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전쟁의 이해 (책)/1.전쟁사
트로이 전쟁
책소개
“호메로스가 그린 전설적인 도시 트로이와 관련된 설화, 역사, 고고학의 핵심적인 내용을 유려한 글 솜씨로 간략하게 소개한 책.”-트레버 브라이스(퀸즐랜드 대학교 명예연구고문, 호주 인문학술원 회원)
“탁월한 아이디어. 자투리 시간에 읽기 좋은 작고 깔끔한 판형에 멋진 디자인.”-리사 자딘, [타임스]
“각 저자의 뚜렷한 주관이 살아 숨 쉬는 명쾌한 저작들로, 포켓판 책의 전범이 될 만하다.”-테리 티치아웃, [월스트리트저널]
헬레네의 납치와 10년간 이어진 트로이 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는 천년 넘게 독자들을 매혹시켜 왔지만, 일부 근대 학자들은 그 작품을 상상력의 산물로 치부하기도 했다. 이 책은 트로이 전쟁의 역사성과 트로이 유적지의 고고학적 근거를 검토하고 있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고고학의 최신 성과들을 토대로 『일리아드』의 사실성을 검토하고, 터키의 히살릭에서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트로이의 유적지를 발견한 슐리만, 되르프펠트, 블레겐, 코르프만 등 고고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 클라인은 호메로스가 서사시로 기록하기까지 수백 년 동안 구전되어온 이야기의 단초가 된 ‘전쟁 중의 전쟁’, 트로이 전쟁이 청동기 후기에 실제로 일어났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탁월한 아이디어. 자투리 시간에 읽기 좋은 작고 깔끔한 판형에 멋진 디자인.”-리사 자딘, [타임스]
“각 저자의 뚜렷한 주관이 살아 숨 쉬는 명쾌한 저작들로, 포켓판 책의 전범이 될 만하다.”-테리 티치아웃, [월스트리트저널]
헬레네의 납치와 10년간 이어진 트로이 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는 천년 넘게 독자들을 매혹시켜 왔지만, 일부 근대 학자들은 그 작품을 상상력의 산물로 치부하기도 했다. 이 책은 트로이 전쟁의 역사성과 트로이 유적지의 고고학적 근거를 검토하고 있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고고학의 최신 성과들을 토대로 『일리아드』의 사실성을 검토하고, 터키의 히살릭에서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트로이의 유적지를 발견한 슐리만, 되르프펠트, 블레겐, 코르프만 등 고고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 클라인은 호메로스가 서사시로 기록하기까지 수백 년 동안 구전되어온 이야기의 단초가 된 ‘전쟁 중의 전쟁’, 트로이 전쟁이 청동기 후기에 실제로 일어났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목차
옮긴이의 말
감사의 말
프롤로그
제1부 트로이 전쟁
제1장 『일리아드』, 『오디세이아』, 『서사시집』에 나오는 이야기
제2장 역사적 맥락에서 보는 트로이 전쟁: 미케네인, 히타이트인, 트로이인, 바다의 사람들
제2부 문학적 증거 연구
제3장 호메로스에 얽힌 의문들: 호메로스의 실존 여부와 『일리아드』의 신빙성
제4장 히타이트의 문서들: 앗수와, 아히야와, 윌루사의 알락산두
제3부 고고학적 증거 연구
제5장 초기 발굴자들: 하인리히 슐리만과 빌헬름 되르프펠트
제6장 다시 히살릭으로: 칼 블레겐과 만프레드 코르프만
에필로그
주석: 인명 및 지명
참고문헌
추가 참고문헌
찾아보기
감사의 말
프롤로그
제1부 트로이 전쟁
제1장 『일리아드』, 『오디세이아』, 『서사시집』에 나오는 이야기
제2장 역사적 맥락에서 보는 트로이 전쟁: 미케네인, 히타이트인, 트로이인, 바다의 사람들
제2부 문학적 증거 연구
제3장 호메로스에 얽힌 의문들: 호메로스의 실존 여부와 『일리아드』의 신빙성
제4장 히타이트의 문서들: 앗수와, 아히야와, 윌루사의 알락산두
제3부 고고학적 증거 연구
제5장 초기 발굴자들: 하인리히 슐리만과 빌헬름 되르프펠트
제6장 다시 히살릭으로: 칼 블레겐과 만프레드 코르프만
에필로그
주석: 인명 및 지명
참고문헌
추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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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아주 오래전 트로이 전쟁 전설의 단초가 된 전쟁이 정말 일어났을까? 그 전쟁의 전투들이 오늘날 우리가 트로이라고 부르는 지역에서 벌어졌을까?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그런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고, 그 전투들이 벌어진 곳은 현재 터키에 있는 아나톨리아 북서쪽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그들은 같은 장소를 무대로 각각 헬레니즘적인 트로이, 로마적인 일리움을 그려냈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석을 붙인 『일리아드』를 베개 밑에 넣고 잤고, 기원전 334년 아시아 원정 중에는 트로이로 추정되는 곳을 방문하기도 했다는 설이 있다.--- p.18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를 위시해 그 이후 그리스의 시인 및 학자 들이 그려낸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몇 가지 주제를 담고 있다. 사랑과 전쟁, 경쟁과 탐욕, 영웅과 겁쟁이가 등장하는, 시대를 초월한 서사시인 트로이 전쟁의 기본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한 편이다. 몇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핵심이 되는 그리스 쪽 인물에는 미케네 그리스의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부인 헬레네, 메넬라오스와 형제인 미케네 왕 아가멤논, 테살리 출신으로 미케네 최고의 전사인 아킬레우스, 그리고 미케네 이타카 섬의 왕 오디세우스가 있다. 트로이 쪽 인물로는 트로이의 왕 프리엄의 아들 파리스, 프리엄 왕 자신, 그리고 파리스보다 나이 많은 헥토르 왕자 등이 있다.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많은 이를 매료시켰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논문, 책, 고고학적 발굴, 장편 영화, TV 다큐멘터리, 연극, 회화와 조각, 기념품, 수집품을 탄생시켰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33개 주에 트로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나 마을이 있고, 열 개의 대학이 있으며,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에는 트로이전스(Trojans)라는 이름을 가진 스포츠 팀들도 있다. 그중에서도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는 특히 흥미진진하다. 그리스인들은 이 대담한 전략을 이용해 트로이 전쟁을 종식시켰고, “선물을 들고 오는 그리스인들을 조심하라”는 속담도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요즘은 이 말이 ‘트로이의 목마를 심어 시스템을 교란시키는 해커’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p.21
트로이 전쟁은 3,000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지만, 이런 의문들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 자체는 단순하지만 그에 관한 책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할 수밖에 없다.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재정리하는 작업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책은 필연적으로 세부 사항을 검토하는 데 많은 정성을 기울일 것이고, 내용 또한 복잡할 것이다. 그리스와 히타이트의 자료들을 보면 트로이 전쟁은 한 번만 일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호메로스가 정말 그 사건을 그렸는지, 그렇다면 그중 어떤 전쟁을 다루었는지 결정해야 한다. (고대 트로이인) 히살릭에는 아홉 개의 도시가 층층이 쌓여 있기 때문에 프리엄 왕의 트로이가 이 곳인지, 그렇다면 그중 어느 층이 맞는지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 문제들을 검토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 자체를 살펴보면서 그리스인들이 트로이 전쟁을 어떻게 그려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p.23
『일리아드』는 전쟁의 마지막 해에 벌어지는 이런저런 사건을 그리고 있지만, 트로이가 실제로 함락되고 약탈당하기 직전에 끝을 맺는다. 제1장에 나와 있는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다툼이 이야기 전체의 배경을 이룬다. 아가멤논이 차지한 전리품 중 하나인 크리세이스(아폴로 신전의 사제의 딸)를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야 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그는 아킬레우스가 그 전의 전투에서 이기고 받은 전리품인 브리세이스를 데려간다. 그러자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그녀를 돌려주고 사과하지 않는 한 절대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아가멤논은 이를 거부하고, 최고의 전사인 아킬레우스가 빠진 그리스군은 형편없이 패배하고 만다.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 10년 중 겨우 50일 정도를 다루고 있다. 이 기간에 대한 『일리아드』의 묘사는 멋지고 상세하지만 기복이 있다. 예컨대 제1장은 약 20일을 다루는 데 비해 제2~7장은 딱 이틀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아주 자세히 다루고 있다. 제2장에는 이른바 ‘배들의 목록’ 부분, 즉 그리스군에 대한 묘사와 그보다는 덜 자세하지만 트로이군에 대해 비슷한 묘사가 나와 있다. 제3장에서는 알렉산더/파리스와 메넬라오스가 일 대 일 결투를 벌이는데, 두 사람은 이 싸움에서 이기는 쪽이 헬레네를 차지하고, 전쟁 또한 거기서 끝내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아프로디테 여신이 알렉산더/파리스를 구해내는 바람에 전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본문을 보면 메넬라오스가 왕자의 헬멧에 달린 턱 끈을 잡고 그를 결투장에서 끌어내는데, 여신이 그 끈을 끊어지게 함으로써 왕자를 살리고 전쟁이 계속되도록 한다. 제4~7장에는 올림푸스의 신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사건과, 트로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전투에 대한 묘사가 나와 있다. 제8~10장은 길지만 결말이 나지 않는 알렉산더/파리스의 형인 헥토르와 나중에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그리스의 거인 아익스(Ajax)가 벌이는 결투 등 단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총 24장으로 이루어진 『일리아드』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여덟 장인 제11~18장 역시 단 하루 동안에 일어난 싸움을 아주 자세히 그리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제16장에서 살해된다는 것이다. 이날 파트로클로스는 종일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싸웠는데, 그 때문에 다들 그를 아킬레우스로 착각했고, 결국 헥토르가 그를 죽이고 만다. 제17장은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벗긴 후,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전투를 다루고 있다. 제19~22장은 또 다른 하루를 그리고 있다. 제20장을 보면, 전쟁터로 돌아온 아킬레우스는 열심히 싸우고 있고, 신들도 편을 갈라 다투고 있으며, 포세이돈이 트로이군을 돕기 위해 지진을 일으킨 상태다. 제22장에서는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인 다음 그의 시신을 그리스 진영으로 끌고 간다. 『일리아드』의 마지막 부분인 제23~24장은 그다음 22일 동안을 다루고 있는데, 제1장에 나오는 20일과 대비를 이루게 하려고 그렇게 배치했을 수도 있다. 제23장에서 그리스군은 거대한 장작더미를 쌓아올려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화장한 다음 다양한 장례 경기를 진행한다. 마지막 부분인 제24장은 친구를 잃은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슬픔을 그리고 있다. 이런저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프리엄 왕에게 헥토르의 시체를 돌려주고, 트로이 측은 12일 간의 휴전 기간 동안 장작더미를 쌓고 그의 시신을 화장한다. 이것이 『일리아드』의 마지막 장면이다.--- p.44
후대 그리스 극작가들과 오비디우스, 리비우스, 베르길리우스 등의 로마 작가들은 『서사시집』에 등장하는 이야기들, 그중에서도 특히 트로이 전쟁 후에 일어난 일들을 다룬 작품들을 계속 펴냈다.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시기와 좀 더 가깝기 때문에 『서사시집』에 나온 정보들이 이 후대 작품들보다 더 정확할 수도 있지만, 초기 작품들 역시 원래의 전쟁에서 최소한 5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인 기원전 8세기에 문자화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시들이 지금의 형태로 정착된 것은 그로부터 또 200년이 흐른 기원전 6세기였을 것이다. 따라서 호메로스가 실존 인물이었는지, 그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썼는지도 문제지만, 트로이 전쟁을 다룬 초기 작품들의 신빙성 역시 호메로스 연구자들과 청동기 시대 고고학자들에게 중요한 주제이다.--- p.56
고대와 현대의 학자들은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면 청동기 시대 후기, 즉 기원전 2000년대 말기에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때는 바로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인과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인이 가장 강성했고, 트로이와 트로아드(Troad, 아나톨리아의 비가[Biga] 반도)가 그 중간에 끼어 있던 시기였다. 이 두 문명은 기원전 1700년에서 기원전 1200년 사이에 번성했는데, 트로이 전쟁이 정말 일어났다면 이 두 세력이 멸망하기 전에 일어났어야 한다. 트로이인은 북서쪽에 있는 히살릭(고대 트로이)의 발굴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지만, 미케네인과 히타이트인에 대해서는 이제 꽤 많은 것이 밝혀진 상태다. 트로이 전쟁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 또 다른 집단, 즉 바다의 사람들이라는 정체불명의 이주자들은 아직 알려진 바가 적지만 흥미로운 연구 주제다.--- p.58
히타이트는 기원전 14~13세기, 특히 수필루류마(Suppiluliuma) 1세와 그 후계자들의 재위 기간에 가장 강성했는데, 이때 시리아 북부까지 영토를 넓혔고 이집트 신왕국과 여러 번 접촉하면서 가끔 충돌하기도 했다. 기원전 1227년에서 기원전 1209년까지 제국을 통치한 히타이트의 마지막 위대한 왕 투달리아(Tudhaliya) 4세는 키프로스를 정복해 금과 은을 약탈했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1200년경, 히타이트 제국은 아마도 여전히 베일에 휩싸여 있는 ‘바다의 사람들’ 때문에 멸망한 듯하다. 이집트의 여러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하티의 땅’을 파괴했다고 한다. 하투사 바로 북쪽에 있는 카쉬카(Kashka) 같은 이웃 민족들이 제국을 멸망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p.66
청동기 후기의 사회가 늘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고, 교역 파트너나 인접국 간의 관계가 언제나 우호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팽창의 시기인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200년 사이에는 트로이 전쟁뿐 아니라 당시의 강대국 간에 또는 강대국과 약소국 간에 여러 번의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다. 예를 들어 이집트는 기원전 1207년과 기원전 1177년 두 차례에 걸쳐 바다의 사람들과 전쟁을 치렀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300년 전인 기원전 1479년에는 메기도(Megiddo, 성경에 나오는 아마겟돈; 현재의 이스라엘)에서 가나안의 반도들과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은 파라오 투트모스 3세가 이끄는 이집트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그 내용은 이집트 룩소르에 있는 카르낙 신전의 벽에 자세히 새겨져 있다. 이것이 바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사상 최초의 전투다.--- p.71
호메로스나 그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고대인들은 그를 최고의 서사시인(bard), 즉 과거 영웅들의 행적을 노래하는 방랑시인으로 간주했고, 현대의 학자들도 그를 최초의, 그리고 어쩌면 최고의 그리스 시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를(들을) 모으고, 짜맞추고, 아마도 문자로 기록한 천재로 생각되고 있다. 배리 파월(Barry Powell)이라는 학자는 그리스 알파벳이 서사시를 기록할 목적으로 발명되었다는 색다른 주장을 펴기도 했는데, 그에 따르면 알파벳은 “우리가 호메로스라고 부르는 그리스의 6보격(hexameters) 시를 기록하기 위해… 어떤 한 사람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호메로스가 이 시들을 지은 것은 맞지만, 애초에 구전으로 전해지도록 의도했고, 기원전 6세기 또는 그 이후에야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p.77
단지 헬레네의 납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편리한 핑계가 되어 줄 수는 있지만, 고대 세계에서 대개 그랬듯이 실제로는 아마 영토 확장이나 이문이 많이 남는 교역로의 통제권 확보 같은 정치적, 상업적 이유 때문에 전쟁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실제로 한 사람에 얽힌 사건이 전쟁의 핑계나 촉매제가 된 경우도 더러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페르디난드 대공의 암살이다. 어차피 일어날 전쟁이었겠지만, 암살이 불씨 역할을 했다. 두 번째 예는 기원전 14세기에 이집트의 공주와 결혼하러 가다가 익명의 암살자들에 의해 살해된 히타이트 수필루류마 1세의 아들 자난자(Zannanza) 왕자의 경우다. 부왕은 이 암살을 핑계로 이집트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 역시 왕자의 죽음과 아무 상관 없는 이유, 즉 영토 분쟁 때문에 어차피 일어났었을 것이다.--- p.95
트로이 발견의 이야기는 부정확하지만 통상 ‘미케네 고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19세기의 사업가 하인리히 슐리만의 이야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슐리만은 자수성가한 독일의 백만장자로 고고학 사상 가장 운 좋은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운 ‘아마추어’로,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이 고대 트로이라고 추정하는 유적지를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발굴한 성공담의 주인공이다. 그는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트로이 전쟁은 꾸며낸 이야기고, 따라서 고대의 트로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던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에 맞서 그런 위업을 이뤄냈던 것이다. 슐리만은 또 아가멤논과 그의 군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미케네와 티륀스를 성공적으로 발굴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슐리만은 발굴일지를 조작하고, 사업이나 사생활에 대해 거짓말을 일삼은 악당이기도 했다. 고고학 분야를 예로 들면, 그는 처음에 프랭크 캘버트(Frank Calvert)에게서 히살릭-고대 트로이 유적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숨겼고, 프리엄의 것도 아니고 보물도 아닌, 그냥 트로이 전쟁에서 1000년이나 앞선 시대에 제작된 귀중한 물건들인 이른바 ‘프리엄의 보물’의 발견에 대해 완전히 근거 없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p.122
최근 들어 프리엄의 보물은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유물들은 프리엄의 보물일 가능성이 전혀 없다. 슐리만은 이 보물들을 ‘불 탄 도시’, 즉 트로이 2층에서 찾았다고 말했는데, 그 층은 최근 연구에 의하면 기원전 2300년경의 유적이다. 실제로 이 ‘보물’에 들어 있는 유물들은 동쪽으로 (현재의 이라크인) 메소포타미아 우르(Ur)의 이른바 ‘죽음의 구덩이’부터 서쪽으로 에게 해의 렘노스 섬에 있는 폴리오크니(Poliochni) 유적지까지 아주 넓은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아주 비슷하고, 대략 같은 시기, 즉 기원전 23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은 프리엄이나 헬레네 그리고 트로이 전쟁과 관련된 어떤 인물보다 천 년 이상 앞선 시기의 사람들이 쓰던 물건인 셈이다.--- p.133
1997년에서 200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코르프만 팀은 이른바 ‘샘 동굴(Spring Cave)’을 완전히 발굴했다. ‘샘 동굴’은 인공 터널, 평평한 부분, 회랑 등, 바위를 파서 만든 수로로서, 저지 도시의 남서쪽, 성채의 성벽 밖에 위치해 있다. 주 터널은 코르프만 팀의 발굴 초기에 발견되었으나, 입구 근처에 있는 이런저런 시설물과 양어장 때문에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입구에 있는 이런 시설들은 정말 로마 시대 유적이지만, 2001년 코르프만과 그의 발굴 팀은 ‘샘 동굴’이 청동기 초기인 기원전 13세기에 건설되었고, 2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부분 기간에 사용되었음을 입증했다. 이는 히살릭/트로이와 히타이트 기록에 윌루사로 기록되어 있는 도시를 동일한 곳으로 보려는 코르프만에게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었다. 이 수로(水路)가 바로 「알락산두 협약서」에 나오는 ‘윌루사의 지하 수로’일 수 있기 때문이다.--- p.163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트로이 전쟁에 대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 호메로스는 청동기 후기에 미케네 문명이 붕괴되기 전 미케네인이 아나톨리아 해안에서 벌인 역사적 사건을 묘사했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정말 많은 사람이 트로이와 트로이 전쟁에 대해 글을 써왔다. 트로이가 영국, 스칸디나비아, 심지어는 터키의 실리시아(Cilicia)에 있다든가, 트로이 전쟁 이야기는 실은 아틀란티스 섬의 전설이 변형되어 내려온 것이라든가 등, 온갖 엉뚱한 가설이 심지어 최근까지 문자화되어 나왔다. 학자들 자신도 트로이와 트로이 전쟁의 역사성에 대해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있다. 호메로스의 시들이 모두 허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가 트로이 전쟁 모티프를 아무런 역사적 기반 없이… 기원전 8세기에 갑자기 지어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p.170
그리스의 서사시들을 보면 한 번이 아니라 적어도 두 번의 전쟁이 있었고(헤라클레스의 공격, 아가멤논의 전쟁), 튜트라니아를 트로이로 착각하고 쳐들어간 아가멤논의 첫 번째 공격까지 치면 실은 세 번의 전쟁이 있었던 셈이다. 마찬가지로, 히타이트의 문서들을 보면 기원전 15세기 앗수와 반란부터 기원전 13세기 후반 윌루사의 왕 월무의 퇴위까지 최소한 네 번의 전쟁이 등장한다.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트로이/히살릭은 기원전 13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세 번 아니면 두 번 파괴되었다. 이 중 어떤 부분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일부는 최근에 드러난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아직은 이런 각각의 증거들을 다른 증거들과 확실히 연결해주기 어려운 형편이다. 예를 들어, 히타이트 기록에 등장하는 월무의 퇴위를 트로이 7a층의 파괴와 연결 지어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그 두 사건이 확실히 연관이 있다는 완벽한 증거가 없다.--- p.172
호메로스는 어떤 인물이나 사물, 사건을 실제와 다르게 묘사했을 수도 있고, 어떤 이유 때문에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다. 실제로 중세 이후 여러 위대한 서사시인과 시 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변형시켜 사용했고, 어떤 경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을 소재로 삼거나,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왜곡해서 위대한 시적 전통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와 『니벨룽겐의 전설Niebelungenleid』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 작품들은 둘 다 역사적 사건들을 실제와 다르게 변형시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가 지닌 기본 요소들의 역사적 근거를 확인한 것으로 만족해야 할 수도 있다. 일부 세부적인 사항은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우리는 이미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가멤논이 실존 인물인지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슐리만 시대 이후 우리는 미케네인과 그 문명이 실재했었음을 확인했다. 프리엄 왕이 정말 존재했는지, 그렇다면 히살릭 둔덕의 몇 층이 그의 도시였는지는 아직 확실히 증명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트로이라는 도시가 정말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가 정확히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지만, 청동기 후기에 아나톨리아 북서쪽, 정확히 트로이 지역에서 미케네인이 300년 이상 간헐적으로 싸움을 벌였다는 것은 확인했다. 또한 히타이트 기록들을 보면, 기원전 13세기 초에 알락산두와 싸운 사람이나 기원전 13세기 후반에 월무를 퇴위시킨 것이 아가멤논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같은 시기에 트로이에서 또는 트로이를 놓고 여러 번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알렉산더와 헬레네, 아가멤논과 프리엄,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정말 존재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일리아드』의 기본 줄거리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 같다.--- p.176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보면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하다. 제우스, 헤라 그리고 여러 신들이 전쟁에 개입하는 부분들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고, 그 밖에도 환상적인 요소들이 꽤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호메로스와 『서사시집』에 나오는 그리스의 문학적 증거 뿐 아니라 고고학과 히타이트 기록들을 보면, 전반적으로 트로이와 트로이 전쟁은 분명 있어야 할 곳, 즉 청동기 후기 아나톨리아 북서부에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 후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을 감동시킨 사랑, 영예, 전쟁, 친족관계, 의무 등의 주제는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를 거쳐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리비우스, 초서, 셰익스피어 그리고 그 이후의 작가들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실제로 그(런) 사건이 일어난 3000여 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여전히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를 위시해 그 이후 그리스의 시인 및 학자 들이 그려낸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몇 가지 주제를 담고 있다. 사랑과 전쟁, 경쟁과 탐욕, 영웅과 겁쟁이가 등장하는, 시대를 초월한 서사시인 트로이 전쟁의 기본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한 편이다. 몇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핵심이 되는 그리스 쪽 인물에는 미케네 그리스의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부인 헬레네, 메넬라오스와 형제인 미케네 왕 아가멤논, 테살리 출신으로 미케네 최고의 전사인 아킬레우스, 그리고 미케네 이타카 섬의 왕 오디세우스가 있다. 트로이 쪽 인물로는 트로이의 왕 프리엄의 아들 파리스, 프리엄 왕 자신, 그리고 파리스보다 나이 많은 헥토르 왕자 등이 있다.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많은 이를 매료시켰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논문, 책, 고고학적 발굴, 장편 영화, TV 다큐멘터리, 연극, 회화와 조각, 기념품, 수집품을 탄생시켰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33개 주에 트로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나 마을이 있고, 열 개의 대학이 있으며,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에는 트로이전스(Trojans)라는 이름을 가진 스포츠 팀들도 있다. 그중에서도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는 특히 흥미진진하다. 그리스인들은 이 대담한 전략을 이용해 트로이 전쟁을 종식시켰고, “선물을 들고 오는 그리스인들을 조심하라”는 속담도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요즘은 이 말이 ‘트로이의 목마를 심어 시스템을 교란시키는 해커’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p.21
트로이 전쟁은 3,000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지만, 이런 의문들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 자체는 단순하지만 그에 관한 책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할 수밖에 없다.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재정리하는 작업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책은 필연적으로 세부 사항을 검토하는 데 많은 정성을 기울일 것이고, 내용 또한 복잡할 것이다. 그리스와 히타이트의 자료들을 보면 트로이 전쟁은 한 번만 일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호메로스가 정말 그 사건을 그렸는지, 그렇다면 그중 어떤 전쟁을 다루었는지 결정해야 한다. (고대 트로이인) 히살릭에는 아홉 개의 도시가 층층이 쌓여 있기 때문에 프리엄 왕의 트로이가 이 곳인지, 그렇다면 그중 어느 층이 맞는지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 문제들을 검토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 자체를 살펴보면서 그리스인들이 트로이 전쟁을 어떻게 그려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p.23
『일리아드』는 전쟁의 마지막 해에 벌어지는 이런저런 사건을 그리고 있지만, 트로이가 실제로 함락되고 약탈당하기 직전에 끝을 맺는다. 제1장에 나와 있는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다툼이 이야기 전체의 배경을 이룬다. 아가멤논이 차지한 전리품 중 하나인 크리세이스(아폴로 신전의 사제의 딸)를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야 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그는 아킬레우스가 그 전의 전투에서 이기고 받은 전리품인 브리세이스를 데려간다. 그러자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그녀를 돌려주고 사과하지 않는 한 절대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아가멤논은 이를 거부하고, 최고의 전사인 아킬레우스가 빠진 그리스군은 형편없이 패배하고 만다.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 10년 중 겨우 50일 정도를 다루고 있다. 이 기간에 대한 『일리아드』의 묘사는 멋지고 상세하지만 기복이 있다. 예컨대 제1장은 약 20일을 다루는 데 비해 제2~7장은 딱 이틀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아주 자세히 다루고 있다. 제2장에는 이른바 ‘배들의 목록’ 부분, 즉 그리스군에 대한 묘사와 그보다는 덜 자세하지만 트로이군에 대해 비슷한 묘사가 나와 있다. 제3장에서는 알렉산더/파리스와 메넬라오스가 일 대 일 결투를 벌이는데, 두 사람은 이 싸움에서 이기는 쪽이 헬레네를 차지하고, 전쟁 또한 거기서 끝내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아프로디테 여신이 알렉산더/파리스를 구해내는 바람에 전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본문을 보면 메넬라오스가 왕자의 헬멧에 달린 턱 끈을 잡고 그를 결투장에서 끌어내는데, 여신이 그 끈을 끊어지게 함으로써 왕자를 살리고 전쟁이 계속되도록 한다. 제4~7장에는 올림푸스의 신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사건과, 트로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전투에 대한 묘사가 나와 있다. 제8~10장은 길지만 결말이 나지 않는 알렉산더/파리스의 형인 헥토르와 나중에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그리스의 거인 아익스(Ajax)가 벌이는 결투 등 단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총 24장으로 이루어진 『일리아드』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여덟 장인 제11~18장 역시 단 하루 동안에 일어난 싸움을 아주 자세히 그리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제16장에서 살해된다는 것이다. 이날 파트로클로스는 종일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싸웠는데, 그 때문에 다들 그를 아킬레우스로 착각했고, 결국 헥토르가 그를 죽이고 만다. 제17장은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벗긴 후,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전투를 다루고 있다. 제19~22장은 또 다른 하루를 그리고 있다. 제20장을 보면, 전쟁터로 돌아온 아킬레우스는 열심히 싸우고 있고, 신들도 편을 갈라 다투고 있으며, 포세이돈이 트로이군을 돕기 위해 지진을 일으킨 상태다. 제22장에서는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인 다음 그의 시신을 그리스 진영으로 끌고 간다. 『일리아드』의 마지막 부분인 제23~24장은 그다음 22일 동안을 다루고 있는데, 제1장에 나오는 20일과 대비를 이루게 하려고 그렇게 배치했을 수도 있다. 제23장에서 그리스군은 거대한 장작더미를 쌓아올려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화장한 다음 다양한 장례 경기를 진행한다. 마지막 부분인 제24장은 친구를 잃은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슬픔을 그리고 있다. 이런저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프리엄 왕에게 헥토르의 시체를 돌려주고, 트로이 측은 12일 간의 휴전 기간 동안 장작더미를 쌓고 그의 시신을 화장한다. 이것이 『일리아드』의 마지막 장면이다.--- p.44
후대 그리스 극작가들과 오비디우스, 리비우스, 베르길리우스 등의 로마 작가들은 『서사시집』에 등장하는 이야기들, 그중에서도 특히 트로이 전쟁 후에 일어난 일들을 다룬 작품들을 계속 펴냈다.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시기와 좀 더 가깝기 때문에 『서사시집』에 나온 정보들이 이 후대 작품들보다 더 정확할 수도 있지만, 초기 작품들 역시 원래의 전쟁에서 최소한 5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인 기원전 8세기에 문자화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시들이 지금의 형태로 정착된 것은 그로부터 또 200년이 흐른 기원전 6세기였을 것이다. 따라서 호메로스가 실존 인물이었는지, 그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썼는지도 문제지만, 트로이 전쟁을 다룬 초기 작품들의 신빙성 역시 호메로스 연구자들과 청동기 시대 고고학자들에게 중요한 주제이다.--- p.56
고대와 현대의 학자들은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면 청동기 시대 후기, 즉 기원전 2000년대 말기에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때는 바로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인과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인이 가장 강성했고, 트로이와 트로아드(Troad, 아나톨리아의 비가[Biga] 반도)가 그 중간에 끼어 있던 시기였다. 이 두 문명은 기원전 1700년에서 기원전 1200년 사이에 번성했는데, 트로이 전쟁이 정말 일어났다면 이 두 세력이 멸망하기 전에 일어났어야 한다. 트로이인은 북서쪽에 있는 히살릭(고대 트로이)의 발굴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지만, 미케네인과 히타이트인에 대해서는 이제 꽤 많은 것이 밝혀진 상태다. 트로이 전쟁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 또 다른 집단, 즉 바다의 사람들이라는 정체불명의 이주자들은 아직 알려진 바가 적지만 흥미로운 연구 주제다.--- p.58
히타이트는 기원전 14~13세기, 특히 수필루류마(Suppiluliuma) 1세와 그 후계자들의 재위 기간에 가장 강성했는데, 이때 시리아 북부까지 영토를 넓혔고 이집트 신왕국과 여러 번 접촉하면서 가끔 충돌하기도 했다. 기원전 1227년에서 기원전 1209년까지 제국을 통치한 히타이트의 마지막 위대한 왕 투달리아(Tudhaliya) 4세는 키프로스를 정복해 금과 은을 약탈했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1200년경, 히타이트 제국은 아마도 여전히 베일에 휩싸여 있는 ‘바다의 사람들’ 때문에 멸망한 듯하다. 이집트의 여러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하티의 땅’을 파괴했다고 한다. 하투사 바로 북쪽에 있는 카쉬카(Kashka) 같은 이웃 민족들이 제국을 멸망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p.66
청동기 후기의 사회가 늘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고, 교역 파트너나 인접국 간의 관계가 언제나 우호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팽창의 시기인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200년 사이에는 트로이 전쟁뿐 아니라 당시의 강대국 간에 또는 강대국과 약소국 간에 여러 번의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다. 예를 들어 이집트는 기원전 1207년과 기원전 1177년 두 차례에 걸쳐 바다의 사람들과 전쟁을 치렀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300년 전인 기원전 1479년에는 메기도(Megiddo, 성경에 나오는 아마겟돈; 현재의 이스라엘)에서 가나안의 반도들과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은 파라오 투트모스 3세가 이끄는 이집트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그 내용은 이집트 룩소르에 있는 카르낙 신전의 벽에 자세히 새겨져 있다. 이것이 바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사상 최초의 전투다.--- p.71
호메로스나 그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고대인들은 그를 최고의 서사시인(bard), 즉 과거 영웅들의 행적을 노래하는 방랑시인으로 간주했고, 현대의 학자들도 그를 최초의, 그리고 어쩌면 최고의 그리스 시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를(들을) 모으고, 짜맞추고, 아마도 문자로 기록한 천재로 생각되고 있다. 배리 파월(Barry Powell)이라는 학자는 그리스 알파벳이 서사시를 기록할 목적으로 발명되었다는 색다른 주장을 펴기도 했는데, 그에 따르면 알파벳은 “우리가 호메로스라고 부르는 그리스의 6보격(hexameters) 시를 기록하기 위해… 어떤 한 사람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호메로스가 이 시들을 지은 것은 맞지만, 애초에 구전으로 전해지도록 의도했고, 기원전 6세기 또는 그 이후에야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p.77
단지 헬레네의 납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편리한 핑계가 되어 줄 수는 있지만, 고대 세계에서 대개 그랬듯이 실제로는 아마 영토 확장이나 이문이 많이 남는 교역로의 통제권 확보 같은 정치적, 상업적 이유 때문에 전쟁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실제로 한 사람에 얽힌 사건이 전쟁의 핑계나 촉매제가 된 경우도 더러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페르디난드 대공의 암살이다. 어차피 일어날 전쟁이었겠지만, 암살이 불씨 역할을 했다. 두 번째 예는 기원전 14세기에 이집트의 공주와 결혼하러 가다가 익명의 암살자들에 의해 살해된 히타이트 수필루류마 1세의 아들 자난자(Zannanza) 왕자의 경우다. 부왕은 이 암살을 핑계로 이집트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 역시 왕자의 죽음과 아무 상관 없는 이유, 즉 영토 분쟁 때문에 어차피 일어났었을 것이다.--- p.95
트로이 발견의 이야기는 부정확하지만 통상 ‘미케네 고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19세기의 사업가 하인리히 슐리만의 이야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슐리만은 자수성가한 독일의 백만장자로 고고학 사상 가장 운 좋은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독학으로 고고학을 배운 ‘아마추어’로,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이 고대 트로이라고 추정하는 유적지를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발굴한 성공담의 주인공이다. 그는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트로이 전쟁은 꾸며낸 이야기고, 따라서 고대의 트로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던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에 맞서 그런 위업을 이뤄냈던 것이다. 슐리만은 또 아가멤논과 그의 군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미케네와 티륀스를 성공적으로 발굴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슐리만은 발굴일지를 조작하고, 사업이나 사생활에 대해 거짓말을 일삼은 악당이기도 했다. 고고학 분야를 예로 들면, 그는 처음에 프랭크 캘버트(Frank Calvert)에게서 히살릭-고대 트로이 유적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숨겼고, 프리엄의 것도 아니고 보물도 아닌, 그냥 트로이 전쟁에서 1000년이나 앞선 시대에 제작된 귀중한 물건들인 이른바 ‘프리엄의 보물’의 발견에 대해 완전히 근거 없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p.122
최근 들어 프리엄의 보물은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유물들은 프리엄의 보물일 가능성이 전혀 없다. 슐리만은 이 보물들을 ‘불 탄 도시’, 즉 트로이 2층에서 찾았다고 말했는데, 그 층은 최근 연구에 의하면 기원전 2300년경의 유적이다. 실제로 이 ‘보물’에 들어 있는 유물들은 동쪽으로 (현재의 이라크인) 메소포타미아 우르(Ur)의 이른바 ‘죽음의 구덩이’부터 서쪽으로 에게 해의 렘노스 섬에 있는 폴리오크니(Poliochni) 유적지까지 아주 넓은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아주 비슷하고, 대략 같은 시기, 즉 기원전 23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은 프리엄이나 헬레네 그리고 트로이 전쟁과 관련된 어떤 인물보다 천 년 이상 앞선 시기의 사람들이 쓰던 물건인 셈이다.--- p.133
1997년에서 200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코르프만 팀은 이른바 ‘샘 동굴(Spring Cave)’을 완전히 발굴했다. ‘샘 동굴’은 인공 터널, 평평한 부분, 회랑 등, 바위를 파서 만든 수로로서, 저지 도시의 남서쪽, 성채의 성벽 밖에 위치해 있다. 주 터널은 코르프만 팀의 발굴 초기에 발견되었으나, 입구 근처에 있는 이런저런 시설물과 양어장 때문에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입구에 있는 이런 시설들은 정말 로마 시대 유적이지만, 2001년 코르프만과 그의 발굴 팀은 ‘샘 동굴’이 청동기 초기인 기원전 13세기에 건설되었고, 2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부분 기간에 사용되었음을 입증했다. 이는 히살릭/트로이와 히타이트 기록에 윌루사로 기록되어 있는 도시를 동일한 곳으로 보려는 코르프만에게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었다. 이 수로(水路)가 바로 「알락산두 협약서」에 나오는 ‘윌루사의 지하 수로’일 수 있기 때문이다.--- p.163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트로이 전쟁에 대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 호메로스는 청동기 후기에 미케네 문명이 붕괴되기 전 미케네인이 아나톨리아 해안에서 벌인 역사적 사건을 묘사했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정말 많은 사람이 트로이와 트로이 전쟁에 대해 글을 써왔다. 트로이가 영국, 스칸디나비아, 심지어는 터키의 실리시아(Cilicia)에 있다든가, 트로이 전쟁 이야기는 실은 아틀란티스 섬의 전설이 변형되어 내려온 것이라든가 등, 온갖 엉뚱한 가설이 심지어 최근까지 문자화되어 나왔다. 학자들 자신도 트로이와 트로이 전쟁의 역사성에 대해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있다. 호메로스의 시들이 모두 허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가 트로이 전쟁 모티프를 아무런 역사적 기반 없이… 기원전 8세기에 갑자기 지어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p.170
그리스의 서사시들을 보면 한 번이 아니라 적어도 두 번의 전쟁이 있었고(헤라클레스의 공격, 아가멤논의 전쟁), 튜트라니아를 트로이로 착각하고 쳐들어간 아가멤논의 첫 번째 공격까지 치면 실은 세 번의 전쟁이 있었던 셈이다. 마찬가지로, 히타이트의 문서들을 보면 기원전 15세기 앗수와 반란부터 기원전 13세기 후반 윌루사의 왕 월무의 퇴위까지 최소한 네 번의 전쟁이 등장한다.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트로이/히살릭은 기원전 13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세 번 아니면 두 번 파괴되었다. 이 중 어떤 부분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일부는 최근에 드러난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아직은 이런 각각의 증거들을 다른 증거들과 확실히 연결해주기 어려운 형편이다. 예를 들어, 히타이트 기록에 등장하는 월무의 퇴위를 트로이 7a층의 파괴와 연결 지어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그 두 사건이 확실히 연관이 있다는 완벽한 증거가 없다.--- p.172
호메로스는 어떤 인물이나 사물, 사건을 실제와 다르게 묘사했을 수도 있고, 어떤 이유 때문에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다. 실제로 중세 이후 여러 위대한 서사시인과 시 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변형시켜 사용했고, 어떤 경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을 소재로 삼거나,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왜곡해서 위대한 시적 전통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와 『니벨룽겐의 전설Niebelungenleid』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 작품들은 둘 다 역사적 사건들을 실제와 다르게 변형시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가 지닌 기본 요소들의 역사적 근거를 확인한 것으로 만족해야 할 수도 있다. 일부 세부적인 사항은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우리는 이미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가멤논이 실존 인물인지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슐리만 시대 이후 우리는 미케네인과 그 문명이 실재했었음을 확인했다. 프리엄 왕이 정말 존재했는지, 그렇다면 히살릭 둔덕의 몇 층이 그의 도시였는지는 아직 확실히 증명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트로이라는 도시가 정말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가 정확히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지만, 청동기 후기에 아나톨리아 북서쪽, 정확히 트로이 지역에서 미케네인이 300년 이상 간헐적으로 싸움을 벌였다는 것은 확인했다. 또한 히타이트 기록들을 보면, 기원전 13세기 초에 알락산두와 싸운 사람이나 기원전 13세기 후반에 월무를 퇴위시킨 것이 아가멤논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같은 시기에 트로이에서 또는 트로이를 놓고 여러 번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알렉산더와 헬레네, 아가멤논과 프리엄,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정말 존재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일리아드』의 기본 줄거리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 같다.--- p.176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보면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하다. 제우스, 헤라 그리고 여러 신들이 전쟁에 개입하는 부분들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고, 그 밖에도 환상적인 요소들이 꽤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호메로스와 『서사시집』에 나오는 그리스의 문학적 증거 뿐 아니라 고고학과 히타이트 기록들을 보면, 전반적으로 트로이와 트로이 전쟁은 분명 있어야 할 곳, 즉 청동기 후기 아나톨리아 북서부에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 후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을 감동시킨 사랑, 영예, 전쟁, 친족관계, 의무 등의 주제는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를 거쳐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리비우스, 초서, 셰익스피어 그리고 그 이후의 작가들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실제로 그(런) 사건이 일어난 3000여 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여전히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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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인문학의 이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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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일본 문화탐방 (여행)
- 38.일본 동경근교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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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일본 큐슈지방 (여행)
- 41.일본 중부지방.섬 (여행)
- 42.일본 동북지방 (여행)
- 43.일본 북해도 (여행)
- 44.지구촌사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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