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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비시정권의 수반, 필리페 페탱의 재판

by 이덕휴-dhleepaul 2018. 5. 5.

나는 프랑스를 믿는다 -비시정권의 수반, 필리페 페탱의 재판

   

   법정에 선 반역자
  "피고인 기립하시오"
  거대한 오크 테이블 뒤에서 프랑스군의 카키색 군복을 입은 백발의 노인이 세 사람의 판사 앞에 일어섰다. 그의 뒤로는 프랑스 고등법원 대법정을 가득 메운 방청객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근엄한 할아버지 얼굴을 한 필리페 페탱은 프랑스 국민들이 지난 나치 점령 기간 4년 동안 포스터, 동상, 우표 등을 통해 수없이  보아온 얼굴이었다. 성필리페의 흉상은 프랑스 전역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핑크 빛 피부는 늘어져  있고 밝은 푸른색 눈에는 피로의 기색이 완연하였다. 다만 백발과 턱수염만은 그대로였다. 패배한 프랑스의 구원자, '베르됭의  승리자 원수'의 모습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암울했던 지난 4년 동안 충성과 애정을 바쳤고, 그를 보기 위하여 수많은 도시의 거리를 메웠으며 '원수, 여기 오셨네'라고 열렬히 노래불렀다. 그런 그를 피고인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니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것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약간은 슬프게 만들었다. 그가 방청객이  꽉 들어찬 법정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은 일어섰고 모두 당황해했다. 여전히 프랑스의 원수였다.
  재판장 몽기보는 회한이나, 슬픔, 동정심을 내보이지 않았다.  붉은  족제비의 휘황찬란한 법복을 입고, 약간 뾰족한 수염을 기르고, 키가  인상적으로 큰 그는  이 법정 안에 감도는 고뇌에도 불구하고 사무적으로 정상적인 재판을  할 결심을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름 , 성, 나이, 직업을 대시오."
  "필리페 페탱, 프랑스의 원수요."
  프랑스의 온 국민들이 라디오를 통해 수없이 들었던 그  목소리, 독일과의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모든 국민들에게 '협력의 명예스러운 길로' 자신을 따르라고 외치던 그 목소리였다. 그는 필리페에 힘주어 말했다. 배심원들에게 또 다른 필리페, 즉 새로운 권력자 필리페 드골을 연상시키려 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 노인은 파리의 한복판 시테 섬에 있는 이 숨막히는 법정으로부터 엘리제궁에  있는 드골에게  미묘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을 터였다. '당신은 나를  재판하고 비난하고 총살까지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한때는 당신들이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프랑스의  해방과 더불어 가장 큰 정치적인  사건이 시작되었다. 나치 점령 4년 동안 비시정권을 이끌었던 베르됭의 영웅, 페탱 원수에 대한 재판이 그것이다.

   

   비극의 사생아, 비시정부
  1938년 루드비히 베크 독일 합참의장은 프랑스  군대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그런 프랑스 군대가 1940년 5월 10일 전쟁이 시작된 지 6주만에  맥없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독일군은 난공불락이라는 마지노선을 통과하여  단 몇 주만에 피레네 산맥까지 점령하였다.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석권한 독일은 이미 5월 15일 전선을  돌파하였고 한걸음에 파리를 향해 진격하였다. 독일은 영불 해협의 북서쪽을 공격함으로써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함께  패퇴시켰다. 유럽 대륙에 남아 있던 영국군  34만 명이 프랑스를 빠져나갔다. 6월 10일에는 이탈리아가 대 프랑스 선전 포고를  했고 프랑스 정부는 루아르강 하류로 철수하였다.
  마침내 6월 14일 밀물처럼 밀려든 히틀러 군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였다. 자유, 평등,  박애의 위대한 프랑스 정신을  담고  있는 이 상징적인 장소를 히틀러가 유린하자 자유세계는 커다란 충격에 사로잡혔다. 전세는  더욱 밀려  보르도까지 쫓겨온 프랑스 내각은 항복과 항전의 기로에 섰다.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레이노  수상은 혼란이 극도로 고조되고 주요전력과 북부 공업 지대를 상실한  데다가 이미 전의를 사실한 상태에서  북아프리카로 거점을 옮겨 항전할 것을 제안하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운명을 강조하고 전쟁을 공동으로 수행하자는 의미였지만 이미 늦은 제안이었다. 사실상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고, 프랑스 영토를 모두  잃은 다음에 불영 연합이 무슨 소용 있겠느냐는 회의가 프랑스 정치지도자들 사이에 지배적이었다.
  휴전파와 항전파가 치열한 논쟁을 거듭하던  1940년 6월  16일, 레이노  수상이 사임하고 대신 페텡 원수가 취임하였다. 페탱은 패배를 인정하고 독일과의  휴전협상에 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던 베르됭 전투의 영웅으로서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페탱 원수는 원래 스페인대사로 나가  있었는데 위급한 상황에서 급거  귀국하여 부수상을 맡았던 것이다. "페탱, 가지 마시오. 나이 핑계를 대시오. 당신은 베르됭의 승리자였소. 당신의  이름을 다른 사람이 패배한 전쟁에  빌려주지 마시오." 스페인의 총독 프랑코는 페탱의  귀국을 만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페탱은 프랑스가 끝까지 싸워 완전히 몰락하느니 일부의 프랑스 군대라도 잔존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개 낫다는 생각으로 수상을 맡았다. 당시 그는 프랑스가  제2의 폴란드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국도 똑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또한 '정부가 휴전하지 않으면 프랑스 군대는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공포에 빠질  것이다. 프랑스 본토를 포기하는 것은 적에게 프랑스를 넘겨주고 그 영혼을 파괴하는 꼴이 되고 만다. 프랑스의 영혼은 프랑스에 남아야만 지켜낼 수 있고  연합군 대포와 함께 재정복한다고 해서  유지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당시의 페탱에게는 '일단 프랑스를 떠나면 다시는 프랑스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신념이었다.
  휴전파를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한 페탱은 수상으로 지명 받은 지 몇  시간만에 독일에게 휴전을 제의하였다. 독일은 앞으로 남은 영국과의 전쟁을 예상하여  영국을 고립시키고 프랑스 함대와 식민지를 중립화시키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하여 지나치게 가혹한 항복조건보다는 프랑스 정부의  주권 존속을 인정하고 부분적으로 점령을 실시하는 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6월 22일 독일대표단과 프랑스측 사이에 휴전협정이  성립되었다. 페탱은 6월 25일자 대국민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휴전협정은 체결되었다. 전쟁은 끝났다... 우리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여러 가지 엄혹한 조건이 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명예는 지켜졌다. 누구도 우리의 비행기와 함대를  사용할 수 없다. 우리는 본국과 식민지에서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육해군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정부는 의연히 자유롭다. 프랑스는 프랑스인에 의해 통치될 것이다.
  "프랑스인을 통치할 프랑스인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비시정부였다. 프랑스  휴양도시 남부의 비시를 전시 수도로 정한 비시정권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의원과 내각의 관료들은 혼비백산하였지만 3분의 2정도가 비시에 모일 수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권력을 공화국 정부에 부여하자고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제정된 헌법은 국가  주석의 권한을 루이 16세 때보다 더 강력하게 규정하였다. 1940년 7월 10일, 페탱은 국가 주석으로  취임하였고 이로써 비시정권이 수립되었다. 그에 앞서  열 두 명의 각료로  구성된 내각을  구성하였고 지방의 지사를  임명하였다. 비시정부 수립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라발은 부주석이 되었다.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
  비시정권의 합법성에 대해 당초에는 별다른 의문이 없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비록 독일에 사실상 항복한 후 등장한 정부였지만 정권의 성립이 무효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형식 논리적으로 보면 비시정권은 당시의 제3공화국 헌법에 따라 구성된 합법적 정부였다. 그러나 런던에 망명한 드골의 '자유프랑스'는 비시정권을 처음부터 무효라고 주장하였고,  제3공화국은  존속하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드골의 선언은 1940년 6월 18일 페탱  원수의 독일과의 휴전협정 직후  영국으로부터  방송된 '라디오  런던'에서 이루어졌다. 드골의 선언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되었다.
  첫째, 페팅 정부는 나치독일과의 휴전협정을 목표로 수립되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상실했다. 왜냐하면 프랑스 대혁명 때의 1793년 헌법에 의하면 프랑스  국민은 프랑스 영토를  점령한 적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둘째, 페탱 정부는 휴전에 동의하여 무조건 항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을 노예상태로 전락 시켰으므로 불법적인 정부이다. 페탱 정부가 휴전협정에 서명한 것은  민족이익을 배반한 것이며 '자유 프랑스' 만이 민족이익의 성실한  수호자로  남아 자동적으로 정권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획득했다는 게 드골의 법률해석이다.
  셋째, 드골은 나치독일과의 휴전협정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왜냐하면 이 협정 제10호는 프랑스 국민에게 나치독일에 반대하여 무기를 들고 투쟁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드골은 휴전협정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했으며, 점령지역 내 저항운동을 조직했고, 나치 협력자들을 처단하기 시작했다.
  비시정부는 법률적인 차원에 앞서 진정한  프랑스 국민의 정부일 수  없었다.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라는 드골의 선언은  철학적 차원에서, 또한 도덕적 견지에서 비시정부를 난도질한 것이었다.
  비시정부는 기본적으로 파시스트정권이었다. 헌법이 제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정한 일련의 탄압적 법률을 통해 프랑스대혁명 이후  확립한 '인간의 권리들을 폐기하였고, 노동조합연맹 등 거추장스런 모든 조직을 해체하였다. 나아가 제3공화국의 요인들을  체포, 재판하였으며 49명의 지사를  포함한 고급관료 2,800명을 숙청하였다.
  더구나 휴전협정은 그 사생아인 비시정부를 괴뢰정권으로 만들어버렸다. 휴전협정을 살펴보면 일방적으로 프랑스 정부가 국민들로 하여금 전투재개를 금지시킬 것을 약속했을 뿐 독일이 무력행위를 중단한다는 조항은 눈 씻고 찾아 볼 수  있었다. 독일은 프랑스 포로를 강화시까지 억류해 둘 수 있다는 것, 프랑스 군대 병력 수를 10만 명으로 제한할 것, 군수품을 인계할 것, 공군의  무장을 해제할 것 등의  내용이 휴전협정에 포함돼 있었다. 이  규정에 따라 150만 명의 프랑스군  포로가 즉시 인질이 되었고 군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10만 명이란 조건도  말뿐이었고, 실제로는 프랑스 제1연대  사병 3,000명만 남았다. 한때 병력이 300만 명에 달하는 등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프랑스 군대는  이렇게 초라한 몰골로 변하고 말았다. 나아가 프랑스 정부는 매일 90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점령군 유지비를 부담해야 했다.
  이 휴전협정에 따라 프랑스 북부는 독일의 직접적인  점령을  받게 되었고, 남부프랑스는 비시정권 통치지역으로 분리되었다. 북부 점령지대는 파리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가장 풍요로운 지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지역의 점령 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독일은  파리의 마지에스티 호텔을 본부로 하여 카이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군 총사령관은 군대의 안전뿐 아니라 치안, 경제, 언론까지 장악하였다.
  한편 남부의 자유지대는 비시정부의 통치지역으로 위임되었다. 그러나 독일측 감시위원회가 설치되어 자유지대의 관보 검열, 중요공무원 임명허가를 요구하였다. 1942년 11월 이후에는 그나마의 자유도 사라져 직접 점령지역과 자유지대 사이의  구별이 사실상 없어졌다. 알자스로렌 지방은  독일에 합병되었다. 막대한 점령비용의 부과는 합법적인 약탈에 다름 아니었다. 비시정부는 일정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페탱 원수의 명성을 이용한 실질적 점령의 한 형태일 뿐이었다.

   

  페탱은 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니다.
  몽기보 재판장이 다음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페탱의 수석변호인이 이의를 제기했다. 1875년 프랑스헌법에 따르면 오직 상원만이 국가원수를 반역혐의로 재판할 수 있으므로 이  법정은 페탱을 재판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상원은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배심원 구성이 불공정하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24명의 배심원 중 12명이 레지스탕스 출신이고 나머지 12명이  전직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페탱과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로서 공정하게 심판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페탱의 변호인단은 자신들에게 적대적이었던 배심원을 축출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법정을 소란에 빠뜨린 것은 세 번째 주장이었다. 3명의 재판관과 검사인 검찰총장이 비시정권 치하에서 페탱에게 충성서약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검찰총장 모네가 벌떡 일어나 큰 코를 벌렁거리며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려 들었다. 1941년 9월 자신은 18개월 이상 퇴직해 있었기 때문에 페탱에게 충성서약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충성서약을 했을까? 아마도  나는 주저 없이  '아마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공직자들은 상사에 의해 그 서약을 강요받았고,  강요한 당사자는 바로 외국군대이다. 외국군대의  통제하에 이루어진 서약은 아무런 효력과 가치가 없다."
  변호인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검찰총장은 '여기는 공공집회  장소가 아니다'고 소리치며 경위를 부르려 하였다. 소란이 진정된 후 검찰총장은 1940년 10월 당시 의회가 페탱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바가 없이 때문에 그는 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상원만이 재판할 권한이 있다는  주장은 기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퇴정하였다가 30분만에  등정한 재판부는 고등법원이 페탱 원수를 재판할 수 없다는 변호인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첫 샅바싸움은 검찰의 승리였다. 하지만 길고 긴 논쟁의 서막일 뿐이었다.

   

  프랑스 국민을 보호하는 방패
  서기가 기소장을 낭독하였다. 자신의 이름을 전쟁 전에 반 공화국  세력에게 빌려준 사실, 정부형태를 바꾸거나 파괴할 목적으로 공직에 취임한 사실, 공모자들과 함께 적국 나치독일에 협력하여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해친 사실, 프랑스에 적대적인  국가를 지원할 목적으로 적국 또는 그 요원과 접촉하거나 정보를 제공한 사실 등이 주요 죄목이었다. 이어서 정리가 증인 명단을 낭독하였고, 호명된 증인들은 방청석에 나와 피고인 뒤편에 나란히 앉았다.  이때 변호인은 피고인이 말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재판장의  허락에 따라 페탱은 위엄 있는 자세로 꼿꼿이 선 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대여섯 장의 종이를 펴들고 읽기 시작했다. 의회 대표들을 통해 1940년 7월  10일 나에게 전권을 준 것은  바로 프랑스 국민이다. 내가 해명해야 할 대상도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지금 이 재판부는  프랑스 국민을 대표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나는 이후 이 법정에서 어떤 진술도 하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어떤 진술도 하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조국  프랑스를
위해 봉사하는 데 일생을 바쳤으며 합법적으로 권력을 승계했다,  나는 군대를 이끌고 1918년의 승리를  장식했다.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그날, 다시 프랑스는 나에게 의지해 왔다. 나는 아무 것도 요구한 적이 없고 바란 것도 없었다. 자만 프랑스 국민이 나에게 간청했을 뿐이다... 당신들은 그러한 조건  아래서 통치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가? 매일 비수가 목구멍을 겨눈  상태에서 나는  적의 요구와 싸워야  했다. 검찰은 단지  나를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겠지만 역사는 내가 여러분을  보호했음을  말해줄 것이다.....드골 장군이 우리의 국경 밖에서 투쟁하였다면 나는  안에서 프랑스를 보존함으로써  해방을 위한 길을 준비하였다.....그러므로 어떠한 프랑스인도 합법적인  국가원수로부터의 명령에 복종했다는 죄로  구속되거나 선고를 받아서는 안 된다. 당신들은 무고한 사람을 재판하고 있다.
  그는 조금도 주자하지 않고 자신의 혐의를  부정했다. 나치와의 휴전은 '필요한 행동이자 구원의 행동'이었고 '군사 지도자들의 동의를 얻어 협상했던  것'이었다. '휴전은  프랑스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를 자유롭게 하고 프랑스 제국이  안전하게 남도록 하였다. 의회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주었고, 바티칸에서 소련에 이르기까지 무든  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 권력은 프랑스 국민을 보호하는 방패로 사용되었다. 국민들을 위해, 점령된 나라의 국가원수로 남음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희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점령은 나로 하여금 내 의지를  거슬러 일정한 행동을 하도록 강제하였지만 프랑스의  존립을 위해 필수적인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폐허와 무덤을  해방시킨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렇게 그는 반문하였다. "나의 인생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프랑스에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을 주었다. 만약 비난하려거든 나를 그 비난의 마지막이 되게  해달라... 그러나 나는 말하려 한다. 당신과 온 세계에, 당신들이 죄 없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판결 후에
는 신과 후손들의 심판이 올 것이다. 나는 프랑스를 믿는다." 페탱은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법정 안에는 완벽한 침묵이 흘렀다. 
단호한 어조의 짧은 연설이 청중을 압도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고뇌가 일었고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확신이 흔들렸다. 과연 그의 말이 옳은 것일까?

   

   방패론의 허구
  나는 4년 이상 매일같이 프랑스의 영원한 이익을 위해 봉사하였다. 충성스럽게, 그리고 한치의 타협도 없이. 나는 하나의 목표만을 가졌다. 바로 프랑스를  최악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것... 만약 내가 프랑스의 칼이 될 수 없다면 나는 방패라도 되려고 하였다.
  1944년 8월,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 독일로 향한 페탱의 대 국민성명의  일부 내용이다. 페탱은 법정에 서기전부터 '방패론'을 극구 주장해 왔다. 드골이  나라 밖에서 프랑스의 칼을 들었다면 자신은 안에서 프랑스 국민을 위해 프랑스의  방패를 들었다는 것이다. 정복자인 나치  독일의 보호 하에 있었지만 자신이 방패가 된 덕에 프랑스 국민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줄 수 있었다는 게 방패론의 요지였다. 과연 비시정부는 나치독일의 전면적인 점령으로부터 프랑스인들의 고통을  경감시켜주었을까? 페탱은 프랑스의 폴란드화를 막았던 것일까?
  독일 점령군은 프랑스를 착취하고 징발하였다.  엄청난 수의 선박을  압류하였으며, 철도 재고의 3분의 1을 장악하였고, 모든 가솔린 재고와 군용을 위한 식품을 징발하였다.  프랑스  산업에 필요한 원료는 독일로부터 공급받는 구조로 바뀌었고, 생산 가동률은 50%에서 점점 더 떨어져갔다. 프랑스는 거의 완전한 농업국가로 전락할 지경이었다.
  전쟁 전 프랑스는 가장 앞선 농업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점령 당시 국민의 일일  칼로리 섭취 량은 서유럽뿐만 아니라 동유럽을 포함한 국가들 중에서도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독일 본토와 점령군에 대한 식품공급량은 폴란드보다 많았다.  영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비시정부가 나치독일과의 협력 관계로 특별히 이득을 본 게  없었다. 알자스로렌 지방은 독일에  병합되었고 두 개의 북서  해협 해안 도시가 브뤼셀에 있는 독일 군정의 관할 아래 놓였다.
  또한 강제노동이나 유대인 문제에서도 비시정부는 별반  방패가 되어주지 못하였다. 라발은 전후  80%의 벨기에 노동자가 강제노동에 종사하였지만 프랑스는  단지 16%뿐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다른 유럽국가의 유대인  92%가 처형, 이송되었지만  프랑스 유대인은  
95%가 살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시정권은 프랑스에 할당된 강제노동자의 숫자를 채우는 데  광분하였고, 실제로 1943년 11월 현재 러시아나 폴란드보다  더 많은 약 130만 명의 프랑스 남자가 독일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강제노동소행의 경우에는 비시정부가 직접 그 일을 했다는 점에서 비난 가능성이 더 높았다.
  더구나 비시정부 하에서 13만  5,00명이 구속되었고, 7만  명이 강제 수용  당했으며, 3만 5,000명의 공무원이 해직되었다. 게다가 갖가지 입법이 이루어져 6만여 명의 조직원이  조사받았고, 6,000여 명이 고문당했으며,  549명이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비시정부는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의 방패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향한 총칼이 되었다. 레지스탕스를 비롯한 프랑스  애국자들을 처형과 탄압의 공포로 몰아넣은 민병대의 존재가 사실을 증명한다. 1941년 봄에 창설된 민병대는 준 군사 조직으로 경찰과는 별도로 공산당원과 레지스탕스를 학살하고  탄압하는데 이용되었다. 나치의  'SS' 'SD'로부터 훈련받고 무장한 이들은 결국 나치의 점령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비시정부의 방패이론은  설 땅이 없어진다. 독일  당국은 점령군으로서 프랑스에 많은 것을 요구하였고, 비시정부는 그 요구를 하나하나 들어주고 말았다. 독일이  인질로 잡았다가 총살한 프랑스인이 수천 명을 넘어 섰다. 1942년 11월, 독일군은 프랑스의 자유지역을 유린하였다. 곧이어 해군함대가 있는 툴룽이 점령되었다. 명백한 휴전협정  위반이었으나  저항할 힘을 잃은 뒤였다. 비시정부는 독일의 요구를 처단하여 프랑스와 국민의 이익을 수호한 것보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정책을 프랑스 정부의 이름으로 합법화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진정한 방패
  진정한 방패는 딴 곳에 있었다. 페탱 스스로 프랑스의  창으로 지목한 드골은 국방차관보로 전쟁을 지휘하던 중 독일과의 협상을 주장하던 페탱이 수상으로 취임하자 바로 그  다음날 영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는 프랑스를 대표할 아무런  권위도 없는 '외로운  모험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패배주의에 빠진 프랑스  지도자들에게 크게 실망한 영국 수상은 드골을 환영하였다. 드골은 처칠의 협조 하에 'BBC'방송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독일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영광스런 군인의 이 불쌍한  그림자가 노령의 허영을 위해 자신의 명예와 조국을 팔았다'고 페탱을 비난하였다. 이미 프랑스가  연합국 명단에서 누락되고 있던 상황에서 드골의 존재와 그의 선무 방송은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드골은 대독협상을 추진 중이던 프랑스 지도자들에게는 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는 1940년 7월 5일 항명죄로 비시정부에 의해 궐석 사형선고를 받았다.  페탱은  그를 '내  가슴속에 키운  독사'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드골은  점차 휴전체제에 저항하는 유일한  지도자가, 정복되지  않은 프랑스의 유일한 대표가 되기에  이르렀다.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에 영국정부와 민간차원의 성원이  줄을 이었다. 드골의 '자유프랑스'는 영국, 미국, 소련 등 연합국으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았으며 프랑스의 해외 영토와 식민지가 그 통치하에 들어왔다.


  1944년, 드디어 지리한 망명의 계절이  끝나고 드골은 해방의 영웅이 되어  고국의 땅을 밟았다. 또 다른 방패는 레지스탕스였다.  담벼락에 나치 독일을 비난하는  낙서와 슬로건을 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레지스탕스 활동은 점차 사보타지, 암살로 발전하여 마침내 나치 점령군
과의 전쟁으로까지 번졌다.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레지스탕스는 1942년 시작된 비시정부의 강제동원체제로  크게 확산되었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독일 공장 행 기차를 타거나  레지스탕스가 되는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했다. 더구나 민병대가 레지스탕스와 민간인들을 아무 사법절차도 없이 마구 처형하는  잔학성을 보이자 레지스탕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사람은 30만 명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성년 남자의 2%에 해당하는 수였다. 이들은 활동과정에서10만 명이 목숨을 잃는 등 희생이 컸지만 독일점령군과 비시정부에게 군사적인 타격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자신의 허구적인 논리 앞에 스스로 함몰된 비시정부와 페탱이  그 죄과를 치르는 순간 이들은 오랜 분투 끝에 얻은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인간 군상의 오묘한 인연들
  페탱의 재판은 피고인뿐만 아니라 소환되어 나온 화려한 증인들의 면모에서도 역사적이었다. 전직 수상들, 의회 지도자들, 부르봉 왕가의 황태자, 노조 지도자 등을 포함해  63명이나 되는 주요 인사들이 증인으로 불려나왔다. 어떤 이들은 페탱을 비난했고 또 어떤 이들은 옹호했다. 선과  악은 종종 그 경계가  너무나 희미하였다. 페탱을 비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프랑스의 영혼'을 지킨 애국자는 아니었으며. 동시에 페탱을 옹호한 사람들이라고  모두 '일신의  안락'을 위해 조국을  배신한 반역자는 아니었다. 재판이 시작된 1945년 7월 23일부터 재판이 끝난 그 해 8월 6일까지  파리 특별고등법원의 대법정은 참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과 그들이 빚어내는 오묘한 인간학을 연출한 화려한 무대였다.
  제3공화국의 수상이었던 폴 레노는 '페탱이 권력에 절정에 있을 때 나는 그를 경멸하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를 동정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경건하고  나직한 어조로 페탱이 자신을 적에게 넘겼지만 자신은 개인적 원한에 연연하지 않겠다면서 페탱에게로  권력이 넘어가던 당시의  상황을 세밀하게 증언했다. 변호인들은 그가 사임  직후 페탱으로부터 미국대사 자리를 제의 받고 수락했던 사실을 들어 그의 진실성에 상처를 입혔다.
  아무런 주관 없이 온갖 정파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만  해서 '제3공화국  통곡의 벽'이라고 불렸던 전임 대통령은 페탱이 그를 일개 하인 자르듯  잘랐음에도 페탱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는 1919년 7월 베르됭 전투에서의 승리 후 페탱이 전 유럽인들의 찬탄과 환호 속에 샹젤리제 거리에서 개선행진을 벌일 때를 회상하며 한탄하였다.  "그토록 높이 올랐다가 이토록 낮은 곳으로  떨어지다니! 대체 어떤 악한 열정이 그의  무인 정신을 더럽혔던 말인가!"
  호시절, 그토록 페탱을 찬양하며 그의  눈 도장을 받으려 애쓰던  제3공화국의 고위 관료들은 대부분 휴전협정을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라고 비난하였으며,  자신들은 페탱과 라발에게 속아 동의한 것뿐이라고 발뺌하였다.  하지만 변호인들이 그에게 과거에  했던 아첨성 발언이나 자리 얻기 운동을 한 사실을 되묻는 바람에 그들의 체면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시정부의 각료들과 장성들, 고위관료들은 대부분 조심스럽게 페탱을 옹호하면서 어찌 '베르됭의  영웅'을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며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하였다.  물론 그 중에는 페탱에 대한 충성심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베르나르 세르그니 장군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는 증인석을 떠나며 재판부에  페탱과 악수를 나누게 해달라고 고집했다. 워낙 많은 증인들이 자기 변명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그의 변함없는 태도는 오히려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나 '고통에 빠뜨린 박해자' 페탱을 대하는 데 가장 훌륭한  모범을 보인 사람은 한때 페탱의 부관이었던 라코 소령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던 그는 페탱의 참모로 복무하던 중 달라디에에 의해 해임되었는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전장에  나가 부상을 입고 독일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병동에서 탈출한  그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하였으나  결국 붙잡혀 2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비시정부는 독방에  갇힌 그를 게슈타포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는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게슈타포의 지하감옥에서 6개월을 보낸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페탱과 독일군과의 관계를 증언하기 위해 법정에  나타났을 때 그는 마치 유령의  모습과 흡사했다. 뼈만 남은 몸에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하였고 두  다리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며 증언을 끝냈다. "나는 페탱 원수에게 아무런 빚을 지지  않았다. 그는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나를 사지에 몰아 넣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백살이 다 되어 가는 한 노인에게 떠넘기는 것을 보니 정말 정나미가 떨어진다."
  그는 재판부를 향해 페탱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요청했다.증인 석에 앉은 사람들 중에 최고의 악인으로 꼽히는 사람은 피에르 라발이었다. 그는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수상의 지위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사회당 하원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였으나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신념의 소유자였으며. '절충하고 타협하고 자리다툼을 벌이는 탁월한 수완'으로 파시스트가 되었다. 그는 '승리자와  함께 일하는 것이 프랑스를  위해  좋다'는 신념을 가졌고 달변과 술수로 비시정부 출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비시정부의 수상에 오른 후 나중에는 페탱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프랑스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결과야  어찌되었건 프랑스의 방패가 되려 했다는 페탱의 선의만큼은 별로  의심치 않았으나 라발에 대해서는 그 반대였다. 그는 자발적으로 반역을  한 '반역의 사도'였으며 '우리들의 원수'를 그릇된 길로 몰아넣은 '악의  화신'이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페탱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비난과 저주를 그에게  퍼부었다. 라발은 예의 그  유창한  언변으로 자신의 부역행위를 '공화국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변명했다.  '휴전협정 당시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독일이 이길 것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이 있었겠느냐'는 게 항변의 요지였다. 심지어 그는 소련 침공 1주년 기념일에 한  저  악명 높은 라디오 연설-'나는 독일의 승리를 기원한다. 왜냐하면 독일이  승리하지  않으면 공산주의가 내일 당장  전 유럽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발언했다-에  대해서도 '독일과 대화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다. '그래야만 내가 그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고 믿을 것이고 만약 조금이라도 의심받을 언행을 했다가는 그들의 요구가 더 가혹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라발의 주장도 페탱의 방패이론과  다름이  없었으나 그의 선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라발은 페탱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지만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

   

  해부하기에는 너무나 따스한 시체
  페탱 재판 서두에서 벌어졌던 판사와 검사의 전력 시비에서 보았듯이 부역자  처벌 문제는 프랑스 국민 모두가 치러야 할 홍역이었다.  목숨걸고 저항한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비시정부 4년 치하에서 살아온 모든 국민이 어떤 의미에서는 부역자였다. 그러나 부역에도 여러 질이 있었다. 나치의 이념을 지지하는 적극적 부역자가 있었는가 하면 생존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협력한 소극적 부역자가 있었다. 이 경우에도 경제적 이익의 추구, 신분 상승, 개인적  원한의 앙갚음 등 동기는 여러 가지였다.  부역자들의 중심지, 파리에는 부역을 열심히 선동하는 언론이 있었는가 하면 나치독일에 적극적인 파시스트 정당들의 본부가  있었다. 독일 점령하의 유럽에서보다 많은  경제적 기회를 제공받기  위해 프랑스 기업가들의 경제적 부역도 심각한 지경이었다, 다수의  유명한 문인,  영화, 연극인들의  부역은 대중의 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연합국에 의한 해방은 삽시간에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비시정부와 그 협력자에게는 부역자'라는 이름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독일병과 잠자리를  같이한 여성들은 머리를 깎이고 갈고리 십자가가 그려진 맨 가슴을 드러낸 채 '나는 독일병과 잤습니다'라는  플
래카드를  달고 파리 시내를 돌며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다. 부역자에 대한  검거와 처단이 불길처럼 일었다.  제대로 사법절차조차 갖추지 않은 채 즉결 처형이  이루어져 처형된  사람이 1만여  명에 이르렀다. 드골의 '자유프랑스'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후 부역자 처리를 위한 전담재판소가 열렸으며  법률적 근거들이 만들어졌다. 이들에 대한 재판 결과 7,037명이 사형 선고를 받아 그  가운데 1,500명이 집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1만 1,343명에 이르는 부역자들은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과거  비시정부에  몸담았던 정계인사,  외교관,  교육계,  군부인사들이 여기에 해당하였다.
  비시정부와 나치독일의 점령정책을 뒷받침한 언론은 대중의 여론을 오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에 철저히 청산되었다. <르피가로><라 크로와><르  탕>, 3개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폐간되었고, 나치독일을 찬양하는 등의 논설을 쓰거나 기사를 쓴 언론인들은 총살당했다. 나치독일과의  교역으로 이득을  취한 기업가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재계에서 1,500여 명의 중요한 경영인들이 추방되었고 그 기업이 몰수되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자동차회사 르노는 독일에 비행기와 탱크를  제작해 주었다는 이유로 국유화되었고  사장은 재판 중 옥사하였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부역자 청산의 방법은  이른바 '공민권박탈제도'였다. 나치독일에 협력한 사람들에 대해 일정기간 공민권을  박탈함으로서 부역자들을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다시 정상적인 활동을 못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이 형을 받으면 선거권과 피선거권 박탈,  정부와 국영기업체 등 공직 진출 금지, 민간기업, 은행, 신문과 방송기관 등에서의  간부직 제외, 노동조합과 변호사 등  사법관련직업, 교육기관 및 언론관련 공공기관 진출 금지, 무기소지 금지조치 등을 받게 되었다. 다른 형과 병과하여 또는 독립적으로 부과할 수 있었다. 그  대상자는 비시정부  종사자, 유대인 탄압기관 종사자, 민병대와 같은 탄압단체의 구성원, 나치를 지지하는 집회, 시위를 조직한자, 나치에 유리한 글을  발표한 자 등이 모두 포함되었다. 이렇게 하여 공민권이 박탈당한 사람은 9만 5,000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는 독일대사 오토 아베츠의 부인에게 꽃을 보낸 사람,  장의사 직원으로서 암살된 부역자의 관  앞에  나치식 인사를 한사람, 라발의 운전기사로 일했던 사람 등도 포함되었다.
  이토록 엄정하게 진행되던 부역자청산작업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열기가 수그러들었다. 국민들은 전쟁 직후 수년에 걸쳐 계속된 논쟁과 보복성 행위에 흥미를 잃고 말았다.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국민의 신임을 얻어 정계의  절대 다수파가 되었던 공산당과  사회당은 분열과 암투에 몰두하였다. 거의 회생불능의 상태에 이르렀던 우익세력이  점차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부역자 처리과정에서 인권침해로 말미암아 비난도 적지 않았고, 많은 부역자들이 해외도피, 잠적, 허위 사망처리, 공적조작 등의 방법으로 정의를 피하기도 했다. 부역자 처리를 둘러싼 논쟁은 전후 프랑스 사회를 끝없이  갈등과 혼돈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나치점령기의 유산을 극복하는 방안으로서 처단에 대해 강온의 대립이 이어졌다. 특히 카뮈와 모리악 사이의 논쟁은 유명하다. <콩바>지에 기고하던 카뮈는 '인간적 정의'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르 피가로>지에서 모리악은 "일탈한 작가들에 대한용서'를 제창하였다. 그러한 논쟁은 식을 줄 모르고 지속되었다. 비시정부 연구가인 앙리 루소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970년대 후반, 나는 비시정부의 역사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무식하게도  나는 메스
를 들어도 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체는 아직도  따스하였다.
해부학자가 부검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빠른 시간이었다.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다
루는 데 적합한 의사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논쟁애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부역자  처리 문제에서 보여주었던 단호함은  우리의
귀감이 될 만하다. 프랑스는 자신의 어두운 역사와 부끄러운  과거를 과감하게 도려내는 역
사적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민족적 정통성을 곧추세웠다. '클라우스 바르비' '폴 투비에르' '
모리스 파퐁'사건 등 최근까지도 공소시효를 배제한 채 나치 부역자에  대한 재판을 계속해
왔다.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우리로서는 부러움과 함께 느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죽어서도 영원한 화두
  8월 11일, 검사의 구형이 있었다.  모네 검사는 페탱의 반역행위의  동기는 순전히 권력을
위한 허영, 권위주의적 본능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방송연설, 서명, 히틀러에 대한  축하전문
또는 영국 왕에 대한 항의서한 등이 반역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모네는 독일에 대한 페탱의 
우호는 쇼였으며, 연합국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묻고 페탱은 프랑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으며 설사 도움을 주었더라도 효과가 없었다면서 그 '이중의 게임'은 허구라고 자
답하였다.  페탱의 욕망은 나치 독일이나 파시스트 이탈리아 같은 모델을 따라 프랑스에 권
위주의 국가를 세우는 일이었다고 공박하였다. 그는 이어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군을, 그
것도 독일군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반역이었다고 결론 내리면서 사형을 구형하였다.
  페이앵 변호사는 사람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호소함  하는 것으로 변론을 시작하였다. '죽
음이  코앞에 와 있는 아흔이 넘은 늙은 노인을 끌어내 사형을  선고하여 하고 있다'고  말
문을 꺼낸 변호사는 그들의 과거의 '영웅'이 얼마나 늙었는지 설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
다. 그는  페탱의 정신이 온전했던 시간은 오전 몇 시간뿐이었고, 따라서 비시정부의 관리들
은 오후나  저녁에 결제를 받기 위해 안달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페탱과 방청객들이
관심을 갖고 기다린 것은 실질적으로 모든 변론을 주관한 젊은 변호사 이소로니의 변론이었
다. 그의  변론은 페탱이 도덕적 양보를  감수하고라도 프랑스를 위해  물질적 이익을 확보
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에 집중되었다. 그들의 적, 독일은 모든  카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
에 양보는 불가피했다고 강조하였다. 페탱 역시 끓어오르는  모욕감을 참아내며 제2의 폴란
드가 되는 것을 막았으며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군사적 점령 하에  있었던 다른 나라보다 덜
고생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소로니는 마지막으로 평화와 안정이 전 세계에  깃들고 전쟁의 소란이 사라지고 있는  이
때 프랑스의 성스러운 땅에서 더 이상 피 흘리지 말자고 간청하였다.
  1944년 8월 15일, 날이 밝았다. 드디어 배심원들은 장장 일곱 시간에 걸친 토론을  시작하
였다. 이들은 결국 14대 13으로 사형 판결을 내렸고 이어서 재판장 몽기보가 판결을 선고하
였다. 재판장은 페탱에 대한 모든 기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하면서  사형과 더불어 모든 재산
의 몰수를 선고하였다. 다만 그의 나이를 고려하여 사형 집행을 정지하도록 권고하였다.  이
틀 뒤 드골은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였다. 선고 직후 페탱은 파리를 떠나 피레네산맥
에 가까운 요새로 이송되었다. 다시 3개월 후 브레타뉴  남쪽 해안에 위치한 자그마한 섬으
로 옮겨졌다. 재심은 법무부에 의해 기각되었다.
  사회당의 오리올이 프랑스의 새 대통령이 되었을 때 페탱의 변호사들은 그를 방문하여 선
처를 탄원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냉정하게  거절하였고 여론이 페탱에  대해  동정적이고
선처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미 야당이 된 드골은  페탱이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제 노인이 된 그가 잔디를 밟지 못한 채 죽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
다. 변호사는 교황 피우스 12세에게도 탄원하였지만 전쟁 중에  나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침묵하고 협력했던 탓에  공격을 받는 교황청으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기는 어려웠다.
  1950년 5월, 변호인들은 다시 정부문서보관소, 회고록, 증언 등에 기초하여 고등법원에 재
심을 요청하였다. 그 사이 페탱의 건강은 악화되고  있었다. 섬 안에서 좀 더 여건이  좋은
저택으로 옮기는 게 허용되었고 의료진도 보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탱은 아흔 다섯
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1951년 7월  23일이었다. 육지와의 전화가 차단되고 경찰이  
그 저택 앞에 포진한 채 베르됭의 재향군인조차 참배가 불허되었다. 그 이틀 후 장례식에는
몇몇 장군과 비시정부의 각료 등이  참석하였고 베르됭의 장교와 병사들이  운구하였다. 이
섬과 가장 가까운 루손의 주교 루이  카조는 망자가 논쟁적인 인물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지금은 휴전을 해야 할 자리라고 추도하였다.  그러나 그 휴전이 쉽지 않았음은 그 후의 역
사, 프랑스 국민 내부에 파인 분열의  상처가 보여주었다. 지금도 이 섬을 방문하는  사람은
그의 묘지에서 흰 대리석 한 가운데 십자가와 '필리페 페탱, 프랑스의 원수'라고 쓴 묘비명
을 발견할 수 있다.
  페탱은 사후에도 끝없는 논쟁의 복판에 서 있었다. 그의 사후에 페탱주의의  부활이 시도
되었다. 1951년 11월 '페탱 원수를 추억하는  조직'이 결성되었다. 그와  함께  페탱의 시신
을 베르됭의 순국용사들이 묻힌 두오몽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었다. 1954년에는
연인원 7만  명의 서명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재향군인회의' 이름으로  시신 이전을 요구
하는 진정서가 정부에 제출되었다. 드골은 '국가적  통일의 기념물이 논쟁에 의해 시달림을
받아서는 안되며 군인묘지의 오랜 전통은 명예롭게 죽은 전사들을 위한 것'이라고 단언하면
서 요청을 거부하였다. 페탱주의자들은 그 이후에도 끝없이 묘지 이전을 주장하였고 레지스
탕스들은 그에 반대하였다.  1973년 극우적인 그룹이 페탱의  시신을 파 베르됭으로 옮기던
도중에 경찰에 의해 체포된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집요한 노력은 페탱을 1940년의 치욕으
로부터 1919년의 영광으로 옮기는데 중요했기 때문이다. 페탱의 이름이 들먹여질 때마다 좌
우 양 진영의 폭력이 분출되곤 하였다. 그의 시신과 그의 이름, 그의 일생은 이미  공화파와
극우파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페탱은  이처럼 프랑스 현대사에 영욕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
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