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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山訟 - 조선의 묘지소송

by 이덕휴-dhleepaul 2022. 11. 9.

조선의 묘지 소송

김경숙 

문학동네 출판

 
소장
종이책 정가 10,000
전자책 정가 25%7,500
판매가 7,500
출간 정보

2012.02.17. 전자책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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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6.8만 자

조선 사대부들의 목숨을 건 소송, 산송!
성리학적 이념과 효의식을 지키기 위한 소송이 온 나라를 뒤흔들다


2010년,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간에 250년이나 끌어온 소송이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명망 있는 두 가문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하며 조정을 어지럽히자 영조는 이들을 직접 심문해 형장을 치고 귀양까지 보냈다. 그러나 두 집안은 죽음을 직면한 상황에서도 서로의 뜻을 굽히지 않고 길고긴 다툼을 이어갔다. 대체 이들은 무엇 때문에 왕의 진노까지 사면서 250년 동안 싸움을 계속한 것일까?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간의 소송의 원인은 묏자리였다. 파평 윤씨 집안에서는 먼 조상인 고려 재상 윤관의 묘 위치를 잃어버려 옛 기록을 토대로 그의 묘를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윤씨가에서 경기도 파주에서 묘갈(墓碣, 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 두어 쪽을 발견해 윤관의 묘지 위치를 재확인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위쪽에 청송 심씨 심지원의 묘가 위치했다. 윤씨가에서는 심씨가에 심지원 묘의 이장을 요구했고, 이에 심씨가에서는 백여 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수호해왔으니 이장할 수 없다고 맞선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선 윤씨가와 심씨가. 이들의 분쟁을 중재하고자 임금까지 나서지만, 단순히 묏자리 선점 문제가 아니라 조상묘를 수호하고자 하는 위선의식(爲先意識)과 가문의 사회적 위상 그리고 명예가 걸린 문제였기에 집안의 모든 구성원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소송은 대를 이어 계속된다. 이처럼 분묘 및 분묘 주변의 산지를 놓고 일어난 소송을 산송(山訟)이라 한다.
그동안 고문서를 통해 조선 후기 사회 문제 및 민인(民人)의 소통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연구해온 조선대학교 사학과 김경숙 교수는 『조선의 묘지 소송』에서 ‘산송’을 통해 조선 후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치열하게 산송에 임했는지를 좇고, 이를 통해 친족질서의 변동, 사회경제적 변동, 신분질서의 동요, 향촌 사회 구조의 변화 등 조선 후기 사회상을 종합적으로 읽어나간다.

조선은 유교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로서 양반 사대부가 드러내놓고 경제 활동을 하거나 소송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때문에 토지나 노비를 매매할 때도 노비를 대리인으로 내세웠으며, 청원서나 소장도 노비 이름으로 제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산송은 달랐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양반 사대부가 패싸움까지 벌이면서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명분과 체모를 중시하는 양반 사대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뿐만 아니라 상중에는 진행하던 소송도 모두 중지해야 하는데, 상중에도 유일하게 허용된 소송이 바로 산송이다. 오히려 분묘를 조성하는 과정, 즉 상중에 산송이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산송에 휘말린 양반 사대부는 상복을 입고 송정(訟廷, 소송이 진행되는 장소, 곧 오늘날의 법정)에 드나들었다. _머리말에서

조선시대의 대표 소송, 산송

여느 소송과 달리 산송은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에도 찾아볼 수 없고, 이웃하는 중국, 일본에도 없는 조선 후기 사회만의 특징적인 역사 현상이었다. 노비소송(奴婢訟), 전답소송(田畓訟)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사송(詞訟) 중 하나인 산송은 16세기 후반을 전후로 등장해 18·19세기에 이르면 양반 사대부가라면 이를 겪지 않는 집안이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발생한다. 게다가 보통 토지나 노비 매매시에 노비를 대리인으로 내세웠던 양반 사대부가 산송만큼은 직접 나설 정도로 적극적인 양상이었다. 왜 이렇게 양반 사대부들은 산송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일까? 왜 조선시대에 산송은 성행한 것일까?
그 해답은 유교 이념에 있다. 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삼은 조선 사회에서, 16세기 이래 성리학에 근거한 종법질서가 확립되며 부계의식이 강화되었고 유교식 상장례가 확산되어갔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조상의 분묘를 단장하고 묘역을 조성하는 일에 관심을 쏟게 된다. 하지만 두 집안의 분산(墳山, 묘를 쓴 산)이 인접한다 해도 각자 정해진 구역을 수호하면 그만일 텐데 왜 다툰 것일까? 이는 분묘의 규모 규정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전반을 아우른 법전인 『경국대전』에서 관직의 고하에 따라 분묘 범위를 차등한 규정과 『주자가례』의 본격적인 보급과 ‘좌청룡 우백호’ 즉 용호수호 규정의 인정으로 각각의 규정이 충돌하면서 다툼이 원만히 해결되지 못한 경우 소송으로 이어졌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풍수사상이 유행하면서 좋은 묘터를 찾아 나섰고, 장례를 마친 뒤에도 불길하다는 말을 듣거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빈번히 이장했다. 기껏 찾은 길지가 다른 사람의 분산을 침해하거나 주인 있는 산이거나, 국가의 금산일 때 등 사유가 있을 때는 다른 자리를 찾아야 했지만, 밤에 몰래 묻거나 봉분 없이 평평하게 만드는 등의 불법적인 투장도 감행했다. 방법이야 어떻든 일단 투장에 성공하면 묘를 다시 파내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족계를 결성하거나 촌락 공동체와 협력 체제를 구축해 불법적인 투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산송은 16, 17세기 유교적 상장례가 보급되고 종족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등장하기 시작했고, 18, 19세기 위선의식과 가문의식이 심화됨에 따라 격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와 동시에 18세기 후반 이후 신분질서가 동요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하층민에게까지 산송이 확산되었고, 산림 이용 문제도 산송에 반영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족층은 분산 수호를 위해 친족 단위의 자체적인 결속을 강화하고 조직 활성화를 통해 족적 연대를 강화하며 향촌 공동체와 협력함으로써 분산 수호를 실현하고 나아가 향촌 사회에서의 위상과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을 모색하였다. 결국 산송은 조선 후기 사회의 특징적인 역사 현상으로서, 조선 후기 사회의 관념과 가치관의 흐름, 친족질서의 변동, 사회경제적 변동, 신분질서의 동요, 향촌 사회 구조의 변화 등 조선 후기 사회상을 종합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산송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나는 대립과 갈등은 역동적인 사회 변동의 한 반영이라 할 수 있다. _본문에서

묘를 묻으려는 자, 묘를 지키려는 자
무덤을 둘러싼 싸움은 계속된다


여느 소송과 달리 산송은, 두 분묘의 위치와 선후 관계 등을 따져서 묘를 파낼지 그냥 둘지만 결정하면 될 정도로 소송의 이유가 명백했다. 하지만 판결이 내려진 뒤 갈등은 오히려 심해졌다. 유교 사회에서 분묘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취급해서 타인의 분묘를 파내거나 훼손하면 살인죄를 적용해 엄중히 처벌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승소했다 해도 직접 상대방의 묘를 파낼 수 없었고, 이런 상황을 잘 아는 투장자는 미적거리며 굴거 기한을 넘기거나, 동절기, 39부동총(풍수상 3월과 9월에는 분묘를 움직이지 않음), 농번기 등의 핑계를 대며 어떻게든 묘를 파내지 않고 버텼다. 이런 투장자의 핑계를 관에서도 허용했기 때문에 실제로 투장총을 파낼 수 있는 기간은 2월, 10월, 11월 등 3, 4개월 남짓이었다. 투장자는 이처럼 이런저런 핑계를 대기도 하였고, 묘를 파내는 척하면서 속임수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온갖 꼼수로 버티는 투장자 앞에서 금장자는 별 도리 없이 부지하세월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한 경우에는 관에서 직접 무덤을 파기도 했으나 거의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속 타는 금장자는 그저 끊임없이 관에 투장총을 파내줄 것을 요청하고, 상언과 격쟁 등으로 국왕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나라와 국왕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과정에서 남은 다량의 산송 관련 고문서가 그 당시의 상황을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한다. 소송 문서라고 하면 딱딱한 글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조선의 묘지 소송』에서 언급한 고문서를 읽어가다보면 옛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오는 듯 생생하다. 예를 들면, 시집간 누이의 묘를 파내려고 하면서 “저희는 차라리 누님의 죄인이 될지언정 조상의 죄인은 될 수 없고, 생질의 죄인이 될지언정 문중의 죄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항변하는 이들의 글을 읽노라면 극단적이긴 하지만 문중 중심의 종법의식과 위선의식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느끼게 해준다.

이번 새해에 성묘할 때 굴거한 곳을 자세히 살펴보니 분묘의 봉분을 제거하여 다시 평지를 만들고, 관은 꺼내지 않고 그 옆에 허빈(虛殯)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니라 시후가 장교와 중간에서 결탁하여 또 간악한 꾀를 부린 것입니다. 세상에 어찌 이렇게 법을 업신여기는 자가 있단 말입니까? 아침에 굴거하였다가 저녁에 다시 묻고 오늘 굴거하였다가 내일 다시 묻으니, 이러하면 법은 어디에 실시하고 기강은 어디에 펴겠습니까? 다시 장교에게 엄히 명하여 평장한 묘를 즉시 다른 곳으로 굴거케 하고, 대낮에 검을 휘두른 죄는 법전에 실려 있으니 법을 업신여기고 제 분수를 모른 죄를 살펴 엄히 형장을 가하고 멀리 유배 보낼 것을 처분해주실 일입니다. _본문에서

오늘날의 관점으로 볼 때 산송이 ‘명당’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조선시대의 유교적 택지관은 조금 달랐다. 풍수상 명당을, 길지에 부모를 묻어 부귀영달을 구하려는 의식이라 한다면, 유교에서는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수개월 동안 장례를 치르지 않고 시신을 방치하는 것을 예법에 어긋나며 의리를 해친다고 비판했다. “묘터를 점치는 것은 땅의 좋고 나쁨을 가리키는 것이지, 음양가(陰陽家)가 주장하는 화복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부모와 자손은 동기(同氣)이기 때문에, 저쪽이 편하면 이쪽도 편하고 저쪽이 위태로우면 이쪽도 위태로운 것”일 뿐이었다. 이처럼 산송은 자신의 평안을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조상에 대한 도리의 문제였고, 나아가 성리학적 이념과 효의식이라는 조선 후기의 사회적 구조와 특성이 응축된 산물이었다.
조선시대에 불교식 화장 문화가 유교식 매장 문화로 전환되면서 분묘의 중요성이 증대했다면 오늘날엔 화장 문화가 다시금 확산되고 종법질서가 해체되면서 납골당 등을 둘러싸고 새로운 양상의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삶과 죽음,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무덤이라는 상징. 그것은 시대의 흐름과 이념에 따라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날지는 몰라도 갈등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앞으로 어떤 양상의 갈등이 발생할지 『조선의 묘지 소송』이 그 해답을 찾는 과정의 단초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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