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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국사

by 이덕휴-dhleepaul 2022. 11. 11.

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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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또는 한국사(韓國史, 영어: History of Korea)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동아시아 한반도, 만주, 연해주 지역을 바탕으로 전개된 한국의 역사이다.[1] 이 문서는 광복 이전의 한국에 대한 역사를 주로 기술한다.

한국사의 시대 구분은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구분되는 선사시대 고조선의 성립 이후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후삼국 시대까지의 고대, 고려 시대 중세, 조선 시대 근세, 대한제국 수립 이후 오늘날까지의 근·현대 등으로 구분된다.[2]

한국의 역사는 고찰하고자 하는 영역에 따라 한국의 경제사[3], 한국의 생활사[4], 한국의 정치사[5]와 같이 분야별 역사로 나뉘어 다루어지기도 한다.

개관[편집]

근세[편집]

이성계 위화도 회군 이후,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1392년 조선을 건국하였다. 세종이 왕위에 있던 시기, 한글이 창제되고 측우기, 앙부일구와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도 이루어졌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지만, 수군을 이끈 이순신 장군의 노력과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을 비롯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난 덕분에 결국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1620년대와 1630년대에 걸쳐 조선은 청나라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붕당 정치가 변질되고 그 폐단이 심화되면서, 노론과 남인 위주의 일당전제화 경향이 두드러졌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서민은 점차 경제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생산력도 증가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영조, 정조 시대에 다시 중흥하였다. 이때 실학이 융성하였고, 천주교가 일부 남인에 의해 학문의 일부로서 전래되었다. 그리고 양명학이 전래되었으며 천문학과 의학, 농업과 상업 분야에서의 기술적 성과가 산업 발전을 촉진하였다. 한편으로는 양반층이 증가하고 농민의 분화가 이루어지는 등 반상제의 신분제가 동요하였다. 세도 정치 시기에는 삼정의 문란으로 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홍경래의 난, 임술 농민 봉기 등은 조선의 신분제 사회가 갖고 있던 문제점과 지방 관리의 학정이 결합하여 일어난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판소리, 탈춤, 한글 소설, 서민 음악이 유행하였고, 생활 도예가 공예의 중심이 되었다.

근현대[편집]

19세기에 들어 조선에는 같은 외세의 접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위기 속에 흥선대원군은 철저한 봉쇄 정책으로 일시적으로 접근을 막았으나, 이후 주위의 열강들과 무력 분쟁을 겪는 등 제국주의와 맞서게 되었다. 1870년대 초반에 일본은 조선에 무력으로 압력을 행사하면서 이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청나라와 충돌하였고, 한국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하였다.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조선과 요동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삼국간섭에 의해 잠시 물러섰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에게 암살되었다.[6] 1897년 10월 12일, 조선은 대한제국 (1897-1910)으로 국호를 새롭게 정하였고,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의 부당한 요구와 간섭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한국의 곳곳에서는 의병들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증가시킬 수 있었다.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1910년에는 요적인 합방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두 조약 모두 강압에 의한 것이며 법적으로는 무효라고 볼 수 있다.[7] 한국인은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제국의 점령에 저항하고자 노력하였다. 1919년에는 곳곳에서 비폭력적인 3.1 운동이 일어났고, 뒤이어 이러한 독립운동을 총괄하고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어 만주와 중국과 시베리아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20년대에는 서로군정서와 같은 독립군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쟁을 벌였고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와 같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부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되는 시기까지를 군정기 또는 해방정국이라 한다. 해방정국에서 남과 북은 극심한 좌우 갈등을 겪었다. 북에서는 조만식과 같은 우익 인사에 대한 탄압이 있었고, 남에서는 여운형과 같은 중도 좌파 정치인이 암살되었다. 국제사회에서는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해 소련 미국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신탁통치를 계획했지만, 한국에서의 극심한 반대와 함께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폐기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가 별도로 수립되면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는 기준이 되었다. 분단 이후 양측 간의 긴장이 이어졌고 수시로 국지적인 교전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이 일제히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침략하여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선사 시대[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의 선사 시대입니다.

한국의 선사시대 구석기 시대 후기로부터 시작되며, 약 70만 년 전에서 청동기 시대까지의 시기에 해당된다.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한반도에서 발굴된 유물 및 유적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발굴 성과와 연계하여 연구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의 구석기 시대입니다.

기원전 70만년 전부터 기원전 6000년 경까지 시기에 해당된다. 약 70만 년 전부터 한반도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충청북도 단양군의 금굴, 평안남도 상원의 검은모루 동굴, 덕천군의 승리산 동굴 최하층 유적, 충청남도 공주시 석장리 등에는 기원전 70만년 경의 뗀석기와 동물 뼈조각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초기의 인골은 약 10만년 전의 평양시 역포구역에서 발견된 역포인과 덕천군 승리산의 중층에서 발견된 덕천인과 단양 상시바위그늘에서 발견된 기원전 3만 9천년 경의 남성 아래턱뼈 상시인 등이 그들로, 이들은 호모 하이델베르켄시스에 해당되는 것으로 비정된다. 기원전 4만 년 경에 현생 인류가 출현하면서 기원전 3만년 경에 한반도에 도래, 주변 환경에 적응하면서 작은 씨족 사회가 서서히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하여 구석기 시대의 인류가 자생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에 대한 실증적 자료는 없다. 1962년 함경북도 웅기 굴포리를 시작으로 공주시 석장리, 제천군 점말동굴, 덕천 승리산 동굴 등에서 구석기 시대의 인골 발굴이 늘어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체질적인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유골이 발견되지는 않고 있다.[8]

  • 연천 전곡리 유적: 전곡리 유적은 1979년부터 1992년까지 10여 차례의 발굴 결과 전기 구석기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된 중요한 유적이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전곡리에 있는 해발 61m의 낮은 구릉지대에서 다섯 군데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발굴된 유적으로는 주먹도끼, 박편도끼, 뾰족찍개 등이 있다. 전곡리 석기는 대부분 석영이나 규암으로 된 자갈을 이용한 것으로 큰 자갈의 박편을 떼어낸 뗀석기나 작은 자갈을 다듬은 원핵석기가 많다.[9]

대표 유적[편집]

중석기 시대[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의 중석기 시대입니다.

한국의 중석기 시대(또는 고신석기 시대)는 약 1만 년 전 부근의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진행하는 과도기에 해당되며, 학자에 따라서는 중석기를 인정하지 않기도 하는 등, 동아시아 중석기 시대의 구분과 함께 다양한 이론(異論)이 존재한다.[10][11][12] 양양 오산리 유적, 홍천 하화계리 유적, 김해 패총 하층, 제주 빌레못 굴 등에서 발견된 유적들이 중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이들은 구석기인이 중석기시대까지 한반도에 정착한 유형 혹은 초기 신석기인의 유적으로 본다.

신석기 시대[편집]

 
덧무늬토기, 부산 동삼동 출토
 
빗살무늬토기, 서울 암사동 출토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의 신석기 시대입니다.

신석기 시대는 구석기 시대와 달리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가 쓰인 시대이다. 한국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약 1만 년 전에서 4천 년 전의 시기에 해당된다.[13]

한국의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간석기를 비롯하여 빗살무늬토기 덧무늬토기가 있다. 덧무늬토기는 한반도 남부의 일부 지방에서 발견되며,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었다. 이때문에 한국의 신석기 문화를 빗살무늬토기 문화라고도 한다. 간석기는 신석기 초기부터 쓰였으나 농기구 무기에 간석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중기 이후이다.[14] 특히 울산 대곡리반구대암각화 (국보 제 285호)는 신석기시대에 조성된 바위그림으로 선사인의 생활상이 잘 나타나 있다.

대표 유적[편집]

상고 시대[편집]

 
화순 대곡리에서 출토된 청동기 유물 일괄

상고 시대 청동기 시대에서 초기 국가성립까지를 가리키는 시대구분이다. 한국의 상고 시대는 기원전 약 2000년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된다.

상고 시대의 중요한 사건은 국가의 형성이다. 그러나, 한국사 학회에서는 최초의 국가가 어떻게 세워졌는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한국의 고대국가 형성에 대해서는 부족집단에서 출발하여 국가를 이루었다는 부족국가설, 추장과 같은 지도자의 권력이 커지면서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군장국가설, 마을 단위로 모여살던 사회가 국가의 기원이 되었다는 성읍국가설 등이 있다. 1940년대 이후 주장되어온 부족국가설은 1960년대 이후 많은 비판을 받아 오늘날에는 학계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반면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제안된 군장국가설과 성읍국가설은 서로 고고학적 연구결과와 고대사회 경제, 정치 관계에 대한 연구 성과를 근거로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15] 1990년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가 출판한 《한국사》[16]에서는 성읍국가설을 채택하고 있고, 서울대학교 출판부의 《한국사특강》은 고조선의 출현을 군장국가설에 의거하여 설명하고 있다.[17]

청동기 시대[편집]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약 2000~30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부와 권력을 가진 족장(군장)이 출현하였고, 성읍국가로 발전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고인돌,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이 있다. 부족장은 세력을 키워 주변 지역을 아우르고, 마침내 국가를 이룩하였다.

홍산문명[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홍산문명입니다.

고조선[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고조선입니다.
 
백두산 한민족의 영산으로 자주 언급되며, 고조선의 건국과도 연관되어 설명된다.[출처 필요]

고조선은 청동기 시대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국가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왕검이 요임금 즉위후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여 나라이름을 조선이라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이를 근거로 연도를 계산하면 기원전 2333년 (약 4400년 전) 그러나 이 기록은 단군 신화와 함께 서술된 것으로 그 정확성을 믿기는 힘들다.[18]

한편 단군은 고조선을 다스리던 군장의 칭호로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많은 단군들이 있었다고 하나 그 이름이나 재위 연도를 알 수는 없다. 일각에서는 환단고기를 근거로 단군의 이름과 재위기간을 거론하는 경우도 있으나, 환단고기는 많은 면에서 신뢰성을 갖추지 못한 자료로 비판되고 있으며 역사 학자들은 환단고기를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다.[19]

고조선은 단군조선 시기와 위만조선 시기로 나뉜다. 근대 이전의 옛 역사서에는 기자조선이 등장하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로 평가된다. 고조선이 중국측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7세기에 쓰인 제나라의 《관자》(管子)로 제나라와 고조선 사이에 교역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공자는 동방예의지국인 구이로 망명하고 싶다고 하였는데 구이는 중국에서 고조선을 달리 부르던 이름이다.[20]

  • 강역 문제

고조선의 도읍이었던 평양성이 요동이나 요서에 있는 평양인지 아니면 지금의 평양시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이는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조선의 특징적인 유물인 세형동검이 만주지역에서도 출토되고 문헌에 고조선이 연나라와 싸워 패했다는 기록이 있어 기원전 3세기를 전후로 하여 남쪽으로 천도한 것으로 보인다.[21]

  • 문화와 사회 제도

고조선 후기인 위만조선 시대에 대한 기록에는 박사, 경, 대부, 상, 대신, 장군 등의 관직명이 남아있어 중앙정치조직이 있었음을 알게해 준다. 그러나 지방 세력은 독자적인 정치 권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조선상 역계경이 한나라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왕과 의견 충돌이 일어나자 휘하 2천호를 거느리고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해 버리는 일이 있었다. 고조선은 노비와 귀족, 왕이 있는 신분제 사회였고 8조법과 같은 법률이 있었다.[22]

철기 시대[편집]

 철기의 한국 전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국의 철기시대는 기원전 300년경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되며,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23]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철기 문화는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무렵 중국의 철기 문화가 들어오면서 형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주철 기술의 도입으로 만들어진 철제 농기구는 농업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켰다. 당시 주요 유물로는 철제 농기구, 철제 무기와 함께 막대 모양의 쇳덩이인 덩이쇠가 있는데 이 덩이쇠가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지배 계급이 철의 주조능력을 중요하게 취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철기 문화는 무쇠와 강철이 거의 동 시대에 발전되었다는 특징이 있다.[24]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중국 한나라와 대립할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성립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위만조선[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위만조선입니다.
 위만  한사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위만조선 연나라 사람 위만 고조선에 망명하여 준왕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된 나라이다. 위만조선은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고,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한나라와의 중개무역을 독점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25]

 
낙랑시대 금으로 만든 허리띠 장식(국보 제89호 금제교구)

위만의 손자 우거왕은 중국의 망명자를 많이 받아들이고,  진국등 주변 소국들이 한나라와 직접 교섭하는 것을 막았다. 한나라의 무제 기원전 109년 섭하를 보내 우거의 무역독점 중지를 요구하였으나 우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한과 고조선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위만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였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 무제는 옛 조선의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한사군은 고구려 미천왕 낙랑군 대방군을 병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26]

원삼국 시대[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원삼국 시대  중화 제국주의 통치 및 열국 시대입니다.

철기 문화의 보급으로 증가된 생산력과 강력한 무기를 바탕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는 여러 소국들이 건설되었다. 많은 소국들이 경쟁하는 가운데 일부는 다른 나라를 병합하였고, 다시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여 중앙 집권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고조선 이후 세워진 부여는 철기를 바탕으로한 연맹 왕국이었다. 이후 동예, 옥저, 고구려, 마한, 진한, 변한, 탐라, 우산국과 같은 연맹체 왕국들이 출현하였다. 이후 이러한 연맹 왕국에서 출발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주변의 왕국들을 병합하여 성장하게 된 삼국시대까지 여러 소국과 대국이 혼재하여 있던 이 시기를 원삼국시대 또는 열국시대라고 한다.[27]

기원전 3세기경부터 예맥(濊貊)계의 부여족(夫餘族)이 세웠던 부족 국가인 부여(夫餘, 扶餘)는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를 지배한 나라이다. 동은 읍루(挹婁), 남은 고구려 및 현도군, 서는 선비(鮮卑), 오환(烏桓)과 인접하였었다. 부여는 북부여, 동부여로 구분된다.

  • 부여

부여는 별도의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는데, 북부여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다섯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와 흘승골성에 도읍하였다는 건국신화가 있고 동부여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아들 금와왕이 세웠다고 한다. 부여는 전국을 사출도(四出道)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와 같은 제가(諸加)가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그 인구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계급인 하호(下戶)는 모두 노예에 속하였다고 한다. 또한 부여에는 영고(迎鼓)라는 제천행사가 있었고, 풍속이 매우 엄격하여 도둑질, 간음 등에 대해 특히 엄벌하였다. 북부여와 동부여는 모두 고구려에 흡수되었다.[27] 538년 백제 성왕 부여를 계승하여 국호를 남부여(南扶余)로 고치고 명맥을 이었다. 백제의 국성은 부여(扶餘)씨가 되어서 2015년 기준 대한민국 의령 여씨(宜寧 余氏)가 계승하였으며 충청남도 부여군의 명칭에도 영향을 주었다.

  • 고구려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이후 주몽이라 불리는 군장을 중심으로 한 부여계 지배층이 이주해 와 고구려의 계루부를 형성하였고 기존의 토착세력인 소노부를 대체하여 고구려 연맹왕국의 주도권을 잡은 것으로 해석된다. 고구려는 땅이 협소하고 산악지역이 많아 주변에 대한 전쟁을 자주하였다. 주변의 여러 소국을 복속시키며 확장하던 고구려는 부여를 흡수하여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었다.[27]

  • 옥저와 동예

동해안에 면한 지역에는 옥저 동예라 불리는 소국이 있었고, 이들은 예맥족의 한 지족(支族)으로 고구려와 언어·풍속이 비슷하였다. 옥저는 지금의 함경도 일대에 위치했던 나라이며, 예맥족의 부족사회였다. 또한 중앙의 왕이 없고 각 지방의 맹주인 현후(縣侯)가 군림하였다. 현후 밑에 삼로(三老)가 하호를 지배하였다. 자원이 풍부하였으며 2만호에 이르는 비교적 큰 나라였으나 왕국을 성립하지는 않았다. 이후 이웃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동예(東濊)는 한반도 동해안에 거주하던 부족사회로 농사를 주업으로 하였고, 직조기술도 발달하였다. 산과 하천을 경계로 읍락이 구분되어 각 읍락을 삼로가 통치했다. 옥저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흡수되었다.[27]

  • 삼한
 
강화도 부근리의 고인돌

기원전 8세기무렵에 이미 한반도 여러 곳에 비파형 동검을 사용하는 지배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세형동검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수 많은 성읍국가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강화도 부근리의 고인돌과 같은 수 많은 고인돌을 남겼다. 기원전 3세기의 기록인 《삼국지》위서 동이전에는 삼한에 속한 나라들이 무려 70~80여 국에 이르며 큰 나라는 1만호, 작은 나라는 6~7백호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크고 작은 소국들은 점차 연맹왕국을 이루어 마한, 변한, 진한 삼한이 되었다.[27]

    • 마한: 삼한 중 가장 먼저 세력이 커진 것은 마한이었다. 한강 유역과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한 연맹 왕국이었던 마한 내의 목지국은 마한을 비롯한 삼한을 지배하여 진국의 왕으로 불렸다. 일찍이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던 목지국은 기원후 3세기 전반에 이르러 소멸된 것 같다. 이리하여 고구려로부터 망명해 온 백제가 그 지배권을 대신하였다. 전설상 온조가 영도한 백제는 마한 세력을 결합하여 백제왕국 기초를 다졌다.
    • 변한과 진한: 진한의 여러 부족 중에는 박혁거세를 중심으로 한 사로국(斯盧國)이 경주평야의 6촌의 씨족 세력을 기반으로 신라로 발전해 갔다. 한편 변한에서는 구야국(狗邪國)이 가야로 발전하였다.
    • 삼한의 생활: 삼한 마한, 진한, 변한으로 구성되었으며, 세 나라 모두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였다. 농경과 철기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별읍인 소도와 이를 주관한 것으로 추측되는 천군(天君)이 있었으며, 파종 이후인 5월과 추수기인 10월에 각각 기풍제와 추수감사제를 지냈다.

고대시대[편집]

한국의 고대는 대략 기원전 1세기부터 900년까지의 시기로, 원삼국시대의 크고 작은 국가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으로 합쳐진 삼국시대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시기 까지다

삼국시대[편집]

 
476년 한반도 삼국시대 지도
 이 부분의 본문은 삼국 시대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연맹은 각자 고유의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 시작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주변의 소국을 흡수하여 강대해졌다. 이들 나라는 이렇듯 고조선 사회의 외곽에서 시간적 선후를 지니며 각자 독자적으로 성립했고, 4세기 중반 이후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기 전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서로 별다른 교섭 없이 발전해 나갔다.[28]

일부 사학자들은 실질적으로 삼국이 정립되어 삼국 시대가 전개된 것은 가야가 멸망한 562년 이후이므로 사국 시대[29] 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 삼국시대의 정치

삼국 시대 초기 국가들의 정치는 국왕과 지방세력인 각 부의 연맹 왕국 형태였다. 고구려에는 5부가 있었으며, 백제역시 고구려-부여계의 이주집단이 부를 형성하였고, 신라에는 6부가 있었다. 이들 부는 독자적인 무력 행위나 외교를 할 수는 없었으나 자신의 영지 내에서는 독자적인 자치를 누렸다. 고구려에서는 3세기 전반까지도 소노부가 자체의 종묘와 사직, 즉 조상신과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 상당한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시간의 지남에 따라 왕권이 점차 강해져 관등제가 확충되고 기존의 집단별 상하관계를 왕을 중심으로한 일원적인 군신의 관계로 변화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왕권 확립의 결과 각 나라에서는 율령이 반포되고 호구를 조사하여 세입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귀족의 권위는 여전히 막강하였으며 실제 국정의 운영은 이들 귀족들과 왕의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대대로, 백제의 정사암 고사, 신라의 화백제도 등은 삼국시대 후기까지도 귀족의 권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28]

  • 삼국시대의 언어

삼국사기에는 3국 사이에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 별다른 통역이 필요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중국측의 기록에서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와 동예 옥저의 말을 비슷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양서》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복장과 예절, 언어가 비슷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어휘와 이두 표기에서도 이들의 언어는 공통점이 많으며 중세 국어와도 통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 각 나라의 언어는 의사소통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같았다고 볼 수 있다.[30]

고구려[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고구려입니다.
 
무용총 수렵도.

고구려(高句麗)는 기원전 37년에서 서기 668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지배한 고대 국가이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유역에 건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한족(漢族)과의 투쟁 과정을 통해 강대해졌다. 1세기 태조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태조왕은 동예와 옥저를 복속시켜 영토를 넓혔다. 고국천왕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미천왕은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 대방군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백제 전연의 공격으로 일시적인 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나, 소수림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태학(太學)을 설립하고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였으며, 율령을 제정함으로써 중앙집권국가를 완성시키고 다시 나라를 정비하였다.

5세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광개토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남쪽 영토를 임진강과 한강까지 확장시켰고, 신라 내물왕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또한 북으로 후연을 쳐서 요동을 완전히 차지하고, 아울러 요서 지방의 일부까지 진출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숙신 동부여를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와 통교하였고,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여 중앙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였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남쪽의 아산만(牙山灣)까지 지배하였다.

6세기 중반에 들어서 내우 외환에 시달리던 고구려는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신라의 진흥왕 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깨고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였으며, 지금의 함경도 지역 일부에까지 진출해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589년 중국에 새로 들어선 수나라는 고구려를 4차례에 걸쳐 침공하였다.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는 612년 을지문덕이 이끈 살수 대첩과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곧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 태종 연개소문의 대당강경책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에게 대패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공격을 받으며 국력이 쇠퇴해갔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이 분열되어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고 민심이 혼란해져 있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혼란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는 신라로 들어갔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요동 반도 한반도 해서 지방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운동이 전개가 되었다.

해서 지방을 근거지로 670년년부터 검모잠은 군사를 일으키고 왕족인 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하였으며, 신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된다. 그러나 내분으로 인해 검모잠과 안승이 싸우게 되고, 670년 8월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면서 검모잠의 부흥운동은 끝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671년, 당나라 장수 고간이 요동지역에 남아 있던 검모잠의 잔당을 토벌하면서 전멸하였다.

고안승이 이끄는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은 호남 지방으로 이동하여 신라의 힘을 빌려 금마저(金馬渚 : 전라북도 익산)에 보덕국(報德國)을 세웠다. 신라 괴뢰국으로 활동하며 나당 전쟁에 참여하고 일본과 견고려사(遣高麗使)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주고받았다.[31] 호남 지방 보덕국은 초대왕인 보덕왕 신라에 친화적이었으나 보덕왕이 신라에 귀순하자 보덕왕의 친족조카 대문의 난으로 멸망하였다.[32] 보덕국의 고구려유민들은 신라의 9주5소경중 하나인 남원경(南原京 : 전라북도 남원)으로 이주되어 거문고 등의 고구려 문화가 한반도 남쪽에 정착되는데 관여했다.[33][34]

요동 반도에서는 보장왕의 손자 보원왕(寶元王)고보원이 측천무후의 힘을 빌려 당나라 괴뢰국 소고구려(小高句麗)등을 건국하였다. 소고구려 당나라 괴뢰국으로 있다가 발해에 편입되었다. 그후 고구려의 공백은 발해가 계승하였다가 망하자 왕자 대광현이 유민을 이끌고 왕건에게 귀순하며 고려로 이어졌으며 고려의 국호가 변형되어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문 코리아(Korea)가 되었다.

백제[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백제입니다.
 
백제의 왕관 장식

백제(百濟)는 기원전 18년 온조에 의해 하남 위례성에 건국되었다. 삼국지[35]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백제는 3세기 경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북쪽으로의 진출은 고구려와 중국 군현 사이의 영토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4세기 근초고왕 때는 황해도 일부지역에 진출하고 전라도 지역의 마한 잔존 세력을 병합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의 연이은 압박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는 수난을 맞았다.

침체에 빠진 백제는 무령왕때부터 중흥을 시작하여 성왕의 치세에 이르러 부여를 계승해 국호를 남부여(南扶余)라하고 수도를 웅진(熊津 :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사비성(泗沘城 : 충청남도 부여군)으로 천도하는등 중흥 노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모두 허사가 되고 결국 본인도 관산성에서 전사했다.

그 후 백제의 무왕 의자왕은 부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의자왕의 잦은 실정으로 국력이 소모되었다. 결국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왜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라[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신라입니다.

신라(新羅)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 경에 건국되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초기에는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 이사금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7세기경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또한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삼국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가야 연맹[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가야 연맹입니다.

가야(伽倻 혹은 加耶, 伽耶)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던 부족국가의 연맹체이다. 2~3세기경에 김해 등지에 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의 5개국이 합쳐져 전기 가야 연맹이 성립되었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금관가야가 큰 피해를 입자 5~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져가 532년 수도인 금관가야 등이 신라에 정벌, 투항하였고, 결국 대가야가 562년 최종적으로 항복함으로써 가야는 멸망한다. 일설에 의하면 가야의 패망 원인으로는 삼국과 달리 제대로 된 국가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부족국가의 연맹으로 전락한 것이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야는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다.

탐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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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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