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使徒) 법관 김홍섭의 삶과 뜻
* 이하의 글은 정태욱교수님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나 역시 오래전 법철학을 맨 처음 접했을떄 라드브루흐와 함께 한국이 낳은
법철학자인 홍섭 김판사님의 글을 최종고교수님의 저서를 통해서 접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수 있을까?"라는 화두는
김바오로판사님의 평생의 화두였다. -이덕휴목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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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현대 법관 가운데 경건함과 진지함에 있어서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김홍섭 판사를 소개할까 합니다. ‘사도(使徒) 법관’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법복 속에 ‘성의(聖衣)’를 입은 분이라고 불리기도 한 김홍섭 판사는 일제시대 변호사로 법조의 길을 시작하여 해방 후 잠시 검사를 거쳐 이후 죽 판사로 그의 본분을 다하고자 고투한 분입니다.
“탐욕과 궤계(詭計)에 부단히 움직이는 손, 손, 손들,
그 위에 그 속에 편승, 농간되려는 표정, 표정, 표정 ――
한편 정의, 신성, 기타 갖가지 명분 아래 카츄샤를 저주하고 네프 공작을 냉소하려는 편협(카츄샤와 네프 공작은 톨스토이 소설 <부활>의 주인공임), 고루, 박정 .... 의 면면 ――”
(김홍섭, “너를 싫어하지 않으려 한다: 법관 참회”, 무상을 넘어서, 성바오로 출판사, 중판, 1987, 95쪽)
김홍섭이 제시한 법조인에 관한 세간의 촌평과 힐난은 바로 그 자신의 시각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법조인으로서의 인생은 일제 강점기의 풍찬노숙의 선배들, 해방 후 독재 권력에 맞선 투쟁의 후배들에 비하면 순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6.25 전쟁, 4.19 의거, 5.16 군사쿠데타 등 비극적 현대사, 권력과 세파에 휘둘리는, 가난하고 헐벗은 우리 동포들의 삶을 몸소 겪으면서 법조인으로서 느꼈을 심적 고초는 누구보다도 컸을지 모릅니다. 더욱이 타산적인 법조인의 현실주의와는 거리가 먼 그의 섬세한 성정과 종교적 지향은 법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한 없이 깊고 높게 하였습니다.
법, 인간사의 여러 제도 가운데, 이만큼 더 크게 사랑과 증오, 평화와 공포, 명예와 치욕의 대상이 된 것이 또 있을지요? 법을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그 모순과 역설을 끝까지 떳떳하게 마주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법조인들이 그 핵심까지는 차마 접근하지 못하고, 편의적 타협으로 얼버무리는 삶을 살아간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김홍섭 판사는 그 인생의 시험대에서 끝까지 치열하고 성실하였으며, 끝까지 번민과 인내의 삶을 살았습니다.
김홍섭 판사의 고향은 원평, 서쪽으로는 김제의 너른 평야, 동쪽으로는 모악산이 멀리 보이는 농촌이었습니다. 소년 김홍섭은 어렸을 적 고향의 자연, 대지의 꽃, 하늘의 별과 친하게 지내던 감상적인 소년이었습니다. 또한 초등학교 졸업 당시 도지사 상(1등상)을 수상할 정도로 총명한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년 홍섭은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시골의 가난한 농가는 총명한 외아들조차 상급학교에 진학시킬 형편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학교를 졸업한 홍섭은 부친을 도와 농사일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향학에 대한 꿈이 계속 커갔던 것 같습니다. 마침 소년 홍섭이 15세 되던 해, 1931년, 홍섭의 집안은 오수로 이사합니다. 1931년은 전라선이 전주에서 남원까지 연장되는 때였고, 임실과 남원 사이 오수에도 역이 들어선 것입니다. 비록 도회지는 아니었지만, 이동 인구가 좀 있었고, 거기서 조그마한 가게(잡화점)를 낸 것입니다. 홍섭은 가게 일을 보면서 여유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또 통학하는 학생들로부터 책을 구해볼 수 있었습니다.
홍섭의 법조와의 인연은 그렇게 책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첫 인상은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거슬러 20 여 년 전 내 어릴 적 독서목록 가운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나는 그 때 <소공자>라는 책자를 탐독한 일이 있었다. 거기 등장하는 한 법률가, 그의 여러 특징을 소개하는 글줄 가운데 특히 ‘손’ 대문에 이르러 ‘... 통통하고 짧고 몽실몽실한 손가락’이란 것이 있었다. 당시 나의 어린 소견으로도 이러한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려는 것인지를 대체로 짐작하게 하였던 것이며...”
그러나 이후 마하트마 간디나 아브라함 링컨 같은 분도 법률가였다는 사실에서 “약간의 호의”를 회복할 수 있었고, 드디어 일제 말기 법조인이 지니는 실용적 의의를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김홍섭은 이를 “보신상의 효험”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단지 일신상의 편익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민족의 독립과 조선인으로서의 자립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년 홍섭의 뜻은 그렇게 뜻이 깊어갔고, 마침내 1935년 19살 청년 김홍섭은 부모님께 자신의 각오를 얘기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결단을 내려 전주로 떠납니다. 전주에 도착한 홍섭은 무작정 변호사 사무실을 찾다가, 일본인 변호사 ‘히사나가’ 변호사를 만나게 됩니다. 이 만남이 김홍섭의 인생의 분수령이 됩니다. 김홍섭은 히사나가 변호사의 호의에 의하여 사무실에서 일을 도우며, 틈틈이 법학공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1939년 김홍섭은 일본 유학을 떠납니다. 히사나가 변호사의 주선으로 동경의 ‘니혼 대학’에 편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도일 후 1 년여의 공부 후에 김홍섭은 바로 조선인 변호사 시험에 합격합니다. 이때 같이 합격한 이들로 오평기 변호사, 이병린 변호사(우리나라 현대 인권변호사의 효시와 같은 분으로서, 대한변협 회장도 역임한 바 있습니다.)가 있었습니다. 특히 오평기 변호사와 김홍섭은 둘도 없는 절친으로 후술하는 바와 같이 후에 그들은 서로 운명을 나누는 사이가 됩니다.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김홍섭은 와세다 대학의 문과에 청강생으로 등록합니다. 김홍섭에게 법학은 ‘실용적 필요’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의 심중은 문학에의 동경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곧 태평양전쟁이 발발,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김홍섭과 오평기는 귀국하여 조국의 미래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울에서 김홍섭은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을 찾아갑니다. 김홍섭의 고향은 김제, 김병로의 고향은 순창, 김홍섭은 변호사 자격을 따고 돌아와 식민지 조국에서 새로운 시작을 도모하려는 청년 변호사, 김병로는 민족지도자로서 전국적으로 신망이 높았던 원로 변호사, 김홍섭이 김병로를 찾아 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김병로 또한 김홍섭을 기꺼워하고, 높게 평가하였던 것 같습니다. 김병로는 김홍섭을 낭산(朗山) 김준연(김준연 역시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언론인으로 활약하였으며, 해방 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기여하여 이승만 정부에서 법무부장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한국 현대 헌정사의 한 증인, 당시 낭산은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 주필직을 사임하고 연천군 전곡에서 은거하고 있는 중이었음)에게 소개하여, 1944년 김홍섭은 그의 셋째 딸 김자선 양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됩니다.
마침내 일본은 패전하고, 우리는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식민지 시대, ‘보신’ 혹은 ‘사명감’으로 법조인의 길을 생각하였던 김홍섭으로서는 이제 더 이상 법의 길을 갈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해방 조국의 현실은 더욱 암담하였습니다. 해방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김홍섭은 검사로 발령을 받게 됩니다. 누가 추천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김병로가 미 군정기 법무부장이었고, 김병로와 함께 민족 변호사로 절친하였던 이인이 검찰총장이었던만큼 김홍섭의 검사 발령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당시 상황이 좌우의 대립으로 국정이 극도로 혼란한 시절임을 감안하면 김홍섭과 같은 원칙과 소신의 법률가가 검사직을 맡는 것이 더욱 필요한 때였는지도 모릅니다.
김홍섭도 검사직을 거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객관사정은 이와는 상반되는 태도를 나에게 요구하였다. 즉 이제는 국권이 우리 책임하에 움직이게 되었으니 도리어 너(법)와의 긴밀한 협조 아래 응분의 노고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김홍섭, 앞의 책, 94쪽)
그러나 그렇게 현실의 책임을 수행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영원을 향하고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다음은 1946년 초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의 일부입니다.
“해보다 달이 좋다.
달보담 별이 좋다.
할아버지 무릎에 앉기어서 북두와 삼태성을 배우던 철부지 적부터 오대산 위 밤하늘 아래에서 몹시 애닯아 하기까지 나는 이 별들을 무척 좋아했고, 시방도 좋아한다.
.....
그때 또 나는 정녕코 이런 속삭임을 들을 수가 있었다. ‘너의 조상으로부터 너로 다시 네 후손 말대에 이르는 동안이 내 안목에는 하루요 한 토막이라 <시류>의 끄나풀에 매어달려 명활하는 그대 사람들의 명운(命運)이 내 눈에는 실로 목하(目下)에 막연하다.
.....
시방 나는 문득 인왕산 말렁이 바로 보이는 깜박깜박하는 작은 별로부터 이런 성음을 감득하였다. 동무별 등성이 한 모퉁이에 터잡은 불우한 족속이여, 그대들은 어찌하여 현세의 공허에 그다지 무자각하뇨. 보이는 형제와 이웃을 미워하면서 어찌 안보이는 나라와 뭇사람을 사랑한다 하느뇨.”
(김홍섭, “별을 보는 마음”, 동아일보, 1945. 2. 1자; 무상을 넘어서, 위의 책, 126-128쪽)
그런데, 여기서 글의 마지막 부분, “보이는 형제와 이웃을 미워하면서, 어찌 안보이는 나라와 뭇사람을 사랑한다 하느뇨”는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혹시 당시 소련을 또 하나의 조국으로 삼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외친 공산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검사 김홍섭은 1946년 5월부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담당하게 됩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란 공산당의 재정부장 이관술, 공산당의 기관지였던 해방일보의 사장인 권오직 등의 모의 하에 당의 활동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지폐원판을 이용하여 화폐를 위조한 사건으로서, 이후 미군정은 공산당을 불법화하였고, 또 세간의 여론도 급격히 나빠지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고, 따라서 그 실체적 진실을 둘러싸고, 커다란 논란이 있었습니다. 공산당 측은 자신들의 연루 사실을 전면 부인하면서 이를 당국의 조작과 날조라고 항변하였고, 그에 따른 데모도 격렬하였습니다. 반대로 미군정과 남한 당국은 이 사건을 당시 경제 혼란과 물가 앙등의 책임을 공산당에게 전가하고, 공산당의 ‘검은’ 정체를 만천하에 폭로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처음에는 당시 만연한 화폐위조 범죄의 하나 그리고 몇몇 공산당원들의 활동자금을 위한 사건으로 출발하였으나, 결국에는 ‘남한 경제’를 교란 파국으로 몰고 가기 위한 공산당의 조직적인 사건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조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대하여는 고지훈, “정판사사건 재심청구를 위한 석명서”, 역사문제연구, 제20호, 2008, 349-373쪽 참조)
이러한 중대한 사건을 담당하였으니 김홍섭은 그야말로 당시 정국의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 있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김자선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집에 돌맹이도 날아들고 경찰들이 지켰어야 했고, 피신가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건 이전에도 김홍섭 검사는 정치적 간섭 때문에 매우 힘들어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검찰청 바로 옆 관사에 살고 있었는데, 고함치는 소리가 집에까지 들리곤 했다고 합니다.
(김자선 여사의 증언에 대하여는 최종고, 사도법관 김홍섭, 육법사, 1985, 49쪽)
결국 정판사 지폐 위조 사건을 끝내고, 김홍섭 검사는 사표를 제출합니다. 검사직만 그만 둔 것이 아니라 아예 법조의 길을 끝내고자 하였습니다. 뚝섬으로 집을 옮겨, 농사를 짓고자 한 것입니다. 2천 평 밭을 구입하여 곡식도 심고, 닭도 키우고, 돼지도 치면서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농사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논밭의 1/3이 소나기에 쓸려가 버리기도 하고, 텃밭에 심은 마늘은 하루 저녁에 모두 도둑맞기도 하였고, 다들 같은 작물을 심어 도무지 시세가 나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김홍섭은 돼지를 키우고자 이웃에서 두 마리를 구입하여 구럭에 넣어 어깨에 메고 올 때, 온 동네 떠나가도록 울어대는 돼지의 울음소리에, “도연명의 세계 ― 그것은 한층 아득하고 먼 거리의 경지일 성 싶다”고 상념하기도 합니다.
(김홍섭, “전원”, 무상을 넘어서, 앞의 책, 40쪽)
김홍섭은 결국 다시 법의 길로 돌아오게 됩니다. 1947년 10월 다시 변호사 등록을 하고, 1948년 봄학기에 중앙대학교 법리학(法理學; 즉 법철학) 강사로 출강도 합니다. 그리고 그 해 정부 수립 이후 대법원장을 맡은 김병로 선생의 강권에 따라 “아직도 남은 흙에 대한 미련과 ‘재판’에 대한 회의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소년심판원에로” 복귀합니다.
(김홍섭, “일(一)법관의 심정”, 무상을 넘어서, 앞의 책, 184쪽)
소년부 판사, 이는 어쩌면 김홍섭에게 가장 어울리는 보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직을 맡기 전 봄날 우연인지 몰라도, 김홍섭은 서울 우이동, 북한산 기슭의 고아원을 방문합니다. 이 고아원 방문은 김홍섭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줍니다. 모두 란(蘭)자가 붙은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피아노를 치는 것을 들으며 김홍섭은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김홍섭은 그 아이들을 보면서, 이 세상의 불의에도 불구하고 삶이 의미 있으며, 신은 지상의 오탁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밝혀주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C선생, 나는 세태와 인심의 전도를 슬퍼하지 않으려오, 가사 모리배가 도량(跳梁); 함부로 날뜀하든, 오리(汚吏)와 강도가 이보다 십백배(十百倍) 흥왕(興旺; 크게 일어남)하던 간에 우로(雨露)와 양광(陽光)을 선악에 공시(共施; 고루 베품)하시는 하느님은 잡초를 제거하기 위하여 곡식을 흔들어 놓지는 않을 법하오. ... 내 소견으로는 지순하게 핀 한 개의 인정화(人情花)의 효능은 족히 한 성자의 대언(代言)에 필적할 것 같으오. ... 차제에 피차 명심할 것으로 생각되는 바는 ... 악과(惡果)과 함께 부단히 선근(善根)도 퍼져가고 있을 게라는 신심(信心)이라 믿소.”
(김홍섭, “동란(童蘭)”, 무상을 넘어서, 앞의 책, 23-24쪽)
김홍섭은 귀로에 오르면서 그 숭고한 깨달음을 이렇게 천명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이뇨.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다시 또, 누구라 그들을 불러 고아라 하느뇨. 돌이켜 천하에 ‘고(孤)’ 아니할 자 뉘뇨.”
(김홍섭, 위의 책, 25쪽)
사람들이 제 서글픈 형상을 모르고 자고자대(自高自大)하여 진정 천사와 같은 저 아이들을 고아라고 하시(下視)하고 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요. 저들 고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한갓 무력한 피조물에 다름 아닐진대, 같은 인간, 가련한 인생들끼리 서로 위하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일, 그것 말고 인생에서 더 귀하고 중요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아마도 김홍섭의 뜻은 그와 같이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곧 김홍섭, 아니 우리 민족은 참으로 가장 처참한 비극의 구렁텅이로 빠져듭니다. 남북의 대립, 좌우의 대립이 깊어져, 6.25 전쟁이 터진 것입니다. 김홍섭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합니다. 김홍섭만이 아니라 당시 피난갈 수 있었던 서울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계속 ‘승전보’를 알렸습니다. 김홍섭을 비롯한 대다수 서울시민들은 맥아더 장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서울로 진주하고 있다는 6월 27일자 저녁 공보(公報)를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 새벽 2시 한강철교와 인도교는 폭파되고 맙니다.
졸지에 적 치하에 남게 된 ‘판사’, 그리고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의 담당 검사였던 김홍섭은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김홍섭은 부모님을 모시고 뚝섬의 옛집에 토굴을 파고 지내는 한편 청산가리를 찾아 나서는 등 죽음을 각오합니다. ‘도망 뺀 이들’에 대한 분노도 치밀어 올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침공을 개시하자 부리나케 내빼던 소련 상층부들에 대한 청년 장교가 내뱉었다는 욕설, “이 새끼들 한 놈만 더 지나가 봐라. 총알로 쏘아버릴 테니”, 하는 것이 그 심정을 대신하는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김홍섭, “실종이후”, 무상을 넘어서, 앞의 책, 63쪽)
그런데 그 때, 오평기 변호사가 나타납니다.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법률가동맹’이라는 완장을 차고, 정보책(情報責)으로 활동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절친, 공산 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김홍섭을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뚝섬에까지 공산당의 수색이 시작되면서, 김홍섭은 7월 한 달 그리고 8월 보름을 오평기의 집에서 은거하게 됩니다. 같이 단파 방송을 청취하면서 유엔군의 진주를 알게 되고, 8월 15일 쯤 유엔군의 서울 입성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이튿날 김홍섭은 오평기의 집을 나서는데, 바로 그 다음날 새벽 오평기는 내무서에 의하여 구속됩니다!
이후로 김홍섭은 오평기를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신산(辛酸)의 한(恨)이 어떠했을까요? 김홍섭의 글과 시에는 오평기에 대한 회상과 회한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중 생생한 표현은 부산 피난 시절 다음의 시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몽한(夢恨)>
6.25 당시 서울서 P는 나의 안위를 위하여 백방으로 노심(勞心)하더니 도리어 나는 물론 과반은 P우(友)의 배려로 살아남고 천만의외에도 그는 납북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 간날 그와 꿈에 만나서 놀다 ――
꿈같은 인생이요 인생이 본시 꿈을
꿈속에 꿈을 꾸어 피(彼)오 시(是)오 하랴마는
깨어진 꿈의 쪼악을 헤어 모는 이 심사(心思)
어허 가신 이여 그 날이 어제 같소
새벽녘 대문 열고 지향없이 가는 나를
부-대 길 조심하이 손목 쥐어 흔들더니
사지라도 같이 가고 살지라도 같이 사자
내 신액(身厄) 풀고지고 가나오나 심려타가
정녕코 못 오실 길을 날과 대신 가시다니
가신날 헤어보니 두 해도 석 삼월이
지내온 고비고비 환(幻)도 되고 몽(夢)도 되다
환몽(幻夢)을 희(戱)라 하리오 념(念)에 새겨 보오련을
(하략)
전쟁, 그 극단의 시간, 온 강토를 피로 물들인 참화의 시간 사람들의 마음은 분노와 원한으로 피폐하고 강퍅해져갑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 새로운 세상, 참으로 올바르고 순결한 세상에 대한 염원도 절박하고 날카로워집니다. 김홍섭의 심중에도 질풍과 노도가 휘몰아칩니다.
<하(下), 돌아온 서울>
(전략)
이제 후로 조국의 순결을 짓밟는 소행이며
인민의 이름에서 죄과를 범하는 자
그런 자는 씨를 남기지 말도록 하여야 한다.
함해(陷害; 남을 해침)와 류취(類聚; 끼리끼리 작당함)로서 파당을 조작하며
새로운 권문과 세도를 꾸미는 자
그런 도배(徒輩)도 모두 제거되어야 한다.
빙공영사(憑公營私; 공적인 것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이득을 꾀하다)로 출몰이 무상하며
모든 명목의 연락(宴樂) 또는 야회(夜會)에 출입하는
그런 자도 모조리 목을 베히도록 하자
무성(無誠) 무위한 대의원(代議員)은 소환되고
정실과 비밀 거래 인권의 유린이며
모든 뇌물행위는 극형으로써 방지되어야 한다
유사(有司; 나라의 일을 맡아봄)이건 시민이건 가릴 것 없이
칠팔십으로 지어(至於) 누백(累百)의 미량(米糧)을 보유하며 지낸 자
그런 자는 우선 서울 거리에 들어서지 말도록 하자
이후 모든 공의(公義)는 진실된 여론 위에 이뤄지고
일체 시책은 냉엄한 인민의 비판 아래 있어야 한다
백귀야행(百鬼夜行; 온갖 잡귀가 밤에 나다니듯 여러 무리들이 설쳐 댐) 부란(腐爛; 부패하고 문란한)의 전철을 되풀이 할세라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기관
인민의 나라 - 모두는 인민의 것이어든
민의는 그대로 천심이라 하였거든
용지(勇智)와 신협(信協)
대의(大義)와 또 죽음은
조상의 거룩된 유훈이어니
돌아온 하늘 이제 그 아래 있음이여
타오르는 공의와 분노에의 감동이여
누구라 이 불길을 가벼이 볼 것이랴
다시는 침략이던 독재, 기만 - 모든 불선(不善), 부정의(不正義)
이 열화(熱火) 앞에서 적은 제물(祭物)이 되고
또 길이 돌아온 서울의 호군(護軍)이어라
이러한 시구는 어쩌면 ‘성인’ 김홍섭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극단적이며 전투적입니다. 그만큼 전쟁이 가져다 준 심적 충격, 분노는 자심(滋甚)한 것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종교적 철저함과 순수한 열정은 숭고한 분노와 잇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김홍섭은 어렸을 적부터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를 이뻐하던 외삼촌 손에 이끌려 개신교 예배당을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외삼촌은 홍섭이 6,7세 때 오래 병을 앓다가 세상을 뜹니다. 이때부터 홍섭은 동네 아이들이 상여 뒤를 구경삼아 따라가는 것과 달리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침울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음을 회고합니다. 홍섭은 조숙한 소년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12-3세 되어서는 그가 각별하게 귀여워하던 이웃의 어린 아이(김홍섭은 외아들이었음)가 갑자기 죽게되는 일을 당합니다. 홍섭은 너무나 서글퍼 그 아이를 살려 달라고 아침 일찍 뒷산 모퉁이 소나무 사이에 엎드려 달포를 일심으로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일찍이 종교적 심성을 키워 온 김홍섭은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에서 그 영성(靈性)을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믿음으로서 의(義)로움을 얻을 수 있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개신교의 가르침은 너무 신(神) 중심적이어서 신앙과 구도에 대한 인간의 주체적 방도에 대하여 얘기해 주는 바가 미약하다고 본 것입니다. 즉 “거기서의 구령(救靈)에 대한 희망이란 투기적이거나, 아니면 맹목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느껴졌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믿음=천당’이라는 개신교의 단순함은 안이함으로 비쳐졌던 것입니다.
(김홍섭, “무상(無常)에서 상생(常生)에로 : 구도기”, 무상을 넘어서, 앞의 책, 324쪽)
그로부터 김홍섭은 불교에 흥미를 갖게 됩니다. 특히 8정도(八正道)의 정진(精進)과 인내를 통한 극기수행은 바로 개신교의 안이한 길과 대비되는 것이었습니다. 김홍섭은 오대산 상원사로 당대 최고의 선승인 방한암 선사를 찾아가기도 하였습니다. 끄는 것이 있으면 출가까지도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또한 신여성, 여성해방의 선구자로서 32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접고 방한암 선사의 문하 비구니로 출가한 김일엽 스님과 토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교도 김홍섭의 구도에 대한 갈구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한편으로는 현실의 지난한 문제들에 적멸의 공(空)으로 대응하려는 것에서 무책임이 느껴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와 영원, 영혼 불멸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서 미흡함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김홍섭은 가톨릭으로 향합니다. 가톨릭은 기독교 본래의 특징인 절대존재와 영혼불멸의 종교이며, 또 개신교와 달리, 또 불교와도 같이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수행을 그 구도의 길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6.25 전쟁,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에서 김홍섭의 종교적 갈구는 점점 깊어갑니다. 그러한 김홍섭의 마음을 읽었는지, 부산 피난 시절 김홍섭 판사에 도움을 많이 주었던 하종오씨(가수 화춘화의 부친)는 가톨릭에서 또 하나의 성경으로 간주되고 있는 <준주성범(遵主聖範; 예수를 본받아)>을 건넵니다. 이후 이 준주성범은 김홍섭의 애독서가 됩니다. 십 수 회독을 하여 책이 다 떨어진 상태인데, 부인 김자선 여사는 이를 소중히 간직하였다고 합니다. 그 기도문들 가운데 김홍섭이 특히 자주 뇌었던 구절 몇 가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무죄한 생활을 못하오면 범한 죄나 합당하게 뉘우칠 은혜를 주소서.”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이 제일 잘 아시는 나의 죄 많은 일생을 멸시하지 말으소서.”
“아첨하는 자를 지혜롭게 피하고 거스리는 자를 인내로이 참게 해 주소서.”
“너는 모든 일에 끝을 생각하라.”
“겸손한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여도 평화를 잃지 않고 ――”
(김홍섭, “준주성범을 읽고”, 무상을 넘어서, 앞의 책, 507쪽)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는 육당 최남선과의 만남입니다. 아직 불교에 대한 미련 속에 가톨릭에의 귀의를 결정하지 못한 김홍섭은 육당 최남선을 찾아갑니다. 최남선은 주지하듯이, 일제시대 우리 민족의 대표 지식인이지요. 최남선은 기미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음은 물론 일제의 대표 식민지 학자 다카하시 도루에 맞서 우리 민족의 자주적 기상과 아울러 조선 불교의 독창성을 선양하였던 민족 계몽운동가였습니다. 비록 일제 말기 전향하여 일제에 협조하여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당대 최고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육당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불교지식인이었는데, 때는 마침 그 자신이 점점 불교에 회의적이 되어 가던 시기였습니다. 육당은 김홍섭을 만나자마자 두 손을 덥석 잡고, 진지하게 얘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가톨릭에의 귀의를 권유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김홍섭은 1953년 9월 온 가족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온 가족이 영세를 받습니다. 이어서 육당 본인도 1955년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선언합니다.
이렇게 김홍섭이 불교를 접고 가톨릭으로 귀의하였지만, 불교를 배척한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김홍섭 판사는 곧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로 발령이 나고, 그에 따라 판사직에 대한 본격적 성찰을 시작할 때, 화엄경의 한 대목을 옮기면서 자신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於諸惑業及魔境(어제혹업급마경),
世間道中得解脫(세간도중득해탈),
猶如蓮華不著水(유여연화불착수),
亦如日月不住空(역여일월부주공)。
모든 미혹과 업장, 마군의 경계
이 세간의 길 가운데 해탈을 얻으니,
오히려 연꽃이 물에 묻지 않고
해와 달이 허공 중에 머뭄이 없듯이.
(화엄경, 보현행원품)
(김홍섭, “너를 미워하지 않으려 한다: 법관 참회”, 무상을 넘어서, 앞의 책, 97쪽.)
마치 ‘화이부동(和而不同)’과 같은 자세라고 생각됩니다.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지만, 그것에 동참하지는 않으려는, 현실을 존중하지만, 현실에 안주하지도 않는 자세, 이는 어쩌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기 위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모순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순은 법관의 경우에는 더욱 큰 것인지 모릅니다. 법의 한계, 또 인간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또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김홍섭으로서 ‘인간이 인간을 재판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무겁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김홍섭은 1959년 “일법관(一法官)의 심정”이라는 글을 발표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나?’, ‘무슨 근거에서 재판을 할 수 있나?’ 이에 대하여 김홍섭은 단순히 국가-질서-안전 등이 아니라 법-양심-이성-절대자라는 종교적 단계에까지 이행합니다. 그것은 결국 가톨릭 자연법 이론, 즉 영구법(永久法; 신의 창조질서)-자연법(自然法;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질서에 참여하는 부분)-인정법(人定法; 자연법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법령으로 공포되는 것)으로 귀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관으로서 과연 내가 적합한가?’, ‘어떤 사람이 법관이 되어야 하나?’ 이에 대하여 김홍섭은 “인물(人物)성행(性行)을 통찰하는 최고의 명(明)과 실체 법규에의 최고도의 통효(通曉; 통달하여 밝게 앎)와 그리고 최고의 자제와 공평과 무사를 필요로 한다”라고 하는 아주 높은 잣대를 제시합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인간학의 부족’과 ‘면학의 부족’을 질책합니다.
그러면서 “<생>은 누구에게나 대견한 것이다. 간지를 부리다가, 제 꾀에 걸려 넘어진 자에게도 밉다고만 볼 수 없는 일면이 있겠거든, 어찌할 수 없는 힘에 압도 유린당한 패배자들 앞에, <좋은 법관>이기 전에 또는, 그와 동시에 <친절하고, 성실한 인간>이어야겠다고 때때로 생각하여 보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결과된 재판이 60점짜리였는지, 50점 미만의 것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의사가 임상의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진단과 투약이 조심스러워지듯이, 판사의 경우에도 그렇다고 하면서, 그저 최선을 다하는 길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결론적으로 법관의 최저선으로서 다음의 세 가지를 내어 놓습니다.
①재직하는 동안 직장이나, 동료에게 폐가 되거나, 불명예를 끼치는 일은 한사코 하지 않도록 할 것.
②내 수고료로서 받는 정당한 보수 이외에 어떤 불의의 이득을 탐하거나, 또는 특권의식을 부려 국민에게 빈축을 받는 일을 한사코 회피할 것.
③수시 적재(適材)와 체임(替任; 교체)될 각오로 모쪼록 빠른 시일 내로 내 기질과 역중에 맞는 자리를 골라 옮기도록 할 것.
(김홍섭, “일법관의 심정”, 무상을 넘어서, 앞의 책, 183-190쪽)
지금은 법관의 보수가 높아져, 행정공무원보다 한층 상회하는 수준이나, 당시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법관은 박봉에 시달렸지요. 더욱이 여덟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김홍섭의 가정은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추운 겨울 그러한 사정을 감내해야 하는 김홍섭의 심경은 다음과 같은 싯구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한소(寒宵; 추운 밤)
1. 이 밤이 기한(氣寒)하니 계절의 탓이로다
엄동(嚴冬)이 아니어던 이대도록 차가우랴
그밖에 딴 사정이야 일러 무엇하리오
2. 창밖에 두드는 손 작년 왔던 삭풍(朔風)이라
적막(寂寞) 삼경야(三更夜)에 반김직도 하다마는
방안에 선객(先客; 먼저 온 손님)(寒氣) 있으니 내 모른 척하리라
3. 밤마다 듣는 적음(寂音; 고요한 소리) 유신(有信; 소식)은 하온지고
세상의 어느 벗이 이렇듯이 신(信) 있으랴
한야(寒夜)에 날과 지나시니 더욱 그러하왜라
4.기한(飢寒; 춥고 배고픔)도 복(福)이던들 이쯤이야 흔할러냐
한 짐은 등에 지고 한아름을 안았구나
복(福) 밖 그 복(福)인가 하여 그냥 누려 보리라
추위가 계절이 돌아온 탓이긴 하지만, 더욱 추운 까닭은 집에 ‘온기’가 없기 때문이지요. 추운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데, 이미 방안에 먼저 온 한기가 가득하니 어떻게 다시 열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그저 고요한 저녁 바람소리만 들을 뿐이나 추운 밤 내내 접하니 절친이 따로 없습니다. 춥고 배고픈 것도 복이라면 복이고, 세상에 흔한 일이지만, 어린 팔남매는 등에 지고 가슴에 안아 한 짐이니 이 정말 특별한 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홍섭의 해학에 미소를 짓게 되지만, 다시 그 삶의 애환이 애닯게 느껴집니다....
날이 갈수록 김홍섭의 종교적 깊이는 더해갑니다. 그의 수첩은 일상적 사무 이외에 거의 대부분 신앙, 종교적 성찰, 고해와 반성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다만, 4.19혁명 이후 장면 정권이 위태로워지면서 같은 가톨릭 신자로서 장면 총리에 대한 걱정과 희망사항을 간절하고 세세하게 적어 놓은 것이 있지만, 그 이전 4.19 의거 그리고 5.16 군사 쿠데타에 대하여는 아무 소감을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5.16에 대하여는 아예 어떤 기록도 없습니다.
1956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1959년 전주지방법원장, 1960년 대법원 판사(현재의 대법관과는 다름), 1961년 광주고등법원장, 이후 1964년 서울고등법원장에 이르기까지 그는 준주성범이 그렇듯이, ‘예수따름’의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1956년, 이승만 정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 암살 사건의 주범, 허태영과 교분을 맺고, 그를 가톨릭으로 인도하고 대부(代父)가 된 후, 김홍섭은 <사형수들의 대부>가 됩니다. 판사의 자격으로 감옥을 왕래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던 김홍섭은 사형수들과 신앙을 얘기하고, 그들을 영혼의 길로 이끌고, 가톨릭으로 영세 입교시키고, 서신을 주고 받고, 마침내 그들이 최후를 마친 후에는 산소에 찾아가 연도(煉禱; 위령 기도)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마치 한 명의 ‘사제’와 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김홍섭은 그로부터 큰 보람을 느꼈으며, 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합니다.
김홍섭은 참으로 될 수만 있으면 신부가 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수첩에는 특이하게도 4명의 외국인 신부들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습니다. 인도, 프랑스, 필리핀, 미국,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로서 노년기에 혹은 가족을 떠나 보낸 후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된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 여덟을 키우는 가장으로서 김홍섭은 그러한 결단을 내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신 김홍섭은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가입합니다. 주지하듯이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과 청빈의 수도사로서, 제2의 예수라고 불릴 정도로 중세 가톨릭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그러한 성인의 덕을 본받아 소박하면서도 거룩한 생활로 임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는 평신도회입니다. 그 활동에서도 김홍섭은 모범적인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김홍섭은 더 나아가 순교를 최고의 덕으로 생각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전주지방법원장 시절, 김홍섭은 치명산(致命山)에 있는, 동정녀 누갈다 가족의 순교지를 찾습니다. 누갈다는 본명은 ‘이유혜’로서 1782년에 태어나 14세에 천주교리를 배워 동정(童貞)을 결심하고 같은 천주교인 유종선과 형식으로만 혼례를 올리고 오누이로서 지내기로 약속하여 지내다가, 1801년 박해로 시아버지, 남편을 비롯하여 가족이 모두 참혹한 죽음을 당한 조선의 순교자였습니다.
그런데 누갈다는 참수형을 당하기 직전 어머니와 언니에게 글을 남겼습니다. 그 치마를 뜯어 만든 서신이 후대에 전해져 사람들을, 김홍섭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김홍섭은 누갈다의 이야기를 가톨릭의 춘향전과 같이 길이 기억되기를 바라며, 그의 수필집에 그 약전(略傳)과 누갈다의 편지를 게재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 서신의 일부입니다.
“... 어머니 ... 우리 내외가 처음 만나던 날에 서로 수절하기로 맹세하니, 평생 근심이 일시에 풀려 4년 동안을 형매(형제자매)같이 살며, 그 사이에 혹독한 유감(유혹의 감정)이 몇 번 있어 대개 열 번이나 무너질 뻔하였으나 공경하올 성혈공로(예수님의 도움으로)로 마귀의 계교를 물리쳤나이다. 이런 말씀을 하옵는 것은 어머님께서 혹 이 일로 걱정하실까 함이오니, 이 글월을 받으실 때 소녀의 얼굴을 대하심과 같이 받으시옵소서... 다시 또 말씀 드리오니 아무쪼록 근심 마옵소서, 이 세상은 헛되고 거짓 것임올소이다. ...
(김홍섭, “춘향과 누갈다: 특히 누갈다의 생애와 그 사적”, 무상을 넘어서, 앞의 책, 119쪽)
지금은 부부의 교합, 아니 남녀가 성관계를 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아니 자랑으로 여겨지는 때이지만, 가톨릭 전통에서 원래 성관계는 부정한 것으로, 가능한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김홍섭도 그점을 의식하고, “다만, 누갈다의 행적에 있어서 그 온전한 이해 - 즉 인간으로서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그렇게 하는 것에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인가, 라는 것 등에는 가톨릭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첨가하여 두지 않을 수 없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김홍섭, 앞의 책, 114쪽)
김홍섭은 그 순교의 정신을 높이 받들고 그 사연을 기리기 위하여 손수 비석을 세웁니다. 그의 수첩에는 비석의 그림과 비문의 초안이 쓰여 있습니다.
“먼지는 제가 생겨난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그를 주신 천주께로 돌아갈지니라, 1959. 3. 1. 동교 후생 나그네 세움”
(김홍섭, 무상을 넘어, 앞의 책, 486쪽)
김홍섭은 때때로 치명산의 누갈다 유적지를 다녀오곤 했던 것 같습니다. 1964년 2월 27일 수첩에는 “치명산 순례, 유적보존 소홀에 상심”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어찌 보면 김홍섭 자신의 삶이 바로 순교와 같은 삶이 아니었나 생각도 듭니다. 드러난 것으로는 1960년 광주고등법원장 시절부터 김홍섭은 극심한 빈혈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그의 건강은 좋지 않았을 것이니다. 그리고 마침내 1964년 간암을 진단받고, 1965년 세상을 하직합니다.
그러나 그 몸을 이끌고 김홍섭의 구도와 같은 삶은 한결같이 이어졌습니다. 법원장의 막중한 책무를 다하면서, 가난을 십자가처럼 지고, 마치 성 프란치스코처럼 평신도 사역을 하고, 사형수들의 대부가 되어 전국을 다녔습니다.
1964년 2월 그의 수첩에는 “만사에 천주님의 안배를 의심할 까닭은 없다. 설사 마시기 어려운 고배일지라도―”라고 적고 있습니다. 수난의 의미에 대하여도 “A. 인간에 대한 천주의 관심, 사랑―그 정도―깊이, B.인간고(人間苦)의 한계와 그 수용태도”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수첩의 마지막 메모는 1965년 신년사로 준비된 문구였습니다. 이는 곧 그의 유언과 같은 말이 되었습니다.
① 어피구데다스(누구인지 잘 모르겠음)의 말, ― 오늘은 이항구에 ― 우리는 가고 있다. 영주(永住)가 아니고 ―
② 일하려 이 직장에 ― 올해도 부지런히 여기는 우리 후대가 영주할 땅 ―
③ 못나도 내 조국, 부지런히 일하자.
(김홍섭, 무상을 넘어서, 앞의 책, 501쪽)
끝으로 김홍섭과 변호사 시험 동기이며, 우리 변호사 역사에서 ‘의인’으로 기억되는 이병린 선생의 추도사의 일부를 옮겨 봄으로써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삼가 고 <바오로> 김홍섭 공의 영전에 고하나이다. 인생이 무상한 것을 누구보다도 깊이 깨달으셨던 공이 드디어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다지도 무상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다 못해 환갑까지라도 사시지 못하고 가시니, 가족과 친척 여러분들의 심경을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있겠으며, 이 강산의 빛을 잃으니 남아 있는 우리들의 슬픔을 어떻다 하오리까. 오호라, 그 인자한 모습을 이제 다시 볼 수 없으니 그리운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사람을 몹시 반가와하시던 공이었고, 근엄하면서도 넓었고 쓸 말만 골라 하면서도 우스운 이야기를 잊지 아니하시던 공이 가셨으니 이제 누구를 상대로 대화를 하여야 하오리까? 공이 선종(善終)하였다는 부음을 듣고 국민들은 물론 죄수들이 더 슬퍼한다 합니다. 공은 실로 법관의 귀감이었으며, 인생의 각자(覺者)이었고, 이 나라 조야 법조계는 물론 우리 민족의 등불이요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후략).
글을 써주신 정태욱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덕휴목사식.
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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