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 철학의 개념 -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
2강 : 진리와 인식 1 - 진리의 기본 개념, 합리와 이성
3강 : 진리와 인식 2 - 비판과 종합
4강 : 존재의 탐구: 형이상학과 존재론
5강 : 보편과 개체, 물질과 생명
6강 : 가치란 무엇인가
7강 : 선의지와 공리주의, 미와 예술
8강 : 사회철학과 역사철학의 기본개념들
1강: 철학의 개념 -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
# 강좌의 목적
이 강좌의 목적은 서양철학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외워야 할 기본개념들을 숙지하는 데 있다.
철학은 철저한 암기과목이다. 철학의 기본개념들에 대한 암기가 전제된 후에야 그것을 징검다리 삼아서 좀더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있고 비판적 사고와 토론도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강의는 <<철학의 제문제>>를 기본으로 삼아 진행한다. 그 책에서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생각되는 것들을 추려내어 '진리와 인식', '존재의 탐구', '가치의 세계', '현실과 역사'라는 주제로 강의할 것이다. 매주 나누어주는 텍스트는 두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대개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와 <<철학의 제문제>>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참고할 책'은 텍스트에 등장하는 내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철학원전을 제시한 것들이다. 그러니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의 기본저작들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강의방식은 텍스트를 함께 꼼꼼하게 읽어나가면서 철학의 기본개념들을 설명하는 것인데, 수강생들은 텍스트의 주옥 같은 문장들을 음미해가면서 읽기를 바란다.
강의에 들어가기 앞서서 각자 자신이 왜 철학을 공부하려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철학을 공부하면 사람이 된다는 판단 하에 공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무식함이 부끄러워서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해서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견 사소한 문제 같으나 이것을 생각해 보지 않으면 공부가 지적 허영에 빠지고 만다. '철학을 왜 공부하는가?' 각자 깊이 생각해 본 다음, 7번째 강의시간 때 A4 용지 반매 분량으로 제출해 주기 바란다. 첨삭을 해서 돌려 주겠다.
# 학문(Science/Wissenschaft)의 정의와 학적탐구의 범위
철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philosophy?)라는 질문은, 곧 철학의 정의(definition)를 묻는 것이다.
이처럼 무언가의 정의를 물을 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 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즉 류(類)와 종차(種差)를 정하는 것이다. 가령 철학의 정의를 물으면 철학이 속하는 상위 카테고리를 생각해야 한다. 철학의 상위 카테고리는 학문(wissenschaft)이다. 회사원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면 먼저 회사를 생각해야 한다. 풀로엮은집은 무엇인가를 물으면 사설교육기관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면 동물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했을 때 '이성적'은 종차이고 '동물'은 류에 해당한다. 종차는 그 종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가리킨다. 그런데 종차는 객관적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임의로 규정해야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철학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학문이 무엇인지 해명해야 한다. 학문에 해당하는 것을 나열해 놓고 철학에게만 있는 고유한 특성을 뽑아내는 것, 이것이 오늘 강의의 주제이다.
학문을 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영장류가 아무리 지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학문을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성찰이 없는 학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크게 보아 '합리적/이론적' 측면과 '의지적/실천적' 측면을 동시에 지닌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의 머리 속에 순수하게 떠오르는 생각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해서, 그것을 일상생활 속에 실천해가며 살아갈 수는 없다. 사람에겐 이론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직관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문은 인간의 '합리적/이론적' 측면만을 자신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 논증가능한 측면만을 다루는 것이다. 근대 이후의 학문, 자연과학과 수학을 모범으로 삼아서 체계를 세우려 했던 학문들이 특히 그러하다. 학문은 체계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제1원리로부터 시작해서 최종귀결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체계 아래 꿰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문이 성립되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은 체계를 세울 수 없기 때문에 학문이 될 수 없다. 요컨대 학문이 다루는 대상은 인간과 세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학문만이 인간과 세계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할 수 있다는 학문만능주의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플라톤의 <<법률>>을 읽어보면 이를 느낄 수 있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국가의 인간이 5040명이다. 5041명이면 한명을 죽여야 하나? 이 숫자는 1에서 7까지 곱하면 나오는 수이다. 7은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이다. 그러니 학문을 식초원액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도록 하자. 식초원액을 그대로 마실 수 없듯이, 학문도 내 삶에 희석시켜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지식의 독에 빠져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린다.
물론 체계를 세울 수 없어 보이는 학문들도 있다. 인문학에서는 역사학이 대표적이다. 아주 보수적인 학문관을 지닌 이들은 역사학은 체계를 세울 수 없는 학문이기 때문에 그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역사에는 그것을 하나로 꿰어줄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학을 하나의 과학적 학문으로서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역사학자들의 고민이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실증주의 역사학이 생겨났다. 실증사학의 방법론을 취하는 역사학자들은 역사에서 객관적인 실체만 드러내고자 한다. 거기서 교훈을 이끌어 내지 않는다. 자연과학에서는 생물학을 들 수 있다. 아주 완고한 의미에서의 과학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생물학을 과학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과학은 일정한 법칙을 만듦으로써 앞날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하는데 생물학은 그렇지 못하다. 실험을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일정한 법칙을 만들 수 없다. 멘델의 유전법칙을 보라. 돌연변이가 있다.
우리는 학문이라고 이름붙은 것들만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다. 누구나 시, 소설, 역사이야기 등을 향유할 수 있어야 풍요로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은 근대 이후에 학문같지 않은 것으로 배제되었다. 철학도 자연과학과 비슷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엄밀하고 합리적인 토대 위에서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전개되어야 마땅한 것이지만, 그렇다 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실천적이고 의지적이고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측면까지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길 바란다. 철학은 인간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지 않는다. 따라서 철학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고 있는 역사학, 문학 등을 폭넓게 공부해야 한다.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살고있는 21세기와 우리 이전의 과거가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 속에서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도록 하자. 중앙정계에서 소위 잘 나가던 퇴계 이황이 갑자기 낙향하여 도산서원을 차린 이유는 무엇일까? 퇴계가 선현에 뜻에 따라 한 일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학문하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퇴계가 당시 마주하고 있었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자. 퇴계가 살았던 조선이란 국가는 성인으로서의 군주와 군자로서의 신하가 협력하여 운영하는 도학적 정치체제였다. 공부를 해야만 관직에 오를 수 있고 국가를 통치할 수 있었다. 왕도 신하도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매일같이 경연을 열어 왕과 신하가 국가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를 공부하곤 했다. 세종같은 왕은 신하들보다 공부를 월등히 잘 해서 신하들이 몸서리를 쳤다. 그런데 퇴계가 살았던 조선중기에는 공부 안 하는 외척들이 관직을 차지하여 통치하기 시작했다. 퇴계는 여기서 절망한 것이다. 결국 국가의 기강이 무너졌다는 판단 하에 교육시스템부터 근본적으로 다시 만들고자 사설학원을 차려 유생들을 교육시킴으로써 도학적 정치체제를 부활시키려 한 것이다. 이처럼 컨텍스트를 알아야 텍스트의 실체가 눈에 들어온다. 자신이 읽는 텍스트가 만들어진 시대의 역사적 맥락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텍스트가 온전하게 읽힐 수 있다. 역사와 철학의 연결고리를 항상 염두에 두길 바란다.
역사를 알았으니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추동하는 가장 강력하고 근본적인 힘은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학문인 정치경제학에 대해 알아야 한다. 수리경제학을 전공으로 하는 경제학 교수들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지 않는다. 수학만 잘 하면 되기 때문이다. 과거에 만들어진 철학이 그 시대와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학문하는 주체로서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견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철학의 기본개념, 역사학, 정치경제학, 이상의 세 가지가 교양으로서 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 알고 있어야 하는 것들이다.
# 철학을 공부하는 방법
"예컨대 우리들은 플라톤 속에서 신칸트주의를 읽어내어서는 안 되고 또 아리스토텔레스 속에서 스콜라 철학을 읽어내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절대적인 무전제성이란 있을 수가 없으므로, 또 앞으로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정신과학자들은 그 시대의 아들이어서, 자기 자신의 척도를 넘어설 수가 없으며, 특히 자기 자신도 절대로 의식하지 못하는 궁극적 세계관적 가치판단과 태도결정에 의해서 항상 판단을 내리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전제성을 완전히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오히려 이 객관성을 일종의 이상으로서 꽉 붙들고 있어야만 한다⋯ 철학사를 과학적 비판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숙명적인 오류들로부터 철학적인 사색(Philosophieren)을 보호할 수가 있다. 이 숙명적인 오류들이란, 심미적인 관찰에 빠져드는 것, 해석을 한다기보다 오히려 그 해석에 휘말려드는 그런 주관적인 '해석', 때로는 영감이 풍부하나 근본적으로는 아무런 체계도 없고 내용도 없는 변증법, 다루고 있는 개념들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그냥 그 말에만 얽매어 있기 때문에, 심각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겉보기만 번지레한 문제들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소위 '사변' 및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순히 학문장사에 지나지 않고, 그 시대의 소위 정신생활에서 장사하기를 일삼는 '철학' 등을 말한다."(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서론)
이 장에서 힐쉬베르거는 철학을 공부하는 기본적인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들은 플라톤 속에서 신칸트주의를 읽어내어서는 안 되고 또 아리스토텔레스 속에서 스콜라 철학을 읽어내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플라톤과 신칸트주의하고 역사적으로 누가 먼저인가? 플라톤이다. 내가 빈델반트, 하르트만과 같은 신칸트주의자들의 책을 읽고서 그것을 가지고 플라톤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을 이해하려면 플라톤 안에서 읽어야만 한다. 굳이 참조한다면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를 참조하면 된다. 데카르트를 이해하기 위해서 스피노자를 가져올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면 무한히 연쇄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내용은 없다. 데카르트를 공부한다면 데카르트의 언어를 가지고 결론을 봐야 한다.
"물론 절대적인 무전제성이란 있을 수가 없으므로, 또 앞으로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철학자들도 사람인 이상 완전한 의미에서의 물려 받은 지적 유산이 없는 상태에서 선행하는 시대와는 무관하게 맨땅에서 출발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이 절대적인 무전제성이다. "그 이유는 모든 정신과학자들은 그 시대의 아들이어서, 자기 자신의 척도를 넘어설 수가 없으며, 특히 자기 자신도 절대로 의식하지 못하는 궁극적 세계관적 가치판단과 태도결정에 의해서 항상 판단을 내리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정신과학은 Geisteswissenschaft의 번역어이다. 'Geist(정신)'과 'wissenschaft(과학)'가 합성된 말이다. 이 문장은 철학자들이라고 해서 시대를 벗어날 수는 없으며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관적 가치판단과 태도결정에 의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이것을 '무의식적 전제성'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심하게 작용한다면 편견이 된다. 요컨대 인간은 선행하는 지식과 그 시대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이는 철학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전제성을 완전히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오히려 이 객관성을 일종의 이상으로서 꽉 붙들고 있어야만 한다." 힐쉬베르거는 무전제성이란 말을 객관성이라는 말로 다시 표현한다. 시대 속에서 절대적인 무전제성이란 있을 수 없고 모든 학문은 시대성에서 결정되고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관적 가치판단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전제성을 포기할 수도 없다. 철학에는 이렇게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요구가 있는 셈이다. 시대제약적인 것과 시대와는 무관한 절대적 객관성. 이것이 바로 철학사를 연구할 때 가져야 하는 태도다.
철학사는 먼저 철학적인 사유가 역사적인 제약 속에서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밝혀준다. 또 그 시대뿐만 아니라 선행하는 철학자들의 학설이 어떤 관계 속에서 이어지는지, 예컨대 칸트는 흄과 어떤 관계가 있고 칸트는 피히테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철학에서의 문제의식의 선행관계도 밝혀준다.
요컨대 철학사는 어떤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적인 무전제성에서 시작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시대성에 놓여있는 철학자들은 항상 절대적인 무전제성에서 출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즉 앞서 말했던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요구를 결합시키려 노력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철학사를 과학적, 비판적으로 읽게 되면 어떤 장점이 있을까?
"철학사를 과학적 비판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숙명적인 오류들로부터 철학적인 사색(Philosophieren)을 보호할 수가 있다. 이 숙명적인 오류들이란, 심미적인 관찰에 빠져드는 것, 해석을 한다기보다 오히려 그 해석에 휘말려드는 그런 주관적인 '해석', 때로는 영감이 풍부하나 근본적으로는 아무런 체계도 없고 내용도 없는 변증법, 다루고 있는 개념들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그냥 그 말에만 얽매어 있기 때문에, 심각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겉보기만 번지레한 문제들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소위 '사변' 및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순히 학문장사에 지나지 않고, 그 시대의 소위 정신생활에서 장사하기를 일삼는 '철학' 등을 말한다."
심미적인 관찰 – "이 철학자 너무 좋아" 등의 비철학적인 태도.
주관적인 해석 –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읽지 못한다는 것
변증법 –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체계없이 이리저리 말을 돌려내는 사변적 궤변. 라볶이를 보고 라면과 떡볶이의 변증법이라 오바하는 짓.
정신생활에서 장사하기 – 그 사람이 살아가는 시대적 맥락과 무관하게, 정신적인 면만 강조하여 학문을 팔아먹는 짓
# 철학과 과학의 구분
"'sophia'는 두 가지 사태에 대해서 대립되는 의미로 쓰여진다. 그 하나는 '무지'에 대립되는 의미로서의 sophia이다. 이 때의 sophia는 '지식knowledge'을 의미하니 철학을 이런 의미에서 '지식의 추구'로 이해하는 경우, 과학과의 구별이 용이치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도 '무지'를 극복하려는 지적 노력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식의 추구'로 말하자면, 철학은 저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그 탐구대상과 권위를 마땅히 과학에 양도하여야 할는지도 모르며, 또 꽁트의 말처럼 인간의 지식은 형이상학적 단계를 극복하고 실증적 단계에 이르러 완성된다고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과거의 철학설들이 미숙한 형태로 다루었던 문제들은 이제는 과학의 문제로 환원되어 과학적인 방법으로 탐구되어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어지고 있을 뿐더러, 종래의 철학문제는 대부분 그 자체가 진정한 문제라고 볼 수 없는 사이비 문제이며, 그 한없이 다양한 견해들도 우리의 지식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무가치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과학만이 참된 지식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철학의 과학으로서의 이러한 고양내지 해소는, '지식'으로서의 sophia의 탐구를 철학으로 이해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 지식으로서의 Sophia
Sophia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흔히 지혜로서의 sophia와 사랑하다의 philia가 합쳐져서 철학이 되었다는 말을 하곤 한다. 좀 다른 것을 생각해 보자.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을 아는가? 철학선생 중에 sophia를 보고 성 소피아 성당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건축은 굉장히 뚜렷한 역사적 상징물이다. 예술적인 것이기도 하면서 실용적인 것이다. 즉 건축가의 예술적인 욕구가 배어있으면서도 다른 한편 사용자에게 최대한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요구가 응축되어 있는 산물인 것이다. 성당의 이름이 sophia인 것도 신기하지 않은가? 크리스트교적 전통에서 sophia는 그렇게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들은 기도로 사는 사람들이지 지혜로써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철학과 과학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어떤 부분에서 공통된 지점이 있는지, 따라서 철학자들은 어떤 지점을 기반으로 닦고 출발해야 하는지를 우리는 아래의 글에서 살펴볼 수 있다.
"'sophia'는 두 가지 사태에 대해서 대립되는 의미로 쓰여진다. 그 하나는 '무지'에 대립되는 의미로서의 sophia이다. 이 때의 sophia는 '지식knowledge'을 의미하니 철학을 이런 의미에서 '지식의 추구'로 이해하는 경우, 과학과의 구별이 용이치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도 '무지'를 극복하려는 지적 노력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식의 추구'로 말하자면, 철학은 저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그 탐구대상과 권위를 마땅히 과학에 양도하여야 할는지도 모르며, 또 꽁트의 말처럼 인간의 지식은 형이상학적 단계를 극복하고 실증적 단계에 이르러 완성된다고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sophia는 '지식knowledge'과 '지혜wisdom'이라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철학과 과학의 공통된 목적은 무지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서 지식(knowledge)의 추구이다. 따라서 철학을 지식의 추구라고 정의해 버리면 과학과의 구별이 힘들어 진다. 반면 철학을 과학화시키려는 이들은 이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이 그들이다. 참고할 책으로 추천한 A.J Ayer의 <>의 1장 The Elimination of Metaphysics를 보면 이 입장을 뚜렷하게 드러내 준다.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경험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지식이므로 철학의 영역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들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거의 철학설들이 미숙한 형태로 다루었던 문제들은 이제는 과학의 문제로 환원되어 과학적인 방법으로 탐구되어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어지고 있을 뿐더러, 종래의 철학문제는 대부분 그 자체가 진정한 문제라고 볼 수 없는 사이비 문제이며, 그 한없이 다양한 견해들도 우리의 지식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무가치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과학만이 참된 지식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철학의 과학으로서의 이러한 고양내지 해소는, '지식'으로서의 sophia의 탐구를 철학으로 이해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에게 철학은 지식의 추구이고, 지식은 과학적으로 검증가능한 것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과학적으로 검증불가능한 것들은 사이비 문제가 된다. 즉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이 '종래의 철학'을 사이비 문제로 비판하는 근거가 바로 문제설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sophia를 지식으로 이해하면 철학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과 구별되는 학문으로서 철학의 정의를 찾고자 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지혜로서의 sophia일 것이다.
"과학이 목적하는 것은 사실들 사이에 성립하는 법칙의 발견이며, 이 법칙이라는 것은 결국 사실을 사실로서 '기술'하는 데 불과한 것이므로, 과학적 지식은 그 본성상 '평가적' 요소를 포함하지 않으며 또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과학적 지식에 선악, 미추, 귀천 등이 있을 수는 없다. 오직 진위만이 있을 뿐이다. 과학적 '지식'이 사실에 대한 객관적이며 참된 기술을 소유한 '상태'임에 반하여 철학적 '지혜'는 인생과 세계를 그 전체적 의미연관에서 이해하고 그 내면의 깊이를 통찰하는 올바른 '판단'의 '활동'이라고 할 것이다⋯ 지혜는 사실의 현상적인 분석과 기술이라기 보다는 그 내면적 근거와 본질 및 전체적 의미연관을 통찰하여 보다 근원적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나 과학에 있어서나 무반성적으로 간과되어 버리는 객관적 사실세계를 다시금 붙잡아, 내 '앞에pro' '던져진 것blema'[즉 문제problem]으로 인수하고, 그 속에 파묻혀 예사로이 넘어가서 '잃어버렸던 것letheia'을 '되찾아a-' 드러내는 진리aletheia 발견의 끝없는 도정이다." -----지혜로서의 Sophia
"과학이 목적하는 것은 사실들 사이에 성립하는 법칙의 발견이며, 이 법칙이라는 것은 결국 사실을 사실로서 '기술'하는 데 불과한 것이므로, 과학적 지식은 그 본성상 '평가적' 요소를 포함하지 않으며 또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과학적 지식에 선악, 미추, 귀천 등이 있을 수는 없다. 오직 진위만이 있을 뿐이다." 철학에게만 있는 것은 평가적 요소이다. 선악, 미추, 귀천 이것은 가치의 문제에 속한다. 과학은 평가적 요소를 제외시키기 때문에 '아름다운 상대성 원리', '추악한 멘델법칙' 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천민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특정한 경제시스템을 가리키는 용어일 뿐이다. 거기에 가치판단적 의미를 들씌울 필요는 없다. 요컨대 과학적 지식에는 평가적 요소, 즉 가치판단이 없다. 우리는 과학에게 사태는 있는 그대로 서술할 것을 요구하나, 철학에게는 사태를 판단할 수 있는 규준을 제시해 줄 것을 원한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이 사실에 대한 객관적이며 참된 기술을 소유한 '상태'임에 반하여 철학적 '지혜'는 인생과 세계를 그 전체적 의미연관에서 이해하고 그 내면의 깊이를 통찰하는 올바른 '판단'의 '활동'이라고 할 것이다." 이 문장은 철학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을 '상태'와 '활동'에 비유함으로써 각각의 특징을 대비시킨다. '상태'는 정지되고 고정된 것이나 '활동'은 끊임없이 움직여 가는 것이니, 철학은 항상 개선해 나가려는 것, 즉 자기반성의 학이라 하겠다.
"지혜는 사실의 현상적인 분석과 기술이라기 보다는 그 내면적 근거와 본질 및 전체적 의미연관을 통찰하여 보다 근원적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나는 이 문장을 "지혜는 사실의 현상적인 분석과 기술에 바탕을 두고 그 내면적 근거와 본질 및 전체적 의미연관을 통찰하여 보다 근원적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라고 고치고 싶다. "보다는"을 쓸 경우 언뜻 사실의 현상적인 분석과 기술은 무시해도 된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치면 과학이 철학의 밑바탕으로 들어와 버린다. 철학을 공부하고자 한다면 과학과 철학이 모두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공부가 뜬구름 잡는 얘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나 과학에 있어서나 무반성적으로 간과되어 버리는 객관적 사실세계를 다시금 붙잡아, 내 '앞에pro' '던져진 것blema'[즉 문제problem]으로 인수하고, 그 속에 파묻혀 예사로이 넘어가서 '잃어버렸던 것letheia'을 '되찾아a-' 드러내는 진리aletheia 발견의 끝없는 도정이다." 객관적 세계를 붙잡는다는 말은 시간을 정지시킨다는 것이다. 시간을 정지시키는 이유는 그것을 되돌아 보기 위해서, 즉 반성하기 위해서 이다. 요컨대 철학은 눈 앞에 놓여있는 일상생활과 객관적 사실세계를 멈추게 하여, 거기에 반성적 통찰을 집어 넣는 학적 행위이다.
# 헤겔의 철학의 개념
"존재하는 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철학의 과제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은 이성이기 때문이다. 개인에 관해서 말하자면 애초에 모든 이는 자신의 시대의 아들이며, 또한 철학도 자신의 시대를 사상에 있어서 파악한다. 어떤 철학이 그것의 현재적 세계를 넘어선다고 망상하는 것은 어떤 개인이 자신의 시대를 뛰어넘고, 로두스 섬을 뛰어 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 그의 이론이 사실상 그것[시대]을 넘어선다면, 그리고 그가 마땅히 존재해야 할 세계를 준비한다면, 물론 그 세계는 존재하지만 다만 그의 사념私念안에서일 뿐이다. – 모든 자의적인 것을 구상할 수 있는 권역." (Theorie Werkausgabe판, <<법철학>>, S. 26)
이 문장에서 우리는 헤겔이 생각하는 철학의 개념이 우리가 앞서 살펴본 철학의 개념과 똑같음을 알 수 있다. 철학자들은 자신의 철학관을 깔고 들어간다.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은 철학을 과학으로 해소시키려 하나 헤겔은 그렇지 않다.
존재하는 것 -> 객관적 세계(철학의 제문제)
개념적으로 파악한다 -> 내면적 근거와 본질 및 전체적 의미연관의 통찰(철학의 제문제)
존재하는 것은 이성이다. -> 존재하는 것 안에도 그것의 근거와 의미연관이 들어있기 때문.
사상事象Sache -> 자신의 시대에 대해서 사유하고 그것을 하나의 체계적 이론으로 내놓는다는 것.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 속에서 시대를 파악. 즉 자신의 시대를 자신의 철학의 소재로 삼는 것.
그러므로 철학은 뜬구름이 아님. 자신의 시대를 토대로 분석하고 추상화하여 원리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행위. 법철학은 정치철학 + 사회철학 + 윤리학 + (실증)법학. 자신의 시대에 대해서 연구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철학이 할 일.
로두스섬 -> 이솝 우화. 자기가 로두스 섬에서는 엄청 잘 뛰었다는 것. 현실에 있지도 않은 것을 가능하다 생각하는 것.
마땅히 존재해야 할 세계 -> 시대를 넘어선 세계를 구상하는 것은 사적인 생각일 뿐이라는 것. 사념의 반대말 공교적(公敎的). 공중에게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님.
자의적인 것 ->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
헤겔 <<법철학>>의 한 구절을 여기서 제시한 이유는 지혜로서의 소피아가 헤겔에서 어떤 식으로 적용되고 있는지, 철학이 시대와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내놓은 것이다. 실제로 헤겔은 현실의 정치문제에 민감했고, 세속적 권력욕도 많았다.
#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의 문제의식
그리스 철학은 밀레토스 학파에서 시작한다. 아래의 지문은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이것을 읽어나가면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어떤 문제의식을 서로 주고 받으며 철학사를 전개해 나갔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철학은 밀레토스에 막이 오른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밀레토스 학파에 대한 필연적 보충이다. 밀레토스 학파는 항상 모든 것들의 밑바탕에 있는 공통적인 것에 관해서 말하고 있을 뿐, 하나하나의 사물들의 개별적인 특성도 설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무엇에서 사물이 생겨나는가 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이 근본질료에서 무엇이 생겼으며, 또 이 생겨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첫번째 문제도 도외시하지 않으면서, 두번째 문제도 다루고 있다. 이들이 처음으로 질료를 형성시키는 형상의 권리를 되찾아 주었다."
밀레토스 학파 -> 우주 만물의 원질(aeche)를 문제삼음. arche는 공통적인 것, 모든 사물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것을 의미함. 그러니 개별적인 사물의 고유함을 규명하는 데는 소홀해짐.
피타고라스 학파 -> 원질에 대해서만 문제삼는 밀레토스 학파에서 나아가 원질이 어떻게 개별적인 사물로 나아가느냐, 즉 원질의 개별적 사물로의 생성과 변화에 관심을 둠.
"여태까지의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한결같이 존재자에 관해서만 물어왔다⋯ 시작과 끝은 고찰되어 왔으나, 그 과도기(중간단계), 즉 생성자체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되지 않았다⋯ 생성, 곧 운동이 모든 것이며, 여태까지 존재자라고 보여져 온 것들도 생성과 운동이라고 하는 명제가 되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극단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뒤에 가서 엘레아 학파가 내세우는 반대에 대해서 도전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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