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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

분청사기상감 이선제 묘지

by 이덕휴-dhleepaul 2022. 4. 14.

분청사기상감 이선제 묘지(粉靑沙器象嵌 李先齊 墓誌) 광주 온다

기사승인 2017.09.12  11: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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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3년 만에 햇빛 본 15세기 보물급 묘지석,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거쳐 국립광주박물관으로 귀향

 
분청사기상감 이선제 묘지(粉靑沙器象嵌 李先齊 墓誌) 앞면

이선제 묘지가 일본으로 불법 반출된 지 20년 만에 광주로 돌아온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지건길)은 최근 국내 문화재밀매단이 1998년 6월 일본으로 불법반출한 조선전기 묘지(墓誌 : 죽은 사람의 행적을 적어 무덤에 묻는 돌이나 도판)인 ‘분청사기상감 이선제 묘지’(이하 ‘묘지’) 1점을 일본인 소장자(도도로키 다카시, 1938~2016) 유족으로부터 기증 받아 2017년 8월 24일 국내로 들여왔으며, 최종적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고 밝혔다.

 
분청사기상감 이선제 묘지(粉靑沙器象嵌 李先齊 墓誌) 뒷면

기증식에서 도도로키 여사는 “묘지에 새겨진 이선제 다섯째 아들(李亨元)이 조선통신사를 이끌고 일본으로 오던 중 쓰시마에서 병을 얻어 미처 임무를 마치지 못하고 순직한 사실을 재단 관계자에게 들었다. 이제 그분의 혼이 일본으로 다시 건너와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묘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는 셈이니, 한국의 후손들이 조상을 더욱 잘 모실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미술을 사랑하고 한일 양국의 우호를 생각한 남편 고 도도로키 다카시를 기리고, 이선제 후손분들의 심정을 공경하고자 묘지를 무상증여한다.”고 밝혔다.

이 묘지는 기증 유물 설명회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를 거쳐 광주국립박물관에 기증된다. 묘지는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고, 필문 이선제의 생몰연대가 밝혀진 기록 가치, 조선시대 초기 묘지로서 유래가 없는 희귀성, 기발한 제작 수법과 미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어 문화재 지정이 추진되고 있다.

필문(蓽門) 이선제(李先齊 : 1390~1453, 본관 광주)는 세종연간 사관으로 <고려사>를 개찬하고, 집현전 부교리로 <태종실록>을 편찬했으며, 강원도관찰사와 호조참판 등 고위관직을 두루 거쳐 문종연간 예문관 제학에 이른 조선전기 호남의 대표적인 역사 인물이다.

 
일본인 소장자의 유족인 도도로키 구니에(76세) 여사가 “한일 간 신뢰와 정이 더욱 돈독해지길 희망한다.”며 죽은 남편인 도도로키 다카시 씨의 유지와 선의에 따라서 재단에 무상 기증했다.

묘지는 오는 9월 19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563년 만에 언론에 첫 공개될 예정이며, 일본인 기증자의 유족 도도로키 여사 일행도 참석한다. 이후 묘지는 9월 20일부터 10월 3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실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묘지는 국내 문화재밀매단이 1998년 5월 김해공항을 통해 반출하려 했다. 그러나 묘지의 가치를 한 눈에 알아본 김해공항 문화재감정관실 양맹준 감정관이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 물건은 못 나간다.’며 막았다. 하지만 한 달 뒤 묘지는 문화재밀매단에 의해 일본으로 밀반출되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잊혀졌던 묘지는 재단의 조사와 기증자 면담, 기증 권유 등의 절차를 거쳐 도도로키 여사로부터 최종 기증 약속을 받았고, 묘지는 2017년 8월 무사히 고국에 돌아오게 됐다.

 
 

 묘지는 분청사기에 상감기법으로 지문을 새겨 백토를 채운 뒤 유약을 발라 구운 위패형이다.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명문은 판의 앞뒤, 측면에 총 248자를 새겨 묘지 주인공의 생애와 가계는 물론, 제작연대도 분명히 보여준다. 특히 묘지를 통해 최초로 이선제의 생몰년이 공식 확인되어 그 사료적 가치도 매우 크다.

또한 묘지는 현재 보물로 지정된 4점과 기타 비지정 묘지들과 비교해도 유사한 사례가 없을 만큼 매우 특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위패의 지붕이나 받침 없이 하나의 판으로 된 동체가 밑 부분에서 두 개의 판으로 나뉘며, 묘지의 굽다리는 연판문(蓮瓣文)으로 장식되어 “단순하면서 기발한 수법이 압도적”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국외소재문화재단 관계자는 “필문 이선제 선생은 문종 때인 1451년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던 광주는 다시 광주목으로 복귀시키는 데 앞장선 인물로 5대손인 이발 이기 형제가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멸문의 화를 입어 관련 기록이 소실되었다.”고 말하고 “20년 전 밀반출되려던 묘지를 막으려 했던 부산 출신의 양맹준 감정관의 묘지 기록이 없었다면 묘지는 특정할 수 있는 증거가 없어 영원히 일본에 남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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