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9년 10월 2일(선조 2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 이었다. 정여립(鄭汝立)이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모반을 꾀했다는 황해감사 한준의 비밀 장계가 올라왔다. 당시 조정은 동인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영의정 유성룡,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정인신등 세정승도 동인이었으며 정여립 역시 동인에 속해 있었다. 그날밤 선조는 중신회의를 열어 고변의 내용을 알렸는데 역모의 시나리오는 아래와 같았다. 「기축년 겨울 서남에서 일시에 거병하여 얼어붙은 강진(江津)을 건너 서울로 직범하여 무기고를 불사르고 강창을 탈략하며 심복을 도내에 배치하고 자객을 분송하여 먼저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죽이고 거짓 교지를 꾸며서 방백과 병사, 수사를 죽이며 대간을 가만히 사주하여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을 파직시키고 그 틈을 타서 일제히 일어난다」
정여립이 모반을 꾀했다 그러나 황해감사의 장계는 박충간의 보고에 의한 것이라고 했을 뿐, 어떠한 경위로 첩보를 취득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는 엉성하기 이를데 없어 「무근지설」일 것이라는 설이 유력했다. 그 내용이 옳고 그름을 따질 여가도 없이 선전관과 금부도사가 전라도와 황해도로 급파되었다. 그때 동인들은 정여립이 서울로 붙잡혀오면 그의 능숙한 능변으로 그간의 경위를 해명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동인측의 기대와는 달리 10월 7일 금부도사 유담으로부터 의외의 급보가 올라왔다. 정여립이 하루전에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한양이 술렁거렸다. 정여립은 그때 황해도 안악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변숭복으로부터 고변사실을 전해듣고 변숭복과 아들 옥남, 그리고 동지였던 박연령의 아들 춘룡을 데리고 진안 죽도로 숨어 들었다고 기록되었다. 정여립 일행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진안의 죽도 천반산 속에 숨어지내면서 며칠을 그 인근 마을에서 밥을 얻어 먹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마을 사람들이 진안현에 알렸고, 진안현감 민인백이 이끄는 관군이 산을 포위했다. 민인백은 바위속에 숨어있는 정여립 일행을 발견하고 왕명을 전하고서 사로잡으려 했다. 그때 정여립이 변숭복을 먼저 칼로치고, 그의 아들 옥남과 춘룡을 차례로 내려쳤다. 그리고 정여립은 칼자루를 땅에 꽃아 놓고 목을 칼날에 대어 자결했다. 죽으면서 정여립은 황소 울음소리를 냈다고 한다.
〈동소만록〉에 의하면 “정여립이 꾀임에 빠져 진안의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이 현감과 같이 두들겨 죽이고는 자살했다고 아뢰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정여립의 자결 소식을 전해들은 서인들은 공공연히 떠들기를 “누구는 누구의 일족이요. 아무는 아무의 친구라 하여 역정과 친분이 두터운 자만이 반드시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정여립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자라 할지라도 동인의 명목이 붙은 자에게는 조사나 유생을 막론하고 다 의구심을 품어서 비참한 기상이 차마보고 들을수 없었다.”고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으며
〈괘일록〉에는 서인들은 정여립의 역변이 일어난 것을 알고 난 뒤부터 갓을 털고 나서서 서로 축하하였으며 동인들은 스스로 물러나고 서인들을 그 자리에 사사로운 원한을 풀기에 꺼리는 바가 없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상처만 입고 서울로 끌려온 정옥남, 박춘룡과 박연령, 이기등은 역모를 승복한 후 처형되고 정여립의 시체를 끌고와서 금부 앞에서 능지처참형을 집행했다. 조정은 연일 이일로 인하여 논란이 계속되었다. 그런 도중에 고향에 있던 서인 정철(鄭澈)이 조정에 입궐, 임금을 만나 속히 역적들을 잡아들이고 한양에 계엄령을 내리라는 글을 올린다. 실로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거기에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다. 정철의 제자이며, 서인의 명사인 김장생이 뒷날 엮은〈송강행록〉에 이런 내용이 있다. 「기축 10월 공은(鄭澈) 고양의 신원에서 장남 기병의 상을 치르고 있었는데 역변이 일어났다. 공이 나(김장생)를 불러 이른 아침에 가서뵈니 공은 정여립이 필시 도망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송강은 자진 입궐할 뜻을 밝히고 김장생의 의견을 물었다. 김장생은 소명이 있으면 모르되 이런 시기에 입궐하는 것은 논란과 오해가 있을 것이다고 반대했지만 송강은 입궐을 고집했다.
김장생은 「지금 숙배하면 반드시 추관을 맡게 될 것이고 공신은 되겠지만 이발 백유양이 죽는 것을 공의 힘으로 구할 수 있겠는가. 또 이와 같은 대목에는 억울하게 범망에 걸려든 자가 없을 수 없는데 공이 일일이 다 구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으나 끝내 듣지 않고 입경하였다. 김장생의〈송강행록〉기록에 의하면 정철은 정여립의 도망을 미리 확신하고 있었고, 역모의 사실 여부가 가려지기도 전에 그의 치옥을 위하여 선조를 만나고자 했던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정철과 송익필(宋翼弼)이 변숭복을 시켜 진안 죽도로 유인을 했고, 암살을 지령한 음모의 최고지도자란 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한 원인이다.
정여립의 역심은 분명했을지라도 기축옥사는 정철과 송익필에 의한 무옥이요 확대조작된 것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이러한 속에 정여립 모반사건의 연루자들이 연이어 잡혀왔다. 11월 12일 드디어 정언신, 이발, 박유양 등에 대한 왕의 친국이 시작되었다. 정여립의 도주와 자결은 그의 역모를 사실로써 정착시켰고, 서울을 중심으로 황해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의 선비들중에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거나 인척이라도 되면 여지없이 잡혀와 처벌을 받았다. 그 당시 동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이발, 정여립과 같은 전주 사람으로 구촌간이었고 우의정이었던 정언신, 백유양 등 헤아릴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기축옥사의 희생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서산대사 휴정은 묘향산에 있던 중 붙잡혀 와 선조에게 친히 국문을 받은 후 풀려났고 사명당 유정 역시 오대산에서 강릉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으니 정여립 사건의 여파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짐작할만하다.
좋은 의견을 구한다 선조는 ‘좋은 의견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모반의 연루자들을 일러바치면 포상을 내리겠다고 본부를 내렸다. 무고한 사람들이 말없는 말로 무수히 잡혀 들어갔고, 이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거나 벼슬이 떨어진 선비들의 수가 일천여명이 되었다.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들의 불행이 정철과 송익필을 포함한 서인측 사람들에게는 행운이었다. 선조 23년 6월에 전라도 순찰사 홍여순은 역적의 무리를 많이 체포한 공로를 인정 받아 가의대부를 받았고 8월 초하루에는 정여립의 난을 평정한 사람들에게 광국공신과 평난공신의 칭호를 내렸으며 그때 상품을 동급별로 하사하고 나라에 대사령을 내렸다. 조선 건국 후 열두번째의 공신 배출이었다.
그렇다면 정여립은 어떠한 사람인가? 정여립은 전주 남문 현재의 행정구역상 전주시 석장동 파쏘봉 아래서 동래 정씨 희중의 아들로 1544년경 태어났다. 정여립의 어린시절 얘기로는 7-8세 무렵 집에서 기르던 매를 잔혹하게 죽였다느니 이를 고자질한 여종을 돌로 쳐서 죽였다느니 하는 기록이 있지만 승자의 기록에 의한 것이므로 신빙성은 별로 없다. 그러나 정여립의 부친 희중이 익산현감 재임때 아전들이 열다섯살 무렵의 여립을 현감보다 더 두려워 했다는 것을 보면 그는 예사 인물이 아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했고, 촉망받는 선비로써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던 정여립은 스물넷에 문과에 급제한다. 문과급제후 정여립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드나들며 학문을 익혀 스승의 총애를 받았다. 그 당시 율곡의 문하에는 전국의 인재들이 모여 들었는데 이이는 그를 큰 인물이 될 것으로 보고 요직에 천거했고, 성혼이나 조정의 박순 역시 그를 아낌없이 돌보아 주었다. 그는 대과급제 13년후에 예조좌랑에 올랐고, 이듬해엔 율곡의 천거로 홍문관 수찬에 오른다. 홍문관은 경연을 주관하는 핵심 정권기관이며, 비록 정 6품관이지만 하루에도 한 두 번씩 왕과 마주앉아 국정을 논하는 자리였다.
정여립은 왕에게 건의할 때 고개를 들고 눈을 똑바로 뜬채 따지고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여립은 율곡이 별세하자 곧 정치적 입장을 돌변하여 동인의 실력자인 이발과 친밀해 진다. 선조 18년의 경연에서 박순, 이이, 성혼등 서인의 영수들을 공개적으로 비방한다. 율곡의 생전에 정여립은「공자는 익은 감이고, 율곡은 덜 익은 감이다」라고 하며 즉, 공자 율곡은 시간 문제라고 얘기했던 정여립이 그를 비난하자 못마땅하게 여긴 선조가 물었다. “이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네가 지극히 따르다가 지금에는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이에 정여립은 “신이 애초에는 그의 심술을 몰랐다가 나중에야 알고서 죽기 전에 이미 절교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정여립은 이렇게 전날의 스승과 동료들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선조수정실록》에는 이 때 정여립의 처신을 “서인이 조정에서 쫓겨나고 동인들이 세력을 잡자, 이제까지 속해 있던 서인 계열에서 벗어나 재빨리 동인들에게 접근하여 권력을 잡고자 했던 하나의 변신 술책이었다”고 기록하였지만 사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군사부일체(軍師父一體)가 강조되던 유교 사회에서 스승을 배신하는 배사(背師)는 인륜을 어긴 강상죄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은 지 한 달이 지난 을유년 5월 28일에 이이․정철과 지우(志友)로 교류하던 서인 의주 목사 서익이 상소를 올려 정여립을 공격하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기축옥사라는 나무에 나뭇잎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여립은 이에 율곡 생전에 이미 율곡과 절교했다고 맞받아 쳤다. 율곡의 조카 이경진이 선조에게 정여립을 맹비난하는 편지를 보냈고, 율곡을 높이 평가한 선조는 정여립을 오늘의 형서라고 비판했다. 형서는 송나라때의 유명한 학자 정이천의 제자로서 선생을 배반한 못된 인간의 표본이며 여포와 같이 두고 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이었다.
대동계를 조직하고 분노한 정여립은 선조 임금 아래에서는 아무것도 이룰수 없음을 깨닫고 낙향한 뒤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호를 죽도라 하였으며 제자들은 정여립을 일컬어 죽도선생이라고 불렀다. 그 무렵 정여립은 처가(김제시 봉남면)에 가까운 모악산 금산사에 가까운 제비산 밑으로 돌아온 금구로 집을 옮기고, 학문을 익히며 대동계를 조직, 여러 사람들과 어울렸다. 예기 대동에서의 동(同)은 한 장막 안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예기》에 실린 대동세계에 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대도가 행해지니 천하가 만민의 것이 되고 어질고 유능한 자가 선출됨으로써 모두가 신의를 중히 여기고 화목한 사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자기 부모만을 사랑하고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지 않고 모두가 한 가족같이 사랑하였다. 그럼으로써 늙은이는 수명을 다하고 젊은이는 재능을 다하고 어린이는 무럭무럭 자랐으며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 없는 늙은이, 병자들도 모두 편히 부양받게 되었다. 또한 남자는 모두 직분이 있고 여자들은 모두 시집을 갈 수 있었다. 재물을 땅에 버리는 낭비를 싫어하지만 결코 자기만을 위하여 소유하지 않으며, 노동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했으나 반드시 자기만을 위하지 않는다. 이처럼 풍습이 순화되어 간특한 모의가 통하지 않으니 변란이 일어나지 않고, 도둑질과 약탈이 없으니 대문을 닫지 않고 살았다. 이것을 일러 ‘대동’이라 말한다.
정여립의 대동계 이후, 중국에서 대동사회에 대한 이상을 새롭게 등장시킨 사람은 청나라 말의 홍수전(洪水全)이었다. 역사 속에서 태평천국의 난이라고 기록된 그 혁명을 발발케 한 홍수전(1814-1864)은 기독교 평등사상과 대동사상을 결합하여 천하가 한 가족처럼 다같이 형통하고 태평한 태평천국의 세상을 외치며 이것이 바로 천하 위공의 대동사상이라고 선전했다. 특히 그는 ‘경제 평균 주의’가 바로 대동사회의 ‘대도’라고 말하며 대동사상을 국가이념으로 설정하였다. 그 뒤를 이어 중국에서 대동이라는 말을 사회․사상적 개념으로 다시 거론한 사람은 청말 근대화를 위해 개량주의적 혁명 운동을 전개한 강유위(1858-1927)이었다. 강유위(康有爲)는《대동서(大同書)》를 저술하여 나름대로의 대동사상을 전개하였는데 그 내용은 유가적 범주를 상당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대동사회가 이룩되지 못한 원인은, 자기 자신과 가족에 집착하는 이기심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가족제도의 폐기를 역설하였다. 최한기는 “사회구성원 각자의 사회적 자각이 대동사회 구현에 필수적인 조건”이며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이치가 같아지는 것이 대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사이 서울에 있던 이발 등이 잇따라 정여립을 천거하여 요직에 앉히려 하였다. 정여립도 선조 19년 김제 군수로 가고자 인맥을 움직였고, 기축옥사가 일어난 선조 22년에는 황해 도사로 가고자 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그 전에 정여립이 입시할 때와 같이 거만 방자한 사람이라고 하여 그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이 일로 인하여 서인들로부터 ‘역모를 준비’했었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즉 대동계 세력을 황해도까지 확대하여 서울을 남과 북에서 협공하려는 전략이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정여립이 가고자 했던 황해 도사는 1559년에서 1562년까지 3년에 걸쳐 황해도 일대에서 일어났던 임꺽정(林巨正)의 난의 진원지였기 때문에 정여립이 황해 도사로 가고자 했던 사실 자체가 훗날 그의 역모 사건에 매우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때 세상은 갈수록 어지러웠고 도적들이 들끓었다. 군정이 문란해지고, 재력은 쇠진하였으며, 매년 흉년이 들어 도적들이 들끓었다. 뿐만 아니라 남쪽 백성들을 북쪽 땅으로 강제 이주시킨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어떤 변란이 일어날 지 아무도 몰랐다.
「선조수정실록」에 사관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백성들은 항심을 잃어버리고, 군사는 장부에만 기재되어 있으며 안으로는 저축이 바닥났고 밖으로는 변란이 잇달고 있으며 사론은 분열되고 기강은 무너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여립은 그러한 세상에 대처하기 위하여 사농공상의 직업적 차별이나 반상귀천 남녀의 신분적 차별이 없는 대동계를 조직하였다. 조정에 있을 당시부터 선조를 바보나 부덕한 임금으로 생각했던 정여립은 조정의 여러 정책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사마공(司馬公)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위(魏)나라를 정통(正統)으로 삼은 것은 참으로 직필(直筆)이다. 그런데 주자(朱子)는 이를 부인하고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삼았는데, 후생(後生)으로서는 대현(大賢)의 소견을 알 수 없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요(堯)․순(舜)․우(禹)가 임금의 자리를 서로 전했는데, 그들은 성인(聖人)이 아닌가? 또 말하기를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한다고 한 것은 왕촉(王蠋)이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 성현(聖賢)의 통론은 아니다. 유하혜는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는데, 그는 성인 중에 화(和)한 자가 아닌가? 맹자(孟子)가 제(齊)나라, 양(梁)나라의 임금에게 천자(天子)가 될 수 있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권하였는데, 그는 성인 다음 가는 사람이 아닌가?”
위의 글은 기축옥사로 희생된 정여립이 남긴 유일한 어록으로 그 무렵 그의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그의 생각과 사상은 대체로 이렇게 풀이되고 있다. 첫째, 정여립은 왕위의 세습을 부인했다. 중국의 성인인 요, 순, 우가 그들의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당대의 현자에게 왕위를 계승케 한 것을 높이 평가하였고, 둘째, 정여립은 충군사상을 부인했다. 그는 임금과 신하가 절대적 충성심으로 이루어지는 수직적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번째, 그는 국가가 천하의 공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주인이 반드시 군주가 아님을 주창했다. 이는 원시적 인민주권설을 담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정여립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자였고,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보다 50년 앞선 공화주의자였다. 그 무렵 그의 동료였던 무안의 정개청은 「배절의론」을 썼고, 그 글 때문에 정개청은 훗날 화를 당한다. 정여립은 천민, 승려, 종들과 사귀였는데 종출신의 길삼봉, 승려출신의 의연, 천민 출신의 지함두와 소외된 황해도 출신의 변숭복과 박연령이었다.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해 그 세력을 키워가고 있을 당시, 해서(海西)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떠돌았다. “호남 전주 지방에 성인이 일어나서 우리 백성을 구제할 것이다. 그 때는 수륙(水陸)의 조례와 일족, 이웃의 오열과 도피자 색출 등을 모두 감면할 것이고, 공․사천과 서얼(庶孼)을 금고(禁錮)하는 법을 모두 혁재(革際)할 것이니, 이로부터 국가가 태평하고 무사할 것이다”하였다. 이 말은 곧 백제 멸망 이후 금산사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미륵의 세상’ ‘꿈의 나라’에 거는 민중들의 염원이나 다름없었다. 정여립은 전주, 금구, 태인등지의 무사들과 노비들을 끌어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 매월 보름날에 활을 쏘고, 무예를 익히며 잔치를 베풀었다.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을 땐 죽도 선생이라고 하면 부근의 어린아이들까지 한푼 두푼 기부할 정도였으며, 재산이 많은 한 과부가 전 재산을 팔아서 바쳤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호남 제일의 인물 그들은 전부터 정여립이 비범한 인물인 줄 알았었고 또 어수선한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몰랐기 때문에 정여립의 청탁이 가기만 하면 곡식과 돈, 그 밖의 각종 물자를 바리바리 실어서 보내주었다. 조경남(趙慶男 : 1570-1641)이 정여립을 평하기를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나 세상을 뒤엎었다. 그는 조정에서 물러 나와 집에 있으면서 자중하는 체 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받지 않았으며, 나라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사림에서는 달려가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라고 하였다. 전주부윤이었던 남언경 또한 당파가 달랐음에도 “정공(鄭公)은 학문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재주도 가히 따르지 못할 바이다.”하며 주자(朱子)에 비기기도 하였으며, 정개청은 18살이나 나이가 작은 정여립에게 보낸 글 가운데 “도(道)를 높고 밝게 봄이 당세의 오직 존형(尊兄)뿐이라”하였다. 이발 역시 정여립을 당시 “제일 인물”이라 하였고, 이이도 “호남에서 학문하는 사람 중 정여립이 최고”라고 하였다. 그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인하여 대동계원들 뿐만이 아니라 호남의 지식인들이 정여립의 집에 모여들었고, 또한 그들은 정여립의 집에서 책도 읽고 무술도 연마할 수 있었다. 이 대동이라는 말이 80년대 대학가에서 유행했던 대동굿이나 대동사상, 대동 한마당으로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다. 정여립은 정해년에 왜군이 손죽도로 쳐들어오자 남언경이 정여립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정여립은 주저 없이 대동계를 동원하였는데 그때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587년(선조 20) 왜변에 열읍(列邑)이 군사를 징발하였는데 전주 부윤 남언경이 똑똑치 못하여 조치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여립을 청하여 군대를 나누게 하였더니, 여립이 사양하지 않고 담당하여 한번 호령하는 사이에 군병이 모였는데, 부서를 나누어 징발하는 데 하루가 안 되어 마무리지었다. 여립은 대동계에 들어 있는 친밀한 부사를 장령으로 썼다. 적이 물러가고 군사를 해산하자 여립이 장령에게 말하기를, “훗날 변고가 있으면 너희들은 각각 부하들을 거느리고 일시에 와서 기다리라”하고 군부 한 벌을 가지고 돌아갔다. 이것도 화근의 한 원인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민중 정여립은 대동계를 중심으로 역성혁명을 준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모반의 대장은 길삼봉이며, 총 책임자는 정여립, 거사년은 선조 22년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들은 도참비기로 천명성을 통한 변혁사상을 강조하였다. <이 가는 망하고 정 가는 흥한다>는 최초의 정감록을 통한 정씨 왕조 사상을 펴뜨려 변혁사상의 효시를 만들었다. 이러한 사상은 뒷날 민중사상의 중심이 된 정감록적 변혁사상과 허균의 호민론에 영향을 주었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민중뿐이다. 민중은 불이나 물 또는 호랑이 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다.”라는 호민론은 정약용의 탕무혁명론으로 이어진다. 정여립은 그때 차별받고 있던 세력을 모아 변혁을 도모하였고, 불만에 찬 신분지역의 사람들을 행동대원으로 끌어들였다. 그중의 한 사람이 겁을 먹고, 고변을 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사실은 송익필의 동생인 송한필의 작전에 의해 진행된 결과라는 말들이 파다하다. 정여립은 조선왕조의 근본이념인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론(節義論)을 부정했다. 그는 시대의 변혁을 꿈꾸며, 대동계를 조직했고, 그러한 이단성과 혁명성이「조선조의 광주사태」라고 일컬어지는 기축옥사로 이어진 것이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조선상고사」총론에서 “항성을 감춰두고 변성만 키워온 역사”라고 통탄하면서 기축옥사의 정여립 모반사건을 제기했다. 그후 백여년의 세월이 흐른뒤에 기축옥사를 계획된 역모였느냐, 그렇지 않으면 무고에 의한 정치적 탄압과 정쟁의 산물이었느냐 그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여립은 신분과 지역 그리고 민본에 바탕을 둔 변혁사상가였고, 행동가였으며 결코 파당의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역사에 희생당한 선각자였다」고 강조하는 역사학자 이이화씨의 말과「기축옥사」가 아니었더라면 3년후에 일어났던 임진왜란은 없었을지라도 모른다는 누군가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또한 「조선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시련과 위기였던 전란에 대처하기는커녕 정치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켰다는 점에서 그 정치사적 배경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인하대 김만규 교수의 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후백제의 견훤과 마지막까지 겨루었던 왕건의 훈요십조로 인하여 금강이남의 사람들이 고려때 등용되지 못하였는데 정여립 모반사건 이후 반역형으로 낙인이 찍혀 호남인의 중앙정계 진출이 거부되었다. 그러다 보니 패자의 자취는 남겨진 것이 별로 없다. 역사학자인 이이화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역사는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진실에 접근하고 해부한다. 신화나 설화는 신비성과 비합리성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정향(定向)을 달리하지만, 그러나 이를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고, 역사적 사실에 접근할 수도 있다. 특히 역사 기록이 부실할 경우 신화나 설화를 줄거리를 통해 진실의 편린을 주을 수도 있다.” 영국의 인류학자인 타일러 역시 “국가나 개인적인 입장을 벗어나지 못해서 편벽되고 허위성 많은 역사가들의 역사책보다는 오히려 신화가 분석만 잘하면 훨씬 공정한 여러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고 말했다.
1589년에 일어난 기축옥사만큼 여러 가지 논란이 함께 신화 속에 묻혀있는 사건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특히 정여립의 삶 자체가 짙은 안개 속에 가려있다 보니 그가 태어난 전주나 서실을 지었던 곳이며 최후를 장식했던 진안(鎭安)의 죽도(竹島), 그리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꿈을 키웠다던 원평 일대에 떠도는 말들 속에서 진실의 조각들을 들추어내지 않으면 기축옥사의 본질에 접근한다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진안 죽도에 있었던 죽도 서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정여립 사건을 억울하다고만 볼 것이 아니라 그 혁명성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해야 하고 숨어있는 정여립의 대동사상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여립의 대동사상과 기축옥사 이후 전주 원평, 진안 일대를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있는 그에 얽힌 민중의 수많은 전설들을 오늘에 맞게 되살려내야 할 것이다. 결국 기축옥사는 위관을 맡은 정철과 막후에서 계교를 내어 사건을 확대시킨 송익필의 ‘사감과 복수심’, 그리고 이이의 죽음(1883) 이후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있던 동인세력을 거세하려던 성혼을 비롯한 서인측의 정략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일어났고,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이 1천 명에 달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약간 과장이 섞여있다 할지라도 당시 조선 인구가 5백여 만명에 불과한 상황에서 네 번의 사화보다 많은 1천여 명의 희생자를 낸 기축옥사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남북한 인구가 7천만 명쯤 되던 1980년대 광주 민중항쟁 당시 죽은 사람이 3백여 명을 밑돌고 있고, 행불자가 200여명에 이를 뿐이니 동인측에서 보면 사화라고 볼 수 있고 서인측에서 보면 옥사라고 볼 수 있는 정여립사건이 조선 역사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기축 옥사 이후 정철이 호남에 인연을 두었던 탓으로 호남지식인들의 분열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래서 그때 살아남은 한 선비는 “호남에 인재가 나려면 앞으로 4백 년은 지나야 한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는데 실제 그 말처럼 조선조 중엽 기축옥사가 있기 전까지는 큰 도시중 생원, 진사에 입격한 사람이 서울에 이어 전주가 2위 나주가 4위 광주가 6위 남원이 7위를 차지하였으나 선조 이후에는 전주가 10위, 남원이 9위, 나주가 10위, 광주가 12위로 확연히 뒤떨어졌고 정여립 사건으로 가장 피해가 심했던 전주와 나주는 하락율이 눈에 띨만큼 두드러졌다. 따라서 조선전기 문과 급제자 260명 중 2명을 제외한 모두가 관직에 나가 99.2%의 진출 율을 보였으나, 후반기에는 323명 중 28명이 관직에 나가지 못하여 92.1%로 그 진출율이 감소하였고 관직에 진출한 사람들 중 당상관에 오른 자의 비율이 전반기에는 35.7%이였으나, 후반기에는 19.5%로 크게 줄어들었다. 그것은 수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기 때문에 학문적 분위기가 크게 위축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중앙 정부를 원망하는 호남 사림들이 과거 자체를 포기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여립 사건 이후 호남사람들이 문과에 응시하기가 용이치 않았을 뿐더러 신원보증서와 같은 보단자와 경재소 관원 3인의 추천서를 받을 수 없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기축옥사 이후 호남 사람들이 별로 차별받지 않았다고 강변하기도 하지만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조선 중엽 이후로 큰 벼슬을 지낸 사람이 드물어서 인재를 능히 배양하지 못하였으므로 인물이 적다”고 했던 말이나 다산 정약용이 “호남 풍속은 호협하기만 하고 질박한 기질이 적다. 까닭에 오직 고씨 제봉의 자손, 기씨 고봉의 자손, 윤씨 고산의 자손 등 서너 집 외에는 크게 나타난 자가 없다”고 했던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난 해인 고종 19년(1882)에 일본인에 의해 출간된 조선지(朝鮮誌)에는 “전부터 조정에서 전라도 인물을 기피하여 전라도 출신들이 고위직에 참여한 경우가 극히 드물었고, 이로 인해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전라도로 모여들어 이곳이 정치혼란의 근원지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매천 황현 또한 “인재가 많은 땅이며 절의가 있다고 이름난 곳이 변하여 천한 시골이 되고 점차 사람이 살지 않은 변방이 되어, 나라 안에서 송도나 서북 지역과 같이 꺼리니 재주 있고 민첩한 사람이 침체되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것은 하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라고 하였던 것처럼 호남에 대한 기피 현상은 지속되어 갔다.
호남 차별의 분수령 기축옥사 정여립은 암울했던 조선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대동사상을 기치로 내걸었었다. 그러나 그의 선구적 사상인 ‘천하공물설’과 ‘대동사상’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허균의 변혁사상인 호민론(豪民論:세력 있는 백성)으로 이어졌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민중뿐이다. 민중은 물이나 불 또는 호랑이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다”로 시작되는 호민론은 한 사회와 나라의 여러 모순과 부조리, 부패 세력을 없애려면 반드시 지도자가 있어야 하며 그때 잠자는 민중을 이끌고 나갈 지도자가 바로 호민이라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다시 정조 때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탕무혁명론(湯武革命論)’으로 이어졌다. “다섯 집이 이웃이 되니 다섯 집에서 대표자를 추대하면 그 다섯 집이 대표자가 되고, 다섯 집씩 모여 마을이 되며, 다섯 마을이 모여 현이 되며, 마을에서 대표자를 추대하면 현의 대표가 함께 추대한 사람이 제후가 되고 제후들이 함께 추대한 사람이 천자가 된다고 하며, 군주를 간접선거로 선출해야 한다”는 탕무혁명론의 취지는 근대적 민주사상과 같은 것으로 이것 역시 민중 사상의 중심이 된 정감록적 변혁사상과 같이 정여립의 정치사상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정여립의 저항의식은 당시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민족의식이나 국민의식으로 승화될 만한 것이었다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기축옥사 이후 호남지역은 서북지역처럼 차별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현상은 수많은 민란으로 이어져 마침내 근현대사의 출발점인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으로 분출되었다.
결국 기축옥사는 현실 모순을 해결할 수 없는 주자학적 통치이념에 대한 반발과 백성들을 도외시한 위정자들의 권력투쟁, 그리고 지배계급에 의해 수탈당한 일반백성들의 불만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의해 발발한 사건이었다. 또한 당쟁을 이용한 사화였으며 당쟁의 형세를 돌이킬수 없는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간 첫 역옥이었고, 혁명적인 사상의 좌절이며 진보세력이 몰락하게된 독립 변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일어났던 사화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논쟁의 불씨를 계속적으로 이어 나갔고, 그 연장선상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시인 고은은 정여립의 시 한 편을 만인보에 추가하였다. 일자 한 자 늘어놓겠습니다 / 무식이 배짱입니다 / 성리학 주리노선은 천지 음양귀천 상하 계급 노선입니다 / 그런데 좌파 주기철학은 일체 만물 평등 노선입니다 / 바로 이 화담, 율곡 주기론을 이어 정여립은 그것을 더 발전시켜 허균의 자유주의와는 또 달리 / 앞장 선 펀하평등 노선을 강화합니다 / 주자는 다 익은 감이고 율곡은 반쯤 익은 감이고 / 또 누구는 숫제 땡감이라고 원조파 은사 / 그리고 선배따위 닥치는 대로 평가합니다 / 그는 동인계입니다. 정철과 대결하다가 / 그놈의 늪같은 권세 때려치우고 낙향해 버립니다 / 천하는 공공한 물건이지 어디 정한 주인이 있는가 / 어허 위태하닞고 이 말은 곧 존왕주의 주자학을 마구 거역함이 아닌가 될 말인가 / 어디 그뿐인가 / 인민에 해되는 임금은 살함도 가하고 / 인의가 부족한 사대부 거함도 가하다 / 이런 칼 휘둘러 치는듯한 우렁찬 말을 듣고 / 오쫑쫑한 재상 도학자들 한거번에 크게 감동키도 했습니다 / 그는 대동계 세워 양반, 상민, 사천노비 할 것 없이 / 상놈이 양반더러 / 먹쇠가 마님더러 야 자 해도 되는 / 대동계 세워 / 문무쌍권의 공부시키니 / 때마침 왜구 침노하고 갯가 나가서 다 격퇴했습니다 / 임진왜란은 이미 그때부터입니다 / 그 이전 신라 고려 때부터입니다 / 호남 전역 해서 전역 / 대동계 식구 늘어나서 임진왜란 전 백성이 모여들었습니다 / 한데 이 민족자결주의 세력 늘어나자 / 조정의 정철은 대동계 일당과 선비 1천여 명을 검거합니다 / 천하 대역죄 먹여 홍살문턱 닳았습니다 / 정여립은 막판에 진안(鎭安) 죽도(竹島)에서 아들하고 자결한 것이 아니라 서인 관헌 암살패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 3백년 뒤에야 5백년 뒤에나 그 이름이 알려줄 뿐이라고 / 이것이 전민족의 항성(恒性)을 묵고 변성(變性)만 키우는 짓거리라고 / 한탄하는 단재의 말마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