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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

[스크랩] 선조 3. 기축옥사와 호남사림(下)(1589~91년)

by 이덕휴-dhleepaul 2018. 6. 12.


3. 기축옥사(정여립 역모사건)와 호남사림의 분열(下)(1589~91년(선조22~24))



       동인(경상右도 영남사림파): 내암 정인홍, 아계 이산해(화담학파), 최영경

여당 ┤  └ 동인계열 호남사림(전라右도): 정여립 / (화담학파) 이발, 이길, 정개청

      동인(경상左도 영남사림파):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야당 - 서인(기호사림파): 우계 성혼, 오음 윤두수, 월정 윤근수, 사암 박순(화담학파), 송익필

            └ 서인계열 호남사림(전라左도): 송강 정철, 고경명, 김천일



7. 화담·남명학파 구원에 소극적인 퇴계학파


기호사림파 송강 정철(좌의정) 주도의 대대적인 수사 정국이 이어지자, 영남사림파의 지도자였던 아계 이산해(영의정)는 공동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던 서애 유성룡(우의정)에게 도움을 청했다. 1589년 말 영의정 유전이 세상을 떠나면서 1590년부터 아계 이산해가 영의정으로, 송강 정철이 좌의정으로, 서애 유성룡이 새로 우의정으로 임명된 상황이었다. 이미 죽은 정여립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호남 지역 내 영남사림파 지지 가문들이 도륙나는 사태는 막고자 했기 때문이다.


특히 전라右도 호남 사림들의 상당수가 화담학파와 연결돼 있었던지라, 자신이 화담학파 출신이었던 아계 이산해의 정치적 입지도 심히 곤경에 처해 있었다. 아계 이산해의 숙부이자 스승이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이다. 그런데 토정 이지함의 스승이 바로 화담 서경덕인지라 아계 이산해 역시 화담학파로 분류된다. 아계 이산해의 생각에 영의정과 우의정이 뜻을 모은다면 옥사가 어느 정도 선에서 진정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서애 유성룡의 태도가 무척이나 애매했다. 무엇보다 그는 선조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정여립發 역모사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퇴계학파는 정여립의 급진적인 사상과는 달리 왕권 강화를 적극 지지하는 보수적인 사상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임금이 보기에 불온한 것이라면, 퇴계 이황의 수제자이자 정치적 계승자였던 서애 유성룡이 보기에도 불온한 것이었다.


여기에 퇴계학파는 이번 옥사를 이발·이길 형제로 대표되는 화담 서경덕(전라右도) 계열과 송강 정철로 대표되는 면앙정 송순(전라左도) 계열 간에 벌어진 일종의 호남 사림 간 내전으로 보았다. 그리고 호남 사림 내부의 문제라면 영남사림파가 끼어들 이유는 더욱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중립적 입장의 배경엔 정치적 극한 대립이라면 일단 피하고 보는 퇴계학파 특유의 성향이 깔려 있었다. 퇴계학파의 종장인 이황의 호 퇴계退溪는 '물러나는 시내'란 뜻이다. 퇴계 이황은 1534년(중종29) 과거에 급제했으나 13대 명종조 원년 을사사화(1545년)를 지켜본 뒤 명종조는 출사할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되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북 안동으로 '물러났다'.


이렇게 인생의 40~60대를 보낸 퇴계 이황은 14대 선조 즉위(1567년)와 함께 중앙 정계의 분위기가 쇄신됐다고 판단되자 비로소 다시 출사해 대제학(정2품, 문형文衡)을 맡았다. 이러한 퇴계 이황의 처신은 이후 그의 제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 퇴계학파 출신들은 정치적 극한 대립 상황에서 대개 중립을 지키거나 차라리 출사를 보류하는 등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8. 기축옥사의 정치史적 의의


(1) 패자, 호남사림


다른 역모사건들과는 다르게 기축옥사로 호남 지역이 반역향反逆鄕으로 지목되진 않았다. 아마도 옥사의 위관(委官, 최고수사관)이 같은 호남 출신이었던 게 첫번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점은 옥사 이후 호남 사림의 독자적인 성장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됐다. 참혹했던 지난 3년간의 옥사는 호남 지역 재지在地 지주들이 재통합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호남 사림 내부를 갈갈이 찢어놓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기축옥사는 오늘날 한국전쟁(1950~53년)을 연상하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소 냉전의 대리전으로 시작돼 3년간 계속된 한국전쟁은 기호-영남사림파의 대리전으로 시작돼 3년간 지속된 기축옥사와 묘하게 닮아 있다. 비극 이후에 비극의 당사자들에 의해 불신과 갈등이 더욱더 격화되었단 점에서도 두 사건은 비슷하다. 이렇듯 내부의 적을 향한 끊임없는 반목은 향후 호남 사림이 기호사림파나 영남사림파와 같은 하나의 단일한 지역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두고두고 장애물이 됐다.


특히 옥사 중에 제거된 세력이 화담 서경덕 계열(전라右도)이란 사실이 전체 호남 사림의 역량을 한층 더 후퇴하게끔 만들었다. 16세기 말 조선 유학의 학문적 동향은 점차 조선 전기의 유교 문학(사장詞章, 가사 및 문장 연구) 단계에서 후기의 유교 철학(경학經學, 경전 연구) 단계로 옮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면앙정 송순 계열(전라左도)은 아직 유교 문학 단계에 머물러 있던 보수적 학문 그룹이었다. 오늘날에도 이들 스승과 제자는 조선 가사 문학의 대가로 국문학계에서 유명하다. 가사 문학의 3대 거장이라 불리는 송강 정철은 물론 그의 스승 면앙정 송순 역시 강호가도(江湖歌道, 조선 가사 문학에 널리 나타난 자연예찬적 문학사조)의 선구자로 큰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국사학계나 한국 철학계의 주목을 받진 못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반면 제거된 화담 서경덕(전라右도) 계열은 당시 학문 흐름의 최일선에 서있던 진보적 학문 그룹이었다. 이렇듯 호남 계열 화담학파의 몰락은 옥사 이후 호남 사림이 유교 철학 단계로의 발전 경쟁에서 기호사림파나 영남사림파에 비해 크게 뒤처지는 배경이 된다.

[면앙정 전경, 전남 담양군 소재, 전남기념물 6호]    


곧이은 임진·정유왜란에 의한 지역 인재 손실 역시, 기축옥사로 인한 인재 가뭄에 시달리던 호남 사림에겐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이 됐다. 호남 사림들은 기축옥사에 따른 중앙 정계의 의심을 풀고자 의병 활동에 열성을 보였다. 그런데 왜란 중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호남 사림들 중 상당수가 전사하면서 면앙정 송순 계열(전라左도)에서마저 학맥 단절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전남 광주 출신의 의병장 고경명이나 전남 나주 출신의 의병장 김천일의 죽음 등이 그 예다.


훗날 인조반정(1623년) 또한 경기·충청 지역 기호사림파의 주도로 이뤄지면서, 호남 사림은 중앙 정계 개편 과정에서 다시금 소외되었다. 그리하여 기축옥사 이후 호남 사림 내에서 주도권을 잡은 면앙정 송순(전라左도) 계열도, 경기·충청 지역 기호사림파로 개별적으로 흡수되는 운명을 맞고 만다.



(2) 또 다른 패자, 영남사림파


3년간 계속된 기축옥사로 호남 지역 내에서 영남사림파 지지 세력은 완전히 제거됐다. 이후 호남 지역은 조선 말기까지 기호사림파의 안정적인 뒷마당으로 전락한다. 영남사림파는 호남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함으로서 非영남 지역의 지지 세력이 사라졌고 결국 영남 안으로 고립됐다. 특히 전라右도 호남 사림들과 밀접히 연결돼 있었던 화담학파의 (남명학파 역시) 좌절감은 깊고도 깊었다. 이 좌절감은 옥사가 끝나가던 무렵 영남사림파 정권을 공동 구성하고 있던 퇴계학파를 향해 터져나오게 된다.



(3) 유일한 승자, 기호사림파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가장 중요한 변화는 호남평야로 상징되는 거대한 경제력이 온전히 기호사림파의 소유가 되었단 점이다. 조선시대 때 호남평야는 오늘날로 치면 삼성이나 현대 등의 거대 기업 집단과 마찬가지다.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경제에서 부가가치의 원천은 토지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경기 지역 토지가 직전법(職田法,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주는 제도)으로 묶여 있어 확실한 경제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던 기호사림파는 호남(평야)이 가지는 가치를 재빨리 알아차렸다. 기호사림파는 호남(평야)을 장악하는 데 당력을 집중했고 가장 든든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게 됐다.


그러나 영남 지역에서 나름대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그래서 경제적으로 절박하지 않았던 영남사림파는 호남(평야) 상실이 가져다 줄 장기적 파급 효과를 계산에 넣지 못했다. 이렇게 영남사림파가 판단 착오를 겪는 동안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기호사림파는, 30여 년 뒤의 인조반정을 통해 중앙 정치 권력마저 다시 탈환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 말기까지 두 번 다시 영남사림파에게 그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19대 숙종 때 기호남인이 두 번에 걸쳐서 집권하나, 이는 기호남인의 자체 역량에 따른 집권 사례라 볼 수 없다. 당연히 집권 기간도 매우 짧았다. 결국 기축옥사는 기호사림파가 동·서인 분당 때의 패배를 딛고 일어서 본격적인 재기를 시작했던 계기라 할 것이다.



※ 보론1  화담학파에 관하여


화담학파는 화담 서경덕(1489~1546년(성종20~명종1))의 제자들을 일컫는다. 화담 서경덕 자신은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송도3절(화담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진보성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 중 다수는 동·서인 분당 때 초당 허엽(허난설헌, 허균(<홍길동전>의 저자)의 부친)을 필두로 훈구·척신파 청산에 앞장섰던 영남사림파에 가담한다. 사암 박순을 중심으로 일부는 기호사림파에도 가담했다. 그러나 그 수는 많지 않았다.

 

화담학파는 '행동하는 지성'을 꿈꿨단 점에서 남명학파 출신들과 뜻이 잘 맞았으며 호남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기축옥사를 겪으며 세력이 크게 약화됐고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소멸됐다. 그리하여 화담 서경덕의 진보적 사상(기氣 1원론)은 사암 박순을 통해 율곡 이이(이기理氣 1원론) 기호사림파에서 계승된다.

 

   [화담 서경덕의 글씨, <명가필보>에서]

결국 화담학파는 구성원들 다수가 영남사림파에 가담했으나 정작 화담 서경덕 사상의 계승은 기호사림파에서 이루어지는 심히 모순적인 내력을 갖게 됐다. 조선시대 학파와 붕당은 대개 일치했단 점에서 볼 때 화담학파의 이런 운명은 붕당史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본 조선시대 붕당史에선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화담학파는 남명학파에 포함해 서술한다.


※ 보론2  그 밖의 지역의 경우


조선시대 붕당史 대부분의 시기에 기호사림파는 주류(여당), 영남사림파는 非주류(야당)의 정치적 위상을 차지한다. 그리고 2~3편 기축옥사와 호남사림의 분열에선 호남 사림이 기호사림파에 종속돼 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 밖의 지역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강원도 및 제주도,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의 경우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들 지역에선 유의미한 정치 세력이 형성되지 못했거나 형성됐다고 해도 반역향 등으로 지목돼 지역 인재 등용이 조직적으로 저지됐다.


(1) 강원도 및 제주도


강원도 및 제주도의 경우 평야가 적은 지리적 특징을 갖고 있다. 평야가 적다는 건 농업 기반 경제에서 농경지가 적다는 걸 의미한다. 그에 따라 이들 지역에선 부양 가능 인구 수준이 매우 낮았고 이는 곧 지방 사림 형성의 경제적 바탕이라 할 수 있는 재지在地 중소지주층 발달에도 어려움을 가져왔다.


오늘날에도 강원 및 제주 지역의 인구 규모는 적으며 그에 따라 배정된 국회의원 수도 상대적으로 적음을 볼 수 있다. 18대 국회(임기 2008~12년)의 경우 전체 지역구 국회의원 245명 중 강원도는 8명(3%), 제주도는 3명(1%)일 뿐이다. 영남권 67명(27%), 호남권 31명(13%) 등과 비교된다. 이런 배경으로 개별 관료들은 꾸준히 나왔으나 (가령 기호사림파의 종장 율곡 이이는 강원도 강릉 출신이다) 이들 지역을 근거로 하는 독자적인 정치 세력 형성까진 이르지 못했다.


(2) 황해도


황해도의 경우 경기도와 인접한 지리적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 이로 인해 황해도는 자연스레 凡기호사림파의 영역권에 포함됐다. 그러므로 기호사림파의 지리적 범위는 경기도 및 충청도(특히 충청남도) 그리고 황해도(특히 황해도 남부 지역)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3) 함경도


함경도의 경우 잦은 반란으로 인해 반역향으로 지목되면서 지역 인재 등용이 차단돼 버린 케이스다. 본래 함경도는 1대 태조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이 있던 관계로 왕실의 각별한 배려를 받던 곳이다. 그런데 3대 태종 때 조사의의 난(1402년), 6대 단종 때 이징옥의 난(1453년), 7대 세조 때 이시애의 난(1467년)이 연이어 터지면서 그만 반역향으로 낙인 찍히고 말았다.


사실 중앙 정부는 함경 출신들의 무골武骨 성향을 자못 부담스러워 했다.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태조 이성계가 바로 대표적인 함경 출신 무인武人 아니던가? 그런고로 함경 출신들을 바라보는 중앙 정부의 시선은 모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시애의 난 이후 함경 출신들은 무과武科를 통해 중·하위직에 일부 등용됐을 뿐이다. 그나마 이들 역시 함경, 평안도 등 여진족의 침입이 잦던 북쪽 변경에 집중 배치됐던지라 중앙 정계에서 일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조선왕조가 문치주의 국가였던 점도 무인 중심의 함경 출신 관료들에겐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4) 평안도


평안도의 경우 조선왕조의 지배사상인 유학儒學 발달이 지체되었단 점이 가장 큰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평안도는 평야가 넓었고 그에 따라 인구 및 물자도 풍부했다. 그러나 경기도 및 하3도(下三道, 경상·전라·충청)에 비해 지역 유학의 발달이 더뎠고 이는 평안 지역 사림 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


특히 16세기 이후 붕당정치(사림정치)가 자리를 잡은 이후부턴 중앙 정계를 장악한 기호사림파에 의해 평안 출신 인재 등용이 조직적으로 저지됐다. 중앙 정계를 통한 입신양명이 차단된 평안 출신들은 평안도가 중국 대륙과 인접해 있단 지리적 이점을 십분 활용해 明나라(후의 淸나라)와의 무역에 종사하며 거상(巨商, 특히 의주상인) 된 사례가 많았다.


그러던 한편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평안도에서도 본격적인 지역 사림 세력이 형성된다. 그러나 기호사림파의 보이지 않는 차별 정책은 지속됐고, 이는 평안 사림들에게 크나큰 박탈감을 안겨다 주었다. 특히 정묘(1627년(인조5)) 및 병자호란(1636년(인조14)) 때 중앙정부가 평안 지역의 수비를 거의 방기하다시피 해버린 일은 이 지역의 민심을 더욱 비장하게 만들었다. 이는 훗날 23대 순조 때 홍경래의 난(1811년)의 역사적 배경으로 이어진다. 홍경래의 난 이후 평안도 역시 반역향으로 지목되면서 조선 말기까지 평안 출신 인재 등용은 원천적으로 차단됐다.



written by 하교길가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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