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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

기축옥사

by 이덕휴-dhleepaul 2022. 10. 11.

기축옥사는 우리 광산이문을 짖밟은 정철 일당들의 만행이다. -이덕휴식

권력투쟁의 서막이 열리다

1589년(선조 22)

1 붕당정치의 심화와 기축옥사(己丑獄事)의 발생

사화(士禍)가 빈번히 일어났던 16세기 전반기의 정치적 난맥상은 선조[조선](宣祖)의 즉위와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오랫동안 권력을 잡아왔던 훈척세력은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고, 그 동안 탄압받았던 사림(士林)세력이 정치 무대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사림세력은 사화기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구체제 청산을 시도했지만, 한편으로 그들 내부의 의견차로 인해 분열을 일으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라는 붕당(朋黨)을 형성했다.

동인과 서인 사이에 정치 노선과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방법상의 차이를 놓고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몇 가지 정치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그 중 선조 때에 벌어진 가장 큰 사건이 바로 ‘기축옥사’였다. 흔히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으로 불리는 이 옥사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기 3년 전인 선조 22년(1589년)에 일어났다.

2 기축옥사의 전개

1589년(선조 22) 10월 2일 밤,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군수 이축(李軸),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조정에 한 통의 비밀장계(狀啓)를 올렸다. 그 장계는 전주에 사는 홍문관수찬을 지냈던 정여립이 모반한다는 내용이었으며, 겨울에 서남지방에서 일시에 거병하여 곧바로 서울을 침범한다는 것이었다. 급보를 받은 임금 선조는 즉시 대소 신료들을 입시하게 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금부도사와 선전관이 급파되어 비상사태에 대비했고 토포사를 전라도에 보냈다. 정여립 사건, 곧 기축옥사의 시작이었다.

정여립의 역모를 도모했던 것이 사실인지, 서인에 의해 날조 또는 왜곡되었는지에 대한 학계의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나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고, 이를 적극 실천했다는 정여립에 대한 평가와 ‘천하는 공공의 것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라는 그의 언급, 나아가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리오’라는 중국 성현 유하혜의 말을 인용하면서 세습되는 군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파격적인 그의 주장 등을 통해 볼 때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처럼 정여립은 사상적으로 당시의 주류적 흐름인 성리학에서 이탈해 있었고, 시국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층민과 무사를 거느리고 대동계를 조직했다든가, 민간에서 ‘뽕나무에 말갈기가 나면 그 집 주인은 왕이 된다.’라는 말을 유포시키는 등 다양한 민심 선동책도 함께 썼다.

사건 발생 전의 상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정여립은 과거에 급제한 후 이이(李珥), 성혼(成渾)과 친밀한 교분을 이어오다가, 이이 사후 돌연 이이를 저버리고 동인 측에 붙었다는 혐의를 받아온 인물이었다. 이러한 정여립의 처신과 과격한 기질은 선조에게 비판을 받아 용납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정여립은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인 전주로 낙향했다. 이것이 역모 고변이 일어나기 4년 전의 일이었다. 이후로 정여립은 향촌에 있으면서 중앙정계의 동인세력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며 재기를 노렸지만 선조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때에 와서 역모사건으로 조정에 일대 파란을 불러 온 것이다.

그 무렵 정국은 붕당 간의 화합에 힘을 쏟았던 이이가 사망한 후, 동서 간의 대립이 한층 격화되어 화합하지 못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경연 석상에서 정언신(鄭彦信)이 선조에게 “오직 저 북방이 비록 걱정스럽다고 하지만 우리 조정을 돌아보건대 그 걱정은 더욱 큽니다. 대저 사방이 팔과 다리라면 조정은 심장인데 이제 조정이 화합하지 못하니 이는 심장이 이미 병이 든 것입니다. 이러고서야 어찌 사지를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것에서 당시의 사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정에서 성혼, 이이의 당에 대한 공격을 거르는 날이 없다고 언급될 만큼, 동인은 서인의 대표적 인물에 대해 계속해서 시비를 논하였고, 이에 맞서서 서인 측에서는 동인 이산해(李山海), 이발(李潑) 등의 처신을 문제 삼아 논박하는 것으로 맞섰다. 기축옥사가 일어날 때까지 정국에 대한 우위는 대체로 동인 세력이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인 내부에서는 서인을 대하는 견해 차이로 남과 북으로 분당하는 단초가 일어나 또 다른 분열을 예고하고 있었다.

서인의 여론을 대변하던 조헌(趙憲)이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들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수차례 올린 끝에 유배에 처해진 것이 역모 고변 5개월 전의 일이었다. 고변이 있은 지 5일 뒤, 전라도에 정여립을 쫓아가 잡으러 갔던 의금부도사 유담(柳湛)이 정여립이 도망하였다는 장계를 올렸고, 같은 달 15일에는 황해도의 죄인 이기(李箕), 이광수(李光秀) 등이 정여립과 반역을 공모한 사실을 승복했고, 17일에는 안악의 수군 황언륜(黃彦綸), 방의신(方義臣) 등이 정여립과 반역을 공모한 사실을 승복하여 형벌을 받고 죽음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정여립의 자살소식이 들려왔다.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은 선조의 친국에서 반역의 실상을 모두 자복하였다. 이제 정여립의 역모는 실체가 된 것이다. 이렇게 역모의 실상이 밝혀진 가운데, 국청은 계속해서 정언신과 이산해 등 동인 주도 하에 진행되었고, 10월 27일에 사건이 종결되었다는 것을 국가적 차원에서 표징(標徵)하기 위해 종묘에 아뢰고 사면령을 반포하는 의식이 치러졌다.

3 옥사의 확대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역모의 주모자는 엄연한 사대부 출신 정여립이었고, 그는 동인의 여러 중요한 인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정 관료를 역임한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면 조정 안에 내응자가 있을 가능성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동인이 주관한 국청에서는 정여립 1인에 대해서만 역적죄를 적용시켰고 더 이상 조사하지 않았다. 이런 동인의 조사 태도는 선조와 서인에게 의구심을 살 수 있었다.

동인에게서 역적이 나왔다는 것은 두 붕당이 서로 견제하며 대치하고 있을 때, 서인이 동인을 공격하는 구실로 이용될 가능성이 매우 큰 사안이었다. 더군다나 옥사가 진행될 무렵 동인과 서인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서인의 경박한 일부 인사들은 이름이 동인이면 관료나 유생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의구심을 가져 역적의 당으로 몰려 했다.

정여립 역모의 실상을 종묘에 고한 후 마무리가 되는 것처럼 보였던 옥사는 며칠 후 선조가 사건에 대한 의견을 널리 구한다는 구언(求言)의 하교를 내리면서 다시 촉발되었다. 선조는 조정 신료들뿐만 아니라 각처의 초야 유생들까지 옥사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게 하였다.

옥사에 대한 선조의 구언 직후인 11월 3일 호남 출신의 성균관 생원 양천회(梁千會)가 동인의 옥사 처결이 잘못되었음을 성토하고 역적 정여립이 이발, 이길(李洁), 백유양(白惟讓), 정언신 등과 친밀했다는 것을 상소했다. 이와 같이 정여립과 연관된 사람들은 동인의 핵심 인사들로 나타났다. 이렇게 되자 선조는 그 동안 거리감을 두었던 서인들을 조정에 다시 불러들여 옥사를 처리하게 하였다. 정철(鄭澈)이 우의정, 성혼이 이조참판, 최황(崔滉)이 대사헌, 백유함(白惟咸)이 헌납으로 임명되면서, 서인들이 옥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서인이 옥사를 담당하게 된 이후 다수의 동인계 인사들이 정여립의 역모와는 무관하게 친분관계나 서신을 왕복했다는 이유 등으로 옥사에 연루되어 처벌되기 시작했다. 불과 11월 12일부터 12월 12일까지 한 달 간 동인계인 정언신, 정언지(鄭彦智), 이발, 이길, 백유양, 김우옹(金宇顒), 홍종록(洪宗祿) 등이 고문으로 죽거나 귀양을 갔으며 송언신(宋言愼), 정윤복(丁胤福) 등이 파직되었다.

연루자들 중에 정여립과 가장 친분이 두터워 일찍부터 같은 당여로 지목받았던 이발은 옥사에서 최대 피해를 입었다. 더구나 이발은 원래 이이와 성혼을 존경했다가, 동인으로 돌아선 점 때문에 서인들의 주된 공격 대상이 되었다. 선조는 이발의 가산을 적몰하고, 이발의 어린 자식과 노모까지 고문으로 죽게 하였다. 이후 동인과 서인은 이에 대한 책임 소재를 두고 시비를 다투었지만, 이발 일가의 죽음은 사실상 선조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정여립 옥사에 연루되어 희생된 뒤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인물은 최영경(崔永慶)이었다. 최영경은 남명 조식(曺植)의 수제자로 경상우도 지역의 향촌 사회에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최영경은 ‘길삼봉’이란 누명을 쓰고 옥사에 연루되어 죽었는데, 길삼봉은 정여립이 역모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모주(謀主)로 내세웠던 인물이었지만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최영경이 길삼봉으로 지목되었던 것은 최영경의 비판적 시국관이 국왕인 선조에게 위험하게 인식된 까닭이 크다.

최영경의 문인 이황종(李黃鍾)이 편지에서 당시의 시사를 심하게 비판한 내용 때문에 장살되었다는 사실이나, 최영경의 동생 최여경(崔餘慶)이 영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정의 시비를 논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본 선조가 매우 미워하여 단 한 번의 혹독한 형으로 죽게 했다는 사실에서 그런 점을 추측할 수 있다.

기축옥사는 결국 동인 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의 분립을 가져왔다. 서인 측의 강경 대응으로 동인의 한 축을 이루었던 남명 조식의 문인과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은 특히 피해가 컸으며, 서인의 공세를 막아주지 않는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과는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화담 서경덕과 남명 조식의 문인은 북인으로, 퇴계 이황의 문인은 남인으로 분당되었다. 이발, 이길, 김우옹, 백유양, 최영경 등은 대부분 북인이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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