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축옥사(정여립 역모사건)와 호남사림의 분열(上)(1589~91년(선조22~24))
┌ 동인(경상右도 영남사림파): 내암 정인홍, 아계 이산해(화담학파), 정언신, 최영경
여당 ┤ └ 동인계열 호남사림(전라右도): 정여립 / (화담학파) 이발, 이길, 정개청
└ 동인(경상左도 영남사림파):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야당 - 서인(기호사림파): 우계 성혼, 오음 윤두수, 월정 윤근수, 사암 박순(화담학파), 송익필
└ 서인계열 호남사림(전라左도): 송강 정철, 고경명, 김천일
1. 서문
2~3편 기축옥사와 호남사림의 분열(1589년(선조24))은 1편 동·서인 분당(1575년(선조8)) 이후 14년이 흐른 시점의 일이다. 이 때는 남명 조식,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 동·서인 분당의 직간접적 주역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제 정치의 중심은 이들의 친구 및 제자들에게로 넘어와 있었다. 집권여당이던 영남사림파는 남명학파(조식의 제자)의 내암 정인홍과 화담학파(서경덕의 제자, ※ 보론1 참조)의 아계 이산해, 퇴계학파(이황의 제자)의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 등 2세대 지도자군으로 세대 교체가 완료된 상황이었다.
야당이던 기호사림파에는 우계 성혼을 필두로 율곡 이이의 절친한 친구였던 1.5세대 지도자 송강 정철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과 함께 퇴계학파 출신이나 기호사림파에 가담했던 오음 윤두수, 월정 윤근수 형제 등이 뒤를 받쳐주고 있었다. 동·서인 분당 무렵만 해도 지리멸렬했던 기호사림파는 그간 율곡 이이의 탁월한 지도 아래 안정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붕당정치(사림정치) 운영의 묘를 깨우치는 데엔 영남사림파나 기호사림파나 모두 미숙했다. 그리고 이러한 미숙함이 몇몇 정치 지도자들의 경솔함과 개인적 사감, 판단 착오 등과 맞물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2. 이단아, 정여립
본래 정여립은 기호사림파(율곡 이이의 제자) 출신이다. 율곡 이이의 천거를 발판 삼아 한때 홍문관 수찬(정6품)까지 오르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정권이 영남사림파로 옮겨가자 그도 기호사림파에서 탈당한 뒤 영남사림파로 옮겨갔다. 사실 당적 변경 정도에 그쳤다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도 있었을 일이었다.
그러나 율곡 이이가 세상을 떠난(1584년) 뒤부턴 영남사림파의 당론을 따라 자신의 스승이던 율곡 이이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는 군사부(君師父, 임금·스승·어버이)를 일치시하던 당시 기준으로 볼 때 가히 패륜과도 같은 짓이었다. 이에 선조는 '스승을 비난한 죄'를 물어 정여립을 그의 고향인 전북 전주로 쫓아냈다. 그러나 율곡 이이 사망 이후 기호사림파의 지도자가 된 송강 정철은 정여립의 낙향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설상가상 정여립 또한 사실상 귀양 간 신분임에도 도무지 자중할 줄 몰랐다. 지방 수령들 역시 집권여당의 촉망받는 신진인 그를 힘없는 귀양객 정도로 취급하진 않았다. 단적으로 귀양객 신분인데도 準군사조직 성격의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할 수 있었던 걸 들 수 있다. 때마침 1587년 전라도로 왜구가 침입하자 이 조직을 바탕으로, 전주 부윤(시장)의 요청을 근거로 대동계원들을 데리고 나가 왜구를 물리치는 등의 활약상까지 보여줬다.
정여립의 사상 역시 문제가 될 수 있었는데 (결국 문제가 되었다) 왕위 승계는 혈통보단 능력이 중요하니 중국 고대의 요堯·순舜·우禹 임금이 남긴 모범을 거울 삼아 '세습이 아닌 능력 있는 자로의 승계'가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라 주장했다. 정여립이 남긴 표현대로 옮기자면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또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누구를 섬기든지 그가 임금이 아니겠는가)이라 한다. 이는 조선왕조 최초의 방계승통(傍系承統, 아들 없는 임금의 후사로 들어가 代를 이음) 사례로 왕권 강화를 위해 노심초사하던 선조의 심기를 거슬리기에 충분한 주장이었다.
3. 정여립 역모사건
요컨대 정여립은 중앙 정계의, 특히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기호사림파의 이목을 끄는 행동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던 중 1589년 10월 무렵부터 정여립의 주요 활동 무대이던 전라도와 황해도에서 기호사림파 출신 지방 수령들을 중심으로 그가 역모를 꾸민단 첩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조정에서 기호사림파는 정여립의 역모를, 영남사림파는 정여립의 무고를 각각 주장하는 가운데 선조는 일단 진상 파악을 위해 그의 체포를 명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사건이 이상한 방향으로 요동치게 된다. 어떻게 미리 자신의 체포 움직임을 알았는지, 정여립은 자신의 별장이 있던 전북 진안군의 조그만 섬(죽도)으로 도망가더니 거기서 자살하고 만 것이다. 정여립이 자살하는 바람에 영남사림파는 그의 무고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죄가 없다면 왜 자살했겠는가? 이 시점부터 영남사림파는 집권여당이었음에도, 사건 처리의 전 과정에서 야당인 기호사림파에 의해 일방적으로 끌려다니게 된다.
그러나 그의 자살에도 불구하고 정여립 역모사건은 여러모로 의문투성이다. 무엇보다 주모자인 정여립의 죽음이 정말 자살인지 아니면 자살로 위장된 타살인지도 분명치 않았다. 정여립의 시신은 땅에 칼을 세워놓은 채 그 위에서 목을 찔린 상태로 발견됐는데, 그런 자세로 자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는 첩보도 대부분 정황 증거에 근거한 것일 뿐, 실제 물증으로 삼을 만한 건 많지 않았다. 설사 정여립 개인이 역모를 꾀한 게 사실이라 해도, 이후 정여립 개인의 역모사건이 호남 지역 전체를 수사 대상으로 하는 대형옥사(기축옥사)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호남 사림들 중 상당수가 그에게 동조했다고 볼만한 증거는 결단코 발견되지 않았다.
4. 고문기술자, 송강 정철
국문학國文學에서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1580년), 사미인곡(1585년), 속미인곡(1585년) 등을 남기는 등 노계 박인로,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 가사 문학의 3대 거장으로 이름이 높다. 그러나 국사학國史學에서 송강 정철이란 이름이 주는 의미는 조선왕조 최고의 고문기술자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문학 속에 스며있는 감성과 정치 행적 속에서 들어나는 잔인함 사이 어디쯤엔가 갇혀버린 인물, 송강 정철.
좌우간 정여립이 영남사림파 소속인지라 수사 과정에서 여당 쪽 관료들이 배제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특히 역모 사건의 경우 사안이 중대하므로 위관(委官, 최고수사관)은 3정승 중 임명되는 게 관례였다. 문제는 1589년 당시 3정승은 중립 성향이었던 영의정 유전을 제외하면, 좌의정 아계 이산해 및 우의정 정언신으로 집권여당인 영남사림파 일색이었단 점이다.
[송강 정철]
그중 동래정씨로서 정여립과 9촌지간이던 우의정 정언신이 탄핵되자 그 빈자리에 야당인 기호사림파의 지도자 송강 정철이 우의정 겸 위관으로 새로 임명되며 비극이 시작됐다. 송강 정철은 동·서인 분당 때 기호사림파에 가담했으나 고향이 전남 담양군인지라 凡호남사림으로도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당시 호남사림은 13대 명종(1545~67년) 때의 하서 김인후 이후로는, 동·서인 분당 때의 기호사림파처럼 확실한 구심점이 없던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호남 사림은 영남사림파를 지지하는 화담 서경덕(전라右도) 계열과 기호사림파를 지지하는 면앙정 송순(전라左도) 계열로 양분돼 있었다. 보다 세부적으로 화담 서경덕 계열은 동·서인 분당 때 영남사림파에 가담했던 이발·이길 형제 및 정개청 등이 이끌고 있었다. 반면 면앙정 송순 계열은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송강 정철, 고경명, 김천일 등이 이끌고 있었다.
면앙정 송순(1493~1582년(성종23~선조5))은 전남 담양군 출신으로 동향 후배인 송강 정철의 스승이었다. 한때 의정부 우참찬(정2품, 3정승 보좌역)이자 호남 사림의 거두로 13대 명종조 및 14대 선조조 초반 남명 조식 및 퇴계 이황과 대립해온 인물이다. 또한 동·서인 분당 때 심의겸을 지지했던 선배 관료들 중 핵심인물이기도 했다. 면앙정가(무등곡, 1533년)를 남겨 국문학에서도 유명한 인물이다. 제자인 송강 정철의 가사 문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저런 배경으로 인해 호남 사림 내부의 분열상을 잘 알고 있던 송강 정철은 기호사림파의 제갈공명이라 불렸던 송익필의 도움을 받아 호남 사림 내 화담 서경덕(전라右도) 계열을 제거하는 데 정여립 역모사건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마음먹는다.
5. 이발·이길 형제의 죽음
여기에는 송강 정철이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일종의 사감까지 작용했다. 송강 정철은 어린 시절 호남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였던 광산이씨 집을 방문했다가 이발·이길 형제으로부터 멸시 받은 일이 있다고 한다. 원래 송강 정철의 연일정씨 가문도 그의 누이들이 12대 인종(1544~45년)의 후궁이요, 계림군(9대 성종의 庶손자이자 대윤(大尹, 파평윤씨-인종외가)의 지도자 윤임의 조카)의 부인이었을 정도로 잘 나가던 집안이었다. 그러나 인종은 즉위 9개월 만에 요절했고 계림군은 을사사화(1545년)에 연루돼 능지처참됐다. 왕실과 혼맥으로 연결돼 있던 송강 정철의 집안 역시 화를 피하진 못해 부친은 귀양 갔고 같이 귀양 갔던 그의 맏형은 그만 죽고 말았다.
그렇듯 송강 정철의 어린 시절, 그의 가문은 무척이나 영락해 있던 상황이었다. 힘들었던 시절 송강 정철보다도 8살에서 11살가량 어렸던 이발·이길 형제는 그런 그를 두고 역적의 집안 출신이라며 몹시 업신여겼던 듯하다. 그때의 응어리가 남았던지 송강 정철은 수사 과정에서 이발·이길 형제를 겉으론 도와주는 척하면서 실제론 끝없이 옥사에 밀어넣었다. 결국 전라右도, 화담학파 출신으로 영남사림파의 차세대 기수였던 대사간(정3품, 오늘날의 감사원장격) 이발·이길 형제는 속절없이 처형됐고, 형제의 82세 된 노모와 8세 난 아들도 고문 중에 죽어나갔다. 기축옥사 이후 광산이씨 가문은 거의 멸문지경에 이르렀다.
당연히 옥사의 물결은 정여립의 불온한 사상에 동조했던 (또는 동조한 것으로 보였던) 화담·남명학파 출신의 명망 높던 재야학자들에게까지 밀려 들어왔다. 전남 무안에서 은거하던 화담학파 정개청과 경남 진주에서 은거하던 남명학파 최영경 역시 옥사의 파고를 넘지 못했던 것이다.
정개청은 정여립의 집터를 봐준 관계로, 최영경은 정여립의 편지 한 장을 받은 죄로 역모자로 몰려 처형됐다. 최영경의 경우엔 우계 성혼까지 나서서 구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이 밖에도 해남윤씨, 나주나씨, 창녕조씨 등 수많은 전라右도 호남 사림들이 피바람을 피하지 못했으니 옥사가 끝나가던 1591년 무렵 호남 지역 내 영남사림파 지지 가문들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6. 기축옥사의 이례성
조선시대 붕당史에서 기축옥사가 이례적이면서도 충격적인 이유는 옥사의 시기 및 처형자 숫자에 있다. 정여립 개인의 역모사건에서 시작되었으나 완전히 다른 차원의 대형옥사로 확대된 기축옥사는 수사 기간만 정여립이 자살한 1589년에서부터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1591년까지 햇수로 장장 3년을 끌게 된다.
특히 기축옥사가 이례적인 건 붕당정치(사림정치)의 공존기에 발생한 사건치곤 지나치게 격렬한 수준의 당쟁으로 비화됐단 점이다. 이 때는 동·서인 분당부터 조선시대 붕당史의 황금기라 평가되는 인조-효종-현종조(1623~74년)로 연결될 무렵으로, 인조반정(1623년)을 제외한다면 비교적 정치 안정기라 평가되기 때문이다. 붕당 간 대립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악순환의 고리로 진입하게 된 건 이 시기부터 대략 90년 정도 지난 19대 숙종조의 환국정치기(1674~1720년) 때부터다.
['기축록', <대동야승>에서]
길었던 수사 기간 만큼 처형자 수도 많았는데 호남 지역에서만 그 수가 물경 천여 명을 헤아리게 된다. 이는 이전 4대사화(무오(1498), 갑자(1504), 기묘(1519), 을사사화(1545)) 때의 처형자 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숫자다. 또한 이후 4대환국(갑인(1674), 경신(1680), 기사(1689), 갑술환국(1694)) 때의 처형자 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은 숫자다. 가령 경신 및 기사환국 땐 각각 백여 명, 갑술환국 때는 135명가량 처형됐다. 갑인환국 땐 귀양간 사람은 있어도 처형된 사람은 없었다. 기축옥사는 훗날 을해옥사(1755년, 처형자 수 오백여 명)와 함께 조선시대 그 어떤 사건보다 큰 규모의 참사를 낸 실로 당쟁 중의 비극이었다.
written by 하교길가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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