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18세기를 흔히 계몽주의 시대(The Age of Enlightenment)라고들 한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계몽을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보다 엄밀히 말해서 18세기의 계몽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구 체제와 기존의 신화적 사고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고 했던 운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지성인들은 진보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합리적 이성으로 회의하고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회복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이러한 조류(潮流)에 앞장섰던 인물로, 그의 수많은 저술과 변호활동은 훗날 1789년 프랑스혁명과 함께 앙시앙 레짐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볼테르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중 하나가 1762년에 있었던 장 칼라스 사건이다.
툴르즈에서 거열형으로 처형당하는 칼라스 ⓒ 위키백과
프랑스의 작은 시골마을 툴르즈에 거주하던 칼라스는 도시 내에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던 부유하면서도 덕망 있는 귀족이었다. 칼라스와 그의 가족들은 프랑스의 주류였던 가톨릭이 아닌 프로테스탄트였지만, 칼라스는 아들 중 한명에게 가톨릭 개종을 허용할 정도로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칼라스의 종교적 관용과 별개로 18세기 프랑스는 오늘날처럼 종교의 자유가 보편적이지는 않은 시대였다. 그에 따라 칼라스의 아들 마르크 앙투안은 변호사가 되고자 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프로테스탄트라는 이유로 변변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좌절한 마르크 앙투안은 어느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자택 아래층에 있는 문틀에 목을 매고 목숨을 끊고 만다.
마르크 앙투안의 자살이 전해지자 아버지인 장 칼라스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자책하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칼라스는 슬픔도 잠시, 곧 한가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당시에는 자살을 인간이 절대 해서는 안될 범죄로 간주하고 자살한 사람은 사지를 찢는 형벌에 처하고 있었는데, 만약 마르크 앙투안의 사인이 밝혀진다면 그의 아들의 시신은 끔찍하게 훼손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두번 죽는 것을 원치않았던 칼라스는 아들의 죽음을 타살로 위장하게 된다. 그러나 칼라스의 이러한 행동은 평소에 프로테스탄트를 혐오하는 일부 가톨릭 광신도들에게 좋은 명분이 되었다. 그에 따라 가톨릭 광신도들은 칼라스가 아들과의 종교적 신념의 불일치로 아들을 살해하는, 무려 직계비속살해의 죄를 범했다고 모함, 고발하기에 이른다.
만약 칼라스가 살던 시대가 21세기였다면 칼라스의 무혐의는 밝혀졌을테지만, 18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범죄자의 유무죄를 밝혀내기 위해 무수한 고문과 비인간적인 행동들을 서슴치 않았다. 사건은 고등법원에 제청되었지만 결국 칼라스에게는 사형이 언도되었다. 종교적 편견으로 가득찬 재판관들은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들을 의도적이고 묵인하였고 칼라스는 일방적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칼라스의 사형언도에는 당대 프랑스 구교도(가톨릭)들의 신교도(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뿌리깊은 불관용과 편견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1
그러나 칼라스의 사형집행은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귀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볼테르는 칼라스의 무죄를 확신하며 칼라스의 부인과 딸들이 칼라스 사건을 파리에 있는 대법원에 상고하도록 설득하였고, 무수한 팸플릿을 작성하여 기존 판결의 부당함과 재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결국 여론의 압력을 못 이긴 대법원은 상고를 허락하였고 볼테르는 칼라스의 편에 서서 그의 무죄를 입증한 끝에 1765년 5월 9일, 마침내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을 선고받기에 이른다. 볼테르의 승소에 대중은 환호하였고 학계에서는 기존의 비인간적인 형벌제도와 종교적 불관용에 대한 논란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본문의 주석에 언급된 것처럼 "칼라스 사건의 재심과 무죄판결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해 온 옛 체제의 낡은 권위에 대한 정의의 승리이자 야만적 형벌제도에 대한 계몽의 승리라고 할 수 있었다."2
볼테르의 『관용론』은 그가 장 칼라스 사건을 바탕으로 18세기 프랑스에 만연해있던 종교적 불관용과 신앙의 자유의 필요성에 대해 저술한 책이다. 볼테르는 본문에서 신앙의 자유는 몇몇 가톨릭교도들의 우려와는 달리 전혀 위험하지 않으며 역사적으로 벌어진 무수한 박해와 학살은 종교적 불관용에서 기인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근거로 유대교와 로마인들, 성서와 중국인들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종교적 관용은 보편적으로 수용되어야 할 가치있는 덕목임을 강조한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존 로크도 『관용에 대한 편지』를 저술하며 영국의 정교유착과 다른 종교에 대한 불관용을 비판한 바 있으니 당시 종교적 불일치와 그로 인한 박해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유럽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볼테르는 종교적 관용과 함께 당대에 만연해있던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처벌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과연 어느정도까지가 적당한가? 라는 의문과 무엇을 죄로 간주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것도 장 칼라스사건을 전후로 해서이다. (그래서 볼테르는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베카리아의『범죄와 처벌』에 방대한 주석을 첨부하며 최고의 찬사를 보낸 바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의 배경이 된 장 칼라스 사건은 한 개인과 가족의 비극이 사회 전체를 변혁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리고 볼테르는 관용론을 저술함으로써 18세기까지 만연한 종교적 불관용과 비인간적인 형벌제도를 이성의 힘으로 회의하고 비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종교간의 대립과 박해를 해소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보탬이 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상은 훌륭하게 실현되어 오늘날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관용(Tolerantia)'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게 되었다. (본문과는 무관한 이야기지만) 한편으로는 한낱 개인의 힘이 사회를 이토록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다.
"신앙의 자유에 대한 이 책은 권력과 신중함 앞에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겸허하게 내놓는 호소입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후일 열매를 맺게 될 씨앗을 하나 뿌렸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시간의 흐름에, 국왕의 호의에, 그의 각료들의 현명함에, 그리고 바야흐로 문명의 빛을 널리 퍼뜨리고 있는 이성의 정신에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는 일입니다."3
- "칼라스 가족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란 있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 증거의 빈자리를 어긋난 신앙심이 대신 메웠다.", 본서 p32
- 본서 16에서 재인용
- 본서 2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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