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
해남 |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지휘하여 일본군을 물리친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669년 표충사라는 사액 사당이 사찰 대흥사 경내에 건립되었다.
서산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 행재소에서 선조 임금의 명을 받아 승병을 총괄하는 팔도 도총섭이 되어 73세의 노령으로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군을 모집하여 활동했다.
표충사 경내에는 표충비각, 조사전, 강례재(요사채), 보련각, 의중당(재실), 명의재, 청허당(서산대사 유물관), 초의관(초의선사 유물관), 성보박물관 등의 건물이 있다. 표충사는 1976년 9월 30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었다.
표충사
사찰 대흥사 경내에 있는 표충사는 유교식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일본군 격퇴에 앞장섰던 서산대사 휴정을 받드는 사액 사당으로 1669년(헌종 10) 대사의 제자 천묵이 사찰 대흥사 경내에 세웠다.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대사와 처영대사의 진영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각주1)
표충사를 둘러싼 돌담 안쪽 중앙에 북향으로 사당이 있고 그 좌측과 우측에는 조사전(祖師殿)과 표충비각(表忠碑閣)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표충사 외곽에 있는 의중당(義重堂)과 강례재(講禮齋) 주위에 담을 두르고 솟을삼문인 예재문과 호국문을 세웠다.
정조 임금은 1778년에 서산대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표충사(表忠祠)’라는 표충사 현판을 써서 내려주었으며, 세금을 면제해주는 특혜를 주었다. 나라에서는 매년 예관과 헌관을 보내 관급으로 제향하도록 했다.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표충비각
표충비각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며, 내부에는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와 건사사적비(建祠事蹟碑)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는 높이 364센티미터이며 사각형 받침대에 비 몸과 사각형의 머릿돌을 올렸다. 건립연대는 비 몸 측면에 ‘숭정 기원후 삼신해월립’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이는 1791년(정조 15)에 세운 것임을 알려준다.
건사사적비는 높이 316센티미터로 사각형 받침대에 비 몸과 머릿돌을 갖추었다. 건립연대는 ‘성상 십육년 임자 오월 일, 서산육세법손 연담유일 근찬, 응운등오 근서(聖上十六年壬子五月日, 西山六世法孫蓮潭有一謹撰, 應雲登旿謹書)’라는 내용으로 보아 1792년(정조 16)이며, 찬자는 연담 유일, 글씨는 응운 등오가 썼다.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
서산대사의 이름은 휴정 속성은 최씨 호를 청허자(淸虛子)라 하며 묘향산에 있었으므로 또 서산대사라 하였다. 1520년에 출생하여 어려서 양친을 여의었다. 이때 불교의 경전을 읽고 삶과 죽음에 대한 학설에 감동되어 머리를 깎고 불문에 들어가서 1540년에 일선화상(一禪和尙)에게서 계(戒)를 받았고 뒤에 영관대사의 문하에 들어갔다. 30세에 선과(禪科)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에 양종판사(兩宗判事)까지의 승직을 받았으나 곧 이를 사임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정여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어떤 자가 대사가 이들과 관련이 있다고 무고하였으나 선조(宣祖)는 그의 억울함을 알고 풀어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시고를 보고 크게 감탄하여 임금이 대를 그리고 거기에 시까지 써주는 영광을 얻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에 피란했다함을 듣고 대사는 칼을 집고 왕을 가서 뵈옵고 승려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자청하여 왕은 곧 대사를 팔도 십육종 도총섭에 임명하였다. 대사는 곧 제자인 유정, 처영과 승병을 모집하여 5천여 명을 얻고 순안 법흥사에서 첫 모임을 갖고 중국군대를 도와 싸워서 모란봉에서 승리를 거두고 평양과 개성을 수복하고 용사 7백여 명을 뽑아서 왕을 호위하여 서울에 환도하였다.
이때에 대사는 왕에게 이제는 늙어서 더 이상 힘을 낼 수 없사오니 이 군사사무를 유정과 처영에게 넘겨주고 자기는 묘향산으로 돌아가게 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통계존자의 칭호를 내렸다.
대사는 한국의 불교를 중흥시킨 고승으로 제자가 천여 명이며 그 가운데는 불교의 영수급에 해당되는 인물이 4~5명에 달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선가귀감’ 외에 몇 가지 단행본과 ‘청허집’이 있다. 그가 죽기에 앞서 유언으로 그의 유물을 해남 대둔사에 보관하라 하며 “이곳은 남에 달마산, 북에 월출산, 서에 선운산이 있어 자기가 마음으로 즐기던 곳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대사가 세상을 떠난 후 185년인 1788년에 그의 7세손 천점(天點) 등이 대둔사 남쪽에 사당을 짓고 대사의 화상을 모시기 위하여 임금에게 진정을 올렸고 호조판서 서유린이 왕에게 적극적으로 진언하여 나라에서 사당의 칭호를 내려주기를 청하였다. 정조는 대사가 임진란에 세운 공적을 생각하여 특별히 표충(表忠)이라는 명칭을 내리고 대사의 직계를 더 높이 추증하고 이듬해 4월에는 예조의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이에 앞서 경상도 밀양에 유정(惟政)을 모신 사당으로 표충사가 있었는데 이제 대사의 사당도 같은 이름을 붙인 것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나라에 충성을 바친 것을 나타내는 영예로운 특전이었다.
서유린이 지어 1791년에 세운 비는 한문으로 되어 있으므로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분부를 받들어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글로 요약 편술한 이 비를 따로 세워 후세에 전한다.
1979년 12월, 임창순 짓고 김병남 쓰고 전라남도 세움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서산대사
서산대사 휴정은 완산 최씨 최세창의 아들로 평안도 안주에서 출생했다. 9세 때 모친상을 당하고 이듬해 아버지마저 별세하자 안주목사 이사증의 양자로 들어갔다. 양부모를 따라 서울로 거처를 옮겼으며, 그 후 사찰에 기거하며 글과 무예를 익혔다. 그러던 중 영관대사의 설법을 듣고 불법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훗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1549년(명종 4)에 승과에 급제하고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전국의 유명한 산을 돌아다니며 후학들을 지도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 역모사건 때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으나 선조 임금이 직접 신문한 결과 무죄가 입증되어 석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먼저 임금을 찾아가 승병을 일으킬 것을 고하니 선조 임금은 대사를 팔도 도총섭(八道都總攝)에 임명하고 승병을 지휘하도록 했다. 대사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승려들에게 격문을 돌려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서도록 당부했다. 그는 순안 법흥사에서 1,500여 명,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는 금강산에서 700여 명, 처영은 지리산에서 1,200여 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순안과 평양 등지에서 일본군 토벌에 공을 세웠다.
서산대사가 이끄는 승병군은 1593년 명나라군과 함께 평양과 개성 수복에 공을 세웠다.
전란 이후 그는 승려로서는 최고의 존칭과 정2품 당상관 벼슬을 받았으며 묘향산에서 수도하던 중 1604년에 입적했다.
사명대사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은 임수성의 아들로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서산대사와 함께 투옥되었으나 무죄로 밝혀져 석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 휴정의 휘하로 들어가 승병 모집과 훈련에 힘썼다. 이듬해 승군 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나라군과 협력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경상남도 의령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공을 세우고 당상관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 명나라군 장수 유정(劉綎)과 의논하여 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의 진중을 3차례 방문하여 강화를 위한 회담을 하기도 했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와 함께 울산왜성과 순천왜성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1604년 선조 임금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그 이듬해 전란 때 잡혀간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성보박물관 청허당
서산대사의 공적을 기리고 관련 유품 · 유물을 보존 전시하기 위해 1978년 대흥사 경내에 서산대사 유물전시관이 설립되었다. 이곳에는 선조 임금이 서산대사를 승군 대장 도총섭으로 임명한 교지와 서산대사가 사용하던 금란가사 · 발우(밥그릇) · 칠보염주 · 수저 · 신발 등을 비롯하여 승병을 이끌며 사용했던 승군단 표지, 소리나팔, 호패 등이 전시되고 있다. 정조 임금이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려 내린 교지와 친서, 금병풍 등도 볼 수 있다.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왜란 종료 5년 후인 1602년 서산대사의 제자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도총섭 고신(告身)을 다시 발급해줄 것을 비변사에 청했고, 비변사에서는 이 일을 임금에게 보고하여 윤허를 받아 재발급했다. 아래의 교지는 임진왜란 초기에 발급되었다가 화재로 소실된 서산대사 도총섭 교지를 만력 30년, 즉 1602년(선조 35) 10월 10일에 재발급한다는 내용이다.
교지(敎旨)
휴정 위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부종수교 보제등계자
休靜 爲 國一都大禪師 禪敎都總攝扶宗樹敎 普濟登階者
만력 삼십년 시월 초십일(萬曆三十年十月初十日) 안시명지보(安施命之寶)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대흥사 홈페이지.
글
일본 야마구치대학 경제학부 졸업,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 대학원 졸업(정치학 석사), 미국 하와이대 대학원 졸업(정치학 박사). 저서로 <한국정당통합운동사>, <한국국회론>..펼쳐보기
일본 야마구치대학 경제학부 졸업,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 대학원 졸업(정치학 석사), 미국 하와이대 대학원 졸업(정치학 박사). 저서로 <한국정당통합운동사>, <한국국회론>, <일본현대정치사>, <일본국회론>, <은행나무 - 문화, 역사, 그리고 사람의 만남>, <소나무 - 변치 않는 푸르름> 등이 있다. 일본 야마구치대학 경제학부 졸업,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 대학원 졸업(정치학 석사), 미국 하와이대 대학원 졸업(정치학 박사). 저서로 <한국정당통합운동사>, <한국국회론>..출처
한국에는 임진왜란의 역사를 담은 유적과 유물이 지역 곳곳에 분포해있다. 전란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전국에 있는 임진왜란 현장과 남겨진 흔적들을 지역별로 정리하여 기..펼쳐보기
한국에는 임진왜란의 역사를 담은 유적과 유물이 지역 곳곳에 분포해있다. 전란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전국에 있는 임진왜란 현장과 남겨진 흔적들을 지역별로 정리하여 기록했다. 한국에는 임진왜란의 역사를 담은 유적과 유물이 지역 곳곳에 분포해있다. 전란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전국에 있는 임진왜란 현장과 남겨진 흔적들을 지역별로 정리하여 기..'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 (0) | 2022.11.11 |
---|---|
기록정보서비스 (2) | 2022.08.25 |
정여립 역모사건 (0) | 2022.08.23 |
對北政策:自由社會-부록 각국의 헌법 (0) | 2022.08.18 |
ROK Rep of Korea. 2 (0) | 2022.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