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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법철학

[스크랩] 올리버 웬델 홈즈 주니어의 삶과 법사상

by 이덕휴-dhleepaul 2018. 6. 10.

법학전문대학원 강의 노트인데요, 가능하면 고등학생들도 볼 수 있게 써 보고자 하였습니다....


올리버 웬델 홈즈 판사의 삶과 사상


올리버 웬델 홈즈, 이름이 ‘홈즈’여서 더욱 기억에 남는 이 사람은 미국 대법관이며 사상가입니다.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법학도들에게는 미국의 대법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판결들은 단지 법학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 아니 민주주의 혹은 자유주의 사회에서 획기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헌법의 기본적 원리들 가운데 그에게 빚지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전 세계적으로 리버럴리즘 법치국가의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상과 판결이 과연 오늘날 리버럴리즘이 말하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것이었는지에 대하여는 다툼이 있습니다. 홈즈 판사가 말한 인간의 자유란 무엇인가, 홈즈 판사가 생각하는 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쉽게 결론내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탐구를 통하여 우리는 인간의 삶과 공동체의 질서에 대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은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법제상 일반 법원의 판사와 대법원의 대법관은 구분해서 쓰이지만, 여기서는 관계없이 섞어서 사용하도록 합니다. 법학계에서 홈즈는 보통 홈즈 판사로 지칭되기 때문입니다.)


올리버 웬델 홈즈, 그는 1841년 같은 이름의 부친의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그리하여 그는 올리버 웬델 홈즈 주니어(Oliver Wendell Homes Jr.)라고 부르고, 부친은 올리버 웬델 시니어(Oliver Wendell Homes Sr.)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의 집안은 미국의 본향(本鄕) 뉴 잉글랜드 보스톤의 명문가였고, 부친은 당대 최고 명망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친은 저명한 외과의사이자, 교수 그리고 문필가였습니다. 에머슨, 롱펠로우 등 당대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사상가들과도 교우하였으며, 유서 깊은 잡지 <The Atlantic Monthly>의 창설자이기도 합니다(이 잡지는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명칭은 The Atlantic으로 바뀌었습니다.).


보통 그렇듯이, 부친의 명성은 아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더욱이 탁월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부친은 자꾸 자신의 관점으로 아들의 세계와 사고를 쉽게 판단하고 재단하려 하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부친 홈즈가 처음에는 법을 공부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러다가 법은 인생을 걸만한 일이 못된다고 판단하고 의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아들 홈즈는 자라면서 부친으로부터 “법률가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아들 홈즈가 법에 인생을 걸게 된 이유가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일종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나 할까요? 부친의 위광(威光)에 콤플렉스를 느끼던 아들, 그러나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고 부친의 벽을 넘어서고자 하는 야망을 품은 아들은, 바로 부친의 길과는 정반대로 법의 세계로 나아가 그곳에서 부친을 능가하는 최고가 되고자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위대함’에 대한 열망, ‘명예’에 대한 자의식, 그것은 아들 홈즈나 부친 홈즈나 모두 공유하는 바였으며, 이는 당시 뉴 잉글랜드의 지식인 세계에서 공통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장 미국적으로 표현한 이들을 꼽자면 초월주의자(Transcendentalist)라고 불리는 사상가들을 댈 수 있을 것입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 헨리 데이비드 쏘로, 브론손 알콧(<작은 아씨들>의 저자인 루이자 메이 알콧의 부친), <주홍글씨>의 나따니엘 호오돈,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 <모비 딕>의 허먼 멜빌 등 미국 정신의 ‘르네상스’라고 하는 미국 정신의 황금기를 만든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 초월주의의 주창자 격인 사람이 랄프 왈도 에머슨이었는데, 그는 부친 홈즈와도 절친하였을 뿐 아니라 아들 홈즈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홈즈 판사 자신도 만년의 회고에서 자신의 젊음의 열정에 불을 당긴 사람으로 바로 에머슨을 꼽고 있습니다(프란시스 비들, “올리버 웬델 홈즈의 생애”, 최종고 편역, <위대한 반대자, 올리버 W. 홈즈>, 교육과학사, 1992, 59쪽). 실제로 홈즈는 플라톤에 대한 자신의 에세이를 에머슨에게 보여주기도 하였는데, 그에 대하여 에머슨은 “왕을 쏘게 되면,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하네”라는 답을 보내주었답니다(구스타프 라드브루흐, “올리버 웬델 홈즈 : 한 미국 법률가의 전기”, 최종고 편역, 위의 책, 259쪽).


모든 시시한 것을 뛰어 넘어, 아니 그런 것들을 경멸하면서, 인간의 초월적 위대함에 헌신하려는 에머슨의 초월주의 사상, 시대의 값싼 영합성에 구애받지 않고, 아니 그것을 하시(下視)하면서 각인의 진실에 충실한 삶의 주인이 되기를 열망한 에머슨의 자기신뢰 사상은 청년 홈즈의 정신에 깊게 각인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 둘은 귀족주의적이고 웅혼하면서도 조금은 ‘이기적인’ 성격까지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홈즈 자신은 에머슨의 사상과 결별하였다고 말하는데, 아마도 에머슨의 초월적 영혼(Oversoul; 大靈)이라는 종교적 사상, 그리고 그 한 부분인 개인 영혼의 무한성의 사상에는 결국 수용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아래 홈즈의 인생관의 변화과정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홈즈의 성장기는 가문의 본질인 위대함에 대한 열망 그리고 초월주의자들의 이상에 대한 열정으로 채색되었습니다. 그러나 남북 전쟁에 징집되어 참전한 후 홈즈는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옵니다. 홈즈는 당시 뉴 잉글랜드 지식인들이 열렬한 노예폐지론자들이었듯이, 당연히 전쟁과 노예해방의 대의를 지지하였고, 기꺼이 전선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수차례의 치명적인 부상에도 불구하고 패배하지 않은 ‘전쟁의 영웅’이 되어 귀향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이란 덧없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은 승리하였지만, 대의는 상실되었습니다. 전쟁의 참혹함, 실존의 극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생존뿐이었지, 다른 명분은 모두 거짓이었던 것입니다. 피웅덩이에서 팔베게를 하고 피묻은 담요를 끌어다 덮을 때, 옆에서는 군의관이 한 병사의 손을 자르고 있고, 밤에 보초를 설 때면, 썪어 부풀어 오르는 시체를 밟게 되고, 대여섯 겹으로 시체들이 싸여 있는 참호 바닥에서 부상자가 몸을 비틀면서 괴로하는 모습을 목도하게 되는 전장, 매일 같이 수천명의 병력이 사라지는 전장에서 홈즈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모든 가르침이 얼마나 허망한지 절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잔인한 전쟁과 무의미한 죽고 죽임을 당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질이며 생의 정체라는 사실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홈즈는 전쟁의 참상에서 반전 평화의 사상을 얻은 것이 아니라 인생과 사회 자체가 전쟁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전쟁의 비극에서 인간의 존엄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미미함과 인생의 무목적성을 실감하게 됩니다. 삶이란 결국 어떤 목적이 없는 실존적 투쟁이며, 그 안에서 그저 최선을 다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외에 다른 가치나 이념도 모두 무의미하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주의할 것은 투쟁이라고 하여 반드시 상대를 제압하는 칼 슈미트 식의 ‘적과 동지의 구분’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한 자신과의 경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홈즈는 나이애가라 폭포 밑을 카누를 타고 뚫고 지나가려는 목숨을 건 모험, 독일 대학생들의 목숨을 건 결투, 목뼈가 부러지는 위험을 감수하는 폴로 경기 등을 모두 인간적 위대함으로 칭송해 마지않습니다!


홈즈는 “인생이란 그저 행동일 뿐”이며, “산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당신의 손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당신의 힘으로 하라. 이는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헛된 시도보다 월씬 더 중요하다”라고 말합니다(앨버트 앨슐러 지음, 최봉철 옮김, <홈즈 평전 : 미국법의 사이비 영웅>, 청림출판, 2008, 58-59쪽). 이렇게 하여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에머슨과 공유하였던 위대함에 대한 추구와 충일한 삶에 대한 열정은 마침내 어떠한 궁극적 가치와 이념, 우주 전체의 정신이라는 좌표를 포기하거나 상실한 상태로 이행해 간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이 된’ 홈즈는 남북전쟁 후에 법을 전공하기로 결정합니다. 어쩌면 공동체의 삶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힘은 법 강제력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하여튼 홈즈는 위에서 얘기한 대로 자신의 힘을 모두 쏟아 맹렬하게 공부합니다. 하버드 로스쿨을 마치고도 연구에 매진하여 Kent의 미국법 주석서의 새로운 편집자가 되고, <보통법(The Common Law)>를 저술합니다. 그리고 1882년 가을 학기 모교인 하버드 로스쿨의 교수로 임용됩니다. 그러나 그해 겨울 매사추세츠 주의 대법원의 판사로 추천되자 홈즈는 바로 승락하고는 대학을 떠납니다. 1889년 매사추세츠 주 대법원의 대법원장의 직도 계승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1902년 미 연방 대법원의 대법관으로 임용됩니다. 이후 1932년, 90세까지 30년간 대법관으로 활동하여 미국 대법관의 ‘전설’이 됩니다.


참고로 말하면 미국 ‘연방’ 판사들의 임기는 ‘종신’입니다.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판사의 직을 유지합니다. 너무 연로하여 재판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스스로 그 직에서 내려 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급은 사망시까지 나오게 됩니다. 한 번 판사가 되면 영원한 판사로 남는 것입니다! 미국 헌법은 이를 사법부의 독립의 중요한 요소로 규정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홈즈 판사가 어떻게 하여 리버럴리즘의 법치주의에서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되었을까요? 그 대표적인 판례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선 홈즈 판사는 30년간을 대법관으로 재직하여 미국 사법부 역사의 산 증인이 되었으며, 그 재직의 이력이 바로 미국 리버럴리즘 헌정질서의 발전 자체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지요. 말하자면, ‘대과없이’ 미국 민주 헌정질서 사법부의 주축의 역할을 수행해 냈던 것입니다. 그에 더하여 홈즈 판사가 특히 기억되는 까닭, 즉 그의 대표적인 판결을 꼽으라면, ‘표현의 자유’에 대한 것과 ‘노동의 사회적 보호’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입니다. 오늘날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확고한 법원리, 리버럴리즘의 화두와 같은 원리로 자리잡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의 법칙’은 바로 홈즈의 언어였습니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법칙’이란 기본적으로 발언 그 자체는 처벌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발언이 불순하거나 거짓이거나 사악한 것일지라도, 그로 인하여 어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야기하는 것이 아닌 이상 처벌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말할 자유, 비판할 자유는 헌정질서상 근본적인 자유와 인권으로서 그 어떤 것보다 중하게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원칙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19년 미국의 방첩(防諜)법(간첩을 잡는 법) 관련 솅크(Schenk) 사건에서였습니다. 때는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결정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솅크는 미국 사회주의 당 서기로서, 징집대상자들에게 징병을 거부하고 권리를 지키라는 팜플렛을 전송하는 등 반전 선동을 하였답니다. 사회주의자들의 시각에서는 세계 전쟁이란 곧 자본주의 식민제국들의 패권 다툼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지요. 미국 정부는 솅크를 간첩죄로 기소하였고, 솅크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맞섰던 것입니다.


(‘수정헌법’이 무엇을 말하는지 조금 애매하지요? 미국은 헌법을 개정할 때, 헌법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처음 만든 헌법 조문들에 이어서 새로운 규정들을 추가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그렇게 개정 추가된 조문 중 가장 첫번째 것이 수정헌법 제1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관점으로 보면 홈즈의 선동행위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법리에 따라 무죄가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솅크 사건에서의 실제 결과는 유죄판결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기준을 말한 홈즈도 유죄에 찬성하였다는 점입니다. 솅크의 행위는 그 기준을 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홈즈가 기본적으로 사상의 자유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옹호자였음은 의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는 특히 그와 유사한 에이브럼스(Abrams) 사건에서 명백해집니다.

1919년 미국은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이 발발하자, 병력을 파견하여 반혁명군(소위 백군)과 함께 공동전선을 폅니다. 러시아 이민자 출신의 무정부주의자 에이브럼스는 그 군사적 개입을 비난하면서, 부당한 무력간섭에 쓰일 무기 생산 중단을 호소하는 팜플릿을 발간 배포하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에이브럼스와 그 동료들을 위의 솅크 사건과 같이 간첩행위 및 내란행위로 기소하였습니다. 그에 대해 에이브럼스 등은 역시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표현의 자유로 항변하였습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그에 대하여 결국 유죄를 인정했지만, 여기서 홈즈 대법관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법리를 재천명하면서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사상의 자유’란 우리가 좋아하는 사상이 아니라 ‘우리가 싫어하는(hate) 사상’에 대하여 적용되는 것이라는 유명한 설시를 하였습니다. 아울러 최상의 진리란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사상의 자유시장(free trade in ideas)’론을 제창하기도 하였습니다.


시대가 흘러 리버럴리즘의 가치들이 널리 공유되면서 이와 같은 표현과 사상의 자유에 대한 홈즈의 반대의견은 결국 미국 대법원에서 다수의견으로 채택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국 그리고 전 세계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국가들에서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의 고전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마침내 홈즈 판사는 존 밀턴, 존 스튜어트 밀 등의 계보를 잇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의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참고로 얘기하면, 우리나라의 경우 그와 유사한 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이지요. 국가보안법에 보면 소위 ‘찬양, 고무죄’라는 것이 있습니다.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자”를 처벌하는 조항입니다. 여기서 ‘반국가단체’라 함은 바로 ‘북한’이지요. 이 조항에 따라 예컨대 지난 번 천안함 침몰 사건 혹은 연평도 포격 사건에 관하여 정부의 공식 견해와 다른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북한에게 이로울 수도 있는 의견을 발표하게 되면 국가보안법상 ‘찬양, 고무’의 죄라는 위험이 항상 따라 붙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국가보안법이야말로 대표적으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법리를 적용하여야 할 법이라고 보고, 만약 그렇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국가보안법 자체를 위헌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법원은 여전히 그 법리를 적용하지 않고, 대신 ‘국가의 안전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이면 충분히 처벌할 수 있다는 판례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일찍이 1992년에 이회창씨가 대법관으로 있을 당시, 그러한 다수의견과 다른 소수의견을 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이회창 대법관은 “기존의 사상이념에 반한다 하여 무조건 배척하거나 억제할 것이 아니라 무가치하고 유해한 사상과 이념이라고 할지라도 가급적 자유 경쟁의 시장에서 비판되고 도태되는 과정을 거치게 함으로써 건전한 국가와 사회체제의 기초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설시하였습니다(대법원 전원합의체 1992. 3. 31. 판결 90도2033). 홈즈의 ‘사상의 자유시장’ 견해와 유사하지요?


이회창 대법관은 실제로 그에 따라 ‘구체적이고 가능한 위험’의 법리를 제안하였습니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에 비하여는 덜 엄격하지만, 그래도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상당히 넓게 보호할 수 있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아직 우리 대법원은 그 소수의견을 다수의견으로 채택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점점 발전하면서 언젠가는 적어도 그와 같은 ‘구체적이고 가능한 위험’의 법리 정도나마 다수의견으로 채택될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다만,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회창씨는 현재 기성 정치권의 어느 누구보다도 북한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취하면서, 북한에 이로운 발언을 하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다’라고 비난하고 있지요. 그가 대법관 시절 국가보안법에서 보여준 의견과는 180도 달라진 것이니, 참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유명한 판결은 로흐너(Lochner)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홈즈는 ‘노동의 사회적 보호에 관한 입법’을 옹호합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유방임적 자본주의가 한창인 시절 노동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895년 미국의 뉴욕 주 의회는 빵집 종업원들의 과도한 근로시간을 제한하기 위하여 하루 10시간, 일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할 수 없게 하는 ‘제과점법(Bakeshop Act)’를 제정하였습니다. 3년 후 로흐너라는 제과점 주인이 그 법 위반을 이유로 벌금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흐너는 종업원들에게 주당 60시간 이상의 노동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에 의하여 노동시간을 정하였다고 항변하였습니다. 즉 그 법은 ‘계약자유’라는 대원칙에 어긋나 무효라는 것이지요. 로흐너는 미국 헌법상의 근거로는 수정 헌법 제14조 ‘적법절차(due process of law)의 원리’를 들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대법원의 다수의견은 그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노동 인권의 보호보다 계약자유가 우선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된 수정헌법 제14조는 ‘어떤 주(state)도 적법절차 없이 개인의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서, 원래 남북전쟁 이후에 흑인 노예들의 해방과 자유, 법적 평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로흐너 판결 이후 미 대법원은 이 조항을 기업의 자유, 영업의 자유, 소유권의 자유를 위하여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노예 해방을 위한 적법절차가 20세기 전반 미국의 자유방임 시장경제의 극성기에는 오히려 기업 자유의 보호막으로 기능한 것이지요.


그 판결에서 홈즈는 유명한 반대 의견을 통하여 수정헌법 제14조는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정학(Social Statics; 즉 사회적 다윈주의)”를 입법화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홈즈의 반대의견은 ‘노동입법’, ‘사회입법’에 대한 옹호의 상징이 되었고, 실제로 홈즈는 사회입법에 대한 다수의 위헌 결정에 맞서 40번이나 반대의견을 제출하였습니다.


참고로 허버트 스펜서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는 다아윈과 동 시대의 철학자로서 ‘적자생존’의 개념을 다아윈에 앞서 사용하였던 사람입니다. 스펜서는 국가의 규제를 가능한 한 축소하고, 개인들 간의 소유권과 계약자유 보장을 극대화할 경우 인류는 최적의 상태에 도달 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는데요, 그리하여 기업에 대한 규제는 심지어 보건, 안전 등에 관한 것도 폐지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것도 결국 시장원리, 계약자유의 원칙에 맡겨 두면 저절로 발전적으로 해결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고 정부가 나서게 되면 오히려 왜곡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이와 같은 스펜서의 ‘사회정학’은 자유방임 철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고, 실제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기 미국의 경제철학, 법철학을 지배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 소위 신자유주의의 선구가 됩니다. 그러나 이후 무책임하게 질주한 시장경제는 결국 대공황으로 귀결되었지요. 그리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위 ‘뉴 딜(New Deal)’ 정책으로 새로운 사회 보장적 경제체제를 지향하게 되지요. 그러나 그 초기에는 역시 로흐너 판례의 여파로 루스벨트 정부의 정책들은 사법부에 의하여 계속 제동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법부의 인적 구조를 개편하려는 소위 '대법원 갈아엎기(court packing)'를 시도합니다. 대법관의 수를 늘려 판례변경을 도모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법안은 여론에 밀려 실패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기존 대법관들의 사망, 은퇴 등으로 루스벨트는 자연스럽게 대법원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로흐너 판례는 폐기되고, 사법부는 더 이상 뉴 딜 정책의 장애가 되지 않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미 대법원의 역사에서 홈즈는 현장의 증인이었습니다.


이처럼 홈즈는 1920년대에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에서 주목받는 반대의견을 천명하면서 ‘인권의 옹호자’로 널리 추앙받게 됩니다. ‘위대한 반대자’라는 명성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앞서 본 바와 같이 실제로 홈즈가 20세기 후반의 평등주의적 리버럴리즘을 실증한 것인지, 그의 사상이 그리고 그의 판결이 과연 인권의 개념을 내재화하고 있던 것인지에 대하여는 적지 않은 의문이 있습니다.


먼저 홈즈는 원래 스펜서의 적자생존의 원리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회적 다위니즘에 친한 사람이었습니다. 객관적인 옳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경쟁을 통해 우월성을 입증한 것이 결국 옳은 것이고 가치로운 것이라는 입장에 가까운 것이지요.홈즈가 로흐너 판결에서 수정헌법 제14조가 스펜서 이론을 입법화한 것이 아니라고 한 말이 스펜서 이론 자체에 대한 반대로 해석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그것은 다만 그 조항을 오로지 스펜서의 이론으로만 국한하여 해석할 수는 없다는 취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홈즈는 사회적 다위니즘적 관점에서 정신박약자들의 단종에 관한 법률을 옹호하기도 하였습니다. 소위 인류의 진화를 위한 우생학을 지지한 것이지요.


그것이 악명 높은 벅 대 벨(Buck v. Bell) 사건(1927)입니다. 미국 버지니아 주는 1924년 정신박약자에 대하여 단종을 강제하는 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캐리 벅이라는 18세의 여성에 대하여 시술을 강요하게 됩니다. 벅의 후견인은 미국 수정헌법 14조에 따라 이는 위헌적인 신체 자유의 침해라고 맞섰습니다. 하지만, 1927년 미 대법원은 단종에 관한 주 정부의 입법을 합헌으로 선언합니다. 그 판결문의 주심은 바로 홈즈였습니다. 홈즈는 유전적으로 정신병이나 정신박약증을 앓고 있는 환자에 대한 불임수술은 공공의 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홈즈의 설시를 직접 들어보지요.


“정신이상의 자손이 범죄로 인하여 처형당하게 하는 것보다, 혹은 저능아인 까닭에 굶어 죽게 하는 것보다, 그 명백한 부적응자들이 자손을 생산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더 좋을 것이다.”(앨버트 앨슐러, 위의 책, 165쪽, 번역은 필자 수정)


이는 현대의 관점에서는 매우 쇼킹한 것입니다. 과연 홈즈를 리버럴한 법률가라고 볼 수 있을지 극히 회의가 들 정도입니다. 나치 시대 악명 높았던 ‘단종법’ 그리고 그를 위한 특별 재판소를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우생학적 단종은 널리 퍼진 인식이었다는 점입니다. 영국의 유력한 리버럴리스트, 진보주의자들이었던 시드니 웹, 베아트리스 웹, 버나드 쇼, 해롤드 래스키 등 저명한 인본주의자들도 그러한 우생학을 지지하였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단종법은 비록 1940년대에 사문화 되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였습니다. 위의 판결의 대상이 된 버지니아 주의 단종법도 1974년에 비로소 최종 폐기됩니다(위키백과 http://en.wikipedia.org/wiki/Buck_v._bell 참조).


이처럼 홈즈 판사는 사회진화론에 친하였습니다. 그리고 힘의 논리와도 가까웠습니다. 어떤 이는 홈즈는 ‘트라시마쿠스주의자’라고 평하기도 합니다. 트라시마쿠스는 바로 소크라테스와 논쟁을 벌인 소피스트로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주장을 펼친 사람이지요. 그런 홈즈가 어떻게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의지를 존중하는 입법을 지지하고, 또 정치적 약자인 이들의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였을까요? 과연 홈즈가 생각하는 노동입법의 의미 그리고 사상과 언론의 자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힘의 논리’라고 하였지만, 이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는 앞서 본 트라시마쿠스와 같이 현상적인 모습에 대한 설명으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 ‘법은 강자의 편이다’라는 서술적 논리이구요, 다른 하나는 또 다른 소피스트인 칼리클레스와 같은 실력설인데요, 이는 ‘강자의 이익이 법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적 논리입니다. 즉 칼리클레스는 어떤 본질적인 강자를 인정하고, 또 어떤 본질적인 약자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당시 희랍 사회에서 칼리클레스가 생각하는 것은 곧 재산과 혈통이었습니다. 유력한 가문, 부유한 가문이 지배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는 현대 나치의 게르만 우월주의와도 상통하는 것입니다.


홈즈에서 힘의 논리란, 그리고 사회적 다윈주의란 그 가운데 칼리클레스의 논리가 아니라, 전자 즉 트라시마쿠스의 논리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현실적 힘으로 뒷받침되는 다수의 의지는 법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비록 벅 대 벨 사건에서 정신박약자의 후손을 끊는 것이 정의라고 본 것은 어쩌면 지적 능력으로 우열을 가르는 실력설과 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홈즈는 기업주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편도 듭니다. 비록 노동자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노동보호 입법이 노동자들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믿지도 않았지만, 노동자들이 다수가 되어 의회에서 노동입법을 성사시킨다면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홈즈는 기업의 결합과 집중을 인정하였다는 점입니다. 노동보호 입법을 긍정하는 입장이라면 동시에 기업결합과 자본집중을 통제하는 것에도 찬성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홈즈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홈즈는 노동자들의 자신들의 입장을 의회를 통해 관철시킬 수 있고, 자본가들도 역시 자신들의 이익을 스스로 도모하고 추구할 자유가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체제에서 다수의 의지는 법이 될 수 있고, 또 누구나 자율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최고도로 도모하고 추구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홈즈는 결국 대세 추종주의자였을까요? 홈즈의 리버럴리즘적 판시도 단지 현실 긍정의 결과에 불과한 것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진정 홈즈는 자유민주적 법치국가의 영웅이 아니라 현실순응의 기회주의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홈즈는 단지 현실 영합주의자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단순한 트라시마쿠스주의자에 그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홈즈는 단순한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 속에서의 사람들의 실존을 중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간의 본질, 삶의 본질, 세계의 본질을 알 수는 없지만, 인간이 자신의 힘을 최대한 발휘하여 위대함에 도달하려는 의지만은 간절히 존중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홈즈는 실력의 본질보다 삶에서의 실존을 앞세우는 실존주의자로서의 면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홈즈는 사회적 약자, 정치적 소수자들이지만, 그들의 삶의 의지, 사상의 자유와 말할 자유를 전적으로 긍정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누구나 자신의 생명과 의지를, 그것이 비록 다수에 의하여 경멸될지라도, 또 그것이 세상에서 보기에 아무 유익함이 없어보일지라도, 자신의 목표와 뜻에 따라 영웅적으로 헌신할 수 있고 또 지상에서 그것보다 더 영원한 가치는 없다고 보는 것이 진정 홈즈의 사상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수정헌법 제14조는 바로 그러한 각인의 의지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그의 귀족적이며 엘리트주의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홈즈의 실존적 생의 철학은 곧 자유민주주의의 법사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또한 이렇게 본다면, 미국의 초월주의자들의 사상의 합리적 본질은 여전히 홈즈 판사에게도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출처 : 정태욱 교수의 교실
글쓴이 : 정태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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