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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법철학

[스크랩] 라드브루흐의 생애와 사상 2

by 이덕휴-dhleepaul 2018. 6. 10.

먼저 구스타프 라드브루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합니다. 


라드브루흐는 흔히 ‘전환기의 법철학자’라고 불립니다. 독일이 프로이센 중심으로 최초의 통일제국을 건설한 직후 태어나, 이후 세계 1차 대전과 패전, 그리고 이후 사회주의 혁명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 그리고 나치의 발흥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 그리고 세계 2차 대전과 독일의 패망, 동서독의 분단, 서독 민주공화국의 새출발에 이르기까지, 라드브루흐의 일생은 그야말로 독일 근현대사의 파란만장한 곡절과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역사 속에서 라드브루흐는 새로운 독일, 새로운 공동체의 법철학을 위하여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독일의 권위주의적 전통을 민주주의적 계몽으로 교정하고자 하였고, 자본의 이기주의적 질서를 공동체적 사회법 질서로 진화시키고자 하였고, 세속적 인간 문명의 오만을 종교적 경건함으로 치유하고자 하였습니다. 그의 비범한 예술적 감수성은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으로 승화되었고, 그의 따뜻한 법감정은 정의의 법, 평화의 법, 인간의 법을 향한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먼저 라드브루흐의 생애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이하 주로 라드브루흐의 자서전 <마음의 길>(최종고 역, 종로서적, 1983)에 의존합니다.


라드브루흐는 1878년 유럽 북부 한자(Hansa) 동맹의 자유도시 뤼벡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이 도시는 프로이센 권역에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자유도시로서 군인이나 관리보다 상인이나 변호사와 같은 민간인이 더욱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하여 왔습니다. 


라드브루흐의 부친은 애초에 아이가 장교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곧 아들의 성격이 그에 맞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법률가로 희망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막내로 태어난 라드브루흐,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 라드브루흐는 법학보다는 문학과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김나지움(고등학교) 시절 라드브루흐는 특히 당시 유명한 서정시인 칼 부세(Carl Busse)의 시에 감동하였고, 그 자신 시작에 몰두하기도 하였습니다. 라드브루흐는 자작시를 부세에게 보내 논평을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아버지의 바람을 뿌리칠 수 없어 미래를 법학으로 정하게 됩니다. 


라드브루흐는 언제나 그의 천성은 법학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법학으로 시작하였지만, 법학으로부터 멀어져간 예술가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 ‘질풍과 노도’의 시인 쉴러는 법학을 ‘빵을 위한 학문’ 즉 ‘밥학’이라고 저주하였습니다. ‘로렐라이’의 낭만파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법학을 ‘가장 비자유적인 학문’이며, 로마법 대전은 ‘악마의 성서’이고, 사비니는 ‘빤들빤들 세련된 판덱텐의 달콤한 음유시인’이라고 경멸하였습니다.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순정 로버트 슈만은 쳥년 법학도 시절 ‘애정 없이 기계적으로 강요된 법률가가 되려는 인간은 그 자체로 훌륭한 법률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어머니에게 고백하였습니다. 

(라드브루흐, 법학의 정신, 최종고 역, 종로서적, 1981, 141-142쪽)


라드브루흐는 법률가가 되려는 젊은이들을 세 유형으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는 법률가의 사회적 지위를 보고 법학으로 온 학생들입니다. 이는 ‘유스티니아누스(로마법을 집대성한 로마 제국의 황제)가 영예를 준다’는 유혹에 끌려온 것입니다. 라드브루흐는 이들을 ‘계급적 편견’에 사로잡힌 법률가라고 하며, 이들은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심대한 피해를 주었다고 비판합니다. 


둘째는 지식만 발달하고 정신적 인격이 부족한 학생들입니다. 이들은 뛰어난 이해력으로 중고등학교에서 모든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우등생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냉정하고 논리적인 성격 때문에, 형식주의적이고 비창조적인 분야에서는 유능한 법률가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다수의 법률가가 이와 같은 부류라고 합니다.


셋째는 강렬하고도 섬세한 감수성을 가지고 철학적, 예술적, 사회적, 인도주의적 성향의 소유자이지만, 고유한 활동만으로 생을 영위하기 어렵거나 또는 다른 경제적 사정과 같은 불가피한 이유로 인하여 법학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학생들입니다. 라드브루흐는 이들 가운데에는 보헤미안적 생활에 열중하여 낙오하거나, 저널리즘으로 빠지는 등 천직의 대용물을 찾는 이들도 있으나, 적지 않은 이들은 마음을 다잡고 법학에 매진하여 또 그의 특유한 감수성으로써 직업으로서의 법률가로서도 성공하고 독특한 학문적 업적도 남길 수 있다고 합니다.


라드브루흐가 말한 위 셋째 유형의 법률가는 곧 그 자신의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라드브루흐가 자신의 모델로 삼았던 독일 형법학의 아버지 안셀름 폰 포이에르바하(Anselm Von Feuerbach)의 경험이기도 하였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게 된 라드브루흐는 남독일 바이에른 수도 뮌헨 대학을 택합니다. 독일 최북단 뤼벡에서 독일을 종단하여 온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했던 것은 라드브루흐가 루요 브렌타노(Lujo Brentano)의 ‘국민경제학’의 강의를 듣고 사회주의에 눈을 뜨게 된 사실입니다. 당시 사회주의는 새 시대의 열풍이었습니다. 비스마르크 정부의 사회주의에 대한 탄압 그리고 다른 한편 체제 내적 사회보장제도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 반체제적 사회주의 정당은 계속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라드브루흐는 뮌헨에서 오래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학기에 라이프치히로 대학을 옮깁니다. 유서깊은 라이프치히 대학 법학부는 뛰어난 교수들로 유명하였습니다. 여기서 라드브루흐는 칼 빈딩(Karl Binding)의 형법과 루돌프 조옴(Rudolf Sohm)의 교회법 강의에 강렬한 인상을 받습니다. 당시 빈딩은 소위 ‘구파 형법이론’의 대가로서 ‘신파 형법이론’의 프란츠 폰 리스트를 주요 논적으로 삼았는데, 이로부터 라드브루흐는 오히려 리스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또한 조옴의 교회법 강의는 라드브루흐의 마음에 기독교적 세계관의 뿌리를 형성케 하였습니다.


라드브루흐는 다시 베를린으로 대학을 옮겨 대학 생활의 마지막 1년을 베를린에서 보냅니다. 베를린에는 바로 프란츠 폰 리스트(Franz von Liszt)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지하듯이 리스트는 범죄를 순전히 법률학적으로 이해하는 구파이론에 맞서, 범죄에 대한 실체적 이해, 사회적 원인의 규명을 중시하였고, 형벌을 범죄에 대한 단순한 응보가 아니라 범죄자의 개선을 위한 것으로 보는 신파 형법이론의 제창자였습니다. 


라드브루흐는 리스트에 완전히 감화되었습니다. 비록 아직 문학에의 열정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이제 라드브루흐는 법학의 의미를 찾게 되고 법학의 길을 만난 것입니다. 라드브루흐는 법학 국가고시(졸업시험)을 무난히 마치고, 고향 뤼벡에 돌아와 사법연수생(시보)의 시간을 보냅니다. 거기서 풍크(Funk)라는 노판사를 만나게 된 것은 또 다른 행운이었습니다. 


“총명하고 신중하게 모든 인간적인 일을 관찰하는 안목을 지니며, 주위에는 엄격하지만, 무언중에 안온함을 나타내며, 다투는 주장들에 대하여 공평하지만, 강직하고도 자신의 정견을 지니고 있는 법률가” - 후에 라드브루흐가 그의 저서에서 그린 이상적 법률가상은 이 풍크 판사에서 온 것입니다.


하지만, 라드브루흐의 주된 관심은 법실무가 아니라 법학이었습니다. 라드브루흐는 프란츠 폰 리스트 사단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리스트를 둘러싸고 학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은 “끝이 없는 논쟁, 공격, 방어, 휴전, 그의 이론은 이 끝없는 논쟁으로 향하는 훈련이며, 그의 교과서는 판에서 판으로 변화하는 생명, 생동하는 생명”이었습니다.  


라드브루흐는 마침내 박사학위를 얻게 됩니다. 논문의 주제는 ‘상당인관관계론’이었습니다. 라드브루흐는 ‘베를린 국가시험 합격, 베를린 박사’라고 하는 영예를 얻게 됩니다. 이는 그의 미래를 위한 두 개의 훌륭한 다리가 될 것입니다. 라드브루흐는 법학의 길로 안내해 준 두 분의 은사로 프란츠 폰 리스트와 루돌프 조옴에게 감사를 표하였습니다. 독일에서는 대학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박사학위논문만이 아니라 교수자격논문을 다시 제출해야만 합니다. 이를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이라고 부릅니다. 라드브루흐는 ‘형법상의 행위개념’으로 그 논문 제출을 무사히 마치고, 마침내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강단에 서게 됩니다.


하이델베르크, 독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대학, 아름다운 강변의 도시, 이 하이델베르크는 이후 라드브루흐에게 제2의 고향이 됩니다. 라드브루흐는 1904년부터 1914년까지 하이델베르크에서 ‘사강사(Privatdozent)’로서 활동을 합니다. 사강사는 우리로 얘기하면 일종의 ‘계약직 교수’ 혹은 정년 보장 교수가 되기 직전의 ‘전임강사’와 같은 지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라드브루흐는 비범한 독일의 정신, 즉 ‘하이델베르크 정신’을 만나게 됩니다. 그 리더는 막스 베버(Max Weber)였습니다. 그 자신이 법학으로 시작하여 경제학으로 이행해 간 막스 베버는 엄격함, 휴머니즘, 지치지 않는 탐구와 분석력, 사회와 학생 그리고 독일 민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단연 독일 학계의 사자, ‘라이언 킹’이었습니다. 그의 연설은 그야말로 ‘사자후(獅子吼)’였습니다. 막스 베버에 인사를 한 라드브루흐는 베버가 자신의 학위논문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베버는 라드브루흐에게 법철학에 관한 논문들을 계속 기고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학부의 속물들에게 넘어가지 말고, 자신의 관점에서 제일 좋은 일을 연구하라’고 격려합니다.


여기서 라드브루흐는 베버의 학문적 상대주의, 즉 가치중립성의 원칙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학자로서의 엄밀한 인식은 주관적 가치관과 개인적 선호에 의하여 방해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라드브루흐가 그의 법철학의 근간을 상대주의에 두게 된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라드브루흐는 이른바, 세계관의 상충, 즉 개인주의-단체주의-작품주의‘의 3분법을 제시하면서, 이들 사이에는 어떤 가치적 우선성을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주의가 무책임한 책임방기, 혹은 허무주의로 오해되어서는 안됩니다. 라드브루흐가 레싱의 작품 <현자 나탄>의 ‘반지의 우화’를 두고 얘기하듯이, 이 상대주의는 사람들의 무기력과 혼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신념에의 충실, 그리고 고차원적 경쟁과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막스 베버의 상대주의 역시 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라드브루흐는 베버의 가치중립성을 우유부단하고 무책임한 태도로 오해하는 이들에 대하여 ‘베버의 상대주의는 이론적-관찰의 원리이지, 실제적 행동의 원칙은 아니었음’을 강조합니다. 실제적 행동에 있어서 막스 베버는 누구보다도 그 자신의 윤리적 원칙에 철저했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에는 또한 당시 국법학의 일인자 게오르그 옐리네크(Georg Jellinek)가 있었고, 라드브루흐에게 법철학 방법론의 기초를 전수한 서남독일학파의 에밀 라스크(Emil Lask)도 있었습니다. 아울러 후에 독일 현대 철학의 높은 봉우리가 될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도 사귀게 됩니다. 부인들 또한 그 지적이고 정신적인 교류에 적극 공헌하였습니다. 그 중심은 베버 부인 마리안네 베버(Marianne Weber)였습니다. 


라드브루흐는 동시대 독일 어느 곳에도 이처럼 학문적으로 진지하며 풍성하고 또 높은 정신을 유지한 곳이 없었으리라 자부합니다. 이 하이델베르크 정신, 그것은 곧 ‘함께 철학함’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독일 정신의 재생의 원천이 되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또한 라드브루흐는 여러 뛰어난 법학 친구들을 사귀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헤르만 칸토로비츠(Hermann Kantorowicz)였습니다. 라드브루흐와 칸토로비츠 그리고 몇 명의 다른 친구들은 스스럼없는 법률가 모임을 이어갔습니다. 이를 칸토로비츠는 ‘법이론학회’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정밀하고 순발력있고, 재치와 통찰력을 겸비한 칸토로비츠는 1906년 <법학을 위한 투쟁>이라는 소책자를 출판합니다. 이는 당시 아직까지도 지배적이었던 개념법학적인 세계관을 타격하는 ‘자유법운동(Freirechtsbewegung)’의 봉화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라드브루흐는 하이델베르크에서 한 여인을 만나 반하게 되는데, 그 인연은 불행하였습니다. 리듬체조를 하던 리나 괴츠는 라드브루흐에게는 ‘수수께끼와 경이에 찬 매혹적인 자연의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의 정신적 훈련은 박약하였습니다. 라드브루흐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그 여인은 결혼으로 갑자기 전혀 새로운 세계로 옮겨졌다. 지적인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지적인 사람들로부터 따뜻하게 환영받았다. 지나치게 대접받았고, 과대평가되었다. 그 결과 그녀는 절도를 잃었고, 그리하여 오고야 말 것이 오게 되었다”. 라드브루흐의 첫 번 째 결혼은 일년 만에 끝나게 됩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라드브루흐는 또한 정치적 실천의 일보를 내딛게 됩니다. 그는 이제 사회민주주의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 독일 사민당의 창건자이자 정신적 지주인 위인의 장례식에 참여하고자 스위스의 취리히까지 달려감으로써 라드브루흐는 그의 마음의 길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공개적 표명은 조심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독일 사민당(SPD)는 유럽 사회주의 역사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정당이며, 지금까지 독일 정당 정치의 양대 축을 구성하고 있지만, 당시 사민당은 ‘불온한’ 정당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사민당에 대한 지지의 표명은 곧 교직의 박탈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는 라드브루흐의 영원한 정신적 고향이었지만, 언제까지 ‘사강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결혼에 실패한 이후 라드브루흐는 새로운 출발을 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라드브루흐는 1914년 쾨니히스베르크, 저 러시아의 접경, ‘칸트의 고향’에서 교수 초빙이 오자 기꺼이 응합니다. 

출처 : 정태욱 교수의 교실
글쓴이 : 정태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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