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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칼럼

코람 데오 -Coram Deo

by 이덕휴-dhleepaul 2022. 11. 18.
 

 

코람 데오(라틴어: Coram Deo, 신전의식(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 혹은 신전사상(神前思想)를 의미하는데 라틴어 2개 단어인 코람(coram)과 데우스(Deus)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라틴어 coram은 '면전에서 혹은 앞에서'(in the presence of)[1]라는 의미이고, Deo라는 단어는 Deus(God, 하나님)의 탈격(ablative, 명사를 부사처럼 사용하기 위한것)[2]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하여 Coram Deo가 되었다.

이 말은 영어 before God(하나님 앞에)인데 coram hominibus(before men, 인간 앞에서)와 대비되는 말이다.[3] 주로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다.[4]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권위 아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신학사상이다. 인간을 지켜보시는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말로도 쓰인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영역안에서 자신을 친히 나타내시는 거룩한 행위이다.독일의 신학자 게하르트 에벨링은 코람 데오와 비슷한 의미로서 임재관계(Coram-Rel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이 개념을 마르틴 루터의 생각으로부터 가져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면전에서 그리고 세상의 면전에서 인간의 상황을 다루는 것이며 동시에 물질적 존재론에 대해서 관계적 존재론의 대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칼빈탄생500주년기념사업회에서 기증한 장 칼뱅의 동상, 코람 데오를 신학의 모토로 삼았던 그의 표어, "주님께 나의 심장을 드리나이다. 즉시 그리고 진심으로"
 

구약에서 모세(출 18: 12)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이 친히 시내산에서 구름 가운데 임하시고(출 19: 9, 11; 20: 18), 광야에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하시며(출 13: 21-22), 또 회막에 구름기둥으로 임재하셨다(출 33: 9-11). 사무엘 상 12장 3절에 사무엘이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 ."라고 말하였다. 구약성경 시편 139편은 대표적으로 코람 데오의 정신을 보여주는 시이다.

  • (시 139: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 (시 139: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 (시 139: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 (시 139: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 라틴어 성경 불가타역에 사용된 성구들-구약 - 창 6:11, 민 10:9, 신 4:10, 12:18, 16:11, 26:3, 대상 13:8, 10, 16:1, 대하 33;12, 왕상 8:65, 에 8:21, 욥 15:4, 32:2, 시56:13, 잠 3:4, 전 5:2, 단 6:10, 말 3:14.

신약에서는 제 2위 하나님되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다.[5] 그리스도 임마누엘이 되시는데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런 임재적 사건은 사도 행전 4장 19장, 8장 21절, 10장 33절등에 나온다. 사도행전 10장 33절에서는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은 주의 얼굴(임재, in the presence of the Lord)과 그의 힘의 영광(위엄, the majesty of his power)이 함께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임재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 위에 존재하다'(겔37:1), '오다'(요이1:7), '이르다, 만나다'(삼상3:10), '방문하다, 도착하다'(마24:27)는 뜻한다. 성경에서 '임재'란 주로,

  1. 하나님의 초월한 권능이 나타나는 때(겔37:1)
  2.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계시하실 때(삼상3:10)
  3.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요이1:7)이나
  4. 그분의 재림의 때(마24:27)를 두고 하는 표현이다.[6]
  5. 불가타 역 성경에 나오는 코람 데오 구절들-신약- 눅 12;6, 24:19, 행 8:21, 롬 4;22, 고후 2:17, 4;2, 7:12, 12:19, 갈 1:20, 딤전 5:4, 5:21, 6:13, 딤후 4;11, 계 3:2, 8:4

 

바울의 사상에도 코람데오가 나오는데 코람과 의미가 같은 헬라어 전치사들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성경에서 코람 데오는 단지 전치사(coram = before)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헬라어에서 라틴어의 ‘코람’에 해당되는 전치사는 여러 가지가 있다. 카테난티(katenanti)나 에난티(enanti)도 그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상황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katenanti theou) 말하고자 하는 결단을 밝힌다(고후 2:17, 12:19). 엠프로스텐(emprosthen) 역시 유사한 의미를 가진 전치사이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것에 따라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하거나 부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마 10:32-33). 그러나 이런 전치사들 보다 더 특징적인 전치사로 에노피온(enōpion)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enōpion tou theou) 자신이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밝힌다(갈 1:20). 에노피온은 엔(en)과 옵탈모스(ophthalmos 눈)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전치사로서 ‘안전’(眼前)의 의미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는 히브리어의 리프네(li-pnê)나 엣프네(et-pnê), 엘프네(el-pnê) 등에 맞먹는 전치사이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이 전치사들은 모두 파네(pane 얼굴)와 연결된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4:23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일 년에 세 차례 ‘하나님 앞에’ 보이도록 명할 때 엣프네 전치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70인경에서는 헬라어 에노피온으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전치사들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하나님 앞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면전(面前), 또는 하나님의 안전(眼前)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7] 야고보서 4장 10절 본문 "주님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에서 주님 앞에서 (in the presence of the Lord, ἐνώπιονΚυρίου)라는 코람데오는 인간의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교만하지 말 것을 교훈한다.이 본문과 4장 6절에 있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제롬 성경의 사용[편집]

히에로니무스(제롬)가 번역한 라틴어 성경 불가타역에 따른 코람 데오(coram Deo)에 사용된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 구약성경 - 창 6:11, 민 10:9, 신 4:10, 12:18, 16:11, 26:3, 대상 13:8, 10, 16:1, 대하 33;12, 왕상 8:65, 에 8:21, 욥 15:4, 32:2, 시56:13, 잠 3:4, 전 5:2, 단 6:10, 말 3:14
  • 신약성경- 눅 12;6, 24:19, 행 4:19,, 행 8:21, 롬 4;22, 고후 2:17, 4;2, 7:12, 12:19, 갈 1:20, 딤전 5:4, 5:21, 6:13, 딤후 4;11, 계 3:2, 8:4
  •  

마르틴 루터는 코람 데오를[8] 즐겨사용했는데 에벨링은 이 개념을 루터의 사상체계의 참된 근거(the very basis of Luther's mode of thought)라고 말한다.[9] 성경환 목사에 따르면 루터의 저서 《식탁대담》 중 〈세상의 본질에 관하여〉라는 장에서는 루터는 이 세상의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다.[10]

  • 첫째 부류는 자신의 부패한 본성과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채 양심의 가책없이 태평스럽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 둘째 부류는 율법앞에서 두려워 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며 좌절감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 셋째 부류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죄로 인하여 멸망할 자임을 잘 알면서 복음에 귀기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죄사함 받음을 믿고 하나님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으며 온갖 선행으로 믿음의 열매를 나타내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요한 칼빈은 코람 데오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 그의 신학의 중요한 사상을 형성하였다.[12] 그의 명저 기독교강요 1권 2장에서 하나님의 얼굴 (the face of God)을 먼저 보지않고서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수 없다고 한다.[13] 칼뱅은 베드로 전서 3장 4절 주석에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속사람(중생한 사람)이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은 인간의 눈(코람 호미니부스)에만 치장하지 않는 값진 것(pretiosus)이라고 한다. 하나님앞에 값진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더 염려하는 것이라고 한다.[14]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때는 두려움과 전율을 느낀다고 한다. 하나님의 위엄이 인간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마다 언제나 충격을 받고 압도당했던 것으로 성경이 일반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그 두려움과 놀람8은 바로 여기서부터 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모를 때는 굳건히 그리고 꿋꿋하게 서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것처럼 전율하고 경악하여 비참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고 거의 혼비백산이 된 것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위엄과 자신들을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비천함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하고 깊이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우기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사건의 실례가 사사기와 예언서에 무수히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었다(삿 13:22; 사 6:5; 겔 2:1; 1:28; 삿 6:22 등). 욥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전하심을 묘사함에 있어서 항상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함과 부패를 깨닫게 함으로써 인간을 압도하는 강력한 주장을 하고 있다(참조, 욥 38:1 이하). 이것은 충분한 증거가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가까이 나아갔을 때, 자신이 흙이요, 티끌에 불과함을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고(창 18:27), 엘리야도 얼굴을 가리우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이렇게 두려운 일이다(왕상 19:13). 그룹들까지 두려움으로 그들의 얼굴을 가리웠는데(사 6:2), 하물며 후패하고(욥 13:28) 벌레에 지나지 않는(욥 7:5; 시 22:6) 인간이야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그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왕이 되시고…"(사 24:23)라고 말한다. 즉 그가 그의 광채를 발하시고,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하면, 가장 빛이 나던 것들도 그 앞에서는 캄캄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사 2:10,19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가르치는 올바른 순서는 전자를 먼저 논하고 다음에 후자를 논하는 것이라 하겠다.

— 《기독교강요》 1:1:3, 장 칼뱅

디모데 전서 6장 13절 주석에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앞에서"라는 것의 의미는 우리의 눈을 세상에서 돌려 만물을 살게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배워는 것이라고 한다.[15] 이승구 박사에 따르면 코람 데오의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16]

 

코람 데오의 신학적 특징

예수를 믿는 것은 코람 데오의 정신이다.[21] 의식적으로 기독교인의 삶 전체를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 하나님 면전(面前)에서의 삶, 하나님 존전(尊前) 의식[神尊意識]을 가지고 사는 삶은 다음과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회개와 정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것이다.[22] 인간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살아야 함을 보여준다(야고보 4:10).

  • 의식(Sin-Consciousness)
  • 칭의 의식(Justification-Consciousness)
  • 성화의 삶(The Life of Sanctification)
  • 사랑의 삶(The Life of Love)
  • 정결한 삶
  • 하나님의 영광
  • 인간의 겸손

같이 보기

각주

  1.  “Latin Dictionary”. 2017년 7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7월 22일에 확인함.
  2.  라틴어-한국어 사전
  3.  Richard A. Muller,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Baker, 1985, 84
  4.  R. C. SproulR. C. 스프롤 (2003) In the Presence of God. Devotional Readings on the Attributes of God. Nashville, Tennessee;Thomas Nelson (publisher)|Thomas Nelson Inc. x
  5.  교회용어사전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13), 397
  6.  교회용어사전 : 교회 일상
  7.  최승락, 코람 데오, 우리가 누려야 할 특권, 코람데오닷캄, 2012-06-20
  8.  Martin Luther’s Understanding of the Conscience, “Coram Deo
  9.  Gerhard Ebeling, Luther: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2), 193
  10.  성경환, 코람 데오라는 말의 의미, 한국교회이야기
  11.  Luca Baschera, Bruce Gordon, Following Zwingli: Applying the Past in Reformation Zurich (London: Routledge, 2016), 24
  12.  Fred Sanders, "Knowledge of God, Knowledge of Self", (Calvin's Institutes)
  13.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2:1
  14.  John Calvin's Commentaries On The Catholic Epistles
  15.  Commentaries on the Epistles to Timothy, Titus and Philemon. By John Calvin
  16.  Seung-Goo Lee, The Coram Deo Idea in Calvin's Theology
  17.  최승락, 코람 데오, 우리가 누려야 할 특권, 코람데오닷캄, 2012-06-20
  18.  A.T. 피어선, 『지난반세기의 전진운동』 안명준 역 (서울: 보이스사, 2008), 22]
  19.  안명준, 칼빈의 성경 해석학에 사용된 성령의 조명, 개혁주의학술원
  20.  황규동,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임재의 연속성에 관한 연구 (한영신학대학교, 2006)
  21.  이승구, 코람데오닷컴
  22.  안종배, 만연한 것짓 바이러스, 정직 백신으로 치료해야, 크리스천투데이, 202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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