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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탄생에서 죽음까지 인간 맑스

by 이덕휴-dhleepaul 2021. 12. 30.

탄생에서 죽음까지 인간 맑스

- 맑스의 성장과 현실 정치에의 입문

 

칼 맑스(Karl Marx)는 지금으로부터 175년 전인 1818년 5월 5일에 독일의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당시 독일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가장 발전한 곳이었으며, 한때 프랑스 혁명군이 점령하여 진보적인 이념을 널리 퍼뜨려 놓은 곳이었다. 변호사인 아버지 하인리히 맑스는 가족들에게 휴머니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사상을 면밀히 교육하였다. 네덜란드 사람인 어머니 헨리에테는 자녀들에게 지적으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대식구의 생활을 잘 꾸려나가는 주부였다. 부모는 모두 유태인이었다. 아홉 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맑스는 이처럼, 당시의 반동적 분위기의 프로이센에서는 보기 드물게 진보적인 지방, 진보적인 집안에서 자랄 수 있었다. 맑스는 청소년 시절에 고대 그리스의 문학과 예술, 유럽 계?주의, 고전 문학을 가까이 하는 등 풍요로운 정신 세계를 펼치며 지냈다. 유태인에 대한 불이익을 피하고자 맑스가 태어나기 직전에 개신교로 개종한 집안에서 맑스는 6살이 되던 1824년에 개신교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12살이 되던 1830년에 맑스는 트리어에 있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김나지움에 들어갔다. 김나지움이라는 것은 지금의 한국으로 말하자면 중?고등학교 정도에 비교될 수 있는 곳이지만, 배우는 과목이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맑스는 이곳에서 라틴어, 그리이스어, 역사, 철학 등을 배웠으며, 말 그대로 교양있는 젊은이로서 이후의 삶을 준비할 수 있었다. 김나지움을 졸업하면서 맑스는 ?직업 선택에 대한 한 젊은이의 고찰?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맑스는 앞으로의 자신의 일생이 ‘인류의 행복과 해방’을 향한 것이 될 것임을 약속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온 힘을 다해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택한다면……우리는 초라하고 제한된 이기적인 기쁨을 향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수백만 명의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835년에 맑스는 본 대학에 입학했다. 법률학을 전공으로 택했으나, 전공 이외에도 고대 신화나 예술사에 대한 강의도 경청하며 풍부한 교양을 쌓아 두었다. 1836년 여름 휴가 동안 맑스는 가족들 몰래 평생의 반려자 예니와 약혼하였다. 그녀는 맑스의 누나인 조피의 친구였으며, 맑스의 동창인 에드가의 누나이기도 하였다.

 

본 대학에서 1년 공부한 후 맑스는 베를린으로 갔다. 법학부에 입학한 맑스는 오히려 주로 철학과 역사, 특히 헤겔의 철학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청년헤겔학파로 알려진 브루노 바우어, 칼 프리드리히 쾨펜, 아돌프 루텐베르크 등이 운영하고 있던 <박사 클럽>이라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프로이센의 속물들의 면전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종교나 철학적 문제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의 용기를 맑스는 존경하였던 것이다. 얼마 안 있어 맑스는 모임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1841년에 맑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 철학의 차이?라는 연구 논문을 철학부에 제출했고, 1841년 4월 14일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를 받긴 하였으나, 청년헤겔학파의 지도적 인물인 맑스는 프로이센 정부의 방해로 대학에 취직할 길이 막혀 버렸다. 강단에 서기는 커녕 청년헤겔학파에게는 글을 발표할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기독교 예술에 관한 저서를 집필하기 위한 연구도 중단한 채, 맑스는 1842년 초에 ?최근 프로이센의 검열 제도에 대한 견해?라는 글로 정부를 비난하였다. 그러던 중 맑스는 1842년에 ?라인 신문?의 편집진에 들어갔다. 이 무렵은 맑스가 혁명적 민주주의자의 입장에서 공산주의자와 철학적 유물론의 입장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던 때이고, 따라서 청년헤겔학파와 결별하던 때이기도 했다. 청년 헤겔학파가 현학적 논쟁에 몰두하는 동안, 맑스는 삼림 도벌법, 출판의 자유, 포도 재배 농민들의 열악한 상태 등과 관련된 기사를 쓰면서 ?라인 신문?의 편집장으로서 활동했다.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기사들을 쓰면서 맑스는 점차 정치와 사상의 문제에서 경제 문제로 관심을 이동하기도 하였다. 훗날의 맑스 자신의 표현대로 하자면 ‘상부구조’의 문제에서 ‘토대’의 문제로 관심이 이동하였던 것이다. 결국, 통렬한 필치로 인해 1843년 3월 18일 맑스는 편집장직에서 쫓겨나야 했으며, 그 신문도 3월 31일자가 마지막 호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서의 활동 개시.

그리고 엥겔스와의 만남

 

1843년 초 크로이츠나하로 옮겨 간 “쾰른의 철학박사 칼 맑스 군과 크로이츠나하의 무직의 요한나 베르타 올리아 예니 폰 베스트팔렌 양”의 결혼이 6월 19일에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맑스는 프랑스 혁명사, 여러 나라들의 역사, 특히 헤겔의 국가철학과 법철학에 대해 공부하며 신혼을 보냈다. 맑스는 1843년 10월 다시 빠리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맑스는 시인 하이네와 알게 되었고, 1789년의 프랑스혁명 연구에 몰두했으며, 영국 부르주아계급의 경제학자들의 저술도 읽었다. 맑스는 이 시기의 연구 결과물들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세 개의 단편적인 초고로 남겨 놓았는데, 그것은 오늘날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로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러나 빠리에서 맑스가 한 가장 중요한 일은 ?독불연보?라는 잡지를 발간한 것과 노동자들을 조직한 것이다. 맑스는 1844년 2월말 루게와 ?독불연보?를 발간하고, 두 편의 글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와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을 발표하였다. 이 글들, 특히 두번째의 글은 맑스의 사상이 혁명적 민주주의에서 과학적 공산주의로 궁극적으로 이행했음을 보여주는 글로 평가된다. ?독불연보?는 열렬하게 환영받았고, 무엇보다도 잘 팔렸다. 비록 3분의 2가 경찰의 손에 들어갔지만, 3000부가 팔렸다고 한다.

 

한편, 맑스는 빠리에서 프랑스인 노동자 조직 및 독일 망명자 노동자 조직과 직접 접촉하였다. 그리하여 그 조직의 지도자들과 알게 되었고, 노동자 모임에도 참석하였다. 이곳에서 맑스는 당시 노동자계급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던 프루동, 불랑, 까베 등의 사상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사적 역할의 발견 이후 맑스는 그들을 조직하기 시작한 것이다.

 

1844년 8월, 엥겔스가 빠리에 방문함으로써 맑스주의의 두 창시자의 역사적 만남이 시작되었다. 엥겔스는 맑스보다 두 해 뒤인 1820년에 독일의 바르멘에서 대단히 보수적인 방직공장 사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였던 엥겔스의 아버지는 엄격한 부르주아적 행동규범과 정통적 신앙에 입각하여 자녀들을 키우려고 하였으나, 청년 엥겔스는 복종하지 않았다. 김나지움도 그만두고 회계실에서 일해야 했던 엥겔스는 여가를 이용하여 역사, 철학, 문학 등의 교양을 쌓았다. 청년헤겔학파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엥겔스도 맑스와 마찬가지였다. 22살 되던 1842년에 아버지의 회사를 경영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간 엥겔스는 영국의 공상적 사회주의,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노동 운동인 차티스트 운동을 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842년 11월말이었으나, 그때는 서로 냉담했다. 그러나 ?독불연보?를 통해 둘은 자신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엥겔스도 ?독불연보?에 두 편의 글을 실은 바 있다.

 

두 사람은 1844년에 공동으로 ?신성가족, 또는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는데, 이것은 제목과 같이 청년헤겔학파인 바우어와 그 무리의 견해와 대결한 것이다. 두 사람은 이 책에서 청년헤겔학파에 대해 지금까지보다 훨씬 강하게 비판하였다. 바우어 일파와의 이와 같은 대결이 필요해진 것은, 어떠한 행동과 저항도 만류하며 ‘순수한 비판’만을 내세우는 그들의 이론이라든가 역사에서의 개인의 역할에 관한 그들의 이론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출현과 이제 막 생겨나려는 노동자 계급 철학에 대한 최초의 반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맑스주의 위대한 두 창시자의 공동활동이 시작되었다.

 

 

브뤼셀로의 추방, 계속되는 조직 사업과 ?독일 이데올로기?

 

프로이센의 정부는 프랑스에 압력을 넣어 맑스를 빠리에서 추방하게 했고, 1845년 2월에 맑스는 벨기에 브뤼셀로 근거지를 옮겼다. 예니는 당국으로부터 허가받은 짧은 유예 기간 동안 여비를 마련하느라고 가구들을 터무니없이 싼 값에 팔아야 했다. 그러나 프로이센 정부는 이번에도 맑스를 가만두려 하지 않았다. 또 그곳에서 추방하려 했던 것이다. 맑스는 프로이센 당국이 자신을 고소하지 못하도록 1845년 12월에 프로이센 국적을 공식적으로 포기해야만 했다. 어쨌든 맑스는 3년 이상을 브뤼셀에서 보냈으며, 다시 경제학 연구에 몰두했다.

 

1845년 4월, 맑스는 청년헤겔학파 중 가장 훌륭하게 평가했던 포이에르바하를 비판하며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을 썼다. 이것은 맑스의 사후에야 엥겔스의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에 실려 세상에 알려졌다. 그 11번째 테제는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테제들?을 통해 맑스주의 철학과 다른 모든 철학과의 대립이 명료해졌다. 맑스주의 철학에서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설명방식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사적 역할이라는 의미에서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 문제된다. 혁명적 실천, 곧 계급투쟁이 철학의 중심이 된다. 맑스는 과학적 이론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실천을 분석할 것을 요구했다.

 

브뤼셀에서도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조직 사업은 멈추지 않았다. 최역 장교인 요제프 바이데 마이어, 독일의 천재적 시인이자 언론인 베에르트, 또 다른 혁명 시인인 프라일리그라트, 훗날 맑스가 ?자본?에서 헌사를 바치는 빌헬름 볼프 등의 동지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이들은 1846년에 ‘브뤼셀 공산주의자 통신위원회’를 구성한다.

 

1845년 여름에 맑스와 엥겔스는 영국으로 연구를 위한 여행을 떠났고, 당시 프로이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노동 운동의 지도자 바이틀링을 만났다. 바이틀링과 프루동은,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 독일 이주 수공업자들이 조직한 ‘의인동맹’이라는 노동자 조직의 지도자였는데, 이 동맹은 프랑스, 독일, 스위스, 영국등에 지부를 가지고 있었다. 노동 운동을 직접 체험하고 그 대표자들과 접촉을 갖게 된 것은 맑스와 엥겔스에게는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선거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인민 헌장’의 쟁취를 위한 영국의 차티즘 운동은 1840년에 ‘전국 차티스트 협회’라는 조직망을 가지고 있었고, 맑스는 그 지도자들과 만날 수 있었다. 차티스트들의 기관지 ?북극성?의 편집인 가운데 하나인 줄리아 하니, 또 다른 지도자 어네스트 존즈 등.

 

맑스는 브뤼셀 이주 후 계속된 연구와 영국에서의 연구를 바탕으로 ?정치와 국민경제학 비판?을 발간할 예정이었으나,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독일의 청년 헤겔 학파들이 기승을 부리자 본래의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미 여러 공산주의 지도자들과 접촉하며 공산주의 조직을 결성키로 한 맑스와 엥겔스에게는 이들 청년 헤겔학파를 분쇄하는 것이 더 급한 일로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맑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 즉 포이에르 바하, 바우어, 슈티르너로 대표되는 최근 독일 철학에 대한 비판과 여러 예언자들의 독일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저술을 쓰기 시작하였다. 1845년 11월이었다. 이 책은 미완성으로 전해져 오다가, 1932년에야 발견된 원고들을 후세의 사람들이 편집하여 출판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 동맹’을 위하여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기초가 놓이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사적 역할이 발견됨으로써, 맑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을 만들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과학적 공산주의와 노동 운동을 결합시키는 것이 모든 활동에서 중심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혁명적 당 건설의 투쟁은 실제로 1846년 초 브뤼셀에 ‘공산주의자 통신위원회’가 건설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위원회는 여러 나라에서 생겨나는 공산주의 선전 활동의 당면 과제들을 논의했다. 이 통신위원회가 설립된 이후, 맑스와 엥겔스는 다른 곳에도 이와 비슷한 위원회를 창립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런던에도 통신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맑스와 엥겔스는 이를 이용, ‘의인 동맹’을 새롭게 해 나가기 시작했다. 1846년 11월에 의인 동맹은 본부를 빠리에서 런던으로 옮겼다. 그리고 국제 공산주의자 대회를 열기로 했다. 런던 통신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의인 동맹의 지도자들은 대회의 강령을 작성하면서 부딪히는 어려움을 맑스와 엥겔스의 도움으로 해결하려 했다. 이미 의인 동맹에 가입할 것을 권유받아 왔으나 동맹의 비과학적인 이론 때문에 거부해 온 맑스와 엥겔스는 의인 동맹을 개편,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의 싹이 되게 하기로 결심했다.

 

이론적으로는 이미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의인 동맹의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 날카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비판의 대상인 이론들이란 그 당시에는 무엇보다도 바이틀링과 프루동의 학설, 그리고 역사적으로 독일인만이 진정으로 사회주의자로서의 자격이 있으며 자신들이 바로 그렇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이었다. 바이틀링과의 견해 차이는 1846년 3월의 브뤼셀 위원회 회합 자리에서 나타났으며, 프루동에 대한 비판은 맑스의 저작 ?철학의 빈곤?(1847년)을 낳았고, ‘진정한 사회주의자들’과의 대립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루어졌다.

 

1847년 6월 2일에서 9일까지 의인 동맹 대회가 런던에서 열렸다. 브뤼셀 위원회 대표로는 빌헬름 볼프가 참여하였다. 맑스는 재정 형편상 참여할 수 없었다. 빠리 위원회의 대표로는 엥겔스가 처음으로 이 동맹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이 동맹은 명칭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했고 “모든 인간은 형제다!”이던 구호를 맑스와 엥겔스의 주장에 의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단결하라!”로 바꾸었다. 한편, 맑스와 엥겔스는 1847년 8월에 망명 독일인 노동자들의 조직인 ‘독일 노동자 협회’를 결성하였다. 이 협회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것을 기초로 하여 후에 ?신라인 신문?에 연재로 기고한 것이 ?임금노동과 자본?이다.

 

1847년 11월 29일부터 12월 8일까지 런던에서 공산주의자 동맹 제 2차 대회가 열렸다. 엥겔스는 서기로서 활동했고, 맑스는 확고한 논리와 설득력은 참석자들을 매혹시켰다. 뛰어난 분별력과 방대한 지식, 굽힐 줄 모르는 의지, 끝없이 샘솟는 활력을 지녔으면서도, 부르주아지 정치가나 이전의 어설픈 사회주의자들에게서 보였던 불손함이나 거만함이 없는 그에게서 사람들은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동맹의 목적은 부르주아지의 타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 계급 대립에 기반한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폐지, 그리고 계급들도, 사적 소유도 없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다.”를 제 1조로 하는 ?공산주의자 동맹 규약?이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제출되었고, 통과되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 동맹은 강령의 집필을 맑스와 엥겔스에게 위임하였다.

 

공산주의자 동맹 회의의 성과에 만족하면서 맑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연대를 이루기 위한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맑스에게는 브뤼셀을 떠나면서 그곳의 ‘민주주의회’라는 단체로부터 위탁받은 또 하나의 사업이 있었다. 영국의 민주주의 조직과 노동자 조직을 접촉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들은 1847년 11월 29일에 1830년의 폴란드 봉기 기념일에 즈음해 ‘런던 우애 민주주의자 협회’가 개최한 국제 회의에 참여하여 ?폴란드에 관한 연설?들을 행하였다. 맑스와 엥겔스는 민족 문제는 결국 계급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공산당 선언?과 첫번째 ?신 라인 신문?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 동맹의 대회가 끝나고 나서 수개월에 걸쳐 ?공산당 선언?의 집필에 매달렸다. 유럽 전역에서 혁명이 일어나리라 예상되던 때인 1848년 초에 맑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이 정치 경제학, 철학, 역사, 노동운동 등의 분야에서 이제가지 획득한 인식들을 ?공산당 선언?에 집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공산주의자 동맹의 구호로 끝나는 이 글은 “?맑스 엥겔스 전집?과 맞먹는다”(레닌)고 평가될 만큼 총괄적이고 중요한 문서이다. ?공산당 선언?을 읽지 않고 맑스와 엥겔스를 알겠다는 것은 성경을 읽지 않고 예수를 알겠다는 것만큼이나 우스운 일이다. 반드시 읽어야 한다. 여러 번 천천히 읽어야 한다.

 

맑스와 공산주의자 동맹이 예상했던 것처럼 1848년 벽두부터 유럽은 혁명의 물결로 휩싸였다. 1848년 2월에 프랑스에서는 인민들이 금융자본가의 우두머리인 루이 필립을 몰아 내고 공화정을 선포하였다(2월 혁명). 3월 13일에는 독일의 빈에서, 18일에는 베를린에서 봉기가 일어나 반동적인 메테르니히의 경찰체제를 무너뜨렸다(3월 혁명). 3월 18일부터 22일까지는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인민들의 혁명의 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혁명의 원인은, 발전해 가고 있는 자본주의를 억누르려는 유럽의 반동적인 봉건 절대주의 세력에게 있었다. 소부르주아들과 노동자들이 절대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가장 열심히 투쟁하였고, 특히 노동자 계급은 이전의 혁명에서와는 달리 소부르주아지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맑스는 혁명이 발발하자 인민의 투쟁에서 멀어지지 않으려 했고, 모든 지식과 힘을 모아 그 투쟁에 바쳤다. 1848년 3월 1일, 벨기에의 브뤼셀에 있던 맑스는 프랑스의 혁명 임시 정부로부터 다시 빠리로 돌아와도 좋다는 편지를 받았다. 반대로 이틀 뒤에는 벨기에 정부로부터 24시간 안에 떠나라는 추방 조치를 받았다. 맑스는 떠나기 전에 자기집 거실에서 공산주의자 동맹 중앙위원회를 소집하였다. 이 중앙위원회에서는, 동맹의 근거지를 빠리로 옮기며 그곳에서 새로운 중앙위원회를 구성하는 문제를 전적으로 맑스에게 위임한다고 결정하였다. 회의를 막 마치고 사람들이 다 흩어진 후 경찰이 들이닥쳤고, 맑스는 24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야 했다. 결국 맑스는 이번에도 짐 하나 변변히 챙기지 못한 채 브뤼셀을 떠나야 했다.

 

빠리에 도착한 맑스는 공산주의자 동맹의 새로운 중앙위원회를 창설하는 일에 주력하였고, 브뤼셀에 남아 있던 엥겔스에게 빨리 오라고 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망명 중에 있던 독일의 혁명가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활동할 것을 촉구하며 ?독일 공산당의 요구들?이라는 팜플렛을 발간하였고, 자신들도 4월 초에 혁명에 가담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맑스는 이미 1845년에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기에, 쾰른 시의 참사회에 거주권을 신청해야만 했다.

 

독일에 도착한 맑스와 엥겔스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대중조직을 형성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맑스와 공산주의자 동맹의 그의 동료들은 1848년 4월말에 창설된 ‘쾰른 민주주의회’에 가입하였다. 맑스는 다른 도시에 있는 동료들에게도 자신처럼, 이미 존재하는 민주주의적 단체에 가입하여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활동을 하라고 권고하였다.

 

한편, 맑스와 엥겔스는 혁명의 성공을 위해 쁘띠 부르주아들과 함께 협력하는 형태의 하나의 기관지를 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848년 5월 31일 저녁에 6월 1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제 1호가 발간된 기관지 ?신 라인 신문?의 부제는 “민주주의의 기관지”였다. 1842년 ?라인 신문?에 이어 맑스는 여기서도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또 하나의 ?신 라인 신문?과 유럽 혁명

 

맑스의 조국 독일에서 혁명이 불붙은 듯했고, 쾰른에서 발행되는 ?신 라인 신문?을 통해 맑스는 혁명의 경험을 총괄하여 대중에게 전달하려 하였다. ?프랑크푸르트 의회?, ?프랑크푸르트 급진민주당의 강령과 좌파의 강령?, ?독일의 대외 정책?, ?봉건적 부담들의 폐지에 관한 법률 초안?, ?부르주아지와 반혁명?, ?혁명 운동?, ?라인 지구 민주주의자 위원회에 대한 재판. 변론? 등의 기사들이 그러한 역할을 담당했다.

 

위기에 몰린 정부는 마침내 이 혁명적 민주주의의 기관지에 시비를 걸기 시작하였다. 검찰은 여러 번 ?신문?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으나, 배심 재판원들은 그 소송을 기각하였다. 마침내 프로이센 정부는 비열한 방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맑스가 외국인 법(맑스는 프로이센 국적을 스스로 포기한 바 있다)을 위반했으니, 24시간 이내에 프로이센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1849년 5월 19일 ?신 라인 신문? 마지막 호는 온통 붉은 색으로 인쇄되어 나왔다. “?신 라인 신문?의 편집인들은 작별에 즈음하여 여러분이 우리에게 보내 준 관심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마지막 말은 언제 어디서나 ‘근로 계급의 해방!’일 것입니다”라는 고별사를 싣고....

 

?신 라인 신문?이 폐간된 뒤, 맑스는 무르익은 혁명적 위기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로 끝나리라는 희망을 안고 다시 프랑스로 갔다. 6월 초에 빠리에 도착하자 맑스는 곧 민주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들과 만나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1848년 6월 13일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으나 패배하고 말았고(6월 혁명), 승기를 잡은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맑스를 추방하기로 결정하였다.

 

여기서 잠깐 맑스의 추방 편력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빠리에서 ?독불 연보?에 참여한 맑스는 프로이센 정부의 압력으로 인한 기조의 명령으로 추방된다. 브뤼셀로 이주한 맑스는, 혁명 정부의 도움으로 1848년 3월에 다시 프랑스로 돌아간다. 1848년에 고국에서의 활동을 위해 독일로 돌아갔지만, ?신 라인 신문?의 폐간과 함께 추방 명령을 받는다. 다시 빠리로 돌아간 맑스는 1849년 8월 24일 런던에 도착하였다. 다행히도 더 이상의 추방은 없었고, 맑스는 1883년 숨을 거둘 때까지 런던에서 지냈다.

 

맑스는, 1848년의 유럽 혁명을 과학적으로 결산하고 혁명 이론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잡지의 형태로라도 기관지를 발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잡지의 이름은 ?신 라인 신문. 정치경제 평론?으로 결정하였다. 1849년 가을과 겨울, 맑스는 잡지 발간을 준비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자금을 조달하고, 발행인을 찾아야 했으며, 협력자를 선정하고, 주식을 발행해야 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맑스는 많은 동료와 아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새로운 ?신 라인 신문?의 창간호는 1850년 3월 6일 함부르크에서 나왔고, 1850년 11월말의 5-6호 합본호가 마지막이었다.

 

1848년 혁명은 패배한 혁명이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은 1848년의 혁명에서 최초로 다른 계급과는 독자적으로 혁명적 요구를 들고 나왔다. 노동자 계급은 자신들이 민주주의 투쟁에서 가장 단호하고 가장 일관된 사회 세력임을 보여 주었다. 맑스는 이미 ?신 라인 신문. 민주주의의 기관지?에서 자신의 철학으로 정치적 사건 및 투쟁을 이론적으로 해석한 것처럼 이러한 작업은 ?신 라인 신문. 정치경제 평론?에서도 자신의 철학을 역사적 변혁 및 계급 투쟁과 직접 결합시켜 그 올바름을 입증했다.

 

새로운 ?신 라인 신문?에 실린 가장 대표적인 글은 ?1848년에서 1850년까지?라는 4회에 걸친 연재물인데, 이는 후에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이라는 하나의 책으로 출판된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을 분석한 글인데,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정식화된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을 일정한 시기의 역사적 사건들을 평가하는 데에 처음으로 적용한 것이다.

 

 

혁명의 패배, 그리고 공산주의자 동맹 해체

 

?신 라인 신문. 정치경제 평론?의 활동과 함께, 맑스와 엥겔스는 혁명의 실패로 파괴된 공산주의자 동맹의 여러 지부들을 재조직하면서 동맹을 재건하였다. 이때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맑스와 엥겔스가 집필한 ?중앙위원회가 동맹에 보내는 호소? 시리즈였다.

 

?호소?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입장의 독자성은 쁘띠 브루즈아 민주주의자들로부터 이데올로기적으로만이 아니라 조직적으로도 엄밀히 선을 그음으로써 확보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독일의 노동자들, 특히 공산주의자 동맹은 독일에 노동자의 독자적인 비밀 조직과 공개 조직을 결성하고, 동맹의 지부를 합법적인 노동자 연합체들의 구심점으로 만드는 것을 위해 활동해야 한다고까지 강조하였다. 이 ?호소?들과 그 밖의 보고서와 성명서 등은 독일과 영국 등의 민주주의적 신문에 실렸고, 동맹의 재건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1850년 여름에 공산주의자 동맹 안에서 빌리히와 샤퍼가 주도하는 ‘좌파’가 형성되어 맑스와 의견이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맑스는 혁명이 실패한 상황에서의 주요 과제는 새로운 투쟁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간부를 모집해 그들을 이론적으로 단련시키는 것이라 생각했고, ‘좌파’는 혁명의 퇴조기입에도 모험주의적인 전술을 고집했다.

 

결국 1850년 9월 15일에 열린 공산주의자 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소수파’인 ‘좌파’는 맑스의 새로운 전술 제안을 거부한 채 퇴장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좌파’는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무시한 채 동맹의 런던 지구 회의에서 자신들을 중앙위원회라고 칭하고, 맑스와 엥겔스 등을 제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맑스는 쾰른의 지구 위원회에서 1850년 9월 15일 새로운 중앙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851년 5월과 6월 독일에는 체포의 물결이 밀려왔다. 반동 세력은 혁명 운동을 뿌리뽑고자 하였고, 결국 공산주의자 동맹이 그 대상이었다. 페터 노트융, 하인리히 뷔르거스, 로란트 다니엘스, 헤르만 베커, 페터 게르하르트 뢰저, 프리드리히 해쓰너 등의 열성적인 동맹원들이 체포되었다.

 

체포의 계기는 위의 ‘분리파’(빌리히-샤퍼 일파)의 모험주의적인 행동이 경찰에 적발된 것이었다. 경찰은 ‘분리파’로부터 입수한 많은 자료들을 날조해, 체포된 공산주의자 동맹원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했다. 체포를 면한 맑스와 엥겔스는 동지들의 재판을 위해 무죄를 입증하는 자료들을 변호사에게 보내왔고, 그 가족을 위해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재판이 날조된 자료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는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에 대한 폭로?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공산주의자 동맹 회원들의 체포와 재판에서의 유죄 판결은 사실상 동맹 조직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852년 11월 17일, 동맹 런던지구의 한 집회에서 맑스는 동맹 지방조직을 해체할 것을 제안하였다. 동맹이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에 많은 공헌을 한 것을 사실이지만, 맑스는 동맹이 어느 시기에나 적합한 프롤레타리아트 당 조직의 모범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총체적으로 볼 때, 동맹의 활동은 프롤레타리아트 해방 운동의 초기에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는 이 조직의 규정적인 성원들이 대공장의 노동자가 아니라 몰락하는 직인이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동맹은 4백 명 이상의 회원을 규합하지 못하는 수적 열세를 보이기도 했다. 동맹의 조직원들은 언제 어디서나 불멸의 강령 ?공산당 선언?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동맹을 해산했다.

 

 

반동의 시대, 경제학 연구

 

1850년대는 지독한 반동의 시대였다. 프로이센에서도 물론 절대주의가 강화되었다. 민주주의적 언론과 노동자 언론은 탄압받았으며 노동자들의 단체들은 깨져 나갔다.

 

맑스도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혁명적 신문이나 출판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예전처럼 새로운 잡지를 만들 돈은 커녕 생계마저 막막했다. 맑스는 1851년 여름에야 아메리카의 신문인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고정 기고자로 지낼 수 있었지만 형편이 나아진 것은 없었다. 쓸만한 것들은 모두 전당포로 갔고 보다 싼 곳으로 계속 이사를 다녀야 했다. 맑스와 예니 사이에 태어난 일곱 남매 가운데 셋만이 병과 굶주림으로부터 살아남았다.

 

다음의 편지 글들은 시련에 처한 맑스의 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자네는 내가 모든 것을 혁명투쟁에 바쳐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네. 오히려 그 반대지. 다시 한번 삶을 시작한다 해도 나는 똑같은 일을 시작할 것이네”(1866년 8월 13일, 후에 사위가 된 라파르그에게). “나는 이른바 ‘현실적인’ 사람들이나 그들의 진리에 개의치 않습니다. 만일 사람이 황소이고자 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인류의 시련에 등을 돌리고 제 몸만을 걱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1867년 4월 30일, 마이어에게).

 

당시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투고한 글들은, 새로운 사상을 확립한 것들이기보다는 반동의 시기에 벌어지는 상황들을 ?독일 이데올로기?와 ?공산당 선언?에서 확립한 사상으로 해석하고 선전하는 것들이었다. 이것은 맑스주의를 지키는 길이었으며, 공산주의자 동맹을 해체할 때 동지들과 했던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 기사들의 대상은 무척 다양했다. 인도나 아일랜드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 있는가 하면, 에스파냐 인민과 이탈리아 인민의 자유를 위한 투쟁도 있다. 중국의 아편 전쟁이 있는가 하면, 영국과 인도, 독일, 프랑스, 러시아, 아메리카 등지의 경제 발전도 있다. 영국과 프로이센의 전쟁이 있는가 하면, 나폴레옹 3세의 정복 정책에 대한 멕시코 인민의 투쟁이 있다. 폴란드의 봉기가 있는가 하면, 아메리카의 내전이 있다. 유럽 열강의 군사 외교 분쟁, 금융 투기, 정권의 위기 등이 있는가 하면, 전쟁과 경제 공황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연구는 늘 프롤레타리아트의 절박한 과제에서 출발됐다. 그의 관심사는 이를 토대로, 노동자계급이 또 다시 혁명적으로 약진하는 상황 속에서 주어진 역사적 조건에 부합하며 과학적 근거를 가진 계획을 전개하고 또한 실천의 요구와 일치하는 전략 및 전술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62년 3월 맑스는 ?뉴욕 데일리 트리뷴?과 관계를 청산한다. 1861년에 벌어진 아메리카의 남북 전쟁에 대해 맑스는 노예제 폐지가 인류의 진보를 가져다 줄 것이라 했으나, 편집진은 노예제를 옹호하는 남군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반동의 시대였던 1850년대와 60년대에 맑스가 행한 또 하나의 주요한 일은 정치경제학 연구에 몰두한 것이다. 이로부터 수십 년동안 정치경제학은 맑스의 주요한 연구 분야가 된다. 1840년대의 혁명이 실패한 후 1867년 ?자본? 제 1권이 출판되기까지의 약 20년 동안, 맑스는 자신의 주요 저작인 ?자본?의 예비 작업 및 예비 연구격으로 일련의 광범위한 원고를 작성하였다.

 

혁명 운동이 퇴조하고 자본주의가 비교적 평화롭게 전개되기 시작하자 맑스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사회 구성체의 객관적 법칙성을 연구하는 데 몰두한다. 1850년대와 1860년대에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심화가 주로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을 완성해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함으로써, 유물론적 역사관의 정당성을 하나의 특정 사회 구성체라는 역사적 재료를 통해 확증했을 뿐만 아니라 유물론적 역사관의 보편 타당성에 보다 깊고 구체적인 이론적 근거를 주었다.

 

이 시기의 맑스의 작업은 다음과 같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한 기본 개요?(1857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제 1분책?(1859년), ?잉여 가치 학설에 관한 이론들?(1862-3년), ??자본?의 첫번째 초고?(1863년), ?자본. 제 3권?(1865년).

 

 

국제 노동자 협회에서의 활동과 ?자본? 출간

 

1863년말 맑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맑스는 약간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또 맨체스터에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빌헬름 볼프로부터 맑스는 800파운드를 유산으로 받았다. 가족과 동지의 죽음으로 맑스의 재정 사정은 처음으로 호전되었다.

 

맑스는 영국에서 열릴 노동자 국제 대회에 독일 노동자 대표로 참여해 달라고 부탁받았고, 맑스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1864년 9월 28일에 영국의 세인트 마틴 홀에서 국제 노동자 협회(제 1 인터내셔널)가 창립되었다.

 

1864년 이래 맑스는 국제 노동자 협회를 위해 지칠 줄 모르고 활동했다. 이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 조직이 떠맡은 역사적 과제는 진보적인 유럽 국가들과 이제 막 부상하는 아메리카의 노동운동을 맑스주의와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 설정 아래 맑스는 이전까지는 우호적으로 대해 왔던 라쌀레주의, 바꾸닌주의, 프루동주의, 블랑끼주의 등과 첨예한 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맑스는 ?국제 노동자 협회 임시 규약?과 ?발기문?에서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 노동자 계급 자신의 일일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분명히 하였다.

 

이토록 노동자 계급의 국제적 조직이 올바른 길을 걷도록 노력하는 한편, 맑스는 그동안의 여러 연구를 결산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해부하는 저서를 집필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맑스는 과중한 업무로 두통과 불면증에 늘 시달렸으며, 부스럼증과 류마티스까지 맑스를 괴롭혔다.

 

마침내 1867년 9월 14일 ?자본? 제 1권의 초판 1,000부가 발행되었다. 이 위대한 저작의 출간은 수십 년 동안의 경제학 연구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맑스는 그 동안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경험 속에서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이 책은 맑스 자신의 말대로 “확실히 부르주아지의 머리로 날아갈 가장 효과적인 미사일”이었다.

 

맑스는 이 책을 빌헬름 볼프에게 바쳤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 훌륭한 인물과 여러 해 동안 함께 혁명 활동을 하면서 깊은 우정을 나누어왔다. 그 책의 속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잊을 수 없는 나의 벗, 담대하고 충실하며 고매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선구자. 1809년 6월 21일 타르나우에서 태어나, 1864년 5월 9일 망명지 맨체스터에서 타계한 빌헬름 볼프에게 바친다.”

 

맑스는 ?자본? 출간으로 생기는 수입으로 물질적 곤궁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대가는 그가 언젠가 농담삼아 이야기한 것처럼 글을 쓸 때 피울 담배 값도 안 될 정도였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맑스는 엥겔스의 도움으로 금전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갔다. 엥겔스 본인은 물론이려니와 맑스 또한 엥겔스가 순전히 금전적인 이유로 회사일에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엥겔스가 1869년 6월 회사일을 그만두기로 하면서 맑스에게 “만세! 오늘로서 따분한 상업을 끝냈다네. 그리고 나는 자유인이라네”라는 편지를 보낸 것이나, 맑스가 “이집트 감옥과 같은 곳에서 자네가 탈출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라고 그 편지에 답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막상 독일에서는 ?자본? 제 1권 초판 1,000부가 다 팔리는 데도 4년이 걸렸지만, 책이 나오자 여러 나라에서 번역하여 출판하겠다고 하였고 그 반응은 독일보다 나았다. 1872년에 3,000부를 인쇄한 러시아 어판은 3월 27일 인쇄가 끝났는데, 5월 15일에 이미 900부가 팔렸고 연말에는 다 팔렸다. 또 1872년에서 1875년에 걸쳐 맑스는 프랑스 어판을 위해 수정 작업에 힘썼다.

 

맑스는 ?자본?의 제 2권과 3권은 완성시키지 못했다. 엥겔스가 그 원고를 검토하고 편집하여 각각 1893년과 1894년에 출판하였다.

 

노동자 계급의 국제적 연대와 제 1 인터내셔널을 위한 맑스와 엥겔스의 그 밖의 활동이 잘 나타나 있는 글들로는 ?노동자 계급은 폴란드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임시 중앙 평의회 대의원들을 위한 개별 문제들에 대한 지시들?, ?합중국 전국 노동자 동맹에 보내는 글? 등이 있다.

 

 

최초의 노동자 권력

 

1870년 5월에 기만적 국민 투표를 통해 절대 권력을 장악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는 그 해 7월에 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인터내셔널은 이에 대한 입장을 맑스에게 위임했다. ?국제 노동자 협회가 전쟁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처음 발표된 이른바 ?독일-프랑스 전쟁에 관한 총 평의회의 첫번째 담화문?에는, 전쟁의 성격과 그것이 세계 노동자 계급에게 미칠 영향이 이야기되고 있다.

 

이 전쟁은 정의의 전쟁도 국민의 전쟁도 아니었다. 위대했던 나폴레옹 시대를 흉내내고픈 루이 나폴레옹의 어설픈 허영심이 전쟁의 동기였다. 그러나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국내 인민의 저항을 분쇄하고 독일을 프로이센(호엔 쫄레른 왕조)에 병합하려던 비스마르크가 아니었다면 이 독일-프랑스 전쟁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두 왕조의 야심을 채우려는 전쟁에 대해 인터내셔널이 반대한 것은 물론이었다.

 

어쨌든 전쟁의 결과로 루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 2 제정은 조종을 울렸다. 제정을 지지했던 왕조적 당파들이 물러나고 공화파들이 권력에 가까이 있는 듯이 보였다. 1870년 9월의 ?두번째 담화문?에서 맑스는 “적(독일)이 이미 빠리 성문을 두드리려고 하는 시점에서 새로운 정부를 전복하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은 자포자기에 빠진 어리석은 짓일 것”이라며, 프랑스 노동자 계급이 처한 “극히 어려운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프랑스 노동자들은 시민으로서의 자신들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프랑스 노동자 계급은 공화주의적 자유가 자신들에게 가져다 준 수단을 냉정하고도 단호히 이용하여, 자기 계급을 확실히 조직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1871년 3월 18일, 빠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을 일으켜 빠리를 장악하였다. “빠리 꼬뮌”이 성립된 것이다.

 

위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실 맑스는 빠리 노동자들의 조급한 행동에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일단 사태가 전개되자 맑스는 열정적인 혁명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를 지원하였다.

 

모든 곳으로부터 고립된 상황을 이용하여 부르주아 언론들은 꼬뮌의 상황을 왜곡하여 보도하였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꼬뮌을 있는 그대로 알게 하는 일이 첫번째 일이었다. 맑스의 사위 라파르그, 러시아의 뾰뜨르 라브로비치 라브로프, 예리사베따 드미드리예바 등의 사람들이 꼬뮌과 인터내셔널을 직접 연결해 주었다. 이를 토대로 총평의회의 주도 아래 꼬뮌과의 국제적 연대운동이 일어났다. 꼬뮌 기념일 행사날 시위와 집회가 개최되는 것이 세계 여러 나라의 노동 운동의 전통이 된 것은 맑스가 지도한 인터내셔널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결국 빠리 꼬뮌은 백 일만에 띠에르 정부에 의해 진압되고 만다.

 

이제 맑스가 할 일, 그리고 실제로 한 일은 두 가지였다. 먼저 맑스는 6월 초부터 영국에 도착하기 시작한 꼬뮌의 난민들과 그 가족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들에게 거처할 집과 직장을 마련해 주고 옷가지라든가 가재 도구 등을 구입할 자금을 모으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였다. 빠리에서 위대한 혁명 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맑스의 집에서 언제나 따뜻한 대접을 받았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후에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런던에 망명해 있는 동안 당신과 맑스의 집은 유일하게 진정한 형제애로 넘쳐 흐르는 안식처를 제공해 주었고, 나에게 우정과 친절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또 맑스는 인터내셔널 총평의회 활동의 하나로, 빠리 꼬뮌의 경험을 총괄하였다. 꼬뮌을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맹아로, 즉 부르주아 국가 기구를 대체할 노동자 권력의 한 형태로 인식한 것은 맑스의 커다란 업적이었다.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사회주의적 목적에 이용할 수 있다는 개량주의적 환상의 분쇄, 낡은 국가기구의 강제적 폐지의 사상 등은 빠리 꼬뮌의 경험을 분석한 결과이며, 이는 ?프랑스 내전?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총괄되었다.

 

 

‘국제 노동자 협회’의 해체와

각국에서의 공산당 건설 투쟁

 

유럽의 정부들은 빠리 꼬뮌의 진압 이후 진행해 오던 꼬뮌 참가자들에 대한 탄압을, ?프랑스 내전?의 발간 이후에는 그 저자와 인터내셔널 회원들에 대해서도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맞아 프롤레타리아트 운동, 특히 인터내셔널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조직적 과제를 분명하게 해야 했다.

 

1871년 9월, 런던에서 인터내셔널 협의회가 열렸다. 맑스의 개회 연설에 따르면, 협의회의 주요 과제는 “상황이 요구하는 것에 발맞추어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는 것”에 있었다. 무정부적이고 조합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투쟁의 중심 축으로서의 ‘독자적인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그것이었다. 다음의 결의안이 최종적으로 정리되었다 : “소유 계급의 총체적인 무력에 맞서 스스로 소유 계급의 모든 낡은 정당 형태와는 다른 특수한 정당으로 구성하지 않는 한, 노동자 계급은 하나의 계급으로서 활동할 수 없다.”

 

물론 무정부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의 반대가 있었다. 특히 바꾸닌주의자들은 런던 협의회의 결의에 반대하며 독자적인 회의를 열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해 맑스와 엥겔스는 ?인터내셔널의 이른바 분열?이라는 글을 통해 바꾸닌주의자들의 “화려한 문구로 치장된” 강령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노동자 운동은 이미 ‘분파’의 수준을 넘어섰으며 이제 국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조직형태로 나아가야 함을 밝혔다. 또 토지 국유화를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조치로만 바라보는 영국의 개량주의자들에 대해 맑스는 ?토지 국유화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비판했고, 후에 총평의회는 부르주아적 영향의 진원지인 뉴욕 제12지부를 인터내셔널에서 제명했다.

 

1872년 9월 헤이그 대회에서는 마침내 “인터내셔널의 사활이 문제로” 되었다. 런던 협의회의 결의의 정신을 규약과 강령에 반영하는 일이 중요한 안건으로 제기되었고, 바꾸닌주의자들의 비밀 동맹 문제가 맑스에 의해 폭로되었다. 그들과의 대립은 갈수록 날카로와졌고, 1873년 제네바 대회에는 주로 스위스 인들만 참여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제네바 대회를 준비하는 동안 맑스는, 인터내셔널이 역사적 사명을 다했으며 이제 중심적인 과제는 프롤레타리아트 세력을 각국의 틀로 단결시켜 인터내셔널의 강령을 기초로 일국적인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들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1876년 7월 15일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인터내셔널의 해체가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맑스의 가장 화려한 활동의 한 페이지도 끝났다. 후에 맑스의 장례식에서 엥겔스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인터내셔널은……실로 그 설립자가 그 밖에 다른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두고두고 자랑할만한 업적이었다”라고 썼다.

 

맑스와 엥겔스가 제일 먼저 프롤레타리아 정당 강화 활동에 착수한 곳은 자신들의 조국 독일이었다. 1870년대에 독일의 공산주의자는 크게 두 파로 갈라져 있었다. 하나는 라쌀레를 중심으로 하는 ‘전독일 노동자 협회’였고, 다른 하나는 리프크네히트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이었다. 이들은 1875년 5월 고타에서 ‘독일 통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 통합했다. 독일 노동자 계급 운동의 내부 분열이 종식된 것이다. 그러나 라쌀레의 주장이 강한 이른바 ‘고타 강령’은 소부르주아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었고, 맑스는 이에 대해 ?고타 강령 비판?을 썼다.

 

1875년 말 ‘포르투갈 사회주의당’의 건설 시도, 1877년 말 스위스 ‘사회민주주의당’의 건설, 1879년 10월 마르세이유 노동자 대회에서의 ‘프랑스 노동당’ 성립, 1879년 ‘벨기에 사회주의당’의 출현 등은 인터내셔널의 활동의 결과였고, 맑스와 엥겔스는 이에 적극적으로 간여했다.

 

한편, 이즈음에 맑스와 엥겔스는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러시아의 혁명가들과 교류를 가졌다. 그 결과는, ?공산당 선언?의 ?러시아 어 제 2판 서문?(1872년)에 있는 “러시아의 혁명이 서구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가 되어, 그리하여 양자가 서로를 보완한다면, 현재 러시아의 토지 공동 소유는 공산주의적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맑스의 죽음과

그 후의 엥겔스의 활동

 

1881년 여름, 맑스는 간암 진단을 받은 아내 예니를 데리고 맏딸 예니 부부가 있는 프랑스로 떠났다. 그곳에서 맑스는 딸 엘레노어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딸의 건강이 호전되어 아내에게 달려 온 맑스도 이제 앓아눕는 신세가 되었다. 부부가 모두 침대에서 앓다가 맑스가 이제 기력을 되찾아 아내를 돌볼 수 있게 된 1881년 12월 2일, 예니는 세상을 떠났다.

 

예니의 죽음은 맑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의사는 예니의 장례식이 있던 12월 5일 맑스에게 집에 있으라고 권유할 정도로 맑스의 건강은 좋지 못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엥겔스가 맑스 대신 모든 장례 문제를 처리해 주었다.

 

아내의 장례를 마치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 맑스는 ?자본? 2권과 3권의 완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83년 1월 큰 딸 예니마저 병으로 죽고 말았다. 맑스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기관지염은 더욱 악화되어 급기야 후두염으로까지 발전하였고, 2월에는 폐렴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1883년 3월 14일 오후, 맑스는 의자에서 잠시 쉬던 도중 숨을 거두었다. 그때 나이 65세였다.

 

1883년 3월 17일 맑스는 런던의 하이게이트 공동 묘지에 묻혔다. 아내와 함께 누워있는 맑스의 묘지 앞에서 평생 동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은 조사를 낭독하였다.

 

“「유럽의」 정부들은 절대 왕정과 공화정을 막론하고 그를 추방하였고, 부르주아들은 보수파와 급진파를 막론하고 날조된 비방을 그에게 가했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거미줄처럼 옆으로 밀쳐 버리고 무시해 버렸으며 오직 어쩔 수 없는 경우에나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어서 시베리아의 광산 노동자들로부터 유럽 전체와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수백만 혁명 동지들의 존경과 사랑과 애도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많은 적대자들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인 적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세기에 걸쳐 이어질 것이며 그의 저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맑스가 세상을 떠난 후, 엥겔스는 둘의 몫을 해야 했다.

 

먼저, 맑스가 원고 형태로 남겨둔 글들을 정리하여 출판하는 일이 있었다. ?자본?은 제 1권의 경우에도 그러했지만 (“드디어 이번 권이 끝났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자네 덕일세”, ?1867년 8월 16일 맑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특히 제 2권과 3권은 엥겔스의 노력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둘째, 사회 민주주의자들을 지도하는 일이 있었다. 베벨과 카우츠키를 통해 엥겔스는 런던에서 조국 독일의 운동에 대해 정보를 입수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곤 하였다. 프랑스, 아메리카, 영국, 러시아 등의 나라의 사회주의자들과도 교류를 유지하며 지도하였음도 물론이며, 그 결과 1889년에는 ‘제 2 인터내셔널’이 창립되었고 1891년에는 ‘가능주의자’와 통합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엥겔스는 맑스와 함께 수립한 이론을 정리하고 또 그것에 입각하여 새로운 사회 현상들을 분석하기도 하고 새로운 분야에 대한 자신들의 입론을 전개하는 일도 하였다.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1884년),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1886년),??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의 서문?(1895년) 등이 그것이다. 그 밖에도 ?공산당 선언?의 새로운 판에 서문을 쓰는 일과 새로운 외국어 번역판을 교열하고 서문을 다는 일들이 있었다.

 

일흔이 넘어서도 쉰으로 보인다던 엥겔스도 1895년 8월 5일 눈을 감았고, 그리하여 맑스주의의 두 창시자 모두 세상을 떠났다. 엥겔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레닌이 쓴 추도의 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제사는 다음과 같았다 : “이성의 횃불이 타오르기를 멈추었도다, 심장이 뛰기를 멈추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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