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자: 2022년 3월 13일 주일 낮 예배
말씀: 말4:1-6/약1:14
제목: 믿는 자들의 미혹(시험)
선포: 대한예수교장로회 만나교회담임 이덕휴목사
-들어가는 말씀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습니다. 그래서 욕심은 파괴력 그 자체입니다. 성경은 탐
욕을 금하고 있고, 탐심을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있습니다(골 3:5). 탐심은 결코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일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고생고생하며 큰 교회로 발전한 경우의 목사님들 상
당수가 자수성가로 오판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판단의 오류 때문에 교회의 내적 외적 성장의 대부분 내지 상당부분을 자신의 몫으로 생
각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런 저런 명분을 내세워 교회를 사유화하는 사례가 적지 않
습니다. 결국 한 평생 고생하며 목회한 결과가 그 탐심 때문에 우상숭배로 마감되는 셈이
니,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내재된 죄의 유혹
죄는 속이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유혹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끌려다니고 “미혹된다”(야1:14). 죄는 인간의 이성을 의무로부터 물러나게 하고, 대신 감정을 유혹한다.
“네 악한 생각이 네 마음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렘4:14). 이 모든 생각들은 메신저처럼 왔다 가며, 그것으로 죄를 실행하게 된다. 그러한 생각들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감정들을 더욱 더 자극한다.
죄는 항상 이성에 죄의 심각성을 경감시키고 경시하게 한다. “그것은 작은 실수일 뿐이다”라고 그것은 말한다. “그것은 금방 그만 둘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변명들로 죄는 미혹된 영혼들에게 말을 건넨다. 영혼의 일부분이 이 은밀한 음성-거짓 술수로부터 비롯된 비밀스런 아부-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될 때, 감정은 이미 꾐에 빠졌음이 명확하다.
영혼이 순순히 이러한 유혹들을 경청할 때,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감정들을 잃어버린 것이고,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죄는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는”(잠23:31) 포도주처럼 유혹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죄는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다”(잠23:32)
감정들을 유혹하고 얽어매고자 어떻게 죄가 속이는가?
첫째, 그것은 이성의 성향을 이용한다. 만일 이성이 영리한 새와 같다면, 죄는 그것을 잡아채지 않을 것이다.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겠거늘”(잠1:17) 그러나 만일 그 새가 정신을 빼앗겼다면, 그 날개는 그 올무에서 벗어나는데 거의 쓸모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죄는 유혹한다. 그것은 거짓 이론과 구실들로서 위험에대해서 이성을 눈멀게하고, 그후 그를 얽어매고자 감정에 그물을 던진다.
둘째, 죄는 생활의 격언들을 이용하고, 죄가 바람직한 것이라고 제시한다. 죄는 상상을 통하여 “죄악의 낙”(히11:25)을 누리도록 촉진시키기위해 수천가지의 거짓으로 물체들을 도금한다. 사람이 모세처럼 이 쾌락들을 경시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것들로부터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죄 안에 사는 자들은 사도가 말씀하시길, “연락하는”(야5:5) 자들이다. 그것은 그것들에 대한 욕망에 육신을 ?추기 때문에 즐겁다. 그래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는 경고가 주어진 것이다. 육신의 정욕으로 너 자신을 허비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그 정욕은 죄가 당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통하여 불어넣은 것이다. 우리에게 “육체의 욕심을 채우지 말라”(갈5:16)고 또한 경고하신다. 인간들이 죄의 권세 아래 살 때, 그들은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엡2:3)을 행하게 된다. 죄는 영혼을 꾈 때, 죄를 무언가 아름답고 만족을 주는 것으로 색칠함으로써 영혼을 유인하는 상상력을 설득한다.
셋째, 그것은 죄와 함께 수반되는 위험을 감춘다. 죄는 덫을 미끼로 감추고, 음식을 그물 위로 뿌린다. 물론, 영혼이 위험을 감지하는 것을 죄가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는 사실을 제거하거나 혹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하나님의 인정하심”(롬1:32)을 숨길 수는 없다. 그러나 영혼이 그 위험을 깨닫지 못하도록 죄의 미혹과 욕망으로 마음과 감정을 사로잡고 휘감는다.
2. 시험의 힘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은 믿는 자들의 큰 의무이다. 하나님은 사실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신다”(벧후2:9). 그러나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커다란 의무이다. 우리의 구세주는 자신의 제자들을 염려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며”(마6:13). 우리 주님은 시험의 힘을 아시기에, 그것을 말씀하셨고, 그분은 얼마나 우리가 그것에 공격받기 쉬운 줄을 아신다(히2:18). 그분은 우리에게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순종에 대해 상을 주신다(계3:10).
시험을 면하기 위해 시험의 힘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 시험은 많은 기본적 이슈들을 초래하기 때문에, 성경은 그것에 관해 많은 말씀을 하신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얇게 흙이 씌워진 돌짝 밭에 뿌려진 씨를 다음과 같이 비유하신다.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눅8:13). 말씀의 가르침은 그들을 감동시킨다. 그들은 믿는다. 그들은 고백을 한다. 그들은 몇몇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눅8:13). 한번 시험을 받으면 영원히 가버린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살펴보고 검증하여야 하며, 누구도 그 자신의 영혼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잠 28:26) 베드로가 자신을 자랑할 때 그러하였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마14:29). 그것은 그의 어리석음이자 그의 자기-확신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시험이 오기 전에는 그토록 아름다운 약속들을 한다. “만물 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예17:9). 시험이 닥쳤을 때, 그것은 수천가지의 변덕과 배반을 일삼고, 시험은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호4:11)듯이 마음을 빼앗는다.
3. 영혼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부적절한 방법
명예에 대한 사랑
자기의 지위와 직업에 의해 사람은 교회에서 존중과 존경을 얻는다. 그래서 어떤 이들을 논쟁한다, “이 정욕, 혹은 그 유혹, 혹은 이러 저러한 공적인 악과의 거래에서 무릎 꿇음으로인해 하나님의 교회에서 그러한 명성을 잃는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는 마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공격에 방어막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강한 논쟁처럼 보인다. 그들은 심지어 교회에서 그들의 평판을 잃는 것보다 차라리 죽겠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늘의 별 삼분의 일”(계12:4)은 무엇인가? 그들이 창공에서 빛나지 않았던가? 그들이 전적으로 그들의 영예, 지위, 세력, 그리고 명성에 무지했던가? 용이 그의 시험들과 함께 왔을 때, 그는 그것들을 땅으로 던졌다. 명예욕보다 더 좋은 방어막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시험을 다루는 데 있어서 부적당한 장비를 갖춘 것이다. 슬프게도, 위대한 명성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유일한 방어막이 자신들의 훌륭한 이름에 놓여있을 때 그 파멸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하늘의 별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것이 당신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수치와 치욕에 대한 두려움
시험들에 따라오는 수치와 치욕을 자기 자신에게 인지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관심은, 그러나, 세상의 주목을 받고 질책을 당하는 공개된 죄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이 동기들은 양심의 죄나 마음의 죄를 다룸에 있어서는 무의미하다. 시험에 대적하기 위한 우수한 방어막으로서 이것에 의지할 때는 무수한 변명들이 그 마음에 제공된다.
만일 우리가 오직 평안을 유지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다면, 대적은 우리를 다른 방향에서 공격할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우리의 방어를 위한 갑주의 일부분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1)고 명령받았다.
시험의 힘
이제까지 살펴본 것의 조명 아래 시험의 힘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시험의 힘은 마음을 어둡게 하고 그래서 사람이 그가 시험에 들기 전에 했던 것들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한다. 이 세상 신은 인간의 영혼을 눈멀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한다(고후4:4). 이처럼, 모든 시험의 그 본성은 시험받게 될 인간의 영혼을 어둡게 한다. 이것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첫째, 상상력과 생각이 어떤 사물로 꽉 차게 되어, 그것을 돕고 구원해줄 수 있는 그러한 것들로부터 마음을 돌이키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를 용서해주셨거나 혹은 그를 미워하신다고 믿도록 시험을 받을 수 있는데,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제시된 여러 방편들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을 만큼 낙담하게 된다. 한편, 그는 자신을 목표로 하고 있는 시험에 마침내 사로잡히게 된다.
시험은 또한 영혼의 기질을 혼란시킴으로 인해 마음을 어둡게 한다. 당신 주위를 살펴보면 얼마나 쉽게 시험이 사람들의 감정을 미혹하는 지 알 수 있다. 소망, 사랑 그리고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에 대한)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나의 그의 눈이 감겼음을 지적할 것이다. 사물에 그의 현재의 판단은 추상적인 것이고 그의 의지는 박약하다. 광기가 재빨리 뒤따른다. 죄에 대한 증오, 주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과 존재에 대한 인식은 떠나고 마음은 대적들에게 기원할 뿐이다.
마침내, 시험은 우리의 욕망들을 일깨우고 자극시킴으로 해서 그 욕망들에 연료를 공급해주고, 끝도 없는 불안에 끌려들어 가게 된다. 하나의 유혹은 – 그것이 정욕이든 아니든 혹은 비뚤어진 태도든, 혹은 그밖의 다른 것이든 – 그의 절대적인 집념이 된다. 우리는 확실한 시험에 직면할 때까지 잘못된 행동에 대한 흥분, 성냄, 그리고 자긍심을 알지 못한다. 마음이 어두워지고, 그의 감정이 미혹되고, 그의 정욕들이 불타오르는 자들의 삶은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그의 방어막들은 부셔지고 만다. 그에게 무슨 희망이 남아있는가?
결론:
“왜 시험에 대하여 그렇게 마음을 씁니까?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야1:2)고 명령하시지 않았는가?”. 그렇다, 우리는 이러한 시험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사도는 “부한 형제는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하라”(1:10)고 권고하신다. 그러나 야고보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로다”(1:12). 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실 때는, 그분은 결코 우리를 꾀지 않으신다. 모든 사람들은 그 자신의 정욕으로 인해 시험당한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이 우리를 꾀어 미혹하지 않도록 깨어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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