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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칼럼

FIDES ET RATIO

by 이덕휴-dhleepaul 2022. 11. 10.

신앙과 이성
FIDES ET RATIO

[차 례]

서론: “너 자신을 알라”

제1장 하느님 지혜의 계시
제2장 알기 위하여 믿는다
제3장 믿기 위하여 이해한다
제4장 신앙과 이성의 관계
제5장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교도권의 입장
제6장 철학과 신학 사이의 협력
제7장 오늘날 요구되는 과제들

결론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속에 진리, 곧 당신 자신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남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또한 자기 자신에 관한 충만한 진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출애 33,18; 시편 26,8-9; 62,2-3; 요한 14,8; 1요한 3,2 참조).

서론: “너 자신을 알라”

    1.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인류가 진리(veritas)를 추구하기 시작하여 점점 더 깊이 투신하여 왔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자의식(conscientia)이라는 지평 안에서 펼쳐져 온 여정으로서, 인간이 실재와 세상을 알면 알수록 더욱 자신의 독특성을 깨닫게 되고, 또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절박해지는 사물들과 그 존재의 의미를 묻게 되는 그런 여정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식의 대상이 모두 우리 삶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델피(Delphi) 신전(神殿)의 문설주에 새겨져 있는 “너 자신을 알라(Gnoti seauton)!”는 권고는, 다른 피조물들과는 구별되는 자신들의 모습을 추구하는 인간 존재자, 곧 ‘자기 자신을 아는’ 존재자들에게는 최소한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기본 진리를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고대 역사를 잠시 훑어보더라도, 세계의 여러 구석에서 상이한 문화 전통 속에서 인간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근본적 질문들, 곧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도대체 악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이승살이가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등의 질문들이 어떻게 동시에 솟아날 수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이스라엘(Israel)의 거룩한 책들, 「베다」(Veda)와 「아베스타」(Avesta), 공자(孔子)와 노자(老子)의 저술들, 그리고 티르탄카라(Tirthankara)와 부처[佛陀]의 설교들 속에서 발견하고, 또 호메로스(Homeros)의 시와 에우리피데스(Euriphides)와 소포클레스(Sophocles)의 비극에서는 물론, 플라톤(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철학 작품들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정신을 언제나 압박해 온 의미 탐구(inquisitio de sensu)라는 공통의 원천으로부터 솟아나는 질문들입니다. 사실, 이 문제들에 어떻게 대답하느냐가 사람들의 인생 항로를 결정짓게 됩니다.

    2. 교회도 이 발견의 역사에서 국외자가 아닙니다. 아니,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교회는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인간 생명에 관한 궁극적 진리라는 선물을 받은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심을 세상에 선포하는 복음 전파의 길을 달려 왔습니다. 인류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봉사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특별한 방식으로 진리의 봉사(veritatis diaconia)라는 매우 특별한 책무를 자임하고 있습니다.1) 이 사명은 한편으로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진리에 이르려는 인류의 투쟁의 동반자로 만들고,2)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 공동체에 (비록 모든 도달된 진리가 하느님의 궁극적 계시와 더불어 나타나게 될 진리의 충만을 향한 한 걸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선포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1고린 13,12).

    3. 남녀 인간들은 진리를 더욱 많이 알게 되어 그들의 삶이 더욱 인간다워지도록 만들 수 있는 일련의 원천들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런 원천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생의 의미를 묻고 그 답을 모색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철학(philosophia)입니다. 그렇다면 철학은 인간의 가장 고상한 과제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 어원에 따르면, 철학이라는 용어는 ‘지혜에 대한 사랑(amor sapientiae)’을 의미합니다. 인간 존재자가 사물들의 이유와 그 목적에 관하여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을 때에 시작되어 자라난 철학은 진리를 향한 열망이 인간 본성 그 자체의 일부라는 것을 다른 모습과 형식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물들이 왜 지금 있는 모습으로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것은 인간 이성의 타고난 속성입니다. 그러나 차츰 드러나게 되는 그 답은 상이한 여러 인간 문화들이 얼마나 서로 상보적(相補的)인지를 밝혀 주는 지평 안에 설정되게 됩니다.
    서양 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미친 철학의 강력한 영향력은 그것이 동양에서 발견되는 인간 생명에 대한 이해 방식들에도 미친 영향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각 민족은 고유하게 타고나는 지혜의 씨앗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진정한 문화적 보물로서 진정 철학적인 형식들로 발전시킬 길을 모색하는 데로 기울게 됩니다. 그 한 가지 예는, 오늘날 사회 생활을 규제하는 데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법 체계들에 영감을 주어야 한다는 요청들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기본적인 철학적 지식의 형식입니다.

    4. 그럼에도, 하나의 용어가 다양한 의미를 감추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비적 명료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인생의 궁극적 진리를 발견하려는 열망으로 추동되어 자기 자신을 좀더 잘 이해하여 자기 실현을 진전시킬 수 있게 해 주는 지식의 보편적 요소들을 취득하고자 추구하고 있습니다. 지식의 이 근본적 요소들은 창조에 대한 명상으로 그들 안에 일깨워진 경이(admiratio)로부터 솟아납니다. 곧 인간 존재자들은 그들 자신을, 모두 공동 운명을 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세상의 일부로서 발견하면서 경이를 느낍니다. 그런데 여기서 늘 새로운 인식의 영역을 발견하도록 이끌 여정이 시작됩니다. 경이 없이는 남녀 인간들은 활기 없는 일상 속으로 매몰될 것이고, 차츰 진정한 인격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철학 작업을 통해서 인간 지성에 고유한 사변 능력은 종교적 사고 방식을 산출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주장들의 논리적 일관성과 그 내용의 유기체적 단일성을 통해서 진정한 사고 체계들을 산출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역사에서 충분히 입증되는 것처럼, 이것은 간혹 하나의 단일 체계를 철학 전체와 동일시하려는 유혹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들은 자신의 단편적이고 불완전한 관점을 모든 실재에 대한 완벽한 해석인 것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철학적 교만(superbia philosophica)’임에 틀림없습니다. 결국, 모든 철학 체계(corpus)는,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한 언제나 마땅히 최대한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유래되어 나오고 또 마땅히 그것에 충실하게 봉사해야 하는 철학적 탐구(cogitatio)의 우위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시대가 변하고 지식이 증대되기는 했지만, 사상사 전체 안에서 철학적 통찰의 핵심을 분별해 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예컨대 모순율, 목적성과 원인성, 그리고 신, 진리, 선을 인식할 능력을 갖추고 있는 자유롭고 영리한 주체로서의 인격 개념 등을 깊이 고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나누는 근본적인 도덕 규범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들은 모두 상이한 학파들을 넘어 인류의 영적(정신적) 유산이라고 판단되어야 할 지식 체계가 실존한다는 몇 가지 지적들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우연히 어떤 함축적 철학(philosophia implicita)을 가지게 되어 그 결과로 우리가 모두 (비록 일반적이고 비성찰적인 방식으로이기는 하지만) 이 원리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정확히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는 모두에게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지식은 상이한 철학 학파들에 대하여 일종의 척도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일단 이성이 보편적인 생명의 제일원리들을 성공적으로 직관하고 정형화시키고 그것들로부터 논리적이고 윤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결론들을 끌어 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이성(ratio recta)’ 또는 고대인들의 표현대로 ‘orthos logos’라고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5. 교회는 사람들의 생활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 줄 목표에 도달하도록 추동하는 이성의 노력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철학 안에서 인간 생명에 관한 근본적 진리들을 알게 해 주는 길을 봅니다. 동시에 교회는 철학을,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하고 복음의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달하는 데 필수불가결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선임자들의 유사한 노력을 계승하여 인간 이성의 이 특별한 활동에 관하여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특히 오늘날 궁극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자주 등한시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성찰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근대 철학(philosophia moderna)은 분명 인간에 관하여 주의를 집중시킨 위대한 공로가 있습니다. 이 출발점에서부터 인간 이성은 여러 가지 질문을 통하여 좀더 알고 싶은 열망과 더 깊이 알고 싶은 바람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복잡한 철학 체계들은 이렇게 형성되었고, 다양한 지식 영역들에서 풍부한 결실들을 내고 문화와 역사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인간학, 논리학, 자연 과학, 역사, 언어학 등 모든 지식 세계는 이런저런 식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취된 긍정적 결과들이, 인간 이성이 배타적으로 인간의 주체성 탐구에만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남녀 인간들이 언제까지나 자신들을 초월하는 진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저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면 개개인들은 변덕에 내맡겨지게 되고, 인격으로서의 그들의 지위라는 것은, 기술이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한다는 그릇된 믿음에 입각하여 본질적으로 실험적 소여들에 기초를 둔 실용적 척도들로써 판단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성은 진리를 향한 인간의 정위(定位)를 표명하는 대신에, 너무도 많은 지식의 무게 때문에 시들게 되고, 조금씩 눈길을 높이 올려 존재의 진리(veritas existentiae)를 명상하는 데로 올릴 능력을 상실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근대 철학은 존재에 관한 탐구를 포기하고 그 대신에 인간의 인식 활동에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인간의 진리를 인식할 능력을 활용하는 대신에, 근대 철학은 이 능력이 제한되고 제약되는 조건들을 강조하기를 더 선호했습니다.
    이것은 철학적 탐구를, 광범위하게 만연되어 있는 회의주의(scepticismus)의 수렁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든 여러 형태의 불가지론(agnosticismus)과 상대주의(relativismus)를 초래하게 하였습니다. 최근에는 오래도록 확실하다고 믿어져 온 진리들마저도 평가 절하하려는 경향을 가진 여러 사상 조류들이 솟아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입장들의 정당한 다원성이, 모든 입장이 다 똑같이 타당하다고 가정하는 데 바탕을 두고 있는 무차별적인 다원주의(pluralismus)에 양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진리에 대한 신뢰의 결핍을 드러내 보여 주는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증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심지어는 동양에 기원을 둔 특정 생명관들조차도, 진리의 배타적 특성을 부정하고 진리가 서로 모순되기까지 하는 다양한 가르침들 안에서 동등하게 드러난다고 가정하는 데에서 이 신뢰의 결핍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모든 것은 그저 견해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환원되고, 그저 망망 대해를 표류한다는 감각이 만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철학적 사고가 인간 생명의 실재와 그 표현 형식들에 가까이 다가가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은 또한 동시에 인격적 실존, 존재, 그리고 신에 관련된 진리에 대하여 근본적 물음을 던질 줄 모르는 실존적, 해석학적, 또는 언어 철학적 주제들을 추적하려는 경향을 보여 왔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비단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남녀 인간들 가운데서도 인간 존재자의 위대한 인식 능력에 대한 불신의 태도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위장된 겸손으로 단편적이고 잠정적인 진리들로 만족한 채, 더 이상 인간적이고 인격적이며 사회적인 실존의 의미와 그 궁극적 기초에 관하여 묻지 않고 있습니다. 요컨대 철학이 이런 질문들에 관한 결정적인 답을 제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점점 위축되고 있습니다.

    6.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담지자로서의 자신의 전문성을 확신하고서, 진리에 대하여 성찰할 필요를 재확인하는 바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진리를 밝히 드러낼”(2고린 4,2) 사명을 함께 지고 있는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과, 진리의 다양한 측면들을 탐구할 의무를 지고 있는 신학자와 철학자들,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서한을 보내기로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 기회에 참된 지혜에 이르는 길을 제공함으로써,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 확실한 길을 따라 걷는 가운데 그 수고에 대한 휴식과 정신적인 보람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주교들이 “하느님께서 가르치신 가톨릭 진리의 증인”이라는3)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강조 때문에, 이 과제를 짊어지는 것이 저의 의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증언하는 것은 우리 주교들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직무에 실패하지 않으려면 이 과제를 거절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진리를 재확인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동시대인들에게 우리의 인식 능력에 대한 진정한 신뢰를 회복시켜 주는 것은 물론, 철학이 그 고유의 충만한 품위를 복원·발전시키도록 촉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성찰들을 쓴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저는 지난번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에서 “현대의 여러 여건들 속에서 왜곡되거나 부정될 위험에 처해 있는 가톨릭 교리의 기본 진리들”에 대해4) 주의를 환기시킨 바 있습니다. 이번 회칙에서는 진리 자체라는 주제와, 신앙과의 관련 속에 있는 그 기초에 관하여 초점을 맞출까 합니다. 왜냐하면, 급변하는 복잡한 현대가 특히 미래를 걸머질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정당하게 참조할 기준점이 없다는 느낌을 남길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위한 기초의 필요는, 일시적인 것들이 가치 있다고 주장되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가능성이 의문에 처해지게 되는, 명백한 전망의 부재에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때에는 더욱 절박한 것이 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비틀거리며 심연의 끝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런 일이, 자신들의 사고에 문화적 표현을 주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진리를 찾지 않고, 무엇이 과연 인생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지를 인내롭게 묻는 수고 대신에 빠른 성공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생겨나기도 합니다. 철학은 진리 탐구에의 끊임없는 호소와 더불어 사상과 문화를 형성해야 하는 커다란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본연의 소명을 회복하기 위하여 단호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저는 이 주제에 관한 성찰들을 보낼 필요와 의무를 느꼈고, 그래서 그리스도교 시대가 열린 이래 세 번째 맞는 천년기(tertium millennium)의 새벽에 인류가, 그에게 맡겨진 위대한 천품들에 대한 분명한 감각을 가지게 되고, 또 새로운 용기를 내어 그 역사가 일부를 이루는 구원 계획을 수행하는 데 투신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제1장 하느님 지혜의 계시

    예수님: 아버지의 계시자

    7. 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특징짓는 것은, 교회 자신이 하느님께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어떤 소식의 담지자(2고린 4,1-2 참조)라는 뚜렷한 자각입니다. 교회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지식은 교회 자신에 대한 명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받아들인 하느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1데살 2,13 참조). 우리의 신앙 생활의 시원에는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모습을 드러내는 독특한 만남이 있습니다(1고린 2,7; 로마 16,25-26 참조).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의 신비를 기꺼이 알려 주시려 하셨으며(에페 1,9 참조), 이로써 사람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 하셨습니다.”5) 이 은혜로운 자발성은 하느님에게서 나와 남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움직여 갑니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알려지기를 바라십니다. 인간 존재자가 하느님께 관하여 가지게 되는 지식은 인간 정신이 인생의 의미에 관하여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성시켜 줍니다.

    8.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헌장’(Dei Verbum)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헌장 ‘하느님의 아드님’(Dei Filius)의 가르침을 거의 글자 그대로 따르면서, 또 트리엔트 공의회가 확정한 원리들을 설명하면서, 신앙 이해(intellectus fidei)의 오랜 역사의 여정을 따라 계시를 성서의 가르침과 교부들의 전통에 비추어 성찰하고 있습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부들은 하느님 계시의 초자연적 특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합리주의자들은 널리 퍼져 있던 그릇된 주장들을 토대로 신앙을 공격하고, 이성의 자연적 역량의 결실이 아닌 다른 지식의 가능성을 부인하였습니다. 이것은 공의회가, 인간 이성에 고유한 지식을 넘어가는 신앙에만 고유한 지식이 있음을 힘있게 재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 이성은 그럼에도 그 본성상 창조주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 자신에 기초를 두고 있는 진리를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속이시지도 또 속이기를 원하시지도 않기 때문에 그 진리는 어느 진리보다도 더 확실합니다.6)

    9.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철학을 통해서 알게 된 진리와 계시 진리가 동일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상호 배타적인 것도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원천에서뿐만 아니라 그 대상에서도 구별되는 두 가지 질서의 인식이 있습니다. 그 원천에서는, 자연적 이성을 통해서 아는 것이 다르고, 초자연적인 신앙을 통해서 아는 것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서는, 자연적 이성이 취득할 수 있는 것들 외에도,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서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지 않는다면 결코 알려질 수 없는 신비들이 있습니다.”7) 하느님 자신의 증언에 바탕을 두고 초자연적 은총의 도움을 받고 있는 신앙의 인식은, 감각 지각과 경험에 의존하여 지성의 빛만으로 인식을 취득하는 철학적 인식과는 다른 질서에 속하는 인식입니다. 철학과 과학은 자연 이성의 질서 테두리 안에서 작업하지만, 성령께서 조명하시고 인도하시는 신앙은 구원의 소식 안에서, 하느님께서 역사 속에서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고자 하신(1요한 5,9; 요한 5,31-32 참조) “은총과 진리의 충만”(요한 1,14 참조)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10.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예수님을 계시의 주체로 명상하는 가운데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 계시의 구원적 성격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골로 1,15; 1디모 1,17 참조) 이 계시로써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출애 33,11; 요한 15,14-15 참조), 인간과 사귀시며(바룩 3,38 참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십니다. 이 계시 경륜은 서로 긴밀히 결합된 행적과 말씀으로 실현됩니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업적들은 가르침과 말씀들로 표현된 사실들을 드러내고 확인하며, 말씀들은 업적들을 선포하며 그 안에 포함된 신비들을 밝혀 줍니다. 이 계시를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 구원에 관한 심오한 진리가 중개자이시며 동시에 모든 계시의 충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밝혀집니다.”8)

    11.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시는 시간과 역사 안에서 전해집니다. “때가 찼을 때”(갈라 4,4)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화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난 다음에, 저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시간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9) 강력하게 재천명할 의무감을 느낍니다. 창조와 구원의 모든 위업이 빛나게 되는 것은 바로 시간 안에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아드님의 육화 사건과 더불어 우리의 삶이 벌써 지금도 장차 올 시대의 충만을 미리 맛볼 수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히브 1,2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맡겨 주신 당신 자신과 당신의 생명에 관한 진리는 시간과 역사 속에 잠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자렛 예수님의 신비 속에서 한 번이면서 결정적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계시 헌장’은 이 점을 웅변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신 후, ‘마지막 이 시대에 와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말씀이신 당신 아드님을 파견하셨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인간 가운데 사시며 인간에게 하느님의 참모습을 알려 주심으로(요한 1,1-18 참조) 모든 인간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혈육을 취하신 말씀이시며 ‘인간들에게 파견되신 인간’이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며’(요한 3,34), 아버지께서 맡기신 구원의 임무를 완수하신 분이십니다(요한 5,36; 17,4 참조). 그래서 그분을 보는 이는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요한 14,9 참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 현존과 출현으로,곧 말씀과 업적, 표징과 기적으로, 특별히 당신의 돌아가심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시어, 마침내 진리의 성령을 보내심으로 계시를 완수하시고 하느님의 증거로 확고하게 하셨으니,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어 우리를 죄와 죽음의 암흑에서 구원하시며 영원한 삶으로 부활시키시기 위한 것입니다.”10)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에게 역사는 성령의 끊임없는 활동으로(요한 16,13 참조) 계시 진리의 내용이 충만히 표현될 수 있도록 따라 걷는 여정이 됩니다. 이것은 바로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는 ‘계시 헌장’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그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완성될 때까지 세기에 걸쳐 하느님 진리의 충만(완전한 이해)을 향하여 꾸준히 나아갑니다.”11)

    12. 그러므로 역사는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보게 되는 장(場)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고 아주 손쉽게 증명할 수 있는 것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떠나서는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마주치는 일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느님 아드님의 육화 사건에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 혼자의 힘으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지속적이고 결정적인 종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곧 영원한 것이 시간 속에 들어오고, 전체가 부분 속에 감춰지며, 하느님께서 인간의 얼굴을 하시고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전해진 진리는 더 이상 어떤 특정 장소나 문화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그것을 인간 삶을 위한 절대적으로 타당한 의미의 원천이 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남녀 인간에게 제공됩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아버지께 이르는 통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첫 번째 아담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던 신적인 생명을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로마 5,12-15 참조). 이 계시를 통하여 자신의 삶과 역사의 목표에 관한 궁극적인 진리가 남녀 인간들에게 제시되었습니다. ‘사목 헌장’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혈육을 취하신 ‘말씀’의 신비를 떠나서는 인간의 신비가 참되게 밝혀지지 않습니다.”12) 그 밖의 다른 관점을 통해서는, 인격적 실존의 신비는 불가해한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픔, 무죄한 사람들의 고통, 죽음 등과 같은 극적인 물음들에 대해서는, 만일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로부터 흘러 나오는 빛 속에서가 아니라면 인간이 다른 어디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신비 앞의 이성

    13. 그럼에도 계시란 결국 신비(mysterium)를 간직한 채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아버지의 너그러우심을 계시하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비밀스러운 사정들을 가르치시러 오셨기 때문입니다.13) 그러나 우리가 보는 하느님의 얼굴은 언제까지나 단편적이고 우리 이해 능력의 한계 때문에 위축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오직 신앙만이 그 신비를 올바로 꿰뚫어 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공의회는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신앙의 복종(oboedientia fidei)’을 드러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14) 이 짧지만 함축성 있는 언명은 그리스도교의 근본 진리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이란 하느님께 드리는 순종적인 응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에게서 그분의 신성, 초월성, 절대적 자유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알려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절대적 초월성을 지니시는 당신의 권위로써 당신께서 계시하시는 내용의 신빙성의 원천이시기도 함을 보증해 주십니다. 그리고 남녀 인간들은 신앙으로써 하느님의 이 증언에 동의(assensus)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 진리를 보증하시는 분이 하느님 자신이시기 때문에 계시되는 그 진리를 충만히 그리고 온전히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녀 인간들은, 그들에게 선물로서 주어지고 인격적 관계의 맥락 속에 설정되어 이성이 그것을 향해 개방적인 자세로 그 깊은 의미를 포용하도록 촉구하는 이 진리에 대해서 아무런 권리 주장도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교회는 언제나 하느님을 신뢰하는 행위를, 그 사람 전체를 사로잡게 되는 근본적인 결단의 순간이라고 간주해 온 것입니다. 그 행위 속에서 지성과 의지는 그 영적 본성을 드러내고, 또 그 주체가 자신의 자유(libertas)를 충만하게 실현시키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해 줍니다.15) 자유가 단지 신앙 행위의 일부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자유는 절대적으로 요청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 자신의 자유를 개개인이 최대한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달리 표현해 보자면, 자유는 하느님을 거슬러 내리는 결단들 속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기 실현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바로 그 실재를 향해서 마음을 열기를 거부하는 것이 어떻게 진정한 자유의 실행일 수 있겠습니까? 남녀 인간들은 신앙 행위보다 더 중요한 어떤 행동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자유가 진리의 확실성에 도달하고 그 진리 안에 살기로 결단 내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신앙 안에서입니다.
    인간 이성이 신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도와 주고 있다는 표지(signum)들을 계시 자체가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표지들은 진리 탐구를 새로운 깊이로 안내하고, 마음이 그 자발적인 탐구에서 이성 자신의 방법을 열정적으로 사용하여 신비 속으로 파고들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이 표지들은 또한 이성이 그것들의 표지로서의 지위를 뛰어넘어 그것들이 담지하고 있는 더 깊은 의미를 포착할 수 있도록 자극하기도 합니다. 그것들은 (마음이 그것을 향해 이끌리고, 또 주어지는 바로 그 표지들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감추어진 진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계시의 성사적(sacramentalis) 성격, 특히 성체성사의 표지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표시하는 것과 표시되는 것 사이의 나뉠 수 없는 단일성이 그 신비의 깊이를 깨닫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현존하시고 살아 계시며 당신의 영을 통하여 작용하고 계십니다. 성 토마스(St. Thomas de Aquino)는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질 세계 넘어서니, 감각으론 알 수 없고, 신덕만이 믿게 한다. 실물 아닌 표징들인, 빵과 술의 형상 안에, 놀랄 신비 감춰 있네.”16) 철학자 파스칼(B. Pascal)도 성 토마스를 반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그분의 진리도 통속적인 사고 방식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또 역시 성체도 다른 통속적인 빵들과 같은 모습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17)
    요컨대, 신앙에 고유한 지식은 신비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보여 줌으로써 신비를 더욱 드러내 줄 뿐입니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 주는 그 계시로써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이 높이 불리었음을 밝혀 주셨습니다.”18) 그것은 삼위일체의 생명의 신비에 참여시키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19)

    14. 제1차 및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은 또한 철학적 탐구를 위해서도 참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줍니다. 계시는, 인간 실존의 신비를 깨우치는 데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하나의 기준을 역사 속에 설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인간의 정신으로는 결코 다 깨칠 수 없고 다만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향해 끝없이 소급해 올라갑니다. 이 두 개의 지점 사이에서 이성은 오직 하느님의 무한한 신비 앞에서만 한계를 인정하게 되는 자신의 고유한 탐구와 이해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인간의 마음을 중단 없이 노력하도록 분발시키는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진리를 우리의 역사 안에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이성이 끊임없이 자신의 인식 단계를 조금도 남김없이 최대한 발휘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확장하도록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더욱 깊이 성찰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결실 풍부하고 중요한 정신들 가운데 하나, 곧 철학과 신학에 공통의 모범이 되는 성 안셀모(St. Anselmus)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 이 캔터베리의 대주교는 그의 「대어록」(對語錄, Proslog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자주 그리고 집중적으로 명상하면서 저는 가끔 제가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때에는 그것이 제 생각을 완전히 벗어나, 결국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그것에 대한 탐구를 포기하고 싶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이 온통 제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한, 제가 유용하게 얻을 수 있는 다른 문제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래서 저는 그 생각을 완전히 뿌리뽑아 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 문제는 더욱 강렬하게 저를 사로잡는 것이었습니다. ……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이브의 보잘것없는 후예 가운데 하나인 제 비참한 모습을 굽어 살피소서! 저는 대체 무엇을 시작하였고 또 무엇을 성취했단 말입니까? 또 무엇을 목표로 삼았고, 얼마나 거기에 접근했단 말입니까?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기대했단 말입니까? …… 오 주님, 당신은 당신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한 그런 분이실 뿐만 아니라(non solum es quo maius cogitari nequit) 또한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보다도 더 크신 분이십니다(quiddam maius quam cogitari possit). …… 혹여 당신이 그러하지 않으셨더라면, 당신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생각해 낼 수 있었을 터인데,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20)

    15. 나자렛 예수님께 기초를 두고 있는 그리스도교 계시 진리는 모든 남녀 인간이 자신들의 삶의 ‘신비’를 포용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은 절대적 진리로서 인간 존재자들에게 그 피조물로서의 자율성과 그들의 자유를 둘 다 존중하면서도 그들이 초월적 세계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자유와 진리 사이의 관계는 완벽하고, 그래서 우리는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는 주님의 말씀의 충만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계시는, 남녀 인간들이 정신의 내재주의적 습성(mens immanentistica)의 압박들과 기술 지배적 논리(logica technocratica)의 옹색함 한가운데서 길을 헤쳐 나가려고 노력할 때, 진정한 길잡이가 되어 줍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사랑의 계획의 씨앗을 그 충만한 깊이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제공하신 궁극적 가능성입니다. 그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만일 그들이 그들 자신과 개인적 관심사들을 넘어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면, 정확히 그 진리의 길을 따라 그들 생명을 충만하고 조화롭게 소유할 가능성이 주어져 있습니다. 신명기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여기에 꼭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이 법은 너희로서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거나 미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법을 내려다 주지 않으려나? 그러면 우리가 듣고 그대로 할 터인데.’ 하고 말하지 말라. 바다 건너 저쪽에 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이 바다를 건너가서 그 법을 가져다 주지 않으려나? 그러면 우리가 듣고 그대로 할 터인데.’ 하고 말하지도 말라. 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1-14). 이 본문은 거룩한 철학자이면서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us)의 유명한 말 속에도 반향되어 있습니다. “바깥으로 나가 방황하지 말고, 당신 자신 안으로 돌아가십시오. 진리는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Noli foras ire, in te ipsum redi. In interiore homine habitat veritas).21)
    이 고찰들은 우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놓습니다. 곧 계시로써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진리는 인간 이성의 산물도 아니고 또 그것이 고안해 낸 어떤 논증의 귀결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거저 주어진 어떤 것으로서, 사람의 마음 속에 영감을 일깨우며, 그것을 사랑의 표현으로서 수용하려고 노력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계시된 진리는, 그분을 믿고 그분을 온 마음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만 유보되어 있는 저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신 직관(Dei visionis)의 한 예표로서 역사 속에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격적 실존의 궁극적 목적은 분명 신학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철학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 방법과 내용이 다름에도 이 두 학문은 신앙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결국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명상하는 충만하고 끝없는 기쁨으로 인도할 “생명의 길”(시편 15,11)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제2장 알기 위하여 믿는다

    “지혜는 모든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지혜 9,11)

    16. 성서는 신앙으로 얻어지는 지식과 이성으로써 얻어지는 지식이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놀랄 만큼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를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지혜 문학(Libri sapientiales)’입니다. 이 성서적 본문들에서 놀라운 것은, 만일 그것들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읽게 된다면, 그것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구현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문화와 문명들의 보화들도 함께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일부러 계획되기라도 한 것처럼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목소리들이 다시 들려 오고, 고대 근동 세계 문화들의 공통된 특성들이 유례없이 풍부하고 깊은 통찰들을 담고 있는 이 본문들 속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성서 저자가 현자(賢者)를 묘사하면서 우연히 그를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고 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따라 살고 그것을 옳게 새겨 깨우치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 속으로 지혜의 길을 찾고 그 신비를 깊이 묵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사냥꾼과도 같이 지혜를 뒤쫓고 지혜가 가는 길목을 지킨다. 그는 지혜의 창문을 엿보며 지혜의 문전에서 귀를 기울인다. 또 그는 지혜의 집 옆에 거처를 마련하고 지혜의 벽에 말뚝을 박아 지혜 가까운 곳에 천막을 치고 그 속에서 행복하게 산다. 그는 이렇게 지혜의 나뭇가지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자기 자녀들을 지혜의 보호 밑에 둔다. 그리하여 그는 지혜의 그늘로 더위를 피하고 지혜의 영광 속에서 살아간다”(집회 14,20-27).
    이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영감 받은 저자에게 지식을 향한 열망은 모든 사람의 공통 특성입니다. 지성은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간에 모든 사람이 지식의 “천 길 물 속”(잠언 20,5)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그리스 철학자들이나 이집트의 현자들처럼 추상적인 방식으로 세계와 그 현상들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떤 선량한 이스라엘 사람이 지식의 여러 종류들을 더욱 세분하고자 하는 근대 세계와 같은 방식으로 지식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말은 더 더욱 아닙니다. 그럼에도, 성서의 세계는 인식 이론에 제 나름대로의 독특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 성서 본문의 특징은, 이성의 지식과 신앙의 지식 사이에는 분해될 수 없는 깊은 통일성이 있다는 확신입니다. 세계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역사와 민족들의 운명을 포함해서 이성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관찰되고 분석되고 접근되어야 하는 실재들이지만, 그 과정에서 신앙이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이성의 자율성을 철폐하기 위해서라든가 그 활동 영역을 제한하기 위해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 존재자가 이 사건들 속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개입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세계와 역사의 사건들은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결코 깊이 있게 이해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내면의 눈을 날카롭게 해 주고 마음을 열어, 사건들의 흐름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 여기에 적합한 잠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속으로 제 할 일을 계획해도, 그것을 하나하나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시다”(16,9).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이성의 빛을 통해서 어느 길을 택할지를 알 수 있지만, 오직 신앙의 지평 안에서 그들이 추구해야 하는 올바른 정신을 갖추고서야 비로소 방해받지 않고 신속하게 그 목표에까지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성과 신앙은, 남녀 인간들이 적절하게 자기 자신과 세계 그리고 하느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위축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17. 이리하여 이성과 신앙을 어떤 식으로든 대립 구도로 몰고 가는 것은 근거 없는 일입니다. 그것들은 서로 상대방을 내포하고 있고, 각기 자기 고유의 활동 영역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잠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며 바로 이 방향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며, 일을 파헤치는 것은 임금의 영광이다”(25,2). 각기 다른 세계에서 하느님과 인간 존재자는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물의 기원이 놓여 있고, 그분 안에서 모든 신비의 충만이 발견되며, 바로 이 점에 그분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녀 인간들에게는 그들의 이성으로써 진리를 탐험할 과제가 주어지게 되고,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고상함이 성립됩니다. 시편 작가는 다음과 같이 기도할 때 이 모자이크 그림에 마지막 조각을 끼워 넣어 그림을 완성시키고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생각은 알아듣기 힘드오며, 헤아릴 길 없을 만큼 많사오이다. 세어 보자 하여도 모래보다 더욱 많고, 끝까지 닿는대도 도로 당신이오이다”(138,17-18). 알고 싶은 바람이 너무도 커서, 인간의 마음은 극복할 수 없는 한계 경험에도, 이제껏 해답을 찾지 못한 모든 문제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 너머에 놓여 있는 무한한 풍요로움을 갈망하게 됩니다.

    18. 그렇다면 우리는 이스라엘이 역사적 반성을 통해서 이성에게 그 신비에 이르는 통로를 열어 보여 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계시를 가지고, 이성으로써 도달해 보려고 헛되이 추구하던 모든 것의 깊이를 측량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더욱 깊은 형태의 지식에 바탕을 두어, 선민(選民) 이스라엘은, 만일 이성이 그 자신에게 충분히 진실하다면, 마땅히 기본적인 특정 규칙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규칙은, 인간 인식이 끝을 모르는 하나의 여정이라는 사실을 이성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규칙은 그런 길이 모든 것이 개인적 정복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자의 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으로부터 흘러 나오며, 세 번째 규칙은, 이성이 세상 통치 속에서 그분의 초월적 주권과 섭리적 사랑을 마땅히 인정해야 하는 ‘하느님 두려움(timor Dei)’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규칙들을 포기할 때 인간 존재자는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고 결국 ‘어리석은 자’의 처지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이 어리석음이 바로 인생에 대한 커다란 위협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들에 시선을 맞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도 모르고(잠언 1,7 참조), 자기 자신이나 주변 세계에 대하여 올바른 태도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느님은 없다.”(시편 13,1 참조)고 주장할 때, 그의 지식이 얼마나 빈약하며 또 사태의 충만한 진실, 그 기원, 그 운명 등으로부터 그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19. 지혜서는 이 주제를 좀더 밝혀 줄 수 있는 여러 중요한 본문들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서 저자는 당신 자신을 자연 속에서 계시하시는 하느님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고대인들에게서, 자연 과학의 탐구는 철학적 탐구와 광범위하게 일치되고 있었습니다. 인간 존재자들이 자기 지성으로써, “(하느님께서) 세계의 구조와 구성 요소의 힘을 알게 해 주셨고, …… 해가 바뀌는 것과 별들의 자리를 알게 해 주셨고, 동물들의 성질과 야수들의 본능을 알게 해 주셨다.”(지혜 7,17.19-20)는 것, 곧 그가 철학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성서 본문은 중요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 맥락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그리스 철학 사상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서 자연에 관해 추론하는 중에 인간 존재자가 하느님을 향해 올라갈 수 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그들을 만드신 분을 알 수 있다”(지혜 13,5). 이것은 인간 이성이라는 적절한 도구로써 읽게 될 때 창조주에 관한 지식으로 인도할 수 있는 놀라운 ‘자연이라는 책(liber naturae)’을 신적 계시의 첫 무대로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 존재자들이 자신들의 지성으로써 하느님을 모든 것의 창조주로 인정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할 수단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자유 의지와 죄악의 상태가 그 길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20. 이런 빛으로 바라보게 될 때, 이성은 조금도 과장 없이 제대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추론의 결과들은 사실상 옳지만, 이 결과들은 더욱 넓은 신앙의 지평 속에 놓여질 때에야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모두 주님께 달렸으니, 사람이 어찌 스스로 이루랴”(잠언 20,24). 구약성서에 따르면, 신앙은 이성이 알고자 하는 바를 올바로 얻게 하고, 그것을 모든 것이 진정한 의미를 얻게 되는 사물들의 궁극적 질서 속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줌으로써 이성을 해방시킵니다. 요컨대, 인간 존재자들은 신앙으로 조명될 때, 모든 것과 특별히 자기 실존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이성을 통하여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 저자는 정당하게 하느님 두려워함을 지혜의 시작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다”(잠언 1,7; 집회 1,14 참조).

    “지혜를 얻고 슬기를 깨쳐라”(잠언 4,5)

    21. 구약성서에 따르면, 지식은 단순히 인간 존재자, 세계, 그리고 역사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신앙과 계시 진리와의 불가결한 연관 관계까지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선민 이스라엘이 마주쳐야 했고 결단을 내려야 했던 도전들입니다. 이것을 자기 자신의 처지라고 생각하면서, 성서의 인간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과는 물론, 백성, 세계, 그리고 하느님과의 ‘접합점(coniunctum)’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계시를 통해서 그에게 다가온 신비에 대한 이 개방은 그에게는 결국 지혜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이성이 그 때까지는 감히 바랄 수도 없었던 깨달음이 하나의 가능성이 되는 그런 무한자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열쇠인 것입니다.
    성서 저자에게, 진리 탐구의 과제는, 일단 이성의 한계들에 부딪히게 될 때 나타나는 긴장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컨대 잠언이 신비스러운 하느님의 계획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데에서 오는 고생을 지적할 때에 발견하게 됩니다(30,1-6 참조). 그러나 아무리 많은 노력이 든다고 하더라도 신앙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아무리 의심의 시련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안 가 본 데 없이 다 찾아 헤매는 ‘탐험가들’(전도 1,13 참조)로 만드셨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 추구를 계속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의지하며,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된 모든 것을 언제 어디서나 찾아 내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22.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장에서, 우리가 지혜 문학의 통찰들을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철학적인 논거를 대중적인 방식으로 전개하면서, 깊은 진리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곧 ‘마음의 눈(oculi mentis)’은 피조된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을 매개로 삼아 하느님께서는 인간 이성 안에 당신의 ‘능력’과 ‘신성’에 대한 직관을 일깨우십니다(로마 1,20 참조). 이것은 인간 이성에게 그 자연적 한계를 거의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시는 셈입니다. 이성은 감각 소여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기 때문에 감각적 지식으로 한정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감각을 통해서 제공된 소여들을 분석하고 추론함으로써, 모든 지각적인 실재의 기원에 놓여 있는 원인에 이를 수 있습니다.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이 중요한 본문이 인간에게 형이상학적 탐구 능력이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에 따르면, 이성이 어려움 없이 감각 소여들을 넘어 모든 사물의 기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원래의 창조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나 남녀 인간이 자신들을 창조하신 분과의 관계에서 감히 충만하고 절대적인 자율을 누리겠다고 나서는 불순종 때문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이 창조주 하느님께 이르는 통로는 위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인간 존재자를 그 한가운데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2,17)가 서 있는 에덴 동산으로 데려가셨다고 말할 때에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는 인간의 조건입니다. 이 상징의 의미는 너무도 명백합니다. 곧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분별하고 결정할 위치에 서 있지 못하고, 부득이 상급 권위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맹목적인 교만(superbiae caecitas)이 우리의 첫 조상들에게 자신들이 최고의 자율적인 존재자들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남녀 인간들은 모두, 인간 이성을 너무도 깊이 손상시켜서, 그 때 이후로는 충만한 진리 추구에 늘 심한 방해를 받게 되는 이 최초의 불순종의 포로들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인간의 진리 인식 능력은 진리의 원천이시며 기원이신 분께 등을 돌렸기 때문에 약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또한 인간의 사고가 죄악 때문에 얼마나 ‘공허한(vanae)’ 것이 되었고 인간의 추론이 얼마나 일그러져 거짓으로 기우는지를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로마 1,21-22 참조). 마음의 눈은 더 이상 명료하게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성은 점점 더 자기 자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은 이성을 스스로 유폐시킨 족쇄로부터 풀고 그 허약함으로부터 구해 내신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23.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철학에 대해서 한결같은 분별력을 갖추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신약성서, 그 가운데서도 특히 바오로 서한들에서,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하게 떠오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지혜(huius mundi sapientia)’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지혜 사이의 대립입니다. 계시된 지혜의 깊이가, 결코 저 진리를 충만하게 표현해 낼 수 없는 우리의 통상적인 사고 습관의 틀을 깨부숩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의 서두에서는 이 갈등이 날카롭게 대비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느님의 아드님은, 순전히 인간적 논거에 입각하여 실존의 의미를 적절하게 설명해 보려는 마음의 모든 시도가 좌절하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모든 철학에 도전이 되는 진정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아버지의 구원 계획을 순수 인간적인 논리로 환원시키려는 온갖 시도는 실패하게 됩니다. 사도는 힘주어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1고린 1,20) 지혜롭다는 사람의 지혜는 더 이상 하느님께서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시는지를 깨닫게 해 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요구되고 있는 것은 어떤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1고린 1,27-28). 인간적 지혜는 자기 자신의 나약함 속에서 그 강함의 가능성을 바라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곧바로,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합니다.”(2고린 12,10)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죽음이 생명과 사랑의 원천일 수 있는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구원 계획의 신비를 계시하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성이 ‘어리석다’고, ‘부끄럽다’고 간주하는 것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당시 철학자들의 용어를 사용하여,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1고린 1,28)라는 역설을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최고도로 압축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계시된 사랑이 거저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도는 철학자들이 하느님에 관해서 사색하는 데 사용하는 가장 급진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성은 십자가로 표상되는 사랑의 신비를 제거할 수 없지만, 그 십자가는 이성이 추구하고 있는 궁극적인 해답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의 지혜가 아니라, 사도 바오로가 진리와 구원의 척도로 제시하고 있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지혜는 그것을 제한하고자 하는 모든 문화적 한계를 철폐하고 그것이 담지하고 있는 진리의 보편성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성에게 얼마나 커다란 도전입니까? 그리고 이성이 이 지혜에 복종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유익이겠습니까? 철학은 그 자체로 인간 존재자가 진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자기 초월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도움을 받게 되면 그것은 ‘십자가의 어리석음(stultitia Crucis)’이, 사실은 자기 자신들이 고안해 낸 어떤 체계의 모래톱에 좌초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진리를 소유했다고 스스로 속이고 있는 자들에 대한 진정한 비판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신앙과 철학 사이의 연결 고리가 거기에 걸려 깨어질 수 있는 암초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그것들이 둘 다 진리의 끝없는 대양(大洋)으로 항해해 나가기 위한 전진 기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성과 신앙 사이의 경계를 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둘이 함께 만날 수 있는 공간도 보게 됩니다.




제3장 믿기 위하여 이해한다



    진리를 찾는 여정



    24. 사도행전에서 복음사가 루가는 사도 바오로가 선교 여행 중에 아테네에 갔던 일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철학자들의 도시는 여러 우상의 상들로 가득했습니다. 한 제단이 특별히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그는 이것을 복음 선포를 위한 공통의 기초를 다지기에 적합한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여러 모로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아테네 시를 돌아다니며 여러분이 예배하는 곳을 살펴보았더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Ignoto Deo)’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 온 그분을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사도 17,22-23). 이 출발점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이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것에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연설을 계속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 위에서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이 살아갈 시대와 영토를 미리 정해 주셨습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사도 17,26-27).
    사도는 교회가 언제나 소중히 여겨 온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인간의 마음 속 저 깊은 곳에는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열망하는 불씨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성금요일’의 전례에서는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 사실을 강력하게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사람이 주님을 찾아 만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하셨으니, 하느님을 안 믿는 이들이 신자들의 착한 행실을 거울삼아 주님 홀로 인류의 아버지이심을 고백하게 하소서.”22) 그러므로 인간 존재자가 취할 길이 있는데, 그것은 이성의 능력으로 시작하여 이 세상의 우연적인 것들을 넘어 무한을 동경하는 길입니다.
    남녀 인간들은 각기 다른 시대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들이 이 내밀한 열망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문학, 음악, 그림, 조각, 건축, 그리고 그들의 창조력을 발휘하는 다른 작업들을 통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탐구의 절박성을 선언하였습니다. 특별히 철학은 이 탐구를 자신의 고유 과제로 삼고, 독특한 수단과 학문적 방법들을 통해 이 보편적인 인간의 열망을 표현하였습니다.



    25. “모든 인간 존재자는 알기를 바랍니다.”23) 그리고 진리는 바로 이 열망의 고유 대상입니다. 일상 생활은 우리 각자가 우리 자신이 누구이고, 또한 단순한 견해들을 넘어 사물들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데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피조물들 가운데서 인간은 인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인식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고, 따라서 그가 지각하는 것들의 참된 진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인식하는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가려 내는 문제에 결코 진정으로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거짓임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그것을 배격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 진리를 찾아 낼 수 있다면 그들은 만족과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나는 속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그러나 속임수에 걸려들기를 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24) 사람은 독자적으로 진리와 거짓을 구분하고 사물들의 객관적 진실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출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특별히 과학적 영역에서 그토록 많은 물음과 탐구들을 낳았고, 최근의 세기들을 통해서 중요한 결실들을 내고, 인류 전체를 위해서 진정한 진보를 이끌어 냈습니다.
    이론적 영역의 탐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실천적 영역의 탐구입니다. 실천적 탐구(investigatio practica)란, 실행되어야 하는 선을 지향하는 진리 탐구를 의미합니다. 자유롭고 올바른 의지에 따라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데에서 인간 인격은 행복에 이르는 길로 접어들고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여기서도 역시 그것은 진리 문제입니다. 저는 이런 확신을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에서 강조한 바 있습니다. “자유 없이는 윤리도 있을 수 없습니다. …… 각 개인이 진리의 추구에서 자신의 길을 밟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에 앞서는 윤리적 의무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가 가진 더욱 중한 의무는 진리를 찾아야 하고, 나아가 한 번 알게 된 진리를 고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5)
    그러므로 각자의 생애에서 선택되고 추구된 가치들이 참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본질적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참된 가치들만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충만하게 실현시킬 수 있고 자신들의 본성에 충실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치들의 진리는 자기 자신 안에 움츠러듦으로써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저 진리를 초월적 차원에서 포착하도록 자기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발견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고 성숙하고 책임 있는 인격자로 자라나는 것은 본질적인 인간 조건입니다.



    26. 진리는 인간에게 처음에는 물음으로써 다가옵니다. 인생이란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얼핏 보면, 인간의 실존은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생의 의미에 관한 의문들을 가지기 위해서, 어리석은 내용들을 가르치는 철학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거나, 욥기에서 발견되는 자극적인 질문들에 호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일상적인 고통의 경험과, 이성으로 풀 수 없는 것같이 보이는 사실들의 배열만으로도, 의미 문제와 같이 극적인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증하기에 넉넉합니다.26) 더욱이 우리가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 우리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확실한 첫 번째 진리는 우리 죽음의 불가피성입니다. 이 당혹스러운 문제가 일단 제기되게 되면, 그 충만한 대답을 추구하는 일은 모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자신의 운명에 관한 진리를 알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우리 삶의 결정적인 끝인지, 아니면 그 너머에 어떤 다른 것이 있는지, 또는 내세(來世)라는 것을 희망할 수 있는 것인지 여부를 알고 싶어합니다. 소크라테스(Socrates)의 죽음이 철학에 결정적인 방향을 주었다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고, 또 지금은 그로부터 2000년 이상이 흘렀다는 사실 역시 못지않게 결정적입니다. 죽음의 사실에 직면해서 철학자들이 거듭거듭 이 문제를 제기했고, 그와 더불어 인생의 의미와 불멸성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27. 철학자이든 일반 대중이든 아무도 이 물음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선택하는 답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여부를 결정지을 것이고, 이것은 결정적인 탐구의 순간인 것입니다. 모든 진리는, 그것이 진리라면, 비록 그것이 전체적 진리가 아닐지라도 보편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만일 어떤 것이 참되다면 그것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도 참된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보편성을 넘어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탐구에 의미와 답을 줄 어떤 절대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의 토대 역할을 할 궁극적인 어떤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모든 질문에 종지부를 찍고 더 이상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는 최종적 설명,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설(hypothesis)들은 매혹적일 수 있지만, 우리를 충족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허용하든지 허용하지 않든지 간에, 우리 각자에게는 궁극적이라고 인정된 어떤 진리에, 곧 더 이상의 의문이 가능하지 않은 그런 확신을 주는 진리에 개개인의 실존이 닻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다가옵니다.
    여러 세기를 두고 철학자들은 이런 진리를 발견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하였고, 그 결과, 다양한 사상 체계들과 학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철학 체계들을 넘어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개인적인 확신과 경험들 안에서, 가족과 문화 전통 안에서, 또는 어떤 스승의 지도 아래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길에서, 자기 자신의 ‘철학’을 형성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비추고 있는 것은 진리의 확실성과 그 절대적 가치의 확실성에 도달하려는 바람입니다.



    인간적 진리의 여러 측면들



    28. 물론 진리 탐구가 언제나 투명한 것도 아니고 또 항상 긍정적인 결실들을 내는 것도 아닙니다. 이성의 자연적인 한계와 마음의 항구하지 못함이 때로는 어떤 사람의 탐구를 가리거나 비틀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진리는 또한 다른 관심사들의 무게 속에서 익사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진리를 보자 마자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가 요구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회피한다고 해도 진리는 아직도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삶이란 실상 결코 거짓, 불확실성, 속임수 위에 정초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실존이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공포와 불안의 위협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존재자를 ‘진리를 추구하는 자(ille qui veritatem quaeritat)’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29. 인간의 본성 속에 그토록 깊이 뿌리박고 있는 탐구의 열정이 완전히 헛되거나 무익하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로 해답의 씨앗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간 존재자들은 전혀 알지 못하거나 전적으로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탐구를 시작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답을 얻을 수 있다는 느낌만이 첫걸음을 떼어 놓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으로 과학적 탐구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과학자가 자신의 직관에 따라 어떤 현상에 대한 논리적이고 검증 가능한 설명을 추구하기 시작할 때, 그들은 처음부터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고, 좌절에 직면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자신들의 최초의 직관을 무익하다고 단정짓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당하게도 다만 아직 만족할 만한 답을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인 것들에 대한 진리를 탐구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에 대한 갈증은 인간의 마음 속에 너무도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억지로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의 실존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입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은 우리 각자가 얼마나 몇몇 근본적인 물음들의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으며, 또 어떻게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적어도 어렴풋한 해답들이 자리잡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이 해답들의 진리가 확신하고 있는 한 가지 이유는, 그것들이 많은 다른 사람들이 도달한 해답들과 그 본질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가 얻게 되는 모든 진리가 다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성취된 결과들의 총체는 인간 존재가 원칙적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줍니다.



    30. 그렇다면 잠시 간략하게라도 진리의 다양한 양태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다수의 진리들은 직접적인 자명성에 의존하고 있거나 아니면 실험을 통해서 확증됩니다. 이것은 일상 생활과 과학적 탐구에 고유한 진리의 양태입니다. 또 하나의 차원에 철학적 진리들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 지성의 사변적 능력들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진리들이 있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철학에 그 토대를 두고 있고, 여러 다양한 종교 전통들이 궁극적 물음들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는 해답들 속에서 발견됩니다.27)
    철학의 진리들은 직업적 철학자들의 때로는 일시적인 가르침들로 한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모든 남녀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철학자들이고, 자신들의 삶을 이끌고 갈 나름대로의 철학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인생의 의미라는 문제에 대하여 포괄적인 전망과 답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비추어서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 역정을 해석하고 행동을 제어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철학과 종교의 진리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진리 사이의 연관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철학의 지속적인 사실 한 가지를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31. 인간 존재자들은 외따로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정 안에 태어나고 가정 안에서 자라나며, 마침내 활동을 통해서 사회 속에 편입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언어와 문화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거의 본능적으로 믿게 되는 여러 진리들도 제공하는 전통들 속에 잠겨 태어나는 것입니다. 또한 인격적 성장이나 성숙은, 이 동일한 진리들이 의문에 부쳐지고 비판적 탐구 과정을 통해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중간 과정이 지나고 나면 이 진리들이 생활 체험의 결과로서, 또는 어떤 추론 덕분에 ‘회복’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인생에는, 개인적인 검증 절차를 거쳐서 취득하는 진리들보다는, 단순하게 믿게 되는 진리들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현대인의 생활이 그 토대를 두고 있는 무수한 과학적 발견들을 어느 누가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누가 있어, 세계 각지로부터 나날이 밀려오고 흔히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정보의 홍수를 개인적으로 조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인간적 지혜와 종교의 보화들을 낳는 경험과 사고의 방법들을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진리를 찾는 인간이 또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ille qui vivit alteri fidens)’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2. 믿음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성취한 지식을 신뢰하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긴장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한편, 믿음을 통하여 취득된 지식은 어딘가 불완전한 지식이어서 차츰 개인적인 증거 축적 작업을 통해서 완성되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한편, 믿음은 가끔 단순한 증거보다 인간적으로 훨씬 더 풍요롭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인격적인 관계를 내포하고 있고, 한 사람의 인식 능력을 가동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을 신뢰하고 친밀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더욱 깊은 능력을 가동시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상호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추구되는 진리가 일차적으로 경험적이거나 또는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추구되고 있는 것은 인격의 진리(personae veritatis), 다시 말해 인격의 본질과 인격이 깊은 내면으로부터 드러내는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적 완전성은 단순하게 진리에 대한 추상적인 지식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신뢰에 가득 찬 자기 증여라는 역동적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충만한 확실성과 안정을 얻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신뢰에 가득 찬 자기 증여에서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사람들 사이의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과 같은 믿음을 통한 지식은 진리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는 행위 속에서 남녀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선언하는 진리를 신뢰하게 됩니다.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예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실존에 관한 진리의 가장 안전한 증거자들인 순교자들을 즉각적으로 마음에 떠올리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안에서 자신들이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 어떤 것이나, 그 어느 누구도 이 확신을 그들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참기 어려운 고통이나 가혹한 죽음조차도 그들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발견한 진리를 포기하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까지도 순교자들의 증언은 계속적으로 흥미를 자아내고, 동의를 이끌어 내며, 그토록 경청되고 경쟁심을 자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말이 그토록 신임을 얻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저 깊은 밑바닥에서 지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온 진리라고 순교자들이 말할 때부터, 그들은 설득을 위해서 길게 논증할 필요가 없는 사랑의 증거를 제공합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안에 깊은 신뢰를 일깨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이미 느끼고 있는 것에 목소리를 부여하고, 우리가 표현할 힘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33. 그렇다면 우리는 한 걸음씩 문제의 실태를 살피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인간 존재자의 본성에 관한 진리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이 탐구는 단편적이고 경험적이며 과학적인 진리들 취득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사람들이 진정한 선익을 추구하는 개별적인 결단 행위들 안에 있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들의 탐구는 인생의 의미를 설명해 줄 그 이상의 진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직 절대적인 것에 이름으로써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탐구입니다.28) 타고난 사고 능력 덕분에 인간은 이런 종류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너무도 중대하고 필수적인 이런 진리는 이성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진리 자체의 진정성과 확실성을 보증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신뢰하는 동의를 통해서도 취득될 수 있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에게 내맡길 수 있는 능력은 가장 중요하고 호소력 있는 인간적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성도 역시 그 모든 탐구 과정에서 신뢰적 대화와 진지한 우정으로 지지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변적 탐구를 흐리게 할 수 있는 의심과 불신의 분위기는, 우정을 건전한 철학적 탐구에 가장 적절한 맥락 가운데 하나로 제안하고 있는 고대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말해 온 것들로부터, 남녀 인간들이 인간적으로 멈출 수 없는 탐구의 여정에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탐구이고, 그들이 자신을 내맡겨야 하는 인격에 대한 탐구입니다. 그리스도교 진리가 그들을 환영하며,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단순한 믿음의 단계를 넘어 나아가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 존재자들을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고, 더 나아가,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진정하고 일관된 지식을 제공하는 은총의 질서에 잠기게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은 인류를 향한 궁극적 호소를 인정합니다. 이 호소는, 우리가 열망과 동경으로 경험하는 것이 그 충만한 성취에 이르게 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호소입니다.



    34.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이 진리는 철학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진리들에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두 가지 인식 양식은 온통 충만한 진리로 이끌어 줍니다. 진리의 통일성은, 모순율이 분명하게 보여 주듯이, 인간 추론의 근본 전제입니다. 계시는 이 통일성을 확실하게 만들고, 창조의 하느님께서 또한 구원 역사의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과학자들이 신뢰하며 의존하는 사물들의 자연적 질서의 가지성과 합리성을 확정하시고 보장하시는 분이시며,29) 당신 자신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계시하시는 분은 동일한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자연적인 진리와 계시 진리의 이 통일성은, 사도 바오로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생생하고 인격적인 방식으로 구현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진리가 있을 따름입니다”(에페 4,21; 골로 1,15-20 참조). 그분은 만물이 그 안에서 생겨난 영원한 말씀(Verbum aeternum)이시고, 그분의 전 인격 안에서30)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육화된 말씀(Verbum incarnatum)이십니다(요한 1,14.18 참조). 인간 이성이 “미처 알지 못한 채”(사도 17,23 참조) 찾고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계시된 것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고 따라서 그분 안에서 그 충만을 발견하게 되는(골로 1,17 참조) ‘충만한 진리’(요한 1,14-16 참조)입니다.



    35. 이 광범위한 숙고들에 바탕을 두고, 우리는 이제 좀더 직접적으로 계시 진리와 철학 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계시를 통해 전해진 진리는 이성의 빛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이 관계는 이중의 고찰을 하게 만듭니다. 이 이중성만이 우리가 계시 진리와 철학적 학문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규정지을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먼저 역사 속에서의 신앙과 철학 사이의 연관 관계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것으로부터 몇 가지 원리들이, 인식의 두 질서 사이의 정확한 연관 관계를 정립하려는 시도에 유용한 기준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제4장 신앙과 이성의 관계



    신앙과 이성이 만나게 되는 주요 계기들



    36. 사도행전은 그리스도교의 선포가 처음부터 당시의 철학적 조류들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가 아테네에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몇몇 철학자들’과 토론을 벌였음을 알고 있습니다(17,18). 아레오파고에서 한 그의 연설에 대한 주석적 분석은 대부분 스토아 학파에 연원을 두고 있는 대중적 신념들에 대한 잦은 암시를 드러내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로부터 이해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말하는 데 그저 ‘모세와 예언자들’을 가리키기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하느님께 관한 자연적 지식과 각 사람 내면의 양심의 소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로마 1,19-21; 사도 14,16-17 참조). 이교도들의 종교에서는 이 자연적 인식이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로마 1,21-32 참조),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연설에서, 언제나 신화와 신비스런 예식들에 대립시켜서 신의 초월성에 대한 더욱 존중할 만한 관념들을 설정하고 있던 철학자들의 사상과 접촉점을 갖는 것이 더 현명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고전 철학의 주요 관심사들 가운데 하나는 신에 관한 인간의 관념들로부터 신화적인 요소들을 정화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 종교가, 다른 대다수의 우주론적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사물들과 현상들을 신격화시키기까지 하는 다신론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들의 기원과 우주의 기원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시도들을 초창기 시들을 통해서 표현하였고, 그래서 신들의 창조 이야기는 인간의 이러한 탐구에 대한 최초의 증거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의 아버지들의 과제는 이성과 종교 사이의 연관 관계를 해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점이 확대되어 보편적 원리들을 포괄하게 됨에 따라, 그들은 더 이상 고대의 신화들로 만족하지 못하고, 신들의 세계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합리적으로 정초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고대 전통들로부터 생겨나기는 했지만 보편적 이성의 요구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발전의 길을 열었습니다. 이 발전은 그들이 믿어 온 것들에 대한 비판적 자각을 취득하게 되었고, 신 개념이야말로 그 첫 번째 수혜자였습니다. 미신들의 진상이 밝혀졌고, 종교는 합리적인 분석으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정화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기초 위에서 그리스도교의 교부들이 고대 철학과 결실 풍부한 대화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을 새롭게 이해하고 선포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37. 그리스도교가 철학을 채용하게 된 과정을 추적하는 데,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의 다른 문화적 요소들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평가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영지주의(gnosticismus)입니다. 실천적 지혜이며 생활 교육으로 이해된 철학과, 완전한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해 유보되어 있는 더욱 고상하고 비의적(秘儀的)인 지식은 쉽사리 혼동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골로사이인들에게 경고할 때에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분명히 이런 비의적 성격의 사변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헛된 철학의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세속의 원리를 기초로 인간이 만들어서 전해 준 것이지,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것이 아닙니다”(2,8). 사도의 이 말들은 오늘날 심지어 적절한 비판 의식을 갖추고 있지 못한 일부 신앙인들 사이에서조차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다양한 비의적 미신들에 적용하기에 너무도 적절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다른 저술가들 가운데서도 특히 성 이레네오(St. Irenaeus)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사도 바오로를 따라, 계시 진리를 철학자들의 해석에 종속시키려 드는 문화 체계를 마주치게 될 때 경종을 울렸습니다.



    38.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가 철학을 채택하는 것은 노골적인 것도 아니고 직접적인 것도 아닙니다. 철학에 종사하고 철학 학원들에 다니는 것은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의 기회라기보다는 혼란만 주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차적 과제는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상대방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신앙과 그 근거들을 더욱 깊이 이해한다는 과제를 소홀히 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무지하고 무뚝뚝하다.”는 첼수스(Celsus)의 비판은31) 터무니없는 과장입니다. 그들의 초기의 냉담함은 다른 토대 위에서 설명되어야 합니다. 복음과의 만남은 이제껏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인생의 의미에 관해서 만족스러운 해답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철학자들을 탐구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엉뚱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각자의 권리 주장에 그리스도교가 기여한 공로를 생각한다면, 오늘날 훨씬 더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인종, 사회적 신분, 성(性)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모든 남녀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실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진리 문제와도 상관됩니다. 고대인들의 진리 탐구를 특징지었던 엘리트주의가 명백하게 포기되었습니다. 진리에의 접근은 하느님께로의 접근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진리 탐구에 어떤 차별이나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구원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궁극 목적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인도하는 한, 어떤 길을 택하는지는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신중한 분별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철학적 사고의 적극적 수용을 주창한 선구자는 성 유스티노(St. Justinus)였습니다. 유스티노는 개종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리스 철학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리스도교 진리 안에서 ‘확실하고 유익한 유일한 철학’을 발견하였다는 것을 강력하고 분명하게 선언하였습니다.32)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de Alexandria)도 복음을 ‘참된 철학(vera philosophia)’이라고 불렀고,33) 철학을 모세법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예비하고34) 복음을 위해 정지 작업을 하는35) 가르침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철학은 영혼과 말의 올바름과 삶의 정화에서 성립되는 지혜를 얻게 해 주기 때문에, 지혜를 지향하고 있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자들을,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주인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지식인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36) 클레멘스에게 그리스 철학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지지하고 완성하는 것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그 과제는 신앙을 옹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세주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철학과 그 결실들은 진리를 보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터무니없는 공격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진리를 배신하여 전투를 벌이는 자들을 무장 해제시킨다는 점에서 그리스 철학은 정당하게 포도밭을 보호하는 울타리이며 장벽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37)



    39.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이 철학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것은 역사로부터 분명합니다. 오리게네스(Origenes)가 그 좋은 예입니다. 철학자 첼수스가 퍼붓고 있던 맹공을 되받아치면서 오리게네스는 자신의 논거를 구성하고 응수하는 데 플라톤 철학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플라톤 사상의 많은 요소들을 취하여 그리스도교 신학의 초기 형태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신학(theologia)’이라는 이름 자체와 신에 관한 합리적 논의라는 어의 자체도 그리스인들에 기원을 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신학은 철학적 논의 가운데 가장 고상한 부분이고 정점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에 관한 일반적 가르침을 의미하던 것이 그리스도교 계시의 빛 안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어, 하느님께 관한 참된 가르침(vera doctrina)을 표현하기 위하여 신앙인이 수행하는 성찰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사상은 차츰 발전하면서 철학을 활용하게 되었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철학으로부터 구분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역사는, 플라톤 사상이 일단 신학을 통해서 활용되게 되었을 때, 특히 그 영혼 불멸성, 인간의 신격화, 악의 기원 등과 같은 개념들이 깊은 변형을 겪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40. 플라톤적이고 신플라톤적인 사상을 그리스도교화시키는 이 작업에서는 카파도키아의 교부들, 디오니시오 아레오파지타(Dionysius Areopagita), 그리고 특히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us)가 중요 합니다. 위대한 ‘서구의 박사(Doctor Occidentalis)’는 다양한 철학 학파들을 섭렵하였지만 그 어느 것에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만나 본 철학자들이 해내지 못한 근본적인 회심(悔心)을 그리스도교 신앙과의 만남이 이루어 냈습니다. 그 자신이 그 동기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하와도 이미 나는 가톨릭 교회에 더 쏠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기서는[마니교] 믿음을 비웃고, 턱없이 지식을 약속하면서도 나중엔 증명할 수 없는 황당무계한 것들을 명령하는데, 여기서는 사람따라 증명이 안 된다든지, 전혀 증명이 불가능한 것을 믿으라고 명령함에 있어, 더욱더 온건하고 조금도 거짓이 없음을 느꼈던 것입니다.”38) 비록 플라톤주의자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기는 했지만, 아우구스티노는 이미 추구할 목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 목표에 이르는 길, 곧 ‘살[肉]이 되어 오신 말씀’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39) 이 히포의 주교는 그리스와 라틴 세계의 사상 조류들을 포용함으로써 철학과 신학 사이의 최초의 위대한 종합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에게서는 또한 성서의 사상에 바탕을 둔 지식의 위대한 통일성이 깊은 사변적 사고를 통해서 재확인되고 지지되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이룩한 종합은 이후 수세기 동안 서구에 알려진 가장 탁월한 형태의 철학적-신학적 사변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개인적 생애 역정으로 강화되고 놀라운 성덕으로 지지되어, 그는 또한 자신의 작품들 속에 장차 다양한 철학 사조들의 서곡이 될 상당량의 소재들을 이끌어들였습니다.



    41. 그러므로 동방 교부들과 서방 교부들이 철학 학파들을 대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선포하는 내용과 선포 방식을 동일시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서로 무슨 상관이 있으며, 학원[아카데미]과 교회가 서로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라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질문을 상기해 보십시오.40) 이것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이 처음부터 신앙과 철학 사이의 관계 문제에 대해서 그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둘 다 고려하는 비판 의식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줍니다. 그들은 결코 순진한 사상가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신앙의 내용을 삶 속에 실천하는 데 열심이었기 때문에, 고도의 사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작업을 단순히 신앙의 진리들을 철학적 범주들로 옮긴 것이라고 한정짓는 것은 그들의 공로를 극소화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훨씬 더 위대한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실상 그들은 고대의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고에서 함축적이고 예비적인 형태로 남아 있던 것들을 모두 완벽하게 노출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41) 이미 지적한 것처럼, 그들의 과제는 이성이 어떻게 외부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신화의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출구를 발견하고 더욱 적합한 길을 향해 초월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성은 정화되고 올바로 조정되기만 한다면 더욱 높은 사고 영역으로 고양되어, 존재, 초월적인 것, 절대적인 것 등에 대한 인식의 튼튼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교부들이 이룩한 독창성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절대적인 것에 개방되어 있는 이성을 환영하고, 그것을 계시로부터 끌어 낸 풍요로움과 혼합시켰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에 종속되게 되는 문화들 사이의 만남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 영혼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만남이었습니다. 이성은 그 본성 덕분에 부지불식간에 지향하는 목적을 초월하여 ‘살[肉]이 되어 오신 말씀’의 위격 안에서 최고의 선과 궁극적인 진리를 만나게 됩니다. 다양한 철학 체계들에 직면해서 교부들은 그 속에 담겨 있는 계시에 일치되는 요소들과 그렇지 못한 요소들을 지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합치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상치점들을 보지 못하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42. 스콜라 신학에서 철학적으로 훈련된 이성의 역할은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에 대한 성 안셀모(St. Anselmus)의 해석의 영향 덕분에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캔터베리의 거룩한 대주교에게, 신앙의 우위성은 이성에 고유한 탐구와 상치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상 이성은 신앙의 내용들에 대해서 판단해 달라는 요구를 받지 않습니다. 그 일은 이성의 역할이 아니기 때문에 할래야 할 수도 없습니다. 이성의 기능은 오히려 각 사람이 신앙의 내용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줄 의미와 설명을 찾아 내는 것입니다. 안셀모는 지성이 그것이 사랑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알고 싶은 열망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은, 점점 더 그 아는 대상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되는 그런 형태의 지식에 이르게 되지만, 그 갈망하는 바를 아직은 얻지 못했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주님,] 당신을 바라보기 위하여 저는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 때문에 지음 받은 바로 그것을 아직은 이루지 못했습니다”(Ad te videndum factus sum; et nondum feci propter quod factus sum).42) 그러므로 진리를 향한 갈망은 이성이 더 앞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합니다. 참으로 그것은 언제나 이성이 이미 성취한 것을 넘어설 수 있음을 보는 데 압도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길이 결국 어디로 인도할 것인지를 이성이 배우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불가해한 어떤 것을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론을 통해서 그 실재에 대한 어떤 특정 인식에 도달할 때, 비록 그의 지성이 그 존재 방식을 관통해 들어갈 수 없을지라도, 만족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 그러나 만물을 초월하여 있는 것만큼 불가해하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이제까지 그 최고의 본질에 관하여 토론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이 마땅한 추론에 바탕을 두고 확정되었다면, 그 사람의 확실성의 기초는, 설사 지성이 그것을 명백히 표현해 낼 만큼 관통해 들어가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만일 먼저 최고의 지혜가 그 자신의 성취들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합리적으로 결론지었다면(rationabiliter comprehendit incomprehensibile esse) ……, 인간 존재자가 전혀(또는 거의) 알 수 없는 이 동일한 지혜가 알려지고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누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43)
    신앙의 지식과 철학의 지식 사이의 근본적인 조화가 재확인되고 있습니다. 신앙은 그 대상이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해될 것을 요구하고, 이성은 그 탐구의 정점에서 신앙이 제시하는 내용이 없이는 자신의 목적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데 아퀴노 사상의 항구한 독창성



    43. 이 오랜 발전 과정에서 성 토마스 데 아퀴노(St. Thomas de Aquino)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르친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당대의 아랍 사상과 유다교 사상과 나눈 대화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이 고대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화들을 재발견하고 있던 시대에, 성 토마스는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에 영예로운 자리를 배정한 위대한 공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성의 빛과 신앙의 빛은 둘 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양자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있을 수 없다고 그는 논증하고 있습니다.44)
    더욱 근본적으로, 토마스는 철학의 일차적 관심사인 자연(natura)이 하느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신앙은 이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이성을 추구하고 그것에 대해서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은총이 자연에 의존하고 자연을 완성시키듯이,45) 신앙은 이성에 의존하고 이성을 완성합니다. 신앙을 통해서 조명받을 때, 이성은 죄의 불복종 때문에 오는 연약성과 한계로부터 해방되어,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지식으로 고양되는 데 요구되는 힘을 얻게 됩니다. 비록 신앙의 초자연적인 성격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이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는 신앙이 지니고 있는 합리적 성격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그는 이 이해 가능성의 깊이를 천착해 들어가 그 의미를 밝혀 낼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사고 훈련(exercitium cogitationis)’입니다. 그리고 인간 이성은, 어쨌든 자유롭게 심사숙고해서 내리는 선택으로 얻어지는 신앙의 내용들에 동의한다고 해서, 무효화되는 것도 아니고 그 품위가 손상되는 것도 아닙니다.46)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한결같이 성 토마스를 사고의 스승이며 올바른 신학자의 전형으로 추천해 온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 저는 선임자인 하느님의 종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천사적 박사의 서거 700주년의 기회에 하신 말씀을 상기하고 싶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토마스는 진리에의 용기, 새로운 문제들을 직면할 때의 정신의 자유,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세속 철학이나 편견으로 감염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지적 정직성 등을 최고도로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교 사상사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철학과 보편적 문화에 이르는 길의 선구자로 남아 있습니다. 그가 찬란한 예언자적 통찰력으로 신앙과 이성 사이의 새로운 만남에서 제시한 요점과 해결의 씨앗은 세계의 세속성(saecularitas)과 복음의 근본성 사이의 화해였고, 따라서 세상과 그 가치들을 부정하려는 자연스럽지 못한 경향을 피하면서도 동시에 초자연적 질서의 숭고하고 준엄한 요구들로써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47)



    44. 성 토마스의 또 하나의 위대한 통찰은, 지식이 지혜로 성장해 가게 되는 과정에서 성령의 역할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의 앞머리에서48) 아퀴나스는, 성령의 선물로서 천상의 것들에 대한 지식으로의 통로를 열어 주는 지혜의 우위성을 날카롭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의 신학은 우리가 신적인 것들에 대한 신앙과 지식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지혜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지혜는 천성적으로(per connaturalitatem) 알려지게 됩니다. 그것은 신앙을 전제로 하고 있고, 결국 신앙 자체의 진리에 입각한 올바른 판단을 형성해 줍니다. “성령의 선물들 가운데 하나인 지혜는 지성적 덕 가운데서 발견되는 지혜와는 구별됩니다. 이 두 번째 지혜는 연구를 통해서 얻어지지만, 첫 번째 지혜는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높은 데서 옵니다.’ 이것은 또한 신앙과도 구별되는데, 그것은 신앙이 신적인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의 선물은 신적인 진리에 따라서 판단할 수 있게 해 줍니다.”49)
    그렇지만 이 지혜에 어울리는 우위성은 천사적 박사가 철학적 지혜와 신학적 지혜라는 지혜의 다른 두 개의 보충적 형태들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철학적 지혜’는 자연적인 제약을 가지고 있는 지성의 실재 탐구 역량에 기초를 두고 있고, 신학적 지혜는 계시에 기초를 두고 신앙의 내용들을 탐구하여 하느님의 신비에 접근해 갑니다.
    “진리는 누가 발설하든지 간에 모두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omne verum a quocumque dicatur a Spiritu Sancto est)”임을50) 깊이 확신하고 있던 성 토마스는 그의 진리 사랑에 공평무사했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든지 진리를 추구하였고, 진리의 보편성을 입증하는 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교회의 교도권은 그에게서 진리를 향한 열정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그것이 일관되게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초월적인 진리의 지평 속에 머무르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인간 지성이 결코 생각해 낼 수 없었을 높은 경지’에 도달했습니다.51) 그는 정당하게도 ‘진리의 사도(apostolus veritatis)’라고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52) 확고하게 진리만을 추구하는 토마스의 실재주의(realismus)는 진리의 객관성을 인정하고 ‘현상’의 철학뿐만 아니라 ‘존재’의 철학(philosophia essendi)까지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이성의 분리의 역사



    45. 초창기 대학(大學)들이 세워지면서, 신학은 다른 형태의 과학적 탐구들과 더욱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성 대(大) 알베르토(St. Albertus Magnus)와 성 토마스는 비록 신학과 철학 사이의 유기적 연관 관계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철학과 과학이 각기 고유한 탐구 영역에서 작업하는 데 요구되는 자율성을 인정한 최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중세 후기로부터 시작해서 두 가지 탐구 방식 사이의 정당한 구별에서부터 차츰 치명적인 분리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부 사상가들의 과장된 합리주의의 결과로(post nimiam animi rationalistarum cupiditatem) 입장들은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신앙의 내용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철학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 분리의 또 하나의 귀결은 이성 자체에 대한 더욱 깊은 불신이었습니다. 회의적이고 불가지론적인 정신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일반적인 불신을 발설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신앙에 좀더 넉넉한 공간을 마련하려는 동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합리성을 통째로 부인하고자 하였습니다.
    요컨대, 교부들과 중세 사상가들에게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깊은 일치를 유지하고 있어서 고도의 사변에 도달할 수 있는 지식을 산출하던 것이, 이제는 신앙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신앙과 대립하게 된 이성적 지식의 논거들과 결합된 체계들로써 사실상 파괴되었습니다.



    46. 이 급진적 입장들 가운데 더욱 영향력 있는 것들은 특별히 서구 역사 안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근대 철학 발전의 대부분이 점점 더 그리스도교 계시로부터 갈라져 나가 명시적으로 정반대의 입장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이런 운동은 지난 세기에 그 절정에 달했습니다. 관념주의(idealismus)의 일부 대표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앙과 그 내용을, 심지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까지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변증법적 구조로 변형시키고자 꾀했습니다. 이런 사고 방식에 반대해서 철학적 용어들로 무장한 다양한 형태의 무신론적 인본주의(humanismi athei)가 생겨났는데, 그들은 신앙을, 충만한 합리성의 개화를 소외시키고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간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새로운 종교라고 주장하는 데 주저하지 않으면서,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 준 전체주의적 체계들로 귀결될 구상의 토대를 구축하였습니다.
    과학적 탐구의 영역에서는,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특히 형이상학적이거나 윤리적인 전망에 대한 일체의 호소를 배격하는 실증주의적 정신(mens positivistica)이 지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부 과학자들은 윤리적 가치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면서, 인간 인격과 그 사람의 일생 전체와는 다른 어떤 것을 그들 관심의 중심에 놓는 위험을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극단적인 일부는 기술적 진보를 위한 기회라고 생각하고 시장 경제의 논리에 따라, 자연과, 심지어 인간 존재자에 대해서까지도 거의 신적인 능력을 행사하려는 유혹에 굴복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합리주의의 위기는 결국 허무주의(nihilismus)의 도래를 초래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허무로 돌리는 이 허무주의는 현대인들에게 특별한 매력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 추종자들은 탐구가 목적 그 자체이지, 진리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이나 가능성은 애당초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허무주의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인생이란 결코 한시적인 것들이 지배하고 있는 감각과 경험의 기회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덧없이 지나가고 찰나적이기 때문에 결정적인 투신이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널리 퍼져 있는 정신 자세의 뿌리에는 허무주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47. 또한 근대 문화 속에서는 철학의 역할 자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철학은 보편적 지혜와 연구로부터 점차 인간 인식의 여러 영역 가운데 하나로 위축되었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어찌어찌해서 완전히 지엽적인 역할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합리성의 다른 형태들이 훨씬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할수록, 철학은 더욱 변방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 합리성의 형태들은 더 이상 진리를 명상하거나 인생의 궁극적 목적과 의미를 추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도구적 이성(ratio instrumentalis)’으로서 그것들은 명시적으로든 함축적으로든 실용적 목적들의 증대, 곧 향락이나 힘들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첫 번째 회칙에서 이러한 접근법을 절대화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현대의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가 만들어 낸 것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손, 나아가서는 인간 지성과 의지의 성향이 만들어 낸 작업의 결과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 다양한 활동이 빚어 내는 산물이, 그것을 만들어 낸 인간의 손을 벗어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도대체 너무도 빨리 그리고 때로는 도저히 예측하지 못할 방식으로 ‘소외’를 빚어 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간접적인 결과를 통해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인간에게 역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거스르고 있거나 거스르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광범위하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인간 실존의 현대적 드라마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갈수록 두려움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만든 것들이, 물론 전부도 아니고 대부분도 아니지만 그 일부, 특히 인간의 재능과 창의성을 각별히 쏟은 것들이, 인간 자신에게 철저히 반역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합니다.”53)
    이런 문화적 격변에 따라 일부 철학자들은 진리 그 자체를 탐구하는 일을 포기하고, 다만 주관적 확실성이나 실용주의적 공익성을 취득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이성의 진정한 품위를 손상시켜, 더 이상 진리를 인식하거나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48. 이런 간략한 철학사 일폐는 신앙과 철학적 이성 사이의 점증적인 분리 과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가속화시키는 사람들의 철학 사상 안에서조차도, 가끔은 올바른 정신과 마음으로 추구한다면 진리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소중한 통찰들의 씨앗이 발견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통찰들은 지각과 경험, 상상과 무의식, 인격과 상호 주관성, 자유와 가치, 시간과 역사 등에 대한 철저한 분석 안에서 발견됩니다. 죽음이라는 주제도 모든 사상가에게 각자 자기 자신 안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라는 자극적인 호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것과 같은 신앙과 이성 사이의 관계가 신중하게 검토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각기 상대편이 없이는 초라해지고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성은 계시가 제공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옆길로 치닫게 될 것이고, 이것은 더 이상 보편적 명제이기를 포기할 위험을 무릅쓰는 일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허약한 추론보다 사태를 더 잘 꿰뚫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오히려 그 때 신앙은 신화로 변질되든가, 아니면 미신으로 전락할 중대한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성숙한 신앙에 연결되지 않은 이성은 존재의 새로움과 근본성에 대한 민감한 감각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이처럼, 신앙과 철학이 각각의 자율성을 훼손당하지 않은 채로 자기 본성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해 주는 깊은 일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호소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이 호소가 시의 적절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신앙의 ‘진실성(parrhesia)’은 이성의 용기와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5장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교도권의 입장



    진리의 봉사자로서 교도권의 식별 기능



    49. 교회는 자신의 고유한 철학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또 다른 철학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어느 특정 철학을 추켜세우지도 않습니다.54) 이런 주저의 주된 이유는, 철학은 신학에 가담할 때조차도 자기 고유의 원리와 방법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진리 추구에서 벗어나지 않고 이성이 지배하는 과정을 통해서 진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보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성의 빛 속에서 그 고유 원리와 방법들에 따라 전개되지 않는 철학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될 것입니다. 철학이 누리고 있는 자율은, 결국 이성이 그 본성상 진리를 향하고 있고, 더욱이 진리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수단들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본성적 구조(statutum constitutivum)’를 의식하고 있는 철학은 계시 진리의 소여와 요구 사항들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철학, 특히 근대 철학이 걸음을 잘못 내디뎌 오류에 빠지게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교도권은 결함 있는 철학적 논의들의 공백들을 메우기 위하여 개입하는 것을 과제로 삼지도 않고, 또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오히려 교도권의 의무는, 대립적인 철학적 견해들이 계시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을 위협하게 될 때, 그리고 중대한 오류들의 씨앗을 심는 거짓되고 단편적인 이론들이 하느님 백성의 순수하고 단순한 신앙을 혼란시키면서 점차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할 때, 분명하고 강력하게 대응하는 것입니다.



    50. 그러므로 신앙의 빛 안에서 교회 교도권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견해들과 철학들을 권위 있게 비판적으로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55) 교도권은 무엇보다도 어떤 철학적 전제들과 결론들이 계시 진리에 모순되는지를 지적하고, 신앙의 관점에서 철학에 부과되는 요구 사항들을 분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철학적 지식이 발전함에 따라 다양한 사상 체계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 다양성도 또한 이 다양한 학파의 기조(基調)들이 하느님의 말씀과 신학적 성찰의 요구들과 양립될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할 책임을 교도권에 부과하고 있습니다.
    어떤 철학 체계 속에 들어 있는 어떤 요소들이 자신의 신앙에 위배되는지를 지적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입니다. 실상 신, 인간 존재자, 인간의 자유, 윤리적 행위 등에 관한 다양한 철학적 내용들이 교회에 직접 도전장을 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교회가 수호하고 있는 계시 진리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별을 위해서 우리 주교들은 ‘진리의 증인들(testes veritatis)’이 되어, 진리를 올바로 성찰하는 이성(recta ratio)을 수호하기 위하여, 모든 철학자가 높이 평가해야 하는 겸손하고도 꾸준한 봉사직을 수행해야 합니다.



    51. 그렇지만 이 식별이 주로 부정적이라고 간주되어, 마치 교도권이 어떤 가능한 성찰을 배제하거나 제한하려 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교도권의 개입은 무엇보다도 철학적 탐구를 증진시키고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한편, 철학자들은 자기 비판의 필요성, 곧 그들의 성찰이 지켜야 하는 너무도 좁은 한계들 때문에 생겨나는 오류들을 교정하고 넘어서야 할 필요를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비록 인간 이성은 죄 때문에 상처를 받아 허약해졌고 그 표현 형식은 역사의 제약을 받을지라도, 진리는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역사적 철학 체계도 진리 전체를 소유하고 있다고 감히 주장할 수 없고, 또 인간 존재자, 세계, 그리고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를 완벽하게 설명했다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때로는 지나치게 복잡해진 철학의 체계, 방법, 개념, 논거들이 다양해짐에 따라, 신앙의 빛 속에서 비판적 식별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물론 이 식별은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 철학적 주장들 속에서 신앙의 관점에서 타당하고 결실 풍부한 것과 그릇되고 위험한 것을 가려 내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로 2,3)는 것을 알고 있고, 따라서 신비의 인정으로 이끄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철학적 탐구를 자극하며 개입합니다.



    52. 교회 교도권이 특정 철학적 가르침에 대해서 자신의 판단을 표현하는 일은 비단 최근의 일만은 아닙니다. 그 예를 들자면, 영혼의 선재(先在)를 선호하는 논거들,56) 또는 항성들에 관한 사변에서 발견되는 우상 숭배나 비의적 미신의 다양한 형태들에57) 대하여 수세기에 걸쳐서 교회가 내려 온 판단들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물론 그리스도교 진리와 양립될 수 없는 라틴 아베로이즘(Averroismus Latinus)의 특정 주장들에 대한 더욱 체계적인 선언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58)
    교도권이 지난 세기 중반 이래로 더욱 자주 발설하게 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 시기에 적지 않은 가톨릭 신앙인들이 다양한 철학 사조들을 자기 고유의 철학을 가지고 대면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교회 교도권은 이 철학 체계들이 그 자체로 그릇되고 부정적인 길로 일탈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했습니다. 비판적 검토는 공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한편에서는 맹신주의(fideismus)와59) 급진적 전통주의(tradi-tionalismus radicalis)가60) 이성의 자연적 능력들에 대해서 불신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합리주의(rationalismus)와61) 존재직관주의(ontologismus)가62) 오직 신앙의 빛만이 전해 줄 수 있는 지식들을 자연 이성에 돌리려고 했습니다. 이 논쟁의 긍정적 요소들은 교의 헌장 ‘하느님의 아드님’(Dei Filius)에 잘 종합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편 공의회, 곧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역사상 처음으로 이성과 신앙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 장엄하게 선언하였습니다. 이 문헌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가르침은 많은 신앙인들의 철학적 탐구에 강력하고 적극적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까지도 이 분야에 관한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그리스도교 입장을 위한 표준적 척도로 남아 있습니다.



    53. 교도권의 발언들은 개별적인 철학 주제들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철학적인 인식의 필요성에 더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의 직권적 교도권으로 신앙인들에게 중단 없이 제시되어 온 가르침들을 종합하고 장엄하게 재확인하면서, 신앙과 이성, 계시와 자연적 신 인식이 얼마나 분리 불가능하면서도 동시에 뚜렷이 구분되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공의회는 계시 자체를 통해서 전제되고 있는, 신의 실존에 대한 자연적 인식 가능성과 만물의 기원과 종말에 관한 기본 척도로 시작해서,63) 앞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다음과 같은 장엄한 선언으로 마무리짓고 있습니다. “인식에는 그 출발점에서뿐만 아니라 그 대상에서도 뚜렷이 구분되는 두 개의 질서가 있습니다.”64) 온갖 형태의 합리주의를 거슬러서 신앙의 신비들과 철학의 발견들 사이의 차이와, 철학적 발견들에 대한 신앙의 신비의 초월성과 우위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맹신주의의 유혹을 거슬러서 진리의 단일성과 신앙의 인식에 대해서 합리적 인식이 제공할 수 있는 적극적인 기여를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신앙이 이성보다 더 상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신앙과 이성 사이에 진정한 의미에서 어떤 상위점 같은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비들을 계시하시고 신앙의 선물을 베풀어 주시는 동일한 하느님께서 또한 인간 정신 속에 이성의 빛을 밝혀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진리가 진리에 모순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65)



    54. 우리 시대에도 교도권은 여러 기회에 이 주제를 언급하면서 합리주의의 유혹에 대하여 경고하였습니다. 성 비오 10세 교황께서는 ‘근대주의(Modernismus)’의 기초에는 현상주의(phenome-nismus), 불가지론(agnosticismus), 내재주의(immanentismus) 등의 위험이 담겨 있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66)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무신론적 공산주의(communismus atheus)를 거슬러 벌여 온 가톨릭 교회의 투쟁의 중요성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67)
    얼마 뒤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회칙 「인류」(Humani Generis)에서 진화론(evolutionismus), 실존주의(existentialismus), 역사주의(historicismus) 등과 연관되어 있는 그릇된 해석들에 대하여 강력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이 이론들이 신학자들이 제안하고 발전시킨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양 우리 바깥’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68) 그렇지만 교황께서는 이런 오류들을 무조건 배격할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자연적 진리와 초자연적 진리를 수호하고 그것들을 사람들의 가슴 속에 각인시켜야 할 중대한 의무를 지고 있는 모든 가톨릭 신학자와 철학자는,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이 경향들을 외면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런 견해들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단 질병들이 올바로 진단될 때라야만 제대로 치유될 수 있고, 또 이 거짓된 이론들 속에서도 얼마간의 진리가 발견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결국 이 이론들이 철학적 진리들과 신학적 진리들에 대해서 더욱 분별력 있는 토론과 평가를 자극하기 때문입니다.”69)
    로마 교황의 보편적 교도권을 도와 특별한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70) 신앙교리성에서는 최근 일부 해방 신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에 기초를 둔 방법론과 주장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위험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개입한 적이 있습니다.71)
    과거에 교도권은 여러 기회에 다양한 방식으로 철학적 주제들에 관한 식별 작업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존경하는 선임자께서는 이 방면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귀중한 공헌을 하셨습니다.



    55. 오늘날의 상황을 검토하면서 우리는 다른 시대의 문제들이 새로운 각도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특정 개개인이나 집단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어느 정도 공통의 정신적 분위기가 되어 버린 확신들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 예로서는 최근의 많은 철학적 탐구들을 통해서 표면에 떠오르게 된 이성에 대한 근본적 불신을 들 수 있습니다. ‘형이상학의 종말(interitus metaphysicae)’이라는 끔찍한 표현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실정입니다. 철학은 사실들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나 인간 인식의 제한된 영역들과 그 구조를 탐구한다는, 보잘것없는 과제들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신학에서도 역시 다른 시대의 유혹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일부 현대 신학 체계들에서는, 특히 철학적으로 잘 정초되었다고 생각되는 견해들이 신학적 탐구에 규범적이라고 간주되게 될 때, 슬며시 합리주의(rationalismus)가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신학자들이 철학적 기초가 부족한 채로, 이미 현대 문화와 현대 언어 속에 들어오게 된, 그러나 충분한 합리적 기초를 결(缺)하고 있는, 주장들에 무비판적으로 노출되게 될 때에 발생합니다.72)
    또한 신앙을 이해하는 데 합리적 인식과 철학적 논의가 신앙의 가능성을 위해서 가지는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맹신주의(fideismus)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는 징후들이 있습니다. 이런 맹신주의적 경향의 매우 널리 퍼져 있는 징후 가운데 하나는,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것을 진리에 관한 유일한 척도로 삼는 성서 제일주의(biblicismus)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오직 성서와만 동일시되고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힘주어 강조한 교회의 가르침이 배제되게 됩니다. ‘계시 헌장’은 하느님의 말씀이 성서와 성전(聖傳) 모두에 현존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73)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전과 성서는 교회에 맡겨진 하느님 말씀의 유일한 성스러운 유산을 형성합니다. 거룩한 하느님 백성 전체는 이 유산에 충실하면서, 목자들과 일치하여 꾸준히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습니다.”74) 그러므로 성서만이 교회의 유일한 전거(典據)가 아닙니다. “교회 신앙의 최고 규범”은75) 성령께서 성전, 성서, 교회 교도권 사이에 설정하신 긴밀한 상호 관련성에서부터 나옵니다. 사실 이들 세 가지는 각기 다른 것들 없이 따로 존속할 수 없습니다.76)
    더욱이, 주석자가, 교회 전체와 결합되어 본문의 충만한 의미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주는 더욱 포괄적인 주해의 필요성을 무시한 채, 어떤 단 하나의 방법론만을 적용하여 성서의 진리를 해석하려고 하는 데 따르는 위험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성서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양한 해석학적 접근 방법들이 각기 고유의 철학적 전제들을 깔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것들을 성서 본문들에 적용하기에 앞서서 조심스러운 평가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형태의 잠재적 맹신주의들은 사변 신학에 대한 숙고의 소홀이나 고전 철학에 대한 경멸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신앙의 이해와 교의 형식의 체계화는 다 같이 고전 철학에서 그 기본 요소들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선임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철학 전통에 대한 이런 소홀과 전통적 개념 사용의 포기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표명하셨습니다.77)



    56. 요컨대, 특히 진리가 지성과 객관적 실재 사이의 일치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합의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널리 퍼져 있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불신의 표지들이 있습니다. 고도의 전문 영역들로 세분되고 있는 세계 속에서, 전통 철학의 목표였던, 인생의 충만하고 궁극적인 의미를 인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는 신앙의 빛 안에서, 저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모든 철학자에게 인간 이성의 능력을 신뢰하고, 그들의 철학 작업에서 너무 협소한 목표들을 설정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막 마감되려 하는 제이천년기 동안의 역사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소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곧 궁극적 진리를 향한 열정, 그 진리에 대한 근면한 탐구, 진리에 이르는 새로운 접근로를 뚫을 용기 등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성이 고립에서 벗어나 진선미(眞善美)를 얻기 위해 모험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리하여 신앙은 이성의 충실한 변호자가 되는 것입니다.



    철학에 대한 교회의 관심



    57. 그러나 교도권은 철학 이론들의 오류들과 일탈들을 지적하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못지않은 관심을 가지고 교회 교도권은 철학적 탐구의 진정한 쇄신의 기본 원리들을 강조하고 특정 방향을 지시하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교황 레오 13세께서는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에서 교회 생활을 위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보를 내디디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회칙은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철학만을 위해 작성된 유일한 권위 있는 교황 문헌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교황께서는 신앙과 이성 사이의 관계에 관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발전시키는 가운데, 철학적 사고가 신앙과 신학에 얼마나 깊이 공헌하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78) 한 세기 이상이 지났지만 그 회칙이 담고 있는 실천적이고 교육적인 통찰들은 그 중요성을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특히 성 토마스의 철학이 지니고 있는 그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가치에 관한 강조는 더욱 그렇습니다. ‘천사적 박사’의 사상에 대한 쇄신된 강조야말로 교황 레오 13세께는 신앙의 요구들에 부합되는 철학의 활용을 활성화시키는 최선의 길로 비쳐졌습니다. “성 토마스는 이성과 신앙을 날카롭게 구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자를 조화시켜 각각 자신의 권리와 품위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79)



    58. 교황의 이런 권고가 얼마나 풍부한 결실을 낳았는지는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성 토마스와 다른 스콜라 학자들의 사상에 대한 폭발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역사적인 탐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당시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던 중세 사상의 풍부한 보화들이 재발견되게 되었고, 새로운 토미즘 학파들이 생겨났습니다. 역사적 방법을 활용함으로써 성 토마스의 작품들에 대한 지식이 엄청나게 증대되었고, 많은 학자들이 용감하게 당대의 철학 및 신학 토론 속에 토미즘 전통을 끌어들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상당한 기여를 한 현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톨릭 신학자들의 작업은 바로 이 토미즘 철학의 부흥의 결실들이었습니다. 교회는 20세기 전체를 통해서 ‘천사적 박사’의 학교에서 자라난 유력한 일군의 사상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59. 그러나 토미즘과 신-토미즘의 부흥이 그리스도교적 영감을 받은 문화 속에서 철학적 사고의 부흥의 유일한 표지는 아닙니다. 교황 레오 13세 시대에도 이미 일군의 가톨릭 철학자들이 당대의 사상적 조류들과 방법론들을 받아들여 대단히 영향력 있고 항구한 가치를 지니는 철학 작품들을 내놓았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 종합들은 대단히 뛰어나서 당대의 관념주의적 체계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만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도덕적 양심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빛 속에서 신앙을 새로이 숙고하기 위한 인식론적 토대들을 제공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은 내재(內在, immanentia)의 분석으로부터 출발해서 초월(超越, tran-scendentia)에 이르는 길을 개척하는 철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앙의 요구들을 현상학적 방법의 전망과 결부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진영에서 다양한 철학적 사변 형태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신앙과 이성을 결합시키는 위대한 그리스도교적 사상 전통을 생생하게 보존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60.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나름대로, 철학에 관한 결실 풍부한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는 특히 이 회칙의 맥락 속에서 ‘교회 헌장’의 한 장(章)이, 철학도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성서적 인간학을 잘 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 장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 인격의 가치를 다루면서, 피조물 전체에서 인간 존재자가 차지하고 있는 품위와 우월성을 확인하고 인간 이성의 초월적 능력을 선언하고 있습니다.80) ‘교회 헌장’에서는 무신론(atheismus) 문제도 다루고 있고, 특별히 인간 인격(persona humana)의 존엄성과 자유에 관한 그 철학적 전망이 잘못되었다는 근거를 밝히고 있습니다.81) 그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분위기가 깊은 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 주제는 저의 첫 번째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재론되었고, 제 가르침의 항구한 기준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실, 혈육을 취하신 ‘말씀’의 신비를 떠나서는 인간의 신비가 참되게 밝혀지지 않습니다. 첫째 인간 아담은 미래의 인간, 곧 주 그리스도의 표상이었습니다. 새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 주는 그 계시로써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이 높이 불리었음을 밝혀 주십니다.”82)
    공의회는 또한 사제직 지망자들에게 요구되는 철학 공부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그 권고들은 그리스도교 교육 전반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철학은 학생들이 인간과 세상과 하느님을 건전하게 연결시켜 인식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구원(久遠)의 가치를 지닌 철학 유산에 기초를 두고 근대 철학의 여러 사조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83)
    이 지침들은 특히 신학 연구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건전한 철학 교육을 보장하기 위하여 수많은 다른 교황 문서들 속에서 재론되고 발전되었습니다. 저 자신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그들의 사목 활동 중에 언젠가는 현대 세계의 갈망들에 직면해야 하고, 특정 태도들의 원인들을 이해하고 즉각적으로 응답해야 하는 사제직 지망자들을 위한 철학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84)



    61. 교도권이 자주 이 문제에 개입하고 ‘천사적 박사’의 통찰들의 가치를 재평가하며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를 강조하는 것이 필요했던 이유는, 교도권의 지침이 언제나 기꺼이 용의를 갖추고 지켜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많은 가톨릭계 대학의 학부들은, 비단 스콜라 철학뿐만 아니라 철학 일반에 대한 연구 자체의 비중이 감소되었기 때문에 차츰 초라해져 왔습니다. 저는 철학에 대한 이런 관심 부족이, 적지 않은 신학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을 놀랍고도 실망스럽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심 저하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때로는 순수 형식적이기도 한 더욱 세밀하고 제한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궁극적인 인간 문제들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연구를 광범위하게 포기한, 현대 철학에서 발견되는 이성에 대한 불신(diffidentia de ratione)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특히 ‘인문 과학(scientiae humanae)’에 대한 오해입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간 존재자의 신비에 대한 더욱 심층적인 인식을 위한 과학적 탐구의 적극적 가치를 강조하였습니다.85) 그러나 신학자들이 인문 과학에 참여하여 그것들을 자신들의 연구에 적절히 적용하라는 호소는, 사목자 양성과 신앙의 준비(praeparatio fidei)에서 철학의 가치를 약화시키거나 그 자리에 어떤 다른 것을 대체하는 함축적 권력 발동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의 요인은 신앙의 토착화(fidei inculturatio)에 대한 쇄신된 관심입니다. 특히 젊은 교회들의 생활은 복잡한 사고 방식들과 함께 대중적 지혜의 다양한 표현들을 발견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통들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문화 유산을 구성합니다. 그러나 전통적 사고 방식들에 대한 연구는, 철학적 탐구와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대중적 지혜의 긍정적인 흔적들이 복음 선포와 연결 고리를 마련할 수 있게 해 줍니다.86)



    62. 저는 철학 연구가 신학 연구와 사제직 지망자 양성에 근본적이고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분명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신학 연구의 교과 과정(curriculum)에 앞서 철학 연구 기간을 특별히 두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확인한 이 결정은87) 철학과 신학의 구조적 조화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중세를 통해서 성숙된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학습 순서는 간접적으로나마 근대 철학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촉진시켰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심지어 독일의 루터교 대학들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프란치스코 수아레즈(Francisco Sua셢ez)의 「형이상학 토론」(Disputationes Metaphysicae)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론의 쇠퇴는 사제 양성과 신학 연구에 심각한 허점을 낳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근대 사상과 근대 문화에 대한 무시는 온갖 종류의 대화에서 경직된 태도를 보이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여하한 종류의 철학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어려움들이 교회 안에서 결코 부족되어서는 안 되는 지혜로운 철학 교육과 신학 교육을 통해서 극복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63. 방금 제시된 이유들 때문에 철학에 대한 교회의 강한 관심을 이 회칙과 더불어 재차 강조하는 것이 절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내밀한 연결 고리는 신학 작업과 철학적 진리 탐구를 하나로 묶습니다. 이로부터 신앙에 배치되지 않는 철학적 사고를 분별하고 촉진시켜야 할 교도권의 의무가 나옵니다. 신학과 철학 사이의 조화롭고 창조적인 관계를 복원시키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원리들과 지침들을 제언하는 것이 저의 의무입니다. 이 원리와 지침들의 빛 속에서 신학이, 현대 세계가 제시하고 있는 다양한 철학 체계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더욱 분명히 식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6장 철학과 신학 사이의 협력



    신앙의 지식과 철학적 이성의 요구들



    64. 하느님의 말씀은 어느 시대에나 세계 방방곡곡의 모든 민족을 향하고 있고, 인간 존재자는 그 본성상 철학자입니다(homo est naturaliter philosophus). 하느님의 말씀을 신앙의 빛 속에서 이해하려는 성찰적이고 과학적인 작업으로서 신학은, 그 일부 과정에서 그리고 그 특별한 과제 수행에서 여러 시대를 통해 발전되어 온 철학들에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신학자들이 특정 방법론들에 매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도권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저는 계시된 말씀의 본성 때문에 철학적 탐구에 호소해야 하는 신학의 특별한 과제를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65. 신학은 신앙의 청종(auditus fidei)과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라는 이중의 방법론적 원리의 빛 속에서의 신앙에 대한 이해로서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신학은 첫 번째 원리를 통해서 계시의 내용이 성전, 성서,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 안에서 점차 명시화된 그대로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는 데 반해,88) 두 번째 원리로써는 사변적 성찰을 통해서 과학적인 사고의 고유 요구들에 응답하고자 합니다.
    철학은 올바른 ‘신앙의 청종’을 위해서 인식과 인격적 통교, 그리고 특히 다양한 언어 형식들과 기능들의 구조를 고찰할 때에 신학에 독특한 기여를 하게 됩니다. 또한 교회 전승, 교도권의 선언들, 그리고 특별한 철학 전통으로부터 끌어 낸 개념들과 사고 형식들을 활용하고 있는 위대한 신학 스승들의 가르침을 더욱 일관되게 이해하는 데서도 철학의 기여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경우에 신학자는, 교회가 자신의 가르침을 성찰하고 발전시키는 개념들과 용어들을 개진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정확하고 일관된 해석에 이르기 위해서 그 관념들과 용어들에 영향을 미쳤을 철학 체계들을 심층에서부터 이해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66. ‘신앙의 이해’에 관해서는 무엇보다도, 신적인 진리가 “성서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되고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올바르게 해석”되기만 한다면,89) 하나의 진정한 인식 체계로 제시될 정도로 논리적이고 일관된 고유한 합리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이해’는 교회의 가르침을 구성하고 있는 명제들의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구조들을 포착하는 데 서뿐만 아니라, 또한 주로 그러한 명제들이 개개인과 인류를 위해서 지니는 구원의 의미를 밝히는 데서도 이 진리를 명료화시킵니다. 이 명제들의 총합으로부터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파스카 신비 속에서 절정에 이르는 구원의 역사를 알게 되고, 신앙의 동의로써 이 신비에 참여하게 됩니다.
    교의 신학(theologia dogmatica)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와 구원 경륜의 보편적 의미를 설화적이고 논증적인 방식으로 해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비판적이고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된 개념들을 통하여 해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상 그것은 철학의 도움이 없이는, 하느님에 관해 말하는 언어 사용, 삼위일체 안에서의 위격적 관계, 세계 속에서 하느님의 창조적 활동,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참 하느님이시면서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정체 등과 같은 신학적 주제들을 논의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철학적 윤리학이 정의하는 도덕 법칙, 양심, 자유, 인격적 책임과 죄 등과 같은 개념들을 채용하는 윤리 신학의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이성은 신적 계시의 대상이기도 한 피조된 실재들, 곧 세계와 인간 자신에 대한 자연적이고 일관되며 진정한 인식을 취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이, 이성은 이 인식을 개념과 논거로 표현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사변적 교의 신학은 인간 존재자, 세계, 그리고 더욱 근본적으로 존재자에 대한 객관적 진리에 기초를 둔 철학을 전제하고 함축하고 있습니다.



    67. 기초 신학(theologia fundamentalis)은, 신앙의 근거를 해명할(1베드 3,15 참조) 과제를 지니고 있는 학문의 고유한 성격 때문에, 신앙과 철학적 성찰 사이의 관계를 정당화하고 명료화해야 합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을(로마 1,19-20 참조) 상기시키면서, 자연적으로(따라서 철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진리들이 있다는 것과 하느님 계시의 수용이 반드시 이 진리들에 대한 인식을 전제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계시와 그 신빙성,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신앙 행위를 탐구하면서, 기초 신학은 신앙을 통해서 가능해진 지식의 빛 속에서 이성이 자신의 독립적인 탐구를 통해서 이미 지각하고 있는 특정 진리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계시는 이 진리들을 그 충만한 의미와 더불어 전달하고, 그것들을 그 궁극적 목적인 계시된 신비의 풍요로움으로 향하게 해 줍니다. 예를 들면, 자연적 신 인식, 신적 계시를 다른 현상들로부터 구분하고 그 신빙성을 인정할 가능성, 모든 인간적 경험을 초월하는 것들에 대해서조차도 참되고 의미 깊은 방식으로 말할 인간 언어의 능력 등입니다. 이 모든 진리로부터 정신은 참으로 예비적인 신앙의 통로의 실존을 인정하는 데에로 인도됩니다. 이 통로는 정신 그 자체의 원리와 자율성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은 채 계시를 수용할 수 있게 해 줍니다.90)
    또한 기초 신학은 신앙과 (완전히 자유롭게 동의할 인간 이성을 통하여) 그 적절한 표현을 발견해야 하는 본질적인 요구 사이의 깊은 양립 가능성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신앙은 “진리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이성에게 통로를 보여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물인 신앙은 이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결(缺)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동시에 이성이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지평에 도달하기 위하여 신앙을 통해서 강화된다는 것이 명백해집니다.”91)



    68. 윤리 신학(theologia moralis)은 어쩌면 철학의 기여를 더욱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인간의 생활은 구약에서보다 계율에 훨씬 덜 지배되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삶은 신앙인들을 율법을 능가하는 자유와 책임으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와 사도들의 저술들은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일반 원리들과 특별한 가르침과 계명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개인적, 공동체적 생활의 특수한 상황들에 적용하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양심과 이성의 힘을 충만히 가동시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 윤리 신학은 인간 본성과 사회, 그리고 윤리적 결단의 일반 원리에 대한 건전한 철학적 전망을 요구합니다.



    69. 신학자는 오늘날 철학보다는 역사와, 무엇보다도 눈부시게 발전하여 찬탄을 자아내는 과학 등 다른 분야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신앙과 문화 사이의 관계 문제에 관한 관심의 증대에 따라, 신학이 그리스와 유럽에서 발원된 철학보다는 민족들의 전통들에 포함되어 있는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문화적 다원주의(culturae pluralismus)라는 그릇된 관념에서 출발하여 교회의 철학적 유산의 보편적 가치를 무조건 부인해 버립니다.
    이미 공의회의 가르침 안에도 들어 있는92) 이 주장들은 일말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과학을 참조하는 것은 연구 대상에 대한 더욱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많은 경우 유용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보편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전형적으로 철학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에 대한 배격을 의미해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풍부한 문화적 교류를 위해서는 그런 종류의 사고가 요구됩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 내용의 보편성을 입증해야 하는 일차적 과제가 포기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특수하고 구체적인 것들을 넘어 탐구해 나아가야 할 의무입니다. 철학적 탐구의 독특한 기여는 우리가 다른 세계관과 다른 문화 속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객관적 진리가 무엇이냐”를93) 식별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 가지 인간적인 견해들이 아니라 오직 진리만이 신학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70. 철학과 신학을 위한 그 함축들 때문에, 문화들에 대한 관계 문제가 비록 일차적 중심 문제는 아니라 하더라도 특수한 주의를 끕니다. 복음이 처음 선포되던 때부터 교회는 문화들과의 만남과 연루 과정을 알고 있었습니다. 계시 진리를 전하기 위해 “땅 끝에 이르기까지”(사도 1,8) 어디든지 가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처음부터 그 소식의 보편성과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되는 어려움들을 인정하게 이끌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초기 공동체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를 말미암아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셨습니다”(에페 2,13-14).
    이 본문의 빛 속에서 우리는 이방인들이 일단 신앙을 받아들인 다음에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성찰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구원의 풍요로움 앞에서 상이한 문화들을 갈라 놓던 장벽은 무너졌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편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떤 특정 민족이나 언어나 관습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각자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는 공동 유산이 되었습니다. 상이한 지역과 전통들로부터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한 가족이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민족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파스카 신비를 통해서 가능해진 새로움 덕분에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구별의 벽을 무너뜨리시고, 우리를 당신의 신비에 참여하게 하심으로써 새롭고도 탁월한 방식으로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이 일치는 너무도 깊은 것이어서 교회는 사도 바오로와 함께,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19)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단순한 선언은 위대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신앙과 다양한 문화들과의 만남은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문화들이 경험 속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을 때, 그것들은 보편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들을 향한 인간 존재자의 특징적인 개방성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진리에 이르는 다양한 길을 제공하고, 이것은 남녀 인간들이 자신들의 삶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들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습니다.94) 문화들이 옛 전통들의 가치들에 호소하는 한, 그것들은 함축적이기는 하지만 조금도 덜 실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가 앞에서 지혜 문학과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을 숙고할 때에 보았던 것처럼, 자연 속에 비치는 하느님의 현현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71. 사람들과 그들의 역사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문화는 인간의 생애 경험을 드러내는 동일한 역동성들에 참여합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고 서로서로 생활 양식들을 나누기 때문에 문화들은 변하고 발전합니다. 문화는 가치들의 교환으로 자라나고, 새로운 경험들에 동화될 수 있는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는 한, 존속하고 꽃 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역동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문화의 일부로서, 문화에 의존하고 그것을 형성합니다. 인간 존재자들은 그들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그 문화의 자식이며 부모입니다. 자기 생애의 모든 표현에서 인간은 피조물 전체와는 다른 어떤 것, 곧 신비를 향한 항구한 개방성과 끊임없는 앎의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문화 속에서는 충만을 향한 이 충동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화 자체가 신적인 계시를 받을 수 있는 내밀한 수용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적 맥락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 속에 젖어들어 있고, 이 신앙 생활은 천천히 그 문화적 맥락을 형성해 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문화에 하느님께서 한 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드러내시는 불변의 진리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여러 세기가 흐르면서 우리는 성령 강림절에 예루살렘을 순례하던 사람들이 목격했던 그 사건이 반복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말을 들으면서 서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 사람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된 셈인가? 이 가운데는 바르티아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프리기아, 밤필리아, 이집트, 또 키레네에 가까운 리비야의 여러 지방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로마에서 나그네로 온 유다인들과 유다교에 개종한 이방인들이 있고, 그레데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지금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들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저마다 자기네 말로 듣고 있지 않은가?”(사도 2,7-11) 여러 문화 전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복음 선포는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신앙을 가질 것을 요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 고유의 문화 전통을 보존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분리를 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가 모든 문화를 포용할 수 있는 보편성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고, 또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들을 진리의 빛으로 밝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문화가 결코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진리의 궁극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은 이런저런 문화를 마주하게 될 때, 그것에 반대하여 그 속에 담겨 있는 고유한 것을 빼앗고 그것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형식들을 강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인이 세계와 문화 속에 실현시키고자 하는 소식은, 죄 때문에 생겨난 모든 무질서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이고 동시에 진리의 충만함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문화들은 이 만남 때문에 조금도 약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복음의 진리의 새로움에 개방될 태세를 갖추고 이 진리를 통해서 새로이 발전되도록 자극을 받게 됩니다.



    72.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무엇보다도 그리스 철학(philosophia Greca)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다른 접근 방법이 배제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복음이 한때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던 문화 세계들과 차츰 접촉하게 됨에 따라, 토착화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세대가, 교회가 초창기에 직면해야 했던 것들과 다르지 않은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의 생각은 즉시, 매우 오래된 종교적 철학적 전통을 풍부히 간직하고 있는 동양의 여러 지역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도 인도(India)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영적 충동은 인도의 사상이 정신을 시공의 제약에서 해방시켜 절대적 가치를 취득하게 해 줄 경험을 추구하도록 이끌었습니다. 해방을 추구하는 이 역동성이 위대한 형이상학 체계의 배경을 제공하였습니다.
    특히 인도에서 이 풍부한 유산으로부터 신앙과 양립될 수 있는 요소들을 추출해 내어 그리스도교 사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입니다. 공의회의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에서 그 영감을 발견할 수 있는 이 식별 작업에서, 몇 가지 기준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 번째 기준은, 아무리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도 그 근본적 요구들이 동일한 것으로 발견되는 인간 정신의 보편성입니다. 이 첫 번째 기준으로부터 파생되는 두 번째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가 위대한 문화들과 처음으로 접촉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그리스-라틴적 사고 세계 속에서 이루었던 토착화에서 얻은 이점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유산을 포기하는 것은 자칫 당신의 교회를 역사 속에서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기준은 모든 시대의 교회, 곧 미래의 교회에 대해서도 유효합니다. 미래 교회는 오늘 동방 문화들과의 접촉에서 오는 모든 긍정적인 것으로 풍요로워져 있을 것이고, 이 유산 속에서 인류가 미래를 향해 나아감에 따라 솟아나게 될 새로운 문화들과의 결실 풍부한 대화를 위한 참신한 열쇠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인간 정신의 본성과는 반대로, 인도 사상의 독창성과 본원성에 대한 정당한 옹호가, 특정 문화 전통이 그 차별성 속에 폐쇄된 채로 남아 있으면서 다른 전통들에 대립되는 것으로 고집한다는 생각과 혼동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인도에 관해 말한 것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의 위대한 문화들의 유산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또한 대부분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아프리카의 전통 문화들의 풍요로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사실입니다.



    73. 이 고찰들에 비추어 볼 때, 신학과 철학 사이에 설정되어야 하는 관계는 상호 순환성으로 설명될 수 있겠습니다. 신학의 원천과 출발점은 언제나 역사 속에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이어야 하지만, 그 최종 목적은 모든 지나가는 세대와 더불어 점차 심화되어 가는 그 말씀에 대한 이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요한 17,17 참조), 인간의 진리 탐구, 곧 고유한 법칙들에 따라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 활동은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비단 철학 체계의 이런저런 개념이나 요소들을 신학적 논의에 사용하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인의 이성이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출발해서 그것을 더욱 잘 이해하는 데로 나아가는 진리 탐구에 그 성찰 능력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성이 하느님의 말씀과 그것을 더 잘 이해함이라는 두 극 사이를 움직이면서, 계시 진리와 궁극적으로는 순수하고 단순한 진리 자체로부터 일탈시킬 방향들에 대한 경고와 지침들을 제공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 대신에 이성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걸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할 길들을 개척하도록 자극받습니다. 이성이 하느님 말씀과의 이 순환 관계로부터 새롭고 의심할 수 없는 지평을 발견하기 때문에, 철학은 풍요로워지게 됩니다.



    74. 이 관계의 결실 풍부함은, 위대한 고대 철학자들과도 비견될 수 있을 만큼, 고도의 사변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작품들을 저술한 위대한 철학자들이기도 한,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신학자들의 경험을 통해서 입증됩니다. 이것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St. Gregorius Nazianzenus)와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us)와 같은 교부들과, 성 안셀모(St. Anselmus), 성 보나벤투라(St. Bonaventura), 성 토마스 데 아퀴노(St.Thomas de Aquino)와 같은 위대한 세 명의 중세 스승들의 경우에 사실로 확인됩니다. 우리는 철학과 하느님의 말씀 사이의 똑같이 결실 풍부한 관계를, 서방 세계에서는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안토니오 로스미니(Antonio Rosmini), 자크 마리탱(Jacques Maritain), 에티엔 질송(Etienne Gilson),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 그리고 동방 세계에서는 블라디미르 솔로비에프(Vladimir S. Soloviev), 파벨 플로렌스키(Pavel A. Florensky), 페트르 카다에프(Petr Chaadaev), 블라디미르 로스키(Vladimir N. Lossky) 등과 같은 최근의 저명한 학자들의 용기 있는 연구들 속에서도 발견합니다. 분명 다른 사람들의 이름도 더 거명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거명함은 그들 사상의 모든 측면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앙의 내용들이 추가될 때 철학 탐구 과정이 더욱 풍요로워진 몇몇 예를 들자는 것뿐입니다. 적어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합니다. 곧 이 스승들의 영적 여정에 주목하는 것은, 오직 진리 탐구와, 그 탐구 결실들을 인류를 위한 봉사에 적용하려는 노력에 더욱 위대한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교회와 인류의 선익을 위해 이 위대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전통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아가는 사람들이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도 많이 생겨나게 되기를 진정으로 희망하는 바입니다.



    철학의 여러 입지들



    75. 신앙과 철학 사이의 관계사에 관한 이 간략한 개괄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철학의 다양한 입장들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복음의 계시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진 철학(philosophia a Revelatione evangelica penitus distracta)이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상 구세주의 탄생 이전에, 그리고 나중에는 아직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지역들에서 생겨난 철학이 취하는 입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 고유의 법칙들에 따라 오직 이성의 힘에만 의지해서 진리를 추적하는 하나의 ‘자율적’ 체계이고자 하는 철학의 정당한 바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간 이성에 내재하고 있는 허약함이라는 중대한 결함에도, 이 갈망은 지탱되고 강화되어야 합니다. 자연적 질서 테두리 안에서의 진리 탐구로서 철학의 기도(企圖)는 언제나 적어도 함축적으로는 초자연적인 것을 향해 개방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사고의 타당한 자율성 요구는 신학적 논의가 철학적 개념들과 논거들을 활용할 때조차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엄정한 합리적 기준에 따라 논한다는 것은 얻어지는 결과가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을 보증하게 됩니다. 이것은 또한 ‘은총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한다.’는 원리를 확인해 줍니다. 다시 말해, 지성과 의지의 도움을 받는 신앙의 동의는, 저 깊은 내면에서 계시된 진리를 환영하는 신앙인 각자의 자유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합니다.
    이 정당한 접근법은 일부 현대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이른바 ‘분리된 철학(philosophia separata)’ 이론으로써 거부되었습니다. 이 이론은 철학의 정당한 자율성(自律性)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명백히 부당한 것으로 드러나는 사고의 자족성(自足性)마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적 계시를 통해서 제공된 진리를 배격할 때에 철학은 단적으로 자신을 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욱 깊은 진리 탐구의 길을 스스로 차단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76. 철학을 통해서 채택되는 두 번째 입장은 가끔 그리스도교 철학(philosophia Christiana)이라고 불리는 입장입니다. 이 용어는 그 자체로 정당합니다만,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교회의 어떤 공식적 철학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앙 그 자체는 철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용어는 그리스도교적인 방식으로 철학하는 것, 곧 신앙과의 역동적 결합으로 개념된 철학적 사변을 가리키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자기들의 탐구에서 신앙과 모순되지 않으려고 노력한 그리스도교적 철학자들이 발전시킨 철학을 지칭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적 철학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 기여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을 철학 사상의 중요한 발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철학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앙이 이성을 정화시킨다는 의미에서의 주관적 측면입니다. 대신덕(對神德)의 하나인 신앙은 이성을 철학자의 전형적 유혹인 자만심(nimia confidentia)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사도 바오로, 교부들, 그리고 우리 시대의 파스칼(B. Pascal)과 키르케고르(S. Kierkegaard)와 같은 철학자들은 그러한 자만심을 공박하였습니다. 겸손을 배우는 철학자는 또한 악과 고통의 문제, 하느님의 위격적 본성, 인생의 의미 등과 같은 문제, 그리고 ‘도대체 왜 어떤 것은 존재하고 무(無)는 없는 것일까?’와 같은, 더욱 직접적으로 형이상학적인 문제와 같이, 계시의 소여가 없었더라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파고들 용기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교적 철학의 두 번째 측면은, 그 내용에 관한 한 객관적입니다. 분명히 계시는, 비록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성의 힘만으로는 결코 발견될 수 없었을 진리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들 가운데에는 우주의 창조주이신 자유롭고 위격적인 하느님이라는 관념이 있습니다. 이 진리는 철학, 특히 존재의 철학(philosophia essendi)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신앙의 빛 속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악 문제에 대하여 적절한 철학 체계를 구성할 수 있게 도와 주는 죄의 실재도 있습니다. 영적 존재자로서 인격 개념은 신앙의 또 하나의 독특한 공헌입니다. 인간 존엄성, 평등, 그리고 자유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선언은 의심할 바 없이 근대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최근에는 그리스도교적 계시에 너무도 중심적인, ‘사건으로서의 역사(historicus eventus)’라는 관념이 철학에도 중요하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의 진리 탐구에서 새로운 장으로 제시되고 있는 역사 철학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인간의 초자연적 소명의 가능성과 원죄 자체와 같은, 성서에 표현되어 있는 특정 진리들의 합리성을 탐구할 필요도 그리스도교적 철학의 객관적 요소들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이성이 하마터면 그 속에 폐쇄될 뻔했던 좁은 한계를 뛰어넘어 참되고 합리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촉구하는 과제들입니다. 이 문제들은 사실 이성의 활동 영역을 넓혀 줍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성찰할 때에 철학자가 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시에 기초를 두고 신앙의 진리들을 이해하고 해명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고유 영역에서 순수하게 합리적인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작업하면서, 진리의 새로운 측면들에 대한 탐구를 확장시켜 왔습니다. 근대 철학과 현대 철학의 상당 부분은 하느님 말씀의 이 자극이 아니었더라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많은 사상가들이 그리스도교의 정통 가르침을 포기했다는 실망스러운 사실에도, 여전히 그 중요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77. 철학은 또한 신학 자체가 철학의 도움을 요청(ipsa theologia ad philosophiam provocat)할 때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신학은 사실상 언제나 철학을 필요로 해 왔고 또 아직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빛 속에서 비판적 이성의 활동으로서 신학은 자신의 모든 탐구 활동에서, 개념과 논거로 형성되고 훈련된 이성을 요구합니다. 더욱이 신학은 자신의 주장의 이해 가능성과 보편적 진리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철학을 대화 상대자로서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교부들과 중세 신학자들이 비그리스도교적 철학자들을 기꺼이 활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은 철학이 이 세 번째 입장에서도 보존하고 있는 철학의 자율성(autonomia)의 가치를 확인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철학 자체가 겪어야 하는 깊은 변형도 함께 보여 줍니다.
    교부 시대 이래로 철학이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라고 불린 것은 그 고상하고 필수 불가결한 공헌 덕분이었습니다. 이 칭호는 신학에 대한 철학의 굴욕적인 복종이나 순수 기능적인 역할을 지칭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경험 과학들을 제일 철학(prima philosophia)에 대해 ‘시녀적(ancillis)’이라고 말했던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었습니다. 이 용어는 우리가 언급한 자율의 원리 때문에 오늘날은 사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지만, 두 학문 사이의 연결의 필연성과 그 분리 불가능성을 가리키려고 역사 전반에 걸쳐서 사용되었습니다.
    만일 신학자들이 철학의 도움을 거절한다면, 그들은 철학 작업을 수행하는 중에 부지불식간에, 초라하게 신앙의 이해에 적용된 사고 구조들의 테두리 속에 폐쇄되는 위험을 무릅쓰게 될 것입니다. 만일 철학자들이 신학과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한다면, 그들은 일부 근대 철학자들에게서 일어났듯이 필시 혼자만의 힘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들을 숙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어느 쪽도 모든 학문이 정당하게 보장되기를 바라는 자율의 원리를 정초하는 데 심각하게 위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입장을 취할 때, 철학은 계시 이해를 위해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그것이 지니고 있는 그 함축 내용들 때문에 신학처럼 더욱 직접적으로 교도권과 그 식별의 권위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철학이 신학과 접촉할 적마다 존중해야 하는 몇 가지 요구들이 파생되게 됩니다.



    78. 이 성찰들의 빛 속에서, 교도권이 왜 반복적으로 성 토마스 사상의 공로들을 격찬하고 그를 신학 연구의 인도자이며 전형으로 삼았는지가 명백히 드러납니다. 이것은 순수하게 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또 특정 이론들에 대한 호감을 표시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교도권의 의도는 언제나, 성 토마스가 어떤 의미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진정한 전형인지를 보여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실상 그의 성찰 속에서 이성의 요구들과 신앙의 힘이, 일찍이 인간 사고가 이룩한 가장 고상한 종합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성에게 고유한 모험을 평가 절하함이 없이, 계시를 통해서 도입된 근본적인 새로움을 옹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79. 과거의 교도권이 가르쳐 온 바를 발전시키는 이 마지막 부분에서 저는 신학이, 아니 그에 앞서 하느님의 말씀 자체가, 오늘날의 철학적 사고와 현대 철학들에 대해서 요구하는 몇 가지 주요 사항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철학은 자기 고유의 법칙에 복종해야 하고 그 자신의 원리들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진리는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계시의 내용은 결코 이성의 발견들과 정당한 자율성을 약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성은 자신이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가치를 자처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코 질문당하고 질문하는 자신의 능력을 상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계시 진리는 ‘자립적 존재(Esse subsistens)’ 자체로부터 솟아나는 광채 덕분에 빛의 충만함을 제공하고, 따라서 철학적 탐구의 길을 조명합니다. 요컨대, 그리스도교 계시는 철학적 사고와 신학적 사고 사이의 상호 관계의 진정한 접촉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진리 자체의 권위에만 복종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에 일치되는 철학이 발생되도록 협력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철학은 문화들과 그리스도교 신앙 사이의 만남의 장이 되고, 신앙인과 비신앙인 사이의 이해의 장이 될 것입니다. 신앙이 사고를 배격하지 아니하고 그것과 협력하게 될 때, 그것은 신앙인에게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더욱 진실해진다는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는 것도 역시 교부들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바로 동의하며 사고한다는 것입니다. …… 신앙인들도 역시 사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으면서 사고하고, 사고하면서 믿습니다. …… 만일 신앙이 사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95) “만일 동의(assensus)가 없다면, 신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동의 없이는 진정으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96)



 



제7장 오늘날 요구되는 과제들



    하느님 말씀의 필수 요구들



    80. 성서 속에는 예외적으로 철학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인간관과 세계관을 알려 주는 함축적이고 명시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서 본문 속에 포함되어 있는 풍요로움을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거기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된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홀로 절대자이십니다. 성서로부터는 또한 ‘하느님의 모습(imago Dei)’으로서의 인간관이 솟아납니다. 이 관점은 인간의 생명, 그의 자유, 인간 정신의 불멸성에 관한 지침들을 제공해 줍니다. 피조된 세계가 자족적(自足的)이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본질적으로 하느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온갖 형태의 자율성에 대한 착각은, 인생의 조화와 의미에 대한 합리적인 탐구를 파괴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악의 가장 비극적 형태인 도덕적 악(malum morale) 문제에 대해서도, 성서는 그런 악이 어떤 질료적 결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 불복종으로 다친 상처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의 의미 문제를 제기하고 인간 존재자를 인간 실존의 완전한 실현인 ‘하느님의 육화(肉化)된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께 향하게 함으로써 대답합니다. 성서 본문을 읽는 것은 이 문제의 다른 측면들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온갖 형태의 상대주의(relativismus), 물질주의(materialismus), 범신주의(pantheismus)에 대한 거절입니다.
    성서 속에서 발견되는 ‘철학’의 근본적 확신은, 세계와 인간 생명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는 그 충만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육화의 신비는 언제나 인간 실존, 피조된 세계, 하느님 자신에 관련된 수수께끼를 푸는 데 핵심적인 열쇠로 남아 있습니다. 이 신비의 도전은 철학이 한계에 도전하도록 자극합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그것이 그 속에 유폐될 위험에 처해 있는 장벽들을 철폐하는 논리를 자신의 것으로 삼도록 불리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이 때에야 비로소 인생의 의미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맞게 되고, 하느님과 인간 존재자의 내밀한 본질이 이해 가능하게 됩니다. 육화된 말씀의 신비 안에서 인간 본성과 신성이 각기 자율성을 고스란히 보존한 채 어떠한 혼동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긴밀히 결속시키는 독특한 유대를 보장받습니다.97)



    81. 현대 상황의 가장 중요한 측면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의미의 위기(discrimen significationis)’입니다. 생명과 세계에 관한, 때로는 과학적 성격까지 띠는 관점이 지나치게 흘러 넘쳐, 사실상 학문의 단편화 현상마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의미 추구를 어렵게 만들고 가끔은 도로(徒勞)에 그치게 만들고 있습니다. 참으로 극적일 정도로, 우리가 호흡하며 살아가고 또 실존의 얼개 자체를 구성하는 소여와 사실들의 더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의미에 대한 물음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지 매우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그 답을 담고 있는 이론들의 다수성과, 세계와 인생을 해석하는 서로 다른 관점들은, 쉽사리 회의주의(scepticismus), 냉소주의(indifferentia), 허무주의(nihilismus)의 다양한 형태로 빠지게 되는 이 근본적 의심을 더욱 가중시킬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인간 정신은 가끔 그것을 점점 더 자기 자신 안에, 그리고 일체의 초월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내재의 테두리 안에 폐쇄되게 만드는 일종의 애매한 사고 형식에 지배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삶의 의미를 묻지 않는 철학은, 이성을 진정한 진리 탐구의 열정이 없는 단순한 부수적 기능들로 환원시킬 위험 속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철학이 하느님의 말씀에 일치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삶의 긍극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그 지혜적 차원(sapientialis amplitudo)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첫 번째 요구는 사실상 철학이 그 자신의 본성에 일치되도록 자극하는 데 매우 유익합니다. 그렇게 하는 데서, 그것은 과학의 여러 영역들의 토대와 한계들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비판적 요인이 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궁극적인 목적과 의미로 수렴시키며 인간 인식과 행위의 단일성의 궁극적 척도의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이 지혜적 차원은, 인간의 기술이 궁극적 가치들에 대한 더욱 새롭고 날카로운 감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합니다. 이 기술이 단지 공리주의적 목적 이상의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즉시 비인간적이 될 것이고, 심지어 인류의 가공할 파괴자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98)
    하느님의 말씀은 남녀 인간의 궁극적 운명을 계시하고, 그들이 세계 속에서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보편적인 설명을 제공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은 철학이, 각 사람이 타고난 종교적 충동에 상응하는 이 의미의 자연적 토대를 탐구하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궁극적이고 총괄적인 의미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철학은 그 과제에 부적합할 뿐만 아니라 거짓된 철학입니다.



    82. 그러나 이 지혜적 기능은 그 자체가 참되고 진정한 인식이 아닌, 다시 말해, 기능적이고 형식적이며 공리주의적인 실재의 특수하고 세부적인 측면들뿐만 아니라, 그 총체적이고 결정적인 진리 또는 인식되는 대상의 본질(essentia) 자체를 지향하지 않는 철학을 통해서는 수행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두 번째 요구를 부각시킵니다. 곧 철학은 인간의 진리 인식(veritatis cognitio) 능력, 다시 말해, 스콜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사물과 지성의 일치(adaequatio rei et intellectus)를 통해서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인식 가능성을 확증해 줍니다.99) 신앙에 고유한 이 요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명시적으로 재확인해 주었습니다. “인간 지능은 현상 세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므로, 비록 죄의 결과로 어느 정도 흐려지고 약해지기는 하였지만 인식 대상의 실체를 참으로 확실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100)
    근본적으로 현상주의적이거나 상대주의적인 철학은 하느님 말씀 안에서 발견되는 풍부한 보화들에 대한 더욱 심층적인 탐구를 돕는 데 부적절합니다. 성서는 언제나, 인간이 비록 이중성과 거짓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기는 하지만,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를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서, 특히 신약성서는 참으로 존재론적인 내용을 가진 진술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영감 받은 저자들은 진실한 가르침들, 곧 객관적 실재를 표현할 수 있는 가르침들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전통이 사도 요한과 사도 바오로의 몇몇 본문들을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에 관한 가르침들로 알아듣는 잘못을 범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이 본문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서,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객관적으로 진실한 인식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 철학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성서가 객관적으로 진실될 수 있다고 간주하고 있는 도덕적 양심의 판단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101)



    83. 이제까지 말한 두 가지 요구 사항에는 이미 세 번째 요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형이상학(vera metaphysica)적 차원의 철학, 곧 그 진리 탐구에서 절대적이고 궁극적이며 정초적인 어떤 것을 얻기 위하여 경험적 소여들을 초월할 수 있는 철학이 필요합니다. 이 요구는 지혜적 인식과 분석적 인식에 똑같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최고선(最高善) 곧 하느님 자신 속에 그 궁극적 토대를 두고 있는 도덕적 선을 인식하기 위해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저는 여기서 어떤 특정 역사적 철학 사조 또는 학파의 의미로 형이상학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실재와 진리가 사실적이고 경험적인 것들을 초월하고, 비록 불완전하고 유비적이기는 하지만 진실되고 확실한 방식으로 이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차원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 존재자의 능력을 복권시키려는 것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인간학(anthropologia)에 대립되는 학문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적 본성에 바탕을 두고 인격적 존엄성의 근거를 확립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형이상학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 인격은 존재와의 만남을 위한 특전적 장(場)이 됩니다. 형이상학적 탐구가 그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남녀 인간이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것을 향한 호소를 발견할 때마다, 그들 앞에는 진리 안에서, 미 속에서, 도덕적 가치들 안에서, 다른 사람들 안에서, 그리고 존재 자체 곧 하느님 안에서, 실재의 형이상학적 차원이 펼쳐집니다. 우리는 제이천년기의 끝머리에 서서, 현상으로부터 토대로(a phenomeno ad fundamentum) 나아가야 한다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시급한 과제입니다. 우리는 경험 속에만 갇혀 있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경험이 인간 존재자의 내면성과 영성을 밝혀 주기는 하지만, 사변적 사고가 영성의 핵심과 그것이 솟아나는 토대를 관통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개방성을 배격하는 철학은 근본적으로 계시 이해의 촉매자로서의 과제에 부적합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인간의 경험과 심지어 인간의 사고까지 초월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인식이 엄격히 감각적 경험 세계로 제한된다면, 이 ‘신비’는 결코 계시될 수 없고, 또 신학이라고 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102) 이리하여 형이상학은 신학적 탐구에서 본질적인 매체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형이상학적 지평이 없는 신학은 종교적 경험의 분석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고, 또 계시 진리의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가치를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신앙의 이해’를 가능하게 해 주지도 못할 것입니다.
    만일 제가 형이상학적 요소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고 있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이야말로 오늘날 철학의 광범한 영역에 침투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고, 또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그릇된 행동 방식들을 교정하기 위하여 취해야 할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84. 해석학(hermeneutica)과 언어 분석(sermonis humani pervestigatio) 영역에서 최근의 발전을 생각해 본다면, 형이상학의 중요성은 훨씬 더 명백해집니다. 해석학과 언어 분석의 결과들은 신앙의 이해에 매우 유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사고와 언어 그리고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의 구조를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부 학자들은, 이성이 실재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심층적으로 검증하지 않은 채, 어떻게 실재가 이해되고 표현되는지를 묻는 데 머무르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정신 자세 속에서 오늘날의 이성의 능력에 대한 신뢰의 위기를 재확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편견들에 바탕을 두고 이 입장들이 신앙의 내용을 희석시키거나 그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려 들 때, 그들은 이성의 기초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하는 중에 자기 자신들의 가치마저 평가 절하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신앙은 분명히 인간의 언어가 신적이고 초월적인 실재를 보편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비(類比, analogia)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103)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언제나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에 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단적으로 진실된 언명으로 인도하지 않고 단순히 우리를 이 해석에서 저 해석으로 돌려 보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계시란 가능하지 않고, 다만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가지시는 생각에 관한 인간적 관념들의 표현만 가능했을 것입니다.



    85. 하느님의 말씀이 철학에 부과하는 이런 요구들이 오늘날 철학적 탐구에 종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담스러운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러 세대에 걸쳐 교황들께서 반복적으로 가르쳐 오시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재확인한 것을 종합하여, 인간 존재자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인식관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강하게 재천명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사상이, 다가올 천년기를 통해서 감당해야 하는 과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식의 세분화는 진리에 대한 단편적 접근과 그에 따른 의미의 분열과 더불어, 현대인들이 내밀한 일치에 이르는 것을 막습니다. 어떻게 교회가 이것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지혜적 과제를 사목자들에게 부과하는 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 과제를 걸머질 의무를 기피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오늘날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인간 사고에 부과되는 요구들에 응답하고자 하는 철학자들이 이 요구들에 바탕을 두어, 그리고 위대한 전통과의 유기적인 일치 속에서 그들의 사상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인들로부터 시작해서 교부들과 스콜라 학자들을 통해서 근대와 현대 사상의 기본적 성취들을 포함하고 있는 전통입니다. 만일 철학자들이 이 전통의 테두리 안에 자리를 잡고 거기서 그들의 영감을 이끌어 낸다면, 그들은 분명히 철학의 자율성 요구를 존중하는 데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상황 속에서 이 전통이 인식의 올바른 접근을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일부 철학자들이 발견하였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전통에 호소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인류에 속하는 문화적 유산에 대한 인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전통에 소속되는 것은 바로 우리이고, 그것을 우리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바로 전통 속에 깊이 뿌리박음으로써, 오늘날 미래를 위해서 본래적이고 새로우며 구성적인 사고 방식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호소는 신학을 위해서는 훨씬 더 타당합니다. 신학이 교회의 전승을 그 본래적 원천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104) 또한 그 덕분에 그것은 초기의 깊은 신학 전통과, 그 진정한 지혜 덕분에 시공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속적인 철학 전통을 둘 다 복원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86. 현대 철학과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서 발전되어 온 철학 사이의 지속적인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성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특히 오늘날 유포되어 있는 몇몇 사상 계보 속에 숨어 있는 위험을 노출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오류와 그것이 철학 활동에 미칠 수 있는 위험을 지적하기 위해서 비록 짧게나마 그것들을 검토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절충주의(eclecticismus)라고 불리는 사조(思潮)입니다. 이것은 신학에서조차도 탐구, 교육, 논증에서, 그 내면적 일관성, 어떤 체계나 역사적 맥락 속에서의 그 위치 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상이한 철학 체계들에서 끌어 낸 개별적 관념들을 사용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주어진 가르침의 진리에 속하는 부분과, 그릇되거나 주어진 과제에 적합하지 않은 요소들 사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다. 절충주의의 극단적인 형태는 또한 때로는 일부 신학자들까지도 쉽게 떨어지는, 철학 용어들의 수사학적 남용에서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조작은 진리 탐구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철학적이건 신학적이건 간에 이성이 진지하고도 과학적인 방식으로 논증하도록 이끌어 주지 못합니다. 철학적 가르침들, 그 특수한 용어들, 그 배경 등에 대한 엄정하고 깊이 있는 탐구는 절충주의의 위험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 주고, 그것들을 신학적 과제에 적합한 방식으로 토론 속에 통합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87. 절충주의는 방법상의 오류인데, 그 속에는 또한 역사주의(historicismus)의 주장도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서는, 그것을 그 고유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 속에 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주의의 근본적인 주장은, 어떤 철학의 진리성이, 그것이 특정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목적에 적합한지 여부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함축적으로는 진리의 지속적인 타당성이 부정되는 것입니다. 역사주의자들은 한 시대에 진실이었던 것이 다른 시대에는 거짓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리하여 그들에게 사상의 역사는, 지금은 대부분이 낡았고 의미 없게 되어 버린 과거의 입장들을 조명하는 데에나 유용한 고고학적 자료 이상을 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상 체계가 어떤 식으로든 시간과 문화에 매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표현하는 진리 또는 오류는 시공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나 불변하게 그러한 것으로 규정되고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신학 연구에서 역사주의는 대부분 ‘근대주의(modernismus)’의 형태를 띠고 나타납니다. 정당하게 신학적 논의들을 우리 시대에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보려는 관심을 가진 일부 신학자들은, 그러나 전통에 비추어서 내려야 하는 비판적 평가를 무시한 채, 다만 최근의 견해들과 철학 용어들만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이런 형태의 근대주의는, 진리(veritas)를 실용성(utilitas)으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이 응답하도록 불리운 진리의 요구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88. 또 하나의 위협은 과학주의(scientismus)입니다. 이것은 실증 과학의 지식과는 다른 형태의 지식들의 타당성을 부정하는 철학 사조입니다. 그것은 종교, 신학, 윤리학, 미학 등의 지식들을 단순한 환상으로 매도합니다. 과거에는 똑같은 태도가, 형이상학적 이론들을 부조리로 간주하는 실증주의와 신실증주의로 나타났었습니다. 비판적 인식론은 이런 주장을 기각시켰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가치들을 단순한 감정의 산물로 간주하고, 순수하고 단순한 사실성을 분명하게 확보하기 위해서 존재(esse) 관념을 배격하는 과학주의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과학이 기술의 진보를 통해서 인간 실존의 모든 측면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과학적 탐구와 현대 기술의 부인할 수 없는 성공이 이런 과학주의적 성향을 부추겼습니다. 이것은 다양한 문화 속에 파고들어 근본적 변화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경계선조차 없어져 버린 것 같습니다.
    불행하게도 과학주의는 인생의 의미 물음과 관련된 모든 것을 비합리적인 환상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철학의 다른 주요 주제들에 접근하는 방법도 이에 못지않게 실망스럽습니다. 곧 과학주의는 합리적 토대를 결한 채, 피상적인 유비에 바탕을 두고 철학적 주제들을 분석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사고를 빈약하게 만들어, 이성적 동물(rationale animal)인 인간 존재자가 처음부터 끊임없이 고찰해 온 궁극적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만듭니다. 그것은 윤리적 판단을 통해 제공되는 비판을 위한 여백을 남겨 놓지 않기 때문에, 과학주의적 정신은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가능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이끌었습니다.



    89. 실용주의(pragmatismus)도 이에 못지않게 위험합니다. 이것은 선택을 하는 데 윤리적 원리들에 입각한 이론적 숙고나 판단들을 배격하는 정신적 태도입니다. 이런 사고 방식의 실천적 귀결은 매우 심각합니다. 특히 불변의 가치들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은 민주주의 관념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점증하고 있습니다. 곧 어떤 행동이 허용될 수 있느냐의 여부는 다수로써 결정된다는 것입니다.105) 이것의 귀결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실상 인류의 중대한 도덕적 결정들은 제도적 조직들의 점진적인 숙고들로 결정되어 왔습니다. 더욱이, 인간학 자체가 고통과 희생, 생명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중대한 윤리적 딜레마와 실존적 분석을 배격하는 일차원적 인간관으로써 강하게 제약되었습니다.



    90. 우리가 검토해 온 입장들은 오늘날 존재의 의미의 풍요로움을 배격한 많은 철학 체계들의 공통 기준으로 나타나는 허무주의(nihilismus)라는, 더욱 일반적인 개념으로 전환됩니다. 이것은 일단 모든 토대를 부인하고 모든 객관적 진리를 부정합니다. 하느님 말씀의 내용과 요구들에 대립된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허무주의는 인간성의 부정이고 인간의 정체 자체에 대한 부정입니다. 존재의 망각은 객관적 진리와 인간 존엄성을 지탱하고 있는 토대와의 접촉을 상실하는 데로 이끕니다. 이것은 남녀 인간의 모습에서 하느님과의 유사성이라는 특징을 지워 버리고, 그들을 차츰 파괴적인 힘에의 의지나 희망 없는 고독으로 몰고 갈 위험이 있습니다. 일단 인간 존재자에게 진리에 접근할 가능성이 차단되게 되면, 그들을 해방하려는 시도는 환상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실상 진리와 자유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흥망을 함께합니다.106)



    91. 이런 사상 조류들을 논하는 데서, 어떤 하나의 전망 속에 통합하기가 매우 어려운, 철학이 오늘날 처하고 있는 상황을 완벽하게 그려 내려는 뜻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분명히, 우리의 지식과 지혜의 유산이, 논리학, 언어 철학, 인식론, 자연 철학, 인간학, 그리고 인식의 감정 차원에 대한 더욱 심층적인 분석과 자유에 대한 실존 분석적 접근 등 참으로 여러 영역에서 풍요로워졌음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세기 이래로 합리주의의 요체인 ‘내재의 원리(principii immanentiae)’가, 과거에는 논의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던 가르침들을 근본적으로 의문에 부쳤습니다. 이에 대응해서 심지어, 이성의 절대적 자기 정초의 요구마저 근거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비합리주의적 사조들이 일게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는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근대 후기 시대(tempus post-modernum)’라고 명명되었습니다. 매우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는 이 용어는, 매우 광범위하고 강력하여 중요하고 지속적인 변화들을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요인들의 복합체가 대두하였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용어는 미학적, 사회적, 기술적 현상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후 철학 영역에도 적용되었지만, 다소 모호한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근대 후기’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판단이 때로는 부정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한 다양한 시대 구분의 경계 문제라는 까다로운 문제에 아직 합의점을 도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근대 후기’라고 주장하는 사상 조류들이 적절한 주의를 요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에 따르면, 확실성의 시대는 확연히 지나갔고, 인간 존재자는 이제 모든 것이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총체적 의미 부재의 지평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많은 사상가들이 모든 확실성에 대한 그들의 파괴적인 비판 속에서 핵심적 사항들을 구분하는 데 실패하였고, 신앙의 확실성들을 의문에 부쳤습니다.
    이 허무주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시대를 특징지어 온 가공할 악의 경험을 통하여 정당화되어 왔습니다. 이런 극적인 경험은, 역사를 이성의 진보이며 모든 행복과 자유의 원천이라고 보는 합리주의적 낙관주의(optimismus rationalista)의 붕괴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20세기가 끝나 가는 지금, 우리를 무섭도록 위협하고 있는 것은 절망의 유혹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실증주의적 태도가, 과학과 기술의 정복 덕분에 우주의 조형자(demiurgus)인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자기 운명에 대하여 완전히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을 계속해서 품고 있다는 것은 사실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현대 신학의 과제들



    92. 계시를 이해하고자 하는 신학은 다양한 역사적 시기에 언제나 다양한 문화적 요구들에 응답해야만 했고, 신앙의 내용을 일관된 명료한 개념을 통해서 그 문화들에 매개하고자 했습니다. 오늘날도 역시 신학은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신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부터 위탁받은 과제, 곧 더욱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고유한 방법들을 쇄신해야 한다는 과제에 더욱 투신해야 합니다. 저는 이와 관련해서 교황 요한 23세께서 공의회의 개막시에 행하신 연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적이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종교를 성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순수한 기대에 힘입어, 이 가르침은 더욱 널리 그리고 더욱 깊이 알려져야 하며, 영혼들은 더욱 충실하게 그 가르침으로 교육되고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충실하게 존중되어야 하는 이 불변의 가르침은 더욱 심층적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또 우리 시대의 요구들을 포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되어야 합니다.”107)
    다른 한편, 신학은 계시가 위탁한 궁극적 진리를 추구하여야 하고, 중도에 머무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신앙 자체 안에서 발견되는 역동성”에 상응하고 그들 탐구의 고유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살아 계신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 계획”임을 기억해야 합니다.108) 신학의 일차적 관심사인 이 과제는 철학에도 도전이 됩니다. 오늘날 과제로 다가오는 여러 문제들은 그 진리가 새롭게 인식되고 표현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론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협동 작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곧 진리 자체는 신학과 철학을 지지하고 자극하며 성장시키는 보편적 권위로서 부과됩니다(에페 4,15 참조).
    보편적으로 타당한 진리 인식의 가능성을 믿는 것은 결코 옹졸함(intollerantia)을 낳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진지하고 진정한 대화의 본질적 조건입니다. 오직 이런 기초 위에서만 분리를 극복하고 함께 손을 맞잡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에게만 알려져 있는 길을 따라 걷는, 완전한 진리 탐구 여정에 동행할 수 있습니다.109) 저는 여기서 현대 신학의 과제라는 관점에서 일치의 요구가 오늘날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93. 신학의 주요 목표는 계시에 대한 이해와 신앙의 내용을 제공하는 것(Revelationis intellectus praebeatur fideique doctrina)입니다. 그렇다면 신학 연구의 중심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명상이 될 것입니다. 이 신비에 대한 접근은 성자(聖子)의 육화(肉化)의 신비에 대한 성찰, 곧 그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심, 수난과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이 신비는 영광스러운 부활과 성부 오른편으로의 승천으로 이어지고, 거기서부터 그분께서는 교회를 탄생시키고 성장시키시는 진리의 성령을 보내실 것입니다. 이런 이점으로부터 출발해서 신학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자기 비움(kenosis)을 이해하는 데에 투신하게 됩니다. 이것은 고통과 죽음이 스스로를 내어 주고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는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을 위해 주어진 위대하고 신비스러운 진리입니다. 이런 빛 속에서 본문들, 곧 일차적으로는 성서 본문들과 그 다음으로는 교회의 살아 있는 전승을 표현하는 본문들에 대한 정밀한 주해가 기본적이고 절박한 필요로 나타납니다. 이 전망 속에 최근에 몇 가지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오직 부분적으로만 새로울 뿐입니다. 그리고 이에 관한 일관성 있는 해결책은 철학의 도움 없이는 발견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94. 첫 번째 문제는 의미(significatio)와 진리(veritas)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입니다. 다른 본문들과 마찬가지로, 신학자가 일차적으로 해석하는 원천들은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하는 의미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성서 본문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전달하시는 하느님에 관한 진리로 제시됩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언어가, 육화의 논리를 반영하고 있는 놀라운 ‘관용(indulgentia)’과 더불어 당신의 진리를 전해 주시는 하느님의 언어를 구현시킵니다.110) 계시의 원천들을 해석하는 데 신학자는 본문들이 언어의 한계를 안고 있으면서도 전해 주고자 하는 깊고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성서 본문들, 특히 복음서들의 진리는 분명히 역사주의적 실증주의(positivismus historicista)가 주장하듯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들을 이야기하거나 중립적 사실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111) 이 본문들이 언급하고 있는 사건들의 진리는 단순한 역사적 발생을 넘어 구원 역사 ‘안에’ 그리고 구원 역사를 ‘위하여’ 그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 진리는 여러 세기에 걸쳐서 이 본문들을 그 본래적 의미를 고스란히 보존한 채 지속적으로 명상해 온 교회를 통해서 충만하게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과 그 의미 사이의 관계가 또한 철학적 관점에서 연구될 필요가 절실합니다. 이 관계가 바로 역사의 특별한 의미를 구성합니다.



    95. 하느님의 말씀은 어떤 특수한 민족이나 역사의 어떤 특정 시기만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교의적 가르침들도, 가끔은 당대의 문화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불변의 궁극적인 진리를 체계화합니다. 따라서 어떻게 진리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그 진리를 표현하는 데 불가피한 역사적, 문화적 제약들과 화해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역사주의의 주장들은 지탱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영역에 개방되어 있는 해석학의 활용은, 본문들이 발전되어 나온 역사의 우연적인 상황들로부터 이 상황들을 넘어 본문들이 표현하고 있는 진리로 나아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의 언어는 역사의 제약을 받고 있고 또 다르게 구성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 존재자는 언어 현상을 능가하는 진리들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결코 시간과 문화로써 한정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알려지지만 또한 역사를 능가합니다.



    96. 이 숙고는 다른 또 하나의 문제, 곧 공의회의 규정들 속에서 사용된 개념적 언어의 항구한 타당성에 관한 문제에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해 줍니다. 저의 선임 교황 비오 12세께서 회칙 「인류」(Humani Generis)에서 이미 이 문제를 언급하고 계십니다.112)
    이 문제를 고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들이 다양한 시대와 문화들 속에서 지니게 되는 의미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상사는, 문화들의 다양성과 그 발전을 통하여 어떤 기본 개념들이 그 보편적인 인식론적 가치를 지니고 있고, 따라서 그것들이 표현하는 명제들의 진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113)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철학과 과학은 서로 아무런 교류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고, 또 그것들이 사색되고 표현되는 것과는 다른 문화들 속에 받아들여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해석학적 문제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해결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많은 개념들의 객관적 가치는 그것들의 의미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철학적 사변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철학이 특별히 개념적 언어와 진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그 관계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줄 방법들을 제시하는 데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97. 원천들에 대한 해석은 신학의 중심 과제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까다롭고 절박한 과제는 계시 진리의 이해(revelatae veritatis perceptio) 또는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를 표현하는 일입니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신앙의 이해’는 무엇보다도 교의 신학이 그 기능을 적절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줄 존재의 철학(philosophia essendi)의 기여를 필요로 합니다. 신앙의 진리들을 행동 규범쯤으로 해석하는, 금세기 초에 영향력을 발휘하던 교의 신학적 실용주의는 이미 논박되고 배격되었습니다.114) 그러나 이 진리들을 순수하게 기능적으로만 이해하려는 유혹은 언제까지나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다만 사변의 차원에서 부적절하고 환원적이며 피상적인 접근법일 뿐입니다. 예컨대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오직 ‘아래로부터(de basi)’만 접근하는 그리스도론(Christologia)이나, 시민 사회만을 기준으로 삼고 전개되는 교회론(ecclesiologia)은 이런 환원주의의 위험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일 신앙의 이해가 신학적 전통의 풍요로운 유산을 하나로 통합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존재의 철학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 철학은 낡은 형식의 무익한 반복에 떨어지는 것을 피하면서, 최근에까지 이르는 철학 전통 전체의 요구들과 통찰들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존재의 문제를 새롭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적 형이상학 전통을 잇고 있는 존재의 철학은 실재를 그 존재론적이고 인과적이며 상호 교환적 구조 속에서 고찰하는 역동적인 철학입니다. 그것은 실재 전체를 향한 충만하고 총체적인 개방을 허용하고, 모든 한계를 넘어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분께 인도하는 존재 현실력(actus essendi) 자체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강인하고 영속적입니다.115) 인식의 새로운 원천인 계시로부터 그 원리를 받아들이는 신학 안에서 이 전망은 신앙과 형이상학적 추론 사이의 내밀한 관계에 일치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98. 이 고찰들은 윤리 신학(theologia moralis)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신앙의 이해가 신앙인의 행위와 연결되는 영역에서 철학의 복원이 시급합니다. 사회, 경제, 정치, 과학 등의 영역에서 제기되는 현대적 도전들에 직면해서 사람들의 도덕적 양심(ethica conscientia)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저는 「진리의 광채」에서 현대 세계의 많은 문제들이 진리의 위기로부터 초래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인간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선에 대한 보편적 진리의 개념이 상실된 이상, 양심의 개념 역시 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양심은 더 이상 그 원초적인 상태에서조차 인간 지성의 행위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지성의 기능은 선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고, 나아가 지금 이 곳에서 선택해야 할 올바른 행위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의 기준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특권을 개인의 양심에 허용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은 개인주의 윤리에 아주 가까운 것입니다. 개인주의 윤리에서는 각 개인이 다른 사람의 진리와는 다른 자기만의 진리를 갖게 됩니다.”116)
    저는 그 회칙 전반에 걸쳐서 윤리 영역에서 진리의 근본적인 역할을 분명하게 강조하였습니다. 매우 절박한 윤리 문제의 대부분에 관련되는 이 진리는, 윤리 신학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의 근거들을 해명할 줄 아는 정밀한 연구를 수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윤리 신학은, 주관주의적이지도 않고 공리주의적인 것도 아니면서 선(善)의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윤리학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윤리학은 철학적 인간학과 선의 형이상학을 전제하고 또 함축하고 있습니다. 윤리 신학은 필시 그리스도교적 성덕과 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덕행에 연결되는 이런 통합적 전망을 활용하여, 평화, 사회 정의, 가정, 생명 수호, 환경 보호 등의 다양한 문제들을 더욱 적절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99. 교회 내에서 신학 작업은 무엇보다도 신앙 선포(kerygma)와 교리교육에 봉사합니다.117) 복음 선포는 회개에의 호소이며, 파스카 신비에서 그 절정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하는 진리의 충만함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도 4,12; 1디모 2,4-6 참조).
    이런 맥락 속에서, 신학 외에도 교리교육(catechesis)에 대한 언급이 왜 중요한 것인지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리교육은 신앙의 빛 속에서 더욱 깊이 탐험되어야 하는 철학적 함축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리교육의 일부를 이루는 교육은 인격 형성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의 언어 전달 방식으로서 교리교육은 교회의 가르침을 그 총체성 속에서 제시해야 하고,118) 그것이 신앙인의 삶과 연관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119) 그 결과는, 다른 방법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교육과 삶 사이의 독특한 유대입니다. 왜냐하면 교리교육에서 전달되는 것은 어떤 개념적 진리 체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하느님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120)
    철학적 탐구는 진리와 삶, 사건과 이론적 진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초월적 진리와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 사이의 관계를 명료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121) 이것은 신학의 분과들과 여러 철학 조류들로부터 끌어 낸 통찰들 사이의 상호 협력 관계를 포함하고 있고, 이런 협력 관계는 신앙의 더욱 깊은 이해와 전달에 참으로 결실 풍부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결 론



    100. 본문 속에서 가끔 참조한 바 있는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가 반포된 지 한 세기 이상이 지나면서, 저는 신앙과 철학 사이의 관계라는 주제를 좀더 체계적으로 재론할 필요를 느껴 왔습니다. 문화 발전 속에서 철학적 사고의 중요성과 그것이 개인적, 사회적 행동 방식들에 미치는 영향력은 명백합니다. 더욱이, 철학은 신학과 그 분과들에 대해 비록 언제나 분명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저는, 신앙의 이해를 위해서 철학이 지니고 있는 가치와, 그것이 계시된 진리들을 외면하거나 배격할 때 직면하게 되는 한계를 강조하는 것이 적절하고 또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교회는 신앙과 이성이 “서로서로 지지하고 있다”고122) 깊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각기 상대방에게, 순화시키는 비판과 더욱 깊은 이해를 위한 탐구를 계속할 자극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101. 특히 서구 세계의 사상사에 관한 연구는 철학과 신학 사이의 만남과 각기 고유한 통찰들의 교환인 인류의 진보(hominum progressus)에 풍부하게 공헌하였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신앙에 관한 학문으로서 실존할 수 있게 해 주는 개방성과 독창성을 선물로 받은 신학은 분명히, 이성이 하느님의 계시 안에서 발견되는 근본적 새로움에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이성이 심화시키도록 불리운 더욱 깊은 의미들을 위한 새로운 지평들이 열리는 것을 본다는 것은 철학으로서는 의심할 바 없는 장점입니다.
    바로 이 고찰에 비추어서, 그리고 철학과의 진정한 관계를 복원시켜야 하는 신학의 의무를 재확인한 것처럼, 저는 철학도 역시 인간 사고의 선익과 발전을 위하여 신학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옳은 것인지를 강조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신학 속에서 철학은, 그것이 아무리 풍부하고 심원하다고 할지라도 한 개인의 제한된 전망을 포함하고 있는 개인의 성찰일 뿐만 아니라, 공통적 성찰의 풍요로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실상 신학은 그 본성상, 진리 탐구에서 그 교회적 차원(ecclesialitas) 과123) 신앙의 단일성 테두리 안에 있는 다양한 학문과 문화 영역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하느님 백성의 전통으로써 지탱됩니다.



    102. 철학적 사고의 중요성과 진정한 차원을 강조하는 가운데, 교회는 인간 존엄성(hominis dignitas)에 대한 옹호와 복음 내용의 선포를 촉진시켰습니다. 오늘날 이런 과제들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 어느 것보다 시급한 과제는, 사람들이 진리 인식 능력과124) 인생의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의미를 위한 갈망을 발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본성 속에 새겨 놓으신 이런 심층적 필요들에 비추어 볼 때, 또한 하느님 말씀의 인간적이고 인간화시키는 의미가 더욱 명료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역시 진정한 지혜인 철학의 매개를 통해서 사람들은 오늘날 자신들의 인간성이 확인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그들은 복음을 신뢰하고 그리스도께 개방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103. 또한 철학은 민족들의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습니다. 신학적 요구들이 제기하는 도전에 응답하고 신앙과 일치하여 전개되는 철학은 교황 바오로 6세께서 복음화의 근본적 목표들 가운데 하나로 제시하시고 있는 ‘문화의 복음화(culturae evangelizatio)’의 일부입니다.125) 저는 새로운 복음화(nova evangelizatio)가 절실히 필요함을 지치지 않고 강조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철학자들이, 하느님 말씀이 통로를 열어 주는 진선미(眞善美)의 차원들을 좀더 포괄적으로 탐구할 것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만일 우리가 특별히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을 가지고 있는 지역과 문화들이 겪고 있고 또 새로운 천년기가 끌어안아야 할 도전들을 염두에 둔다면 이 과제는 더욱 절실해집니다.



    104. 철학적 사고는 우리의 신앙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 유일한 토대가 되기도 합니다. 현대 철학 사조는 유능한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이 이 역사적 운동의 기대치들, 개방적 요점들, 핵심적 주제들을 세밀하게 식별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성의 빛 속에서 그 규칙들에 따라 성찰하고, 언제나 하느님 말씀 덕분에 가능해진 더욱 깊은 이해의 안내를 받을 때,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은 신적 계시가 선언하는 진리를 아직 충분히 포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해 가능하고 호소력 있는 성찰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해와 대화의 토대는 특히 오늘날 더욱 절실합니다. 왜냐하면 환경, 평화, 그리고 상이한 인종과 문화들의 공존 등과 같이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절박한 주제들이,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 그리고 종교적 신념은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마음 속에 인간성의 쇄신을 희망하고 있는 모든 사람 사이에 진지하고 정직한 협력이 있기만 하다면, 해결책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편에서 본다면, 진리에 대한 사랑만이 이루어 주는 대화의 소망은, 신중한 태도로 임해야 하겠지만, 아무도 대화의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습니다. 곧 인간 정신의 고귀한 가치를 존중하지만 그 원천인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나 또는 교회를 반대하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들까지도 제외하지 않습니다.”126) 인간의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결정적 해답인127)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까지도 비쳐져 나오는 철학은 세계가 오늘 필요로 하고 있는 진정한 범세계적 윤리를 위한 강력한 지지 기반이 될 것입니다.



    105. 이 회칙을 마무리하면서 저의 생각은 특별히 신학자들(theologi)에게 향하게 됩니다. 신학자들은 하느님 말씀이 담고 있는 철학적 함축들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자신들의 작업에서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모든 사변적이고 실천적인 폭을 유지하기 바랍니다. 신학적 지혜와 철학적 지혜 사이의 내밀한 유대는 계시 진리를 탐구하는 그리스도교적 전통의 가장 독특한 보화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하느님 말씀과 일치되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현대 철학적 사고와 철학 전통의 모든 측면에 대하여 비판적 대화를 나눌 수 있기 위하여, 신학자들이 진리의 형이상학적 차원들을 최대한 복원하고 표현하기를 강력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신학자들은, 언제나 사상과 영성의 위대한 스승인 성 보나벤투라(St. Bonaventura)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정신의 여정」(Itinerarium Mentis in Deum)에서 독자에게 인정하기를 요구한 다음과 같은 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곧 “뉘우침이 없는 독서, 헌신 없는 지식, 경이감 없는 탐구, 기쁨에 복종할 줄 모르는 신중함, 종교로부터 멀어진 행동, 사랑에서 멀어진 학문, 겸손 없는 지성, 신적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는 연구, 하느님께 영감 받은 지혜가 없는 사상”의128) 부적절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저는 또한, 학문적으로 지도하든 사목적으로 지도하든 간에 ‘사제 양성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quorum est sacerdotibus institutionem tradere)’을 떠올립니다. 그들도 오늘날의 남녀 인간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될, 그리고 더 나아가 신학 연구와 교육에 헌신하게 될 사람들의 철학적 준비 교육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지침과,129) 신앙의 진리들을 참되고 깊이 있게 전달해야 할 우리 모두의 준엄하고 절박한 과제를 명료하게 말하고 있는 그 후속 규정들에 따라 그들의 작업을 수행하려고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신학교와 교회에서 설립한 대학에서 철학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준비 교육을 시켜야 할 중대한 책임이 소홀히 되어서는 안 됩니다.130) 이 영역에서 가르침은 필시 적절한 학문적 준비, 그리스도교 전통의 위대한 유산에 대한 체계적 제시, 교회와 세계의 현대적 요구들에 대한 식별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06. 저는 또한 철학자들(philosophi)과 철학 교사들(qui philosophiam docent)에게 호소합니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타당한 철학 전통의 흐름 속에서 형이상학적 지혜를 포함하여 철학적 탐구에 고유한 진정한 지혜와 진리의 차원들을 복원시킬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에서 솟아나는 요구들에 개방되어 있어야 하고, 그 도전들에 응답하여 자신들의 사고와 토론을 꾸려 나갈 정도로 충분히 강인해야 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진리를 위해 투쟁해야 하고 진리가 담고 있는 선(善)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그들은 이 특별한 시대에 인류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 진정한 윤리를 체계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지대한 관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철학자들의 탐구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가 그들 학문의 정당한 자율성에 대해 보이고 있는 존경심에 대해 확신해야 합니다. 저는 특별히 철학 영역에서 일하고 있는 신앙인들이 용기를 내어, 신앙의 지지를 받기 때문에 점점 더 확신과 예리함을 지니게 되는 이성의 실행을 통해서 인간 활동의 다양한 영역들을 조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과학자들(scientiae periti)에게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학자들의 탐구는 우주 전체와 그 풍부한 유기적, 무기적 구성 부분들, 그리고 그 복잡한 원자적, 분자적 구조들에 관해서 늘 더욱 풍부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이룩해 온 성취는 특별히 금세기에 우리를 거듭거듭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오늘날의 발전을 크게 빚지고 있는 과학적 탐구의 이 용감한 선구자들에 대한 저의 경탄을 표현하고 격려하는 데, 저는 그들이 지혜적 지평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노력을 계속 기울이도록 촉구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 지혜적 지평의 테두리 안에서 과학과 기술의 성취들은 인간 인격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두드러진 특징인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들에 직결되게 됩니다. 과학자들은 “진리 탐구가, 그것이 세계나 인간이라는 유한한 실재에 관심을 기울일 때조차도, 결코 끝나는 법이 없고, 언제나 직접적인 연구 대상을 훨씬 뛰어넘는 어떤 것을 가리키며, 신비를 향해 출구를 여는 질문들을 던진다.”는131) 것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107. 저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당신 사랑의 신비 속에서 구원하신 인간과 인간 존재자의 끊임없는 진리와 의미 탐구에 더욱 심층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도록 호소하고 싶습니다. 다양한 철학 체계들은 사람들이, 그들이 자기 자신의 절대적 주인이고 자기 운명과 미래를 완전히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믿고 자기 자신과 자기 능력들만을 신뢰하도록 현혹시켰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인간의 영광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진리 속에 편입되어 지혜의 그늘 아래 머무르기를 선택함으로써만 충만하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오직 이 진리의 지평 안에서만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충만히 이해하고, 그들의 진정한 자아의 최고의 실현으로서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라는 소명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108. 저의 마음은 마지막으로, 교회의 기도가 ‘상지(上智)의 좌(座)(Sedes Sapientiae)’라고 호소하고 있고 그분의 생애 자체가 이 회칙에 포함되어 있는 성찰을 조명해 주는 진정한 비유인 여인께 향합니다. 왜냐하면 복되신 동정녀의 소명과 진정한 철학의 소명 사이에는 깊은 조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동정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말씀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실 수 있도록 인간으로서 그리고 여인으로서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도 신앙을 이해하려는 신학이 결실 풍부하고 창조적이 될 수 있도록 그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자원들을 제공합니다. 마리아께서 대천사 가브리엘의 전갈에 동의하면서도 자신의 진정한 인간성과 자유를 잃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도 복음의 진리의 호소를 받아들일 때에 자신의 자율성을 조금도 상실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철학의 모든 탐구가 최고의 표현을 얻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때입니다.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거룩한 수도자들이 마리아를 ‘신앙의 지성적 식탁(fidei mensa intellectualis)’이라고 부르면서 이해하고 있던 진리였습니다.132) 그들은 동정 마리아에게서 참된 철학의 빛나는 표상을 보았고, 마리아와 함께 철학 하기(cum Maria philosophari)의 필요성을 깊이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상지의 좌’이신 마리아께서 진리 탐구에 몸 바치는 모든 사람에게 확실한 천국이 되시기를 빕니다. 모든 인식의 확실하고 궁극적인 목표인 지혜를 향한 그들의 여정이, 진리 자체를 출산하시고 당신의 가슴에 품으심으로써 그 진리를 온 세계와 영원히 함께 나누신 분의 중개로 온갖 장애물로부터 해방되기를 빕니다.



로마 성 베드로좌에서
교황 재위 제20년
1998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 저는 저의 첫 번째 회칙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우리도 예언자 그리스도의 이 사명을 나누어 지게 되었으며, 이 사명에 의거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안에서 신적 진리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 진리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그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 진리의 구원적 능력과 광채와 심원함과 아울러 단순함을 우리가 속속들이 가까이하고 남들도 가까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19항).: AAS 71(1979), 306면.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16항 참조.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 25항.
4. 4항: AAS 85(1993), 1136면.
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 2항.
6.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 Dei Filius, III: DS 3008.
7. Dei Filius, IV: DS 3015. 이것은 사목 헌장, 59항에서 재인용되고 있다.
8. 계시 헌장, 2항.
9.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Tertio Millennio Adveniente, 1994.11.10.), 10항: AAS 87(1995), 11면.
10. 계시 헌장, 4항.
11. 계시 헌장, 8항.
12. 사목 헌장, 22항.
13. 계시 헌장, 4항 참조.
14. 계시 헌장, 5항.
15.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앙의 복종이 지성과 의지의 참여를 요구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인간 존재자는 자신의 창조주이시며 주님이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창조된 이성은 창조되지 않은 이성에 완전히 종속되기 때문에, 우리는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신앙을 통하여 지성과 의지를 완전히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Dei Filius, III: DS 3008).
16.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의 ‘부속가.’
17. 파스칼(B.Pascal), 「팡세」(Pense셌s), 789면, L. Brunschvicg 편.
18. 사목 헌장, 22항.
19. 계시 헌장, 2항 참조.
20. 성 안셀모, Proslogion, Prooemium, 1.15항: PL 158,223-224. 226.235.
21. 성 아우구스티노, De Vera Religione, XXXIX, 72: CCL 32,234 (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1989, 145면 참조).
22. “Ut te semper desiderando quaererent et inveniendo quiescerent.”: 「로마 미사 전례서」(Missale Romanum).
23.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Metaphysica, I, 1.
24.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Confessiones), X, 23, 33: CCL 27,173 (최민순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3, 2판 6쇄, 280면 참조).
25. 「진리의 광채」, 34항: AAS 85(1993), 1161면.
26.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 1984.2.11.), 9항: AAS 76(1984), 209-210면 참조.
2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 2항 참조.
28. “이것은 제가 오래도록 추적하며 여러 기회에 표현해 온 주제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슨 쓸모가 있는가? 인간이 잘하면 얼마나 잘하며, 더구나 그 잘못이야 어디에다 쓰랴?’(집회 18,8) …… 이것들은 모든 시대, 모든 민족의 시인들이, 인간을 참으로 인간답게 만드는 ‘진지한 문제’를 거듭거듭 제기하면서 거의 인류를 위한 예언자적 목소리로서 보여 준 것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물음들입니다. 그것들은 일생의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물론, 더욱 일상적인 때에도 매순간마다 존재 이유를 발견할 절박성을 표현하는 문제들입니다. 이 문제들은 인간 실존의 깊은 이유를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간 지성과 의지가 인생의 충만한 의미를 밝혀 줄 수 있는 해결책을 자발적으로 추구하도록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최고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그 대답이 자기 자신의 실존에 얼마나 깊이 투신하느냐를 알려 주는 계기판이 되는 이유입니다. 특히 ‘사물들의 이유’가 궁극적인 답에 대한 추구와 충만히 일치하여 탐험될 때, 인간 이성은 그 절정에 달하고 종교적 충동에 개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충동은 인간 인격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성적 본성의 최고 요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깊은 인간적 열망으로부터 솟아 나오고, 신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자유롭고 인격적인 추구의 기초가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일반 알현(1983.10.19.), 1-2: Insegnamenti, VI, 2(1983), 814-815면.
29. “(갈릴레오는) 신앙의 진리와 과학의 진리가 결코 서로 모순될 수 없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성서와 자연 세계는 둘 다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전개됩니다. 성서는 성령으로부터 받아 쓴 것이고, 자연 세계는 하느님의 명령에 대한 매우 충실한 수행자입니다.’ 그는 베네데토 카스텔리 신부에게 1613년 12월 21일자로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유사한 용어들을 사용하며 동일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학문 분야의 탐구는, 그것이 참으로 과학적 방법을 따르고 윤리 규범을 따라 이루어진다면, 절대로 신앙에 대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내용은 다 함께 하느님 안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사목 헌장, 36항). 갈릴레오는 자신의 과학적 탐구에서,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를 자극하시며 그의 통찰들에 영감을 던져 주시는 창조주의 현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청 과학원에서 행한 연설(1979.11.10.): Insegnamenti, II, 2(1979), 1111-1112면.
30. 계시 헌장, 4항 참조.
31. 오리게네스, 「첼수스 논박」(Contra Celsum), 3, 55: SC 136,130.
32. 유스티노(Justinus), 「트리폰과 나눈 대화」(Dialogus cum Tryphone Iudaeo), 8, 1: PG 6,492.
33.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de Alexandria), Stromata, I, 18, 90, 1: SC 30,115.
34. Stromata, I, 16, 80, 5: SC 30,108 참조.
35. Stromata, I, 5, 28, 1: SC 30,65 참조.
36. Stromata, VI, 7, 55, 1-2: PG 9,277.
37. Stromata, I, 20, 100, 1: SC 30,124.
38.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 VI, 5, 7: CCL 27,77-78(최민순 옮김, 143-144면).
39. 「고백록」, VII, 9, 13-14: CCL 27,101-102(최민순 옮김, 176-177면).
40.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De Praescriptione Haereticorum, VII, 9: SC 46,98: “Quid ergo Athenis et Hierosolymis? Quid academiae et ecclesiae?”
41. 가톨릭 교육성, 사제 양성에서 교부 연구에 관한 훈령(1989.11.10.), 25항: AAS 82(1990), 617-618면 참조.
42. 성 안셀모, Proslogion, 1: PL 158,226.
43. 성 안셀모, Monologion, 64: PL 158,210.
44.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이교도 논박 대전」(Summa contra Gentiles), I, 7 참조.
45. 「신학대전」, I, 1, 8, ad 2: “cum enim gratia non tollat naturam sed perficiat.” 참조.
46. 요한 바오로 2세, 제9차 국제 토마스 학회에서 행한 연설(1990.9.29.): Insegnamenti, XIII, 2(1990), 770-771면 참조.
47. 바오로 6세, 교황 교서 Lumen Ecclesiae(1974.11.20.), 8항: AAS 66(1974), 680면.
48. 「신학대전」, I, 1, 6: “Praeterea, haec doctrina per studium acquiritur. Sapientia autem per infusionem habetur, unde inter septem dona Spiritus Sancti connumeratur.” 참조.
49. 「신학대전」, II-II, 45, 1, ad 2; 또한 II-II, 45, 2도 참조.
50. 「신학대전」, I-II, 109, 1, ad 1. 이것은 잘 알려진 Ambrosiaster, In Prima Cor. 12,3: PL 17,258의 재인용이다.
51. 레오 13세,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 1879.8.4.): ASS 11(1878-79), 109(이재룡 옮김, 「신학과 사상」 11호, 1994/6, 262면: 이 책의 부록 141면).
52. 바오로 6세, 교황 교서 Lumen Ecclesiae(1974.11.20.), 8항: AAS 66(1974), 683면.
53.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인간의 구원자」(1979.3.4.), 15항: AAS 71(1979), 286면.
54. 비오 12세, 회칙 Humani Generis(1950.8.12.): AAS 42(1950), 566면 참조.
55.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Pastor Aeternus): DS 3070; 교회 헌장, 25항 참조.
56.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주교대의원회의: DS 403 참조.
57. 톨레도 공의회 I: DS 205; 브라가 공의회 I: DS 459-460; 식스토 5세, 칙서 Coeli et Terrae Creator(1586.1.5.): Bullarium Romanum 4/4, Roma 1747, 176-179; 우르바노 8세, 칙서 Inscrutabilis Iudiciorum(1631.4.1.): Bullarium Romanum 6/1, Roma 1758, 268-270 참조.
58. 비엔 공의회, 교령 Fidei Catholicae: DS 902;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 칙서 Apostoli Regiminis: DS 1440 참조.
59. Theses a Ludovico Eugenio Bautain iussu sui Episcopi subscriptae(1840.9.8.): DS 2751-2756; Theses a Ludovico Eugenio Bautain ex mandato S. Cong. Episcoporum et Religiosorum subscriptae(1844.4.26.): DS 2765-2769 참조.
60. Sacred Congregation of the Index, 교령 Theses contra Traditionalismum Augustini Bonnetty(1855.6.11.): DS 2811-2814 참조.
61. 비오 9세, 서한 Eximiam Tuam(1857.6.15.): DS 2828-2831; 서한 Gravissimas Inter(1862.12.11.): DS 2850-2861 참조.
62. Sacred Congregation of the Holy Office, 교령 Errores Ontologistarum(1861.9.18.): DS 2841-2847 참조.
63. Dei Filius, II: DS 3004; 교회법 2, 1: DS 3026 참조.
64. Dei Filius, IV: DS 3015. 이것은 사목 헌장, 59항에 재인용되어 있다.
65. Dei Filius, IV: DS 3017.
66. 성 비오 10세, 회칙 Pascendi Dominici Gregis(1907.9.8.): ASS 40(1907), 596-597.
67. 비오 11세, 회칙 Divini Redemptoris(1937.3.19.): AAS 29 (1937), 65-106면 참조.
68. 비오 12세, 회칙 「인류」(1950.8.12.): AAS 42(1950), 562-563면.
69. 회칙 「인류」: AAS 42(1950), 563-564면.
70.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령 「착한 목자」(Pastor Bonus, 1988.6.28.), 제48-49조: AAS 80(1988), 873면; 신앙교리성, 신학자의 교회적 소명에 관한 훈령 Donum Veritatis(1990.5.24.), 18항: AAS 82(1990), 1558면 참조.
71. 신앙교리성, ‘해방 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훈령 Libertatis Nuntius (1984.8.6.), VII-X: AAS 76(1984), 890-903면 참조.
72.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매우 명료하고 권위 있는 어조로 이 오류를 단죄하였다. 공의회는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 신앙에 관한 한 …… 가톨릭 교회는 그것이 초자연적 덕임을 고백합니다. 이 덕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영감과 은총의 도움을 받아,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것들이 진실임을 믿습니다. 그 근거는 이성의 자연적 빛으로 지각한 것들의 내밀한 진리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을 계시하시고 속이실 수도 없고 또 속으실 수도 없으신 바로 하느님 자신의 권위 때문입니다”(Dei Filius, III: DS 3008; 교회법 3, 2: DS 3032). 다른 한편으로, 공의회는 이성이 결코 “[이 신비들을] 자기 고유의 진리들처럼 관통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고 있다(Dei Filius, IV: DS 3016). 그런 다음 실천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신앙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견해들, 특히 교회로부터 단죄받은 견해들을 타당한 과학적 결론들로 옹호할 권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진리의 외양을 갖춘 현혹적인 오류들로 간주해야 할 엄정한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Dei Filius, IV: DS 3018).
73. 계시 헌장, 9-10항 참조.
74. 계시 헌장, 10항.
75. 계시 헌장, 21항.
76. 계시 헌장, 10항 참조.
77. 비오 12세, 회칙 「인류」(1950.8.12.): AAS 42(1950), 565-567. 571-573면 참조.
78. 레오 13세,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1879.8.4.): ASS 11(1878-1879), 97-115(이재룡 옮김, 248-270면: 이 책의 부록 123-151면) 참조.
79. 「영원하신 아버지」, 23항: ASS 11(1878-1879), 109(이재룡 옮김, 262면: 이 책의 부록 142면).
80. 교회 헌장, 14-15항 참조.
81. 교회 헌장, 20-21항 참조.
82. 교회 헌장, 22항; 요한 바오로 2세, 「인간의 구원자」, 8항 참조.
8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Optatam Totius), 15항.
84.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령 「그리스도교적 지혜」(1979.4.15.), 제79-80조: AAS 71(1979), 495-496면;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 권고 「현대의 사제 양성」(1992.3.25.), 52항: AAS 84(1992), 750-751면. 그리고 성 토마스의 철학에 관한 다양한 언급들에 대해서는: 안젤리쿰 대학에서 행한 강연(1979.11.17.): Insegnamenti, II, 2(1979), 1177-1189면; 제8차 국제 토마스 학회에서 행한 연설(1980.9.13.): Insegnamenti, III, 2(1980), 604-615면; 성 토마스의 ‘영혼에 관한 가르침’에 대하여 국제 토마스 학회에서 행한 연설(1986.1.4.): Insegnamenti, IX, 1(1986), 18-24면도 참조. 또한 가톨릭 교육성, Ratio Fundamentalis Institutionis Sacerdotalis (1970.1.6.), 70-75: AAS 62(1970), 366-368면; 교령 Sacra Theologia (1972.1.20.): AAS 64(1972), 583-586면도 참조.
85. 사목 헌장, 57.62항 참조.
86. 사목 헌장, 44항 참조.
87.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 칙서 Apostolici Regimini Sollicitudo, Session VIII: Conciliorum Oecumenicorum Decreta, 1991, 605-606 참조.
88. 계시 헌장, 10항 참조.
89. 「신학대전」, II-II, 5, 3, ad 2.
90. “인간이 삶의 의미, 인생의 목적, 죽음 이후에 기대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 최초의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되는 조건들에 대한 탐구가 기초 신학을 위한 필수 전제를 구성합니다. 그래서 오늘 당장이라도 신앙이 이성에게,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탐구에 이르는 길을 충분히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Lettera ai partecipanti al Congresso internazionale di Teologia Fondamentale a 125 anni dalla “Dei Filius”(1995.9.30.), 4: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1995년 10월 3일자, 8면.
91. 위와 같음.
92. 사목 헌장, 15항;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Ad Gentes), 22항 참조.
93. 성 토마스 데 아퀴노, In de Caelo, 1, 22.
94. 사목 헌장, 53-59항 참조.
95. 성 아우구스티노, De Praedestinatione Sanctorum, 2, 5: PL 44,963.
96. 성 아우구스티노, De Fide, Spe et Caritate, 7: CCL 64,61.
97. 칼케돈 공의회, Symbolum, Definitio: DS 302 참조.
98.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인간의 구원자」(1979.3.4.), 15항: AAS 71(1979), 286-289면 참조.
99.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I, 16, 1; 성 보나벤투라, Coll. in Hex., 3, 8, 1 참조.
100. 사목 헌장, 15항.
101.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진리의 광채」(1993.8.6.), 57-61항: AAS 85(1993), 1179-1182면 참조.
102. Dei Filius, IV: DS 3016 참조.
103.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De Errore Abbatis Ioachim, II: DS 806 참조.
104. 계시 헌장, 24항; 사제 양성 교령, 16항 참조.
105.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 1995. 3.25.), 69항: AAS 87(1995), 481면 참조.
106. 같은 의미로, 저는 저의 첫 번째 회칙에서, 요한 복음의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8,32)라는 표현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근본되는 요구와 경고가 둘 다 들어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의 조건이 되는 진리에 대해서 정직한 관계를 가지라는 요구가 들어 있고, 일체의 환상적 자유, 일체의 피상적이고 일방적인 자유, 인간과 세계에 관한 온전한 진리에 접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유를 피하라는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게 진리에 기초를 둔 자유를 주시는 분, 인간의 영혼과 마음과 양심에서 이 자유를 빼앗고 위축시키고 뿌리째 뽑아 버리는 것들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는 분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인간의 구원자」, 12항).
107. 요한 23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연설(1962.10.11.): AAS 54 (1962), 792면.
108. 신앙교리성, 신학자의 교회적 소명에 관한 훈령 Donum Veritatis (1990.5.24.), 7-8항: AAS 82(1990), 1552-1553면.
109. 저는 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에서 요한 복음 16,12-13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파라클리토를 진리의 성령으로 제시하시면서, 그분을 ‘가르쳐 주실 분’, ‘되새기게 해 주실 분’, 당신을 ‘증언해 주실 분’으로 소개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분께서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시리라.’는 말씀은 사도들에게 하신 ‘지금은 알아들을 수 없다.’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고 계시던 순간으로서는 바로 임박해 있던 수난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자기 비허(自己 卑虛)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온전히 깨닫도록 이끌어 주시리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걸림돌을 뛰어넘어,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사도 1,1) 모든 것에까지 확대 적용된다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실상, 그리스도의 신비는 전체적으로 신앙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계시된 신비의 실체로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은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온전히 깨닫도록 이끌어 주시는 일’은 신앙 안에서 또 신앙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며, 인간 안에서 수행하시는 그분의 역사(役事)가 이루어 내는 결과입니다. 이 점에서, 성령께서는 인간의 최상 안내자이시며, 인간 정신을 비추는 빛이십니다”(6항: AAS 78[1986], 815-816면).
110. 계시 헌장, 13항 참조.
111. 교황청 성서위원회, 복음서들의 역사적 진리에 관한 훈령(1964. 4.21.): AAS 56(1964), 713면 참조.
112. “교회가 어떤 일시적인 철학 체계와 결속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가톨릭 교사들이 여러 세기가 흐르는 동안 어떻게든 교의를 좀더 잘 이해하려고 기울인 공동의 노력을 통해서 발전되어 온 관념들과 용어들은 분명히, 이런 어떤 허약한 토대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피조된 사물들에 대한 진정한 지식으로부터 연역된 것들입니다. 그 연역 과정 속에서 이 지식은 마치 하나의 별처럼, 교회를 통해서 인간 정신에 빛을 던집니다. 이리하여 그 관념들 가운데 일부를 보편 공의회들이 채택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재가하기까지 하였다는 것은 놀랄 일이 못 되고, 또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멀리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회칙 Humani Generis(1950.8.12.): AAS 42(1950), 566-567면; 국제신학위원회, 문서 Interpretationis Problema(1989.10.): Enchiridion Vaticanum 11, 2717-2811면 참조.
113. “교의적 정식들의 의미 자체에 관해서는, 그것은 비록 더욱 명료화되고 더 잘 이해될 수는 있지만, 교회 안에서 언제까지나 진실되고 일관된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교의적 정식들(또는 그 몇몇 범주들)이 진리를 결정적으로 드러낼 수 없고, 다만 진리를 어느 정도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가변적인 근사치를 제공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를 단호히 피해야 합니다.”: 신앙교리성, 교회에 관한 현대의 오류를 반박하는 가톨릭 교리 선언 Mysterium Ecclesiae (1973.6.24.), 5항: AAS 65(1973), 403면.
114. 성무성성, 교령 Lamentabili(1907.7.3.), 26항: ASS 40(1907), 473 참조.
115. 요한 바오로 2세, 안젤리쿰 대학에서 행한 강연(1979.11.17.), 6항: In-segnamenti, II, 2(1979), 1183-1185면 참조.
116. 「진리의 광채」, 32항: AAS 85(1993), 1159-1160면.
117.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현대의 교리교육」(Catechesi Tradendae, 1979.10.16.), 30항: AAS 71(1979), 1302-1303면; 신앙교리성, 훈령 Donum Veritatis(1990.5.24.), 7항: AAS 82(1990), 1552-1553면 참조.
118. 「현대의 교리교육」, 30항 참조.
119. 「현대의 교리교육」, 22항: AAS 71(1979), 1295-1296면 참조.
120. 「현대의 교리교육」, 7항: AAS 71(1979), 1282면 참조.
121. 「현대의 교리교육」, 59항: AAS 71(1979), 1325면 참조.
122. Dei Filius, IV: DS 3019.
123. “아무도 신학을 단순히 자기 개인 사상의 집합으로 만들 수는 없으며, 모든 이는 교회가 책임지고 있는, 진리를 가르치는 사명에 자신이 밀접히 결속되어 있음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인간의 구원자」, 19항: AAS 71(1979), 308면.
12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 1-3항 참조.
125. 바오로 6세, 교황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1975.12.8.), 20항: AAS 68(1976), 18-19면 참조.
126. 사목 헌장, 92항.
127. 사목 헌장, 10항 참조.
128. 성 보나벤투라, Itinerarium Mentis in Deum, Prologus, 4: Opera Omnia, Firenze, 1891, t. V, 296.
129.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 양성 교령, 15항 참조.
130.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령 「그리스도교적 지혜」(Sapientia Christiana, 1979.4.15.), 제67-68조: AAS 71(1979), 491-492면 참조.
131. 요한 바오로 2세, 알마 마텔 야겔로니카 설립 600주년을 기념해서 크라코프 대학에서 행한 강연(1997.6.8.), 4항: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1997년 6월 9-10일자, 12면.
132. “He noera tes pisteos trapeza”: Pseudo-Epiphanius, Homilia in laudes Sanctae Mariae Deiparae: PG 43,493.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10호,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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