리고 이 교회로부터 제도화된 이 사회의 종교로 가는 길을 계속 갈 것이냐, 아니면 교회가 아래로부터 나오는 능력으로써 자신을 갱신하고, 백성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공동체(회중) 교회가 되느냐의 갈림길에 있다. 같은 시기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회중교회"의 구상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교구가 변하여 공동체로 변한다!" 이 점은 라틴 아메리카의 바닥 공동체로부터 카톨릭 교회가 갱신되던 다른 현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자유로운, 함께 모인 공동체는 국가교회와 국민교회로부터 되찾지 못한 종교개혁의 약속이었다. 미국, 제3세계의 국가, 사회주의 국가의 자유교회를 방문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나는 개신교회가 "국민교회"로부터 공동체 교회"로 넘어가야 할 신학적인 근거를 마련하려고 했다. 책을 쓰려는 실천적 이념은 삼위일체론적 성령론에 관한 신학적 이념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공동체 안에서 새로이 성령을 경험하는 일이 없이는, 교회의 갱신이란 전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이 성령론의 관점 아래서 교회론과 성례론을 설명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두 책과 같이 여기서도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의 초점에 맞추어 이해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교회론에서는 너무나 다양한 주제들이 다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스라엘과 맺는 교회의 관계 안에서, 이 관계를 무시하지 않고 교회의 자기이해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또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예수의 민중"을 늘 주목하면서, 다시 말하면, 가난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주목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자기이해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못지 않게 나는 성례론, 예배론 그리고 직무론에서 항상 교회의 사귐의 형태로부터 시작하고, 이를 지향하면서 그 이론들을 새롭게 전개하려고 애썼다.

다른 두 책이 출간된 이후에는 찬성과 거부를 동반한 활발한 논쟁이 이루어졌지만, 이 책에 대한 반응은 또 다른 논쟁서가 나올 만큼 그다지 집중되지 못했다. 이 책은 교회일치운동을 강하게 지향하였기 때문에, 다른 종파들과 교파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리고 나는 침례교회와 정교회의 신학자들과 함께 성령론에 관해 새롭게 대화하였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아마도 복음주의적 교회론, 프로테스탄트적 교회론과 개혁주의적 교회론의 종파적 윤곽을 더 이상 분명히 보진 못했던 것 같다. 나도 그러한 종파적 특수성을 더 이상 중요시하진 않았다.

1975년 이후로 나는 여러 모임에서 이 책의 실천적인 기본사상을 논의하였고, "새로운 삶의 스타일. 공동체를 향한 발걸음"이라는 소책자에서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직접 말해 보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독일 개신교에서 나타난 일반적인 추세는 오래된 국민교회를 국민을 위한 종교적인 "구호교회(救護敎會)"로 계속 현대화하려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물론 공동체로부터 시작해서 공동체를 향해 가려는 새로운 착안점은 수용되었지만, "공동체 교회"라는 표어가 가리키는 것과 같은 방향전환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독일 개신교회는 목사가 돌보는 "교회 공동체"로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설문조사는 특히 대도시에서 교회라는 이 제도로부터 소리없이 빠져나가는 자들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교회를 종교적인 구호기구, 의미의 원천, 직업적인 생활동반자, 다시 말하면, 단지 소속되고 관리되는 기구로만 경험하다 보면, 교회는 공허해지고 교인들은 물이 새듯 빠져나간다. 여하튼 독자적인 결단과 능동적인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고 요구하는 자발적인 공동체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교회의 미래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를 깨닫고 제때에 방향전환을 착수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과 사람들은 좌절감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이 섬기는 주님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그들로 인하여 더 큰 신뢰성을 갖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미리 계획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세 책들이 서로 함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부작(三部作)"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다. 만약 우리가 이 세 책들을 동시에 보면, 내가 분명히 부활절과 희망으로부터 성금요일과 고난으로, 그리고 결국엔 오순절과 성령으로 인도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학의 빛을 모으는 초점들은 바뀌었다. 초점들은 매우 의미있게 바뀌었으므로 서로를 보충하며, 나로서는 불가피했던 그때마다의 일방성을 교정한다.

그런 후에 나는 신학을 하나의 초점에 모아서 요약하는 이러한 방법을 더 이상 적용하지 않고, 앞으로는 역으로 신학의 전체에 기여하기 위해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나의 논문들을 제공하려고 결심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향전환은 단순히 이론적인 이유만을 갖지 않고, 시대사적이고 생애와 관련된 계기들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