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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나는 고발한다 -드레퓌스사건

by 이덕휴-dhleepaul 2018. 5. 5.

나는 고발한다   - 드레퓌스 재판 -
 


 "드레퓌스가 결백함을 나는 맹세코 주장합니다. 나의 생애와 명예를 걸고  확언합니다. 이 엄숙한 순간, 이 법정 앞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당신들과 배심원 여러분  앞에서,  프랑스 앞에서, 드레퓌스의 결백을 나는 주장하는 바입니다. 나의 작가 생활 40년과 필생의  작업으로 획득한 모든 것을 걸고서 나는 드레퓌스의 결백을 선언합니다. 내가 얻은  것, 내가 이룩한 명성, 또한  프랑스 문학의 성장에 기여한 나의 공적, 이 모든 것을 걸고서  나는 드레퓌스가 결백함을 맹세합니다.  만일 드레퓌스가 결백하지 않다면, 신이여! 이  모든 것이 파멸하고 나의 모든 작품이 잊혀지도록 하소서! 드레퓌스는 결백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토록 확신에  찬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죄없이 갇힌 한 수인을 위해, 그  결백을 위해 자신의 모든 명성을 걸고  선언할 수 있다는 것은 정년 행복한 일이다.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명예, 명성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전 생애를 바쳐 쌓은 명예와 명성이 마치 이 한  사건을 위하여,  이 한 사람을 위하여 존재했던 것처럼 말했던 그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에밀 졸라, 인생의 절정기에 서 있던 작가. 문학이라는 봉우리의 정상에서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었던 사람. 전 세계 문명국에서  베스트셀러였던 그의 소설들. 그 모든 것을  던져 한 인간의 무고함을 온몸으로 증거 하고자 했던 사람. 그는 과학적 사고로 종교적 편견과 미신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 최고의 문명국  프랑스에서 그 편견이 가장 저열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작가로서의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던 졸라의 관심은 점차 드레퓌스의 결백을 확신하게 되면서 희생자에 대한 깊은 동정심에 압도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문학적 업적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한 위대한 신념의 행위에  참가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허위고발자, 거짓증언자들이 칭송되고  진실의 기수들이 악당처럼 취급받는  시점에 이르자 그는 단호한 신념의 순교자만이 그 사회를 뒤덮고 있는 그 광기를 깨뜨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펜을 들고 하루 밤 하루  낮 또 그 다음날 밤 동안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줄기차게 써 내려갔다.
 

 1898년 1월 13일, 이렇게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가 탄생되었다.  대통령 펠릭스 포르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의 이  논설은 거대한  폭풍우가  되어 프랑스 전체를 진동시켰다.  <오로르>(새벽이라는 뜻)라는 이 별 볼 일 없는 잡지는 바로 이 글을  실은 것만으로 30만 부가 팔려나갔다. 프랑스 온  국민이 졸라를 이 글을 읽게  되었다. '나는 고발한다'는  전 세계에, 영원히 졸라의 꼬리표가 되어 따라다니는 표어가 되었다. 진실을 위한 용기와 작가의 위대성을 상징하는 징표가 되었다.  그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조금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거듭 말합니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고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음을! 진실이 지하에 묻히면 자라납니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네 알 것입니다. 우리가 가까운 장래에 가장 먼 곳까지 재앙을 미치게 할 지뢰를 매설했는지 아닌지를...
 

 졸라의 이 글 하나로 이미 모든 진실은 선언되었다.  이 글은 엄청난 폭발력으로 모든 허위를 날려보내 버렸다. 이 글이 내포하고 있는 무서운 힘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졸라의 고발장을 환영하는 3만 통의 편지와 전보가 쏟아져 나왔다. 3만 통의 서한에는 한결같이 프랑스에서의 이성의 퇴조를 비판하는 분노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런 비분강개는 역설적으로 졸라의 존재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었다. 졸라의  존재와 그의 웅변은 대혁명의 나라를 그리  성급하게 포기할 수 없음을 전 세계에 환기시켰다. 마크 트웨인은 <뉴욕헤럴드>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졸라를  향한 깊은  존경과 가없는 찬사에 사무쳐 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100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바로 유대인이었군!
 에밀 졸라가 그토록 변호하고자 했던 행복한(?) 사나이 드레퓌스는 누구인가? 드레퓌스는 1859년 알자스지방에서 방직공장을 경영하는 유대계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프랑스와 프러시아 사이의 전쟁 대문에 드레퓌스 가족들도  고초를  겪었으나 이들은 프랑스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드레퓌스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1878년  파리공과대학을 졸업한  드레퓌스는 1880년 소위로 임관 받고 퐁텐블로에 있는 포병학교에 입학하였다. 2년 후 그는 포병중위로 진급, 망슈에  있는 한 포병연대에 소속되었다. 1889년에는 대위가 되었고 부르주에 있는 폭약전문학교에 근무하게 되었다. 1890년 루시라는 여성과 결혼하였고 그 이듬해 아들 피엘이, 다시 1893년에는 딸 잔느가 태어났다.  그 사이에 그는 대학원 과정인 전술학교에 입교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융통성 없고  소박한  드레퓌스는 동료들 사이에 인기는 별로 없었지만 우수한 성적 때문에 엘리트만이 들어갈 수  있는 참모본부에 수습참모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행운이 일생일대의 화근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독일 군에 처참한 패배를 경험한  프랑스인들은 그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울  희생양을 찾느라 안달이 나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패배가  반역행위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 주재하고 있던  독일 무관  슈바르츠코펜이 브뤼셀, 스트라스부르, 스위스 등지에 산재한 독일 스파이망을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프랑스 참모본부 상데르 대령 휘하의  방첩부대가 눈치챈 것이다. 프랑스군의 정보가 독일로 유출되고  있음은 여러 경로로 감지되었다.  그럼에도  제대로 단서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프랑스 방첩부대는 마침내 한 정보원을 독일대사관 건물  내로 침투시켜 직접 슈바르츠코펜의 우편함 속에서 다음과 같은 문건을 빼내오게  하였다. 물론  이것은 곧바로 상데르 대령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귀하가 부탁한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흥미로운 정보를 전해 드리는 바입니다.
1. 120mm포의 수압식 제동기와 그 작동방식에 대한 정보

2. 지원부대에  대한 정보

3. 포병편제 변경에 대한 정보

4.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정보

5. 야전포병부대 임시 포격편람.

이 마지막 서류는 특히 빼내기가 곤란합니다. 나는 이 서류를 단 며칠간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국방성에서 한정 부수만을 발간해서 각 부대에 그 보관책임을  지우고 있습니다. 이 사본을  가진 장교는 작전이 끝나면 그것을 돌려주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귀하께서는 필요한 부분을 메모하신 뒤 그것을  내게  되돌려주기 바랍니다. 그래야 내가 그것을  부대에 반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모두 복사해서 보내도 좋다면 별문제겠지만 말입니다.  나는 곧 작전을 수행하러 떠납니다. 무뢰한 D 


 이 명세서를 작성한 사람은 분명히 프랑스 참모본부  내부의 첩자가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군대 조직과 활동에 대해 그렇게 소장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였다.  프랑스 방첩부대를 괴롭혀 온  유령은 바로 그 명세서의 끝 부분에 서명된  '무뢰한  D'였다. 그렇다면 'D'라는  이름의 프랑스 장교임이 틀림없다. 방첩 부대원들은 숨쉴 사이도 없이 수습참모의  기록 카드철을 꺼내왔다. 그들은 D자를  쭉 훑어내려 가다가 'DREFUS'라는 이름에 시선을 멈추었다.   마침내 범인을 찾아냈다는 탄성이 일었다. 곧이어 "바로 유대인이었군!"하는 소리가 터져 올랐다. 상데르 대령은 왜 자신이 진작  드레퓌스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의아해했다. 이들은 드레퓌스의 서류철을 가져다가 문제의 명세서 옆에 나란히 놓았다. 필적을 비교해 본 것이다. 물론 비슷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자신들이 수집한 단  한 가지 들어맞지 않는 것이 있었다. 명세서를 쓴 사람은 자신이 '곧 작전에 나간다'고 밝혔다. 그런데 수습참모들은 이미 5월경에 그해에는 작전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은  바 있었다. 드레퓌스는 그 무렵 파리를 떠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드레퓌스의 운명은 정해진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첫 재판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 드레퓌스를 체포하는 일뿐이었다.  뒤파티 소령이 드레퓌스의 체포 명령을 하달받았다. 그는 드레퓌스를 별 사고 없이  체포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한  장의 명령서가 드레퓌스에게 날아들었다. "드레퓌스  대위는 참모총장실에서 실시되는 참모본부 수습참모 면담에 출두하라." 출두시간은 10월 15일 오전 9시. 복장은 사복차림이었다. 드레퓌스는 당연히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출두하였다. 뒤파티 소령은  드레퓌스에게 참모총장이 도착할 때까지  자신의 편지를 대필해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자신은 손가락을 다쳐 펜을 쥘 수 없다는  핑계를 덧붙였다.  드레퓌스는 창가에 있는 조그만  책상 앞에 앉았고 뒤파티는 편지의 내용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저 평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편지에는 무제의 명세서에 나오는 구절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드레퓌스의 표정이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  불한당은 신경이 몹시 무딘  모양이군.'하고 뒤파티는 생각했다. 뒤파티는 조금 있다가 편지 쓰기를 중단시킨 후 이렇게 외쳤다. "법률에  의해 나
는 귀관을 체포한다. 귀관은 반역 혐의를 받고 있다."
 

 재판은 1894년 12월 19일 파리 근교의 한 궁전 건물에서 시작되었다. 18세기의 궁전을 개조한 군사법정은 건물 분위기조차 우중충하기 짝이 없었다. 노란  가스등이  어렴풋이 법정 안을 밝혀 주고 있을 뿐이었다. 두툼한 돌 벽에 난 조그만 창문 틈으로 형무소 마당이 바라보였다. 일곱 명의 장교가 군법 회의의 장교로 임명되었다. 그들 중 모렐 대령이 재판장이었다. 재판장의 명령에 따라 드레퓌스  대위는 딱딱한 걸음걸이로 법정에 들어섰다.  머리숱이 적고 안경을 썼으며 날카로운 코 밑  수염이 길게 나 있었다. 그는 참모본부 장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재판은 공개 여부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되었다. 드레퓌스의 변호인 데망즈는 유죄의 증거로 내세운 서류가 명세서 하나뿐이며 그것마저도 그를 유죄로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반 신문들은 이미 드레퓌스를 반역의 화신으로, 충분한 증거가 있는 것으로 보도하였기 때문에  공개재판을 통하여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언론은  이미 반역죄에 대해 사형제도를 부활시키자는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반역자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법률이 폐지되어 드레퓌스가 길로틴을 면하길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공개재판을 요구하는  데망즈의 요구는 단호히 거부되었다. 대문짝만하게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신문들은 그가 유죄라고 단정하고 그에 따른 대중의 분노로 지면을 메웠다. 재판의 진실은  이제 밀실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드레퓌스는 진술 순서가 되자 차근차근 진실을 설명하였다. 그는  명세서에 나열된 몇 가지 정보를 자신도 통보 받은 사실이 있노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자신은 120mm포와 그  지원부대에 관한 정보, 그리고 마다가스카르 원정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게 불가능하며  '나는
작전에 나간다'는 말이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부와 평안을 마다하고 군대를  택한 자신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완강히 거부하고 평생  군인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자신이, 또한 이제 겨우 군인으로서  성공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으며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 자신이 왜 반역행위를 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드레퓌스의 진술은 대단한 호소력이  있었기 때문에 국방성에서 나온 참관인이 재판이 무죄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그러나 상황은 사건이 순리대로 해결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드레퓌스의 동료 장교들이 증언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오래 전부터 드레퓌스를 의심해 왔다고 증언하였다. 친하게 지냈던 동료조차 불리한 증언을 하는걸 보고 드레퓌스는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현실에 치를 떨었다. 이번에는  필적전문가들이 증언하였다. 베르티옹이라는  필적전문가는 '드레퓌스의 필적이 명세서의 필적과 다르다는 사실이  바로 그가 명세서를 쓸 때 남의 필적으로 가장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희한한 논리를 내세웠다. 게다가 극도로 전문적인  용어를 쓰는 바람에 재판부와 방청객이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정보국의 앙리 소령은 증인으로 나서 '인격을 의심할 수 없는  한 신사가 지난 3월경에 국방성에 반역자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경고해 주었다'면서  바로 그 반역자가  드레퓌스라고 단언하였다. 드레퓌스와 변호인은 경고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힐 것을 요구하였다.

 

 프랑스 형법 제 101조에는 '피고인은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과 대면할 권리를 갖는다 '고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앙리는 '장교의 머릿속에는 결코 발설해서는  안될 비밀이 들어 있는  법'이라며 넘어가려 하였다. 재판장이 끼여들었다. "귀관이 그 사람 이름을 대야 할 의무는 없소. 다만 귀관의  명예를 걸고 그 사람이  반역자가 드레퓌스라고 말했다는 것을 증언하면 충분하오." 앙리 소령은  십자가에 손을 대고 법정  안을 뒤흔드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십자가에 걸고 그 사실을 증언합니다."  재판이 시작된 지 나흘만에 심리는 종결되었다. 재판관들이  판결을 논의하려고 퇴정하려 할 때  뒤파티 소령이 재판관을 향해 다가갔다. 곧이어 봉투가 전해졌다. 사람들은 주목하지 않았으나 그 작은  봉투에는 이런 내용의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판결을 심의하는 동안 작은  봉투  안에 든 내용을 재판관들에게 읽어준 다음에는 다시 봉인해서 그  봉투를 전한 장교에게 되돌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한 시간  후 그들은 논고와 최후변론을 듣기  위해 다시 개정을  선언했다. 데망즈는 세 시간 동안  변론하면서 명세서에 대해 집중적으로 언급했다.  그것이 검찰 측이 내놓은 유일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검사의 논고는 간단했다. 재판관들에게 확대경을 들고 직접 그 명세서를 조사해 보라고  요구했다. 그 다음에 드레퓌스가 일어섰다. "나는 무죄입니다." 그는 이 한마디만  했다.  재판장들이 퇴장했고 드레퓌스도 호송되어  나갔
다. 판결문을 낭독할 때 피고인의 출석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장이 허락된 몇몇 일반인들이 들어와 자리를 지켰다. 모렐 대령이  판결문을 낭독하였다. 전원일치였다. "반역죄를 인정해서 드레퓌스를 군으로부터 불명예 제대시키며 아울러 프랑스로부터  추방, 종신
유폐형에 처한다."  노변호사  데망즈는 이 순간 통곡했다.
  
   악마도로 유배되다
  드레퓌스에게 판결 내용이 전해진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그는 감방에서 다시  호송되어 텅 빈 법정 안으로 인도되었다. 경비병이 홀로 "받들어  총!"을 외쳤다. 서기가 촛불에 의지해 판결문을 읽었다. 드레퓌스는 부동자세로 귀를 기울였다. 다 듣고 난 다음  그는 절도 있게 '뒤로 돌아' 자기 감방으로 돌아왔다. 감장에 홀로 남게 된 드레퓌스는 벽을 향해 달려가 머리를 쳐박았다.  두개골을 부숴 자살을 시도한 것이었다. 형무소 책임자가 달려와 '자살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확인해 주는 행위이며 가족들에게 지울 수 없는 오명을 남기
는 일'
이라고 설득했다. 얼마 후 그의 아내 루시가 찾아와 앞으로 무죄가 밝혀질 날이 반드시 오리라며 그를 위로했다.
  군사법정에서 유죄판결이 내려진 뒤에도 참모본부와 정보국은 드레퓌스를 함정으로  몰아넣기 위한 증거를 계속 찾고 있었다. 한편 그들은  드레퓌스에게  유형생활 동안 좀더 편히  지낼 수 있게 해줄 테니 '부주의로 그런 반역행위를 했다'고 시인하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드레퓌스는 그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본인이 원하는 단  한 가지 특전은 반역자에 대한 수사를 계속해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정작 드레퓌스가 두려워한 일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벌어지는 불명예 퇴역식이었다. 그는 1월 5일 자신의  아내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내일 나는 당신과 우리  아이들을 위해  가장 큰 시련을 견뎌내야 할 것이오.' 수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샹드마르스의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드레퓌스의 불명예 퇴역식이 거행되었다.
  두 줄로 늘어선 경비병들은 퇴역식이 거행되는 동안 연병장 주위의 철책을 둘러싸고 있어야 했다. 퇴역식은 마치 형의 집행처럼 형식을 갖춰 진행되었다. 파리에 주둔한 각 연대에서 일개 부대씩을 대표로 퇴역식에 파견하였다. 트럼펫이 울리고 구령이 떨어지자 조그만 문이 활짝 열렸다. 그 문에서 공화국 근위대의 몸집  좋은 상사 한 명이 결어 나왔다. 칼을  빼든  네 명의 병사가 그 뒤를 따랐고 그 중간에 드레퓌스 대위가 끼여 있었다. 그들은 그 의식의 주제자안 다라 장군 앞에 멈춰 섰다. 장군은  자신의 칼을 뽑아들었다. "알프레드 드레퓌스,  귀관은 무기를 들 자격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귀관의 지위를 박탈한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모여 있던 군중들로부터 포효하는  듯한 함성이  일었다. "유대인 죽여라!" 거구의 상사가 드레퓌스에게 다가갔다. 그는 드레퓌스 대위의 어깨에서  견장을 뜯어내고 바지에서 참모본부의 장교임을  상징하는 붉은 줄을 죽죽  걷어냈다. 그리고는 드레퓌스가 차고 있던 칼을 두 동강으로 부러뜨려버렸다. 그는 동강난  칼을 땅 위에  내동댕
이쳤다. 드레퓌스는 연병장에 늘어선 병사들  앞을 지나가도록 강요받았다. 그는 시찰  나온 참모장교처럼 꼿꼿하고 정확하게 걸어나왔다. 이 


 참혹한 날을 견딘 그는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보냈다. 어떤 악마가 정직한 우리 가정에 이런 불행과 불명예를  던져  넣었을까?... 그러나 내 용기는 아직 꺾이지 않고 있소. 나는 장래를 생각하면서 힘을 돋우곤  하오.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소. 의지는 강력한 지렛대라오. 나는 항상 명예와 정의를  지켜왔으며  의무를 다른 무엇보다도 앞세워 왔다는 것을 당신도 알거요... 나는 온 세상을 향해 내 무죄를 외치고 싶소. 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 피의 마지막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쉬지 않고 매일 나는 무죄임을 외치겠소...
  하지만 사실 이것은 허세였다. 아내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늠름한 모습을 보인 것뿐이었다. 나는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너지는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누님, 매부, 보십시오. 나는 슬픔으로 심신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데 이런 불운을 당하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 힘과  용기가 나를 저버린다면... 내 아내를 돌봐주십시오.  그녀는 훌륭한 여지입니다. 그녀의  영웅적인 용기는 찬양할 
만합니다. 그녀를 친구로 삼아주십시오. 누님, 나는 항상 누님이 알고 있는 옛날의  나입니다.  선량하고 용감하고 정직합니다. 그러나 운명이 나를 덮쳐 이와  같은 처지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은 고통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을 참는 데는 내가 용감하다는 것을 누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나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힌다는 것-이것은 정말 참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시작일 뿐이었다. 1895년 2월 21일, 드레퓌스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성나자렛호에 태워져 기아나의 적도 해안으로 가는 항해 길에 올랐다.  바로 악마도행이었다. 드레퓌스는 긴 항해 동안 쇠사슬에 꽁꽁 묶인 채 마침내 악마도에 도착하였다. 정식명칭이 살뤼제도인 이 섬은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아 유형장소로도 쓰지 않던 곳으로  한때는 나환자들이 격리 수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  그들조차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나는 군인의 용기를 가지고 있지만 순교자의 영혼은  갖고 있지  못한 듯하오." 드레퓌스는 이곳에서 부인 루시에게 당시의 고통을 호소하였다.

   

  제2라운드, 무죄 방면된 진짜 간첩
  세상은 완전히 드레퓌스를 잊은 채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그 사이 군  내부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정보국 방첩 책임자 상데를 대령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피카르 중령이 들어섰다. 피카르는 국방성의 참관인으로 드레퓌스 재판에 참석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증거를  깊이 있게 검토해 보지는 않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다는 느낌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진실은 엉뚱한  일에서 예기치 않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자가 참모본부 배속을 신청하였다.  그의 신청서가 피카르 중령의 책상 위에 전달되었다. 필적이 낯설지 않았다. 피카르 중령은 곧장 금고로  달려가 명세서를 꺼낸 다음 그  필적을 에스테라지의 배속신청서와 대조해 보았다. 그는 즉시  필적전문가 베르티옹을 불렀다. 그는 명세서를 자세히 검토한 다음에는  에스테라지의 신청서를  조사했다. 조사를 마친  필적전문가는  '이 사람이 바로 명세서를 쓴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은 신속히 상부에 보고되었으나 '이미 드레퓌스 사건은 종결되었다'는  답변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에 관련된 간부들이 진실을 알게 된 피카르 중령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만약 진실이 밝혀지는 날이면 사건의  조작에 직, 간접적으로 연관된 이들의 정치적 생명도 끝날 일이었다. 피카르는 아프리카로 전출되었고 거기에서도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뭔가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다음과 같은 서신을 쓰기 시작하였다.
  아래 서명한 전 국방성 정보국 방첩책임자 마리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다음의 사실을 밝히는 바입니다. 일부 인사들이 이 사실을  은폐하려고  하고 있으나 이 사실은 반드시 세상에 알려져야 한다고 본인은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 편지는 계속해서 명세서를 쓴 진짜  범인을 발견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1. 에스테라지는 독일의 첩자입니다. 2. 드레퓌스가 했다고 알려진 행위는 에스테라지가 한 것입니다. 3. 드레퓌스 사건은 드레퓌스가 유죄라는 선입관으로 법을 무시한 채 매우 경솔하게 처리되었습니다.
  피카르는 이 편지의 수신인을 프랑스 대통령으로 했지만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의 친구이자 변호사인 레블르와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은 다음 자기가 죽을 경우 그 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해놓았다. 레블르와는 그 후 이  문제를 알자스 출신 상원의원 케스트네르와 상의하였다. 그 문서를 신뢰한 케스트네르는 점차  유력 인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다녔다. 한편 드레퓌스의 가족들은 눈물겨운 구명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젊은 작가 베르나르  라자르를 통해 드레퓌스 사건의 실기를 쓰게 하여 이를 유명인사들에게 일일이 송부하였다. 또한 <르마텡>지는 '이것이 바로 증거다'라는 제목 하에 문제의 그  명세서를 실었다. 프랑스 최대 일간지였던 이 신문은 바로  그 명세서를 감정한 필적전문가로부터 입수하여 최초로 이 문서를  대중에게 공개했던 것이다. 거래관계를  통해 에스테라지를 잘 아는 카스트로는 사람이 그 신문기사를 보고 그 명세서가 바로 에스테라지의 필적이 틀림없다고 드레퓌스 가족에게 알렸고, 증거로 자신에게 보낸 에스테라지의 편지를  제시했다.
진실은 진실을 향해 열려 있는 귀에 들어가게 마련이었다.  그 가족들은 카스트로의 증언과 증거물을 토대로 정식으로 에스테라지를 진짜 첩자로 고발하였다.
  그러나 반동과 허위의 먹구름은 좀 채 잦아들 줄  모르고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프랑스 언론들은 일제히 에스테라지를 편들면서 드레퓌스와 유대인들을  공격하였다. <에코 드 파리>라는  신문은 '예수를 유다로 대우하는 것은 잔인할 뿐만 아니라 자기 파멸에의 길'이라고  논평했다. 진실이 알려질게 다치게 될 침모본부의 여러 지휘관들은  연일 조작한  증거들을 흘렸고 언론들은 확인도 없이  이를 대서특필했다. 여론은 완전히 이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런 와중에 재판부는  에스테라지의 무죄를 선고하고 말았다. 동시에 진술을 고발한 피카르가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또 한 번 정의와  불의가 제자리를 바꾸어 앉은 것이다. 제 2 라운드 역시 악의  편이 승리했다. 에스테라지의  무죄 석방과 피카르의  체포 소식은  곧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프랑스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리스본에서   살로니카, 모스크바까지 전 유럽이 애도했다.

   

   제3라운드, 졸라의 재판
  드레퓌스는 무죄라는 진실을 향한 행군에는 수많은 엑스트라가 등장한다. 또 하나의 위대한 엑스트라, 그가 바로 조르주 클레망소였다. 그는 외국신문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프랑스는 정의와 자유라는 인간의 권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현대사회가 예전에는 몰랐던 행복을 지표로 삼고 발전하도록 보장해 주는 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에 반영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두 나라를 갖고 있다. 자기의  모국과 프랑스이다." 나라란 땅과 바위와  하천, 삼림, 전답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사람의 마음을 한데 묶고  사람들의 행동을 알리며 문명세계에  영향력을 좌우하는 이념으로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 자유와 억압, 승자와  패자의 모든  상태에서 근대 프랑스는 전 인류를 위한 정의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뚜렷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정의가 이제 의미 없는 빈말이 되어 버렸고 폭력이 고삐를 벗어났다. 또다시 우리가 인종과  종교의 박해자가 될 때, 관용과 자유라는 표어가 증오의 외침에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될 때, 그때에도 우리는 바로 이 평야, 이 강물, 이 산들을 소유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프랑스 땅 위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는 우리 조상이 창조하려 했던, 프랑스  조상들이 실현하라고 우리에게 물려준 그 프랑스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 후 클레망소는 드레퓌스 사건에 관하여  약 800편의 글을 썼다. 매일  매일 그는 굽힐 수 없는 논리로 <오로르>지에 드레퓌스를 변호하는 힘찬  글을  썼다. 그에게는 불법성 자체가  불의의 한 형태였다. 법만이 정의를 보장해 주는  안전판이었다. 국가이익을 위해 군부의  위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적들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가차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국가이익-그것이 법을 위반할 힘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법에 관해 말하지 말라. 자의적인 권력이 법을 대신할 것이다.  오늘은 그것은 드레퓌스를 치고 있지만  내일은 다른 자를  칠 것이며, 국가이익은 이성을 잃은  채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반대자를  비웃으며
쓸어버릴 것이고, 군중은 겁에 질린 채 쳐다만 볼 것이다. 정권이 국가이익을 내세우기  시작하면 끝이 없게 마련이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의 차이를 허용치 않고 차이를 감내하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드레퓌스에게 적용된다면, 다른 누구에게도 적용될 게 분명하다.  새시대의 동이  터 올 때, 대혁명이 보인 첫 행동은 국가이익의 저 거대한 요새, 바스티유룰 쳐부수는 것이었다.
  프랑스 사회당 당수로 탁월한 웅변가였던 장 조레스 역시 케스트네르의 이야기를 듣고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게 된 사람이었다. 당시 하원위원이었던 그는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운명적으로 지배계층의 일원에서 탈락되어 인간적 고통의 상징이 된 드레퓌스에  대한 동정심을 일깨우려 하였다. 파스퇴르 연구소의 에밀 뒤클로 소장은 인간사에서 정의가 승리하도록 결연하게 투쟁하라는 볼테르의 말을 추종하는 사람이었다. 아나톨 프랑스 역시 이서의 대의에 무심하지 않았으며 광신주의를  지지하지 않았다. 전직 법무장관은 드레퓌스를 위해 자신의 권위를 사용했다. 이렇게  합류한 지식인들은 비록 수적으로는 한 줌에 지나지 않았으나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사회  명사들이었다. 온갖 모욕과 협박을  헤쳐나가며 드레퓌스의 복권을 위해 노력하게된 이들에게 에스테라지의  석방은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드레퓌스의 재심과 복권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워 보였다.

 이때 바로 폭풍우처럼  밀어닥친 것이 바로  졸라의 글, [나는 고발한다]였다. 그는 치열한 정신과 호쾌한  문장으로  단숨에 모든 허위의 장
막을  걷어내는 듯했다. 그의 긴 편지는 관련자들에 대한 준열한 고발로 끝난다.
  나는 뒤파티 중령을 고발합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법적 과오의  악마  같은 중개인이었음을, 또한 지난 3년 간  가장 부조리하고 역겨운 음모와 자기가 저지른 사악한 행위를  계속해서 은폐하였음을 고발합니다.
  나는 메르시에 장군을 고발합니다. 필경은 심약한 탓으로, 사상 최대의  죄악에 그가 공모자로 끼여들었음을 고발합니다.
  나는 비오 장군을 고발합니다.  그가 드레퓌스가 결백하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쥐고서도 정치적 동기 및 참모본부의 체면을 구하고자 그것을 은폐하였으며 파렴치죄와  정의모독  죄를 자진해서 저질렀음을 고발합니다.
  나는 펠리의 장군과 라보리 소령을 고발합니다. 그들이 약한 것은  심문을 자행했음을, 즉 극악무도하게 불공정한 심문, 어리석도록 뻔뻔스러운 저 불만의  기념비를 우리에게 제공한 그들의 보고서를 고발합니다.
  나는 벨롬, 베르나르 및 쿠아르  3인의 필적전문가를 고발합니다. 의학적 검진에  의해 그들의 시력과 판단력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지 않는 한,  그들은 거짓이며 가짜인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국방성을 고발합니다. 여론을 오도하고 죄악을 은폐할 목적에서 특히  <에코 드 파리>와 <레클레르>를 위시한 심문들이 저열한 캠페인을 주도했음을 고발합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첫 번째 군사법정을 고발합니다. 피고인에게  그 증거를 비밀로 가린 채 유죄판결을 내려 인권을 침해했음을 고발합니다. 나는 또 두 번째 군사법정을  고발합니다. 피고인에게 죄가 있음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그를 무죄 석방하는  법적 죄악을 저지른 것을,  그리고 이 불법성을 명령에 의해 은폐한 갓을 고발합니다.
  내가 취한 행동은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서두르기 위한  혁명적 조치입니다. 그처럼 많은 것을 지탱해 왔고 행복의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인류의 이름에 대한 지극한 정열만이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내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이  외침으로  인해 내가 법정으로 끌려간다 해도 나는 그것을  감수하겠습니다. 다만 청천 백일  하에서 나를 심문하도록 하십시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글에 대한 프랑스인의 반응은 차라리 폭약 같은 것이었다. 낭트, 보르도, 툴루즈,  몽펠리에, 오를레앙에서 대규모 군중이 유대인  상점을 약탈했고 유대인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졸라의 기사가 공개리에 불태워졌으며  졸라의 초상을 목매달았다.  파리의 군중은 "졸라를 죽여라! 유대인을 죽여라!"고 소리쳤다. 대규모 항의집회가 열렸고 유혈 충동을 빚었다. 한 달 이상 전국그이 도시들이 소요에 휩싸였다. 동시에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의 대학들에서는  정의를 위한  졸라의  입장을 찬양하는 결의문이 발표되었다. 프랑스 내에서도 많은 지식인들이 졸라에 바치는 찬사에 그들의 이름을 서명했다.
  문제는 내각이었다. 졸라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에 대해 혼란에 빠졌다. 그는 메르시에와 비오, 두 국방상을 최악의 범죄 공모자로 비난했고, 펠리와 장군을 악당처럼  처신했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모두가 졸라의 엄벌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만약 졸라를  중상모략  죄로 고소한다면 그에게 진실을 밝힐 기회를 부여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실제로  드레퓌스 사건과 에스테라지 사건의 재심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번에는 민간재판이다. 군사법정과는 달리 내각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각은 [나는 고발한다]중에서 드레퓌스 사건의 비밀을 드러낼 직접적인 기회는 주지  않으면서 정부의 체면을 새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냈다. 바로 그 구절 가운데서 '군법회의가 명령에 의해 행동하면서'  에스테라지를 무죄 석방했다는 부분만을 중상 죄로 고소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번에 피고인 석에 선 사람은  에밀 졸라였다. 열 두 명의 배심원이 소환되었다. 파리의 평범한 시민들은 이때부터 군부 최고위 장성들과 과학,  문학계 대가들이 펼치는 이 진귀한 논쟁을 지켜보았다. 피고인측과 검사 측을 지지하는 각각의  증인들은 15일 동안 엄
청난 논쟁을 토해냈다. 검사는 졸라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고 단언하였다. 졸라의 변호사 라보리는 조용하게 이성에  호소하면서 졸라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특히 같이 기소된 <오로르>지의 변호를 맡은 클레망소는  배심원들을 향해 이렇게 외
쳤다.
  판결의 날에 시민들은 우리에게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배심원 여러분,  저쪽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저 그림에서 여러분들은 바로 유죄사건을  보고 있습니다. 그림이 재판장 등뒤에 걸려 있는 것은 재판장이 그림을 보고  당황해 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저 그림을 재판관들 앞에 걸어야 합니다. 재판관들이  판결을 내릴 때 우리의 문명이 인류가 수치로 여기는 오판의 본보기를 저 그림에도 보도록 해야 합니다...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의 임무는 우리보다는 여러분 자신을 판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앞에 출두했지만, 여러분을 역사 앞에 출두할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변론도 당시의 험악한 분위기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군중들이 법정 건물까지 쳐들어와 연일 시위를 벌였고 졸라를 위협하였다.  졸라는 숱한 봉변과 협박을 당하여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은 끝나고 배심원은 평결을 내렸다. 8대 4로 유죄판
결이  내려졌다. 졸라는 징역 1년, <로고르>의 발행인은 4개월, 그리고 각각 벌금 3,000프랑이 선고되었다.

   

  제4라운드, 또 한번 배반한 재심
  그 동안 새 인물이 국방상에 올랐다. 그는 잡음이 많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새롭게 조사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여러  증거를 조작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심지어 원래 편지에 다른 사본을 붙여 색깔만으로도  알아볼 정도로 조작방법이 거칠었다. 결국  이 일을 꾸민 알리  중령이 구속되었다. 그는 자신이  구금된 요새에서 자살함으로써 지금껏  드레퓌스의 유죄를 믿어 왔던 프랑스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충격적인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허위보고서 작성으로 인해 졸라에 의해 고발당했던 펠리 외 장군은 부하들에게 기만을 당하여 배심원을 오도했던 사실을 참회하면서 국방상에게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다. 에스테라지는  사태가 불리해지자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도망친 후였다. 이쯤 되자 재심은 이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제 참모본부의 음모가 드러났고 드레퓌스의 무죄를 믿는 사람이 훨씬 늘어났다.
  드레퓌스의 재심을 요구하는 탄원서가 파리고등법원에 제출되었다.  또 다시 긴 논쟁이 법정 안팎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드디어 고등법원 3부 46명의 판사들이 자신들에게 제출된 탄원서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 붉은 법복을 입고  자리에 않았다. 프랑스와 문명세계는 5년을 끌어온 악몽을 걷어낼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판결을 읽는 판사가 입을  열었다. "본인은 모든 증거를 검토한 후 그 명세서는 드레퓌스가 아니라 에스테라지에 위해 씌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나흘 후 재판부는  1894년 12월 22일의 선고는  무효라고 선언하고 드레퓌스에게 렌에서 다시 군사재판을 받도록 명령했다. 그 이틀 후 악마도에 수용되어  있는 드레퓌스의 감방에 형무 소장이 나타나 그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읽어 주었다. "고등법원의 판결에 따라 드레퓌스 대위는 유형자 규정을 받지 않고 다시 군복을 입도록 허용되었다. 드레퓌스는 형법상의 구속에서 해제된다. 드레퓌스를 프랑스에다 실어다 줄 순양함 스펙스 호가 오늘 출항한다." 드레퓌스는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자신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을 한  장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드레퓌스를 실은 스펙스 호가 프랑스를 향하고 있는  동안 법무상은 드레퓌스 사건의 유죄판결을 강요했던 국방상 메르시에 장군을  기소하자는 동의 안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생명의 위협과 협박을 견디지 못해 영국으로 망명했던 졸라도 영국에서  11개월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했다.  최초 조작 사실을 알렸던 피카르도  324일의 감옥생활 끝에 석방되었다.
  다시 재심이 열렸다. 렌느의 법정에 나타난  드레퓌스는 서른 아홉  살의 나이였는데 이미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의 모습이었다. 지난 5년  동안  국내외적 관심과 논쟁의 초점이었던  그는 냉정하기만 했다. 최후진술을 하라는 재판장에게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의 드레퓌스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만 조국과 군을 향해  죄가  없다는 사실만을 말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나는 내 자녀들이 이어갈 나의 이름에게 명예를 되찾아주기 위해 5년  동안 몸서리치는 고통을 참아 왔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정직성과 정의감에  비추어 나의 그러한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그의 확신은 이번에도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또다시 5대 2로 드레퓌스에게 대역죄를 범했다는 평결이 나온 것이다. 다만 정상을 참작하여 10년으로 감형한다고 선고하였다. 온 세계가 이  판결소식에 분노했다. 전세계 프랑스 대사관과 영사관에는 항의데모들이 들이닥쳤고 미네아폴리스에서는 프랑스  국기가 불태워졌다. 이듬해 파리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던 만국 박람회를 보이콧하자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12년만의 승리
  빗발치는 항의에 힘입어 1899년 9월 10일  드레퓌스는 특사로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1900년 12월에는 다시 사면령이 내려졌다. 그로부터 다시 4년 후 국방상은 드레퓌스의 재심청구에 따라 그가 조사한 새로운  증거를 첨부하여 1904년 3월  최고재판소에 제출했다. 이번 재판에서는 심리 미진의 여지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증인심문을  다시 하기로 결정했다. 또 한 차례의 행진-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증인심문과 증거조사의 행렬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5년 전의 렌 재판, 그보다 2년 먼저 있었던 졸라의 재판, 에스테라지 재판, 그리고 1894년의 첫 재판, 이  모든 재판의 증인심문이 다시 진행되었다. 괴괴하고 목소리에 녹이 슨 증인들이 차례로 등장했다.
  1906년 7월 12일, 선고공판이 열렸다, 이제 법정에는 더 이상 군중이 몰려들지 않았다. 드레퓌스 가족과 지지자 몇 사람, 법률적 관심을 가졌던 변호사 몇 사람만 나왔을  뿐이었다. 드디어 프랑스 최고재판소는 렌 군법회의의 유죄판결을 오판이라고 파기했다.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할 어떤 증거도 없으므로 재심의 여지도 없이 지금까지의 모든 유죄판결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동시에 이러한  최고재판소의 판결내용을 파리와 렌에  게시하고 관보 및 드레퓌스가 지정한 50개 신문에  공고하되 그 비용은 재무성이  부담한다고 명령하였다. 정부는 지체없이 드레퓌스와 피카르의 복권 절차를 밟았다. 정부는 드레퓌스를 소령으로 승진시키고 '레제옹도뇌르 훈장'을 수여하기로  하는 동의 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그는 군인으로 근무하기보다는 은퇴를 택했다. 피카르는 준장으로 승진, 복직되었다.

   

  최후
  레제옹도뇌르 훈장 심사위원회는 ';비견할 데 없이 가혹한 희생을 치른 군인에게  적합한 보상으로 드레퓌스에게 훈장을 수여키로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또한 드레퓌스는 악마도에서  썼던 일기를 출판하여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드레퓌스는 1908년  졸라의 유골이 팡테옹에 이장되는 행사에 참석했다가 반 유대계 신문기자가 쏜 총격에 경상을 입기도 하였다. 이 저격사건을 들은 세계적인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는 '당신은 또 고통을 또 당하셨고, 우리는 또 울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의 고통도 울음도 없을 것입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멀리 가까이, 모두가 당신편이며 당신을  위해 비겁함과 거짓과 망각과 싸우려는 사람들뿐입니다.  그중 한 사람이 저  사라  베른하르트입니다'라고 편지를 써 보냈다.
  1914년 드레퓌스는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다시 소집되어 두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렀다. 그중 하나가 베르됭 전투였다. 1918년 9월에는  중령으로 승진한 다음 다시 제대하였다. 드레퓌스는 그후 오랫동안 병마와 씨름하다 1935년 7월 11일 그 파란만장한 생을 조용히 끝냈다.
  졸라는 {진실}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졸라가 생애 최고  걸작으로 기획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못하였다. 의미와 구성에 있어 현실이 소설가의  상상을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2년 가을 졸라는 방에 피워 둔 난로 가스에 중독 되어 숨졌다. 완전한 승리를 보지 못한 채 죽은 것이다. 클레망소는 이렇게 졸라를 기렸다. '가장 강력한  제왕에  반항하며 그에게 거부할 것을 거부할 만큼 강한 사람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다수에 저항하고 오도된 대중에 홀로 맞선 사람은 매우 드물다.'  열렬히 드레퓌스를 옹호하고 그 무죄를 주장했던 조르
주 클레망소는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동부전선이 붕괴되어 패색이 짙어갈 무렵 프랑스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여전히 투지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나는  파리의 앞에서 싸우겠다. 나는 파리의 뒤에서도 싸우겠다. 파리가 함락되면  나는 루아르에서 싸울
것이고 가론에서 싸울 것이며  최후의 경우에는 피레네 산중에서라도 싸울 것이다. 혹시 피레네에서라도 쫓겨나면 우리는 바다에서라도 싸워야 한다. 평화를 바라는 우리의 염원은 깎이는 법이 없을 것이다." 클레망소는 마침내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그 전쟁
을 승리로 이끌었다.
  피카르 장군은 군대에 복귀하여 진급을 거듭, 1908년 클레망소 내각의  국방상이 되었다. 군부의 개혁자가 되리라는 기대를 안았던 그는 1914년 낙마사고를   당해 사망하였다. 조레스는 피카르의 죽음에 붙여 이렇게 썼다. "운명의 착오라든가   인생항로의 옳고 그름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인생의 의미를 주는 것은 찬란하고 열렬한 몇 시간으로 족한 것을..."
  폰 슈바르츠코펜, 독일 무관으로서  첩자 에스테라지의 파트너였던 그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장군으로 승진한 후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죽음이 임박해 오던 1917년에서야 그는 혼미상태에 빠져 프랑스어로 부인에게 드레퓌스에게 죄가 없음을 고백했다고  한다. 1930년 6월1일 드레퓌스는 폰  슈바르츠코펜 부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여기 죽는 남편 보병사령관 막스 폰 슈바르츠프코펜 장군의 일기책을 별도의 봉투에 넣어  보내드립니다. 이 일기는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편집 출판한 것입니다. 남편은 당신을 희생의 재물로 만든  그 괴상한 재판에 늘 유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기에 명백히 서술되어 있는  대로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그분은 재판에 나서 증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은폐된 진실 뒤에서 활개쳤던 에스테라지. 런던으로 도주한  그는  런던 빈민굴에서 구차한 말년을 보냈다. 너절한 하숙집에 기거하면서 낮에는 자고 밤이면 나와 산보에 나서던 그는 1923년에 죽었다. 모든 것이 사필귀정이었다.

   

   100년 후
  지난 1998년 1월 12일 시라크 대통령이 파리 제9의 한  허름한 주택 앞에 나타났다. 바로 [나는 고발한다]를 썼던 에밀 졸라의 저택 앞에서  그 글의  발표 100주년을 기념하는 팻말 부착식을 거행한 것이다. 프랑스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장 조레스가 '19세기  최대의 혁명적 행동'이라고 극찬한 이 사건을 기념하는  행사에 프랑스 대통령이 참석하였다고  큰 화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이어서 프랑스국립도서관은 에밀 졸라의 그  글의 원본과 드레퓌스 사건 관련  문서의 진본들을 전시하는 행사를 열었다. 그 전문이  <르몽드>를 비롯한 몇몇 매체에 다시 실렸고,  또 다른 신문은 '20세기말의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제목 하에 또 다른 현안사건에 대해 나딘 고디머, 로버트  윌슨 등 명사들을 동원하여 신판  [나는 고발한다]를 연재했다. 텔레비전 방송들은 드레퓌스 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 토론회를 몇 주 동안  계속 내보냈다.
  '사회와 정치에 글이나 행동하는 식자'라는 프랑스적  의미의 '지식인'은  1763년 볼테르의 '관용론'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볼테르는 지식인이라는 말이 태어나기 전의 지식인이었다. 왜냐하면 지식인이라는 말이 생긴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고 그 말이 대중화한 것은  바로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에밀 졸라를 비롯해 드레퓌스 대위의 무죄를 주장한 학자, 작가, 예술가, 기자, 교사들에  대해 반 드레퓌스파는 '앵텔렉튀엘'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지식인이라는 의미가 된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무책임한 선동가'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는 뜻이었지만  그  후 바로 이러한 지식인들이 프랑스 사회와 역사의 중심부에 서게 되었다. 장 폴 사르트르, 앙드레  말로 같은 행동하는 지식인이 수없이 태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은 바로 이러한  지식인의 앙가주망(현실참여)에 있었다. 드레퓌스 사건 100주년을 기념해 출간된 '지식인의 세기'는 프랑스 지식인의 참여와 저항, 그리고 이를 둘러싼 논쟁을 정리하고 있다. 청년  레옹 블룸,  모리스 바레스에서부터
앙드레 지드, 알베르  카뮈, 몽티,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에 이르기까지 지식인의 군상,  역할, 활동 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는 이를 통해 지난  100년간을 '지식인의 세기'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새벽 별처럼 빛나는  지식인들의 첫 번째 자리에  졸라가 있고 드레퓌스 사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