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학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형성

by 이덕휴-dhleepaul 2022. 12. 2.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형성

[원천] http://www.zeno.org/Philosophie/M/Engels,+Friedrich/Der+deutsche+Bauernkrieg/IV.+Der+Adelsaufstand
 
원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형성: 1843년의 연구들에서 그룬트리세까지

Ⅰ. 들어가는 말

영원히 망각될 것이라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저작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역사적 무대로 되돌아왔고, 세계 곳곳에서 그의 많은 저작들이 서점의 서가에 다시 진열되어 있다. 마르크스의 재발견은 그의 저작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설명력에 기초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만든 거대하고도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여, 많은 사람들은 과거에는 종종 소련과 잘못 연결시켜 1989년 이후에 성급히 내쳤던 한 저자를 다시 보고 있다.
이런 정치적 관심의 부활에 앞서 마르크스의 저작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부흥했다. 1980년대의 관심의 쇠퇴와 1990년대의 “침묵의 공모” 이후에, 신간이거나 재간행된 마르크스의 작품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접할 수 있다(러시아와 동유럽은 예외인데, 그곳에서는 “현존 사회주의”의 재앙들이 너무 최근의 일이어서 마르크스의 부활이 의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출판물들은 많은 분야에서 중요하고도 혁신적인 결과를 낳고 있다.

 

Marx-Engels-Gesamtausgabe(MEGA2)가 철저한 재해석을 위하여 중요한 것인데, 이 전집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모든 저작들의 비판적인 역사적 판본으로 1998년부터 연속적으로 간행되었다(Musto, 2007: 447-98; 2010: 182-210). MEGA2는『자본론』2권과 3권을 위한 마르크스의 발췌노트들과 모든 예비적 수고를 출판한 바 있다. 발췌노트에는 마르크스가 읽었던 책들의 발췌문뿐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떠올랐던 사상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들은 마르크스의 비판 이론의 작업장, 그 사상의 전반적 궤도, 그 사상을 발전시키는 데 활용한 원천들을 드러내준다. 『자본론』의 모든 수고들과 엥겔스의 모든 편집 수정판들의 동시적 출판을 통해 2권과 3권에 대한 마르크스의 원문들과 엥겔스의 추가부분의 범위 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비판적 평가를 할 수 있게 해준다. 왜냐하면 이 텍스트들은 마르크스 대표작의 미완성적 성격을 드러내주고 미래의 더욱 엄격한 연구를 위한 기반으로 봉사할 것이 때문이다

 

이 새로운 연구소재를 사용하여, 이번 작업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단계들을 MEGA2를 통해 획득한 문헌학적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철저하게 마르크스의 사상 형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분야에서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마르크스의 사상 발전에서 특정 시기들만 검토하고, 예를 들면 『1844년 경제학·철학수고』 에서 바로 『그룬트리세』(1857-58)로 그리고 『그룬트리세』에서 『자본론』 1권(1867)으로 건너뛰거나 기껏해야 다른 두 권의 텍스트, 즉 『철학의 빈곤』(1847)과 『잉여가치학설사』(1862-63)를 검토하는 것이 고작이다.

 

귀중한 수고들과 흥미로운 잠정적 결과들에 대한 이런 연구는 MEGA2 독일어 책들을 독해할 수 있는 협소한 학자집단의 보존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이 텍스트들을 더욱 널리 알리고, 새 연구소재들의 관점에서 마르크스 작업의 기원과 미완성적 성격에 대한 논쟁을 부활시키기 위해 이번 연구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이 논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연구와 이 분야에서 그의 이론적 기여를 1843년의 초기 연구부터 『그룬트리세』(1857-58)까지 평가하는 것이다. 『그룬트리세』는 일반적으로 『자본론』의 첫 번째 초고로 간주되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라는 짧은 저작을 위한 대량의 예비적 수고이다. 가까운 시일에 발표될 두 번째 논문에서는 『자본론』의 형성을 『그룬트리세』부터 죽기 전 마지막 1882년의 수고들까지의 다양한 수고들을 통해 검토할 것이다.
이번 논문은 우선 『철학의 빈곤』의 출판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던 1843년에서 1847년 동안 파리, 맨체스터, 브뤼셀에서 마르크스가 수행한 정치경제학 연구들을 재구성하려고 한다(본 논문의 2장과 3장). 그 다음에 1848년 혁명과 이후 런던 망명 시기 동안 마르크스의 정치적·인간적 운명을 다루려고 한다(본 논문의 4장과 5장). 이 시기 동안 마르크스는 자신이 창간하고 지도한 두 개의 잡지에 정치경제학에 관한 논문을 썼다: 1848년에서 1949년의 <신라인 신문: 민주주의의 기관지>, 1850년의 <신라인 신문: 정치경제학 평론>. 새로운 혁명은 오직 세계 경제위기의 여파로 전개될 것이라는 확신이 마르크스에게서 서서히 형성되었다. 6장은 『런던노트』로 알려진 1850년에서 1853년까지 마르크스가 작성한 26권의 발췌노트를 집중해서 다룬다. 이 발췌노트들은 수십 권의 정치경제학 저술들에 대해 마르크스가 몰두한 흔적을 남겨놓았고, 그 흔적들을 통해 지금까지 거의 아무도 탐구하지 않았던 마르크스 사상에서 한 중요한 국면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가 방어하는 데 엄청난 정력을 쏟아 부었던 중요한 사건이었던 1853년의 공산주의자 재판을 토론한 뒤(7장), 8장과 9장에서는 1850년대의 경제위기 가능성에 대한 <뉴욕 트리뷴>에 기고한 글들에서 그의 입장의 발전과정을 검토한다. 그런 위기의 발생은 『그룬트리세』에서 마르크스의 초기 작업과 궁극적으로 일치하는데, 이 작업에서는 화폐-가치관계, 자본의 생산과 유통과정을 다루었고, 잉여가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였으며, 이전에 흡수하였던 정치경제학의 심오한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였다. 부록에서는 1843-1858년의 발췌노트, 수고, 정치경제학 저작들이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도표를 제시한다.

 

Ⅰ. 정치경제학과의 마주침


정치경제학은 마르크스에게 첫 번째 지적 열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정치경제학은 독일에서 마르크스의 젊은 시절에 하나의 학문으로 막 떠오르고 있었고, (마르크스는) 여러 다른 분야를 거친 후에야 정치경제학과 마주치게 되었다.
1818년 트리에에서 유태인 가계에서 태어나서, 1835년에 본과 베를린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철학(특히 지배적이었던 헤겔주의)으로 변경하고, 1841년 예나대학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 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으로 졸업했다. 그런 후에 마르크스는 학문적 경력을 갖게 될 수도 있었지만, 프러시아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취임 이후 헤겔철학이 공식적 선호에서 멀어져 가면서 청년 헤겔주의자의 일원이었던 마르크스는 계획을 바꾸어야 했다. 1842년과 1843년 사이에 마르크스는 언론에 투신하여 시사문제를 다루면서 쾰른의 일간지인 <라인신문>에서 일하였는데, 여기에서 곧 매우 젊고도 중요한 편집자가 되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가 편집자로 있으며 경제문제(비록 법적, 정치적 측면만이지만)에 관한 그 자신의 칼럼을 싣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검열이 신문에 타격을 주는 바람에 그 경험을 끝내고 “공적 무대에서 내 연구로 철수하게”(MECW 29 :263) 되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국가와 법률관계를 계속 연구했는데, 이 분야에서는 헤겔이 최고 권위자여서, 1843년에는 사후에 『헤겔 법철학 비판 』으로 출판될 수고를 썼다. 마르크스는 시민사회가 정치적 국가의 실질적 토대라는 확신을 발전시키면서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을 설명하는 데 경제적 요소의 중요성에 관한 가장 초기의 견해를 제시했다.
마르크스는 파리로 이주한 후 “정치경제학에 대한 의식적 비판적 연구”(MECW 3: 231)를 시작했는데, 파리에서 1844년에 마르크스는 <독불연보> 를 창간하여 공동 편집자가 되었다. 이전에는 주로 철학적·역사적·정치적 성격을 띠었던 마르크스 자신의 연구가 이 때부터 미래 연구의 지주가 될 새 분야로 바뀌었다.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하고, 9권의 발췌노트를 작성했다. 사실 마르크스는 대학 시절에 연구 작업에 대한 발췌노트를 모아두는 평생토록 가는 습관을 얻었는데, 이 발췌노트에는 종종 그 연구를 통해 형성된 사상들이 산재해 있었다. 소위 』는 장 밥티스트 세의 『정치경제학 개론 』과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 에 대한 긴 발췌노트들이 특히 흥미로운데, 마르크스는 이것들에서 정치경제학의 기초 지식을 얻었다. 또한 데이비드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와 제임스 밀의 『정치경제학 요강 』 에 관한 긴 발췌노트들도 흥미로운데, 이것들을 통해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가치와 가격 개념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었고, 화폐를 인간에 대한 소외된 사물의 지배라고 비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연구들과 병행하여 마르크스는 사후에 『1844년 경제학·철학수고 』로 출판될 세 권의 다른 노트를 작성했는데, 여기에서 특히 소외된 노동(entäusserte Arbeit) 개념에 관심을 두었다. 주요 경제학자들이나 헤겔과는 대조적으로 소외라는 현상을 통해 노동자의 생산물이 자신에게 “타인의 것, 생산자와 독립된 힘으로”(MECW 3: 272) 마주서는 것은 자연스럽고 따라서 불변의 조건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관계 – 근대 부르주아 사회와 임금노동 – 의 특수한 구조의 특징으로 간주되었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를 방문한 몇 사람들이 그가 강도 높은 연구 작업을 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급진적 언론인 하인리히 뷔르게르스(H. Bürgers)는 1844년 하반기의 마르크스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심오한 연구를 시작하였고 경제학을 다시 건설할 비판적 연구를 저술할 계획을 세웠다”(Enzensberger ed.: 46). 1844년 여름 마르크스와 처음 만나서 평생토록 지속될 친구관계와 이론적·정치적 연대를 맺은 엥겔스도 또한 임박한 사회적 대격동의 희망에 고무되어 이후 40년 동안 지속될 서신교환의 첫 번째 편지에서 마르크스에게 가능한 한 빨리 출판할 것을 강력히 권했다: “당신이 모아온 자료들이 세상에 공개되도록 하세요. 하늘에 맹세코 지금이 적기입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자신의 지식이 미비하다는 생각에 원고를 완성하여 출판하는 것을 보류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신성가족 또는 비판적 비판주의에 대한 비평: 부르노 바우어에 반대하여 』를 썼는데, 이 책은 너무 사변적인 고립과 무익한 개념들의 전투에만 매몰되었다는 이유로 마르크스 자신이 1842년부터 거리를 두었던 헤겔 좌파 운동의 바우어와 기타 인물들에 대해 집중적 논쟁을 제기한 책이었다.
그 후 1845년 초 엥겔스는 다시 그의 친구에게 준비된 연구를 완성할 것을 촉구했다.

당신이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내용이 그 저서에 많다 하더라도 정치경제학 저서를 완성하도록 하세요. 그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아요; 마음의 준비는 다되었으면,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합니다. ……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4월 전에 끝내도록 하고, 내가 말했듯이, 퇴고 날짜를 정한 다음 재빨리 출판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이런 강력한 권유들도 거의 소용이 없었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썼던 초고를 완성형태로 만들기 전에 더 연구할 필요를 여전히 느꼈다. 어쨌건 곧 출판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1845년 2월 1일에 – 독일어로 된 노동자들의 격주간지 <전진!(vorwärts)>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프랑스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을 후에 – 다름슈타트 출판사의 칼 빌헬름 레스케와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2권의 책을 내기로 계약하였다(MEW 27: 669, n.365).

 

Ⅱ. 경제학 연구의 지속


1845년 2월, 마르크스는 “현재 정치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출판하지 않는” 조건으로 거주를 허락받은 브뤼셀로 이주했다(MECW 4: 677). 여기서 부인 제니 폰 베스트팔렌과 1845년 파리에서 태어난 첫 딸과 함께 1848년 3월까지 머물렀다. 이 3년 동안 특히 1845년에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연구에 효과적으로 매진했다. 1845년 3월 마르크스는 독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책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MECW 4: 256-93)에 대한 비평작업 –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 을 했다. 동시에 기계제 대공업에 관한 문제를 탐구하여 찰스 배비지의 『기계와 제조업자들의 경제』에서 많은 분량을 꼼꼼히 발췌했다. 또한 엥겔스와 함께 “최상급 외국 사회주의 저자들의 문헌”의 독어 번역을 추진할 계획을 세웠다(MECW 4: 677). 그러나 시간 부족과 출판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두 사람은 계획을 접고 대신 자신들의 작업에 전념했다.
마르크스는 7월과 8월을 맨체스터에서 영어로 된 방대한 경제학 문헌들을 검토 – 염두에 둔 책을 내는 데 필수적 작업 – 하며 보냈다. 마르크스는 9권의 발췌노트, 『맨체스터 노트』를 작성했다. 또한 가장 눈에 띄는 발췌노트들은 정치경제학과 경제학의 역사에 관한 책들, 토마스 쿠퍼의 『정치경제학의 요소에 관한 강의』, 토마스 투크의 『가격과 유통의 상태에 관한 역사』, 존 램지 매컬록의 『정치경제학 문헌』,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의 몇 가지 미해결 문제에 관한 논문』들에 관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또한 사회주의 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영어로 된 사회주의 문헌들의 주요 책들, 특히 존 프란시스 브레이의 『노동의 과오들과 노동의 구제책』, 로버트 오언의 『인간 성격 형성에 관한 논문』,『새로운 도덕의 세계에 관한 책』에서 발췌노트를 작성했다. 비슷한 주장들이 1845년 6월에 출판된 엥겔스의 첫 번째 작품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 실려 있다.
마르크스는 벨기에의 수도에서 경제학 연구 외에 정치적 여건을 고려하여 필요하다고 생각한 다른 계획을 진행했다. 1845년 11월에 마르크스는 엥겔스, 조셉 바이데마이어, 모제스 헤스와 함께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슈티르너 같은 대표적 인물들이 설명하는 근대 독일 철학과 그 다양한 선지자들이 설명하는 독일 사회주의”에 대한 하나의 비판을 작성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MECW 6: 72). 그 결과로 사후에 『 독일 이데올로기 』라는 제목으로 출판될 그 수고의 작성은 두 가지 목적을 가졌다: 독일에서 신헤겔주의의 마지막 형태와 싸우는 것(막스 슈티르너의 『 유일자와 그의 소유 』가 1844년 10월에 출판되었다)과 마르크스가 출판업자 레스케(Leske)에게 쓴 편지에서 밝혔듯이, “독일의 과거와 현재의 학문과는 정반대인 나의 경제학에서 채택된 시각을 대중에게 제공하기 위한 것” (MECW 6: 72)이었다. 이 수고는 1846년 6월까지 작업했지만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수고는 엥겔스가 40년 뒤에 더 많은 대중을 위한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화” (MECW 26: 519)라고 규정한 것을 비록 아직 명확한 형태는 아니지만 이전보다 더 정교하게 다듬는 데 도움을 주었다.
1846년에 마르크스의 ‘경제학’의 발전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다시 레스케에게 보낸 마르크스의 편지를 볼 필요가 있다. 8월에 마르크스는 그 출판업자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거의 완성된 1권의 수고”가 “아주 오래 동안” 쓸모가 있겠지만 그래도 “내용과 문체를 수정하지 않고는 출판하지 않겠습니다. 계속 작업해온 작가로서 6개월 전에 작성했던 원고를 6개월이 지난 시점에 토씨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출판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통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가까운 장래에 그 책을 마무리하기로 약속했다: “출판을 위한 1권의 수정 판본이 11월말에 준비될 예정입니다. 더욱이 역사적 성격의 2권이 그 직후에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지내용은 작업하는 실제 상황과 일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원고들은 “거의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47년 초까지 단 하나의 원고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출판업자는 계약을 파기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계속된 연기는 마르크스가 열의가 없었던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몇 해 동안 마르크스는 결코 정치적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고, 1846년 봄에는 유럽의 다양한 노동자 연맹들 간의 연결을 조직하는 임무를 띤 “공산주의자 통신원 위원회” 관련 작업을 진척시켰다. 그럼에도 항상 이론적 작업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마르크스 자신의 연구 노트들과 출판물들이 그가 얼마나 성실했는지를 입증해 준다. 1846년 가을부터 1847년 9월까지 당시 독일의 주요 경제학자 중 하나였던 구스타프 폰 글리히의 저서 『 우리 시대 주요 상업 국가들의 무역, 상업, 농업의 역사적 배경 』에서 주로 경제사에 관한 세 권의 두꺼운 발췌노트를 작성했다. 1846년 12월에는 피에르 프루동의 『 경제적 제 모순 또는 빈곤의 철학 』을 읽고 나서 “매우 빈약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비평문을 쓸 결심을 하였다. 그 결과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첫 출판저작이었는데, 여기에서 가치이론, 사회 현실 이해를 위한 진정한 방법론적 접근, 생산양식의 역사적으로 이행기적인 성격에 관한 사상들을 설명했다.
계획된 책 – 정치경제학 비판 – 의 완성에 실패한 것은 마르크스의 근면성 부족 때문이 아니라 과제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비판적 검토를 위한 자료는 너무 방대하여 그 특유의 진지함과 비판 의식으로 진행한다면 수많은 나날들이 더 걸릴 일이었다. 1840년대 후반에는 그런 줄 몰랐지만 사실 그는 그 작업의 출발점에 서 있었다.

 

Ⅲ. 1848년과 혁명의 발발


1847년 하반기에 사회적 동요가 증폭되자 마르크스는 정치적 연루에 더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6월에 독일 노동자와 장인들 그리고 그 국제적 지부들의 결사인 공산주의자동맹이 영국에서 설립되었다; 8월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브뤼셀에서 독일노동자협회를 설립했다; 11월에 마르크스는 온건 민주 인사들뿐 아니라 혁명적 진영까지 통합한 브뤼셀 민주연맹의 부의장이 되었다. 그 해말 공산주의자동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정치 강령을 작성할 임무를 주었다. 잠깐 뒤 1848년 2월에 『공산주의자선언』으로 출판되었다. 그 시작 문구 –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 는 전 세계에 유명해졌다. 그 핵심 테제들 중의 하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MECW 6: 481, 482).
『선언』의 출판 시점은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었다. 출판 직후 유례 없는 범위와 강도로 발생한 혁명운동이 유럽 대륙의 정치사회적 질서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유럽 정부들은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했고, 1848년 3월에 마르크스는 벨기에에서 프랑스로 추방당했다. 마르크스는 이제 자연스럽게 정치경제학 연구를 밀쳐두고 혁명을 지지하는 언론 활동에 종사하며 바람직한 정치적 경로를 계획하는 데 도움을 주려 했다. 4월에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달되었고 정치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지역인 라인란트로 이주하였고, 6월에는 쾰른에서 이미 창립되었던 <신라인신문: 민주주의의 기관지>를 편집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 자신의 기사는 대부분 정치적 사건에 관한 기록이었지만, 마르크스는 1849년 4월에 정치경제학 비판에 관한 논설 시리즈를 출판했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노예상태뿐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존재와 그 계급지배가 근거하는 관계들을 더욱 면밀히 다룰” 시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MECW 9: 198). 브뤼셀의 독일노동자협회에서 1847년 12월에 행한 강연에 기초한 다섯 개의 논문이 『임금노동과 자본』이라는 제목으로 탄생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대중에게 지난번보다 더 해박하게 또 가능한 한 노동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임금노동이 어떻게 자본에게 착취당하는지를 밝혔다.

 

그렇지만 1848년에 유럽 전역에서 발생한 혁명운동은 단기간에 패배로 끝났다. 열정적 정치활동의 시기 이후 마르크스는 1848년 5월에 프러시아에서도 추방령을 받고 다시 프랑스로 향했다. 그러나 파리의 혁명이 패배하자 당국은 마르크스에게 모르비앙으로 그 다음에는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황량한 브리타니로 옮길 것을 명령했다. “생명에 대한 가려진 위협”에 직면하여 마르크스는 프랑스를 떠나 런던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독일 신문을 발간할 수 있는 긍정적 전망”이 있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망명자이자 무국적자로 영국에서 나머지 생을 보내게 되었는데, 유럽의 반동이 정치경제학 비판을 작성하는 데 더 없이 좋은 장소에다 그를 가둔 것이었다. 그 당시 런던은 세계 최고의 경제·금융 중심지, “부르주아 우주의 조물주”(MECW 10: 134)였고, 그래서 가장 최신의 경제 발전을 관찰하고 자본주의 사회 연구를 재개할 최적의 장소였다.

 

Ⅳ. 런던에서 위기를 기다리며


마르크스는 1849년 여름 31살의 나이로 영국에 도착했다. 수도에서 그의 삶은 평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마르크스 가족은 1845년에 로라(Laura), 1847년에 에드가(Edgar), 1849년 직후에 귀도(Guido)의 출생으로 모두 6명에 달했는데, 런던에서 가장 빈곤하고 황폐한 구역 중의 하나인 소호(Soho)에서 장시간 지독한 가난 속에 살아야했다.

* 젊은 나이에 갈 곳도 없어 런던의 공원벤치에서 6식구가 생활하기도 하고, 그리고 먹고 살기도 어려운 마르크스는 엥겔스로부터 생활비를 얻었다. -dhleepaul
이런 역경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새로운 출판 사업을 시작하는 과제를 성취할 수 있었다. 1850년 3월에 “모든 정치적 운동의 기초를 형성하는 경제적 조건에 관한 포괄적이고 과학적 탐구”를 위한 거점으로 계획된 월간지 <신라인신문: 정치경제학 평론>을 발간했다. 마르크스는 “지금같이 외관상 고요한 시기는 종전에 경험한 혁명적 시기, 갈등하는 당파들의 특성, 이 당파들의 존재와 투쟁을 규정하는 사회적 조건들을 해명하는 목적에 정확히 사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MECW 10: 5).
마르크스는 그 상황이 직전의 혁명과 곧 다가올 혁명 사이의 짧은 막간극일 것이라고 잘못 믿었다. 1849년 12월 그의 친구 바이데마이어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신라인 신문의〕발간이 한 달에 세 번 혹은 두 번이 될 때까지 세계적 대참사가 발발하여 정치경제학을 당장에 완료할 기회가 사라질 것을 거의 확신한다.” 마르크스는 “거대한 산업, 농업, 상업 위기”가 확실히 임박하였으므로, 새로운 혁명운동이 부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신라인신문>에 연속 논문으로 연재된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서 마르크스는 “실제 혁명은 …… 오직 현대적 생산력과 생산의 부르주아 형태가 서로 충돌할 …… 때만 가능하다. …… 새로운 혁명은 오직 새로운 위기의 결과로서만 가능하다. 그렇지만 새로운 혁명은 직전의 위기만큼 확실하다”고 주장했다(MECW 10: 135). 마르크스는 경제적 번영이 확산될 때에도 그의 시각을 바꾸지 않았다. <신라인신문> 1(1-2월)호에서 마르크스는 동인도 시장은 “이미 거의 포화상태”이고 북미, 남미, 호주도 곧 그렇게 될 것이므로 호황이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썼다.

공급과잉에 관한 첫 번째 소식과 함께 “공황”이 투기와 생산 분야에서 동시적으로 발발할 것이다 – 아마도 봄이 끝날 무렵이거나 늦어도 7월이나 8월에. 그렇지만 이번 위기는 유럽 대륙에서의 거대한 격돌과 함께 발생할 것이므로 이전의 모든 위기의 결과들과는 매우 다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위기는 새로운 진보, 토지 소유와 금융 부르주아지에 대한 산업 부르주아지의 새로운 승리를 위한 신호였다면, 이번 위기는 현대적 영국혁명의 시작을 특징짓게 될 것이다(MECW 10: 264f).

1850년 3-4월호인 다음호에서도 또한 마르크스는 긍정적 경제국면이 단지 일시적 개선을 표현할 뿐인 반면 과잉생산과 국가 철도부문에서의 과도한 투기가 위기를 초래할 것인데, 그 효과는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금까지의 위기의 효과들보다 더 중대할 것이다. 이번 위기는 농업 위기와 함께 발생할 것이다. …… 영국에서 이 이중의 위기는 대륙에서 동시적으로 임박한 격변에 의해 촉진되고 확대될 것이며 쉽게 불타오를 것이다; 그리고 대륙에서의 혁명들은 세계시장에 대한 영국 위기의 반작용을 통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뚜렷이 사회주의적 특성을 띠게 될 것이다(MECW 10: 340).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자 운동의 근거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었고 유럽과 북미시장 양쪽 모두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의 시각에서는 “북미가 과잉생산에 의해 초래된 불황에 진입함에 따라 우리는 위기가 다음 달에 지금까지보다 더 빨리 발전하게 될 것을 기대해도 좋다.” 마르크스의 결론은 그래서 확신에 차 있었다: “상업위기와 혁명의 일치는 …… 점점 더 확실해지고 있다. 그것은 운명대로 될 것이다!”(MECW 10: 341).
여름 동안 1848년 이전에 시작된 경제 분석을 심화하였고, <평론> 1850년 5-10월호 – 자금부족과 프러시아 경찰의 괴롭힘 때문에 마지막 발행이 된 호 -에서 마르크스는 “혁명이 상업위기에 기여한 것보다 상업위기가 1848년 혁명에 훨씬 더 많이 기여했다”는 중요한 결론에 도달했다(MECW 10: 497). 경제위기들은 그때 이후 계속해서 그의 사상에서 근본적인 것이 되었다. 게다가 만연하는 투기와 과잉생산 과정들을 분석하면서 “만약 1848년에 시작된 산업 발전의 새로운 순환이 1843-47년과 같은 과정을 밟는다면, 위기는 1852년에 발생할 것이다”라고 과감하게 예측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미래의 위기는 지방에서도 발생할 것이고 “처음으로 산업과 상업위기가 농업위기와 같이 발생할 것이다”(MECW 10: 503).
이 일 년 이상의 기간에 대한 마르크스의 예측은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혁명이 느닷없이 나타날 것을 기대했던 사람들과 달리 마르크스는 1850년 가을에 새로운 세계 경제위기가 없이는 혁명이 무르익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때 이후 계속해서 마르크스는 임박한 혁명 에 대한 헛된 희망과 거리를 두었고 “완전히 물러나서” 살았다. 그래서 위기의 발생을 예측하는 것이 도전 과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제 또 다른 정치적 동기를 하나 더 가지게 된 마르크스는 다시 한 번 정치경제학 연구에 전력하게 되었다.

 

Ⅴ. 1850-53 연구 노트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연구를 중단한 3년 동안 경제적으로 중요한 사건들 – 1847년의 위기에서부터 캘리포니아와 호주에서 금 발견까지 – 이 연속적으로 있었는데, 마르크스는 그 사건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지난 노트들을 재검토하여 완성된 형태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연구를 더 깊이 수행했다(Tuchscheerer, 1973: 318). 마르크스의 추가 독서는 26권의 발췌노트로 종합되었는데, (역시 다른 학문분야의 텍스트들도 포함되는데) 그 중 24권은 1850년 9월에서 1853년 8월에 작성한 것으로 소위 『런던 노트 』에 포함된다. 이 연구 자료는 마르크스의 비판에서 중요한 시기를 문서로 증명하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다. 이때 마르크스는 이미 습득한 지식을 요약했을 뿐 아니라 대영 박물관 도서관에서 탐독한 수십 권의 새로운 (특히 영어로 된) 책들을 연구하여 장차 집필하고자 하는 저서를 위한 중요한 사상들을 습득했다.
『런던 노트 』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850년 9월부터 1851년 3월 사이에 작성한 첫 번째 7권(Ⅰ-Ⅶ)에서는 마르크스가 읽고 발췌한 수많은 작업들의 일부로서 다음이 포함된다: 토마스 투크의 『가격의 역사 』, 제임스 테일러의 『영국 화폐체계에 관한 한 시각 』, 저메인 가니어의 『화폐의 역사 』, 조한 게오르그 뷔쉬의 『은행과 주화에 관한 제반 법칙 』, 헨리 소튼의 『대영제국의 지폐신용의 성질과 효과에 관한 연구 』이 그것들이다. 특히 마르크스는 경제 위기의 역사와 이론들에 집중하여, 위기의 기원을 이해하려는 시도로서 화폐형태와 신용에 대해 긴밀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 당시의 프루동 같은 다른 사회주의자들 – 그들은 경제위기가 화폐와 신용체계의 개혁을 통해 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 과 달리 마르크스는 신용체계가 저변에 있는 조건들 중 하나이므로 위기는 화폐유통의 올바르거나 잘못된 사용을 통해서는 기껏해야 더 악화되거나 완화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진정한 원인들은 오히려 생산에서의 모순들에서 찾아져야 했다.
이 첫 번째 발췌노트의 끝에 마르크스는 『지금(bullion): 완전한 화폐제도 』라고 제목을 붙인 (본시리즈 부분에는 속하지 않은) 두 권의 노트에 자신의 지식을 요약했다. 1851년 봄에 작성한 이 수고에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의 주요 저작들에서 – 때로는 자신의 논평을 같이 실으면서 – 화폐에 관한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들이라고 간주한 발췌들을 옮겨 적었다. 91개 부분으로 나누어진 『지금 』은 단지 인용문일 뿐만 아니라 많은 해 동안 계획해왔던 책을 저술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화폐와 유통에 관한 이론 의 최초의 독립적 공식화로도 간주될 수 있다.
이 같은 시기에 비록 마르크스는 개인적으로 끔찍한 시기(특히 아들 귀도를 여읜 1850년을 전후하여)를 맞았지만, 그는 자신의 작업을 수행해냈을 뿐 아니라 곧 완성할 것을 여전히 희망하고 있었다. 1851년 4월 2일에 엥겔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내 작업이 매우 많이 진척되어서 5주 내에 이 모든 경제학적 허튼소리들과 끝장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경제학을 편안하게 완성하고〔대영〕박물관에서 다른 학문분야에 몰두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근본적으로 이 학문에서 아담 스미스와 리카도가 개인적 연구의 길을 통해 많은 진보를 이룩했고 종종 매우 통찰력이 있었지만, 그들 이후에는 진보가 없었다. …… 조만간 나는 전지 60매로 된 2권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편지는 저술의 완성에 관하여 실제 상황보다 낙관주의를 반영한 것이었다. 모든 발췌노트들과 그 자체로서 출판용 원고가 아닌 『지금 』이라는 예외를 제외하면, 마르크스가 그때까지 출판 준비가 완료된 수고는 하나도 없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마르크스는 대단히 강도 높게 연구를 진행했지만 여전히 경제적 자료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성공하리라는 결심과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 꼼꼼함 때문에 발췌노트 작성이나 비판적 논평을 넘어서 최종적으로 자신의 책을 저술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마르크스에게 그 연구를 더 줄여라고 촉구하는 출판업자도 없었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조만간” 완성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다시 정치경제학의 고전 연구로 방향을 전환하였고, 1851년 4월에서 11월 동안 『런던 노트 』의 두 번째 부분(Ⅷ-Ⅹ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작성하였다. 발췌노트 Ⅷ은 1847년에 연구를 시작한 제임스 스튜어트의 『정치경제학 원리 탐구 』와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에서 거의 전적으로 발췌한 것이었다. 사실 『지금 』을 작성할 때 모아둔 리카도 책의 발췌는 수많은 논평과 개인적 성찰이 뒤따르고 있어서 『런던 노트 』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1840년대 말까지 마르크스는 본질적으로 리카도의 이론들을 채택하고 있었던 반면, 이때부터 지대와 가치에 대한 새롭고도 깊은 연구를 통해 일정한 점에서 리카도의 이론들을 넘어섰다.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초기의 견해 중 일부를 수정하였고 지식의 반경을 넓혔으며 계속해서 더 많은 저자들을 검토해갔다. 1851년 5월에서 7월까지의 노트 Ⅸ와 Ⅹ은 리카도 이론의 모순을 다루거나 일정한 측면에서 리카도의 개념을 발전시킨 경제학자들에 집중하였다. 그래서 다음의 책들에서 많은 발췌가 작성되었다: 존 데벌 투켓의 『노동인구의 과거와 현 』, 토머스 찰머스의 『정치경제학에 관하여 』, 리처드 존스의 『부의 분배에 관한 에세이 』, 헨리 찰스 카레이의 『정치경제학의 원리 』.
연구 범위의 확장과 풀어야 할 이론적 문제의 누적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저작계획의 완료에 관하여 여전히 낙관적이었다. 1851년 6월말에 마르크스는 헌신적인 바데마이어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보통 대영박물관에서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지냅니다. 내가 다루는 자료들은 너무나 복잡해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앞으로 6-8주 내에 끝낼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단조롭게 지내는 이곳의 비참한 환경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실질적 유형의 끊임없는 중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급속히 완성으로 향해가고 있습니다.

명백히 마르크스는 이미 모아둔 거대한 양의 발췌와 비판적 노트들을 이용하여 책을 두 달 안에 완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희망하였던 “완성”에 도달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출판업자에게 보낼 수고의 정확한 사본 작성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이번에 예정시간을 넘긴 것은 마르크스의 심각한 경제적 곤궁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안정적 수입도 없는데다 자신의 물리적 조건에 지쳐서 1851년 7월 말에 엥겔스에게 편지를 썼다.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 내가 도서관에서 오래 전에 끝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중단과 방해들이 있었고, 집에서는 모든 것이 계엄 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밤새도록 초조해져 있다가 마구 쏟아지는 눈물에 격분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일을 많이 할 수 없습니다.

재정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언론 활동을 재개하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신문을 물색했다. 1851년 8월 마르크스는 미국에서 가장 배포 부수가 많은 <뉴욕 트리뷴>의 통신원이 되었다. 그리고 1862년 2월까지의 기간 동안 그 신문에 싣는 글을 수백 페이지를 작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1851년 여름동안 계속되었다. 8월에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19세기의 혁명관 』을 읽고서 그에 대한 비판을 엥겔스와 함께 작성할 계획을 (나중에 포기한) 간직했다(MECW 11: 545-70). 게다가 마르크스는 독서한 책에 대한 발췌를 계속 작성했다. 노트 Ⅺ은 노동자계급의 조건을 다룬 책들을 대상으로 것이다; 노트 Ⅻ, ⅩⅢ은 농화학에 관한 연구를 포괄한다. 지대연구를 위해 이 후자의 학문이 중요한 것을 이해하고 마르크스는 자세한 노트를 주스투스 리빅의 『유기화학의 농업과 생리학에의 응용 』과 제임스 F. W. 존스톤의 『농화학과 지질학의 요소 』에서 작성했다. 노트ⅩⅣ에서 마르크스는 특히 맬서스에 대한 반대자 아키발트 앨리슨의 『인구의 원리 』로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에 관한 논쟁에 다시 한 번 뛰어들었다; 아돌프 듀로 데 라 말레의 『로마의 정치경제학 』, 윌리암 H. 피레스콧의 『멕시코 정복의 역사 』, 『페루 정복의 역사 』를 발췌하여 전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허만 메리베일의 『식민화와 식민지의 교훈 』을 통해서 특히 식민주의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1851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마르크스는 연구 분야를 기술로 확장하여 노트ⅩⅤ의 상당한 분량을 조안 H. M. 포퍼의 기술의 역사를, 노트ⅩⅥ에서는 정치경제학의 다방면의 의문들을 다루었다. 1851년 10월 중순에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여주듯이, 그때 마르크스는 “기술과 그 역사 및 농경제학을 깊이 탐구하면서” “경제학을 완성하는 산통기에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핵심에 대한 어떤 종류의 견해를 형성하였을” 것이다.
1851년 말에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뢰벤탈 출판사가 마르크스의 더 확장된 작업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엥겔스와 라살레와의 서신교환으로 볼 때 마르크스는 그때 세 권의 계획에 대해 작업하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1권은 자신의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고, 2권은 다른 사회주의들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는 것이고, 3권은 정치경제학의 역사였다. 그렇지만 처음에 출판업자는 단지 3권에만 관심이 있었던 반면 나머지 두 권은 만약 그 3권 기획이 성공적이게 되면 출판할 수 있는 선택권을 보유하고 싶어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계획을 바꾸고 그 계약을 체결하라고 설득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하고 “독일 저서 시장에서 당신의 오랜 공백과 그 뒤 서적상들의 소심함 때문에 형성된 휴지기를 깨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출판업자의 관심은 사라졌고 아무것도 실행되지 않았다. 2개월 후에 마르크스는 미국에 있는 충실한 바이데마이어에게 “그곳에서 출판업자를 찾을” 수 있는지 알아봤다.
출판에 관한 이런 장애들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임박한 경제위기에 대한 낙관주의를 잃지 않았다. 1851년 말에 오랜 친구이며 유명한 시인인 페르디란트 프라일리그라트에게 편지를 썼다: “위기는 온갖 요소들에 의해 저지되었지만 …… 늦어도 내년(1852년) 가을에는 반드시 불어닥칠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사건들 후에 나는 더욱 확신하게 되었는데 심각한 상업공황이 없이 진정한 혁명은 없다.”


그 동안 마르크스는 새로운 일에 착수했다. 1851년 12월부터 1852년 3월까지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을 작성했고, 1852년 5월에서 6월까지 런던에 있는 독일 정치 이민자들의 지도적 인물들(조안 고트프리트 킨켈, 루게, 칼 하인젠, 구스타프 폰 스트루베)에 대한 풍자적 초상화 전시장인 논쟁적인 글 『추방당한 거인들 』을 엥겔스와 함께 작성했다. 1852년 4월에서 1853년 8월까지 마르크스는 『런던 노트 』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부분(ⅩⅦ-ⅩⅩⅣ)의 작성을 재개했다. 이것들은 주로 인간사회 발전의 다양한 단계에 관한 것으로 많은 부분이 중세에 관한 역사적 논쟁과 문학, 문화, 관습의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인도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는데, 동시에 <뉴욕 트리뷴>에서 인도에 관한 칼럼을 쓰고 있었다.
광범위한 연구가 증명하듯이 마르크스는 결코 “휴식을 취한” 적이 없었다. 다시 마르크스의 계획에 대한 장벽은 오랫동안 씨름해 왔던 가난이었다. 1851년부터 매달 5파운드씩 송금해주었던 엥겔스의 도움과 칼럼당 2파운드를 벌었던 <뉴욕 트리뷴>의 수입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진정으로 절망적 조건에서 살았다. 1852년 4월의 그의 딸 프란지스카(Franziska)의 죽음에 직면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삶은 하나의 오랜 전쟁이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마르크스의 작업과 시간에 큰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럼에도 금융시장의 폭풍들이 마르크스의 사기를 높게 유지시켰고, 그것들에 관해 모든 가까운 친구들한테 편지했다. 마르크스는 1852년 2월 매우 풍자적으로 라살레에게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 금융위기가 지금 뉴욕과 런던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상업공황에 필적할 수준만큼 도달했다. 저 상업 신사들과 달리 나는 파산에 의지할 수도 없다.” 4월에 마르크스는 바데마이어에게 호주와 캘리포니아에서 금광맥의 새로운 발견과 영국의 인도에 대한 상업적 침투라는 특별한 환경 덕분에 “위기가 1853년으로 늦춰질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폭발이 더욱 가공할 만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혁명적 격동을 생각할 수 없다” 고 말했다. 그리고 8월에 미국에서의 투기 붕괴 직후에 마르크스는 의기양양하게 엥겔스에게 편지했다: “위기가 오고 있지 않은가? 혁명이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빨리 올 것 같네.”


마르크스는 그런 평가를 오직 편지에서만 하고 있지 않고 <뉴욕 트리뷴>에도 썼다. 1852년 11월 “빈궁과 자유무역”이라는 칼럼에서 마르크스는 예측했다: “위기는 …… 산업적이라기보다 더 상업적이고 화폐적이었던 1847년 때보다 더 위험한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더 많은 과잉자본이 산업 생산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 더 확대되고 지속되고 직접적으로 노동 대중에게 위기가 영향을 미칠 것이다”(MECW 11: 361). 요약하면 좀 더 오래 기다리는 것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조만간 혁명의 시간이 울려 퍼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1852년 10월 프러시아 정부는 전년도에 체포했던 공산주의자동맹 회원들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기소내용은 이들이 프러시아왕국에 대항하여 마르크스가 지도하는 음모자들의 국제적 조직에 가입했다는 것이었다. 10월에서 12월까지 기소가 근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정부의 책략에 대항하여 그 당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고, 『쾰른의 공산주의자 재판에 관하여 』를 작성했다. 프러시아 정부 장관들이 입을 모아 주장하던 것과는 반대로 마르크스는 이 시기에 정치적으로 매우 고립되어 있었다. 공산주의자동맹의 해산 – 1851년에 사실상 해체되었고 1852년 말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던 – 은 마르크스의 정치적 접촉자의 숫자를 매우 축소시켰다. 많은 경찰과 반대자들이 “마르크스의 정당”으로 규정하였던 것 은 충실한 지지자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새로운 활동적 지지자들의 충원, 특히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노동자들의 참여는 그래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마르크스가 했던 연구 작업도 또한 그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지지자의 충원은 정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필수적인 것이었다. 1853년 3월에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편지했다:

당신은 경제학을 완성해야 합니다; 나중에 우리가 신문을 보유하게 되면 그것을 주간단위로 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도들이(discipuli) 어떻게든지 효과가 있도록 상세히 설명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 때 복원된 우리 연합체들에게 토론의 기초를 제공할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이전에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4월”에 엥겔스와 함께 며칠을 보내면서 “[자신의] 시각에서는 곧 지진이 일어날 현재의 조건에 대해 방해받지 않고 담소하기를 희망한다” 고 썼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를 괴롭힌 빈곤 때문에 저술에 집중하지 못했다. 살아남기 위해 마르크스와 그의 부인 예니는 필수품을 위한 자금도 없는 집에 남아 있는 약간의 옷가지와 값나가는 물건들을 자주 전당포에 맡겼다. 비록 귀중한 시간을 잡아먹어도 언론 칼럼에서 생기는 수입은 점점 더 중요해졌다. 그해 말 마르크스는 친구 클루스에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나는 몇 달 물러나 있으면서 경제학 연구를 하는 것을 …… 희망해 왔다네. 그러나 그리될 것 같지 않다네. 나는 지겨운 신문에 지속적으로 매문(賣文)을 하고 있다네. 그것은 시간 낭비이고 짜증나게 하며 보수도 매우 적다네. 어떤 작가가 아무리 스스로 독립적이라고 생각해도 나처럼 돈을 벌 때면 신문과 독자에게 예속된 것이라네. 순수한 학문적 작업과는 다르다네.

마르크스가 생활 필수품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그의 마음은 그래서 완전히 ‘경제학’에 가 있었다.

 

Ⅵ. <뉴욕 트리뷴>의 위기에 관한 칼럼들


이 시기에도 경제위기가 <뉴욕 트리뷴> 칼럼의 지속적 주제였다. 1853년 6월의 “중국과 유럽에서의 혁명”에서 1851년에 시작한 반봉건 중국혁명을 일반적 경제상황과 연결하였는데, 마르크스는 재차 “시장들의 팽창이 영국의 제조업의 확장과 보조를 맞출 수 없을 계기가 곧 올 것이고, 그리고 이 불균형이 반드시 새로운 위기를 과거에 그랬던 것과 같이 확실하게 초래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했다(MECW 12: 95f). 마르크스의 시각에서는 혁명의 여파로 중국의 거대시장이 전례 없이 수축하여 “현재의 산업체계에서 과부하가 걸린 광산에 불꽃을 던지고, 오래 동안 준비된 일반적 위기의 폭발을 초래하여, 그 위기가 해외로 번져 곧 바로 유럽 대륙의 정치적 혁명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MECW 12: 98). 물론 마르크스는 혁명적 과정을 결정론적 태도로 지켜본 것이 아니라, 위기가 그 혁명의 수행에 필수불가결한 전제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유럽에서 18세기의 시작부터 상업 및 금융 위기가 앞서지 않은 중대한 혁명은 없었다. 이것은 1848년 혁명뿐 아니라 1789년 혁명에도 적용된다. …… 세계시장에서 유럽산업의 대표인 영국이 보통 내보내는 신호, 즉 상업 및 산업 위기의 결과로서가 아니라면 전쟁도 혁명도 유럽을 시끄럽게 하지 않을 것 같다(MECW 12: 99).

 

요점은 1853년 9월 하순에 강조되었다. 칼럼 “정치적 운동들: 유럽에서 빵의 부족”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선동가의 연설도 외교관의 쓸데없는 소리도 사태를 위기로 몰고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 유럽 혁명의 전조임이 틀림없는 경제적 재앙과 사회적 대격변이 다가오고 있다. 1849년 이래 상업과 산업 번영은 반혁명이 안전하게 잠자는 안락의자를 늘려 놓았다(MECW 12: 308).

사건들이 벌어질 것을 기대한 마르크스의 낙관주의 흔적들은 엥겔스와의 편지교환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1853년 가을의 한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적었다: “사태가 놀랍게 될 것이다. 프랑스에서 금융 거품이 터질 때 대혼란이 올 것이다.” 그러나 위기는 여전히 오지 않았고, 마르크스는 수입의 유일한 원천을 버리지 않기 위해 다른 언론 활동에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했다.
1853년 10월에서 12월 사이 『팔머스톤 경』이라는 제목으로 연속 칼럼을 작성했다. 게다가, 1854년 6월의 스페인에서의 민간 및 군사 반란 이후에 마르크스는 또 다른 연속 칼럼 『스페인 내전』을 8월에서 12월 사이에 작성했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이전 10년간의 주요 사건들을 요약하고 분석했다. 마르크스는 이 일을 매우 중대하게 간주했는데, 이는 1853년 9월부터 1855년 1월까지에 작성한 9권의 대형 발췌노트를 보면 판단할 수 있다. 그 중 첫 4권은 『팔머스톤 경』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 외교의 역사에 집중하여 발췌한 반면, 나머지 5권은 『스페인 내전』 칼럼을 위한 조사를 포함하여 스페인의 정치·사회·문화사에 집중하여 발췌하였다.
마지막으로 1854년 후반에서 1855년 초의 어느 시점부터 마르크스는 자신의 정치경제학 연구를 재개했다. 그렇지만 3년간의 중단 이후였기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옛 수고들을 작업 재개 전에 다시 읽기로 결심했다.

 

1855년 2월 중순 엥겔스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 4-5일 동안 나는 심한 눈의 염증 때문에 …… 저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병은 내 발췌노트를 통독하다가 걸렸는데, 발췌노트를 다듬는 것보다 어쨌든 숙달하여 계속 작업할 수 있게 준비하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입니다.

 

이 검토를 통해 새로이 20페이지의 노트를 작성하고 『인용들: 화폐의 본질, 신용의 본질, 위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발췌들은 마르크스가 이전 몇 년간 했던 발췌들에서 재발췌한 것들이었다. 투크, 존 스튜어트 밀, 스튜어트 같은 저자들의 책들과 <이코노미스트>의 칼럼들에로 돌아가서 마르크스는 1850년부터 시작한 화폐, 신용, 위기에 관한 주요 정치경제학자들의 이론들을 더욱 더 요약했다(Schrader, 1980: 99).
동시에 마르크스는 <뉴욕 트리뷴>을 위하여 경기후퇴에 관한 더 많은 논문을 작성했다. 1855년 1월에 “영국에서의 상업위기”에서 마르크스는 만족하여 작성했다: “전조적 징조들에 관해 나의 칼럼들에서 오래 동안 실렸던 영국 상업위기가 이제 최고 당국자에 의해 크게 외쳐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 되었다”(MECW 13: 585). 두 달 후 “영국에서의 위기”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몇 달 뒤 영국은 위기가 아마 1842년 이후는 아닐지라도 1846년 이후에는 전에 도달한 적이 없는 높이에 있을 것이다. 위기의 영향이 노동계급 사이에서 완전히 느껴지기 시작할 때, 6년 동안 잠자고 있었던 정치적 운동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 영국에서 실제로 경쟁하는 당사자들, 즉 중간계급과 노동계급 그리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맞대면할 것이다(MECW 14: 61).

하지만 마르크스가 “경제”에 관한 연구를 다시 시작할 무렵 개인적 어려움이 계획을 다시 한 번 바꾸게 했다. 1855년 4월 마르크스는 8살 난 아들 에드가(Edgar)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마르크스의 건강과 경제적 환경은 1855년 동안 비참한 상태였고, 그의 가족은 엘리너(Eleanor)가 태어나면서 다시 늘었다.
마르크스는 1856년 6월에서야 <인민의 신문>에 크레딧 모빌리에(Crédit Mobilier)에 관한 몇 개의 칼럼을 쓰면서 정치경제학 연구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크레딧 모빌리에는 프랑스의 주요 상업은행으로서 마르크스가 “우리 시대의 가장 기묘한 경제 현상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 것이었다(MECW 15: 10). 1856년 가을에 가족 형편이 잠시 좋아진 후 소호의 임대주택에서 북부 런던의 더 나은 아파트로 이사 가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뉴욕 트리뷴>에 위기에 관해 다시 썼다. 마르크스는 1856년 10월 3일 신문에 실린 “유럽의 화폐위기”에서 “1847년 공황과 유사한 유럽 화폐시장에서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MECW 15: 113). 그리고 11월에 신문에 실린 “유럽의 위기”에서, 모든 칼럼니스트들이 최악의 상황을 자신 있게 예측하고 있을 때,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유럽으로부터 온 지표들은 …… 대서양 양쪽의 사람들이 모두 어떤 불가피한 운명에 관하여 두렵게 바라보면서 본능적으로 예상하는 투기와 주식시장의 최종 붕괴가 미래의 어느 날로 연기된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연기에서 붕괴는 확실하게 되었다; 참으로 현존하는 금융위기의 만성적 성격이 더욱 더 폭력적이고 파괴적 종말을 예고한다. 위기가 오래 지속될수록 최종청산은 더 악화된다(MECW 15: 136).

사건들은 또한 마르크스에게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격할 기회를 주었다. “유럽의 화폐위기”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만약 우리가 이 짧은 화폐공황의 효과들과 마찌니주의자(Mazzinian)들 및 다른 사람들의 선언들의 효과를 나란히 놓는다면, 공식적 혁명주의자들의 망상인 1849년 이후의 전체 역사가 한꺼번에 그 신비를 제거할 것이다. 그들은 인민들의 경제적 삶과 역사 운동의 실제적 조건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새로운 혁명이 발발할 때 그들은 빌라도(Pilate) 총독보다 더 먼저 손 씻을 권리를 가질 것이고 자신들이 피의 희생(예수의 죽음 – 역자)과 무관하다고 주장할 것이다(MECW 15: 115).

그렇지만 1857년 상반기에 절대적 고요가 국제 시장에 널리 퍼졌다. 3월까지 마르크스는 『18세기 외교 역사에 관한 폭로』를 작업하였는데, <프리 프레스>에서 발행한 신문의 논문들의 모음으로 실렸다. 이번 경우에도 마르크스는 자료를 깊이 연구하였고, 1856년 1월부터 1857년 3월까지 18세기 국제정치에 관하여 7권의 발췌노트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7월에 마르크스는 1851년에 이미 연구하고 발췌했던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경제적 조화』와 캐리의 『정치경제학의 원리』에 관한 짧지만 흥미로운 비판적 논평을 작성했다. 사후에 『바스티아와 캐리』로 출판된 이 노트에서 마르크스는 자신들의 저작에서 “생산관계의 조화”와 전체로서 부르주아 사회의 조화를 증명하기 위해 애썼던 두 경제학자의 순진함(전자는 자유무역의 챔피언, 후자는 보호무역주의)을 꼬집었다.

 

Ⅶ. 1857년 금융위기와 『그룬트리세』


이번에는 과거의 다른 위기들과 달리 경제적 폭풍이 유럽에서가 아닌 미국에서 시작하였다. 1857년 처음 몇 달 동안 뉴욕 은행들은 예금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 금액을 늘렸다. 결과적인 투기적 활동의 증가가 일반적 경제 조건을 더 악화시켰고, 오하이오 생명보험사의 뉴욕지점이 지불불능이 되자 만연해 있던 공황은 수많은 파산들을 초래했다. 은행체계에 대한 신뢰의 상실은 신용의 수축을 낳았고 예금의 고갈과 화폐 지불의 정지를 동반했다.
이 사건들의 비상한 성격을 감지하고서 마르크스는 즉시 작업에 들어갔다. 1857년 8월 23일에 – 여론에 공황소문을 유포시킨 오하이오생명보험사의 파산 하루 전에 – 마르크스는 자신의 “경제학” 『서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위기의 폭발적 습격이 마르크스에게 이전 몇 해 동안에는 없었던 추가적 동기를 주었다. 마르크스는 1848년의 패배 이후 10년 동안의 정치적 후퇴와 깊은 인간적 고립에 직면했다. 그러나 위기의 폭발과 함께 마르크스는 일련의 새로운 사회적 반란들에 공헌할 가능성을 보았고 가장 긴급한 과제를 혁명의 시작에 매우 중요한 경제 현상을 분석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가능한 한 빨리 그가 오래 동안 계획했던 작업을 저술하고 출판하는 것을 의미했다.
위기는 뉴욕에서부터 미국의 나머지 지역에 급속히 퍼졌고 몇 주안에 유럽, 남미, 동양에 있는 세계시장의 모든 중심들로 확산되면서 역사상 최초의 국제 금융위기가 되었다. 이런 소식들이 마르크스에게 커다란 도취감을 심어주었고, 지적 생산력의 거대한 폭발을 불러 일으켰다. 1857년 여름에서 1858년 봄 사이의 시기는 마르크스의 생애에서 가장 다작의 시기였다: 이 수개월 동안 마르크스는 이전의 수년 동안보다 더 많은 분량을 작성했다. 1857년 12월에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는 밤을 꼬박 세며 미친 듯이 작업하고 매일 밤 내 경제학 연구들과 대조하고 있어서, 대홍수가 오기 전에 최소한 『그룬트리세』의 개요는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마르크스는 위기가 불가피하다는 자신의 예측이 그렇게 잘못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토요일자의 <이코노미스트>가 1853년의 마지막 수개월, 1854년 전체, 1855년 가을, 1856년의 급격한 변화 동안 유럽은 임박한 위기로부터 머리카락 한 올 만큼도 비켜나 있지 못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의 작업은 매우 놀랍고 광범위한 것이었다. 1857년 8월부터 1858년 5월까지 『그룬트리세』 로 알려진 8권의 노트를 다 채우는 한편 <뉴욕 트리뷴>의 통신원으로서 다른 것과 함께 유럽에서 위기의 전개에 대해 수십 개의 칼럼을 작성했다. 자신의 경제적 환경을 개선할 필요에 따라, 마르크스는『뉴아메리카 사이클로피디어』에 여러 장을 작성하는 데에도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1857년 10월부터 1858년 2월까지 『위기노트』 라고 불리는 세 권의 발췌노트를 작성했다(Krätke, 2008: 169-75). 이전에 작성했던 발췌노트와 달리 경제학자들의 저작들의 요약은 없고, 다양한 일간 신문들에서 위기의 주요 전개 상황, 주식시장 동향, 교역의 증감, 유럽과 미국 및 나머지 세계의 주요한 파산들에 관한 내용들을 모은 수많은 노트들로 구성되어 있다. 12월에 엥겔스에게 쓴 편지에 얼마나 강도 높게 작업했는지가 드러난다:

나는 새벽 4시까지 규칙적으로 엄청나게 작업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중의 과제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1. 정치경제학 개요를 퇴고하는 것(대중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이 악몽을 없애는 것은 내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2. 현재의 위기. <트리뷴>을 위한 칼럼을 제외하면 이번 위기에 대한 기록들을 보관하는 것이 내가 하는 모든 것인데, 이것에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내 생각에는 봄쯤에 우리가 공동으로 이번 사태에 대한 소책자를 내어 독일 대중에게 우리가 항상 그들과 같이 있고 함께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룬트리세』에 관하여 볼 때, 8월 마지막 주에 마르크스는 노트 “M”을 작성했는데, 그것은 작업에 대한 『서설』로 기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고 나서 10월 중순에 다른 7권(Ⅰ-Ⅶ)의 노트 작성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중 Ⅰ권 2부에서 마르크스는 소위 『화폐에 관한 장』을 작성했다. 그것은 화폐와 가치를 다루었고 반면 나머지에서 소위 『자본에 관한 장』을 작업했다. 여기에서 수백 페이지를 자본의 생산과 유통 과정에 관해 할애했고, 잉여가치 개념과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선행하는 경제적 사회구성체들 같은 전체 수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들 중 일부를 취급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엄청난 노력도 작업을 완료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았다. 1858년 2월 후반 라살레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는 사실 몇 달 동안 마지막 단계에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태는 매우 느리게 진행됩니다. 왜냐하면 수년 동안 헌신적으로 연구해온 주제들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려 하는 찰라 사태는 바쁘게 새로운 양상들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더 깊은 생각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작업은 『경제적 범주들 비판』또는 당신이 좋아한다면 부르주아 경제체계에 대한 비판적 폭로입니다. 이것은 폭로이자 동시에 체계에 대한 비판입니다. 나는 전체 분량이 몇 장이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 15년 동안의 연구 뒤에 마침내 작업할 때가 되었는데, 외부로부터 휘몰아치는 운동들이 결국 작업을 중단하게 만들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듭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위기와 함께 분출할 것으로 가정되었던 오래 가다린 혁명 운동의 표시는 없었고, 이번에도 또 마르크스가 수고를 완료하는 데 실패한 다른 이유는 자신이 물질적 세계에 대한 완전한 비판적 정복자가 여전히 되지 못한다는 자각이었다. 그래서 『그룬트리세』는 단지 미완성 초안으로 남았다. 1858년 8월과 10월 사이에 『화폐에 관한 장』을 꼼꼼히 작업하여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2장과 3장 초반부의 원본 텍스트』의 수고로 만든 후에 마르크스는 1859년 대중적 반향이 없었던 짧은 책을 출판하였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또 다른 8년간의 열정적 연구와 거대한 지적 노력이 『자본론』1권을 발행하는데 걸릴 것이었다.

 

Ⅹ. 결론


『그룬트리세』는 오직 수고로만 남아 있다. 1858년 8월에서 10월 사이 『화폐에 관한 장 』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원본 』으로 재작성한 후에, 마르크스는 1859년에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라는 반향이 없었던 짧은 책을 출판하였다. 그때부터 『자본론 』1권을 출판하는 1867년까지 또 다른 8년 동안 마르크스는 엄청난 연구와 거대한 지적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가 영어로 번역된 잘 알려진 저작들뿐 아니라 MEGA2의 수고와 발췌노트를 염두에 둔다면 마르크스의 이론적 기획의 거대함과 풍부함이 더 잘 드러날 것이다. 이 노트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뿐 아니라 – 그것은 종종 마르크스의 개념화를 마치 태어날 때부터 마술적으로 머리에 주어졌으며 그가 수행한 연구들과 동떨어진 어떤 것으로 묘사하였다 – 또한 1960년대의 유럽에서 벌어진 헤겔 철학과 인식론적 단절이 있는지 아니면 기본적 연속성이 있는지에 대한 논쟁의 거대한 제한성을 보여 준다. 사실 논쟁에 참가한 사람들은 단지 마르크스의 텍스트들 중 소수의 저작들만 검토하였고, 심지어 이 저작들 중 일부는 완전히 완성된 저작이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취급하기도 하였다.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 』와 『독일이데올로기 』시기, 『그룬트리세 』의 시기 그리고 이후의 『그룬트리세 』와 다양한 『자본론 』의 초고들 사이에 마르크스의 연구들은 마침내 MEGA2의 책들을 통해 학자들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MEGA2는 마르크스 사상의 발전에서 1850년대와 그의 사상에 대한 더 비판적이고 열려진 해석을 제시하는『자본론 』1권 발간 이후의 양자 모두 시기에서 다양한 매개적 단계들을 따라가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MEGA2로부터 떠오르는 그림은 자신의 테제들의 정확함을 증명하는 더 많은 연구를 위해 죽기 전까지 몰두하며 자기 저술의 많은 부분을 미완성으로 남긴 저자에 관한 것이다.

 

부록: 정치경제학에 관한 발췌노트, 수고, 논문, 단행본의 연대기 표(1843-58)

연도 제목 내용
1843-45 [파리노트]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연구의 가장 초기 발췌노트
1844 [1844 경제학․철학 수고] [파리노트]와 병행하여 작성된 미완성 수고
1845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책에 관한 논문의 초고: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 독일 경제학자 리스트를 비판한 논문의 미완성 수고
1845 [브뤼셀 노트] 정치경제학의 기본 개념에 관한 6권의 발췌노트
1845 [맨체스터노트] 경제문제, 경제사, 영국 사회주의 문헌에 관한 6권의 발췌노트
1846-47 폰 귈리히의 『상업의 역사』에 관한 발췌노트 경제사에 관한 3권의 발췌노트
1847 『철학의 빈곤』 프루동의『경제적 모순의 체계』에 관한 논쟁적 저서
1849 『임금노동과 자본』 <신라인신문, 민주주의의 기관지>에 실린 5개의 논문
1850 <신라인신문>의 논문. 정치경제학 평론 경제 상황에 관한 논문
1850-3 『런던노트』 주로 정치경제학에 집중된 24권의 발췌노트(특히, 위기의 이론과 역사, 화폐, 정치경제학 고전들, 노동계급의 조건, 기술)
1851 [지금. 완전한 화폐체계] [런던노트]를 작성하는 동안 같이 작성한 화폐와 유통에 관한 가장 중요한 이론들에서의 인용을 포함한 2권의 발췌노트
1851-62 <뉴욕트리뷴>의 논문들 이 신문에 실린 487개 논문 중 약 70개의 정치경제학에 관한 논문들
1855 [인용들. 화폐의 본질, 신용의 본질들, 위기들] 주요 경제학자들의 화폐, 신용, 위기에 관한 이론들을 요약한 1권의 발췌노트
1857 [서설] 마르크스의 방법론에 관한 가장 폭넓은 사상을 포함한 수고
1857-58 [위기에 관한 노트] 1857년의 금융위기 사건들에 관한 보도자료 들의 노트
1857-58 [그룬트리세]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를 위한 예비적 수고

 

참고문헌
무스토, 마르셀로. 2010. 카를 마르크스의 재발견. 마르크스주의연구 제7권 제3호.
Engels, F. “Preface to Pamphlet Ludwig Feuerbach and the End of Classical German Philosophy”, MECW 26, p. 519
Engels, F. “Introduction to Karl Marx’s The Class Struggle in France 1848 to 1850”, MECW 27, p. 510
Engels, F. “Critical Review of Proudhon’s Book Idée générale de la Révolution au ⅩⅨe siécle “, MECW 11, pp. 545-70
Enzensberger, H. M. ed., “Heinrich Bürgers, Autumn 1844-Winter 1845”, Gespräche mit Marx und Engels, Frankfurt/Main: Suhrkamp, 1973, p. 46
Haupt, G. “From Marx to Marxism”, Aspects of International Socialism, 1871-1914,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p.2
Jahn, W. and Noske, D.(eds.) “Fragen der Entwicklung der Forschungsmethode von Karl Marx in den Londoner Exzerptheften von 1850–-1853”, Arbeitsbla¨tter zur Marx-Engelsforschung,
Krätke, M. “Marx’s ‘Books of Crisis’ of 1857-8″, Karl Marx’s Grudrisse(Musto, M, ed.), pp. 169-75
Marx, K. Exzerpte und Notizen. 1843 bis Januar 1845, MEGA2 IV/2, Berlin: Dietz, 1981.
Marx, K. Exzerpte und Notizen. Sommer 1844 bis Anfang 1847, MEGA2 IV/3, Berlin: Akademie, 1998
Marx, K. Exzerpte und Notizen. Juli bis August 1845, MEGA2 IV/4
Marx, K. Exzerpte und Notizen. August 1845 bis Dezember 1850, MEGA2 IV/5.
Marx, K. Exzerpte und Notizen. September 1846 bis Dezember 1847, MEGA2 IV/6
Marx, K. Exzerpte und Notizen. Ma¨rz bis Juni 1851, MEGA2 IV/8, Berlin: Dietz, 1986
Marx, K. Exzerpte und Notizen. September 1849 bis Februar 1851, MEGA2 IV/7, Berlin: Dietz, 1983
Marx, K. “Bullion. Das vollendete Geldsystem”, MEGA2 IV/8, pp. 3–-85.
Marx, K. Exzerpte und Notizen. Juli bis September 1851, MEGA2 vol. IV/9, Berlin: Dietz, 1991.
Marx, K. Exzerpte aus David Ricardo: On the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MEGA2 IV/8, pp. 326–-1, 350–72, 381–95, 402–4, 409–26.
Marx, K. Exzerpte und Notizen. September 1853 bis Januar 1855, Berlin: Akademie,
2007.
Marx, K. Ökonomische Manuskripte 1857/58, MEGA2Ⅱ/1.1, Berlin, Dietz, 1976, p. 4;”Bastiat and Carey” in Grundrisse: Foundations of the Critiques Political Economy (Draft), London, Penguin Books, 1993, p. 886
Marx, K. “Economic and Philosophical Manuscripts of 1844”, MECW 3
Marx, K. “Marx’s Undertaking Not to Publish Anything in Belgium on Current Politics”, MECW 4, p. 677.
Marx, K. “Draft of an Article on Friedrich List’ book Das Nationale System der Politischen Oekonomie “, MECW 4, p. 256-93.
Marx, K. “Plan of the ‘Library of the Best Foreign Socialist Writers”, MECW 4, p. 677.
Marx, K. “Declaration against Karl Grün”, MECW 6, p. 72.
Marx, K. “Wage Labor and Capital”, MECW 9, p. 198.
Marx, K. “The Class Struggle in France, 1848 to 1850″, MECW 10, p. 134. 135
Marx, K. “Reviews from the Neue Rheinische Zeitung Revue No. 4”, MECW 10, p. 318.
Marx, K. “Review: May-October 1850”, MECW 10, pp. 529f.
Marx, K. “Reflections”, MECW 10, pp. 584–92.
Marx, K. “Revolution in China and Europe”, MECW 12, pp. 95f. 98. 99
Marx, K. “Political Movements: Scarcity of Bread in Europe”, MECW 12, p. 308
Marx, K. “The Commercial Crisis in Britain”, MECW 13, p. 585
Marx, K. “The Crisis in England”, MECW 14, p. 61
Marx, K. “The French Crédit Mobilier”, MECW 15, p. 10
Marx, K. “The Monetary Crisis in Europe”, MECW 15, p. 113
Marx, K. “The European Crisis”, MECW 15, p. 136
Marx, K.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Part One”, MECW 29,
Marx, K. and Engels, F. “Proceedings of the Sixth Rhine Province Assembly. Third Article. Debates on the Law on Thefts of Wood” and “Justification of the Correspondent from the Mosel”, Collected Works(이하MECW), London: Lawrence & Wishart, 1975-2005, vol.1, pp. 224–63, 332–58.
Marx, K. and Engels, F. “The 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 MECW, 6. pp. 481, 482
Marx, K. and Engels, F. “Announcement of the Neue Rheinische Zeitung. Politisch-okonomische Revue”, MECW, 10. p.5
Marx, K. and Engels, F. “Review:January-February 1850”, MECW, 10. pp.264f.
Marx, K. and Engels, F. “Review:March-April 1850”, MECW, 10. p. 340, 341
Marx, K. and Engels, F. “Review:May-October 1850”, MECW, 10. p. 497, 503, 529f.
Marx, K. and Engels, F. MEW, vol.27, Berlin: Dietz Verlag, 1963, p. 669, n.365
Marx, K. and Engels, F. MECW, 38. p. 6
Müller, H.P. Karl Marx über Maschinerie, Kapital und industrielle Revolution, Opladen:Westdeutscher, 1992. 64.
Müller, H.P.’s collection: Karl Marx, Die technologisch-historischen Exzerpte, Frankfurt/Main: Ullstein, 1982.
Musto, M. Rediscovery of Karl Marx, Internal Review of Social History, vol.52, 2007, p. 447-98
Musto, M. “Marx in Paris: Manuscripts and Notebooks of 1844”, Science & Society, vol. 73, no. 3, July 2009, p. 386–402.
Ossobowa, I. “Über einige Probleme der ökonomischen Studien von Marx im Jahre 1857 vom Standpunkt des Historikers”, Beiträge zur Marx-Engels-Forschung 29, 1990: 147-61
Rubel, Marx, Critique du Marxisme, p. 26. n.2
Schrader, F. E. Restauration und Revolution, Hildesheim: Gerstenberg, 1980, p. 99
Tuchscheerer, W. Bevor “Das Kapital” enstand Berlin: Alkademie, 1973, p.318
Wendling, A. E. Karl Marx on Technology and Alienation, New York: Palgrave, 2009.
The Formation of Marx’s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From the Studies of 1843 to the Grundrisse

'사회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교 개혁  (0) 2022.12.02
토마스 뮌처  (0) 2022.12.02
독일농민전쟁-루터와 뮌처  (0) 2022.12.02
가사 노동과 사회주의 건설  (0) 2022.12.01
나이와 성별  (0) 2022.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