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서인 분당(을해분당, 1575년(선조8))
┌ 동인(경상右도 영남사림파): 남명 조식, 내암 정인홍, 아계 이산해, 오건, 김효원
여당 ┤
└ 동인(경상左도 영남사림파):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만취당 권율, 여해 이순신)
야당 - 서인(기호사림파):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송강 정철, 심의겸, (평중 원균)
1. 서문
14대 선조조(1567~1608년)는 조선왕조 519년 역사에서도 문·무 인재가 가장 많이 배출된 시기로 손꼽힌다. 문文의 남명 조식, 퇴계 이황, 내암 정인홍, 우계 성혼, 율곡 이이, 송강 정철, 학봉 김성일, 아계 이산해, 서애 유성룡, 무武의 만취당 권율, 평중 원균, 여해 이순신 등은 연배는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선조 집권기를 살았다.
이 시기 우수 문인들의 출현은 멀게는 세조반정(계유정난, 1453년)에서 가깝게는 중종반정(1506년) 때의 반정공신 세력(훈구·척신파)이 소멸된 이후였기에 가능했다. 반면 우수 무인들의 두각은 임진·정유왜란(1592~98년(선조25~31))이란 국난이 낳은 결과였다. 이렇듯 우수 인재들의 대거 출현은 곧 이들 간에 출신 지역별·학파별 파벌 형성으로 이어진다.
훗날 조선의 붕당정치(사림정치)라 불릴 정치체제가 1575년(선조8)을 기점으로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훈구·척신파(기호)는 소멸됐으나 집권 주류는 여전히 같은 경기·충청(호서) 출신인 기호사림파 차지였다. 여기서 '기호'란 경기, 호서(충청)에서 한 글자씩 따온 말이다.
사실 기호 세력은 고려왕조(918~1392년) 창건 이래 집권 주류의 위치를 놓치지 않았다. 왕조가 교체되면서 수도도 개성에서 서울로 옮겨왔다지만 그래 봤자 다 같은 경기 지역 안이었던 것이다. 이들을 상대로 오랜 기간 비주류의 대명사였던 영남사림파가 점차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학문적으론 기호사림파에 오히려 앞섰다는 평가를 받던 영남사림파였지만, 정치적으론 기호사림파의 들러리 신세를 면치 못하던 중이었다.
당시 영남사림파는 경상右도(= 경남 진주, 합천군)의 남명 조식과 경상左도(= 경북 안동군)의 퇴계 이황이란 극강의 투톱이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맞선 기호사림파엔 아직 확실한 구심점이 없는 가운데,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이 차세대 지도자군으로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전 시기 훈구·척신파(기호)의 정치적 자산을 물려받은 덕에 사회·경제적 지위상 기호사림파는 분명 영남사림파에 크게 앞서 있었다. 그러나 이를 하나로 결집시킬 만한 확실한 지도자가 없었단 게 (반면 상대에겐 다시 없을 만큼 강력한 지도자들이 있었다) 이 시기 기호사림파의 불운이었다.
한편 1567년 선조 즉위 후 영남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한 덴 선조 자신의 의지도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선조는 조선왕조 최초의 방계승통(傍系承統, 아들 없는 임금의 후사로 들어가 代를 이음) 사례로 권력 승계상 정통성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 즉위 초반 내내 불안했던 선조는 기호 세력 견제를 위해 영남사림파를 대거 중용하면서 이들을 자신의 새 지지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11대 중종이 반정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 등 사림파를 등용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영남사림파 역시 이러한 선조의 의중에 십분 부응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2. 붕당정치의 축, 이조전랑吏曹銓郞
영남사림파의 첫 포문은 남명학파(조식의 제자)와 퇴계학파(이황의 제자) 모두에서 수학한 야심만만했던 신진 김효원이 열었다. 김효원은 신임 이조정랑(정5품) 추천 문제를 놓고, 기호사림파의 중진이자 13대 명종(1545~67년)의 처남이었던 심의겸과 충돌했다. 당시 전임 전랑이던 오건은 자신의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했는데, 이를 오건의 상급자였던 이조참의(정3품, 차관보) 심의겸이 제지한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애초 전임자 오건 역시 남명학파는 물론 퇴계학파까지 두루 거친 영남사림파 출신인데다, 후임자로 추천된 사람 역시 같은 영남사림파 출신의 김효원이었으니, 심의겸으로선 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래 문·무 당하관의 인사추천권을 쥔 전랑銓郞은 이조(吏曹, 행정안전부)에 6명, 병조(兵曹, 국방부)에 8명이 있었다. 이조전랑은 지금으로 치자면 행정안전부 3~4급 인사과장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권한은 판서(장관) 급에 버금간단 세평을 들을 만큼 막강했다. 구체적으로 이조정랑(正郞, 정5품) 3명 및 이조좌랑(佐郞, 정6품) 3명, 이렇게 총 6명으로 구성돼 있으며 권한은 아래와 같다. 조선은 문치주의 국가였던 만큼 무관의 인사 추천을 맡은 병조전랑보단 문관의 인사 추천을 맡은 이조전랑 쪽을 더 높이 평가했다.
1. 후임 전랑 추천권: 후임 전랑은 판서(장관), 참판(차관), 참의(차관보) 등 전랑의 상급자들이 아닌 전임 전랑이 추천했다.
2. 당하관 추천권: 정3품 이하(당하관) 문관에 대한 추천권이 있었다. 정3품 이하 무관 추천은 병조전랑 쪽이 담당했다.
3. 재야 사림 추천권: 과거를 거치지 않은 재야학자들을 문관으로 추천할 수 있었다.
4. 예문관 검열 의견 조정권: 사초史草 작성을 맡은 검열(史官, 정9품)들의 의견 충돌 시, 이들 간 의견을 조정했다.
5. 언론3사 당하관 지휘권: 청·요직淸·要職인 언론3사의 당하관들을 사실상 지휘했다.
- 언론3사: 홍문관(국책연구기관), 사간원(감사원), 사헌부(대검찰청)로 이들은 오늘날 언론사 기능까지 수행했다.
위의 항목들을 살펴보면 이조전랑은 청·요직을 위시로 한 정3품 이하(당하관) 문관들에 대해 실로 광범위한 인사 추천권을 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이조전랑 자신의 인사는 왕권이나 3정승 6판서로 대표되는 재상권에서 독립돼 있었음에 주목하라. 참고로 사초 작성을 맡은 예문관 검열 역시 인사 문제에 관한 한 독립돼 있었다. 예문관 검열의 정원은 총 8명이었는데, 이 중에서 결원이 발생하면 전임 검열을 포함해 8명 전원의 내부 투표를 통해 후임 검열을 공동 추천했다. 이러한 독특한 인사시스템은 사초 작성 시 내부 보안 유지 목적으로 최고권력층으로부터 예문관 검열들의 정치적 독립성을 보장받기 위함이었다.
붕당정치(사림정치)는 왕권王權을 견제할 수 있는 신권臣權의 존재를 기본 전제로 한다. 그러나 비대해진 신권이 왕권을 넘어서는 상황 역시 방지하기 위해, 신권을 상上-중中-하下의 3개 그룹으로 나눠 신권 상호 간에도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추구했다. 이를 위해 이조전랑으로 대표되는 참상관(정4~6품)들의 낭관권 및 예문관 검열로 대표되는 참하관(정7~9품)들의 언관권이, 왕권은 물론 재상권까지 견제함으로서, 조선시대 붕당정치 구현의 핵심 장치로 기능하게 된다. 아래는 이 구도를 간단히 도식화한 것이다.
왕권王權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신권臣權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당상관(정1~3품) <ㅡㅡㅡㅡ> 참상관(정4~6품) 참하관(정7~9품)
재상권 낭관권(인사권) 언관권(언론권)
3. 심의겸과 김효원
심의겸이 보기에 청·요직의 꽃인 이조정랑을 맡기기엔 김효원은 부적당한 인물이라 생각됐다. 이에 김효원은 이조전랑의 후임자 추천권을 존중해온 건 60년 가까이 된 오랜 관행인데 이를 상급자(이자 외척)가 무시하고 관여하는 게 더 부적당한 일이라 맞받아쳤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 심의겸과 같은 선조 집권 이전의 구세대, 외척 출신, 훈구파(기호)들은 주요 공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까지 주장해 잔잔하던 정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심의겸은 자신과 7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 김효원이 자신을 구세대 인물로 몰아붙이는 것에 대해 격분했다.
[심의겸의 글씨, <근묵>에서]
또한 심의겸은 같은 명종의 외척 출신이자 개인적으론 자신의 외삼촌이었던 이량 등에 맞서, 그간 사림파(영남)를 보호해온 인물이기도 했다. 더구나 심의겸 역시 퇴계학파에서 수학하기도 했으니 비록 훈구파(기호) 출신이지만 사림파(영남)로서 자격 역시 아주 없다고 보긴 어려웠다. 심의겸 또한 한걸음 더 나가 김효원은 을사사화(1545년)의 흉역인 윤원형의 문객 노릇이나 하던 자라며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윤원형은 소윤(小尹, 파평윤씨-명종외가, 사림파에 우호적이던 대윤(大尹, 파평윤씨-인종외가)과 대립하여 대윤과 사림파를 숙청했다. 을사사화라 한다.)의 지도자로서 소멸 직전 훈구·척신파의 상징과도 같던 존재였다. 그리고 김효원은 1565년 과거에 장원급제하기 전부터 이미 이름을 날리고 있던 선비였다. 당시 김효원이 과거 준비를 위해 서울에 머물고 있던 무렵 당시 영의정 윤원형의 사위였던 이조민과 친분이 있어 얼마간 윤원형의 집에서 지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을 윤원형과 정치적으로 대립 중이던 심의겸도 알게 되었다. 소위 문명을 날린다는 선비가 권세가의 집에 머무른단 얘기를 듣게 되면서 심의겸은 김효원을 무척 비루한 사람으로 여기게 됐다. 그런데 그 김효원에게서 공격을 받게 되자 심의겸은 10년 전의 일까지 떠올랐던 것이다.
심의겸 자신은 비록 외척 출신이었지만 그렇다고 원흉의 문객(김효원)에게서 자격 시비를 들을 만큼 헛살진 않았다며 자부하고 있었다. 실제로 심의겸으로 대표되는 청송심씨(명종처가) 외척 가문은 윤원형으로 대표되는 파평윤씨(명종외가) 외척 가문과는 달리 사림정치의 도래를 앞당겼단 평가를 받았다. 명종 사후 그의 조카였던 하성군(선조)의 승계도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를 중심으로 한 청송심씨 가문의 지지 덕택이었다. 심의겸을 잘 아는 이들은 이 일을 계기로 김효원을 힐난하기 시작했고 김효원을 잘 아는 이들은 시험 준비차 잠시 머무른 걸 갖고 문객 운운하는 건 근거 없는 깍아내리기라며 반발하기 시작했다.
4. 舊시대의 지도자도 新시대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서 13대 명종 때부터 줄곧 동고동락해온 기호 출신 선배 관료들이 전략적으로 심의겸 지지를 선언했다. 그렇잖아도 기호 출신 선배 관료들은 영남 출신 후배 관료들의 급속한 세력 확장에 긴장하고 있던 중이었다. 반면 14대 선조 때부터 중앙 정계에 등장한 영남 출신 후배 관료들은 김효원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율곡 이이는 연배상 후배 관료 쪽에 속한 인물이었으나 심의겸과 김효원 둘 다 글 읽는 선비君子들이라 옹호하며 양측 간의 조정(조제보합調劑保合)을 시도했다. 그러나 선배 관료들이 여론전에서 크게 밀리자 마지막에 가선 전격적으로 선배 관료 쪽 지지를 표방하며 기호사림파의 1세대 지도자 자리를 거머쥔다. 당시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쪽인 정릉동에 있어 심의겸을 지지하는 선배 관료들은 서인西人이라,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인 건천동(現 인현동)에 있어 김효원을 지지하는 후배 관료들은 동인東人이라 불리워졌다.
[율곡 이이]
결국 이 논쟁의 핵심은 '舊시대의 지도자도 新시대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의 판단 여부에 있다. 심의겸으로 대표되는 명종 때의 헌 술도 선조라는 새 포대에 담을 수 있는가? '담을 수 있다'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서인이다. '담을 수 없다'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동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당신이 어느 쪽에 서있느냐가 아닌 그 대답에 일관성이 있느냐에 있다. 당신이 어떤 곳에 살든 어떤 시대를 살든 이 논쟁은 시공을 초월해 유효하니까. 박정희 이래로 고관대작을 놓친 적 없던 고건이나 그의 딸인 박근혜, DJ의 충복인 박지원이나 그의 아들인 김홍일, YS의 아들인 김현철을 향한 당신의 대답도 변함이 없는가?
5. 170여 년 만의 정권교체
어쨌든 기호사림파의 집중 지원을 받던 거물급 정치인 심의겸을 상대로 한 이 도전은 '외척 아웃'과 '훈구·척신파나 기호사림파나 그 밥에 그 나물'을 핵심 슬로건으로 내건 영남사림파와 김효원의 승리로 돌아갔다. 심의겸의 결사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론전에서 승리를 거둔 김효원이 이조정랑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 당시에도 기호사림파의 세력이 더 강했던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구심점 없이 지리멸렬 중이었던 기호사림파로선 자신들과 훈구·척신파(기호)의 관련성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영남사림파의 선명한 개혁론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아울러 1516년(중종11)부터 관행화된 전임 전랑의 후임 전랑 추천권 역시 더욱더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392년 조선 건국 이래 영남 세력은 1대 태조 때의 삼봉 정도전(경북 봉화군 출신)에서 9대 성종 때의 점필재 김종직(경남 밀양군 출신)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중앙 정계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고려의 개성에 이어 조선의 서울도 장악한 기호 세력의 장막은 실로 두터웠다. 그래도 170여 년 간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아 드디어 1575년 14대 선조 때에 기호사림파(서인) 對 영남사림파(동인) 간의 역사적인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동시에 타 지역·학파를 의식하며 자기 지역·학파를 결집시키려는 붕당 간 경쟁도 불을 뿜기 시작했다. 특히 율곡학파(이이의 제자) 및 우계학파(성혼의 제자)가 기호사림파 쪽으로 전격 합류한 일은, 정권 상실의 충격에 휩싸여 있던 기호사림파에겐 가뭄 속의 단비와도 같은 일이었다.
이를 통해 당시까지만 해도 지역 세력 차원에 머물러 있던 기호사림파는 남명학파 및 퇴계학파로 구성된 영남사림파에 맞설 수 있는 명실상부한 하나의 학파學派로써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시대 붕당史에서 율곡 이이가 차지하는 위상은 이래서 중요할 수밖에 없다. 율곡 이이에 의해 舊시대의 훈구·척신파(기호)가 新시대의 기호사림파로 전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보론 각 학파·붕당의 형성시기
14대 선조조에서 정국 운영을 주도한 세력은 정치적 구분인 영남사림파(동인), 기호사림파(서인)에 관계없이 학문적으로 볼 때 단연 남명학파 및 퇴계학파였다. 이는 남명 조식, 퇴계 이황이 율곡 이이, 우계 성혼과 비교해서 34~35년 가량 연장자였기 때문이었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은 둘 다 1501년(연산군7) 출생 동갑내기였다. 그러나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31) 출생이었고 우계 성혼은 율곡 이이보다 겨우 1년 빠른 1535년(중종30) 출생이었다.
남명 조식,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우계 성혼과의 34~35년이란 연배 차이는 그대로 남명·퇴계학파와 율곡·우계학파 간의 형성 시기 차이로 이어졌다. 남명·퇴계학파는 13대 명종 때 학문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해 14대 선조 때 중앙 정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율곡·우계학파는 14대 선조 때 학문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해 15대 광해군(1608~23년) 때부터야 중앙 정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곧 15대 광해군조 무렵 율곡 이이의 정치적 자산을 물려받은 오성 이항복 및 학문적 자산을 물려받은 사계 김장생 등이 율곡·우계학파의 실질적 1세대라 부를 수 있다. 참고로 14대 선조 때엔 기호사림파 지도부에마저 퇴계학파 출신들이 즐비했다. 퇴계학파 출신이었나 기호사림파에 가담했던 오음 윤두수, 월정 윤근수 형제(선조 2편부터 등장) 등이 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우계학파의 종장 우계 성혼 역시 30대 초반에 퇴계 이황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은 전력이 있다.
다시 말해 영남사림파에선 학문 집단인 남명·퇴계학파가 곧 정치 집단인 붕당(동인)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기호사림파에선 정치 집단인 붕당(서인)에 학문 집단인 율곡·우계학파가 가담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학문적 역량에서 우월했던(전형적인 학자 출신들이 많았던) 영남사림파와 정치적 역량에서 우월했던(전형적인 관료 출신들이 많았던) 기호사림파 간의 학파, 붕당별 특징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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