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찬송가 516장(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눅13:22-35)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31)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 여정: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심(9:51-19:27)
--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첫 번째 언급하신 때로부터 두 번째 언급하실 때까지(9:51-13:21)
--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지칭한 두 번째와 세 번째 언급(13:22-17:10)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접과 거부(13:22-30)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 함, 예수님이 갈릴리를 떠나심(13:31-33)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13:34-35)
-----수종병 든 사람을 고치심(14:1-6)
-----청함을 받았을 때의 태도에 관한 말씀(14:7-14)
-----큰 잔치 비유(14:15-24)
-----제자도의 조검(14:25-33)
-----소금 비유(14:34-35)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22-24)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여정의 둘째 단락이 22절의 누가의 해설로 시작됩니다(13:22-17:10).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22절)”
9장 51절에서 이 여정이 시작된 후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예루살렘을 언급하면서 예수님께서 승천의 기약을 위해 굳게 결심하셨다고 했습니다.
(눅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이러한 예수님의 단호한 결심과 함께 시작되는 여정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적이 있습니다.
(사50:5-9)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이제 시작되는 두 번째 단락에서는 심판을 면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완성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다루면서 다양한 잔치이야기들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설교하여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께 한 사람이 다가와 여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3절)"
그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들었지만 충분히 이해를 못했을 것이고 아마도 예수님이 해설하신 어떤 갈릴리 사람들은 예배드리다 죽고, 하나님 나라의 상징인 예루살렘 다윗 성벽에 높이 세워진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었다는 사실에 회개치 않는다면 그들처럼 모두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에 대한 질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 말씀과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연결하여 답하여 주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4절)"
좁은 문은 겨자씨 비유의 핵심주제를 생각하게 하고 있으며,
힘쓰라는 말씀은 누룩비유가 말하려 하는 내용에 연결됩니다.
기회는 많아 보이지만 실은 아주 작고 볼품이 없어 이를 취할 자가 적으며,
힘써야만 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 대수롭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거나 가볍게 취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아 보이는 그것이 큰 결과를 얻게 할 것입니다.
하찮아 보이는 그 과정이 때가 되면 엄청난 폭발력으로 완성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을 선택하는 것이 첫 번째 실천 과제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힘쓰는 것이 구원을 완성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알기에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그까짓 것으로'라고 말하는 믿음을 힘써서 끝까지 붙들고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외면을 하기에 좁은문이며 고생과 멸시가 뒤따르기에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다투지 아니하고 영광의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고전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영생을 취하는 일인 만큼 싸움도 치열할 것입니다.
(딤전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그 싸움은 인내하며 다투는 싸움이며 죄를 벗어 던지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으로 영생을 얻은 이들이 우리를 허다하게 둘러싸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하나님 나라의 입장거부
(25-27절)
마태복음에서는 좁은 문에 이어지는 길이 좁고 협착하다 하였습니다. 좁고 협착한 길이었으나 그 좁은 문으로 난 길을 통과하면 하늘의 연회장에 입장할 수 있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문은 닫히기 전에 들어가야 합니다(마25:10-12).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25절)"
주님은 이 문이 좁은 문이기에 허용된 이들이 다 들어가고 나면 곧 닫히고 말것이라 하십니다. 한번 닫힌 문은 다시 열려지지 않습니다. 무리들 중의 '어떤 사람', 수많은 '어떤 사람'들은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의 어리석은 다섯 처녀에게 닫혔던 것처럼, 또 마태복음은 7장 22절 이하의 불법을 행한 자들을 냉정하게 거부하였던 것처럼 집주인은 그들을 외면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단호한 말씀에 무리들, 곧 '어떤 사람들'은 쉽게 수긍하지 못합니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26-27절)"
주님께서 집주인에게 거부당하는 자들이 항변하는 주장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집주인의 친구였다고 주장합니다. 또 제자들이었노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집주인은 그들을 알지 못하노라며 물리쳤습니다.
그들을 '행악하는 자들'이라며 떠나가라 명합니다.
마태복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의롭다 여기며 주님의 거부에 항변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의를 불법이라 말씀하십니다.
(마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처럼 천국문이 좁은문이었던 것은 다수가 천국의 입장 메뉴얼을 무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조건은 단순하지만 엄격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쉬워보여 관심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던 고급지고 화려한 것, 지혜롭고 세련된 것들의 실체는 불법과 부정함이었습니다. 길이 넓고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들을 쫓다가 그만 불의의 바다로 흘러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결정적인 시작지점에 도달하기 전까지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신실한 태도를 유지하여야 합니다(12:35-40).
나중 된 자 먼저 된 자
(28-30절)
주님께서 무리들 중에 섞여 살았다는 것, 넓은 문이 보기 좋아서, 넓은 길을 가느라 좁은 문을 외면한 것에 대한 결과가 확연하게 드러났을 때에 있을 일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 때 무리 중에 어떤 사람으로 살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들이 소외시켰던 그들에게 소외당하게 되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28-29절)"
그들이 본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자기들이 조롱했던 선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있고 자신들은 거기에서 쫓겨나 있다는 현실이었습니다. 이들이 가슴을 찢으며 후회합니다. 또 이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갑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일찌기 숨겨진 원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놓쳤는지 그 때에갸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30절)"
그들이 무시했던 이방인들, 병들고, 가난했던 이들, 무식한 사람들, 자기 표현도 제대로 못하여 어리석다며 멸시했던 이들, 혈통과 직업, 그들의 외모를 보며 조롱하였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놀리고 이용했던 자들은 모두 소외되고 쫓겨나 있습니다.
헤롯 안디바를 여우라 하심
(31-33절)
이 때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더니 정중하게 부탁을 합니다.
그들이 위선적인 태도로 예수님께 요구한 것은 자신들에게서 떠나 헤롯의 위협을 피하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31절)"
예수님은 현재 헤롯의 통치 지역에 계십니다. 그러나 불과 수일 후면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마치실 것입니다. 그러니 헤롯은 쓸데 없는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의 속셈은 마침 헤롯의 의향을 빌미로 자신들을 불편하게 하는 예수님을 멀리 쫓아내려는 시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헤롯을 여우로 지칭하는 것을 잘 아십니다. 헤롯은 로마황제와 총독, 그리고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라는 유대사회의 주류세력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자기에게 유리한지를 정확하게 보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우가 상징하는 바는 교활함과, 무익함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들도 헤롯 못지 않게 교활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지혜에 있어서는 이들에게 지지 않으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2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헤롯에게 가서 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헤롯이나 바리새인들이나 같은 편이 되어 주님을 죽이려 할 것임을 아시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기가막힌 방법으로 그들의 불의한 협력을 폭로시키셨습니다.
이어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3절)"
헤롯에게 오늘과 내일 사역하시다 제 삼일에 완전하여 지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는 오늘과 내일은 내가 갈길을 가는데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내일, 그리고 제 삼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시간으로 규정하기 쉽지 않으나 비교적 짧은 기간이고 오늘은 현재를 포함하며, 완전하여 지는 것은 성육신이 목표한 바를 완전하게 수행함을 의미하는데 부활과 승천을 포함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의 사역, 예루살렘에서의 사역,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을 각각 의미하는 삼일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많은 선지자들이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는 자들로부터 살해를 당하였습니다(렘2:30; 26:20-23; 대하24:20-21; 왕상19:10 및 행7:52). 그들이 죽임당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거부한 예루살렘
(34-35절)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은 암탉이 새끼를 자기 날개 아래로 모으듯 자기 백성을 품에 품으시려고 애써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4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는 탄식의 부름이 자식을 부르는 애타는 어미(사31:5)로서의 하나님의 심정을 잘 반영해줍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말씀을 보내셔서 내 이름, 우리 교회를 애타게 부르십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예루살렘은 다시 무너집니다. 솔로몬 성전의 영광이 어떻게 한순간 무너졌는지, 찬란했던 다윗 왕국이 어떻게 몰락했는지 보았음에도 종교지도자들은 다시 같은 죄를 짓고 같은 심판의 길을 갑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고 이스라엘은 패망합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35절상)”
예수님은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고 하나님은 성전과 예루살렘을 떠나십니다. 얼마되지 않아 예루살렘은 로마에 함락되고 하나님은 최후 심판의 때까지 다시는 예루살렘을 이전처럼 자기 집으로 삼아 돌아오시지 않으십니다.
(마24:1-2)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렘26:6)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이들이 나중 되었지만, 그들에게도 회복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35절하)”
모든 족속, 모든 나라들,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이 함께 '마라나타'찬양을 주께 불러 드릴 때 이스라엘은 드디어 자기들의 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출처]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13:22-35|작성자 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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