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약 노래 못지않게 수려한 외모로 관심을 끈 한국대중가요계의 가수들,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을까. 1930년대 기생출신 왕수복부터 90년대 초반 ‘테리우스 열전’까지, 시대에 따른 대중의 선호를 살펴보았다.
여기 소개한 가수들은 현재의 관점에서는 미남 미녀로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 시대 대중에게는 외모로 주목받았던 가수들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미의 기준은 시대마다 개인마다 달라서 선정이 쉽지 않았지만, 당대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외모에 대한 관심을 모았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하였다.
외모로 특혜가 결정되는 것은 매우 터부시될 일이다. 그럼에도 좋은 외모에 끌리는 것이 인지상정이어서, 앨범 사진이 없는 유성기 음반 시절에도 미녀 가수로 칭해지는 인물이 있었다. LP가 대량으로 제작된 60년대부터는 남녀 가수들이 자신의 멋있는 모습을 앨범 재킷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
연대별로, 1부는 일제 강점기부터 70년대까지 2부는 80~90년대의 미남 미녀 가수를 소개한다.
일제 강점기~1960년대
대중가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30년대부터 60년대 이전까지는 인물이 좋다는 말을 “복스럽게 생겼다”는 말로 대신하곤 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 호리호리한 마른 몸매보다 통통한 체형을 더 선호한 것이다. 실제로 유성기 시절 가수들은 동그랗고 넓적한 얼굴이 많았다. 하지만 서구 음악이 유입되기 시작한 50년대 후반부터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이 극에 달했던 60년대에는 서구적인 외모의 가수들이 등장하며 당대의 젊은이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60년대 앨범 재킷들을 차례로 보면 오히려 현재보다도 서구적인 외모가 인기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생출신 여가수 왕수복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미녀 가수로 불렸던 왕수복은 전형적인 계란형의 둥근 얼굴과 복스러운 미소,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한복을 입은 단아한 모습으로 대중들의 시선을 모았다. 평양 기생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기생 출신으로서, 전국적인 인기를 누렸다. 소설가 이효석, 경제학자 김광진과의 유명했던 러브스토리는 당대 그녀의 인기를 말해준다.
한국의 험프리 보가트 현인
해방 이후에 등장한 현인은 스타카도 창법과 넓고 시원한 이마를 지닌 이국적인 마스크로 당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뒤로 넘긴 스타일은 험프리 보가트를 연상시켰다. 1947년 해방 후 최초의 영화 「자유만세」를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선보일 때, 현인은 <신라의 달밤>을 처음 발표했다. 영화가 끝나자 관객들은 28세의 신인가수 현인의 수려한 외모와 독특한 바이브레이션 창법에 열광했다.
로맨스 그레이 윤일로
윤일로는 서구 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한 1950년대의 인기 가수로 당시 유행하던 신나는 부기리듬의 노래 <기타부기>로 청춘스타가 됐다. 짙은 눈썹의 잘생긴 얼굴로 여성 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말년에도 항상 중절모를 착용해 ‘로맨스 그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국적인 미모의 요절가수 박신자
50년대 여가수 박신자는 부드러운 인상의 예쁜 얼굴로 사랑받았다. 그녀의 대표곡 <댄서의 순정>이 수록된 음반 재킷에는 단발머리에 블라우스를 입은 세련된 모습이 실려 있다. 짙은 눈썹에 갸름한 얼굴은 지금의 대중에게도 어필할 만한 외모다. 가수 주현미의 큰어머니이기도 한 박신자는 너무 젊은 나이에 요절해 안타까움을 샀다.
마카오 신사 손시향
손시향은 1950년대에 화이트컬러 정장에 백구두를 주로 착용해 마카오 신사로 불렸다. 잘생긴 외모와 탁월한 미성으로 당대를 풍미했던 그는 <검은 장갑>, <이별의 종착역> 등 지금도 애창되는 노래의 주인공이다. 1960년 제 4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진으로 선발된 당시 이화여대 출신의 영화배우 손미희자가 그의 여동생이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엘리트인 손시향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현지에서도 독집 음반을 발매했다.
독일계 남매 가수 유주용과 모니카 유
한국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모니카 유와 유주용 남매는 이국적인 외모로 60년대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서구인의 이목구비를 그대로 물려받은 두 사람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였으며 특히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에 입학한 유주용은 미남 엘리트 가수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구적인 걸그룹 마운틴 시스터즈
60년대 여성 듀엣 마운틴시스터즈는 당시에는 보기 드문 수려하면서도 귀여운 미모로 TV를 통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주로 번안곡을 부른 이들은, ‘귀여운’이라는 수식어를 앨범 재킷에 직접 기입할 정도로 외모를 어필하기도 했다. 올림머리를 한 두 여성이 단정한 포즈를 취한 앨범 재킷은 많은 팬들을 설레게 했다.
여성적인 매력의 고음가수 금호동
금호동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 입국했다. 이후 군예대에서 음악을 본격적으로 배운 그는 작곡가 박춘석에게 발탁돼 가요계에 데뷔했다. 저음의 남성가수의 목소리가 지배적이던 1960년대 중반, 깔끔한 외모와 여성적 보이스컬러를 가진 금호동의 인기는 대단했다.
특히 유부녀들이 그에게 열광하자 “너 때문에 가정을 유지할 수 없다”며 남성들이 금호동의 집 앞에 찾아와 몰매를 때리고 얼굴을 할퀴는 등 여러 차례 테러를 가했다. 그래서 금호동은 신문사에 가요계 은퇴를 통보하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때문에 <내일 또다시 만납시다>, <젊은 내고향>을 히트시켰지만 활동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오빠부대의 원조 꽃미남 가수왕 남진
1965년 데뷔한 남진은 한양대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 준수한 외모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외모만큼 감미로운 목소리 그리고 경쾌한 율동으로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 불리며 오빠부대를 거느리게 된다. 그는 항상 극성 여성 팬들의 등쌀에 시달렸는데 꽃다발 공세는 기본이고 목에 매달려 키스를 하거나 신체 접촉을 시도하는 일이 예사였다. 숙소에 속옷 차림으로 쳐들어오는 여성 팬이 있을 정도로 극단적인 팬덤을 형성했다.
가창력, 미모, 춤 모두 출중했던 펄시스터즈
1968년 혜성처럼 등장한 자매 듀엣 펄시스터즈는 훤칠한 키에 예쁜 얼굴, 가창력까지 갖춘 걸그룹으로, 당시 대중의 눈과 귀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또한 여대생 가수라는 청순한 이미지로 데뷔 1년 만에 가수왕에 등극했다. 또한 배인순, 배인숙 자매의 등장은 듣기 위주의 정적인 오디오 가요계에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비디오 시대로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님아!>, <커피한잔> 같은 대형 히트곡을 남겼다.
1970년대
70년대는 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 개발 계획으로 가난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대마초 파동으로 많은 가수들이 활동을 못하는 등 가요계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가수 기근이라는 상황 때문이었는지, 당대 탑 배우들이 대거 가요계에 등장한다. 전시대적으로 배우와 가수를 겸하는 사례는 적지 않지만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배우들이 가수로 활동해 인기를 끈 경우는 70년대가 유독 활발하다. 배우뿐 아니라 미인대회 출신, 패션모델 등도 가요계로 활발히 진출했다.
가수 은지원의 어머니 김성아 자매의 리리시스터즈
김성아, 김경아 쌍둥이 자매는 안양예고 2학년 때 리리시스터즈로 데뷔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펄시스터즈에 버금가는 인기로 잡지 표지 모델과 각종 CF 모델, 영화배우로도 활약했다. 김성아는 아이돌 가수 은지원의 어머니로 밝혀져 화제가 되었다. 번안곡 <낚시터의 즐거움>이 히트했으며 1970년에 김민기의 <친구>도 녹음했다.
70년대 섹시 스타 김형자
1970년 TBC 동양방송 공채 탤런트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김형자는 섹시한 몸매로 주간지 화보를 장식하던 인기 배우였다. 1976년 영화 「조약돌」로 한국 연극 영화 TV예술상 영화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다음해에 독집을 발표하며 영화와 대중가요계에서 종행무진 활약했다. 트로트 가요부터 리드미컬한 팝 스타일의 노래까지 무리 없이 소화하는 가창실력을 선보였다.
서구적 미모와 세련된 스타일의 김아영(린다김)
국방부 무기 로비스트로 유명한 린다김(본명 김귀옥)은 서구적 미모와 세련된 스타일로 여고 시절부터 화장품 모델로 발탁되었다. 1973년 ‘김아라’라는 예명으로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1977년에 김아영이란 이름으로 두 장의 음반을 발표했는데 채은옥의 히트곡 <빗물>을 리메이크해 좋은 반응을 얻어 꽤 인기를 누렸다.
원조 국민여동생 혜은이
1975년 등장한 혜은이는 패티김과 이혼한 후 일본에 칩거하던 길옥윤의 컴백을 이끌어낸 가수이다. 혜은이는 낭랑악극단장 김성택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전국을 돌며 악극단 무대에서 노래실력을 연마했다. 정감 있는 그녀의 노래들은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이 발산하는 매력과 만나면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국민적인 인기를 얻었다. 70년대 ‘국민 여동생’이라 말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기였다.
방송계의 팔방미인 정소녀
깜찍한 미모로 사랑받은 정소녀는 1974년 김수형 감독의 영화 「이름 모를 소녀」에서 주인공을 맡으며 배우로 데뷔했다. 이후 1976년 첫 독집을 발표하며 가수로서도 활동을 병행했으며 1978년 최병걸과 함께 부른 <그 사람>을 크게 히트시켰다. 이후 높은 인기를 얻으며 KBS TV 프로그램 「쇼쇼쇼」에서 허참과 함께 MC를 맡았으며 진행자로서도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개인적인 루머에 시달리며 하차와 복귀를 반복했다.
미스 롯데 출신 서승희(서미경)
오똑한 콧날과 큰 눈망울이 매력적인 서미경은 1977년 미스 롯데에 입상하면서 CF 모델 겸 배우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인기의 여세를 몰아 ‘서승희’란 예명으로 가요계에 입성한다. 포크송 계열의 노래로 대중의 마음을 자극했지만 가수활동은 단발에 그쳤고, 라디오를 통해 <둘이 둘이서>가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다. 1978년 매니저였던 친언니 서수경과 함께 발매한 음반은 그녀의 유일한 정규 앨범이다.
한국적인 미모로 사랑 받은 정윤희
정윤희는 지금도 팬들이 많은 70-80년대의 최고 인기 여배우다. 유지인, 장미희와 함께 8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형성하였으며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1977년 가수로 깜짝 데뷔했다. 정윤희가 노래를 하고 음반을 냈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청순한 음색으로 노래한 <목마른 소녀>가 히트하자 정윤희는 1979년에 한 장의 음반을 더 발매했다.
청순한 이미지의 김보연
70년대 김보연은 청순한 이미지로 영화 「진짜진짜 미안해」를 통해 하이틴 스타로 떠올랐다. 1978년 발표한 <사춘기>가 가요순위 프로그램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면서 가수로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고 여러 장의 독집을 발표하며 배우와 가수활동을 병행했다.
성우 출신 가수 오정선
혼성 듀엣 라나에로스포 출신인 오정선은 TBC 동양방송의 성우 출신 미녀 여가수이다. 솔로 가수로 번안 곡 <마음>을 히트시킨 그녀는 말솜씨가 뛰어나 MBC-TV 「토요일 토요일 밤에」 사회자로 발탁되어 이덕화와 더블 MC를 맡았고 TBC FM 「가요 앨범」의 디제이로도 맹활약했다.
패션모델 출신 가수 박지영
큰 눈과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구적인 미모의 박지영은 가수와 더불어 패션모델 활동을 겸업했다. 그녀는 솔로가수로 데뷔하기 전에 동생 박난영과 함께 여성듀엣 큰별자매를 결성해 활동했는데 자매 모두 화려한 외모로 주목받았다. 박지영은 1979년 솔로로 독립해 <그 사람 목석>을 히트시켰고 TBC FM방송에서 DJ로도 활동했다.
귀공자 가수 이현
1970년대의 인기 가수 이현은 아이돌의 원조로 평가받는 출중한 외모와 장군의 아들이라는 배경으로 화제를 모았다. 우리나라 군번 1호로 육군 제2사단장이었던 이형근 장군이 그의 아버지이다. 1970년 데뷔한 해에 이현은 TBC 동양방송 신인 남자 가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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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zelee저시절엔 대부분 성형수술이 보편화되어있지않아 자연미인/미남들이었고, 연예인지망생도 많지않아 요즘처럼 다양한 루트와 다양한끼로 연예계에 진출할수있지않았으니 외모는 요즘보다 오히려 더 좋았을듯 하네요 ㅎㅎ2017-03-07 18:14신고의견0공감/비공감공감6비공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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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시대별 미남 미녀 가수 1 -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가요앨범사, 한국대중가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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