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라는 유토피아엔 원래 해방의 열망이 담겨 있으며, 그런 열망이 절대왕정을 타파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소유권이 민주적 시민권에 우선시되는 상황에서 자유주의 유토피아의 한계는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사진은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의 1830년 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우리는 사회를 이루고 산다. 사회 없이 고립된 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외로워서든 아니면 경제적 필요 때문이든, 우리는 사회 속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타인은 우리 존재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질곡일 때도 있다. 누군가에게 타인은 스스로가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존재론적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에게 타인은 목적 성취를 위해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이기도 하고, 때로는 개인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모여 살았기 때문에 혹독한 자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맞지만, 사회는 점점 개인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사회 속에서 개인은 오랫동안 잊혔다. 어떤 성별로 태어났는지,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났는지, 어느 지역에 태어났는지, 그리고 어떤 종교적 전통하에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대부분의 삶의 전망이 결정되고, 주어진 직분을 얼마나 성실히 수행하는가만이 중요했던 꽤 오랜 시기를 거쳤다(지금 나는 과거형으로 쓰고 있지만, 이러한 얘기들이 과거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겠다). 거기서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노력에 따라 재산을 쌓아 나가고, 각자 바라는 삶의 전망을 수립하는 것이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사회라는 곳에 모여 사는 것이 유리”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고픈 열망을 담아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그림 속에는 종교적, 관습적, 계급적 속박으로부터 탈피한 개인들을 그려 넣었다. 이 개인들은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은 채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우선, 간섭받지 않으려면 스스로 알아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줄 알아야 했고, 그러한 의미에서 그림 속에 등장하는 개인들은 합리적인 존재들이라고 했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더라도 뭐가 자신에게 좋은 일인지를 알아서 잘 판단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림 속의 개인들은 각자의 성을 쌓고 있었다. 누추하고 곧 허물어질 것같이 보이는 성들도 있었지만 누구도 허락받지 않고는 성문을 넘을 수 없다고 했다. 성안에서라면 무슨 생각을 하든, 누구를 믿든, 어떤 계획을 짜든, 그리고 혼자서 무슨 짓을 하든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그림 속의 유토피아에서도 개인들은 여전히 사회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기껏 전통과 관습, 계급과 종교로부터 독립해 이제야 자유를 만끽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개인들이 왜 도로 사회로 들어가 살고 있을까. 이 그림을 그린 사람들의 답은 이랬다. 성만 견고하다면 고립되어 사는 것보다는 이른바 사회라는 곳에 모여 사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개인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사회적 분업 때문이었다. 거기서 각자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 중 일부만을, 그것도 자기가 잘하고 또 원하는 것만을 생산하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과의 교환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은 사회는 분업 시스템일 뿐, 이전처럼 누구를 간섭하고 누구를 억누르는 곳이 아니고, 대등하게 만나서 대등하게 교류하는 장소일 뿐이라고 했다. 누구는 이 장소를 사회가 아니라 경제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타인이 휘두르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최초 자유주의 유토피아에 담긴 그림이었다면, 절대권력을 향해 들었던 촛불을 기업의 횡포에 맞서 그대로 들 수는 없는 걸까? 사진은 지난 9월 방한한 가이 라이더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이 방한 기간 중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서울 종로5가 청계천 전태일다리를 찾아 전태일 기념상에 헌화하는 모습.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 그림에 꽤나 비판적이었다. 누군가는 그림 속의 개인들이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텐데, 이때 서로의 이해가 충돌하는 경우는 없냐고 물었다. 그림 작업을 주도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나서서 자신이 쓴 <자유론>을 보라고 했다. 그의 책에는 자유에는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이라는 전제가 따라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희소한 자원과 무한한 욕망을 생각하면 거의 모든 선택이 직간접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 것 아니냐는, 뒤를 잇는 질문에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누군가는 개인들이 저마다 내리는 선택이 올바르다는 보장이 없는 것 아니냐고 우려를 나타냈다. 그림을 그린 사람들 중 누군가가 올바름이라는 것은 억압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 않았냐고, 합의한 적도 없는 이른바 올바름이라는 선험적 기준이 지금까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가로막는 족쇄 아니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걸 다 인정하더라도 적어도 우리 모두가 함께 지향해야 할 방향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반발에 많은 사람이 동의를 표했다.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은 부리나케 경제학자들을 데리고 왔다. 때로는 수학도 쓰고 어렵기도 했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이미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시장이라는 제도를 그림에 넣으면 된다고 했다. 시장에서 적절한 경쟁이 뒷받침되면 공정한 교환이 보장될 뿐 아니라 각자 자기의 이익만을 보고 행동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가장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올바름이라는 게 뭔지 자신들은 관심이 없지만, 그것이 공공의 이득이라는 정도로 합의할 수만 있다면 시장이 이른바 올바름마저도 부지불식간에 해결해주는 장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언제나 전자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그림 속에서라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가격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충분한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대로 하더라도 최선의 결과가 나오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엄격한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했지만, 그말은 곧 잊혔다. 경제학자들의 등장은 이 그림을 완성시켜주는 신의 한 수와도 같았다. 이제 그림은 누구의 간섭 없이도 스스로 조화롭게 작동하는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절대왕정 타파 등 승전보 전했지만…그때 누군가가 질문을 했다. 이 그림 속에서 개인들은 평등한가?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자신들도 오래 고민해온 문제라고 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우선, 완전한 평등은 있을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했다. 적어도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면 결과에 따라 나타나는 불평등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물론 불평등이 너무 심해서 다시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로까지 나아갈 것처럼 보이면, 그때는 교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불평등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그것이 가져올 악영향을 최소화하겠다는 말이었다. 이들은 또 평등을 위해서 누구에게나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국가 차원의 의무교육 시스템을 그림에 추가하여 선택에 필요한 정보와 지식이 누구에게나 충분히 제공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면 누구는 더 많이 알고 있어서 선택지가 많고, 누구는 몰라서 더 좋은 것이 있어도 선택하지 못하는 문제는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또한 개인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최선이 아니었음이 판명되더라도, 한번의 실패가 이후 새로운 선택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그림 속의 주인공들에게 직업 선택의 자유, 거주지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했다. 이제 그림 속의 개인들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을 마쳤다.
1893년 뉴질랜드 여성참정권 청원 당시 2만3853명이 의회에 제출한 546장의 청원 서류로 길이 274m의 두루마리를 만들었다. 위키피디아
이제 그림이 완성된 듯했다. 완성된 그림은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림 속의 주인공들은 타인으로부터 간섭받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자유로운 개인들이었고,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행동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조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 그림을 사람들은 자유주의 유토피아라고 불렀다. 그림의 파급력은 실로 대단했다. 많은 사람이 열광했다. 그림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실제로 자유주의적 메시지는 절대왕정의 타파와 봉건적 예속의 철폐 등 많은 곳에서 승전보를 전했다. 이상향일 뿐이라고,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심한 거부감을 드러낸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메시지는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었고, 현실 곳곳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밝혀내고 새로운 대안을 찾는 데 중요한 잣대로 작용해왔다.
이 그림에 어느 정도 균열은 예상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성을 가진, 그것도 어느 정도는 큰 성을 가진 사람만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처음 그려진 그림 속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들은 제법 큰 성을 갖고 사업을 벌이던 사람이었는데, 이들은 일정 규모 이상의 성을 가져본 사람만이 스스로의 일을 처리할 능력을 인정받은 것 아니냐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그림 속의 자유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 논리를 수용할 수 없었다. 성의 크기와 상관없이 동일한 크기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애초의 그림과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성을 가진 사람이 남성에 국한되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었고, 그림의 논리대로라면 성을 가진 사람의 피부색도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물론 이 당연한 논리를 완성하기까지 많은 사람이 피와 땀을 흘렸다. 그리고 이 요구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를 낳으면서, 소수자들의 인권 문제로까지 번졌다. 성의 크기가 문제가 안 된다면, 성의 모습도 문제가 될 수 없어야 한다는 논리는 이 그림 속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한편, 그림 안에는 다른 이의 큰 성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왜 성안에서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없냐고 묻기 시작했다. 굳게 닫힌 성안이라도, 거기서 일하는 수많은 개인의 생살여탈권 달린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대등하게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애초 그림을 그릴 때는 예기치 않았지만, 원래 그림의 메시지로부터 크게 동떨어진 얘기도 아니었다. 왜 자산을 소유한 사람만이 성을 만드는 것이냐고, 원래 그림의 메시지에 따르면 살아 있는 개인 모두가 성이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개인의 삶이 중요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성을 소유한 사람들끼리 민주주의를 합의할 수 있었다면 왜 성안에서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없냐고 물었다.
자유가 있어도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 실로 성채 안에서의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주장은 자유주의적 논리의 필연적 귀결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의 그림 안에 쉽게 담아내기는 힘든 주장이기도 했다. 새뮤얼 볼스와 허버트 긴티스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서 이러한 목소리를 지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루이 16세, 조지 3세, 니콜라스 2세의 야망에 대해 그처럼 효과적으로 대항했던 언어가 끝내 아이비엠, 피아트의 절대주의에는 겨누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자유주의 정치 전통은 하나의 분명한 질문에 대해 어떤 일관된 대답을 제출하고 있는데, 그 질문이란 이런 것이다. 누가 기업 업무를 관리해야 하는가를 결정할 때 왜 소유권이 민주적 시민권보다 우월해야 하는가? 이 기업의 정책이 50만이나 되는 많은 피고용자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생산, 위치, 기술의 선택이 미치는 영향이 공동체 전체와 그 너머에까지 확대되는데도 말이다.” 절대권력을 향해 들었던 촛불을 기업의 횡포에 맞서 그대로 들 수 없는가?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타인이 휘두르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최초 그림에서 담고자 했던 메시지였다면, 성안에서의 민주주의 확장에도 그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한 것 아닌가?
다른 한편, 이동의 자유가 모든 사람들을 불행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누구나 동일하게 그 자유를 향유할 수 없다는 것도 예기치 못한 문제였다. 자본을 가진 이들은 쉽게 성을 옮겼지만, 성이 옮겨 간 뒤 폐허처럼 남은 자리에는 떠나지 못해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은 이게 아니다 싶을 때 (상대적으로) 쉽게 이동해버렸지만, 노동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이동하지 못한 채 남아서 불행을 감당해야 했다. 그림 속의 이상향에서는 이탈할 자유에만 주목한 나머지, 자유가 있어도 옮기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남을 수밖에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이 그림에 얼마나 담아낼 수 있는지는 열려 있는 문제다. 성을 옮기는 문제를 이로부터 가장 영향을 받는 지역 공동체가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런 일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다는 점도 문제다. 처음에는 농촌만의 문제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도시에서도 이곳저곳에서 비슷한 문제들이 속출하고 있다.
자유주의라는 그림에는 해방의 열망이 담겨 있었다. 이제 그림을 얼마나 더 덧칠해야 할지, 어쩌면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하는 건 아닌지를 질문할 때가 되었다. 그림은 어느덧 낡았고, 그림에서 분출되는 요구와 에너지를 더 이상 그림이 담아내지 못한다는 징후가 여기저기서 보이기 때문이다.